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 공동기도문 공동설교문
60주년 기념 공동기도문
송영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저희를 죄에서 구속하사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삼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감사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이곳에 충만히 임하셔서 영광과 능력을 나타내시고, 존귀와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옵소서.
감사
특별히 오늘 개혁신학과 순교 신앙의 산실인 고려신학대학원 설립 60주년을 기뻐하며, “고려신학대학원 주일”로 지키게 하시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60년 전에 일제 치하에서 변절한 한국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이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게 하시고, 그동안 성도들의 눈물과 기도를 통해서 오늘과 같이 발전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가진 것 없이 오직 주의 은혜만 의지하고 시작한 이 신학교를 통해 많은 주의 종들을 배출하게 하시고 국내외에 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게 하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고백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건만, 우리는 은혜를 입은 백성답게 살지 못하였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보다는 우리의 욕망을 따라 살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보다는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였습니다. 복음 전파와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헌신하기보다는 자기 유익과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데 급급하였습니다. 순교신앙을 자랑하고 순교정신을 강조하였으나, 순교자의 자세로 살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나님 대신에 물질과 명예와 이생의 자랑을 구하였습니다. 입술로는 생활의 순결을 외쳤으나, 우리의 마음은 탐욕과 교만과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오,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무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이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간구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간절히 구하옵나니 고려신학대학원을 새롭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이 학교를 세우신 목적대로, 경건과 인품과 실력을 겸비한 종들을 많이 배출하는 신학교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고려신학대학원의 교수들을 위해서 기도하오니, 저들이 주께 받은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게 해주시옵소서. 신학생들을 가르치기 전에 저들이 먼저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배우는 자들이 되게 해주시고, 자신들을 살펴 진실한 삶을 살게 해주시옵소서. 학생들을 지도할 때에 신앙과 인격의 본을 보이게 하시고, 영적인 감화력을 끼치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신학생들을 위해서 기도하오니, 저들이 잘 배우고 익혀서 신실하고 겸손한 종들이 되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불꽃과 같은 눈을 의식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만을 추구하는 순결한 종들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이들을 통해서 십자가의 복음이 능력 있게 선포되게 해주시옵소서. 분열과 다툼으로 고통당하는 한국교회와 영적으로 황폐해진 이 땅을 치유하시고, 온 세계에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케 해주시옵소서.
역사와 생명의 주인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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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신학대학원 설립 60주년 기념 설교문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히브리서 11:33-40
히브리서 11장은 기라성같은 신앙의 영웅들의 기사를 수록해 놓은 믿음의 전당과 같은 장입니다. 여기에 등록된 믿음의 영웅들에 대해서 읽노라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특히 우리의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드는 것은 33절부터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인물들은 무명의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위대한 선지자도, 예언자도 아니었고, 그저 우리와 똑같이 가정을 꾸리고 직장 생활 하고 돈 버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 하나로 창출해내는 사건들은 정말 엄청납니다.
본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승리를 두 가지로 말씀합니다. 33절부터 35절 상반절까지는 대적을 이기는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고, 35절 하반절부터 마지막까지는 고난을 이기는 믿음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것을 정복자의 믿음과 순교자의 믿음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정복자도 되게 하고 순교자도 되게 합니다. 이것이 나에게 다가올 때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예수 믿는다고 칼이 다가올 때 그 때 그 칼을 꺾어버릴 정복자의 믿음을 구해야 합니까, 아니면 그 칼을 맞으면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순교자의 믿음을 구해야 합니까?
한 마디로 대답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요. 신학자 틸리히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제게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믿음을 주십시오. 그러나 이 환경이 변화되어서 안 될 것이라면 이 환경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제게 주십시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 알 수 있는 지혜를 제게 주십시오.” 정말 두 가지를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자세가 한 가지 힌트가 됩니다. 그들은 풀무불에 집어던지겠다고 위협하는 느부갓네살 왕 앞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 할 줄을 아시옵소서”(단 3:17-18)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하는 이 말은 우리에게 순교자의 믿음이 앞서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건져 주시면 좋고, 감사하지만 그러나 우상에게 절하라는 이 배교의 요구 앞에서는 우선 순교자의 믿음을 간구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35절 하반절부터는 이 순교자의 믿음으로 고난의 길을 갔던 선배들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 실려 있습니다.
“악형을 받되”에서 악형은 툼파노의 형벌이라는 것인데 사람을 어깨로부터 다리까지 두 쪽으로 쪼개놓은 다음에 가슴을 북을 치듯 쳐서 죽이는 잔인한 형벌을 가리킵니다.
