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1. 박윤선 - 신학의 사람 [한국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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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1. 박윤선 - 신학의 사람 [한국교회사]


분류: 교회사- 한국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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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선 (朴允善)

박윤선목사는 1905년 1월 23일, 평북 칠산군 백량면 장평동에서 출생. 부친 박근수 모친 김진신의 2남 3녀 중 둘째이다. 부친은 근면 정직한 농부. 9세 때 서당에 나가 한학을 하였고 17세가 되기까지 사서삼경을 통달. 후에 성경주석에 사서삼경이 많이 인용된 이유.

가난한 농가에서 소 먹이고 한학을 공부하다 17세에 교회로 나가 복음을 받게 됨. 주일이면 15리 길을 걸어 예배, 남녀 좌석을 휘장으로 막아놓고 예배드리던 시절.

1923년 18세 때, 선천군 군산면 장공동의 대동소학교에 6학년으로 편입하였는데 이 학교는 김도순이라는 교인이 설립. 학교는 아침마다 예배, 주일에는 교실에서 예배. 그해 겨울방학 18세에 결혼. 신부는 15세의 김애련. 다음 해 1924년 봄 대동소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중학교 2학년에 편입. 한 학기 공부 후 학생들이 이구하 교장 배척 데모를 하였고 휴교가 되어 일시 귀가했다가 선천에 있는 신성중학교 3학년 보결시험으로 합격.

학비 마련을 위해 고학을 하여 방과 후 젖소를 먹이고 우유배달을 하고 밭에서 풀을 뽑았으며 변소 소제 등도 마다 하지 않음. 길선주목사님의 부흥회에 참석하였고 양전백목사님의 설교도 계속 들었으나 주일에는 선천 북교회에 출석, 교회 생활은 익숙하였으나 신앙은 어림. 방학 때는 학우들과 전도대를 조직하고 대장이 되어 마을을 찾고 열심히 전도하였으나 확신없는 하나의 운동.

어느날 학교 가까이 있는 수청 고개 밑에 있는 냇가를 거닐 때 하나님 존재에 대한 회의가 느껴졌고 하나님은 정말 계시는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왜 믿는가 라는 자문자답 속에서 영음을 듣게 되고 "네 손에 들고 있는 성경이 하나님이 계신 증거라"는 순간으로 확신. 이후 힘있게 신앙생활

신성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아내를 공부시키려는 결심으로 마지막 겨울방학 때 선천에서 장평까지 80리 길을 걸어 집에 가서 아내를 데리고 선천읍으로 돌아와 방 한 칸을 얻어 아내에게 기초학문을 가르치기 시작. 봄에 보성여학교에 입학시키면서 이름을 김영선으로 개명.

1927년, 신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숭실전문학교에 입학. 1931년에 4학년으로 졸업하고 193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 기도에 열심을 더하여 철저한 믿음의 사람이 됨. 학우들 사이에서도 박목사로 불리울만큼 경건파. 새벽에 일찍 일어나 모란봉에 올라가 기도하고 신학교에서 기도 동지회를 만들며 열심히 기도하며 집회 참석. 1934년. 평양신학교 29회 졸업. 그해 9월 미국으로 유학. 돈이 없어 기도하자 협조자가 나타나 도와 주었고 모자라는 돈은 왕길지 선교사에게 차용

평양에서 부산까지 기차로 가서 부산에서 일본 시모노세키에 도착, 동경을 통해 고베로 가서 지지부 마루라는기선으로 미국행. 고베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는 17일 여정. 가는 동안 계시록을 암송하여 미국에 도착할 때까지 18장을 암송하였고 나머지 22장까지는 학교에 다니며 계속 암송.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입학. 1936년 신학연구원 졸업하고 신학석사학위 취득 후 그해 8월 귀국.

