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언론보도 1 - 김일성 밀랍상에 큰 절. 눈물/ 2 -주체사상 교육
방북 일부 백두산서 "훌륭한 장군님" 기록
김일성 밀랍상에 큰절·눈물
‘8·15 평양 민족통일 대축전’ 행사 기간에 남측 대표단 인사들 일부가 김일성 생가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의 글을 남겼을 뿐 아니라, 백두산 일대에선 ‘훌륭한 장군님’ ‘백두혁명’ 등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찬양하는 언행을 하거나 이런 글을 방명록에 남겼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22일 이번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방북했던 인사들에 따르면, 남측 방북단이 18일과 19일 북한이 김 위원장의 생가라고 주장하는 ‘백두산 밀영’을 방문했을 때, 한 여성은 방명록에 “백두산 정기를 타고 나신 장군님이시라 훌륭한 장군님이 되신 것 같습니다”라는 글을 남겼으며, 일부 인사들은 김일성 주석을 찬양하는 내용의 ‘한별을 우러러’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방북단 중에는 이들의 행동을 말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백두산 밀영 근처 삼지연 방문 과정에서도 김일성 동상에 참배하거나 묘향산 혁명사적기념관에서 김일성 밀랍상을 보고 눈시울을 적시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이들은 전했다. 김숙희(여·64) 대한YMCA연합회 회장은 “묘향산의 국제친선전람관 내에 있는 김일성 밀랍상 앞에서 수십 명의 참가자들이 큰절을 올리고, 몇몇은 엎드려서 크게 울먹였다”며 “아마도 통일연대쪽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문제가 된 강정구 교수는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 초가집에서 30여m 떨어진 방명록 탁자까지 걸어가 「만경대 정신을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는 글을 남겼으며, 북한 TV방송 기자들이 이를 촬영했다.
또 한총련 소속 학생들 일부는 김 주석 동상 앞에서 북측 안내원에게 “이런 것 만들 돈이 있으면 인민들에게 빵을 나눠주는 게 좋지 않느냐”고 하면서도, 김 주석이나 김 위원장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고 방북단 인사들은 전했다.
익명을 요구한 통일운동 관계자는 “관념적으로 주체사상에 몰입된 이들이 처음 평양에 오게 되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런 저런 돌출행동을 벌인 것”이라며, “우리 손으로 남북간 화해와 교류 분위기를 망쳤다는 사실에 참담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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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품위 훼손했다"
국회 "전공노 主思派교육" 비판 유세환씨 조사
홈페이지에 올린 정권비판 글 문제삼아
정우상기자 imagine@chosun.com
홍원상기자 wshong@chosun.com
입력 : 2004.11.12 18:30 42"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공무원 노조 교육자료 중 일부가 북한 주체사상이라고 지적했던 국회 사무처 소속 유세환(39) 입법조사관(서기관·미국 연수 중)에 대해 국회 사무처가 12일 위법성 검토에 착수했다. 국회 관계자들은 “징계에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국회 사무처 고위 관계자는 이날 본지와의 통화에서 “주체사상 관련 글 때문이 아니라 유씨가 홈페이지의 다른 글에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과 품위를 훼손한 여지가 있다”며 “위법성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그러나 유씨의 징계가 빠른 시일 내에 결정될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유씨는 지난 4월부터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 여당 386 국회의원들, 대북정책 등을 지속적으로 비판했다. 노 대통령 취임과 17대 국회가 출범하면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으며, 보수세력도 이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씨는 “지금 이 나라에는 국가보안법도, 공무원법도, 국가정보원도, 검찰도, 경찰도, 행정자치부도 다 작동을 멈추었다” “대한민국이 공산화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대한민국의 행정권과 입법권을 장악한 현 집권세력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 때문” “노무현 대통령은 386의 도구이기를 자처한다”고 주장했다.
유씨는 같은 세대인 386 여권 정치인들에게 더욱 비판적이다. 유씨는 “386 정권에 의해 국가보안법이 폐지되고 대한민국에서 김정일 독재를 찬양하고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이 활개치게 됐다” “일부 386정치인들이 16대 국회에 처음 들어왔을 때 보수세력과 언론은 낙관적으로 점잖게 충고하는 데 그쳤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나라당이 국보법 정부참칭 조항을 삭제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밝힌 것은 나라를 걱정하는 모든 세력의 기대를 저버린 것”이라고도 했다.