“희롱과 채찍질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이라고 했는데 바울사도가 선교여행을 다니면서 이런 갖가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는 살 소망이 사라지고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돌로 치는 것”이란 사가랴 선지자가 우상 숭배를 경고하다가 돌로 쳐서 죽임을 당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 극렬분자들에게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톱으로 켜는 것”은 역사에 의하면 이사야 선지자가 므낫세 왕에게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도대체 사람을 톱으로 켜면 그 몸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땅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핍박과 어려움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35절에는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순교의 길을 걸어갔다고 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길을 선택했습니다. 사람에게 받는 영광은 하나님께 받는 영광과는 비교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그 길을 갔습니다.
본문은 그들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를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못 말리는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아무리 회유를 해도 회유가 통하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위협을 하고 협박을 하고 고문을 가하고 매질을 해도 그것이 도통 통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니 도대체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다”는 말의 원어는 ‘세상을 아무 가치 없이 여긴다.’(of whom the world was not worthy)는 뜻입니다. 세상에 미련을 두어야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면 마음이 약해질 텐데 세상을 아무 가치 없이 여기니 아무리 유리 방황해도 마음이 약해지지가 않습니다. 다 빼앗는다고 겁을 주어도 세상 것을 아예 무가치하게 여기니 ‘그래. 가져가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하는데 아예 말이 통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니 세상이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는 사람이지요.
칼빈은 이 구절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하나님의 종들을 어리석은 자로 여기고 배척할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서 세상에 임한다. 따라서 세상이 하나님의 종들을 수용할 수 없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세상에게는 충분한 형벌인 것이다.” 참 희한한 배짱입니다. ‘그래, 핍박하려면 해 봐라. 배척하려면 배척해 봐라.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를 통해서 임하기 때문에 우리를 핍박하면 할수록 너희들 손해다.’ 정말 못 말리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한상동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1941년 8월 25일 평양 형무소에 투옥되었습니다. 3일째 되던 날 온 몸에 미열이 났습니다. 오들오들 추워지면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끙끙 앓고 있는 그를 간수가 보고는 끌어다가 의사 앞에 세웠습니다. 폐결핵이었습니다. 그는 독방으로 옮겨졌습니다. 간수가 주먹밥을 던져주면서 내뱉습니다. “당신은 살아 나가기는 글렀어. 그러기에 쓸 데 없는 고집부리지 말고 그냥 항복하고 나가서 요양이나 하라고 하지 않아. 죽어 나가기 싫거든 그렇게 해.” 폐병이라는 말에 한 목사님은 삶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포기했다고 합니다.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랫동안 감옥 속에서 고통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빨리 천당 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듬해 봄에 그의 몸은 더욱 쇠약해졌습니다. 기침이 심해지고 목에서는 피까지 솟구쳤습니다. 의사가 와서 보고는 병보석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일제시대 형무소에서는 병보석은 여간해서는 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죄수는 생명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해서인지 나갈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목사님은 나가지 않겠다고 거절했습니다. 다음 날도 의사가 와서 “287번, 오늘 나가시오” 하는데도 한 목사님은 “저는 안 나갑니다.”라고 합니다. 의사는 이해할 수가 없지요. 다른 사람들은 보석을 못 얻어서 야단인데 이 사람은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갑니다. 그리고는 묵묵히 눈감고 기도를 하는데 의사는 그 죄수를 보면서 두려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두려움을 느껴야 합니까? 죄수가 생명줄을 쥐고 있는 의사에게 두려움을 느껴야 할 텐데, 반대로 의사가 죄수에게 두려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쯤 되면 정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죽을 것이라고 하니까 차라리 잘 되었다고 하고, 감옥에서 내 보내주겠다고 하니까 ‘아니. 나는 여기가 더 좋다.’고 하고. 세상이 어찌 해 볼 수 없는 사람이 아닙니까? 이 분이 바로 고려신학대학원의 설립자입니다.
오늘은 우리 교단의 신학교인 고려신학대학원의 설립 60주년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전국 교회가 오늘 설립 60주년을 기념하는 예배를 동일하게 드리고 있습니다. 신학교의 설립 배경은 이렇습니다. 일본은 조선 침략을 개시할 때부터 식민통치를 효율화하고 소위 국민정신을 통합하기 위해서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1930년대에 들어 일본 내에 군국주의자들이 득세함에 따라서 신사참배는 더욱 활기를 띄게 됩니다. 민족말살 정책, 황민화 정책의 핵심을 신도(神道)라는 국가종교, 즉 일본 천황을 살아있는 신으로 경배하는 종교의식에 두고 전국 각처에 신사를 건립했습니다. 그리고는 신사참배 행위는 종교가 아니라 국민의례하고 하면서 참배를 강요했습니다. 미나미 총독 부임 후에는 많은 학교들이 이 문제로 자진 또는 강제로 폐교를 당했고, 가톨릭과 감리교는 여기에 굴복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일제는 그 타깃을 장로교에 두게 됩니다. 1938년 9월 9일 저녁 8시에 제27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회집이 되었습니다. 총대 193명이 참석했는데 경찰 97명이 사이사이에 앉아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첫날은 임원 선거를 하고 그 다음날 오전에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말았습니다. 그 취지가 이렇습니다. “우리는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또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하고 다음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서 황국신민으로서 적성을 다하기로 기함.” 그런 다음에 일사천리로 가결했습니다.
