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김석준 목사님의 설교 한 편
김석준목사님은
1970년대 초반까지 공회에 잠깐 소속했고 지금은 사망한 목회자입니다. 대구지방에서 목회를 시작하였으나 이후 서울로 올라갔고 서울 경기지역에 그분을 따르는 목회자로 비록 작지만 한 교단을 이끌었던 분입니다. 비록 소속을 달리했으나 늘 백목사님에 대한 존경과 애착이 많았던 분이었고 백목사님의 주요 교리를 그대로 따라 살았습니다. 눈에 띄는 다른 점은, 신학지식에 대한 유용론(有用論)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백목사님 노선에 대하여 적극적이고 호의적이었던 이유로 그 소속 목회자들과 교인들에게는 백목사님과 공회가 남의 식구로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친밀감이 있으며 또한 공회 소속으로 전입되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과 그렇게 절연하고 살았기 때문에 공회노선에서 탈퇴한 다른 분들과는 차원이 많이 다른 분입니다.
이곳에서 이분을 소개하는 것은
백목사님 신앙노선을 따를 수 없는 형편도 있기 마련이고, 백목사님 신앙노선을 반대하는 양심이 있을 것이라는 것도 다 아는 사실이며, 옳지만 체질이 달라서 따르지 않는 경우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회 신앙노선 내부에 있지 않게 되면 자신의 처지와 입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너무 지나친 표현들이 나오는 것이 인간의 자기 변호 심리인데, 이 분은 생각하는 방향이 좀 다르기 때문에 나가겠다고 하였는데, 나간 후에도 늘 백영희신앙노선에 대한 입장이 한결같았다는 것입니다.
공회 역사 한 부분에 속했던 분이어서 소개했습니다. 백목사님과 오랫동안 떨어져 있게 되면서 달라진 부분들, 또 이런 부분 때문에 함께 하지 못했다고 느껴지는 부분 등을 참고해보셨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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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자
1985년 가을
설교 제목
신자(神子)가 인자(人子) 되신 성자(聖子) (김석준 목사)
제1강 신자(神子)가 인자(人子) 되신 성자(聖子)
요 4. 10-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 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한복음 4 : 10 - 15)
우리가 은혜 받고자 하는 말씀의 총 제목은 "성자 예수님을 바로 알자"입니다. 우리가 성자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종교생활을 한다고 해도 참 신앙생활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성자 예수님에 대해서 측면적인 역사와 이면적인 사실을 시간이 닿는 데까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저녁에는 제1강으로서 신자(神子)로서 인자(人子) 되신 성자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요1 : 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 다음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그 다음 34절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며, 그 다음 49절에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 거기까지 봉독했습니다.
말씀 듣기 전에 이번에는 신자(神子)이신 하나님이 인자(人子)로 오셔서 지상의 교회를 건설하신 주님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기도제목으로 삼아봤습니다.
우리가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고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이요, 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다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있는 신자로 그렇게 볼 수도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믿는데 왜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아니냐?"그렇게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이방신을 믿었습니까, 하나님을 믿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 야훼 엘로힘을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그때의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나 유대인이나 그들을 신앙인으로 인정해줬습니까? 예, 신앙인으로 인정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바리새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 그렇게 알고 있었지요. 다시 말하면 인간 세계에서는 그들이 자타로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고 공인을 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이 신앙은 "나는 신앙인이다.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신앙인으로 인정하시지도 않고, 어떤 국가가 그 사람을 신앙인이라고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래? 그 국가가 그 사람을 신앙인이라고 하니 나도 그를 신앙인으로 인정을 해야되겠다. " 그렇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신앙인이라고 한다 해서 하나님도 인간을 따라서 그 사람을 신앙인으로 인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신앙인이라는 그 인정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그것입니다
