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조수옥' - 백목사님 관련 출옥성도의 약력, 참고할 증언 몇 가지[한국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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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조수옥' - 백목사님 관련 출옥성도의 약력, 참고할 증언 몇 가지[한국교회사]


분류: 교회사- 한국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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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2.1. 경남 하동군 하동읍 읍내동 1088번지 출생
1922.3.-27.2. 하동 보통학교 입학 및 졸업
1935. 신앙출발
1937.3.-1938.3. 진주 성경학교 입학 및 졸업
1938.6. 삼천포교회 여전도사
1938.10.신사참배 거부로 경철서장으로부터 삼천포에서 추방
1938.11.부산 초량교회 시무
1940.1.초량교회 사임, 호주선교부 순회전도사 시무
1940.9.20. 부산 초읍에서 검거 북부산경찰서 압송
1941.7.11. 평양종로경찰서 이송
1941.8.25. 평양형무소로 이송
1945.8.17. 출옥
1945.12. 마산인애원 설립
1946.1. 마산시 행정자문위원역임
1964.1.-82.6.사단법인 한국부인회 경남지부장 역임
1965.1. 마산지방법원 마산지원 가사조정위원
1966.9.22.경남윤락여성 선도정책위원
1972.12.-78.6.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역임
1962.9.-82.9. 대한예수교 장로회 경남노회 여전도회연합회 회장(현.고문)
1973.5. 현 경남사회복지교육원설립(보건복지부지정)원장
1982.9.-85.9. 대한예수교장로회 전국여전도연합회 회장 역임(현.고문)
1986.1. 현 경남여성단체연합회 고문
1986.5. 정부의 국민훈장 동백장 수상
1989.5. 경상남도 사회복지협의회 회장 역임
1989.10. 경상남도청 도정자문위원 염임
1992.5. 전국여전도회관 설립 추진위원장
1997.9. 일가상 수상(일가 기념재단)
1997.9. 용신봉사상 (한국여성단체협의회)
2002.3.29. 제1회 유관순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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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경학교 관련 증언 (p.35)

학교라고 해서 어떤 규칙적인 커리큘럼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계절학교였지요. 일년동안 계속되는 강의가 아니라 4월부터 6월까지였습니다. 한 학기가 끝나면통영으로 돌아갔죠. 저는 두 학기를 다녔습니다. 호주에서 온 선교사가 성경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신학교는 아니었습니다. 가정 주부들이 성경을 배우기 위하여 청강할 정도였습니다. 저는 전도사가 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 자신을 위하여 성경을 확실히 배워야겠다는 마음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성경의 가르침을 배우고 싶었던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배웠습니다.

꿈에서 본 인형(p.70)

그들은 정말로 화가 났습니다. 아주 큰 음성으로 죽도와 일본도를 가지고 탁상을 탁 탁 치면서, "이런 몹쓸 계집년이, 불경스럽게 사람의 모습을 하신 신이신 천황폐하를 자기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한단 말인가? 이런 불경을 그대로 방치하 ㄹ수는 없다."고 성난소리를 내면서 아주 난폭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유도장은 삽시간에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졌습니다. 그들 가운데, "이 년을 죽여."라는 소리도 들려왔습니다.

나는 "아! 이제는 정말로 죽는구나"라고 생각했죠. 아주 겁이 났습니다. 몸을 숙이고 죽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지난 밤에 보았던 꿈과 같은 환상을 보았습니다.

무서운 일본 순사들이 한 여인을 둘러싸고, "죽여라. 죽여라."고 소리치면서 칼로 그 여인을 마구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여인은 쓰러지지도 않고, 상처를 입지도 않았았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눈을 크게 떠보니, 그들의 손에 손잡이가 붙어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여인의 등을 때리지만, 손잡이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ㄱ칼이 등까지 오질 않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옆에서 좀더 자세히 보니까 그 순사들이 마치 끈으로 조작되는 종이 인형같이, 아주 우습게 보이는 것입니다. 꿈속이었지만, 무언가 "확"하고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렇다, 하나님은 살악ㅔ셔서 역사하시는 ㅂ문이시다. 하나님은 이 순사들을 지배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나를 죽이고자 해도 그들의 손이 하나님의 손아귀에 잡혀있는 이상, 나를 죽이지 못한다. 나 역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인간이기에, 누군가 나를 죽이려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절대로 나를 해할 수 없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순간, 눈을 떴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순사들이 행하는 행동들이 우습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종이인형과 같은 자들에게 위협을 당하여 떨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 불쌍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종이인형과 같은 자들에게 위협을 당하여 떨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 불쌍해 보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같이 하심을 깨달아씩 때문에 허리를 바로 하고 등을 펴고 바로 앉았습니다. 그리고, 정면으로 그들의 눈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들도 놀란 나머지 갑자기 분위기가 조용해졌습니다. 자신들의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자세를 바로 했습니다. 그 상태로 잠시동안 침묵이 흘렀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사건은 오늘밤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특별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여인을 특별조치가 있을 때까지 집으로 돌려보내라!"