유씨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국가에 봉사해야 할 공무원이 주체사상을 공부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이를 알고도 방치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고 말했다.
서강대 영문과,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졸업한 유씨는 95년 입법고시에 합격했고, 국회 환노위에서 환경부문을 담당하다 지난 8월 미국 뉴욕주립대학에 2년 일정으로 유학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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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전공노 “주체사상이 무엇인지 몰라”
전국공무원노조(전공노)는 12일 민족통일 전국연합 박세길 조직위원장의 전공노 교육 내용 가운데 주체사상이 포함됐다는 주장에 “어처구니가 없는 매도”라고 강력히 반발했다.
전공노 정용해 대변인은 “박 위원장을 초청해 1시간짜리 강의를 들은 것일 뿐”이라며 “주체사상이 무엇인지 몰라 강의 내용에 주체사상이 포함됐는지 조차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강의내용이 친북적이라고하면 상식적으로 그 강의를 듣고 있을 공무원이 누가 있겠느냐”며 “정도가 지나쳤다”고 주장했다.
최영기 노동연구원장은 “현재 전공노는 노조로서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과도한 투쟁으로 여론의 비판을 받고 있는 점이 문제”라며 “전공노의 교육과정에서 일부 주체사상과 유사할 수 있는 내용이 들어있다는 점을 들어 집단 전체의 사상적 성향을 규정하는 것은 지나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앞서 유세환 국회 환경노동위 입법조사관은 11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9월 전공노가 실시한 교육내용 중 박세길 위원장이 발제한 ‘세상을 바꾸는 철학,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위해’라는 글에 주체사상이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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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전문가가 분석한 전공노 主體思想 교육 교재 “金正日 주체사상 논문과 상당부분 일치”
발행일 : 2004-11-12 A3 [종합] 기자/기고자 : 홍원상
11일 본지는 유세환 국회 입법조사관의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 주체사상 전문가인 신지호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겸임교수와 홍진표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정책실장에게 박세길 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 조직위원장의 글 원문과 김정일의 1982년작 논문 ‘주체사상에 대하여’의 비교를 의뢰했다.
신 교수와 홍 실장은 두 글을 검토한 뒤, 본지에 비교표(표 참조)를 보내왔다. 두 전문가에 따르면 두 글은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존재 ▲(주체사상의) 사람중심의 세계관이 새로운 철학 ▲사람과의 사업의 중요성 ▲사람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지닌 사회적 존재 ▲자연개조, 사회개조, 사람개조 ▲역사의 주체는 민중(인민대중) 등에서 같다고 말했다.
◆신지호 교수=박 위원장의 글 앞부분은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의 유물변증법이고 그 이후는 완전히 주체사상이다. 이같은 형식으로 글을 쓰는 것은 주사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유 입법조사관이 정확히 지적했다.
글에서 나오는 ‘사람중심의 세계관’은 현재 북한에서 쓰는 단어이고, ‘변혁적 군중노선’이라는 말은 현재 북한에서 ‘혁명적 군중노선’으로 사용된다. ‘민중중심의 역사관’도 북한에서 말하는 ‘인민대중이 주인’이라는 이야기와 같다. 글에 나오는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도 주체사상에서 쓰는 용어다.
◆홍진표 실장=박 위원장은 이 글에서 나오는 이론의 유래나 주창자 등 출처를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런 이론은 세계철학사에서 오직 주체사상에서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강조하거나 중시한 철학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과 세계라는 관계설정이나 사람을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갖는 존재라고 규정하는 것은 오직 주체사상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이론이다.
박 위원장이 용어나 표현을 변형시켜 나름대로 위장을 시도하고 있지만, 북한에서 주체사상의 기본서로 불리는 ‘주체사상에 대하여’(김정일 논문)와 비교해 보면 그 내용의 일치성을 쉽게 증명해 낼 수 있다.
