[고신] 남영환 목사님 장례 - 인물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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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 남영환 목사님 장례 - 인물소개


문화일보

광고

▲남영환
전 예수교장로회 총회장 별세,

남효극 한국파라마운트㈜대표이사·
효순 동양중교사·
효응 두알산업㈜회장·
효현 재캐나다사업
부친상,

임희옥 아이코리아연수원장
시부상

= 19일 11시55분 서울아산병원. 발인 21일 9시 02-3010-2230








남영환 목사님 소천

이정창 2008-08-19 17:25:52 27



경기노회 공로목사이며 증경 총회장이신 남영환 목사님게서 오늘(8/19) 오전 11시 55분에 소천하셨습니다.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안치되셨으며 내일 9시에 입관예배 드리고 모레 발인예정입니다.







故 남영환 목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다

글쓴이: 샬롬! 조회수 : 16 08.08.20 22:07 http://cafe.daum.net/choug/Uys/248

故 남영환 목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다

故 남영환 목사가 향년 94세를 일기로 천국을 향한 여행길에 올랐다. 故 남영환 목사는 1915년에 태어나 고려신학대학원 제2회(1948년)로 졸업하고 거창교회, 부산수정교회, 여수충무동교회, 장산교회를 거쳐 1977년 강남일교회를 개척설립하였다. 故 남영환 목사는 제33회(83.9.22 - 84.9.20) 고신총회장을 역임하였다.

故 남영환 목사는 일제 말 봉천 신학원에 재학 중 신사참배 거부로 학교에서 퇴학당한바 있었던 철저한 고신신앙인이었고 대한예수교 고신교단사를 집필 발간하기도 했다.

故 남영환 목사의 일화 중 아직도 잊지 못할 것은 거창교회에 시무할 때 주일성수 문제로 6개월 근신처분을 받은 일이었다. 당시 남목사는 부산서 구제품을 싣고 금요일에 떠났으나 차가 고장이 나서 마산에서 차를 바꾸는 바람에 짐을 다시 옮겨 싣고 토요일 새벽에 떠났는데도 토요일 밤 권병재(합천을 지나 묘산가는 고개)에서 밤을 새고 그 다음날 주일 1시 반에 거창에 도착했으니 주일을 범한 결과가 되었다. 그래서 남영환 목사가 경남노회에 조처를 자원했고 경남노회도 임시노회를 열어 6개월 근신을 하도록 했고, 구제품을 차에 실어 놓을 수가 없어 짐을 내리는데 협조한 집사 6명을 6개월 근신처분을 하였던 것이다. 남영환 목사에게는 부득이한 사건으로 인정되나 대예배를 중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들었던 것이다.

故 남영환 목사는 1986년 5월 3일 강남일교회를 정년 은퇴하면서 경기노회 공로목사로 추대되어 장수의 복을 누리다가 2008년 8월 19일 12시경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자녀로는 효극( 한국파라마운트㈜ 대표이사 ) 효순(동양중 교사 ) 효응(두알산업㈜ 회장) 효현(在캐나다 사업)이 있고 며느리 임희옥(아이코리아 연수원장)이 있고 손자로는 남건(SBS PD) 경(그랜드코리아레저 사원) 웅(P&G코리아 사원) 우혜(삼성전기 대리) 주혜(대우캐피탈 사원) 진혜(서울대병원 의사)가 있다.(자료 조선닷컴 사회 부고)

총회 임원회는 긴급히 의견을 모아 총회장으로 하기로 하고 서울 송파구에 있는 서울아산병원에서 21일(목) 오전 9시에 천국환송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장지는 남한산성으로 결정되었다 . (문의 (031-293-4276)

▲ 진해 신학강좌 시절의 남영환 목사 - 1946.8.10.
둘째줄 오른쪽 부터 이경석, 다음 이인재, 왼쪽 네번째 황철도 목사, 옆에 김차숙 사모,
첫줄 왼쪽 두번째 이경석 목사 사모, 오른쪽 네번째 박인순, 왼쪽 일곱번째 김복주이,
맨뒷줄 오른쪽 세번째부터 이장수, 남영환 목사, 왼쪽 첫째 김응도 목사)
1946년 6월 23일부터 8월 10일까지 만 6주동안 진해에 해군 훈련소로 사용되었던 건물에서 박윤선 목사를 강사로 신학강좌를 열었다










시아버님 남영환목사님의 소천 | 따뜻한 가정 2008.09.01 16:45 자유인


시아버님은 1915년 3월 25일 경북 영덕군 영해면 부곡리에서 출생하셨습니다.
어머님과 일찍 결혼을 하셨지만
조부님이 토지를 매도하고 보관하고 계시던 자금을 일부 변통하여
혼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공부를 시작하시어서

일제 말기에
일본 오사카에 있는 미국인이 설립한 관서학원대학 신학과에 입학을 하였지만
일본의 신사참배를 거부하시고 학교를 중퇴하신 후,
만주의 봉천에서 신학을 공부하시다가 해방이 된 후에 조국으로 귀국하시었고,
마침내 1948년 부산에 있는 고려신학대학교를 2회로 졸업하셨습니다.