이듬 해 총회 때는 개회 벽두 천황이 있는 궁성 쪽을 향해 요배한 후 예배와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신사와 천황이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했고 예배는 그 발 아래서 드렸습니다. 총회에서 결의하기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는 무효로 하고 교역자들이 서울에서는 한강에서, 부산에서는 송도 앞 바다에서 일본신 천조대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미소기바라이>라는 의식을 의무적으로 거행하도록 결의했습니다. 예배당마다 전면에 신주단지를 모셔놓고 그 앞에서 예배하는 기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
1943년에는 아예 조선예수교장로회를 해체하고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흡수해버렸습니다. 구약성경은 없애기로 하고, 기도는 일본의 승리만을 위해 하게하고, 연보는 국방헌금으로 사용하고, 교회 종은 무기 만드는 데 헌납하도록 했습니다. 교인들은 주일에도 일하고 목사는 시국강연을 하도록 했습니다. 교회당에 모여서는 신사참배와 궁성요배와 국기배례를 했습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당시 신자들 중에 그 엄청난 죄악과 더불어 투쟁하다가 2천여 명이 투옥되었고 그 중에 5백여 명이 순교를 했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이 한상동 목사님입니다. 그는 전도사 시절부터 분연히 일어섰습니다. 1936년 10월 24일, 그가 부산초량교회 전도사 시절에 그는 설교하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현 정부는 정의 및 신의에 위반한 우상인 신사참배를 강요하니 오등은 굴하지 말고 이것에 절대로 참배해서는 안 됩니다.” 마산문창교회로 옮긴 후에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나가기를 시작했습니다. 각 지역마다 책임자를 세워 조직적으로 그 운동을 전개시켰습니다. 그 당시의 행동지침은 이렇습니다.
1. 신사참배 하는 교회는 출석하지 말 것.
2. 신사참배 한 목사에게 성례를 받지 말 것.
3. 신사참배 한 교회에 십일조와 연보를 하지 말 것.
4.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교인들끼리 모여 예배하되 특별히 가정예배를 주 로 할 것.
그러다가 한상동 목사님은 1940년 7월 3일 체포되어 그로부터 45년 8월 해방될 때까지 약 5년간을 평양형무소에 구금되어 갖은 고문과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 모진 고통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내고 마침내 해방을 맞았습니다. 출옥하자마자 한 목사님이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이 바로 신학교를 설립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한국교회 초기 신학은 성경을 100%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보수주의, 혹은 경건주의적 복음주의였습니다. 근본주의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정통적 성경 교리에 충실했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조류가 들어오기를 시작했습니다. 소위 신신학, 자유주의 신학이 대두되게 된 것입니다. 그 뚜렷한 조짐이 성경관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생각으로 요리하는 성경비평학이 도입되었고, 성경을 100%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자유주의 사상이 신학교에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득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은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간주하고 적극 수용했기 때문입니다. 보수주의자들이 신사참배 반대로 탄압을 받고 투옥을 당하고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들은 일제의 비호 아래 급격히 세를 넓혀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봅니다. 3공, 5공 시절 자유와 민주를 위한 투쟁은 주로 자유주의 신학 계열의 사람들이 앞장섰습니다. 보수주의자들은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석하는 등 오히려 군사독재 정부를 두둔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일제시대 때는 불의한 정권에 대해 항거한 것은 자유주의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보수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장로교의 유일한 목회자 양성기관이요 보수주의 신학의 본산이었던 평양의 장로교신학교는 1938년 1학기만 마친 채 마침내 폐교하게 됩니다. 보수주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줄줄이 투옥되거나 해외로 망명의 길을 떠났고, 복음주의 계열의 선교사들도 일제히 추방되었습니다. 한국의 보수주의 신학의 창구 역할을 하던 신학지남도 1940년에 폐간됩니다.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자유주의자들이 교계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1940년에 서울 승동교회에서 조선신학교를 개교합니다(현재 한신대학교의 전신입니다). 따라서 해방 당시의 장로교계의 신학교로는 조선신학교밖에 없었고, 이 학교가 46년에 장로교단 총회 직영 신학교로 인가까지 받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상동 목사는 옥중에서 이미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한국교회 재건의 방향을 구상했습니다. 그가 구상한 것은 첫째, 평양신학교의 신학을 계승하는 신학교를 설립하여 진리를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참된 교역자를 양성해야 한다. 둘째, 전도인을 길러서 교회를 설립해야 한다. 셋째, 수양원을 설립하여 일제의 탄압 하에서 신앙 양심을 더럽힌 교역자들을 수양시켜 새 출발을 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학교육을 통한 한국교회 재건과 교회 건설의 비전을 담은 것입니다. 놀랍게도 같은 시대 평양의 옥중에 있었던 주남선 목사도 동일한 비전을 품고 있었습니다.
