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김현봉 목사님(1884-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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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 이단, 신학 정치, 과학, 종교, 사회, 북한
교단 (합동, 고신, 개신, 기타) 교회사 (한국교회사, 세계교회사)
통일 (성경, 찬송가, 교단통일) 소식 (교계동정, 교계실상, 교계현실)

[인물] 김현봉 목사님(1884-1965)




평생 예수님의 청빈과 순결로 목회하신 분이다. 김현봉목사는 평양신학교를 나오고, 한 때 서울 아현동에서 기성교회 목회를 했으나, 교회 장로들 때문에 실패하고 교회를 사면하고 나와 마포구 아현동 굴레방다리 근처에 7명 교인과 함께 교회를 개척하였다. 닭장을 개조하여 집을 만들어 예배를 드렸으며 계속 가난한 자들과 함께 검소하게 살았다. 별세 할 때 1,000명의 교인이 있어도 그의 생활은 거지에 가까운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우리 나라 기독교 최초 선교사가 들어오던 1884년 경기도 여주군 가내면 건장리에서 김현봉은 태어났다. 형이 한 명, 누나가 한 명 있어 막내로 자랐는데, 아주 어릴 때 서울 서대문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나서 세 친구와 함께 동대문 감리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예배가 마친 후 목사께서 청년 현봉의 손을 잡으면서 ‘다음 주에 꼭 오십시오’라고 부탁하자, ‘예’하고 대답을 한 것이 예수 믿게 되고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출석하였다.

1910년 8월에 한일합방이 되자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은 생각으로 많은 날들을 고민하던 애국청년은 1912년 월남 이상재의 소개장을 받아 가지고 중국 서간도 땅으로 건너갔다. 교포 2세를 위해 한국학교를 세워 한국 역사를 가르쳤다. 다시 러시아 영 삼위로 옮겨 학교를 세우고 한국말과 한국역사를 가르쳤다.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되어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옥중 생활 중 뜨거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구체적인 구상을 하게 되었다.


1923년 출감해서 이듬해에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독립운동에 구체적으로 기여하기 위해 40세에 신학생이 된 김현봉은 열심히 공부하면서, 신학생 시절에 광명리 교회, 시흥군 서면 한이 교회, 구읍 교회, 군포장 교회, 안양 붙임말 교회, 수원 학현교회 등을 차례로 돌보게 되었다.

재학중 1927년 그의 나이 44세에 당시 세브란스 병원 간호원이었던 28세 처녀 박천선과 결혼했다. 드디어 1928년 제23회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공덕리 교회를 맡게 되었다. 경기노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후에 공덕교회를 사임하고, 1932년 3월 31일 아현동 37번지에 일곱 사람이 모여 아현 교회 개척예배를 드렸다.

교회의 터는 아현동 37번지는 공동묘지였으며 큰 소나무들이 꽉 들어 차 있었다고 한다. 1930년대 초에 일본의 경제개혁 실패로 농민들이 몰락하게 되자, 소작농민들은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아사상태에 빠져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못해 일본, 만주 등으로 흩어지고, 국내에 있던 농민들은 대도시로 몰려 생활의 터전을 마련해 보려고 했다. 이들 중 일부가 아현동으로 몰려들었다. 자연스럽게 이곳에 빈민촌이 형성되었는데, 김목사는 이곳에서 집 짓는 일을 도와주기로 하였다.


1925년 일제는 남산에 조선 신궁을 건설한 것을 시발로 해서, 1930년 들어서서부터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되었다. 이들의 압박에 못 이겨 1938년 제27차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되자, 큰 충격을 받고 김현봉 목사는 ‘자신과 교회를 어떻게 해야 바르게 살 수 있을까?’는 제목으로 기도하던 중 십자가의 신학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스스로 낮아지고 스스로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몸에는 철저하게 누더기를 걸치고, 궂은 음식을 먹고, 머리를 밀어버리고, 고무신을 신고 가장 낮은 자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을 하였다. 교회에는 간판, 종, 종탑, 십자가, 의자, 성가대, 악기, 장로가 없었다. 목사 자신이 검소한 옷을 입고 다니기에 교인들 역시 사치한 옷을 입는 사람이 없었다.


해방 후에도 계속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비가 오면 검은색 우산을 쓰고, 성경 찬송을 들고 ‘예수 믿으시오’ 하면서 길거리를 누비며 열심히 전도를 하였다. 200명 넘는 교인이 되자 부엌을 헐어내고 4칸 마루와 건너 방을 터서 예배실을 늘렸다. 6?25가 발발하자 김목사는 삼각산에 들어가 39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기도 중 회개기도가 터져 15가지 이상의 죄를 하나씩 고백하며 크게 은혜 받은 체험이 그의 목회생활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로 교회가 크게 부흥되기 시작을 하였고, 원고 설교에서 영감 설교로 바뀌어 설교 중에도 하나님의 영감이 계속 임했다고 한다. 전쟁 후에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이 너무 많이 생기게 되자 사회 복음화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 봉사와 구제 사업을 펼쳐 나간다.

70의 나이에도 상관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대로 토요일에는 쌀밥과 고기 국을 끓여 배고픈 이웃을 대접하였다. 그래서 아현교회에는 주일날 시내의 거지들이 다 모여들었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한 줄로 서게 하고 100원씩 주어서 보내기도 했다. 이때 교인수가 500명을 넘어섰다.

그는 기독교의 형식주의, 교권주의를 배격하는 동시에 교회건물을 크고 화려하게 짓는 일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교인이 늘어나면 자기가 손수 교회의 벽을 헐고, 예배당을 넓히면서 지붕도, 벽도 손수 쌓아 올렸다.

건물의 미관엔 관심이 없고, 창문을 많이 내어 다만 위생적으로 태양 광선이 잘 들고, 예배드리기에 불편하지만 않으면 되었다. 교회가 산비탈에 있었기에 늘 정과 망치를 들고 바윗덩이를 일일이 깨 가며 예배장소를 확장했고, 기둥이 많아 일명 ‘기둥 교회’, 초라하여 ‘누더기 교회’의 별명이 있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교인들을 보면 어느 피난민 수용소나 거지떼들이 흩어져 나오는 광경 같았다. 그러면서도 전 교인이 십일조를 드리게 하고 연보는 김목사 자신이 관리를 하는데, 그는 자녀가 없었기에 한푼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오직 전도와 구제하는데 쓰기에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모든 헌금은 진정한 영혼을 길러 주기 위해 수고하는 인근 교역자들과 신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사용되었다. 교단에 들어가지 않고 독립교회로 있었다. 목사의 사례금은 교회에서 정해지지 않고 목사의 생활을 위해서는 별도로 연보함을 만들이 교인들이 자유로이 넣도록 했다.

주일날은 오전 예배를 마치고 사모가 국수기계로 손수 만든 밀국수를 전 교인에게 대접했고, 잠시 쉬었다가 오후 2시에 저녁예배를 드렸다. 교인들이 세상을 떠나면 어린아이는 자전거 뒤에 싣고 장사하고, 어른은 리어카에 실어 벽제 화장터에 가서 화장했다. 결혼식은 교회에서 사경회 하는 도중 쉬는 시간에 신랑 신부가 평소 입던 옷 그대로 불러 앞자리에 세우고 “잘 살겠소?” 하고 묻고 기도해 주면 끝이다.


김목사는 자신이 길가에 나가 노방전도하고 교인을 늘려갔다. 다른 교회에서 불만이 있어 찾아오는 떠돌이 교인은 받지 않고, 김목사 친히 자기 손때를 묻혀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교회를 만들어가며 성장을 시켰다. 70세 넘어 81세 별세할 때까지 그의 목양 일은 계속 하였는데 교인수가 1200명까지 되었다.

예배는 두 시간이나 길게 드리는데도 교인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있다. 그 교회 남자 성도들은 김목사처럼 머리를 삭발하고 바지저고리 입는 이가 많았다. 김목사는 키가 작으며, 삭발하고 항상 검은 두루마기에 검은 고무신을 신고 다녔기에 그의 별명이 “중목사”라 했다.

그 교회의 여자들도 사치한 색깔의 옷은 입지 않고 한동안 머리에 파마도 못하게 했다. 모든 형식을 무시하고 김목사는 때때로 강대 위에서 파리채를 들고 파리를 잡아가면서 설교를 했다. 사경회에 다니다가 힘들 때는 강대상 위에 올라가 타고 앉아서 설교하기도 했다.

김목사는 후배를 기르는 일에 무척 애를 써서 그의 감화를 받고 김 목사를 따르던 목회자들과 청년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중에 이병규(신촌), 백영희(부산 서부교회), 안병모, 이한영, 안길옹(알래스카에서 개척교회) 등이 있다. 안길옹목사(2001년 현재, 85세)는 노인 아파트에 살지만 아파트 공터에 있는 곳에 창고 같은 건물을 지어두고 매일 새벽부터 정오까지 머물면서 기도하며 성경을 깊이 묵상하는 생활을 지금도 계속 하고 있다.

그의 아들인 안정남목사(나성 성약교회)도 김현봉 목사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에 대한 정보는 임형태 목사(콜로라도 스프링스한인장로교회)께서 제공해 주셨다.



김현봉목사의 사생활은 저녁 5시경이면 잠자리에 들고 밤 12시에 기상해서 고요히 단좌해 묵상에 잠기고 새벽 4시 통행 금지가 해제되면 연세대학교 뒷산에 작게 마련한 기도실 마당에 있는 나무에 기대어 묵상에 들어간다.

낮 12시까지 그런 모양으로 머문다. 오후에는 심방을 다녔는데 아현동 일대에 교인들 집을 하루에 70호를 심방하는 때도 있었다. 교인 집에는 일일이 들어가 앉아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문 밖에서 “별일 없소?” 묻고 지나가고 간혹 가난한 교인 집에는 부엌에 들어가 연탄불이라도 피웠나 해서 방바닥에 손을 대보는 것이 심방이었다.


1965년 3월 12일 오전 9시 50분 81세의 일기로 김현봉 목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별세하셨다. 장례식은 늘 따르던 이병규 목사(신촌 창광교회, 계약 신학교를 운영함)가 집례했고, 시신은 생전 김목사의 정신에 따라 리어카에 실어 끌고 갔다. 그 뒤를 1200성도들이 따라 갔으며, 시신은 화장을 했다.






