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기독교를 마구 짓밟는 과학의 호언장담, 유구무언으로 고개 숙인 기독교
이 책은, 과학의 발전 때문에 원래의 기독교는 분해되어 새로운 기독교로 조립되어야 한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라는 이름은 그대로 가지고 있되 지금까지 주장하던 기독교의 가르침은 현대 과학 앞에서 전부 폐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책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천문학, 양자물리학, 진화론, 유전학과 신경과학이 새롭게 밝혀내고 개발하는 기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분야의 과학에 대하여 아직까지 어떤 신학자 어떤 교단에서도 유구무언입니다. 이
책은 기독교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이미 승패는 완연하게 판명났다는 자신감에서 기독교에게 현실 인식을 하고 과학이 가는 앞선 길을 조심스럽게 따라 오라고 달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과학에게 너무 앞서 가면 어찌 따라 가겠느냐고 울고 매달리고 있는 것이 현 모습입니다. 현재 출간되는 모든 기독교 서적과 논문들이 이렇게 한결같이 떼를 쓰고 있는 것은, 그들이 과학과 세상을 그렇게 우상으로 삼고 열심히 가지려고 노력한 댓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종으로 던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잊음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잊었습니다. 생명없는 기독교가 세상을 이길 리야 있겠습니까?
백영희신앙노선!
그 길을 이곳에서 집중 연구하는 것은, 이 시대 교회가 잊어버린 하나님을 그는 평생 모시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모든 교회를 하나님께서는 다 잊어버리시고 그들이 좋아하던 세상 속으로 그들을 던지셨으나, 이 신앙노선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위치와 능력으로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진정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모신 교회라면, 다음에 주장하는 과학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웃을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교회와 신앙노선은 "백영희신앙노선" 외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입니다. 혹 또 다른 곳도 그런 곳이 있으면 진정 알아보고 싶습니다.
오늘 과학의 호언장담은 바울과 어거스틴, 루터와 칼빈의 신학으로도 맞서 대답할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백목사님이 그들보다 신앙에 앞서 있다고 섣불리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분들은 그 당시 세상에게 오늘 백목사님의 위치에서 오늘 세상을 향해 호령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세상이 호언장담하는 주장에 대하여는 그분들은 자기 시대가 아님으로 하나님께서 오늘의 과학을 호령할 수 있는 미래의 교리와 깨달음은 주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백목사님은 오늘 현재에 필요한 말씀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고 그래서 오늘 세상을 향해 "백영희목회설교록"을 통해 외치고 있습니다.
"폭풍아 불어라!", 노암은 우스워서 미소 지으며 폭풍을 비웃습니다.
"폭우야 부어라!", 대해는 쏟아붓는 그 폭우를 삼키며 배를 채웁니다.
"흑암아 외치라!", 눈꼽만한 반디불은 작은 빛 하나로 우주의 흑암을 놀이터로 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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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3.30. 조선일보 인용)
자연에서의 하느님 역할은 무엇일까
과학이 종교를 만날때 / 이언 바버 지음 / 김영사
◆ 사진설명 : `그래도 지구는 돈다` 지동설을 주장한 최목으로 종교재판을 받는 갈릴레이.
바야흐로 복제인간이 옆집에 이사를 오고 탐탁지 않은 유전자를 손쉽게 갈아 끼울 수 있는 시대가 우리들 코앞으로 다가왔다. 우리의 정신과 마음도 곧 두뇌의 물질작용으로 일목요연하게 설명될 지 모른다. 과학 그 중에서도 생명과학의 눈부신 발전이 새로운 세계관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과학을 외면하고는 도저히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점에서는 종교도 결코 예외일 수 없다. 물리학자 다이슨이 지적한대로 인류의 미래가 과학과 종교에 고루 달려 있다면 두 분야는 서로에 대해 충분히 알 의무가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두 분야는 일방적인 대남, 대북 방송으로 너무나 많은 시간을 허비한 것이 사실이다.
이언 바버는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관한 연구의 한복판에 서 있는 학자다. 그는 이 책에서 천문학, 양자물리학, 진화론, 유전학과 신경과학 등 현대과학과 기독교의 관계를 이미 오래 전 그 자신이 제안하여 이제는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분류체계인 갈등, 독립, 대화, 그리고 통합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마지막 장에서는 보다 일반적이고 구체적인 문제인 ‘자연에서의 하느님의 역할’에 대해 논의한다. 종교와 과학의 만남을 기대하는 모든 이들에게 입문서로서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책이다. 하지만 저자가 원래 핵물리학자였기에 그런지는 모르지만, 이 책은 과학자들에게 종교를 알리는 것보다는 종교인들에게 과학의 본질을 이해시키는 데 더 크게 기여할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제목은 차라리 ‘종교가 과학을 만날 때’이었어도 좋았으리라.
인간은 과학적 동물이다. 인간의 두뇌는 엄연한 진화의 산물이고 과학은 바로 그 비범한 두뇌의 산물이다. 인간은 그 어느 동물보다도 훨씬 더 과학적으로 사고하고 문제를 풀 줄 알았기 때문에 오늘날 이 지구를 호령하는 ‘만물의 영장’이 된 것이다. 우리가 예전에 비해 더 행복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우리 삶의 수준이 한결 높아졌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다. 오늘날 중산층이 누리는 생활수준이 웬만한 옛날 왕족의 수준보다 높은 것만 봐도 쉽게 수긍이 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과학의 발달은 왜 늘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일까. 코페르니쿠스, 다윈, 뵐러, 아인슈타인의 발견들이 각각 그 자체로 가공할 파괴력을 지닌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무지와 오해가 더 큰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종교와 과학이 만날 때 나는 어쩔 수 없이 종교가 몇 발짝 더 떼어놓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종교가 변하는 속도보다 과학이 변하는 속도가 훨씬 빠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긍정적인 차원에서는 미국 작가 허바드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죄인들을 구원하지만 과학은 죄인이 만들어지지 않게 할 수 있다.”
최재천·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2002/03/29 1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