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십일조 신앙을 가집시다
(창세기 2 : 8 -17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 : 10)
에덴동산이란 [행복]과 [낙원]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고 사람을 낙원으로 이끄신 것입니다. 창2: l1 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하셨읍니다. 이 말씀은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아담을 인도하여 에덴 동산에 두셨습니다. 사람이 에덴 동산에 들어간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요, 결코 아담의 공로나 노력으로 된 것은 아니었읍니다. 에덴 동산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축복이었읍니다. 에덴 동산은 하나님이 만드신 동산이요, 오직 은혜로만 들어갈 수 있는 터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이 동산을 다스리시며 지키도록 하셨고 또 명령하시기를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 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읍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는 인간에게 주어진 최초의 금령이요, 이것을 바로 풀게 되면 낙원에서 행복하게 살 것이요, 풀지 못하면 불행하게 되는 것이었읍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이 금령을 지키지 못하므로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질문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셨읍니까? 인간의 타락과 죄가 선악과를 만드신 하나님에게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있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을 악에 빠지도록 시험하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에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윤리적인 존재요, 자유의지의 결단을 지닌 인격적인 존재였읍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의지로 악을 택한 것이 불행이었읍니다. 아담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 하므로 악을 범했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성도가 에덴동산에서 신앙생활을 바로 하려면, 에덴이란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바로 하려면 항상 조심해야 할 선악과가 있읍니다. 시간이란 선악과가 있습니다. 우리는 첫 시간을 혹은 주일을 주님의 것으로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질이라는 선악과가 있습니다.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첫째, 십일조는 물질 선악과 입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서 선한 청지기가 무엇인가를 가르쳤읍니다.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읍니다. 이는 청지기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나의 것은 하나도 없읍니다. 시간도 물질도 생명도 자녀도 다 주의 것이요, 다만 우리는 선하게 관리할 책임이 있을 뿐이요, 위탁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올 때 아무 것도 가지고 온것이 없읍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시간도 하나님께 빌린 전세 기한이요, 물질도 다 받은 것이니 함부로 낭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청지기 사명을 주시면서 청지기 원리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셨읍니다. 그러므로 선한 청지기는 십일조를 하나님의 것으로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선악과를 먹음으로 에덴동산의 청지기 자격을 상실하듯이 십일조를 먹으면 물질 청지기로서 자격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질을 다스릴 권세를 잃고 물질의 노예가 되어 물질에 매여 사는 사람이 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여 저주를 받아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가시와 엉겅퀴가 앞뒤를 가로막는 고난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물질 세계에서 하나님의 주권의 표시는 십일조입니다. 에덴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였을때, 하나님은 "내가 먹지 말라 한 실과 나무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3 : l7)고 말씀하셨읍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한 결과로 얻은 저주입니다. 말라기 3장7-9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덕질 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덕질 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 하였읍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에덴 동산의 저주와 말라기 저주가 똑 같이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한 데서 온 것임을 알 수가 있읍니다. 에덴 동산의 저주는 선악과를 도적질함으로 왔고 말라기의 저주는 십일조를 도적질함으로 온 것입니다. 이와같이 십일조가 하나님의 주권의 표시임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소유임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사탄은 인간들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게 함으로 저주를 받게 만들고 있읍니다.
둘째, 십일조는 아브라함의 신앙고백 이었읍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십일조 생활을 하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십일조는 유대 민족의 율법 시대에 받은 것으로서 오늘날 은혜시대에는 필요없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읍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율법이 아닙니다. 창세기 l4장l8절에 보면,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나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제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라함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하였읍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렸던 멜기세덱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표상이요 아브라함은 예수님에게 십일조를 처음으로 바친 조상입니다. 히브리서 7장l-3에 보면 이떻게 기록되어 있읍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전쟁에서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 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을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하였읍니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린 멜기세덱은 예수님의 모형이었읍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하였읍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입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준 것은 예수님이 성찬을 베푼 모형이었읍니다. 성찬을 받고 신앙고백으로 십일조를 드렸으니 십일조는 신앙 고백의 확증입니다.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모범적으로 바치신 분이었읍니다. 마태복음 23장23절에 보면,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요한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예수님은 친히 십일조에 모범을 보이셨읍니다.