■ 김현봉 목사의 설교 세계 - 송광택

1. 생애(약력)

김현봉 목사(1886-1965)는 서울에서 출생하였다(장로교 목사). 1906년(22세) 동대문 감리교회에 3인과 함께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1912년 양정의숙 법과 졸업 후 배화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한일합방 이후 줄곧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감시를 피해 월남 이상재 선생의 소개장 들고 중국으로 망명하여(1912-1923) 북간도와 러시아 영토를 두루 다니며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에 헌신하였다(중국어, 러시아어 능통).
1923년 귀국시 서을역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같은 해에 누님과 생질이 보증을 서 보석으로 풀려났고, 출옥한 그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39세).
평양신학교 재학 중(1923-1927) 평북 정주교회, 관악 보리말교회, 시흥 구읍교회 조사로 시무하였다.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졸업(23회)하고 1928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같은 해 6월 16일 세브란스 간호원 출신의 박천선(朴天善)양과 결혼하였다(사모님은 1924년 진명여학교 졸업, 1944년까지 간호사 일).
그후 경기노회 소속으로 경기도 시흥군에 있는 부림교회에 부임하였고, 경성노회로 이적하여 서울의 공덕교회에서 시무했다.
1932년 3월 30일 성수주일 문제로 공덕교회를 사임하였고, 1932년 4월 20일 7인과 더불어 서울의 아현정(阿峴町)교회(아현에배당)를 창립하고 목사로 취임한 후 38년간 계속 시무하였다.
1964년까지 전국 각처에서 사경회를 인도하였다.
특히 총회에서 신학교 문제로 분열되는 상황에 직면하여 독립교회를 표방하였다(1953년 고려파 38회 총회에서 제명됨). 1965년 3월 12일 자택에서 별세했다.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제3권, 313쪽; 자료-안길옹 목사 제공)

2. 목회 방침과 교훈의 특징

1) 찬양대, 학생회, 청년회 두지 않았다(교회 사업주의 반대)
2) 주일성수 강조
3) 자발적 연보 가르침
4) 친목회, 야외예배, 망년회, 찬양새벽송, 어머니주일, 약혼식 폐지
5) 국산품 애용 강조
6) 삼분설 주장
7) 천국은 다 평등이 아니다(천국에서는 큰 자와 작은 자가 있다)
8) 목회, 치리, 재정, 유년주일학교, 심방 전담.
9) 한복을 즐겨 입으심.
10) 밥을 먹으라고 했을 때 먹었다고 하면 두 번 다시 권하지 않았다.
11) 하루 7-8시간 기도하셨다(15일을 앉아 계신 적이 있다고 함)
12) 점심은 항상 국수를 하시고, 국수를 대접하셨다.
13) 하루 수면 시간은 3-5시간뿐이다.
14) 오전 시간은 기도, 성경공부, 오후는 심방과 전도와 교회 일을 하셨다.
15) 장례는 리어카로 운반(심지어는 관이 없어도 무방)

3. 메시지

1) 10대 특수 교훈

(1) 삼가하고 조심하라
(2) 양심을 똑바로 써라(양심과 말씀에 순종하는 정신을 가지라)
(3) 일심정력
(4) 구원을 이루라(성화구원)
(5) 명예 영광심을 버리라
(6) 나 하나 만들라
(7) 사치하지 말고 검소하게 생활하고 풍속습관을 버리라.
(8) 지식중심주의를 버리고 믿고 실행하라.
(9) 인본주의를 버리고 신본주의로 살라.
(10) 개교회주의

2) 그밖에 강조하시고 가르치신 말씀들

(1)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기도하고 성경보고 묵상하라
(2) 예수 믿는 것은 남을 위하여 믿는 것이다
(3) 교회 직원 많이 내지 말라
(4) 참되고 진실되고 정직하라. 옳고 착한 일을 하고,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고 용납하고 참고 견디고 덕을 길러라.
(5) 겉 사랑하지 말고 그 영혼에게 참 유익을 주는 참 사랑을 하라.
(6) 물질적 신앙적 자립정신을 길러라.
(7) 교회사업주의를 버리라.
(8) 결혼식 간소화
(9) 물질(돈, 전기, 의복, 음식, 건물)을 절약하고 남용치 말라.
(10) 자녀에게 어려서부터 믿는 도리를 가르치고 순종하는 법을 가르쳐라.
(11) 쉬운 것부터 믿고 실행해 나가라.
(12) 들어오는 대로 종횡으로 열을 맞추어 앞자리부터 앉아라.
(13) 마음을 모으고 정신을 가다듬고 고요한 장소를 찾아 기도하라.
(14) 이자놀이 하지 말고 계하지 말라.
(15) 강단을 꾸미지 말라(성경을 올려놓고 강도할 수 있으면 족하다).
(16) 예배시간을 엄수하고 약속을 지키라.
(17) 찬송가를 뜻을 생각하며 불러라.
(18) 혈기를 이겨라.
(19) 극장가지 마라.
(20) 우상의 제물, 피, 목 매여 죽은 짐승 먹지 말라.

3) 목사에 대한 교훈("택함 받은 일꾼의 자격과 신덕", 딤전 4:10-16)

택함 받은 일꾼은 열심과 힘을 드리며, 양을 자기의 뼈와 살과 같이 사랑하여 교인과 목자가 통하게되는 것이다.
참된 일꾼은 어머니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사랑이 쏟아져 나오고 피땀이 섞이어 나오는 것이다. 목자를 알아서 따라온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을 양들에게 보이어야 할 것이니 영혼의 키가 장성하는 것을 보이라는 말씀이다. 덕이 자라고 선의가 더욱 자라나는 것을 보이라는 말씀이다. 묵상, 성경 보는 일, 기도, 궁구하는 일을 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일, 잘 해야 한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면 먼저 자기가 은혜를 받는 것이며 연단하는 것이다.

전심전력을 강도에 기울여 해야 하는 것이다. 몇 시간 준비해서 하려고 하는 것은 품팔이 일꾼인 것이다. 교인이 온 것은 영의 양식을 먹으려고 왔는데 굶어간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연구가 부족하고 궁구가 부족하고 정도가 유치해도 일심정력을 기울여 공만 들이면 그 강도(講道)는 하나님이 가르치게 하는 것이다. 강단을 아무나 가르치게 양보해서는 안될 것이다. 한 번 이단을 가르쳐 놓으면 여독이 심하다.

일꾼이 되려면 먼저 믿고 말씀을 사랑하고 자기가 먼저 실행하고 자기를 만들어 정직하고 진실하고 사람이 되어 가르칠 때에,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아서 믿는 자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자기가 실행치 않고 입으로만 가르치니 마귀의 종이요, 자기가 되지 못하고 가르치니 못된 것 가르쳐 놓으니 결단날 일만 해놓는 것이다.

일꾼이 된 자는 피땀을 흘리지 아니하고는 못하며,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피땀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된다.
남을 불쌍히 여기고 실행하라고 하면서 자기는 얼마나 실행하는가? 앵무새와 같이 가르치고 지식으로만 배워서 가르치니 이런 사람으로 말미암아 도를 가리우는 것이다.

교인의 사정을 함부로 내놓으면 안 되는 것이다. 유익이 되지 않는 말은 내놓으면 안 되는 것이다. 어른이고 인도자인데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교회에 나오는 자를 모두 성자를 만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다 그렇게 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너무 다 잘 만들려다 낙심하기 쉬우니까 교인의 처지를 보아서 차차 잘 인도해야하며, 자라기를 바라고 길러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불완전하여도 쓰시는 것이다. 쓰되 길러가면서 쓰시는 것이다. 자기가 의로운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면 안될 것이며 회개하고 바로 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진저.
목자는 파수꾼이요 목자이니 나보다도 양을 위하여 바로 자기를 세워야 하는 것이다. 목자가 양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은 본능이며, 내가 희생하는 것이 교인을 살리는 것이며 즉 나를 살리는 것이다.
교역자는 교회 일을 볼 때에 사람을 의지하여 일하면 안되고 하나님과 손을 잡고 일을 해야 한다. 사람을 의지하니 하나님은 배척하고 사람이 교회를 세우려하니 되지 않는 것이다.
교역자는 남의 생명을 맡은 자이니, 육신의 오락을 취하지 말고 희생해야 한다.

자기가 연구해서 가르치는 것이 은혜가 되고 힘이 된다.
강도를 할 때 은혜를 받아 신자가 좋아한다. 그러면 자기가 잘 한 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일시적 감동인가, 행위가 변화하는가 보라.

4) 장로에 대한 교훈

장로가 교회를 지어서, 쥐고 펴고 하는 것이면 이는 장로가 할 일이 아니다. 장로가 교회의 주인도 아니며 목사도 주인이 아니요, 주인은 그리스도인 것이다. 금일 장로는 주인이요 목사는 품팔이꾼이 되는 것이다. 목사가 만일 장로를 책망하면 받지 않고, 목사를 쫓아내는 것이다.
장로는 목사의 조력자이다. 현재 장로는 권세를 부리고 교회주인 노릇하여 일꾼 내쫓고 하는 것은 저주받을 일이다. 장로가 장로일을 못하면 장로가 교회의 분쟁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5) 전도부인(전도인)에 대한 교훈

이북에서는 권사, 이남에서는 전도사라는 명칭을 교회에서 결정하였다. 현재 전도 일 안 하는 자를 성직 명칭으로 부르지 말라.
가난한 집에는 더욱 자주 가야하며 돕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다니되 입이 무거워야 하며 필요 없는 말은 아니해야 한다.
흠점이 보이거든 자기가 권면하여 들을 만 하면 하되 못할 것 같으면 목사에게 말해야 한다.
목사의 흠집을 교인에게 말하면 안 된다.
목사의 잘못이 있으면 직접 와서 목사의 잘못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자기 마음에 맞지 않거든 자기가 거기 있지 말고 다른 데로 가는 것이 낳으며, 목사를 추방하는 것이 성공했다 할지라도 후에는 벌받고 자기도 쫓겨나게 될 것이다.
충실히 일하지 않으면, 섭하지만 보내야 한다. 정이나 체면을 못 이겨서 두어두면 그 사람 망하고 교회 망하는 것이다.
전도인은 목사의 신앙 사상과 같아야 되는 것이다. 사상이 같지 않으면 진리의 혼란을 갖게 될 것이니 안될 일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그 밑에서 전도일을 할 마음이 있으면 신앙적 사상과 은혜를 받고 마음으로 주안에서 심복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6) 신자에 대한 교훈

부모는 육신을 기른 자이나 일꾼은 나의 심령을 기르는 자인 줄 알고 영혼의 선생인 줄 알고 고맙고 감사함으로 배워야 한다.
실행하기 위해 배워라, 말씀을 지식으로만 배우게 되면 양심의 자유를 못 누리니, 듣고 실행해야 한다.
예수 믿는 데 폐물된 사람, 아무데 가나 사람 노릇 못한다. 이 좋은 교훈 배우지 못하는데 어디 가서 사람 노릇 하는 것 배우겠는가?
사람 노릇하려면 용서하고 참고 견디고 용납하는 마음을 길러야 한다. 이런 마음이 없으면 교회 일 잘 할 수 없는 것이다.
책망과 옳은 말을 해주면, "고맙습니다. 이것을 가르쳐주지 아니했으면 캄캄한 데 행할 뻔하였는데 가르쳐주시니 참 감사합니다"할 것이다.
옳은 것을 사모하는 마음, 양심 쓰는 마음, 이것 먼저 만들라. 먼저 마음을 돌이키고 자기 만들어 나가는데 힘써라.
자기가 타인에게 좀 났다는 칭찬을 받는 자, 정신 차려야 한다. 잘못 하면 자기의 의(義) 그것만 의지하니 넘어질까 조심해야 할 것이다.
바른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망하고 말 것이다.
음식을 먹되, 덕을 세우기 위해 먹고 유익하려고 먹는데 해되게 먹으면 안된다. 먹을 때에는 절제가 있어야 한다. 식물에 대한 절제, 이것도 선한 싸움이다.
기술과 지식만 배워 가지고는 안된다. 인격이 없으면 그것은 악하기 때문에 자기를 망치는 것이다.




