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4. 주남선 - 죽지 못한 순교자 [한국교회사]
분류: 교회사- 한국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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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남선(朱南善) 목사
한 교회를 개척하고 그 교회에서 주교 반사, 집사, 장로, 전도사, 목사로 일생을 마친 경우는 거의 없을 것. 출옥 성도 주남선(朱南善) 목사의 특별한 점. 주남선 목사는 1888년 9월 14일, 경남 거창군 읍내면 동동 28번지에서 한학자 주희현의 2남으로 출생.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 거창 군수의 비서관 일을 보았으며. 1908년 5월에 복음을 받았고, 1911년 9월에는 잠업 실습소를 수료. 1912년 6월에 맹호은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1914년 서리 집사 임명.
진주 경남 성경 학원에 입학, 1919년 2월에 졸업, 1928년에는 거창읍 교회의 장로로 장립.
그해 3월에 독립 운동이 일어나자 3형제 모두가 선동자로서 활동하다가 동생 주남수는 군정서 의용병에 출전하여 만주에서 순국. 주남선은 군정서 의용병 모집과 군자금 모집에 앞장섰다가 발각되어 대구 형무소와 진주 형무소에서 2년의 옥고. 출옥 후엔 성서공회 권서일을 하며 전도에 힘을 썼다.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1930년 3월 졸업하고, 9월에 경남 노회에서 목사 안수.
1931년 2월 22일, 거창읍 교회 위임 목사로 임직. 삼군(거창, 합천, 함양) 시찰장에서 당회장을 겸임. 그는 초기 강인한 배일 사상. 일제가 서서히 탄압정치를 펴기 시작할 무렵, 하루는 거창 지방 유지들과 종교계 지도자들을 공회당에 부러 모아 놓고「여러분은 오늘 우리 대일본 제국에 대하여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하시오.」하고 총독부에서 내려온 고관이 말을 했을 때 아무도 그 엄한 분위기에서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으나 주목사는 「우리 한국 사람이 원하는 것은 우리 나라에서 일본사람이 떠나주는 것이오.」 라고 발언. 이 엄청난 뱃장앞에 일본 총독부 고관도 유구무언.
1935년 11월, 일제가 신사 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자 앞장서서 반대 운동. 서부 경남의 각 교회를 순방하면 반대 운동. 서부 경남의 각 교회를 순방하며 반대 운동을 시작. 1940년 7월17일, 신사 참배 반대 운동자로 구금되어, 다음해 7월 11일, 평양 형무소로 압송. 평양형무소는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의 거목들이 모인 감방. 주기철, 한상동, 주남선 목사 등이 생명을 주 앞에 내어 놓고 일제 앞에 항거. 1945년 8월 15일, 조국 해방과 함께 출옥하여 당시 어지러웠던 경남 노회 회장으로 선임되어 사랑과 온유로.
진리 보수의 신학 정립을 위하여 죽어버린 평양 신학교의 그 정신과 사상을 계승할 신학교 설립을 위하여 옥중에서부터 기도하여 오던 계획을 실행하게 되었으니, 1946년 9월 20일, 부산에서 개교하게 된 고려 신학교 설립. 한상동 목사와 함께 박윤선, 박형용 박사 등을 세워 학교를 육성.해방 이후 1948년, 처음으로 우리 나라에 국회의원 선거가 시작되던 때, 거창 군민들이 국회 의원에 출마하기를 청하였고 무투표로 당선시키겠다고 좌우익 양측에서 추대했고 그의 집에는 중앙에서 여러 사람이 찾아 왔으며 지방 유지들로 붐볐으나 그는 거절. 끈질기게 그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에게 「저는 교회 목사입니다. 목사는 하나님께 몸을 바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을 위해 죽는 일 밖에 다른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를 더 이상 찾아 오지 마시오.」인민군들이 그를 잡아다 처형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이 보호. 그는 일생 소원이 순교였지만, 순교를 하지 못하고 병사.
1950년 6월 25일, 전쟁시 적지가 된 거창을 떠나지 않고 남은 성도들을 돌보며 오직 순교 일념으로 교회를 사수. 1951년 3월 23일, 과로에 지쳐 쓰러져 간암으로 별세할 무렵 「내가 순교를 아무리 원하였지만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시니 되지 않더라.」 고 하면서 임종. 주남선 목사. 그는 성자. 그는 주 예수님 밖에 모른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