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평양대부흥운동은 부산경남지역과 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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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평양대부흥운동은 부산경남지역과 무관



"대부흥의 역사, 부산경남엔 없었다"

[ 기독신문 2007-01-19 오후 10:20:35, 조회수 : 239 ]



이상규 교수 "있었다면 기록했을만한 사료들에서 확인 안돼"
"지도자 부재와 지역특색이 원인"…세세한 검토 필요성 제시


"1907년 전후 평양을 기점으로 전국으로 퍼져나간 부흥이 부산과 경남 지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부산경남 지역 교회사 연구 그룹인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의 회장 이상규 교수(고신대학교 교회사학)가, 자칫 분위기에 휩쓸려 역사적 사실이나 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성찰의 기회마저 놓치기 쉬운 때에, 의미 있는 사실을 발견해 관심을 모은다.

1월 13일 부산 부평교회에서 열린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 창립 1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에서 "1907년 전후 부산·경남에도 부흥이 있었을까"를 제목으로 이 교수는 지금부터 꼭 100년 전인 1907년 평양에서 대 부흥의 역사가 있었다고 전제한 뒤 "평양을 비롯한 이북 지방과 서울, 대구, 목포 등지에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을 때 부산, 경남 지방에서도 이와 유사한 부흥의 역사가 있었을까"라고 질문했다.

이 교수의 이 논문은, 한국 교회사의 거대 담론이 되어버린 "1907년 평양대부흥"에 가려 당시 지방교회의 부흥의 역사에 대한 세세한 검토 작업까지는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는 때에, 그것도 거대담론에 대한 "흠집 내기"로 비춰질 수도 있는 결론을 끌어낸 발표여서 더욱 눈에 띈다.


이 교수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부흥의 불길이 "전국을 휩쓸었고, 한국 땅을 부흥의 물결로 파도치게 만들었다"고 인정했다. 선교사들이 이 사건을 "한국교회의 재생" 또는 "한국교회의 오순절"이라 불렀던 데는 그만한 근거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먼저 미국이나 웨일즈의 부흥운동을 연구했던 여러 부흥 운동사 연구자들과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성령께서 비상하게 역사하실 때 교회의 생활 속에서 체험되는 현상"이라는 정의를 종합해, "부흥"을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를 통하여 우리의 영혼을 불러 깨우시고 하나님의 교회를 소생시키시는 영적인 영역에서의 변화"라고 정의한 다음, "집단적인 회개운동을 동반한 영적 각성과 교회의 수적인 성장을 통해 나타난" 이러한 부흥이 바로 "평양에서 있었던 부흥"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는 "이런 부흥이 부산이나 경남지방에서도 있었을까" 질문한 다음, 단도직입, "결론부터 말하면 이런 부흥이 1907년 전후 부산, 경남지방에서도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고 지적했다. 자신의 이러한 결론에 덧붙여 이 교수는 ""사료(史料)가 없으면 역사도 없다"는 말이 있지만, 이 점은 사료의 결핍에서 오는 단정이 아니라, 유관 사료에서 부흥 역사의 발생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뜻이라며 "부산·경남 지방에서 평양이나 서울 혹은 송도, 목포 등지에서 일어난 유사한 형태의 부흥이 있었다면, 그것이 기록되거나 언급될 기록의 가능성이나 개연성이 충분했지만 그런 기록이 없다"고 설명했다. 부산에서는 "그런 유형의 부흥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면 1907년 1월 평양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파급된 부흥의 사건이 부산이나 경남 지방에서는 왜 일어나지 않았을까? 달리 말하면, 1907년을 전후로 신의주, 개성(송도), 평양, 서울, 대구, 목포 등지에서, 특히 부산이나 제물포에 비해 알려지지 않는 작은 항구였던 목포에서도 부흥이 있어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부산지방의 부흥은 왜 보고되지 않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이 교수는 1903년부터 1907년 사이에 한국교회와 관련된 기록들, 특히 주한 선교사들이 1905년 11월 창간한 <더 코리언 미션 필드>(The Korea Mission Field)와 호주 선교사들의 각종 기록과 보고서들을 검토하는 작업을 했다.


부산에서 사역하던 호주선교사 켈리(Kelly)는 본국의 여전도회연합회(PWMU)로 보낸 1906년 10월 12일치 편지에서, 동료여선교사 니븐(Niven)과 서울에서 모이는 선교사연례대회(General and Presbyterian Council)에 참석했던 것을 얘기하면서 서울 모임에서 한국을 방문한 존스톤(Dr Howard A. Johnston)이 강연한 것과 북쪽에서 일어난 부흥을 언급한다. 이 편지에는, 북쪽에서는 선교사들은 교회를 조직하고 신자들과 탐문자들을 가르치기에 정신이 없지만 "이곳 남쪽에는, 비록 우리 선교부 관할에서 수적인 성장이 있었고 또 성장하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탐문자들이 많지 않고, 불신자를 얻기 위해서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고 적고 있다.


또 다른 편지에서 니븐은 "평양에 있는 이곳 출신 교우가 부산을 위해 매일 간구하고 있다니 기쁨의 근거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그가 말하는 "부산을 위한 간구"란 부산에도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구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이 교수는, 이런 사료들을 예로 들어, 부산경남지방에서도 평양이나 서울에서와 같은 부흥이 있었다면, 켈리 같은 이 지역 선교사들이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런 사실에 대한 침묵은 곧 그런 역사적 사실이 없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것 외에도 여러 자료들에서 이 교수는 부산이나 경남에서 부흥이 있었다면 말하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 없을 문맥들에서 나타나는 "침묵의 기록들"을 찾아 제시했다.