■ 김현봉 목사님 - 좁은 길로 간 사람들 중에서

엄두석 엮음

- 목차 -

* 서론
* 주변 이야기들
* 그의 교훈들
* 성생활에 관하여
* 그의 주장들
* 그의 생활에 관하여
* 결혼에 관하여
* 장례에 관하여
* 물질에 관하여
* 예배에 관하여
* 여전도사와 심방
* 그의 책망과 사랑
* 그의 일과에 관하여
* 마지막 사경회
* 그의 죽음과 후배들
* 제 2의 김현봉 목사들


김현봉 목사하면, 얼른 머리에 연상되는 것은 강단에서 파리채 들고 설교하면서 파리잡는 목사를 생각케 된다.
그만치 그는 모든 면에 있어 기인이었다. 작은 키에 땅땅한 몸에, 언제나 검정 무명 두루마기에 고무신 신고 다니고, 머리는 중처럼 빡빡 삭발하고 다녀 별명이 "중목사"였다.
한국교회 인물사에 있어 그런 신기한 인물도 전무후무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화와 영향력을 끼쳤다.
내가 김현봉 목사를 본 인상에서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의 나이 80고령에 그로서는 마지막 집회였을 서울 관악산 벧엘기도원에서 여름 집회를 열었을 때의 일이다.
좁은 장소에 자기 교회 교인들이 빈틈없이 꽉 차고, 그를 따라 다니는 목사들도 많았고, 자리가 좁아서 일부는 문을 열어 놓고 마당에까지 앉아서 설교를 듣는다. 언제나 두 시간 세 시간씩 끄는 그의 긴 설교를 지리한 줄 모르고 듣고 있었다.
모인 군중의 모습은 나쁜 말로 거지떼들 모양이었다. 남자들은 대부분 머리를 삭발했고 여자들은 파마 머리를 한 이라곤 한 사람도 없고, 검정 무명 치마 저고리에 보따리 안고 있는 모양이 어느 피난민 수용소 같았다.
그때 김목사는 긴 시간 서서 설교하다가 지쳤든지 강대상 성탑 위에 올라가 앉아서 강의를 하였다. 그런 광경은 생전 처음보는 터이라 모두 의아한 느낌에 젖었는데, 이를 보다 못해 이병구 목사가 큰 소리로 "김 목사님! 그렇게 하시면 교인들이 시험 받습니다." 하고 소리질렀다.
당차고 뱃장이 두둑한 김 목사가 그랬다고 순순히 내려 올리가 없었다. 도리어 자기 편에서 기분이 좀 언짢은 눈치였다. 성탑을 가리키면서, "이것이 제단이오? 제단이라면 나는 내려가겠오. 이것은 설교하는데 편리하기 위하여 만든 책상에 지나지 않소. 나처럼 나이 늙은 사람이 설교하다 지쳐 잠깐 이 위에 올라앉아 설교했다기로 시험될 것이 뭐요?"
그 기세에 눌려 사람들은 다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했다.
필자는 김현봉 목사를 따라 다닌 사람은 아니지만, 내 목회생활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그 어른의 생각이 났고, 그 모습이 떠올랐다.
그 분의 목회방법을 본받아 보려고 경솔하게 덤비다가 실패도 했다. 그 어른은 필자가 사숙한 필자의 위대한 스승이다.
김현봉 목사가 가장 많이 강조한 교훈은 "자기를 만들어 가라."는 것이다. "자기를 만들어야 남을 지도해 낸다."고 거듭 가르쳤다.
그는 목사라기보다 하나의 도인이었다. 김 목사의 목회와 설교 방법은 마치 어린애 기르는 어머니가 굳은 음식물을 자기 입에 넣어 충분히 씹은 후에 아기 입에 넣어주듯 하였다.
그의 설교는 처음엔 무슨 목적으로 저런 이야기를 하나 의심나기까지 여러 가지 이야기를 좁혀 가다가 마지막에 "노다지" 같은 정신을 교인들 귀에 쑥 넣어 주었다. 그래서 그를 따라 다니는 젊은 목사들끼리 주고 받은 은어는 "오늘 노다지가 있었나?"하는 것이었다.
누가 찾아와서 젊은 제자나 교인들 중에 누구의 비행을 이야기하면, 침통한 표정으로 "아깝지! 되다 말았지!"했다. 김 목사는 이 소리를 참 많이 했다. 안길옹 목사가 미국 가려고 여권까지 다 얻어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역시 "아깝지, 되다 말았지!"하더라 한다.



1. 주변 이야기들

김현봉 목사는 23세 때 기독교를 믿기 시작하여 한동안 러시아령 해삼위에 가서 살다가 귀국하여 평양신학교에 신학도로 입학했다. 그 때는 일제시대였다.
학창시절에는 키도 작고 말도 잘 할 줄 모르고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 분이었다. 총각이었기 때문에 여학생들 중에서 인기가 있음직도 했지만, 워낙 못난 분이기 때문에 여학생들도 김현봉이라면 "픽!" 외면해 버렸다.
졸업 후 경기도 과천 부림교회를 맡아 농촌교회 일을 보는데 교인들이 농번기에 일하다가 예배시간 늦게 교회에 찾아오면 "예배 다 봤어"하고 예배도 안 보고 가버렸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농촌 교인들이 병들면 세브란스 병원에 데리고 가서 무료 치료해 달라고 떼거지를 썼다. 그 맛에 교인들이 따랐다.
그 후 서울 공덕동에 와서 교회 일을 보다가 장로들 등살 때문에 목회 실패하고, 염리동 굴레방다리 근처 고개에 자기 손수 처음 교회를 개척할 때에 닭장을 헐어 예배 처소로 만들고 소금장사 해 가면서 교회일을 보았다.
처음 모인 교인수는 자기 가족까지 합쳐서 8명이었다. 교인이 없어서 김 목사는 한길에 나서서 길가는 사람들을 쫓아가 옷소매를 잡아 끌면서 "한번 들어와보시오."하고 사정사정했다고 한다.
그때 끌려들어간 고등학생 중에 지금 목사가 된 이도 있다.
예배처소의 벽은 미군 잡지를 뜯어 손수 발랐는데, 잡지 그림에는 서양 여자들 나체화가 많아서 예배당 벽에 나체미인들 사진이 여기저기 붙어 장관이었다. 교회 같지도 않았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어떤 외국인 선교사가 지나다니다 보니 너무 비참해 보여 좀 도와 주겠노라고 하니 김목사는 딱 거절하며, "아니요, 우리는 두움 받을 필요없어"해서 쫓아보냈다. 독립정신이 강한 분이다.
나이 40세가 되어서 세브란스 병원 간호원으로(간호과장?) 시집 못 가고 있던 올드미스와 결혼했으나 자녀를 낳지는 못했다.
김현봉 목사의 정신은 기독교의 형식주의, 교권주의를 배격하는 동시에, 교회건물을 크게 화려하게 짓는 일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겼다. 교인이 늘어가면 자기 손수 교회 벽을 헐고 교회를 넓히고 지붕도 벽도 손수 쌓아올렸다.
건물의 미관엔 관심이 없었고, 창문을 많이 내어 다만 위생적으로 태양광선이 잘 들고, 예배에 편리하기만 하면 됐다. 건물을 크게 하든가 장식은 하지 않았다. 장소가 산비탈이었기 때문에 바닥의 바위를 정과 망치를 들고 일일이 깨가며 언제 가 보아도 김 목사는 늘 일하고 있었다.
교회 안에 다락을 매는 것도 손수 기둥을 받치고 마루를 깔아 그 교회는 기둥이 많고 볼품이 없어 별명이 "기둥교회" "누더기 교회"였다. 얼마나 기둥이 많은지 어두운데선 이마를 자주 찧게 마련이었다.
교인 하나 하나를 자기 손때를 묻혀 자기 정신 넣어 훈련시키고 길러갔는데, 그것은 세속 속의 수도원 같은 교회였다.
주일날이면 예배 드리고 흩어져 나오는 교인들을 보면 어느 피난민 수용소나 거지떼들이 흩어져 나오는 광경 같았고, 서울 복판에 이런 교회가 있을 수 있는가 의심할 정도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교회 이름은 "아현교회"라 했지만, 그 교회는 없는 것이 너무도 많았다. 교회 간판도 없고, 종도 종탑도 없고, 십자가도 없고 의자도 강대상도 없고, 성가대란 것도 없고, 장로도 없었다. (교회에 조직을 두지 않다가 한 번은 장로 1인을 세웠더니, 얼마 후 교인 12명을 이끌고 나가버렸다. 다시는 장로를 세우지 않았다.)
사치한 옷 입은 교인도 없었기 때문에 교회를 개척하여 5백명 교인이 되기까지 24년이 걸렸고, 그 후 교인이 날로 증가하여 10년 후에는 1200명이나 됐다.
처음엔 존재가 없던 김현봉이었지만, 이렇게 교회가 성장하고, 또 그렇게 잘 훈련된 교회가 되고보니 당시에는 전국에서 영락교회 다음으로 김 목사의 아현교회만한 교회는 없었다.
이로써 김현봉 목사는 교계의 관심을 모으게 되고 그를 배우려고 따르는 목사들도 많아졌다. 이렇게 교회 부흥 4년만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김현봉 목사는 자기 목회의 땀과 노력을 회고하면서 후배에게 교훈하기를 "목회자는 장기전으로 교회를 만들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2. 그의 교훈들