"신사참배를 거부한 그리스도인 조수옥" 2002.4.11.와따나베노부오. 엘맨출판사=========================================================================================

경남성경학교 생활(p.54)

사람은 만나면 헤어져야 한다.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이 영원히 함께 살 수 없는 곳이 세상이다. 조수옥도 마산에 머물러 재봉틀이나 돌리고 있을 마음이 없어졌다. 열심히 성경공부를 해서 진주 경남성경학교에 들어가고픈 마음뿐이었다.

1937년 4월. 진주에 있는 경남성경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꿈에도 그리던 성경학교에 들어가 학생이 된 것이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였다. 같은 목적의 사람들과 어울려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밤마다 특별기도를 했다. 새벽기도회는 눈물바다였다. 세상것은 멀리하고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만 살겠다고 마음에 결심하고 열심히 기도하였다.

기숙사에는 사감이 있고 밤이면 문을 잠갔다. 출입금지였다. 밤엔 아무도 나가지 못하고,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였다. 그 규율은 철저하였다. 그러나 밤에 몰래 빠져나가 봉래정 뒷산에 올라가 학생들이 기도하였다. 그 수는 얼마되지 않았지만 그 열심은 대단하였다.

어느 날 밤, 조수옥도 선배학생들을 따라 밤에 빠져 나갔다. 봉래정 뒷산은 높은 산이 아니었다. 그러나 숲이 우거져 있어 산은 깊었다. 이슬이 내리는 밤이었다. 학생들은 이곳 저곳 흩어져 기도자리를 찾았다. 찬송을 부르며 기도하였다.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달이 없는 밤이었기에 더욱 어두었다. 그 어두움을 뚫고 기도하는 소리는 고요를 깨었다. "주여!" 부르짖는 기도소리가 골짝을 매웠다.

처음 산기도에 동참한 조수옥은 선배들의 기도소리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들의 간절한 기도, 깊은 견지에 도달한 은혜로운 기도소리에 마음이 뿌듯하였다. 첫날 밤은 많은 기도를 드리지 못하고 돌아왔지만 다음 날 밤은 그녀도 기도할 수 있었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그녀의 기도도 깊은 견지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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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성경학교에 가다(p.103)

1939년 7월 말경 조수옥전도사는 경남 성경학교에 갔다. 앞으로 학교를 계속할 마음으로 동향을 알아보려고 간 것이었다. 2학기부터는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까 하여 간 것이었다. 학교는 폐교령이 내려 학기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모여서 기도회를 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있었다.

조수옥전도사도 그들과 합류하였다. 신사참배를 반대한다하여 성경학교 개강을 허락치 않았다. 당국에서 수시로 찾아와 동향을 살폈다. 학생들이 돌아가지 않고 있기 때문에 매일처럼 고등계 형사들이 나타나 조사를 하고 갔다. 학생들은 밤마다 찬송을 부르며 기도회를 가졌다. 모여온 학생들은 모두 열심이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전도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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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 반대와 반대운동 (p.117) - 심군식목사의 의견

앞서 말한 전국각지의 신사참배 반대 운동자들의 명단에 주기철목사의 이름이 빠진 것을 보고 의아한 생각을 가진 분들이 있을 것이다. 왜 주기철목사의 이름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자들의 명단에 빠졌을까? 이것은 누락이 아닌 사실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지식은 버려야 한다. 분명히 한국교회가 바로 알아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역사 바로잡기에 해당하는 중요한 일이다.

주기철목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투옥되었고,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가 다시 투옥되고 이렇게 반복하다가 결국 평양형무소에서 순교하였다. 주기철목사는 신사참배 반대자였다. 그러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전개하지 않았다. 신사참배 반대와 반대운동은 그 성격이 다르다. 그런데 주기철목사가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면 반대 운동도 하였을 것인데 왜 그렇지 못하였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 첫번째 이유는 한상동 목사와의 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심군식저. "세상끝날까지" 1977.8.10.소망사간. p138. 3판, 1997.4.28. 총회출판국간 p.126) 그 내용은 이러하다.

1939년 4월 20일, 농우회 사건으로 검속되었던 주기철 목사가 병보석으로 풀려나왔다. 이 소식을 들은 한상동목사는 평양으로 올라왔다. 주기철목사는 채정민목사댁에서 몸을 돌보고 있었다. 이날 이 곳에 모인 사람들은 채정민목사, 오윤선장로, 이광록집사, 방계성장로, 안이숙선생, 박의홍전도사, 김의창목사, 최봉석목사, 오정모선생, 한상동목사 등이었다.

