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호주선교부의 부산 경남지방 활동 약사 [사진] [한국교회사]
분류: 교회사- 한국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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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국선교 약사
1884년, 중국에 있던 미북장로교의 의료선교사 알렌이 서울에 들어와 활동
1885년, 4월에 장로교 언더우드, 5월에 스크랜튼, 6월에 미감리교 아펜젤러목사님들 입국
2.호주선교 약사
1885년, 11월 최초의 영국선교사 월페가 영국과 호주인들의 후원으로 부산 도착, 90년 철수
1889년, 10월 호주 데이비스목사는 부산의 선교사 철수 소식을 접하고, 선교회 설립을 위해 입국
1891년, 10월 데이비스선교사가 1890.5.에 부산에서 병사하게 되자, 3인의 선교사 재파송
맥케이 부부, 멘지 양, 페리 양이 부산에 도착
1913년, 미북장로교에서 부산 경남지역을 호주선교부로 완전 분할하는데 동의
3.호주선교부의 지소 설립
1989년, 부산지부
1905년, 진주지부 (커렐: Currell)
1911년, 마산지부
1913년, 통영지부
1913년, 거창지부 (맥레: Macrae)
부산진지부: 동래 기장 울산 언양 울릉도 양산 김해 밀양 영산 창녕
마산지부: 함안 창원 칠원
통영지부: 거제용남 고성 진해
진주지부: 진주지구 사천 곤양 하동 남해 단성 삼가 산청 의령
거창지부: 거창지구 거창 안의 함양 합천 초계
4.순회설교로 시골 곳곳마다 전도와 교회 개척
선교사는 적었고 전도할 지역은 너무도 멀고 험하여 한 곳을 전임하는 목회 선교보다는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설교하고 말씀을 전하는 순회설교제도로 초창기 선교는 그 방법을 찾음. 개별적으로 협조하는 사람을 데리거나 성경매서인과 함께 적어도 하루 한곳이 예배를 담당하도록 계획하고 추진. 교회의 여러 문제를 지도하고 새로운 직책자를 세우며 학습 세례 성찬식도 집례.
여성선교사들은 남자들의 접근이 어려웠던 안방에까지 들어가서 전도 교육 상담 등을 하며 적절하게 그 역할. 1941년까지 한국인 목사는 진주교회 담임목사님과 거창읍교회 주남선목사님 뿐.
5.진주성경학원
1911년, 1월에 각 지부단위에 성경학교 설립을 계획
1913년, 11월에 진주에 성경공부 자원봉사자 학급에 선교사 4명 한국인 지도자 3명으로 교수진
을 임명하고 5년간의 교과와 함께 여자성경학교의 규율도 제정
1913년, 5-6월에 진주에서 15명이 참석하여 여자성경학교 개최
남자성경학교는 부산과 합류가 추진되다가 결국 진주로 정착
여자성경학교가 남자성경학교보다 초기에는 활발
학생등록상황
진주성경학원(남자) 여자성경학원
1927년 46명
1930년 28명 (흉년) 1930년 44명
1931년 46명
1932년 55명
두 성경학원은 모두 1930년대 계속하여 성장하였고 수년동안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숫적인 면에서 우세. 진주의 시설은 훌륭하였고 학생들은 열심이었으며 식민당국의 간섭은 없었음. 특기할 점은, 성경학원이 초기 확고하게 수립된 후 등록하는 학생들의 평균연령은 현저하게 낮아졌고 성경학원에 오는 목적도 신학대학을 입학하거나 전도인 등에 종사하기 위한 일종의 "자격증"으로 인식하는 경향
1937년, 한국인 심문태목사님이 교장
1939년, 1월 식민당국의 탄압으로 학교가 복잡한 사태를 맞고 봄학기만 개학결정
남자성경학원 등록자는 소수 있었으나 여자학교는 숫자는 적어도 훌륭
1940년, 3월 28일 정식 해산. 학생들은 4월 9일에 경찰에 의하여 해산 조처
6.경남성경학원 건물
진주성경학원은 초기에는 교사가 특별하게 마련되지 않았으나 1929년, 신사참배 거부로 폐쇄된 최초의 선교회 학교였던 진주 광림학교 교사를 사용
7.신사참배문제
일본은 "신성한" 일본제국의 "신성한" 창건자에게 헌신하는 신도(神道)사당에의 참배를 애국적의무행위라고 가장하고 1910년부터 강요. 그러나 당시는 종교적인 예배의 자유가 1889년의 법령에 의해 보장되어 있었으나 1935년 평양에서부터 이 문제는 표면화. 1936년부터 총독부는 선교회 중등학교의 교직원과 학생들에게 신사의 기념식에 참가할 것을 요구하기에 이름.