해방이 되자 한상동 목사는 출옥과 더불어 주남선 목사와 함께 자신의 비전을 구현하기 시작합니다. 1946년 여름에 진해에서 박윤선 목사를 강사로 6주 동안 신학특별강좌를 개최하였습니다. 그리고 9월 20일에 부산진에 있는 일신여학교(현 금성중학교) 교실 하나를 빌려 신학교를 개교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역사적인 고려신학대학원의 시작입니다. 이듬해 10월에는 평양신학교의 교수였던 박형용 박사가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려신학대학원은 명실공히 한국교회사에서 평양신학교의 맥을 잇는 개혁주의 신학의 파수꾼이요 정통신학의 보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창기에는 교사(校舍)가 없어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보니까 ‘보따리 신학교’라는 별명까지 붙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뜨거웠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역사도 있습니다. 1950년 봄, 그러니까 6.25사변이 일어나기 직전입니다. 학교 경건회 시간에 박윤선 교장이 설교를 하면서 요한복음 21:15-17절을 읽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말씀을 증거 하였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학생들 중에서 누가 일어나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학생 한 사람이 일어나 기도하는데 참으로 눈물겹고 진실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가 끝나자마자 연이어 다른 학생이 간절한 마음으로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또 그 뒤를 이어 다른 학생이 기도하고, 또 다른 학생이 일어나고. 그 자리가 기도의 분위기로 충만해졌습니다. 학생들은 통회하는 마음으로 저마다 앞에 나와서 죄를 자복했습니다. 상상도 못할 죄까지 숨김없이 모두 토해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온 회중이 눈물과 기쁨과 사랑으로 충만해졌습니다. 학교는 강의를 전폐하고 그 날을 기도의 날로 선포했고 학생들의 자복기도는 종일 이어졌고 한 주간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그 기도운동이 고려성경학교에도 일어났고, 점점 퍼져서 고신교단 교회 는 물론 한국교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와 같은 초창기의 기도운동, 성령운동은 세월이 흘러가도 사라지지 않고 신학교의 저변을 흐르는 큰 물줄기가 되었습니다.
설립 60주년을 맞는 고려신학대학원의 이념은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진리를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아까워하지 않는 순교정신입니다. 선배들은 우상숭배와 싸우기 위해서 목숨까지 내어놓았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오늘날의 우상인 돈과 권력과 인본주의와 싸우기 위해서 생명까지 내어놓아야 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한 바울사도와 같이 날마다 세상에 대해 날마다 죽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고려신학대학원을 통해 이런 일꾼들이 배출되도록 교회는 힘써 기도하고, 신대원의 교직원과 학생들은 전적인 헌신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청교도적인 삶과 경건을 추구하는 영성운동입니다. 우리의 신앙 선배들의 삶에는 그 중심에 늘 회개하는 생활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물질만능주의, 쾌락지상주의 같은 부패한 세속주의가 교회 안에까지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을 성찰하는 회개운동이 절실한 때입니다. 기도운동, 성령운동으로 세상의 탁류와 싸워 이기는 영성운동에 전력을 투구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충만한 일꾼들을 배출하는 신학대학원이 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는 민족과 교회를 살리는 역사 변혁 운동입니다. 한상동 목사님이 교회를 쇄신하고 영적 부흥운동을 일으켜서 민족에 희망을 주는 교역자들을 양성하기 원했던 그 뜻을 계승해야 합니다. 교파주의, 개교회주의를 탈피하고 온 민족과 세계를 가슴에 품고 나아가야 합니다. 21세기 조국 교회의 부흥을 이끌어가는 역사의 주역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단이 이러한 거룩한 비전을 품고 미래를 향해 전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려신학대학원이 동일한 비전을 품고 남은 21세기를 달려갈 수 있도록 교수와, 직원, 학생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거룩한 순교정신으로 영적으로 어둡고 혼탁한 이 시대를 이기는 믿음의 승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