셋째. 왜 하나님은 십일조의 물질을 원하실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일조를 원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물질 세계의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모든 소유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순종함으로 물질보다 크신 하나님을 섬기며 물질을 바르게 다스림으로 축복을 받아 더 잘 살게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읍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과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우주의 창조주입니다. 시편 50 : 9-I2절에,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 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산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하였읍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가난하심으로 물질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부요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고 소유의 주인되심을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더 많은 축복을 주시라고 십일조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이 있읍니다.
① 하늘 문이 열립니다. (말3 : 1o)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신앙인의 축복은 하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천국은 믿음으로 하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베드로가 고백할 때 그에게 천국 열쇠를 준다고 하였읍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받을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다고 하였읍니다. 성도는 하늘 문을 여는 3대 열쇠가 있읍니다. 믿음으로 천국 하늘 문이 열리며, 기도로 하늘 문이 열려 성령을 선물로 받고, 십일조는 하늘 문을 열어 물질 축복을 받게 됩니다. 심는대로 거두게 하 시는 하나님은 믿음을 심는 자에게 천국을, 기도를 심는 자에게는 성령을, 십일조를 심는 자에게는 물질로 거두게 하십니다.
② 황충을 금하여 주십니다. (말3 : 11)
황충이란? [먹는 자]를 뜻합니다. 농사를 지어 주인이 먹어야 할 텐데 먹어서는 안될 벌레가 먹는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여 모으는 것도 중요하나 황충이 없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은 열심히 하였으나 회사에 황충이 생겨 망한 사람이 있읍니다. 어떤 가정은 행복한 결혼을 시작하였는데 애정 생활에 황충이 생겨 가정이 파탄하는 사람이 있읍니다. 어떤 분은 건강하였는데 황충(질병)이 먹어 죽게 되었읍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 나 회사나 국가나 황충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셨읍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자에게는 황충(먹는 자)을 금하여 주신다고 하였읍니다.
③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말3 : 11)
일년 동안 땀 흘려 농사를 지었어도 열매를 거두기 전에 태풍이나 병충해로 떨어지면 헛수고가 됩니다.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인간의 수명도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인데 일찍 병이나 사고로 죽는 것은 기한 전에 떨어짐이요, 학교에 입학한 학생이 졸업하지 못하고 퇴학당하는 일, 결혼하여 조금 살다가 이혼하는 것, 임신 한 여자가 해산하기 전에 낙태하는 것, 계를 들었는데 중도에 파장하는 것, 사업을 시작하여 중도에 잘 되다가 망하는 것, 모두 기한 전에 떨어지는 불행입니다. 기한 전에 떨어지는 최고의 불행은 신앙 기한이 하늘나라에 까지 차지 못하고 중간에 타락해 버리는 일입니다. 이런 신자는 참 불행한 자들입니다. 땅에서 여러 모양으로 기한 전에 떨어지는 불행이 있어도 신앙 기한만은 떨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 처럼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는 고백처럼 신앙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④ 땅이 아름다워집니다. (말3 : 11)
십일조 신앙은 심령 (밭-땅)이 아름답고, 몸 (흙으로 만들었으니) 이 건강하고 아름답고, 부요한 축복을 받아 산야가 푸르고 기름지며 강물이 흐르고 국로가 개발되니 아름다워집니다, 전 세계 십일조하는 국가는 심령적으로 양심적인 나라, 건강한 나라, 국토가 아름다운 나라들입니다. 십일조 모르는 나라는 미개하고 추한 나라들입니다.
