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이인재 목사님, 독립유공 관련 - 손주 이연규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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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규 사진.hwp (108.5K)
이인재 목사님 장손 계통 자녀로 짐작 되는 분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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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마의 변
자유게시판, 조회 82, 10.05.15 11:56 cafe.daum.net/hsnosamo/BE0N/354
제 할아버지 이인재 목사님은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4년7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해방된 날 석방됐지만 당신의 신념에 의한 결과였다며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할아버지를 존경하기에 경북대를 다니던 대학2학년 때 광주민주화항쟁을 겪으며 불의를 참지 못하고 학생운동을 한 결과 학업을 중단하게 됐고 다시 재입학하여 91년 8월 졸업을 했습니다.
재입학 후 당시 계명대학 부총장이신 아버지가 계셨지만 부모님께 의존하지 않으려 파출부 일을 하여 학비를 벌어 사범대를 졸업했으나 임용고시 면접에서 탈락해 교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IMF 이후 해직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다 신용불량자가 됐기에 워크아웃을 신청해 작년 초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어려움을 많이 겪고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기에 누구보다 서민의 현실과 아픔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도의원이 된다면 무엇보다 먼저 서민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한 정책을 통해 배려와 나눔이 있는 경기도와 화성시를 만들고 싶습니다. 4대강 개발사업과 같은 대기업, 건설업 중심의 정책은 IT강국이던 우리나라를 IT 16위로 추락시켰고, 희망근로와 같은 한시적 일자리를 제외한다면 한 해 40만 개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저 이연규는 가족을 위해 따뜻한 밥을 만드는 마음으로 화성시민과 도민에게 ‘엄마의 마음’으로 봉사하겠습니다. 어려움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됩니다. 나눠서 행복한 사회 만들기를 위해 한 표를 빌려주십시오. 반드시 정책으로 갚겠습니다.
경기도의원 화성시 제3선거구 출마
예비후보인 불꽃님이 국민참여당 경기도당에 낸 자기 소개서
자유게시판, 장경훈 조회 253, 10.04.02 17:52
cafe.daum.net/hsnosamo/BE0N/332
저는 이번 지방선거에 화성시 제3선거구에서 경기도의원으로 출마할 예정인 이연규입니다.
제 주소가 오산인데 왜 화성으로 출마를 하는지 의아해할 분들도 계실 겁니다. 지난해부터 이사를 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집주인이 집을 내놓은 상태여서 계약만료 후 이사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최근 계약기간이 가까워 이사할 의사를 밝히려 전화를 걸었으나 전화번호를 바꾸고 연락이 두절된 상태입니다. 경제적 여력이 여의치 못해 이사하지 못하는 점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경제적 능력도 없는 사람이 정치를 하려 하는 것은 저와 같이 어려운 사람들의 편에 서서 일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화성은 정조대왕이 개혁정책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한 전초기지였습니다.
또한 3.1운동 당시 일경의 총격에 분노한 주민들이 총격을 가한 송산의 일경 노구치와 화수리 주재소의 일경 가와바다를 처단하고 주재소와 가옥 50채를 방화하는 무력시위를 벌였던 곳입니다. 그로인해 일본군에 의한 제암리 학살사건으로 23인이 순국했고, 전국에서 가장 많은(37명) 사람들이 만세사건과 관련 구속됐습니다. 이런 화성의 역사가 저로 하여금 화성시를 정치적 발판으로 삼고자 결심하게 했습니다.
저희 할아버지도 일제에 의해 수감돼 해방 후 석방되셨기 때문입니다. 저희 할아버지는 평양신학교를 다니던 전도사 시절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이다 주기철 목사와 함께 투옥된 이인재 목사입니다. 4년7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해방된 날 출감한 할아버지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함께 옥고를 치른 이들이 ‘독립유공자’신청을 하며 이를 권유할 때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닌데 어찌 유공자 신청을 할 수 있느냐!”며 거부하셨습니다.