이 무렵, 총회 교육부 주관의 표준 주석 편집부에서 박형룡박사를 도와 일하고 1938년 8월, 2차 유학길에 올라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1년간 벤틸교수의 지도하에 변증학을 연구하고 1939년, 일본 동경에 머물면서 총회 표준주석 집필을 계속 돕다가 1940년 3월에 귀국하였으나 한국교회가 신사참배 문제로 검속이 있어 만주 봉천에서 우지황 교회를 목회하였고 북능에 있는 만주신학교에서 신약학을 가르치고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교수. 박형용박사도 일본에서 만주로 나와 함께 강의.

1944년 4월부터 주석집필에 전념.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8월 27일에평북 강평동 고향으로 돌아가 4개월을 머물다 1946년 2월에 고향을 출발 3월 1일 서울에 도착, 그해 5월 한상동목사의 방문을 받고 그의 뜻을 따라 신학교 설립을 결심하여 1946년 5월 진해에서 경화동교회를 시무하면서 6월 23일 신학강좌를 개설했고. 이어 9월 20일 부산진 일신학교에서 고려신학교 개교. 1947년 10월 14일 박형용박사가 고려신학교 초대교장에 취임하였으나 1948년 5월 박윤선목사가 2대 교장으로 취임하고 한상동 한명동 이상근 박손혁목사 등이 강사로 도왔고 선교사로 한부선 마두원 최의손 함일동목사 등이 강의. 고려신학교는 과거신사참배를 반대하다 투옥된 분들이 해방과 함게 출옥하여 세운 학교로 신사참배에 동참했던 한국교회의 과오와 회개를 외치고 한국교회를 정화하기 위해 세운 학교.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성령의 감동과 은혜 중심의 교육을 실시하려고 노력.

1953년 10월 화란 자유대학으로 유학을 떠났고 1954년 3월 김영선사모가 교통 사고로 별세 향년 49세였고 5남매가 다 미혼. 그해 8월 미국 필라델피아 국제 기독교 연합회 제2차 세계대회에 참석 한상동 이약신 박손혁과 함께 하였고 페이스신학교에서 한상동목사와 명예 신학박사학위 수여. 귀국 후 10월 이화주여사와 재혼하였고 고려신학교 하면 박윤선을 말할 정도. 그러나 1960년 여름 성수주일에 대한 의견차이로 14년간 몸담았던 고려신학교를 사직.

1961년 1월 서울서대문동산교회에서 3년 목회. 1964년 3월 서울총신대 7대교장에 취임하였고, 1969년 3월 총신대신학대학원장이 되었으며 1968년 6월 서울 영등포구노량진 한성교회를 개척, 1980년 11월 수원 합동신학원 원장이 되어 1985년 2월까지 봉직하고 3월부터는 동신학원 명예교장으로 사역. 신구약성경 전부를 20권으로 출판하여 1960년대 이후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중요한 지침서가 되었고 1988년 6월 3일,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계속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영동 세브란스병원에서 5일간 입원치료를 받았고 그후 병중에서도 많은 동료 후배 제자들의 영접을 받으며 기도하고 자신의 작은 과오도 용서를 구하며 1988년 6월 30일 사망.

1988년 7월 2일 대한예수교 장로회 개혁측 합동신학교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가족들은 일산기독교묘지 안장을 원하였으나 신학교당국의 간절한 요청에 의하여 수원에 있는 합동신학교 내에 안장.

1979년 10월 9일 총신대학강단에서 성경주석완간 감사예배 때 40년 주석집필 소감에 대하여 "나의 주석 저술 동기는 나 자신이 먼저 성경을 깨닫고 깊이 안 후, 확신 속에서 전하고자 함이다. 나의 마음은 항상 성경에 머물러 있었고, 성경주석 저술에 기쁨이 있었다. 내가 성경을 많이 아는 것은 아니지만, 아는 만큼은 확신하고 있으며 또, 내가 아는 그것을 형제에게 나누어주고자 하는 마음이 항상 불타고 있으므로 계속 붓을 들게 되었다." 고 술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