⑤ 열방이 복되다 합니다. (말3. 12)
믿음으로 구원 는 것과, 영생과 천국이 있다는 사실, 기도하므로 신비한 은사의 체험은 불신자들이 알 수 없읍니다. 그러나, 십일조 신앙으로 범사가 잘 되는 물질의 축복은 눈에 보이므로 남들이 복 받았다 말합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가장 복 받았다고 부러워하는 나라는 미국입니다. 미국은 청교도의 십일조 신앙으로 세워진 나라입니다. 한국이 오늘과 같이 경제적인 성장도 한국교회의 십일조 신앙이 형성되면서부터 받은 축복인 줄로 믿습니다.
넷째, 십일조 생활을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소속된 교회에 바쳐야 합니다. (14:19)
아브라함이 떡과 포도주를 받은 멜기시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처럼 말씀과 은혜를 받고 있는 제단에 바쳐야 합니다. 십일조는 자기 임의로 사용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법이니 다른 헌금(감사, 월정, 주일, 특별, 구역, 건축)과는 다릅니다. 십일조를 인간적인 생각으로 약한 제단이나 신학생이나 구제 사업이나 선교 단체에 자기 임의로 드리는 것은 자기 의사가 앞선 것이니 이는 신앙이 병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가 시무하는 교회에서 한 형제가 십일조를 본 제단에 바치는 것보다는 시골 가난한 교회에 보내는 것이 좋겠다 생각하고 자기 임의로 나누어 얼마동안 하였읍니다. 합리적인 이론이었읍니다. 결국은 교만해지고 자기의가 바리새인 처럼 앞서고 교회가 멀어지고 사업조차어렵읍니다.
온전히 바쳐야 합니다. (말 3 " 1o)
십일조는 온전히 해야 합니다. 수입의 십분의 일을 드려야 합니다. 시내 모 교회에서는 수입의 십분의 일을 주일 헌금, 감사헌금, 월정 헌금으로 나누어 바치면서 십일조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읍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생활이 어려워서 전 수입의 십분의 일 이상 드릴 수 없다면 십일조로 한번만 바치면 됩니다. 십일조는 십일조의 축복이 있 으므로 온전히 바쳐야 할 것입니다.
의와, 인과, 信이 있어야 합니다. (마23 23)
예수님은 바리새인처럼 사람 앞에 바치려는 그릇된 정신을 버리라고 했읍니다. 기분 좋으면 바치고, 알아주면 바치고, 기분 나쁘면 안 바치는 인위적인 인간의 태도를 버리라 했읍니다. 또 대인 관계에서 남의 것 사기하고 도적질하고 그리고 노동자 임금을 착취하면서 십일조 하는 것은 인의 정신이 없는 것이요, 십일조 바친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지적했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끝까지 십일조를 하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십일조 신앙은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의 신앙고백의 확증입니다. 말라기 선지는 십일조의 구절구절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말3 : 7, Io, l1, l3)고 강조하였읍니다 십일조를 바치게 되면 열번 놀라게 된다고 합니다. 제일 처음 뗄려고 할 때 그 마음이 칼로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느끼고 놀란다. 십일조를 하니 언제부터인가 십일조 드리는 일이 조금도 부담이 되지 않고 어렵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란다. 십분의 일을 바치고 나머지 아홉을 가지고 살 때에 그 돈을 올바른 판단과 놀라운 지혜로 살아가는 것을 보고 놀란다. 내가 좀더 일찌기 좋은 십일조 생활을 하지 않았던가 하는 것으로 놀란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활이 윤택하여지고 사람들이 자기를 가르켜 부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놀라게 된다. 생활이 기름져 가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된다고 합니다. 물질을 주신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침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온전케 해야 합니다. 십일조는 물질의 선악과입니다. 십일조는 먹지 말아야 합니다. 십일조는 물질 축복의 종자입니다. 농부는 흉년이 들어도 종자를 먹지않습니다. 물질에 대한 청지기로서의 자격은 십일조를 물질 선악과로 대할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십일조 안 바쳐도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신앙은 아닙니다. 십일조 때문에 믿음을 버리지는 마십시오. 십일조 신앙으로 크신 축복 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