홍원상기자 (블로그)wshong.chosun.com
<표> 전공노 교육 교재와 김정일의 ‘주체사상에 대하여’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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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파 출신이 말하는 "1980년대와 오늘의 386"
"1980년대 386들, 나라 바꾸려는 열정 있었지만
2000년대 386들은 기득권 지킬 생각 밖에 없어"
홍진표 자유주의연대 운영위원
입력 : 2004.12.18 08:52 07"
열린우리당 이철우 의원의 조선노동당 입당 논란으로 여야가 극한 대결을 벌이고 있다. 검찰은 이 의원의 노동당 입당 의혹을 제기한 한나라당 의원 3명에 대해 수사를 착수했다. 한나라당은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에 대한 조속한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고, 열린우리당은 ‘간첩 조작’을 중지하라고 한나라당을 비난하고 있다. 2004년12월에 터진 이철우 의원 사건은 1980년대 주사파(主思派) 운동권의 실상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고 있다. 주간조선은 이철우 의원과 같은 시기에 주사파 운동권으로 활동하다 북한의 실상을 접한 뒤 전향한 홍진표 자유주의연대 운영위원의 체험적 수기를 싣는다. (편집자 주)
1985년, 내가 학내시위 참여로 인해 강제징집 당해 군대에 갔다온 후 서울에 있는 큰아버지 댁에 기거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큰아버지는 나를 불렀다. 큰아버지는 “이 집이 사회주의혁명의 거점이 되도록 놓아둘 수 없다”고 역정을 내며 바로 짐을 싸도록 하였다.
제대 후 당시 학생운동 내에서 널리 읽히던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당의 두 가지 전술’, 스탈린의 ‘레닌주의의 기초’와 같은 유인물을 갖고 있다가 들킨 것이다. 당시 내가 순수하게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던 큰아버지는 사회주의를 추구하고 있는 조카의 정체를 알고나서 사실상 절연(絶緣)을 선언한 것이다.
필자는 1982년에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여 그 해 4월 지하이념서클에 가입하였다. 처음에는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박현채의 ‘민족경제론’과 같은 입문서를 읽고 토론을 했는데, 여름방학 합숙 때부터 ‘자본주의 구조의 발전’이라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일본서적을 보기 시작했다.
그 후 1983년에 강제징집으로 학교를 떠나 직접 체험하지는 못했지만, 1984년에 이르면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비롯하여 레닌, 마오쩌둥의 저작들을 운동권의 교과서로 채택하게 된다.
▲ 재야인사와 전대협 학생들이 1991년 8월12일밤 경희대 노천강당에서 열린 범민족대회 개막식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
1985년에 제대했지만 나는 복학을 포기한 채 노동현장에 들어갈 결심을 하였다. 나는 뜻이 맞는 선·후배들과 모여 위장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이미 주체사상파(이하 주사파)가 등장한 이후라 이른바 노선투쟁이 치열한 상태여서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 참으로 난감하였다. 결국 주사파(主思派)를 선택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이랬다. 우선 마르크스주의 정통파를 주장하는 PD(민중민주)계열이 북한 문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이 없거나 정통에서 일탈한 집단으로 보는 점이 내키지 않았다. 두 번째로는 당시 개헌문제를 둘러싸고 PD계열이 ‘제헌의회’라는 급진적 주장을 내건 반면 주사파들은 야당과 연대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자는 매우 현실적 주장을 펴는 것에 큰 매력을 느꼈다.
그 후 북한의 대남방송인 ‘구국의 소리’를 듣고 녹취해서 돌려보다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어 1년을 복역하는 바람에 노동현장으로 가겠다는 계획은 유보될 수밖에 없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잠시 학생운동에 복귀하여 서울대총학생회 사무국장으로 일하다가 다시 집시법으로 투옥되었고, 출소 후 한겨레사회연구소를 거쳐 1990년부터 김근태(金槿泰), 이부영(李富榮), 장기표(張琪杓)씨 등이 주도하던 전민련(全民聯)에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재야단체의 통일운동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때 주사파의 대부(代父)로 알려진 김영환씨를 만나 반제청년동맹이라는 주사파 지하조직에 가입하였고, 이 조직이 민족민주혁명당으로 개편되면서 계속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80년대 말 구소련 동구의 붕괴를 거치면서 구소련을 모델로 삼았던 PD계열은 물론이고 주사파 내에서도 대거 운동권을 떠나는 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1992년 대선에서 김대중(金大中)씨가 패배하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접고 사법시험에 도전하거나 대학원에 진학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마치 침몰하는 배에서 앞다투어 뛰어내리는 그런 분위기였다.