"믿음 쓸 줄 알고 양심 쓸 줄 알라" "자기를 만들어 가라" "일심정력(一心精力)을 다하라"
이것은 김현봉 목사가 끊임없이 제자들을 가르친 그의 교훈이었다.
양심은 예수 믿는 밑천이다. 하나님께 대해서나 사람에게 대해서나 물질 처리하는 일에 있어서나 양심을 바로 써야 한다. 잠시도 방심말고 일심정력을 다해 믿는 일을 할 것이다.
성직자는 위대한 사상가이어야 하는 동시에 철저한 도덕가이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도는 마음의 도이다. 그런고로 깨끗한 마음 성심을 주님께 바치는 그만큼 그가 하는 일은 되어가는 것이다.
김현봉 목사만큼 양심행활을 강조한 이는 드물 것이다. "신앙도 본 밑천이 없이는 아무나 못 믿는다. 본 밑천은 양심이다."
"양심에 순종하면 하나님께 순종함이요, 양심에 거슬리면 하나님 거스름이 된다. 하나님은 내 영혼을 통해 일하시는데, 그 작용을 온전히 맡아 일하는 것이 양심이다.
하나님은 직접 이래라 저래라 하시지 않고, 인간 영혼에게 그 뜻을 알게 하시고 영혼이 양심을 순종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순종함이 된다. 힘 쓸수록, 양심을 쓸수록 예수님이 점점 가까워진다."
"하나님의 일꾼은 의인이라야 한다. 의인이라야 교역자 되는 것이다. 원 신자는 의인이라야 한다. 불의인이 무슨 신자냐. 성경만 잘 가르치는 것이 의인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만 가르치고 있는 악독한 사람이다."
"의인도 죄를 짓는다마는, 악인은 죄 짓고 애통하지 않지만, 의인은 애통한다. 죄를 깨달아 갈수록 이왕에 자기를 의롭고 착한 줄 여겼던 일들이 애통스러워진다."
"목사는 교인들에게 못할 일을 시키는 것이다. 이왕에도 예수는 믿어왔으나 회개를 모르고 예수를 믿어 온 자들이 많다. 회개하고라야 예수 믿는 것이다."
"일심정력을 드려야 예수를 바로 믿는 것이다. 구원 얻으려면 일심정력해야 한다. 믿음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자꾸 일하는 것이다.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 침노라는 말은 생명 내 놓고 달려드는 일이다. 예수 믿고 천당간다는 그것만 알고 있으니 탈이다. 예수 믿고 할 일은 없으니 세상 일만 하고 있다. 바울이 "믿음을 지켰다"(딤후 4:7)고 고백한 말은 "집 지키듯" 우두커니 믿음 지킨 것이 아니다. 믿음이 하자고 하는대로 해 갔다는 말이다."
"옛날에는 우리 나라에도 좋은 신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지금은 참 한심할 뿐이다. 오늘날 이런 꼴의 사람들도 기독교인인가? 어떤 교회든지 전부터 뿌리박고 내려오는 신자들이 있는데서는 여간해서는 좋은 신자를 만들어내기 불가능하다."


3. 성생활에 관하여

김현봉 목사는 성직자들은 남녀의 성생활을 초월하는 일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아무리 부부라도 별거하여 살며, 육신도 깨끗이 사는 것이 신앙생활에 좋다고 가르쳤다.
김목사 자신은 가정에서 동거생활 10년 하고는 중단해 버렸다. 어떤 목사가 이북에 부인을 두고 혼자 내려와 고민하면서 김목사에게 외로운 심정 이야기를 하니 고민하는 그를 책망하면서, "아니, 부인을 일부러 떼내기도 해야 할 판인데 그것 때문에 시험받는단 소리가 무슨 소리야!" 하면서 사람을 의뢰하고 처자를 그리워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책망했다.
그를 따르던 젊은 목사들 중에서 부부생활을 여러해 중단한 이들도 있었고, 여자들도 독신으로 산 이들이 많았다. 성직자만 아니라 평신도라도 성생활은 참을 수 있는데까지 참아 끊으라고 권했다.
김목사는 약혼식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는데, 어느 신학생이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려고 어느 처녀를 선 보고는 한달 뒤에 결혼하기로 하고 그 사이 참지 못하여 두어번 만난 일이 있었는데, 그 소식이 김목사 귀에 들아가자 당장 불러다 앞에 앉혀 놓고 "두번 만났다지!"하고 책망하면서 "이제는 다시 만나지 마시오!" 엄명했다.
아담부부가 무화과 잎을 엮어 하체를 가리운 것은 그들이 선악과 따먹고 죄지은 뒤의 일이다. 에덴 동산에서는 남녀 벌거벗고 살아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창 2:25). 성 프란치스코는 어느 제자와 함께 벌거벗고 알몸으로 사람들 앞에서 가장 유명한 설교를 한 적이 있었다.
김현봉 목사도 어느 눈 오는 날 밖에서 소변을 보고 있는데, 제자가 곁에서 무슨 말을 물어보는데도 보던 일을 중단하지도 않고 부끄럽다는 생각도 없이 제자 있는 쪽을 향하여 태연히 서서 용무를 끝까지 마쳤다. 천진난만한 어린애처럼.


4. 그의 주장들

김현봉 목사가 일생동안 주장한 것은 "자기를 만드는 일"(自己完成)이었다. 그는 만나는 제자들에게마다 이것을 강조했다.
어떤 청년이 25세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일 보려할 때, 김 목사는 "좀 더 자기를 기르고 교역에 나서라."고 권했다.
김목사 자신도 자기와의 투쟁에 전력을 다했다. 밤낮 "일심정력(一心情力)"을 강조하면서도 자기는 그것을 잘 못한다고 늘 스스로 탄식했다. 그것을 실천코자 매일 10시간 애썼다.
"급한 것은 자기를 만드는 일이다. 누구든지 자기가 된 만큼 밖에 남을 만들지 못하는 법이니 요는 나 하나 만드는 일이 급선무이다."
"바울 한 사람이 10만 목사보다 낫다. 하나님은 한 사람 일꾼을 바로 기르시기 위해 애쓰시는 하나님이시다. 교회보다 일꾼이 더 크다. 교회를 바로 세우려면 일꾼을 바로 세워야 하고, 그러한 일꾼을 바로 길러내기 위해 하나님은 수십년 두고 애쓰신다."
"현대교회는 교인들이 얼마나 양심쓰느냐, 얼마나 믿음 자리에 서 있느냐, 얼마나 진리의 사람이 되서 사느냐에 관심두는 것보다 숫자만 높이려 한다." 이런 폐단 속에서 김 목사는 물질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자립정신을 길러주려고 자기 따르는 젊은 청년들을 약간의 밑천을 대어주어 소금장사도 시키고 목수 일도 배우게 하고 리어커도 끌게 했다.
김 목사 자신이 절대 남의 신세를 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육체의 몸도 일생동안 연단시켜 건강을 만들어갔다.
매일 냉수마찰을 하고, 동그란 돌을 가지고 매번 자기 몸 피부를 마찰하면서 때를 벗겨 처음엔 거칠던 돌면이 나중엔 반질반질하게 매끈해질 정도였다.
늘 몸을 깨끗이 씻고 목욕할 때면 자기 잔등의 때도 남의 신세 안지고 자기 손으로 닦았는데, 김목사는 자꾸 연습해서 오른손 팔꿉을 굽혀 어깨로부터 잔등에 대고 왼손을 왼편 겨드랑 밑으로 굽혀 잔등에 대면 손끝이 서로 맞닿았다.
그의 피부는 젊은이 몸같이 단단했다. 새벽마다 아현동 자기 집에서 연세대학교 뒷산 기도실까지 10리나 되는 산길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녔다.
81세에 세상을 떠났지만, 자기 자신은 백 이삼십 년은 거뜬히 살 줄 짐작했다. 머리도 삭발이지만 이발소에 안 가고 혼자 깎았다.
가끔 집회를 인도하러 가서 마중나온 교인들이 김목사가 어깨에 메고 있는 보따리를 받아 메려면 냉정하게 "필요없어!"하고, 자기가 그냥 메고 갔다. 그 분의 정신 속에는 자립정신이 꽉 차 있었다.
그를 따르는 이들이 김목사의 생활을 세밀한 부분까지 연구하며 본받으려고 애쓴 것은, 자기네 사는 생활과 일일히 다르니 배우지 않을 수 없었다.
보수파의 박모 박사와 손잡고 한 동안 개혁신학교를 하려하다가 교리적으로 중생문제 등에 서로 의견이 대립되니 갈라졌다. 진리가 같지 않고 바르지 않으니 함께 할 수 없다는 고집이었다.
그러니 일생동안 교회도 어느 교파에 소속하지 않고 철저한 독립교회였다. 그의 껍데기로부터 내장과 오장육부에는 "얼"로 꽉차 있었다.


5. 그의 생활에 관하여

김현봉 목사의 검소한 생활은 유명하다.
교인이 천명이나 모이는 큰 교회요, 또 거의 모든 교인들이 십일조 생활을 하여 교회재정이 풍부하고 목사의 이름으로 염리동 일대에 수십동의 집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그는 철저히 검소하게 살았고, 또 남들에게 검소한 정신을 강조했다.
그 자신이 일생동안 검정 무명 두루마기에 고무신 신고 머리는 삭발하고 다녔기 때문에 염리동 일대에서는 별명이 "중목사"였는데, 그래도 그 별난 중목사에게서 사람들은 예수를 느꼈다.
그가 거느린 야현교회 교인들은 목사를 닮아 남자들은 바지 저고리에 삭발한 이가 많았고, 여자들은 화려한 색깔이나 좋은 옷은 못 입고, 검정 치마 저고리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머리는 파머를 못하고 옛날 누구집 식모머리처럼 머리끝을 땋아 얹었다.
"사치는 음란에서 나온다." 그는 늘 그렇게 가르쳤다.
김현봉 목사의 식사는 메모가 미리 짜 있어서, 월, 화, 수요일마다 딴 메뉴로 했다. 어느 날 안목사가 찾아갔더니 "오늘 우리는 모밀국수 먹는 날입니다. 밀국수 잡수소? 못 잡수시면 밥 해 드리겠오. 돈 없어서가 아니오."했다.
그의 정식 밥상에는 밥 한 그릇(그는 팥밥을 즐겼다)에 무우 배추 김치 하나, 반찬이 세 가지 이상 놓여진 예가 드물었다. 많아서 세가지 밥, 국, 반찬. 그는 채식위주인데 홍당무우가 몸에 좋다해서 늘 생 것을 먹는 일이 많았다. 시금치, 사과도 잘 먹었다.
그런 식사를 하고 어떻게 건강유지를 해 가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는 단 것을 좋아해서 사탕을 많이 먹었다.
어디로 사경회 인도하러 가서도 사례금을 받는 일이 없고, 집회를 인도한 교회에서 선물을 드리면 은혜 못 받아서 그런 짓을 한다고 나무라고, 사경회 강사라 해서 음식상을 지나치게 잘 차린 것을 보면 책망하면서 은혜 못 받아서 그런다고 하였다.
한번은 부산 어느 교회 집회를 인도하러 가서는 식사 때 음식상을 차려 나왔는데, 주방에서 강사 음식준비 맡은 이가 하나님께 머리는 쓰지 않고 음식 차리는데만 머리를 쓰면서 음식상에다가 "김현봉 목사 음식"이라고 써 놓은 것을 보고는 "이거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뇨!"하고 호통을 쳤다.
그는 직업적 부흥사들을 비난하면서, 부흥회하게 되면 개를 잡아놓고 개장국 먹으면서 집회한다고 비난했다. 누구 집에 가서도 꽃무늬를 수놓은 방석을 내놓으면 "이것도 사치정신이 들었군!"했다.
그가 목회하는 아현교회 어느 집사 며느리가 머리를 파머했기 때문에 그 집사는 고민하여 김 목사 정신은 교인들이 사치하지 못하게 하고 파머 머리를 금했는데, 자기는 교회 집사면서 며느리 하나 단속 못하면서 어떻게 집사노릇하느냐고 목사님께 사표를 냈더니 김목사는 두말없이 사표를 수리해버렸다.
김 목사는 그후부터는 시무집사 아닌 그를 다시는 집사라 부르지 못하게 했다. 집사에서 떨어진 자를 계속 집사라 부르는 것은 그 목사가 진실이 아닌 증거요, 그 해당자를 겸손하게 가르치지 못하는 일이 된다. 이런 것이 인본주의라고 교훈했다.