첫째로는 모든 일반인들에게 인정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그것도 필요 없고, 둘째로는 모든 종합 종교회의에서 모든 종교인들이 말하기를 "저 사람들은 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인정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라 이 말이죠. 그리고 어떤 특정 교단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고 인정을 한다고 해서 그것도 우리가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가 "나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고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지도 못합니다
그러니까 올바른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렵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는 쉽죠. 어떻게 하면 됩니까? 교회에만 나가면 됩니다. 교회에만 나가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고 인정해 줍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면서 하나님 앞에 내가 신앙인으로 인정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그 염려보다는 어떤 특정 종교, 특정 교단이나 교파로부터 신앙인이라고 하는 인정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거기에 더 마음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죠? 그러나 우리가 이 산상에서 그런 특정 교단이나 교파를 초월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신앙인이라고 인정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한번 냉정하게 생각하고 지나가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려면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죠.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일반 통속적으로는 예수 믿는다 그러죠? 그러면 예수를 바로 믿으려면 예수를 바로 알아야 된다 그 말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아야지 바로 알지 못하면 제 아무리 자기가 걸어온 코스가 룰을 잘 지키고 모든 체계를 다 밟아서 왔다 할지라도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참된 신앙인과 기본구원과는 분리시켜서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구원 얻어 천국 가고 못 가는 것은 잘 믿고 못 믿는 데 좌우되는 것이 아닌 것인 만큼 어떤 교파나 어떤 교단에 소속되어 있든 간에 예수를 구세주로 믿었으면 일단 천국권에 들어가기는 합니다. 그러나 천국권에는 들어가 있지만, 그 다음에 자기의 영인 성장과 이성과 몸의 성화 문제, 다시 말하면 건설 구원이라고 하는 성화구원, 건설구원, 혹은 성장구원, 소유구원, 연관구원 등의 이런 구원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이 현존 세상에 극히 제한되어 있는 시간 속에서 영원히 실수 없이 참 유효적으로 살아 나가려고 하면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요한복음 4장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를 하신 것 을"우리가 볼 때에, 예수님께서 그 사마리아 여자에게 하신 말씀이 뭡니까? "네게 말하는 그가 누구인줄 네가 알았던들" 그렇게 했단 말이요, "그가 누구인 줄 네가 알았더라면 그에게 네가 물을 먼저 달라고 했을 것이다. " 그럴 때에 그 다음에 이제 예수님께서 "야곱의 우물의 물을 먹는 자는 또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 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 하실 때에, 그 여자가 "그 물을 내게 주십시오." 하였는데 여기서 보면 물 은 다 같은 물인데, 물에 대한 개념이 서로 다르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내게 원했으면 내가 네게 뒀을 것이다. " 하는 그 물의 개념과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에게 요청한 "그 물"의 개념이 서로 다르다 이 말입니다. "그 물을 내게 주시옵소서."다른 물 말고 당신이 말씀하신 "그 물"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우 리가 이 언어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물"이라 했으니까 그것이 꼭 같은 물입니까, 물의 개념이 서로 다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물과 그 사마리아 여자가 말한 그 물. 그 여자가 아무 물이나 달라고 말하지 않고, 앞에 정관사를 붙여서 "그 물, 예수 당신이 말씀하시는 그 물을 내게 주십시오." 했는데, 이 생각하는 개념이 같았을까요, 달랐을까요? 예, 언어적으로는 같은데, 그러나 그 개념은 전혀 다르다 이 말입니다. 왜 다릅니까? 몰라서 그래요. 이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세계를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해를 못하죠
그러면 쉽게 말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물은 물질적인 그 물을 말합니까, 비물질성의 물을 말합니까? 비물질성인 물이죠. 가견적인 물입니까, 불가견적인 물입니까? 불가견적인 물, 이런 물인데, 그 여자가 알리가 없죠. "그 물"이라고 했지만 여 자가 생각하는 그것은 물질인 물, 가견적인 물, 그 물을 달라고 이렇게 말한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 때까지는 그 여지가 도무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세계를 이해할 도리가 없죠 이해하지를 못하죠? 그렇습니다.