1947년 경남 거창교회에서 기독교 교계의 거두이신 주남선 목사님을 모시고
전도사로 시작하여 1951년 목사로 안수를 받고,
주남선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에는
유지를 받들어 주 목사님을 이어서 1958년까지 봉직을 하시었으며,
1967년에 다시 재부임을 하시어서 1972년까지 봉직을 하시었습니다.

해방 후에 신사참배를 반대하시던 분들과 교단을 같이하시게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보수라고 일컬어지고 원칙주의를 고수하는
고신교단을 끝까지 지켜 오셨습니다.
이은화교수님의 아버님이신 이약신목사님을 모시고
목회를 하신 일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보수로서 고집스러움도 있었지만 유연하신 측면이 아주 많아서
교단내의 많은 문제들을 사랑으로 포용하시었던
실제로는 속마음이 아주 다정한 분이셨습니다.
제가 새댁이었을 때는
딸이 없던 아버님은 제 이름을 불러
곁에서 딸이냐고 물었던 분들도 많았습니다.

목회를 하시던 동안에 살림살이는 전부 어머님에게 의탁하시면서도
어머님 손가락에 금가락지 하나도 헌금함에 바쳐서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님은 가락지 하나를 끼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돌아가신 어머님이 암수술을 받은 해인 1977년,
제가 시집을 왔던 그해
회갑도 지난 63세에 서울로 상경하여
강남일 교회를 개척하는 결단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총회장과
서울고려신학교 교장을 역임하셨습니다.
1986년 교회를 은퇴하신 후에도
사역자가 없거나 어려움에 처한 교회를 지원하기 위해
홍콩과 브라질의 한인교회에서 약 5년간 봉사를 하셨습니다.

끊임없이 할 일을 만들어 가면서 조금도 앉아서 쉬지 못하던 분이었습니다.
아이들과 아침체조를 하실 때조차 진지하고 엄숙하게 지휘하시던 분이셨으며,
모시고 살 때 혹여 친구들이 집으로 찾아오면
정장에 넥타이까지 차려 입으시고 일단 예배부터 인도하셨습니다.
은퇴하신 후에 집필한 저서만 6권이 됩니다.

“한국교회진리운동사”, “한국교회와 교단”, “일제통치와 일본기독교”, “일제수난성도의 발자취”, “한국 기독교 교단사” “세계기독교회사” 등
노후에 집필한 저서들은 모두 새로운 이론을 주장하시기 보다는
당신이 겪었던 일들을 모두 생전에 정리해 두고자 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이중 두권은 제거 모시고 살 때 집필을 하셔서 교정을 도와드렸더니
책 서문에 제 이름을 남겨주셨습니다.

혹 새어머님과 언짢은 일이 생기면 현관에서
"학교에 가면 자연스럽게 집안사 이야기하며 울적했다고 먼저 말하거라.
머릿속이 복잡하면 강의하기 어렵다."고 위로해주셨습니다.
함께 살 때는 언제나 제 안색을 살피고
여성문제, 교육문제 등을 저와 토론하는 것을 즐겨하셨습니다.

이제 94세를 일기로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어머님을 먼저 보내신지 30년 만에,
당신이 마지막으로 개척하셨던 교회의 젊은 목사님께서 문병을 오셔서
함께 임종예배를 드린 지 5분 만에
아무런 고통도 없이 평안하게 운명을 하셨습니다.

친정 아버지를 67세에 보내드린지라
90이 넘은 시아버님때문에는 눈물이 나지 않으리라싶었는데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몇 달간 주말마다 찾아뵈면서 아픈 다리 때문에 꾀가 났었는데
이젠 주말이 허전할 것 같습니다.
남편은 저녁마다 울면서
아버님께서 제 얼굴을 보면 웃으셨지만(?)
자기를 바라보실 때는 섭섭한 눈빛이었다고 자책을 했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부모님 돌아가시면 그렇게 후회만 남는가 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 하시는도다. (중략)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편 23편)
라고 하는 구절은 저희 아버님이 가장 즐겨하시던 것이었고,
이번에 묘비에도 그렇게 새겨 드렸습니다.







"해와 같이 빛나리"

pp.207~209 등에서 비슷하지만 의미 있는 인물 소개 별도 참고
"야하다 철공장에 들어가 일을 한 기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