6. 결혼에 관하여

결혼하는 청년에게는 새 양복을 입지 못하게 하고 보통 입던 평상복을 입고 식을 올리도록 하든지, 아니면 광목 바지 저고리에 두루마기 차림으로 하게 했고, 약혼식은 폐지시켰다.
김목사 정신을 따라서 처녀 총각이 처음 선 볼 때 서로 물어보는 것은, "거듭났습니까?"였다고 한다.
결혼식 때는 청첩장도 조촐히 몇사람이 모인 중에서 신부측 담임목사께 알려 남자 손님 단 2명만 오게 하고 도합 20명도 못되게 모이게 하고는 김목사는 기도실에서 기도하다가 나와서 결혼하는 남녀를 앞에 앉혀놓고 위해 기도해주고는 "잘 살아라."는 한 마디로 끝냈다.
너울이고 드레스고 그런건 절대 못쓴다. 다만, 신부에게 옷 두 벌만 허락했다. 결혼 시간은 정각에 시작하고 5분 전에 도착하여 간단히 끝낸다. 결혼식 마치고 집에 가기까지 전체 30분 이내였다.
한번은 당신 본 교회에서 사경회를 하다가 중간에 쉬는 시간인데, 오후 1시경이었다. 어느 제자 목사가 보니 김현봉 목사가 강대 곁에 앉아 있는데 그의 앞에 젊은 남녀가 가지런히 앉아 있었다. 김목사가 그 남녀보고 뭣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결혼식을 하는 중이었다.
사경회 도중에 그 자리에서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처녀는 어느 목사의 여동생인데, 국민학교 교사였다. 신랑 신부 옷차림은 보통 때 입는 옷 그대로다. 드레스고 너울이고는 어디라고 감히 입고 나올 것인가.
"신랑 신부가 있으면 결혼식하는 것이지 돈 있어야 하나?" 김목사는 그렇게 주장했다. 극히 간단한 식을 마치고 나서는 신랑 신부보고 "가시오. 가서 믿음 잘 지키시오!" 했다. 신혼 여행이고, 택시 드라이브고 어림도 없다. 김현봉 목사 식으로만 살면 사람 사는데 돈 몇푼 안든다.
또 한번의 결혼식 때는 신부가 지방에서 올라와 김목사 주례를 받게 됐다. 그런데 오후 3시 반으로 정했는데 기차가 연착하여 신부가 늦게야 도착했다. 김현봉 목사 사행활의 일과는 오후 5시면 취침하는 습관인데, 김목사는 신부를 기다리다가 5시가 되자, 자기 침실에 들어가 취침을 시작했다.
그 후에 신부가 오니 할 수 없이 사모님을 통해 잠자리에 든 김목사께 연락하여 양해를 구하니 김목사는 할 수 없이 일어나 자기 침실에 그냥 앉은채로 이불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신랑 신부를 그 방에 들어오라 명해서 곁에 몇 사람 더 들어와 앉게 하고 기도해주며 "믿음 잘 지키시오." 권면하고는 끝났다.
서울 은광학교에서 누가 결혼식을 하던 날, 그 교회 목사가 따라와 곁에 있었더니, 김현봉 목사는 그 보고 "목사님은 뭐 하려고 왔습니까?"해서 그 목사는 무안해 못 견디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7. 장례에 관하여

신자가 세상 떠났을 때 장례하는 방법 : 운명하고 24시간 지난 뒤에 시신을 놓고 예배드리고 나서는 김목사가 손수 시신에 수의를 입혔다. 수의는 돈을 드려 새로 할 것 없이 세상 떠난이가 평소 즐겨 입던 옷 중에서나, 혹은 수의나, 옷을 갈아 입히지 않고 그대로도 무방했다.
비싼 관을 쓸 것 없이 송판만(칠성판) 하나 깔고 김목사가 손수 묶었고, 처음엔 교인집 어린애가 죽으면 시신을 김목사가 친히 지고 가서 염리동 산에 묻었다.
후에는 리어카를 크게 개조해서 거기다 손수 실어 김목사 자기가 친히 상여 리어카를 끌고 장지로 갔다.
아현동에서 서대문 지나 화장터까지 15리나 되는 길을 끌고 갔다. 남들이 도저히 본받기 어려운 분이었다. 후에는 김현봉 목사가 바빠서 김조사나 다른 이들이 리어카 끄는 일을 대신하기도 했다.
젊은 교역자들에게 가르치기를, 교회가 커져서 장례가 자주 있고 교역자가 바쁠 때는 그런 일에 교역자가 너무 시간 빼앗기지 말고, 자기는 한 번 가서 예배를 드리고, 그 다음엔 다른 사람을 보내서 장례식 하게 해도 좋으나, 그 유가족들이 그렇게 하면 시험받을 염려있는 사람들이면, 목사는 시간 뺐긴다는 생각만 말고 가서 친히 예배 인도해주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김현봉 목사는 매장보다 화장이 좋다고 대개 화장을 시켰다. 임종할 때 곁에서 찬송가를 많이 부르게 하고 입관할 때는 김목사가 직접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처음엔 김목사가 직접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처음엔 김목사가 시작하고 "마지막으로 자손들이 하라." 시키고 목사는 곁에서 감독했다.
출상할 때와 매장할 때는 예배를 드렸으나, 화장할 때는 대체로 기도만 했다.
주로 화장을 많이 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 교회에 안 나오는 집사도 있었다. 화장을 반대하는 친척들은 그 유가족과 단교하는 일까지 있었다.
시신에 대한 위생처리는 철저하고 면밀하게 하여 시신의 입, 코 등 구멍을 솜으로 막고, 시신의 팔 다리를 주물러 팔도 앞으로 모아 맞잡게 하고, 비닐을 깔고 시신을 똑바로 편안히 누이고, 향은 두 대 이상은 피우지 못하게 하고, 조문객들이 와서 시신에 절하지 못하게 옆에 써 붙이고는 곁에 사람을 세워 "교회식으로 합니다."고 문상오는 사람에게마다 말하게 했다.
망인의 사진을 놓지 못하게 했다. 세상 떠난 사람을 위하여 비용을 많이 드리는 일은 남에게 칭찬 듣고자 하는 산 사람들의 허영심으로 보았다.
장의사는 쓰지 못하게 하고, 그 비용을 교회에 연보하게 하고, 상가집의 밤새는 것은 남전도회에서 두 차례로 나눠 초저녁과 새벽을 담당케 했다. 상가집의 봉사는 여전도회에서 맡아 하게 했다.
김현봉 목사 자신이 세상 떠났을 때는, 장례식 방법에 대하여 제자들 중에 의견 대립이 생겼다. 김목사의 시신을 관을 사다 입관하게 되니 일부 제자들 주장은 관에 넣는 것은 김현봉 목사 평소의 정신에 위반되는 일이라고 불평했다.
그만치 그를 따르는 교인들은 김현봉 목사 말이라면 철칙으로 여겼다. 김목사 시신도 리어카에 모시고 위에 포장을 쳐서 화장터로 끌고 가서 화장하고 말았다. 1200명의 대 교회의 목사였지만...