여기에 이 교수는 1907년 9월 22일부터 평양에서 열린 북장로교연례대회에 보고된 교세 통계, 곧 1907년 대 부흥이 일어난 이후에 보고된 통계에서도 부산지부의 교세가 타 선교지부에 비해 미미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며 이 지역에 부흥이 없었다는 근거로 제시했다.


이 교수는 부산과 경남에 부흥이 일어나지 않은 원인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그는 먼저1905-1907년 당시 부산의 교세가 미미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1907년 당시 부산에는 부산진교회, 초량교회, 제일영도교회, 수안교회, 항서교회, 엄궁교회, 하단교회, 구포교회 들이 있었고 경남지방에도 15여개 처에 교회가 있었지만, 교인 수는 서울이나 평양에 비해 월등히 작았고 또 이들은 경남 지방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영적 각성이나 부흥은 신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는데, 이 당시 부산 경남 지방에서의 경우 신자들의 수가 미미했고, 영적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적 한경이 조성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또 다른 이유로, 부산과 경남지방에는 영적 각성에 대한 기대나 영적 지도력이 없었다는 점을 들었다. 부산보다 작은 도시였지만 목포의 경우에는 그 지역 선교사였던 프레스톤의 강력한 지도력이 주효했지만, 부산경남 지역에서는 그런 지도력이 행사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교수는 "지역적 특성"이 부산경남 지역의 부흥을 가로막았을 것이라고 들었다. 이 교수는, 부산이나 경남의 유교적 색체가 강한 보수적 환경, 강력한 불교적 영향, 그리고 해안성 민속신앙과 미신은 기독교에로의 입신과 성장을 방해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되어 왔다는 기존의 연구들을 근거로, 이와 같은 지리적 환경이 서울이나 평양과는 판이한 환경을 조성했고, 이런 점들이 영적 각성이나 갱신, 부흥에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가 풀이한 이러한 원인들은 오늘 부산과 경남 지역의 부흥을 갈망하는 교회들이라면 깊이 새겨들을 가치가 있는 분석들이다.


부산경남 지역 교회사에 대해 남다른 애착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교회사학자로서, 그리고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으로서, 어쩌면 당연한 질문을 던지고, 또 거기에,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맞아 "부흥"에 대한 학술모임이 여러 곳에서 개최되고 부흥을 위한 기도회가 또한 많은 곳에서 개최되고 있는 분위기에 자칫 찬물을 끼얹는 것으로 오해될 수도 있겠지만 꼼꼼한 사료 검토와 비평을 거친 다음 "부산경남 지역에는 그 당시 부흥은 없었다"고 과감하게 결론 내린 이상규 교수는, 이날 발표한 논문은 "연구 없이 그러려니 추측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 "그렇지 않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 쓴 글"이라고 말했다.




김은홍 기자 (amos@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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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경남서 평양 대부흥운동 미미했던 이유,“교세 약하고 영적 지도력 부족 탓”



[2006.12.21 18:52]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한국 교회의 부흥의 불길이 신의주 선천 개성 서울 대전 공주 대구 목포 등지까지 이어졌지만 부산·경남지역에서는 그 영향력이 미미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상규(사진) 고신대 교수는 내년 1월5일 발간 예정인 ‘부경교회사연구 6호’에서 이같이 밝히고 “부산·경남지역에서 평양 대부흥운동의 영향력이 크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1905∼1907년 당시 부산의 기독교 교세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1907년 부산에는 부산진교회 초량교회 제일영도교회 수안교회 항서교회 엄궁교회 하단교회 구포교회 등이 있었다. 경남지방에도 교회가 15곳에 달했다. 하지만 교인 수는 서울 평양 등에 비해 월등히 적었다. 1907년 9월에 개최된 미국 북장로교(PCUSA) 연례대회에서 보고된 교세표에 따르면 한국인 입교자는 평양 2만414명,선천 1만5348명,서울 7435명,재령 7428명,대구 6145명,부산 2017명 등의 순이었다. 북장로교가 부산지부를 대구지부보다 먼저 설치했지만 부산 교세는 대구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이 교수는 두번째 이유로 부산·경남지방에서는 영적 각성에 대한 기대나 영적 지도력이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목포의 경우 새뮤얼 R 프레스톤 선교사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한 반면 부산·경남에는 그같은 지도력이 없었다는 것. 부산·경남지방은 1913년까지 미 북장로교 선교부와 호주장로교(PCV) 선교부의 공동 선교지역이었다. 부산·경남 호주선교부에는 1907년 5명의 여성선교사와 3명의 남성선교사만이 배속돼 있었다. 그중 의료선교사 후이 커를은 진주,제임스 E 애덤스는 마산,겔슨 O 엥겔은 부산에서 활동했다. 북장로교 선교부는 의사인 찰스 H 어빈,리처드 H 시더보탐,월터 스미스 등을 부산지부에 배속시켰다.

이 교수는 마지막으로 지역적 특성을 들었다. 부산·경남은 유교적인 색채와 불교의 영향에 따라 보수적인 분위기가 형성됐으며 해안성 민속신앙과 미신 등까지 혼재되면서 기독교 입교를 방해하는 주요인이 됐다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이같은 환경이 서울 평양과는 매우 판이한 환경을 조성해 부산·경남에서 기독교적인 영적 각성이나 갱신,부흥을 견인하지 못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