운동권에 대한 北의 영향력 실감
나는 김일성(金日成)이 주장했다는 ‘모스크바에 비가 오는데 왜 평양에서 우산을 쓰는가?(소련은 망했지만 북한은 건재하다)’라는 북한건재론을 의지삼아 신념을 유지해 나가려고 애썼다. 특히 1994년 여름,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북한조기붕괴설이 유행하자 주사파를 비롯한 운동권 잔류자들에 대한 주위의 시선도 매우 냉랭해졌다. 한때 고교동문회에 가면 동창들이 진심으로 미안해하면서 격려했던 분위기도, 이 시기에는 아직도 운동권에 남아있다는 것을 한심해하는 기류로 바뀌어갔다.
솔직히 나는 당시 냉랭한 주변 시선은 담담하게 견디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심각한 갈등은 북한 때문에 시작되었다. 1991년에 전민련 주도로 남북해외 공동조직으로 만들어 놓은 범민련(현재도 존재)이 당국의 계속되는 탄압으로 활동 불능상태에 빠졌고, 고 문익환(文益煥) 목사를 중심으로 합법성을 강화하는 개편이 시도되었다.
범민련 결성 과정부터 실무에 관여해온 나 또한 개편노선을 지지하였는데, 정작 북한이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북한은 단순한 반대에 머무르지 않고 특히 한총련이 이를 반대하도록 노골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 전대협 학생들이 평양축전 참가를 주장하며 집회를 갖고 있다. 앞줄 오른쪽이 이인영씨(현 열린우리당 의원), 한사람 건너가 우상호씨(현 열린우리당 의원).
처음엔 북한의 대남(對南) 실무자들이 일시적으로 판단착오를 하는 것이라고 좋게 해석해보려고 했으나, 수년에 걸쳐 북한의 입장이 변하지 않는 것을 목격하면서 결국 진실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범민련은 생전에 김일성이 관심이 많았던 조직이기 때문에 북한은 이른바 수령(首領) 절대주의에 입각해 그 고수를 고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직 북한 정권과 체제에 대한 신뢰 하나로 운동의 동력을 삼던 나에게 북한의 지독한 비합리성은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1995년에 이르자 북한의 극심한 식량난이 외부에 알려지고, 탈북자들이 대거 발생하면서 그들의 증언이 쏟아져 나왔다. 통일운동 과정에서 북한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고 있었지만 처음엔 탈북자들이 말하는 정치범수용소나 기아사태에 대해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두 사람이 아닌 수많은 탈북자들의 증언이 대부분 일관되고 일치한다는 사실을 결국 부인할 도리가 없었다.
1996년에 이르러 나는 마침내 큰 결단을 내리고 충분히 내부에서 토론 가능하다고 믿고 운동권의 필독서였던 월간 ‘말’지에 북한에 대해서 다시 보아야 한다는 글을 실명으로 기고하였다. 그러나 이 글이 실리자 곧바로 변절자라는 돌이 사방에서 날아왔고 운동권을 떠나라는 삿대질을 접하게 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는 이 사건을 통해 남한 운동권에 대한 북한의 막강한 영향력을 절실히 체험할 수 있었다. 이미 북한은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성역(聖域)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결국 나는 자의 반 타의 반 15년에 걸친 운동권 생활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청춘의 꽤 긴 시간이 잘못된 삶이었다는 자책(自責)에 수개월 동안 불면(不眠)과 좌절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르고 이미 생각을 바꾸고 있던 김영환씨 등과 합류하여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하여 주체사상이 어떤 결함을 지니고 있는지 체계적인 비판작업을 시작했고, 이 시대 진정한 진보의 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탐구의 노력을 했다. 1년 이상의 탐구를 거쳐 얻은 결론을 중심으로 ‘시대정신’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였고, ‘북한민주화네트워크’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향의 이유’ 설명하려니 답답해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왜 생각을 바꾸게 되었는지 질문을 받아왔다. 당연한 호기심이겠지만, 무언가 설명이 필요하다는 현실이 때로는 답답해진다. 구소련과 동유럽이 붕괴되고, 북한 체제가 사실상 파산한 이 마당에 좌파(左派)사상을 아직도 갖고 있는 것이 오히려 이색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일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특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일찌감치 운동권을 떠나 사회에 편입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른바 ‘전향(轉向)’에 대해 보이는 반발감이다. 운동권이 옳은 것이었다고 생각했다면 왜 그들은 떠나게 되었는지 반대로 묻고 싶다. 이런 이중성(二重性)의 이면에는 운동권 경력이 일종의 기득권이 되어버린 현실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97년 대선에서 DJ가 당선되면서 선보였던 대북포용정책과 민주화경력 우대정책은 주사파들의 친북반미(親北反美) 주장을 정당화시켜 주었고, 좌파 사상을 비판적으로 돌아볼 기회를 박탈해버렸다.
