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호주선교부의 '거창지부'. [사진] [한국교회사]
분류: 교회사- 한국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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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레(Macrae)목사님은 1910년 9월 한국에 도착하여 진주에 2년 있다가, 그 후 1912년 5월 자신이 이미 순회설교를 하고 있던 거창에 새 지부를 개소. 그는 곧 새로 도착한 켈리목사 부부와 합류. 그들은 해외선교위원회가 설립한 집에 거주. 그러나 맥레목사님은 한국식 집을 짓는 것을 제안했으며, 해외선교위원회는 두번째 거주지를 세우는 것에 동의, 그는 이 집으로 그의 신부인 홀양을 데려왔고 그와 1915년 1월 일본에서 결혼, 그해 중반에 맥레목사님은 창신학교와 그 지역의 교회를 담당하게 되어 마산으로 이주.
거창지부가 처음 개소되었을 때 장로교여자선교회는 거창에 아무 선교사도 보내지 않았으나 당시 거창지부에서는 한국의 권서 여자분들이 여성활동을 하고 있었고 그후 1914년 새 선교사들인 에베리양, 스키너양이 거창에 배치, 에베리양은 여성들의 복음전도 업무를 맡았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진주에서 1년 봉사 후 휴가차 귀국하고 다시 돌아오지 못함. 스키너양은 초등학교를 세우려고 계획했으나 새로운 총독부 규제로 등록신청이 불가능하여 강습소라고 하는 비공인 학교로 만족. 이 강습소는 이전에 공립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던 많은 소녀들의 교육적 욕구를 충족시킴. 더 중요한 것은 비록 교육과정상 허용되지는 않았지만, 정규학교 교육내용을 가르치기 전에 매일 성경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다는 점.
1916년 9월 스키너양은 마산으로 옮겨가고 그 후임에 스코트양이 거창으로 부임, 그는 그후 23년간 거창지부에서 교육활동, 순회선교활동 등을 하여 "거창의 감독자"라 일컬음. 1961년 멜버른에서 사망. 켈리부부가 사임, 1916년 도착한 토마스목사님 부부가 1922년 사임, 토마스목사님과 켈리목사님은 지부의 전도사업을 담당하고 토마스부인은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많은 공헌을 하였고 교육활동도 담당.
그후 거창지부에는 코트렐목사님 부부가 1936-1938년 2년 거주한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여성선교사가 배치. 일부 지부감독은 주로 진주에서 커닝햄목사님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지부의 책임은 대부분 여성 선교사들 즉 1940년까지 스코트양, 1919-1921년 태트양, 1921-1922년 클라크양, 1922-1929년 맥카거양, 1929-1940년 던양, 1년동안 학교와 유치원에 많은 도움을 준 엘리스양 등에게 주어짐.
1923년 3가지 자격증을 소유한 간호사 딕슨양이 유아복지와 보건진료를 발전시키기 위해 거창에 전임으로 임명, 거창에서 여성활동과 아동활동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1929년에는 교회의 급격한 성장이 보고되었으며 스코트양은 "한 해를 돌이켜 보면 여러 분야에서 많은 사업을 시작하고 완료했지만 불행하게도 일꾼의 부족으로 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지적, 1930년에는 아동활동에 상당한 진전이 있었고 대부분의 교사가 기독교계 상급학생들로 구성되는 하계학교에는 1천명 이상이 등록, 1935년에는 정치적 상황 때문에 선교사의 순회전도활동은 없었으나 거창지부에서 개최한 성경학급에는 300명의 여성이 참석했고 마을 성경학교에는 약 800명의 아동이 등록
1938년 새로운 교회가 거창에 세워졌고 장로교여자선교회 건물들은 수리, 신사참배 정책은 한동안 강요되지는 않았으나 그 정책을 준수하도록 하는 압력은 계속.그후 아동복지와 건강진료활동은 선교회와는 별개의 주요사업이 되었고 1935년부터 또다시 정치적 간섭이 증가. 딕슨양은 처음부터 낡은 건물과 부족한 장비로 운영했으나 1940년 9246엔의 비용으로 전부터 계획해왔던 훌륭한 진료소가 건립. 그러나 이 중요한 사회사업은 1941년 4월 끝이 나고 건물은 폐쇄되고 선교사는 귀국.
1947년 전쟁이 끝난 뒤 한국에 다시 온 던(Dunn)양은 6.25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일본으로 건너가 1952년 귀국할 때까지 한국인들과 같이 일했고 그후 그는 1958년 은퇴할 때까지 순회전도활동과 아울러 지역의 성경학급과 성경학교에서 가르쳤으며 1923년부터 한국에서 봉사했고 한국인과 동료 선교사들로부터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음. 1940년말 통계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거창지부에는 3명의 전임목사님, 4개의 조직교회, 26개의 불완전하게 조직된 교회 2251명의 교인이 존재.
1915년 진주에서 선교사회의 (앞 2선, 좌 4번. 맹호은선교사: 거창지방에 많은 활동을 남긴 분

1923.12.25 진주에서 선교사회의 (뒷줄, 좌 2번, 전은혜선교사: 봉산교인을 첫 전도했고 개명 원기동교회로 활동이 많았던 분

"거창지부 호주선교사 사택.
거창읍 죽전 언덕에 위치하였고, 바로 옆에 명덕학교.
선교사사택은 거창고등학교 소속 샛별초등학교 교사로 사용되다가 화재로 없어졌고
명덕학교는 거창여중학교 교사로 사용되다 현재 없어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