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5. 최덕지 - 궁성요배까지 반대한 재건교회 지도자 [한국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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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5. 최덕지 - 궁성요배까지 반대한 재건교회 지도자 [한국교회사]


분류: 교회사- 한국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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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지(崔德智) 목사


한국 교회 재건 운동의 기수로 철저한 신앙 운동을 일으킨 여성 신앙가 최덕지. 일제의 신산 참배와 궁성 요배를 반대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형무소에서 6년의 옥고를 겪고 출옥하여 대한 예수교 재건교회를 세운 최덕지 여사는 대쪽같은 절개의 사람. 출옥 후, 한상동 목사 등과 함께 재건 운동을 시작하려 하였으나 의견의 차이로 따로 재건 운동.

최덕지 여사는 1901년 6월 25일, 통영군 항남동에서 최익문 씨와 김처녀 씨 사이에 무남 독녀로 출생. 부친 최익문 씨는 갓을 만드는 일을 하였기에 그 집안은 언제나 분산. 부친은 예수를 믿지 않았고, 모친 김쳐녀 씨가 복음을 받아 교회 출석. 최덕지는 어머니를 따라 일찍부터 교회 출석. 어린 최덕지는 부친의 회개를 위하여 기도. 결국 덕지 소녀가 9살 때 부친도 출석. 최덕지는 통영 진명학교에 입학. 진명 학교는 기독교 선교사들이 새운 사립학교.

최덕지가 4학년 졸업반이었을 때, 모친은 35세의 꽃다운 나이로 별세. 이때부터 최덕지는 슬픔이 무엇이며,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생각. 진명 학교를 졸업한 최덕지는 마산 의신 여학교 고등과에 입학. 이 무렵 부친은 재혼. 그러나 재혼한 지 4년만에 별세. 최덕지는 1919년, 통영 진명 유치원 보모로 19세 처녀로 취임. 이 유치원 원장은 호국 선교사 신애미 여사. 최덕지는 유치원 어린이의 가슴속에 애국심과 신앙심을 심음.

1920년, 최덕지는 고성군 거류면 은월리 출신인 일본 동경 명치 대학 법과 재학생인 김정도 씨와 결혼. 그 집안은 예수를 잘 믿는 집안으로 부친 김명광 씨는 영수였고, 모친 정찬영 씨는 집사. 그는 이런 좋은 가정에 좋은 신랑을 만났지만, 하나님은 그녀에게 하늘의 상급을 위해 땅의 것을 버림. 1924년 7월, 첫딸 혜주를 얻고, 여름 방학이 되어 집에 돌아온 남편 김정도 씨는 열병으로 갑자기 별세. 최덕지는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오직 주의 일에 힘쓰기로 작정. 진명 유치원 원장 신애미 선교사는 최덕지 선생의 신앙과 그 절개 있는 애국심에 감복되어 그녀가 지방에서 유치원 보모나 하고 있을 인물이 아님을 알고 평양 여자 신학교에 추천.

최덕지 선생은 평양 여자 신학교에 입학, 신학을 공부하는 중 그녀의 신앙은 더욱 체계화되었고, 그의 지도자다운 상이 부각. 2년 때, 학우회 회장이 되었다. 1935년 4월, 제 22회 평양 여자 신학교 졸업생이 되어 미순회 마산 지방 전도사. 미순회 마산 지방 그 산하 교회 수는 당시 83개 처나 되었다. 최덕지 전도사는 열심. 1938년 9월 9일, 예수교 장로회 제27회 총회가 신사 참배 가결을 결의. 곳곳에 신사 참배 반대 운동. 이미 반대 항거하던 주기철 목사는 1938년 2월에 농우회 사건으로 검속되어 부역 중이었고, 잠시 풀려났다가 8월에 2차 검속..

신사 참배 반대 운동자들을 보면, 평북에 이기선 목사가 주둥이 되었고, 신의주에 김화준 전도사, 영변에 박관준, 박천에 안이숙, 강계에 고흥봉 목사, 선천에 김인희 전도사, 경상도 주동은, 한상동, 주남선, 최덕지, 최상림 목사 등이었다. 전라도에 손양원, 만주에 한부선 선교사, 봉천에 박의흠 전도사. 최덕지 전도사는 강력한 영성 지도자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하고 다니다가 1940년 4월 9일, 1차 검속. 26일에 풀려났다가 다음 날이 27일, 2차로 검속되어 모진 고문. 다시 석방되었다가 1942년 8월, 3차로 구속.

최덕지 여사는 그가 몇 차례 검속되 었다가 다시 풀려날 때마다 밖의 교회는 더욱 말이 아니었고 신사 참배뿐 아니라 동방 요배까지 엄연히 시행되어. 그녀는 다른 투옥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자들과 달리 동방 요배 문제에도 적극 반대 의항을 제의. 궁성 요배 반대 운동. 최덕지 전도사는 제4차 검속으로 경남 도경 감방에 수감되었다가 1943년 1월 초순, 평양 형무소로 이감. 평양 형무소에는 전국에서 압송되어 온 신사 참배 반대 운동 성도들이 집결. 모진 고문과 죽음의 사선을 헤매던 중 하나님의 은총으로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게 되어 17일 출옥.

출옥한 성도들은 한국 교회 재건 운동에 앞장. 최덕지 전도사는 부패한 그 속에 들어갈 수 없다 하고 나와서 다른 재건 운동을 일으켜 세워진 것이 대한 예수교 재건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