최근 자유주의연대가 발족되어 386세대의 자기성찰을 촉구하자 이른바 색깔론이라는 시비를 비롯하여 우익된 것이 자랑이냐는 비아냥거림도 들린다. 현재 집권세력에 참여하고 있는 386들의 다수는 이미 과거의 좌파사상에서 많이 벗어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들도 이미 현실이 사회주의혁명을 꿈꾸거나 북한 주도의 통일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1980년대 민주화운동이 좌파이념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사실은 애써 부인하려고 한다.
1980년대에 386들이 좌파운동을 할 때는 비록 잘못된 이념이었지만 그나마 사회를 어떻게 바꾸겠다는 구상과 열정이라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사회적 주류가 되어버린 지금의 386들에게는 정치적 기득권을 보호하고 강화하는 세속적 관심만이 발견된다. 민주화운동 경력을 부각시키고자 건국과 산업화를 주도했던 세력들을 폄하하고, 편가르기에만 정력을 쏟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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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전대협계" 깃발 날린다
의원·보좌관등 국회에만 150명…NL계열 운동권출신 "전대협 동우회"
"친목모임일 뿐 정치성향 서로 달라" 지적도
정우상기자 imagine@chosun.com
입력 : 2004.12.20 18:46 39" / 수정 : 2004.12.20 20:19 32"
요즘 국회에선 정치권 최대 계파로 ‘전대협(全大協) 동우회’가 떠올랐다는 말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오간다. 과거 ‘상도동계’ ‘동교동계’처럼 보스와 지역중심으로 뭉쳤던 거대 계파들이 힘을 발휘했다면, 17대 국회에선 전대협 출신의 의원과 보좌관, 당직자들이 최대 인맥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전대협 동우회 회원은 국회의원 12명, 의원 보좌관과 주요 정당의 당직자까지 합치면 국회 안에만 150명에 달한다고 전대협 출신인 열린우리당의 한 당직자는 전했다. 전대협 동우회의 힘은 그들이 국회와 청와대·각 부처는 물론 각종 위원회와 시민단체, 정치성향의 인터넷 동호회, 친노(親盧)성향의 언론 등 정치권 전반에 포진하고 있다는 데 있다. 청와대엔 행정관급으로 상당수가 들어가 있고, 각 부처에도 장관 보좌관 등으로 일하고 있다.
▲ 전대협 출신들이 국회, 청와대, 정부 등 정치권 전반에 걸쳐 포진하며 최대 세력으로 부상하고있다. 사진은 1989년 7월 10일 당시 전대협 학생들이 서울 한양대에서 평양축전 참가를 주장하며 농성을 하고 있는 모습. 조선일보DB
현 전대협 동우회장인 전문환씨는 한 인터넷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12명이나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은 개인의 힘이 아니라 80년대 민주화운동 세대의 힘”이라며 “30~40대인 이들의 힘은 엄청나다”고 말했다.
‘전대협 동우회’는 1987년 만들어져 1993년 이름을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으로 바꾸기까지 전대협의 간부를 지냈거나 각 대학 총학생회·단과대 학생회 간부를 지낸 사람들의 친목모임이다. 올해로 출범 13년째를 맞는 전대협 동우회는 학번으론 83학번부터 89학번까지, 연령대로는 30대 초반에서 40대 초반까지이다. 총학생회 일을 했던 이들이 수십개 대학에서 ‘민주동문회’를 운영하고 있고, 이들이 전대협 동우회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80년대 학생운동에서 민족해방(NL)계열이 전대협을 장악했기 때문에, NL과 대립했던 민중민주(PD)계열들은 전대협 동우회원이라도 동우회에 소속감이 없거나 모임에도 잘 나가지 않는다. PD계열 총학생회장 출신의 여당 당직자는 “전대협 동우회는 정확히 말하면 NL계열 학생운동권 출신들의 모임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PD계열이 여당과 한나라당, 민주노동당에 골고루 분포한 반면 NL계열들은 여당에 집중 포진해 있다.