이 문제에 관하여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은 각기 다른 입장. 일부는 한국 젊은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신사에 참배하는 것이 애국적 행위이지 종교적 행위가 아니므로 그 표면적 가치에서 받아들이고 이의 말 것을 주장. 미국장로회 학교들은 즉시 폐교, 감리교와 캐나다학교들은 총독부 지침을 준수하고 호주선교회는 1936년 2월 이 문제에 관한 선교회 정책을 명확히 하기 위해 특별회합하여 1939년 학교들이 폐교.
8.선교회의 철수
1940-1942년, 2차세계 대전으로 호주 선교사들은 심문 체포 투옥 격리수용 등을 통해 결국 본국으로 전원 철수.
해방후 호주선교부는 즉시 선교부를 복구하기 위해 대표단 파송을 원했으나 한국내 상황이 허락되지 않았고 1946년 1월 던칸양이 유엔구제부 복지사업가로 한국내 소식을 전하며 호주선교사들의 회귀를 이전 지역에서 원한다고 전하게 되어 1950년 남침으로 병원, 여학교, 성경학원, 5개 거주가옥으로 된 진주 구내가 완전히 파손되고 거창과 통영의 선교부 자산도 심하게 파손됨을 확인.
1947년 2월 현지 파악을 위해 방문했던 앤더슨목사님은 한국교회의 상태와 선교단체의 복귀필요성과 자산 상태를 보고하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갔고 커닝햄목사님도 6월에 귀국했으며 위더스양 던컨양 레가트양은 9월에 귀국이 결정
결국 호주선교부는 부산에 선교회 지부는 두기로 하지만 한국교회는 한국교회가 앞서 나가고 선교부는 후원위치를 유지키로 결정하며 호주선교부 소유의 상당한 자산을 한국내 교회로 활용되어 유지되도록 하여 1950년 선교회 철수 이전에 거창 통영 등 다른 3지부의 대부분 선교회 자산은 처분하였고 기관 활동에 종사하지 않기로 한 선교정책에 따라 부산에 있는 여학교 유치원 마산의 리알 중등학교는 경남노회로 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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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인용:〈한국의료선교사〉 고신대 이상규교수 강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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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장로교회는 1885년 영국 교회 선교회 소속 월푸 선교사가 조선을 방문하고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편지를 멜보른의 메칼트니 목사에게 보내어 그가 국내 국외 선교지에 게재한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아 호주 첫 선교사 데이비스가 1889년 10월 그의 누이 메리양과 함께 조선에 입국하였다. 1890년 3월 14일 자기 혼자 도보로 이동하여 4월 4일 금요일 부산 에 도착하여 천연두와 폐렴으로 이튿날 세상을 떠났다. 입국한지 6개월, 183일만이었다. 그의 불운한 죽음은 호주교회로 하여금 한국선교를 시작하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당시 부산에 있던 카나다 선교사 게일이 데이비스 죽음에 대해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그후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청년 연합회와 더불어 선교사 파송단체인 장로교 여선교회 연합회의 창립을 가능케 하였다. 청년 연합회는 제임스 맥카이 목사 부부를, 장로교 여선교사 연합회는 세명의 미혼 여 선교사 멘지스 양, 페리 양, 퍼셋 양, 등 다섯명의 호주 선교사들이 1891년 10월 12일 부산에 도착했다. 데이비스가 부산 땅을 밟은 지 꼭 2년만이었다. 외국인에 대한 불신 때문에 주택 얻기가 어려워 원래 창고였던 허술한 집을 구했지만 1892년 1월 27일 맥카이 목사 부인이 폐렴으로 사망하고 맥카이 목사도 건강이 좋지 않아 1892년 7월 4일 호주로 요양차 돌아갔다가 8월 3일 장로교 여선교회 연합회파송 여선교사인 무어양과 함께 다시 왔다.
맥카이 목사는 그해 10월 11일 일본 나가사끼 성고회 교회당에서 퍼셋양과 결혼하였다. 1893년 맥카이 목사는 부산 초량지역에 땅 600평을 구입하고 여 선교사들은 부산진지역에 집을 구해 그 두곳이 선교 거점이 되었다. 호주선교사들의 초기 사역은 전도와 교육, 자선 사업으로 특히 부녀자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였다.
▼ 말이나 나귀를 타고, 진주교회(당시 옥봉리교회)에 진주지부를 두고있던
선교사들이 거창을 포함 관할 지역을 전도나 순회설교를 다닐 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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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부경남의 호주선교부는 진주교회를 본부로 삼고 있었습니다.
진주교회 담임목회자들과 재임기간
이약신, 황철도목사님은 출옥성도로 고신의 지도자였고
윤인구목사님은 후에 부산대총장 연세대총장을 지내며 사회활동으로 나간 분이며
현 진주교회 목회자는 2000년도 합동측 총회장으로 국내최대교단의 교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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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강나룻배(진주 남강에 다리가 없었기에 나룻배로 건너는 모습)

▼ 해방 후 호주선교부가 철수하던 마지막 시기
1945년 해방후와 1950년 전쟁후 한국교회를 통한 구호물자는
당시 교회의 대단한 행사였으나 내부를 썩게하는 요인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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