그런고로 그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그 물을 먹을 수 없죠? 그 물을 받아 마실 수 없습니다. 그 물을 받아 마실 수 없으면 그 물을 받아 마실 수 있을 때까지의 신행(神行)은 중단상태에 있다 그렇게 봐야 됩니다. 이제 기본구원은 그것에 좌우되지 않지만, 기본구원을 얻은 자로서 앞으로 영인 성장과 이성과 몸의 성화와 또 그 모든 구원 을 이뤄나가는데 있어서는 그 모든 면이 중단상태에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려면 예수님을 바로 알아야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거나, 그 분이 어떤 분인지를 알지 못하면 그 분과 실컷 대화를 하고도 그 분의 대화는 전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분의 대화를 알 리가 있나요? 세계가 다른 데. 말은 똑같은 말인데 대상이 다릅니다 "그 물" 그랬지만 완전히 세계가 다르잖아요? 예수님께서 만일 사마리아 여자에게 반문하신다고 하면, "네가 "그 물"이라고 그랬는데 그 물은 어떤 물을 말하느냐?" "예, 한번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 않고 영원히 그 속에서 솟아나는 그 물" 말입니다. " "그래?" 거기까지는 대답을 하는데, 자기가 들은 그대로 대답을 할거라 이 말이요. 그런데 그 다음에 가서 예수님께서 "그러면 "그 물"이 물질의 물을 말 하느냐, 비물질의 물을 말하느냐?" 할 때에 확실한 대답이 나을 까요, 안 나올까요? 그 여자가 대답을 했을까요? 못했을 것입니다.
자, 그러면 성경을 봐요. 성경에 보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15절에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을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자 거기에 확 실하게 나와 있죠? 그 물을 마시고 나서 이제는 물 길러 오는 것 안 하게 해 달라고 한 것을 보면, 이 여자가 예수님께 달라 고 말한 "그 물"은 무슨 물입니까? 물질의 물입니까, 비 물질의 물입니까? 물질적인 물을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말로 하라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은 그대로 하지만, 그 생각이 거기에 미칠 수가 없습니다 미치지를 못한다 이 말이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입이 있어서 들은 대로 말은 전하지만, 그 분으로부터 말을 받아서 말은 전하고, 그 분과 나와 대화도 하고 이렇게 하지만, 우리의 경우가 마치 이 여인의 처지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물질 세계의 것을 말하고 있고 그 여자는 물질의 것을 말하고 있으니 서로 대화가 되는 것 같은데 실은 대화가 안되죠. 그러나 그 여자는 지금 대화가 된다고 느끼고 있습니까, 대화가 전혀 안 된다고 느끼고 있습니까? 자기는 자 기 나름대로 예수님과 대화한다고 하고 있어요, 대화가 안 된다 고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 여자는 대화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건 네가 도저히 못 알아듣고 있구나" 대 화를 하면서도 예수님이 "너는 대화의 상대가 안 된다. " 하십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자기 입장에서는 대화의 상대가 된다는 저요 이와 똑같이 오늘 우리가 우리 나름대로 성경을 읽어놓고, 뭐 제목을 적어놓고, 뭐 어쩌구 저쩌구 합니다. 그래, 예수님께서 옆에서 가만히 들어보시면서 "잘 놀아난다. " 할거라 이 말이요.
그것을 보면 전혀 세계가 다른 그런 말을 지긍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이제 "영광"이라는 말도 쓰곤 하는데, 주님께서 우리로 인하여 물론 영광 받기를 원하시죠. 그래서 "주님께서 영광 받기를 원하신다‥‥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려야 된다" 그러죠? 우리는 영광을 돌려야 되고 하나님은 영광 받기를 원하신다고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인가? 그것을 지금 우리가 말은 척척 잘 합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가 유창하게 말을 하고 나가면, "잘 놀아난다. " 그러실 거라 이 말이 요. "네가 내게 영광을 돌려라!"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무슨 말이죠? "네가 좀 탁월해 져라!" 이 말이죠? "네가 탁월해져 라!,""네가 좀 유명해져라!" 이 말이요.