전대협 동우회 소속 국회의원은 모두 열린우리당 소속이다. 1기 이인영(李仁榮·의장·고려대) 우상호(禹相虎·부의장·연세대) 이철우(李哲禹·비서·서울시립대) 김태년(金太年·경희대 총학생회장), 2기 오영식(吳泳食·의장·고려대) 최재성(崔宰誠·동국대 총학생회장) 백원우(白元宇·고려대) 정청래(鄭?來·건국대 조국통일위원장), 3기 임종석(任鍾晳·의장·한양대) 이기우(李基宇·성균관대 총학생회장) 한병도(韓秉道·원광대 총학생회장) 복기왕(卜箕旺·명지대 총학생회장) 의원이 전대협 동우회원이다. 여당의 4대 쟁점입법 중 국보법 폐지는 물론 사학법(이인영, 최재성, 백원우, 복기왕), 신문법(우상호, 정청래) 제·개정을 전대협 출신들이 주도 하고 있다.
전대협 동우회장을 지낸 열린우리당 복기왕 의원은 “따로 모임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단체행동을 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5월 열린 전대협기 축구대회에는 의원 12명 중 9명이 참석해 단결을 과시했다. 1년에 한 번 충청지역에서 열리는 동우회 전체 모임에는 한 번에 수백명이 몰릴 정도로 성황을 이룬다고 한다. 한편에선 “전대협 동우회라는 틀은 동창회처럼 친목모임일 뿐 정치적으론 분화돼 의미가 별로 없다”는 지적도 있다. 정당과 정치적 성향이 모두 달라졌다는 것이다.
범전대협 동우회 현황
국회의원(여당)
1기: 이인영(의장.고려대) 우상호(연세대) 이철우(시립대) 김태년(경희대)
2기: 오영식(의장 고려대) 최재성(동국대) 백원우(고려대) 정청래(건국대)
3기: 임종석(의장 한양대) 이기우(성균관) 한병도(원광대) 복기왕(명지대)
총와대
임상경(숭실대) 이은희(연세대) 김병규(연세대) 김영배(고려대)
윤건영(국민대) 권오중(연세대) 권혁기(국민대) 유민영(성균관)
부처
기동민(복지부.성균관)
김상일(통일부.경희대)
전대협이 주도한 주요투쟁
1기: 1987년 6월항쟁
2기: 1988년 남북청년학생회담
3기: 1989년 임수경방북성사
4기: 1990년 민자당해체투쟁
5기: 1991년 5월투쟁(강경대 치사사건항의)
6기: 1992년: 제3차 범민족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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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구 "6·25는 통일전쟁, 미국은 생명 앗아간 원수"
조선닷컴 internet@chosun.com
입력 : 2005.07.27 18:09 41" / 수정 : 2005.07.27 21:12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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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구, 만경대 방명록,
맥아더 동상
지난 2001년 ‘만경대 방명록 사건’으로 논란을 빚었던 동국대 강정구 교수가 인터넷 매체 ‘데일리 서프라이즈’에 기고한 칼럼에서 “6·25전쟁은 후삼국시대 견훤과 궁예, 왕건 등이 모두 삼한통일의 대의를 위해 서로 전쟁을 했듯이 북한의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라고 주장했다.
강 교수는 ‘맥아더를 알기나 하나요?’란 제목의 기고문에서 이같이 주장하고 “집안싸움인 이 통일내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한달 이내 끝났을 테고, 물론 우리가 실제 겪었던 그런 살상과 파괴라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쟁 때문에 생명을 박탈당한 약 400만명 대부분에게는 미국이란 생명의 은인이 아니라 생명을 앗아간 원수일 것”이라며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한달 이내 끝났을 것이고 사상자는 아무리 많아야 남북한 합쳐 1만명 미만일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개입으로 인해 약 3백99만명이 더 많이 죽게 되었다는 의미”라고 했다.
그는 이어 “원수를 은인으로 보는 이런 역사왜곡, 곧 대미 보은론은 이제 탈냉전 통일시대를 맞아 완전히 폐기돼야 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동상 철거 공방이 벌어지고 있는 맥아더에 대해선 “남의 집안싸움인 통일내전 사흘만인 27일 한국전선을 시찰하고, 미국정부에 개입을 요구하고, 곧바로 소사 등에 폭격을 감행한 전쟁광이었다”며 “맥아더 동상도 함께 역사 속으로 던져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맥아더는 완전히 식민지총독 부임과 같은 서슬 퍼런 모습으로 점령군의 면모를 한껏 발휘했다”며 “이런 맥아더와 북쪽을 점령한 소련군 사령관 치스챠코프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