8. 물질에 관하여

돈 문제에 대하여 어떤 이는 "돈을 보기를 돌멩이 보듯 하라." 가르친 이도 있고, 성 프란치스코는 어떤 기부도 거절하니 누가 돈주머니를 억지로 그의 수도원 창문 안으로 던져 넣은 일이 있었는데, 그는 놀라서 다시 밖으로 내던져 보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현필 선생같은 이는 일생 손에 돈을 만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김현봉 목사의 입장은 달랐다. 그의 주장은 참된 목자는 돈이 아무리 생긴다 해도 하나님 뜻에 합치하게 쓰는 것이라면서 교회는 교역자에게 돈(물질)을 드릴 수 있는 데까지 풍부히 드려야 한다고 했다.
김현봉 목사는 교회 회계 관리를 자기가 직접 맡아서 했다. 한동안 교회 재정을 회계 집사에게 맡겨 보았으나, 김목사의 눈에 그의 재정 처리가 어딘가 거슬려 보이고, 교회 일 해나가는데 지장이 많아서 사실 김목사의 재정처리가 능숙하고 민첩하여 집사보다 우월했기 때문에 집사는 회계를 목사께 가지고 와서 "목사님, 맡아주십시오."해서 두말 없이 맡았다.
아현교인 중에 이 일에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으나, 괜히 외부의 사람들이 "독재 독재"했다.
교인들은 김목사의 인격을 절대 신뢰했기 때문에, 또는 김목사는 고기도 안 먹고, 자녀 한 사람도 없는 분이기 때문에, 교인 중 여유가 있어 돈을 유용하게 쓰려는 이는 김목사라야 돈을 쓸데 바로 쓴다고 그에게 돈 써 달라고 가져다 맡기는 이들도 많았다.
아현교인들은, 목사님께 돈이 들어가도 사사로이 쓰는 것이 없다는 점을 전교인들이 공통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실제로 김목사는 그 돈 가지고 가난한 교인들이 거처할 허술한 집들을 수십 채나 사서 교인들이 살게 했다. 바른 일 하고 있으니 목사께 수십만원 돈이 들어가도 의심도 않았다.
그의 거실 벽장 속에는 돈뭉치들이 은행 금고같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리고 김목사의 한복 조끼나 저고리 안쪽은 돌아가면서 전부 주머니로 되어 있었다. 저고리 안주머니에는 언제나 30만원 정도의 거액의 돈이 들어있었다.
누가 와서 도움을 청하면 그가 신임 할만한 사람인 경우 김목사는 저고리 안주머니에 자기 손을 넣어 짐작으로 손에 잡히는대로 꺼내 주었다. 그런 경우 돈을 세는 일이 없었다.
교인들이 계를 하는 일은 내용적으로 이자놀이니 하지 못하게 했다. 계를 하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고 그런 것 하고 있으면 마음이 신앙에서 떠나는 것이라 하여 김목사는 개인의 이자놀이를 금지했다.
성경에서 에스겔 18:13 "변(利子)을 위하여 꾸이거나 이식을 받거나 할진대 그가 살겠느냐 살지 못하리니...정녕 죽을지라"라는 귀절을 인용하여 엄히 금했다.
어떤 사업을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거액의 자본을 얻어 쓰는 일은 그가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고 더 돈 벌기 위한 것인데, 이런 경우 사업하는 이들이 이자돈 꿔쓰는 일에 대해서는 김목사가 명확한 의견을 말한 것은 없으나, 예배당 짓는 일에 이자돈 얻어서 짓지는 못하게 했다.
처음에는 이자 주기도 하고 쓰기도 했으나, 후에 깨닫고는 중지했다. 그러나 은행 이자는 성경에서도 허락되는 줄 알고 받아도 가한 줄 알았다(신 23:19, 15:1-3, 출 22:25).
안모 목사가 김현봉 목사의 영향을 많이 받고 큰 교회를 사면하고 김목사의 아현교회 같은 교회를 해보려고 새로 교회를 개척할 때 돈이 없어서 김목사에게 부탁하니 그때 돈으로 3천원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김목사가 돈받으러 오라는 날에 정한 시간보다 5분 늦게 갔다. 김현봉 목사는 오후 5시면 취침하여 밤 12시에 기상하는 것이 그의 일과의 철칙인데, 5시 5분에 가니 벌써 자리에 들어 누우시고 사모님이 대신 나왔다.
개척하는 교회일 손수하다가 늦었다고 사과하며 사모님께 전달하니 들어오라고 해서 주무시는 거실에 안내됐다. 옷을 다 벗고 주무시다가 일어나 안목사 보고 앉으라면서 벽장문을 여는데, 드려다 보니 벽장 속에 돈뭉테기가 수두룩 쌓여 있었다. 그 중에서 헐어쓰던 돈다발에서 5천원을 세어 주었다.
그후 사택방을 짓다가 또 돈 구걸을 갔더니, "얼마드는가?" "만원입니다." "그럼 주지!"하고 척 내 주었다.
김현봉 목사가 언제나 강조하고 몸소 주력한 것은, "똑바른 교훈" "구제하는 일에 위주하는 것" "복음 전도 돈을 쓰는 일"이었다. 그가 다루는 많은 돈은 특히 구제와 전도에만 많이 썼다.
가난한 교인이 있으면 자금을 대어 주어 고무신 장사, 소금 장사, 생선 장사를 시켰고, 염리동 일대의 값싼 판자집이 나면 사서 집 없는 교인들에게 거져 주어 살게 하다가도, 저희들끼리 싸움하는 경우는 내쫓아 버렸다.

9. 예배에 관하여

예배드리는 형식도 전혀 달랐다.
김현봉 목사의 아현교회 예배는 주일 오전 예배는 3시간이나 길게 드렸다. 80고령에도 부목사나 전도사도 두지 않고, 원고도 없이 하는 설교를 좌담식으로 하는데, 설교가 그렇게 길었다.
예배 드리다가 중도에 30분 쉬었다가 다시 계속하기도 했다. 오전 예배 본 후 점심은 교회에서 대접했는데, 간단한 밀국수를 모두 먹었다. 그것은 주로 김목사 부인의 봉사로 이루어졌다.
주일날은 엄격하게 지켜서 국민학교 학생들이 주일날 학교에서 행사가 있어도 가지 못하게 했다.
김현봉 목사는 자기 강단에 다른 목사를 세워 설교시키는 일이 없었다. 교회에서 부흥회를 한다던지, 자기가 부흥회를 인도하는 일은 절대 없었다.
해마다 여름에 관악산 벧엘 기도원에서 자기 교인들을 총동원시켜 특별 사경회할 때도 그가 세상 떠나기 바로 전 해까지 자기가 혼자서 맡아 했다.
김목사의 설교는 제목 설교는 없었다. 대지 소지로 조직해서 하는 일도 없었다. 언제나 성경 본문을 가지고 해석하면서 차근차근 아이들 훈계하듯 해 내려가면서 어려운 문제를 질문하는 이가 있을 때는 그 자리에서 즉답하기 보다 좀더 생각해 보고 대답하겠다고 했다.
그가 사용하는 성경주석은 중국판의 한문주석만 썼다.
설교해 가면서 강단 위에서 파리채를 들고 왔다갔다 하면서 파리를 잡으며 했는데, 그것은 조금도 일부러 꾸며하는 제스쳐가 아니요, 마치 자기 집안 식구들을 앞에 놓고 앉아 가장으로서 차근차근 일러주고 또 일러주려 하듯 한 모양이었다.
설교 도중에 울음이 나와 몇 번이나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그럴때면 교인들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는 분명 이 나라의 선지자의 한 사람이었다.
모든 형식을 무시하는 김목사는 위에서 말한 대로 설교를 하다가 너무 지치면 강대상 위에 올라가 앉아서 계속 설교했다.
그에게는 예배당 건물이 신성하다는 관념은 없었다. 김목사는 집회 인도나 설교하는 때가 산에서 혼자 기도하는 때에 비해서 자기 영감이 가장 메마르고 피곤을 느끼는 때라고 술회한 일이 있다.
김현봉 목사가 목회한 아현교회는 한창 부흥하던 시절은 교인 수가 1200명이나 되었는데, 전체 교인의 80퍼센트가 십일조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교회재정은 풍부했다.
십일조 바치는 이들 중의 최고 액수를 내는 이는 김목사 부인의 이름으로 내는 것이었다. 김목사는, 연보하는 방법은 목사가 친히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연보 광고는 목사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르치지 않으면 신자들이 그것을 모르는 것이다. 십일조를 바침으로 축복받는 법을 목사가 친히 가르쳐야 한다. 연보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일은 귀하다."고 김목사는 강조했다.
그러면서 십일조 바치는 방법을 설명하기를, 가령 누가 만원 수입했다면, 그중 10분 1인 천원을 떼어 그 중의 5백원은 봉투에 넣어 "사례금"이라 써서 사례금 함에 넣는다. 남은 5백원으로 가족들이 분배하여 주일 연보를 하도록 했고, 가령 십일조 속에서 다른 감사할 일의 감사연보라든가 구제금을 떼내는 일은 부당하다고 했다.
십일조는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정신을 강조시켰다. "사례금"이란 것은 목사께 드리는 생활비 연보이니 사례금 함에 따로 넣게 했다.
목사가 사례금 받는 것은 교인들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받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일한 삯을 주시는 것이다. 교인들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고, 목사는 하나님께 받는 것이다 라고 했다.
김목사는 받은 사례금을 가지고 다시 양심껏 하나님께 바치고 유익된 일에만 썼다.
목사들이 연보 광고 할 때면 괜히 미안해서 "죄송합니다만...연보를 잘 바치라." 운운 하는데, 연보는 누구에게 내는 것인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닌가. "죄송합니다." 운운 하는 말 속에는 "내가 먹으니 죄송합니다."라는 뜻이 내포된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 인식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10. 여전도사와 심방


김현봉 목사가 돌보던 아현교회에 주일예배 때 "안내원"이란 것이 없다. 전도부인도 예배시간에는 은혜 받아야지 안내를 하지 않는다.
아현교회에는 전도부인(전도사라 부르지 않고, 전도부인이라 부르게 했다.) 두 명과 견습생 여러 명이 있었다.
전도부인은 다른 일은 일체 않고, 교인댁 심방만 하게 했다. 그 심방하는 방법은 한 집에 가서 몇 시간씩 머무적거리며 제 맘대로 다니는 것이 아니라, 누구 집에 가면 안부부터 묻고 별일 없다면 기도도 않고 가곤 했다.
하루 최고 3백 가정을 방문한 기록이 있다. 그리고 그 실태를 김목사가 보고로 들을 수 있도록 했다.
전도부인에게는 쉬는 날이 없었다. 일주일 동안 줄곳 계속됐다. 김목사도 쉬는 날이 없었다. 전도부인은 점심을 도시락으로 싸가지고 다니면서 점심 때(11시경) 교회에 돌아와서 점심 먹으면서 목사에게 보고 하도록 했다.
전도부인은 빨래도 남에게 시켜서 했다. 자원해서 전도인으로 나선 이에게는 김목사가 그의 식모를 자기가 대 주겠노라 했다.
정식 전도부인 밑에 견습 전도인을 몇 사람 두어 심방과 노방전도도 시키면서 그들의 자격이 인정되면 전도부인으로 승격시켜 월급도 더 주었다.
심방이나 전도 다니는 일에 혼자 다니는 것을 금했다. 전도대는 여자들끼리인 경우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으로 하고, 남자들끼리 여럿이 다니는 것은 금하고 남자 혼자 심방 다니는 것도 금했다.
남자 한 사람에 여자 두 사람 짝지어 그것도 비슷한 나이로 말고 연령의 차가 많이 나게 해서 다니게 했다. 지나치게 여럿이 심방다니는 것도 금했다.
어느 젊은 목사가 여집사댁에 혼자 심방가서 아랫목에 앉아 기도하는데, 믿지 않는 남편이 들어와 보고 오해하고는 삽을 들고 들어와 목사를 매질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김목사는 그런 일들을 참작해서 심방대를 조심스레 운영했다.