예를 들어 사무엘이 그렇게 자라났지만 사무엘이 나중에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을 때에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사무엘로 인해서 영광을 받았습니까? 영광을 받았죠. 그러면 한나가 성공 했습니까, 사무엘이 성공했습니까? 사무엘의 성공을 위해서 한 나가 그렇게 애써 길렀더니, 그 어머니의 의사를 거절하지 않고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사무엘이 성공했습니다. 성공은 사무엘이 하고, 탁월해지기는 사무엘이 탁월해 졌는데, 그 어머니가 영광을 받았다 이 말이요 다윗도 마찬가지죠. 다윗도 벌판에서 양이나 치고 이렇게 하던 자가 이스라엘의 대왕이 되었을 때에 이새에게는 영광이 된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은 우리 인간으로부터 영광만 받기를 좋아하신다 그렇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너는 내게 영광을 돌리라."는 그 말씀을 우리가 깊이 듣고 한 단계 더 넘어서 이렇게 듣게 되면, "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탁월해 지기를 원하셔 서 저런 말씀을 하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는 개인적으로 굳이 그렇게 탁월해 지고 싶지 않다 하더라도 "내가 탁월해지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욕이 되고, 하나님 앞에 망신이 되니 반드시 탁월해 져야 하겠구나." 하게 됩니다.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려면, 찬송을 잘 부른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느냐, 사람이 많이 모였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느냐? 예, 우리 인간 생각으로는 "야! 그 집회에 사람 이 굉장히 많이 모였더라. 하나님께서 큰 영광을 받았을 것이 다" 뭐, "부흥회 감사헌금이 얼마나 나왔다. 하나님 앞에 큰 영 광이 되었을 것이다. " 또 "죽은 자가 살아났다. 하나님 앞에 큰 영광이 되었을 것이다. " "병든 자가 뭐 몇 명이 나았다. 큰 영광 이 될 것이다. " 이렇게 생각하고 말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런 것이 반드시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그것을 잘 한다 해도 하나님의 자녀인 내가 바로 성장해서 모세나 에스더나 다니엘이나 이런 분들과 같이 이렇게 뛰어나고 탁월한 존재가 되 지 못하면, 영적 세계와 신앙의 세계에서 탁월한 존재가 되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어떤 짓을 해도 영광이 되지 않는다는 것 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내가 어떤 큰 일을 해야 하나님 앞에 큰 영광이 되느냐? 아무리 자기가 큰 일을 해도 하나님 앞에 영광이 안 될 수 있습니다. 가령 내가 한 달 동안 나가서 돈을 수천 억을 벌었습니다. 무슨 짓을 했든지간에 돈을 수천 억을 벌어 왔다고 하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될까요? 반드시 영광이 된다고 말하기는 어렵죠 그러니까 수천 억을 번 그것보다는 하나님의 성품대로 바로 만들어지는 이것이 하나님 앞에 영광이라는 것을 알 아야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 속에 영웅에 되려고 하는 허영심, 영웅심, 명예 영광심, 이런 것부터 뽑아놓고 자기 하나 바로 만들어지는 것, 이것을 우리가 붙잡고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내가 올바른 사람으로 만들어지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영광은커녕 도리어 욕이 되고, 수치가 되고, 가는 곳마다 하나님 앞에 욕과 수치만 돌려 놓고 만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런 뜻에서 역사적인 인자, 이면적인 인지 성자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역사적인 성자에 대해서 알고, 이 면적으로는 성자이신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단계 한 단계 체계적으로 알면서 역 사적인 인자는 이러하신데, 그 이면에 이면적인 인자 성자이신 것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하셨나 하는 짓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금번에 이번 추석명절을 기해서 다른 데 시간을 보내 . 젓보다 이 예수를 바로 아는 데 시간을 보내고자 합니다. 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예수를 바로 알자, 좀 더 알자는 것입니다. "바로 알자!" 하면 또 교만이 될까봐 그러는데 그럼 푹도 바로 알고자 원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나만 바로 카르친다. " 하면 교만이지만, "예수를 바로 알자!" 하는 것은 교만이 아니고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예수를 바로 알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피차에 기도해야 됩니다. 누구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예수를 바로 알면 뭐하고, 바로 알지 못하면 어떠냐? 열심히만 믿으면 된다. " 이것은 안 됩니다. 열심히 믿기 전에 바로 알고 믿자 이 말입니다. 열심히 믿는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신앙인으로 인정하시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의 구원은 중단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첫째는 신자(神子)께서 인자(人子)가 되신 성자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신자라 했는데, 성경에 우리가 몇 군데 보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 34절에도 보면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이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그렇게 세례요한이 말했죠. 49절에는 나다나엘이 "당신은 하나님 의 아들"이라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신자(神子)라 그 말이죠.
그럼 요한복음 1 : 1절에 보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랬죠? 그러니까 여기서 왜 말씀이라고 했느냐? 우리 한국말로는 이 성경보다 조금 앞서 번역된 것은 "도"라고 그랬습니다.
