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9. 한상동 - 출옥성도로 시작했다가 교권정치가로 마감한 [한국교회사]

일반자료      
쓰기 일반 자료 초기목록
분류별
자료보기
교리 이단, 신학 정치, 과학, 종교, 사회, 북한
교단 (합동, 고신, 개신, 기타) 교회사 (한국교회사, 세계교회사)
통일 (성경, 찬송가, 교단통일) 소식 (교계동정, 교계실상, 교계현실)

[교회사] 9. 한상동 - 출옥성도로 시작했다가 교권정치가로 마감한 [한국교회사]


분류: 교회사- 한국 교회사

===============================================



한상동(韓相東) 목사


1901년 7월 30일, 경남 김해군 명지면 명지에서 한치명씨와 배봉애 여사 사이에 넷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명지에서 염전을 하여 윤택하게 살았으나, 1904년 8월 20일 갑진년에 해일로 인하여 빈털터리가 되어, 신평으로 가서 가난하게 살게 되었다. 한목사는 6살 때, 오촌 당숙 한금출씨 댁에 양자로 갔다. 이곳에서 일찌기 한학을 수학하였고 열살 때엔 신식 학문을 배우던 다대 실용 학교에 입학을 하여 공부하였다. 4학년 때, 담임인 김성권 선생으로부터 나라 사랑의 애국심을 배웠고, 그 이후 일제에 대하여 반일 사상을 갖게 되었다.

1916년 2월 20일, 실용학교를 졸업하고, 동래 고보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일본 유학의 꿈에 부풀어 몇 차례 도일하였지만 양부의 끈질긴 추적을 되돌아오곤 하였다. 결국, 다대 실용 학교 교사로 취직을 하였다. 양부모를 잘 모시고 있다고 1919년 3월1일 독립만세 운동에 가담하려다가 실패하고, 1921년 5월 김차숙씨와 결혼을 하였다.

1924년 봄, 박창근 전도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때부터 열심히 교회에서 살았다. 기독교를 이해하지 못한 학부형들과 양부모의 소동으로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고, 결국에는 파양까지 받았다. 1927년 9월, 진주 광림 학교에 교사로 들어갔다. 이 학교는 호주 선교사가 경영하는 기독교 학교였다. 그러나 교직 생활 1년만에 사표를 내었다. 복음 전도에의 불길이 그 가슴을 태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8년 9월, 경성으로 올라가 피어선 고등 성경 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지식 수준이 낮은 성경 학교였기에 계속하지 못하고 복음 전도 일선에 나섰다.

1929년 3월, 경남 여전도회 후원으로 고성 학림에 개최전도를 시작하였다. 기도를 많이 하였다.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지만, 복음을 전하다가 하동 진교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중에 크게 교회가 부흥되었다. 그리고 그이 기도의 뜨거운 체험을 이곳 뒷산에서 가졌다. 1939년 봄, 평양 신학교에 입학을 하여 바른 신학을 배웠다. 졸업을 하고, 1938년 3월 경남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마산 문창 교회에서 청빙하였기에 문창 교회에 부임하였다. 한목사는 주기철 목사 후임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 설교는 은혜가 충만하였다, 교회는 은혜 중에 잘 지냈다. 그러나 일제의 신사 참배강요가 공공연히 밀려왔다.

경찰에서 와달라는 통지를 받고 나갔더니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못한다고 강력히 거절하자, 교회를 사면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결국 교회 당회와 재직회를 통하여 사면하도록 일제가 조종하였다. 교회를 사면하고 나온 한목사는 이때부터 신사 참배 반대 운동에 나섰다. 1938년 9월 9일, 예수교 장로회 제 27회 총회가 신사 참배를 가결하자, 일제는 반대하고 나선 목사나 장로, 평신도를 감금하고 검속하였다.

1941년 7월, 한상동 목사는 평양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평양 경찰서 유치장에서 하룻밤, 주기철 목사를 만났다. 주목사와 지상에서 만나는 마지막 시간을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이었다. 주기철 목사는 한상동 목사의 손목을 잡고 몹시 우는 것이었다. 80이 넘은 노모를 두고 먼저 가는 불효자라면서 우는 것이었다.
한목사는 그 밤을 주목사와 보내고 다음날, 형무소 다른 감방에 수감되었다. 옥에서 무수한 고난을 당하였다. 특히, 폐결핵이 재발되어 죽음문턱에 이르렀다.
하나님은 그에게 영음을 통하여 죽지 않고 살아 나갈 것을 말씀해 주셨다. 그는 출옥하면 세가지 일을 할 것을 기도하면서 준비하였다. 하나님께 서원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조국 광복의 날이 왔다 출옥하여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집회를 갖게 되었고, 산정현 교회 당회에서는 주기철 목사 후임으로 한목사를 담임 목사로 모시게 되었다. 1945년 3월, 모친 별세의 소식을 듣고, 집에 갔다 오겠다고 하고 월남 한 것이 38선은 그를 다시 이북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1946년 6월 23일, 주남선, 박윤선 목사와 손을 잡고 진해에서 신학강좌를 열었다. 성공리에 마쳐지자 고려 신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1946년 9월 20일, 일신 여학교에서 고려 신학교 개교 예배를 올리고, 개학을 하였다. 이렇게 고려 신학교를 시작하고, 만주에 계신 박형용 박사를 모셔 오게 하여 본격적으로 보수 신학교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시련도 많았고, 바람도 많았다. 그러나 고려 신학교는 고려 신학대학이 되었고, 지금은 고신 대학으로 발전되어 갔다.

1976년 1월 6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