11. 그의 책망과 사랑

김현봉 목사는 누가 잘못한 경우에 보통은 책망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냥두기 어려운 경우는 오래 생각하다가 기도하며 벼르다가 듣는 이가 감당할 범위 내에서 책망했다.
교인 중에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가 들려오면, 그 교인을 불러다 앞에 앉히고 "요즘 믿음 잘 지키시오?" 하고 물었다. 감히 누구 앞이라고 교인은 일체 사실을 고한다. 다 듣고 나서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이오?" "조심하겠습니다." "안 되지. 집을 팔아라. 교회 가까이 이사할 것이지." 했다.
어느 명령이라고 그 교인은 당장 집 팔아 시키는 대로 이사했다. 김목사는 교인들 집을 될 수 있는대로 아현교회 가까이 모이게 했다.
서울 용산구 남영동에 있는 원성교회에서 김현봉 목사의 사경집회가 있었다. 김목사의 집회는 대개 월요일 새벽부터 시작한다. 그의 집회소식을 들으면 그를 따르는 교역자들은 모두 그 교회로 모여왔다.
당시 A 목사도 그 집회에 참여하여 오전 공부를 끝맺고 화장실에 갔다가 김목사와 마주쳤다. "오후 예배에 오겠오?" "예!"
A 목사는 오후에 명수대에 가서 볼일 보다가 오후 공부시간에는 참석 못하고 저녁 시간에야 집회에 참석했다. 다음날 오전공부 마치고 나서 김목사는 그 목사 보고 "A 목사! 저 있는 방에 좀 오시오." A 목사가 따라가서 강사방에 들어가니 방에는 그 교회 어느 장로도 곁에 앉아 있었다.
김목사 거실에는 어느 때나 먹을 것이 많았다. 젊은 목사들이 들어가면 그것을 내놔 함께 먹는 것이 재미였다. 그런데 그날은 분위기가 달랐다. 김목사는 곁에 앉아 있는 장로 보고 "장로님, 나가시오" 명해 놓고는 "A 목사! 어제 오후 예배에 참석했어?" "예, 어제는 명수대 교회에 갔다가 그만 일에 잡혀서..."
김목사는 A 목사의 변명을 막으며, "아아아아, 내가 그 소리 들으려는 것이 아니오..." A 목사가 변명하려면 김목사는 "아아아"하며 못하게 막았다.
"A 목사님, 직업을 바꾸시오!" 김목사는 기연한 태도로 단도직입적으로 충고하며 얼마나 호되게 책망하는지, "목사가 제 입으로 말해 놓고 제가 지키지 않으면 그 목사가 교인 가르치겠소? 그것이 목사요? 다른 직업으로 바꾸시오!"
이렇게 책망하면서 김목사는 "내가 그 심정을 압니다. 그럴때면 어제 내가 물을 때면 "예!" 할 것이 아니라, "내가 참석하려는데 사정이 좀 있다."고 하는 것이오. 그런 목사 교훈을 누가 받겠소?" "예, 고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늘날 교회 목사들이 책임없는 말을 얼마나 하는지 압니까? 아무쪼록 죽은 목사 되지 마시오."했다.
그후 김현봉 목사가 세상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A 목사는 뛰어가서 김목사 유해 앞에 꿇어 앉으니 눈물이 앞을 가리웠다. "아, 나를 책망해 주시던 어른이 죽었으니 이제는 누가 나를 책망해 주겠는가?"고 통곡하며 말했다.
김현봉 목사는 "교회에서 사람을 칭찬해 주는 일은 독약을 먹이는 것이지"했다.(눅 6:26)
김현봉 목사는 나이 80이 되어서도 사람들을 대할 때 20대 청년에게라도 반말을 안 쓸 사람에게는 언제나 존대했다. 그러나, 처음에 반말 안쓰다가도 자기 심복이 된 후에는 반말을 썼다.
사람따라 대우가 달랐다. 그런둥만둥 하는 사람에게는 좋던 궂던 무관심 했지만, 책망해야 할 사람에게 대해서는 얼마나 호되게 책망하는지 그 사람이 그 교회에 다시 나올 마음이 없어지리만큼 책망했다. 언제 봤드냐는듯이 사정보지 않고 책망했다.
그러나 그후 다시 불러서 쓰다듬고 위로해 줄 때는 얼음 녹듯 다 녹아지고 나오게 된다. 순종할 때는 자기 간이라도 빼 먹일만치 지극히 사랑했다. 김목사의 사랑받는 비결은 순종이다. 그 교회 교인들은 목사님께 사랑받는 경쟁을 했다. 그것은 첫째는 잘 믿는 일로, 그리고 순종하는 일로이다.
그래서 "성현능지성현(聖賢能知聖賢)"이란 말을 자주 사용했다. 목사들과 장로들도 아현교회에 많이 출석했는데, 김목사는 양(羊)만 거느리는 덕량(德量)보다 이리도 거느리며 양을 만드는 덕량을 갖춰야 이리도 빠져나가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아현교회에서는 김목사 말 한번 떨어지면 어디라고 누가 한 마디 말 못했다. 신자들 중에는 김목사를 하나님같이 여길만큼 됐다. 김목사는 들을만한 사람에게만 충고했다. 충고해도 받을 것 같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예 말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새로 나오는 교인은 사랑으로 특별 대우했다.
예배드리는 시간에 어린애들이 떠든다든지 울면 벼락이 떨어지나, 새로 나오는 교인의 어린애가 울 때는 아무 말씀도 안 했다. 그의 목회는 능숙능란했다. 개개인의 처지를 잘 알아 그 처지에 알맞게 사랑도 하고 책망도 했다. 그렇게 하니 사람들은 그에게 심복하여 자신의 머리도 깎고 전적으로 그를 따랐다.
아현교회에 다니던 교인 한 가정이 김목사를 버리고 안식교회로 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김목사는 가난한 그에게 돈 8만원을 주어 보내고는 그 교인이 자기를 떠난 것이 아쉬워 가끔 "아까운 것들!"하고 못 잊어했다.
목사 사택을 찾아간 사람에게는 언제나 먹을 것을 내 놨다. 그는 실과나 단 것을 좋아했지만, 된장국을 잘 끓여주기도 했다.
어떤 교인이 된장국을 못먹는다고 대답하면 "그래, 그래, 된장국에 영양이 많은데..."하며 남의 자유를 존중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교회에서 특별한 행사는 없지만, 김목사는 털신, 목도리 등을 궤짝으로 몇 궤짝씩 사다가 교인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교인들은 존경하는 목사님께 선물받는 일이 기분좋은 일이었지만, 다 일제히 준 것은 아니고, 주일날 예배보고 나서 김목사가 교회 문앞에 섰다가 목사 앞으로 지나가는 교인에게 눈짓을 하면 그가 목사방에 들어가면 거기 집사가 기다리고 있다가 신발 맞는 것 하나씩 골라 신으라 해서 선물로 주었다.
못받은 교인 들이 불평도 했으나, 목사님이 골라 선물 주는 상대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믿음 좋은 사람을 골라 주는 듯 싶었다.
그 밖에도 자기를 따르는 젊은 목사들 중에서도 김목사가 알뜰히 사랑하는 이가 있었고 되는대로 대하는 이로 그 차별이 있었다.
자기가 알뜰히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만날 때마다 "장 가져 가거라, 쌀 가져 가거라." 선심을 썼다.
교회 처녀들도 만나면 사과도 주고 병들면 약도 사 주고 했지만, 교회서 월급받는 사찰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김현봉 목사는 교회재정을 자기가 관리하면서 아현교회가 있는 염리동과 연세대학 뒤 골짜기에서 거의 200채나 되는 판자집들을 사가지고 있었다 한다. 교인이 와서 어디에 집 팔려고 내 논 것이 있다고 하면 "얼마나 되나?" 묻고는 곧 사도록 하고, 교인 목수를 시켜 수리하게 하고 큰 방은 중간에 간을 막아 두어 세대가 살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는 집 없는 교인들을 입주시켰다. 그들은 의무적으로 아현교회에 출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교인수가 400명은 되었다 한다.
김현봉 목사 세상 떠난 후, 아현교회는 분열하면서 이런 판자집 입주 교인들도 거의 반반으로 갈렸다. 이 모 목사 측이 좀 더 많이 차지한듯 하지만, 양측에서 대표 3인씩 뽑아 서로 협상하고 돈을 물어주기도 했다.
김목사 생전에는 지방에서 새로 이사온 사람들이나 가난한 교인들에게 이 집들을 무상으로 빌려준 것이다. 그러면서도 소행이 나빠서 아내를 때리고 못되게 구는 이들이 있으면 두세번 타일러 훈계하다가 정 안 들으면 내보내고 말았다.
이런 많은 수효의 교회 집이 김목사 세상 떠난 뒤에 교회가 분열하면서 재산 싸움의 화근이 되고 말았다.


12. 그의 일과에 관하여

김현봉 목사의 일과는 시계 바늘같이 규칙적이었다. 매일 오전 중은 사사로운 기도와 독경생활 위주로 보내고, 오후는 교회 일에 보냈다.
초저녁 일찌기 5시에 잠자리에 들고 한 밤중 12시에 일어나 명상하다가 새벽 통행금지 해제와 함께 집을 나서 아현교회에서 도보로 연세대학교 뒷산까지 가서 자기 기도실에서 오전 중을 보냈다.
그 산 자체는 김목사를 존경하는 어느 사람이 김목사에게 내주어 맘대로 쓰게 하였는데 거기다가 조그마한 기도실을 지었다.
그러나 김목사 세상 떠난 뒤에 아현교회가 분열로 싸움하는 것을 보고 산 임자는 철조망으로 울타리를 치고 출입 못하게 했다.
김목사는 그 산 기도실에 앉아 정좌하고 깊은 명상에 들어갔다. 길고 긴 명상이었다. 그 앉아있는 모습은 지금 하나님 영접하는 듯한 엄숙한 보기에 감동스러운 모습이었다.
아침 해가 떠오를 때면 김목사는 기도하던 움막에서 나와 떠오르는 태양을 향하여 정면으로 마주 보며 실로 오래오래 깊은 황홀경에 잠겨 앉아 있었다.
그럴 때면, 김목사는 옛날 프란치스코가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느끼며 태양의 노래를 지어부르듯, 김목사도 꼭같은 인스프레이션과 감격에 사로잡혀 지금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표현을 "만물이 어리어리하다"고 말했다.
이 기도하는 움막과 거기서 보내는 명상시간이 김현봉 목사의 설교 영감과 그의 모든 활동의 산실이었다. 충분히 자기 내적 생활을 충실히 다지고 자기 완성을 위하여 애쓰는 시간이었다.
김목사가 스님옷 같은 솜 넣어 누빈 두툼한 두루마기 입고 그 산 숲속에 나무기둥을 의지하고 정좌하는 것을 보고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도 본을 받아 그렇게 했다. 마치 어미닭 날개 밑에 병아리들이 모여 앉듯 많은 제자들은 저마다 큰 나무 하나씩 택해서 뿌리 언저리에 돌로 좌대를 만들고 그 위에 앉아 흉내냈다. 그 산의 나무마다 그런 자리가 됐다.
김목사는 그들의 명상을 지도하며, 소리내서 기도하는 것을 금하고 절대 정적하도록 했다. 김목사는 정오까지 하고 하산해도 남아 있는 이들이 많았다.
낮 12시가 지나면 하산하여 교인들 집집을 심방했다. 그 심방은 문전(門前) 심방이다. 교인 집집의 방문을 열어보고 가난한 교인집 방바닥이 따스한가 손으로 짚어보고 부엌에 들어가도 보고 어려운 사정이 없는가 묻고 별일이 없으면 그냥 지나갔다.
나이 80세의 고령에도 그의 일과는 그대로 계속했고, 오전 중 산기도실에서 정좌하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너무 힘들어 쓰러지듯 자리에 누웠다가 다음 날 또다시 계속했다.
주일날은 아침 일찌기 주일 학교로부터 공부와 대예배 인도, 그리고 오후 2시 예배까지 무려 7시간 반이나 자신이 독담해서 했다.
김목사는 세속 교육의 효과를 높이 평가하지 아니했다. 세속적 교육이 중점두는 점은 육신이 잘 살고 돈 벌기 위한 것이라고 결론짓고, 신도들이 육신적 축복을 장려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계속 배격했다.