도라는 말과 말씀이라는 말과 우리 한국말로 한다고 하면 국어 사전적으로 보면 의미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도가 있으니" 한 것은 길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개역 성경에는 "말씀"이 라고 그랬고, 또 원어 성경에는 로고스라 그랬는데, 그러면 이 로고스란 말은 무슨 플라톤 철학에서 말하는 그 로고스라는 말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말씀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는 데, 이것은 특별한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데, 무엇인고 하니, 이제 신학적으로 말하면 제 2위의 하나님이라는 그런 뜻이고, 위 적으로 말한다고 하면 제 2위의 신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본체와 관계성을 말한다고 하면 신자(神子)라 그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계시니라."고 한 것입니다. "말씀이 계셨다"가 아니고 "계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하나님과 함께"라고 하는 것은 공간성도 가지고 있지만 시간성과 공간성의 복합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함께" 라고 할 때는, 함께 났 다고 할 때에 그 시간성으로 볼 때는 한날 한시에 동시에 났다 는 그런 뜻도 있고, 또 "그 사람이 함께"라고 할 때에는 공간성 을 말하고 이렇게 "함께"라는 그 뜻을 공간성으로도 시간성으로 도 말할 수 있는데, 여기 있는 이 "함께"라는 말씀은 두 가지 뜻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 시라" "곧 하나님이시라." 하는 이 말은 이제 하나님 본체를 말 하는 것이고, 이 분도 곧 하나님이시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1절에서 제 2위이신 성자 하나님을 두고 여기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1절에는 "말씀"이라 했고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했는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는 것을 보면, 말씀으로 계시던 그 하나님이 육신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그 지식을 배우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또 이번에 제 2위이신 키 그 하나님, 말씀으로 계시던 그 하나님이 육신이 되었다는 그런 . 신학적 지식을 이 시간에 강의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신학생들에게 신학을 가르칠 때 필요한 것입니다. 말씀이 어떤 순서를 밟아 가지고 이렇게 육신이 되었다는 그 사실에 대하여 여러분들이 알면 물론 모르는 것 보다야 지식적으로 났죠 그러나 그것은 몰라도 괜찮습니다. 그것은 몰라도 괜찮은데, 제가 말씀드리려는 이것은 반드시 알아야 하겠다 이 말입니다.
말씀으로 계시던 제 2위의 신자(神子)께서 말씀으로 계실 때는 분명히 신자(神子)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신자 아닙니까? 신자죠? 그러면 신자이신 그 신자께서 어디 계셨다고요?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그랬죠? 그분의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 신자였습니다. 신자로서 쫓겨났습니까? 아니죠.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 하면, 그가 어디 계셨을까요?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그 세계는 무한한 영광의 세계입니까? 예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神子)가 인자(人子)되고 싶어하는 그런 경우가 있을까요? 이성을 가진 존재요 가치판단력을 가진 존재라면 어느 누구도 신자로 있으면서 인자가 되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제 우리가 몇 가지 알아야 될 것은 신자이신 그분이 계시던 그곳이 시간적으로 지루하고 모든 환경적으로 고통스럽고 고독하고 부족함이 있는 이런 세계였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분의 신분이 신자라 하면 인격적 존재로서는 최고의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그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 하는 것은 물론 물질을 말한다고 하면 공간성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말은 어떤 뜻을 지니는고 하니, 그가 계신곳의 성격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 하니까, 무슨 뭐 사랑방에 계셨다 뭐 안방에 계셨다 하는 이런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무슨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격적으로 가장 만족하고 즐겁고 영광스럽고 존귀의 극치에 있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자, 우리가 또 이렇게 한번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그곳에 뭐 부족한 것이 있었을까요? 좀 더 시설이 좋았으면 하는 그런 것이 있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상태. 완전에 도달했을까요, 완전에서 0.1%라도 부족함이 있을까요? 예, 완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던 그 천국은 이미 완전 세계입니다. 완전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완전이라고 하는 것은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발전할 수 없는 아주 극치 이른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런 세계에 계시던 신자(神子)로서 그런 세계에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분이 무엇이 부족해서 굳이 인자가 되려고 하셨던가 하는 것을 우리가 한번 짚고 넘어 가보자 이 말입니다.
(본설교는 고 김석준 목사님의 설교를 김성봉 목사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바로 알자"라는 책으로 허락을 받아서 출간한 책의 제 1장 절반을 부분적으로 올린 것입니다.
책 전체와 그 내용을 보시기를 원하시면 나눔과 섬김 출판사(전화: 02-573-3298로 연락하시면 이 책 외에도 김석준 목사님의 책을 구입해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