그런 할아버지셨기에 어린시절 함께 한 시간은 참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힘든 감옥살이로 60이 되기 전에 이가 다 빠지신 할아버지는 남은 생애 틀니에 의존해 사셔야 했지만 결코 불행해하지 않으셨습니다. 늘 미소가 가득했고 책을 옆에 끼고 사셨습니다. 목회 활동을 통해 들어온 헌금은 고스란히 가난한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사용했지만 정작 당신의 아들은 학비가 없어 배를 주리곤 했노라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제 아버지 역시 청렴결백하게 사시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버지는 20대 후반에 대구 계명대학의 학생처장이 돼 이후 교무처장, 학장, 부총장 등의 요직을 겸했지만 정직하고 곧은 성품이라 어떤 청탁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늘 아버지로부터 많은 것을 물려받았다 생각합니다. ‘지식인은 투기를 해서는 안 된다’며 현재 살고 계신 집 한 채가 전부이신 아버지, 그 아버지의 딸로 살아가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제가 정치를 하고자 한 이유는 바로 이렇게 올곧고 바른 사람이 인정받지 못하고 물질숭배와 천민자본주의가 판치는 우리사회를 바꾸고 싶다는 열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을 통해 후보가 된 이명박을 보고, 그가 내세운 ‘한반대 대운하’ 공약 등의 개발위주의 공약을 점검하며 이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전 세계가 지식산업으로 나아가는 오늘, 이명박의 정책은 토건 중심의 개발 정책으로 되돌아가 그렇지 않아도 버블위기 등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대한민국의 토대가 무너질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 줄 정치집단은 보이지 않고, 국민의 실망은 갈수록 커지는 상황에서 ‘사람이 희망이다’는 캐치플레이즈를 내 건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를 통해 마지막 희망을 건지기 위해 선거운동원이 돼 연설을 하고 다녔습니다. 선거 후 창조한국당 중앙당 여성국장으로 임명돼 중앙정치를 경험하며 ‘당원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당의 존속이 어렵다’는 것을 배웠고, 1인정당의 한계도 깨달았습니다.
총선 때 수원과 오산에서 정책연대를 내세우며 민주당 후보 지지 선언과 연설을 했고, 이 경험을 통해 국민이 민주개혁 세력의 연대와 연합을 갈구함을 배웠습니다. 이후 창조한국당의 비례대표 문제와 자유선진당과의 정책공조 등의 사안이 발생하며 당내 민주화와 상향식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당원들과 함께 노력하다 탈당을 하게 됐습니다.
당시 미국소 수입반대 촛불집회가 연일 열렸고, 촛불문화제 운영위원회에 네티즌 대표로 참석하여 ‘국민명령권 발동’이라는 제안을 했고, 이후 중앙 중심의 촛불집회의 한계를 깨닫고 지역에서 활동하기 위해 오산촛불문화제를 오산 네티즌과 시민들과 함께 열었습니다.
그 후 ‘탁발순례’와 ‘오체투지 순례’ 등에 참여해 화성, 오산 지역을 걸으며 많은 시민사회단체 사람들을 만났고 그런 경험이 바탕이 돼 화성오산생명평화포럼을 함께 결성, 강연회 개최도 했습니다.
지난해 5월부터 화성신문의 기자가 된 것은 화성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였고, 화성의 현안을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발로 뛰며 배우고자 한 이유는 지금껏 우리 정치가 탁상공론에 머물다보니 진정으로 지역주민, 국민이 바라는 바를 미처 알지 못하고 대안을 찾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흠이 많은 사람입니다. 두 번의 이혼경력, 큰 아들과의 이별 등... 어쩌면 완벽주의에 가깝던 제가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심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제 흠이 교훈이 됐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절반이 넘는 인생을 살다보니 인생이란 결코 기쁨과 즐거움만으로 구성돼 있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고, 고통도 슬픔도, 아픔도, 수치스러운 경험들도 모두 오늘의 나를 만든 요소라 생각합니다.
늘 겸손한 자세로 당원과 국민과 함께하는 정치인이 되고자 합니다. 비록 부족하고 흠이 많은 사람이나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사람에 대한 사랑과 희망을 버리지 않는 정치인이 되고자 합니다. 진정 우리아이들이 더 이상 성적과 학벌,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배려하고 나누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남은 생을 다 바치려 합니다.
4만불 소득이라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이웃의 배고픔을 돌아보고, 작은 것도 나누며 살 수 있는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국민참여당에 가입했고, 같은 뜻을 가진 동지들을 만나게 돼 너무나 감사합니다.
2010. 3.28
이 연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