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손양원 목사 기념사업회 사무총장 문제
손양원 목사 기념사업회 사무총장 물러나야
검증되지 않은 곳에 교회후원 자제돼야
손양원 목사 생가복원을 위해 지난 6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 칠원교회에서 기공 감사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이날 손양원 목사의 자녀들이 참석치 않아 참석자들을 의아케 했다. 가족들은 본지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사임을 하겠다던 사무총장이 자리를 고사하고 있어 참석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애족지사 손양원 목사 기념사업회가 정식 출범하기에 앞서 사무총장의 과거 금전문제로 시끌벅적했다. 본지 보도이후 사실로 알려지자 인제대 총장과 적십자 총재를 역임했던 이윤구 박사가 회장직에서 사임을 하자 사태 수습을 위해 사무총장은 곧 사임하겠다고 했다.
그는 이사회가 소집되지 않아 사임이 미뤄졌다고 해명하고 있다. 그러나 회장 사임이 곧장 이뤄진 마당에 그의 주장은 전혀 맞지가 않다. 그런 그가 생가복원기공예배에 사무총장 이름으로 버젓이 얼굴을 내 밀었다.
교계에서는 그의 과오가 사실이라면 애족지사 손양원 목사 기념사업회는 투명하고 깨끗한 인물이 이끌어 가야한다며 그가 부적격자임을 꼽았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과오로 가족들이나 그를 잘 아는 주변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고 있는 것 일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충분히 이해가 될 것 같다.
손양원 목사의 장녀 손동희 권사가 쓴 회고록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에 고아원 얘기가 나온다. 손목사가 일본군에 의해 형무소 생활하면서 손권사가 고아원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은 부산에 위치한 어린이집 ‘애린원’이다.
1938년, 당시 초량교회 담임이던 한정교 목사가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처마 밑에 놓인 바구니 속의 아기를 사택에 데리고 와 양육하기 시작한 것이 애린원의 시작이다.
이곳에는 주기철 목사의 자녀들도 와 있었다. 애린원은 고아원이었지만 신사참배 거부로 도망 다니던 자들의 은신처이기도 했다. 애린원의 설립자 한정교 목사는 동대신동, 서대신동, 보수동에 원을 세우고 고아들을 돌봤다. 이후 사회복지법인 인가를 받고 부산애린어린이집 설립, 애린유스호스텔 창설 등 부산지역 아동 복지 발전에 기여했다. 현재는 한 목사의 둘째 딸 한희선 권사 부부가 애린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다. 애린원 설립자 한목사와 손목사는 평양신학교 출신으로 손목사가 자녀들을 안심하고 맡긴 곳이다.
그러니까 손동희 권사와 한희선 권사와는 친 자매 이상 각별한 사이인 셈이다.
애린원은 법인의 재산을 정리하고 해운대에 유스호스텔(현 아르피나)을 건설하면서 부도로 법인이 타인에게 넘어 갔다. 법인과 상관없이 구포어린이집은 한권사 부부가 운영하고 있다. 부도로 인해 법인측과 가족간 첨예한 대립관계 양상을 띠고 있을 때 법인을 찾아 주겠다고 나선 자가 바로 손양원 목사 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이다.(당시에는 사무총장 아니었음) 2006년 그는 우선적으로 활동비 명목으로 수백 만 원을 받아 갔다. 그리고 법인을 되찾는데 변호를 해 줄 변호사를 선임하자며 변호사비를 받아 가로챘다. 그러고도 모자라 그는 수 백 만원을 빌려 갔다. 한 권사는 이용당한 것을 알고 경찰에 고발을 했다. 검찰은 사기죄명으로 약식기소하고 이어 부산지법은 지급 명령서를 송달 받은 즉시 갚을 것을 명령했다.
법원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던 그는 어느 날 ‘애족지사 손양원 목사 기념사업회’ 사무총장임을 자처하며 나타났다. 그로서는 손 권사를 찾아야만 했다. 어느 정도 보훈청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 가족의 동의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기를 접한 손 권사는 단호히 거절했으며 사무총장 사임을 강조했다.
손권사와 한권사는 친자매나 다름없다. 더욱이 애린원에 피해를 끼친 그의 과오에 기념사업회를 맡길 수 없다고 했다. 기념사업회가 있어야 하며 생가복원도 이뤄져야하는데 참신한 인물이 맡아서 사역해 줄 것을 소망하고 있다.
본지는 애린원 법인 문제를 취재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접하고 지난 672호(2008년 4월 5일자) 신문에 이 문제를 다룬바가 있다. 보도 이후 교계 지도자들이 문의해 왔다. 본지는 나이든 권사님을 생각해서라도 속히 돈을 갚으라고 말했다. 그는 사무총장직도 내 놓겠다고 했다. 그가 반성하고 법원의 이행 명령을 따르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그는 두 달이 넘도록 이행하지 않고 생가복원 기념식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적반하장으로 손권사와 한권사에게 여직원을 시켜 음해 운운하며 고소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또한 본지 기자에게 위임장을 받았으면 보내 달라며 그를 토대로 고소하겠다고 했다. 급기야 그는 법원의 지급 명령 1년이 지나서야 일부를 남겨 두고 12일에 변제를 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권사와 손권사, 그리고 본지 기자에게 재차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누가 누구를 고소해야 하는지 그는 잘 모르는 듯 했다. 자기의 잘못이 드러나 사무총장직을 내 놓게 됐으니 분 할 수밖에 없어 보였다.
약속 이행과 함께 자기반성을 가졌다면 재차 기사화 되지 않을 것을 그는 왜 몰랐던가?
호미로 막아야 할 것을 가래로 막고 있는 셈이다. 금정구기독교연합회 임원 S목사는 그가 연합회 일을 봐 주겠다며 활동비를 받아가고서는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생가복원은 전적으로 교회의 후원을 받아 이뤄진다. 벌써 칠원교회와 은혜와 진리교회 등에서 수천만원의 후원금을 내 놓은 상태다.
손양원 목사 기념사업회가 활발히 추진됨은 물론 생가복원이 순조롭게 이뤄져야한다.
일제시대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돼 모진 고문을 당했던 손양원 목사는 해방의 기쁨도 잠시, 공산당원들에게 두 아들을 잃었지만 용서를 넘어선 사랑으로 자신의 두 아들을 총살한 그를 양 아들로 삼은 하나님의 사자다. 평소 주기철 목사의 순교 정신을 부러워했던 만큼 그도 결국은 미평과수원에서 공산당원에 의해 순교를 했다. 애양원의 한센환자들을 보살펴 왔기에 슬픔은 이들에게 더욱 컸다.
하나님의 힘이 아니고선 순교와 용서와 사랑을 감당해 낼 수 없었던 드라마 같은 실화가 일제와 해방기 사이에 일어났었다.
우리는 작금에 고귀한 애족 순교정신을 후대에게 길이 전해 주고자 생가복원을 이룩하고 있다. 또 기념사업회를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주먹구구식으로 조직이 짜져서는 안 된다.
교단을 대표로 한 자들이 힘을 합해 가족들과 함께 법인을 만들어 추진해야한다. 교회의 후원은 성도들의 헌금이기에 이를 관리 감독할 기구가 마련돼야 한다. 그래야만 교회는 믿고 후원에 동참을 하게 될 것이다. 검증 받지 않은 곳에 무조건 동참하는 교회의 후원 풍조는 사라져야 할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