한상동목사는 경남지방에서 펼치고 있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대하여 말했다. "경남에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활발합니다. 신사참배 불참노회를 재건하자는 소리가 높아가고 있습니다. 경남지역은 노회재건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경남만의 일이 아니므로 북쪽 여러 동지들을 만나봤습니다. 역시 그런 뜻이 많습니다. 자꾸만 강압적으로 나오는 일제의 동향을 볼 때, 힘이 모여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하여 노회가 조직되는 것이 힘을 모으는데 도움이 죄지 않겠습니까?"

주기철목사는 눈을 감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시기가 빠르지 않겠습니까?" 만일 재건노회가 조직되고 반대운동의 세력이 강해지면 일제가 더 강압적으로 달려 들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희생자도 더 많이 나지 않을까요?" 주기철목사는 옥중 1년 동안 시달린 고통이 너무 컸기에 희생자가 많이 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조용히 지도자들만 수난 당하는 것으로 끝났으면 싶었다. "지금 반대운동을 하고 나서지 않아도 이렇게 탄압을 가하는데 정말 반대운동을 하고 나선다면 희생은 전국에 막대할 것입니다. 우리 목사들이 반대의사를 나타내고 그러다 잡혀 들어가 고난을 받는 것으로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주기철목사의 얼굴에는 피로가 서려있었다.

"아닙니다. 이미 반대운동은 시작되었습니다. 북쪽에는 이기선목사가 조직적으로 반대운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경남에는 제가 내려가면 조직하여 운동에 나설 예정입닏." 한상동목사가 열을 올렸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기철목사가 왜 반대운동에 소극적이었나를 알게 된다. 그 이유는 많은 희생을 줄이자는 지도자다운 자애심에서였다. 주기철목사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지 않아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데 운동을 한다면 더 많아질 것이고, 그러면 일제의 간악함을 더하여 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많은 희생자가 날 것이니 이것이 염려였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면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진정한 교인이라면 누가 하겠다 하겠는가, 반대할 것이 뻔하고 그리되면 결국 희생자만 늘어나고 겨로가는 한국교회는 피바다가 된다는 것을 주기철목사는 염려하였을 것이다.

두번째 이유는, 일제가 주기철목사에게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았다. 신사참배를 제27회 총회가 결의하기 전인 1938년 7월에 예비검속되어 1개월간 유치장에 있었다. 출감되어 나오자 8월에 농우회 사건에 연류시켜 의성경찰서 형사들에게 인계되었다. 주기철목사는 사실 농우회사건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산정현교회 조만식장로가 농우회 초대회장이었고, 제직 중 몇이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는 정도다. 주목사가 마산문창교회 시무 당시 유재기목사가 시무하는 의성읍 교회에 부흥회를 한 주간 인도한 것 외엔 아무런 관련도 없다. 그러나 유재기목사가 농우회 책임자이고, 주기철목사와 가깝다는 이유에서 연류시켜 검속시켰다. 사실은 신사참배 반대 주동인물이기 때문에 1938년 9월 27회 총회를 앞두고 예비 검속의 별미를 잡은 것 뿐이었다. 1939년 8월 제3차로 다시 검속되었다. 1940년 5월 4일 4차 검속으로 1944년 4월 25일 평양형무소에서 순교하였다.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주기철목사를 신사참배 반대자로 두지 않고 과장하여 반대운동자로 내세우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고 과장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의 기록은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할 때만 그것은 참 가치가 있고 힘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존경하는 주기철목사를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절개를 지키며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일제에 항거하다가 순교한 한국교회 순교의 대표적, 인물로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사참배 반대운동가로 내세워 역사를 굴절시키는 일에 열을 올릴 이유는 없다. 신사참배 반대운동가로는 이기선목사, 한상동목사, 최덕지전도사 등을 대표로 기억함이 올바른 역사관이다.

어느 날 고등계 형사가 나타났다. "여러분, 모두 책을 싸가지고 나를 따라 갑시다." "어디로 가자는 것입니까?" "학생 중 누군가가 말했다. "어디는 어디야, 경찰서지!" 고등계 형사는 상당히 신경질적이었다. 벼락 고함을 치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모두 책을 꾸렸다. 형사를 따라 고분 고분 경찰서로 갔다. 조수옥 전도사도 함게 갔다. 경찰서 마당에 학생들을 집결시켰다. "지역별로 서시지요." 학생들은 지역별로 섰다. 거창, 사천, 마산, 부산 등지로 학생들은 갈라섰다.

고등계 형사부장이 나와서 말했다. "여러분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자유롭게 가는 것이 아니고, 지역마다 형사 한 분씩 책임을 맡겼으니 지시를 따르시오." 형사들이 지역별로 서서 학생들을 데리고 갔다. 지역 경찰서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조수옥전도사는 부산지역이기 때문에 형사의 지시를 따라 부산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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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인물사(10) - 조수옥권사의 생애, 심군식지음, 도서출판 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