13. 마지막 사경회

1964년 12월에 김현봉 목사는 조금 감기 기운이 있은채 아현동 집에서 목욕을 하다가 쓰러지면서 뒷머리를 땅에 쳤다. 그때 마침 흥암교회로 사경회 인도차 떠나려던 참이었는데, 곁에서 몸이 불편하니 집회를 연기하도록 전보를 치려고 해도, 아니라고 예정대로 간다고 고집하고 떠났다.
그때 흥암교회 내에는 교회 노선 대립으로 내분이 있었는데, 김현봉 목사는 그 교회 맡은 김조사에게서 그 이야기를 다 들으시고 저녁 집회 후에 밤 늦게까지 김조사에게 훈계하고 어려워도 그 교회에 더 있으라 권면하며 함께 부둥켜 안고 울었다.
밤에 잠잘 때는 방문마다 안으로 문걸이를 만들어 걸고 잤다. 김목사 몸에는 언제나 저고리 안주머니에 수십만원의 거액을 넣고 다녔기 때문이다.
이튿날 새벽 3시 반, 김조사가 방문을 노크해 봤으나 숨소리는 들리는데 대답이 없었다. 문틈을 째고 손을 넣어 고리를 벗기고 김목사를 보니 요 위에 앉아 벼개를 의지하여 기도하시다가 벼개에 의지한채 쓰러졌는데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교회 문제를 걱정하며 철야기도하다가 그렇게 된 듯 했다.
김목사 시중하기 위하여 늘 따라 다니는 간호하는 처녀를 불러 들여 응급주사를 놓고 약을 쓰며, 한편 사람을 시켜 고장난 자전거를 따고 20리 밖에 있는 의사를 불러다 주사를 놓으니 좀 숨이 순조롭고 가래가 나오나, 눈은 못 뜨고 말은 한 마디도 못했다. 반나절 그런 상태가 계속됐다.
할 수 없이 김조사가 목사를 업고 택시 타는 데까지 찾아가는데 목사님의 몸이 어찌도 무거운지 간신히 차에 태우고 "안녕히 가십시오."하니 김목사는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서울 아현동 사택에 돌아오니 문병객이 계속 찾아들었다. 도저히 안정할 수가 없어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시켰어도 김목사를 아버지같이 따르는 교인들은 거기도 계속 줄을 지어 찾아왔다.
할 수 없이 아무도 오지 못할 비밀 장소로 옮기고 면회사절을 시키고 비대한 몸의 살이 빠지도록 계속 치료하니 좀 회복이 되어 그후 사람의 부축을 받으면서 강단에 올라가 앉아서 설교를 하게끔 됐다.
처음 흥암교회서 졸도했다가 혼수상태에서 의식이 깨어났을 때, 아직 피를 흘리면서도 "참 기쁘다! 예수 잘 믿으라."는 말을 세번이나 되풀이 했다. 측근인들의 추측으로는 그때 김목사는 혼수상태 속에서 낙원을 구경한 것이 아닌가 짐작했다.
김조사는 그때 김현봉 목사가 기도하다 쓰러져 흘린 피를 볼 때 성경에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뜻이 깨달아지더라고 소감을 말했다. 그는 자기를 위해 김목사가 피흘린 것 같이 느껴졌다.
흥암교회 집회는 흐지부지 되고 말았으나 김목사의 피흘려 쓰러지심을 보고 교회 문제는 저절로 서로 오해가 풀리고 화해됐다.
흥암교회 집회 후 3개월 지나, 1965년 3월 12일 오전 9시 50분, 김현봉 목사는 기어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석달 동안 그의 몸은 살이 다 빠져서 임종한 그의 시신은 얼굴도 몸도 작은 소년만치 되어 버렸다.
장례식은 그를 따르던 이병구 목사 집례하에 거행하고, 시신은 생전 김목사 정신 따라 리어카에 실어 끌고 갔다. 김목사는 평소에 교훈하기를 예수 믿는 사람은 장례 때 울지 말라고 가르쳤어도 1200명의 교인들은 리어카 뒤를 따르며 통곡했다.
다시 누가 이런 지도자를 만나겠느냐는 아쉬움에서였다. 시신은 화장을 했다. 그것이 평소 김현봉 목사 정신이었기 때문이었다.


14. 그의 죽음과 후배들

생전에 김현봉 목사는 자기 건강에 지나친 자신을 가졌었다. 어느 좌석에서 자기는 120세까지는 살 수 있다고 농삼아 장담한 적이 있었다.
그런고로 그는 아마 자기가 그렇게 빨리 세상 떠나리라 짐작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나이 80세가 됐어도 자기 후계자를 전혀 생각지 않고 있다가 뜻밖의 죽음이었기 때문에 교회 뒷수습이 혼란해지고 말았다.
평생 심혈을 다해서 애써 그렇게 특별한 교회로 길러 놓은 아현교회는 사실상 4분 5열이 되고 말았다. 세상 떠날 때가 가까와졌을 때 김목사는 자기 정신을 바로 이해하는 이가 없는 일과 교회 앞날을 염려하여 탄식하면서 "하나님, 나를 불러 가옵소서."하며 기도하신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후배를 기르는 일에 무척 애썼다. 그의 감화를 받고 그를 따른 이는 많았다.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나오고 신학교를 졸업한 K씨는 처음 김현봉 목사를 만나 봤을 때 키는 작은 몸에 검은색 한복 입고 삭발한 그 모양이 중 같기도 하고 몇 세기 옛날 늙은이 같은 인상이었으나 그 설교를 들어 본 후 다른 교회는 못 다니고 김목사의 충실한 제자가 되고 말았다.
B 목사는 부산서 교회봉사 하면서 김현봉 목사께 서울 가고 싶다고 하니 "본 교회 목사가 서운해 할걸..." 한 마디 하시더니, 얼마 후 편지 오기를 "오구 싶으면 올 것이지..." 한마디 써 보내왔다. 서울에 상경하니 김목사는 그렇게 반가워하실 수 없었다.
벌써 방도 다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대학원 다니는 것도 다 집어 치우고 김목사를 따랐다.
김목사의 정신이 특별했기 때문에 그를 추종하는 목사들도 많았고 김목사는 젊은 목사들이나 청년들을 일꾼으로 기르기 위해 자신의 온갖 정력을 다 썼다.
그러나 결과는 그들 중 다수가 자기 고집대로 하고, 김목사 정신을 바로 안 배우고, 바로 안 따르니 김목사는 실망 속에 그런 기도를 한 것이라 본다.
이 말은 김현봉 목사의 심정을 가장 잘 아는 이의 증언이다. 김목사는 임종하기 얼마 전에도 "하나님께서 자꾸 나를 징계하시는데 이 교회가 앞으로 어떻게(시험) 될런지?..."하며 걱정하였다 한다.
평소에 김현봉 목사는 이기주의로 예수 믿는 것은 죄악이라고 강조했다. 자기를 위해 믿지 말고 남을 위해 믿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어느 교회가 분규가 있을 때는 나를 반대하는 사람에게 말로도 행동으로도 대항치 말라고 명했다. 교역자가 아무리 나빠도 그를 내는 일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교인들이 할 일은 못된다고 교인들을 훈련시켰다.
김목사가 살아있는 동안은 제자들이나 교인들은 목사님을 신 같이 여기고 그의 말은 신의 말씀같이 여겨 절대 순종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사실 김현봉 목사는 지혜있고 엄격한 분이었다. 김목사 스스로가 자기를 그렇게 우상화 시키려고 노력한 것은 아니지만, 교인들이 그렇게 여겼다.
그러나, 한 번 김현봉 목사가 세상 떠나자, 즉시 교회는 분열하고야 말았다. 그가 평생 애써 가꾸어 놓은 교회는 네 조각으로 갈리고 말았다.
먼저 600명이나 이OO 목사를 따라 나가 버리고, 남은 교인들이 또 안OO 목사, 이OO 목사 등으로 몇 번이나 갈려 나갔다.


15. 제 2의 김현봉 목사들

김현봉 목사를 따라 다니던 목사들과 젊은 청년들은 많았다. 그들은 현재 모두 당당한 목회자로서 김현봉 목사에게서 배운 것으로 실천목회에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 중에는 지나치게 김현봉 목사를 흉내내는 이들도 있다.
김목사는 설교할 때마다 목이 깔깔하여 가래빼앝듯 "캑 캑"하여 밥알 하나 정도의 가래를 곁에 준비해 둔 신문지 자른 종이에 닦는 습관이 있었다. 그를 따르던 젊은이 중 어떤 분은 신통하게도 설교하다간 꼭 김현봉 목사 식으로 "캑 캑"하여 종이에 닦는 습관이 있는 이도 있었다.
또, 어떤 목사는 말하는 것, 동작, 손가락 놀리는 것, 밥숟갈 움직이는 것까지 신통히 김현봉 목사를 닮은 이들도 있다.
바지 저고리 입고 삭발하고 외형적으로는 가장 철저히 김현봉 목사를 모방해 가는 이는, 이OO 목사와 안OO 목사다. 철저해 시원스럽다.
김현봉 목사 생전에 수제자격이었던 이OO 목사는 머리를 깎지 않아 김목사가 좋아 안했다. 하지만, 지금 교단과 신학교 일에 열을 올리고 있다.
김현봉 목사께 가장 친밀한 교육을 받았고, 김목사 사후에 그 교회에 후임으로 갔던 S목사는 그 후 고려파 교단으로 넘어갔다. 그는 회갑도 차리고 김목사 정신을 떠난듯 하다.
김목사 따르던 젊은이 중 가장 장래가 촉망받던 이OO는 아주 탈선하고 말았다.
김현봉 목사의 제자라기보다 동지의 한 분이었던 부산의 백 목사는 지금 제 2의 김현봉처럼 독특한 목회에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밖에 쟁쟁한 이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