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고신 50년과 해외선교 - 고신 50년을 말한다 (7) [고신]
분류: 교단 -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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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 50년과 해외 선교 / 이병길 (전 선교부총무)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의 무리는 정오가 되면 가던 길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무리를 지어 원
을 그리며 빙글빙글 돈다고 한다. 낙타의 그림자가 발굽에 밟혀 자신들의 위치 확인이 안
되기 때문이란다. 이윽고 태양이 서쪽으로 조금 기울면 낙타 무리는 자신들의 그림자를 비
로소 발견하고 걸어가야 할 방향 지점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고 한다. 낙타는 사막에서
태양 빛에 반영되는 자신들의 그림자를 보고 방향을 확인한다는 말이다.
‘고신 50년’을 되돌아보면서 다가오는 시대를 조명하는 기독교보의 ‘기획특집 시리즈’
가 조금 때늦은 감이 있으나,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가다듬고 아직도 걸어야 할 먼 길을 다
시 확인하는 결단은 매우 의미 있는 기획이라 생각되어 먼저 찬사를 보내 마지않는다.
그 동안 교단의 정체성 재고에 대한 의견이 이곳 저곳에서 비등해 왔고, 뜻 있는 선후배들
에 의하여 우리의 모습을 가다듬어야 한다는 각성의 목소리도 심심찮게 제기되어왔던 터이
기에 본 기획이 갖는 의미가 더욱 크다고 여겨진다. 고신 교단의 정체성 문제는 그 동안 기
회 있을 때마다 주기적으로 확인된 바 있다.
‘교단 창립 30주년 기념 대성회’(1977), ‘고신 선교 40년’(1998), 그리고 이번에 다시
확인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우리 한국 교회의 위대한 신앙의 유산을 지켜온 고
신 교단’은 그 설립 기반이 채 숙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해외 선교를 시작, 교단의 위상을
업그레이드하는 계기를 만든 것이라 생각된다.
한국 교회 해외 선교의 선도적 위치
‘고신 50년’ 역사에서 해외 선교는 한국 교회의 산동성 선교(1912∼1956) 이후 한국 교회
로서는 처음으로 중국 선교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광복
후 교권 세력의 횡포와 신학 사조의 혼미를 거듭하는 가운데 맞았던 6.25 한국전쟁의 참혹
한 동족 상잔의 현장을 지켜보면서, 암울하기만 했던 혼란기에 고신 교단의 해외 선교는 한
국 교회 선교 역사에 밝은 미래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중국의 타이완 선교는 고신 교
단이 한국 교회로서는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하여 선교를 개척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높
이 평가되어야 할 사건이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 역사에서 고신 교단의 타
이완 선교는 거의 언급이 되지 않는 등 시류에 묻혀 지나갈 정도로 무관심 되었던 것은 아
쉬움으로 남는다.
고신 교단의 해외 선교는 처음부터 확고한 선교 지지 기반과 체계적인 정책보다는 교단 설
립 이념에 기초한 ‘개혁주의 세계교회 건설’이라는 선교적 모토에 힘을 실었던 것으로,
이는 선교 신학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신 해외 선교는 한국 교회 역사와
선교 신학적인 의미와 함께 목회 현장적인 의미도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은 곧 기도 운동이
었다. 지금까지 선교를 위한 기도는 고신인이 모이는 곳 그 어디서든지 뜨겁게 달아올랐다.
특정지역 교단에서 세계선교 영역 발판 구축
‘고신 50년’의 해외 선교는 교단 설립 초기의 교세가 특정 지역에 편중되어 있었던 탓으
로 특정지역 교단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사실 첫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
의할 당시(1956) 교세는 전국 568개 교회 중 497개 교회가 경남과 부산 및 경북 일대에 편
중되어 있었다. 게다가 신학교가 이 지역에 장기간 유치됨으로 자연히 인재 육성면에서도
지역 편중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경상도의 억센 억양과 사투리, 거칠다 싶은 몸 동작
은 특정 지역의 한계를 벗어나는 데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해외 선교는 이런 특
정 지역의 한계에서 벗어나 교단의 지역적 이미지 쇄신은 물론 지역 한계를 탈피, 세계 무
대로의 영역확대 발판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특히 타이완 선교는 미국 정통장로교회와의
협력 차원에서 이루어진 점을 고려할 때 당시 교단의 국제적 위상을 한 단계 높이는 계기
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고신 해외 선교의 추진력
‘고신 50년’ 역사에 있어서 1986년은 두 가지의 큰 의미를 지니는 해라고 생각된다. 그
중 하나는 전국 교회 수가 100단위(974개 교회)에서 1,000단위(1,022개 교회) 수를 넘어선
교세 성장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선교 인적자원 확대의 의미다. 당년은 교단 해외 선교
를 시작한 지 29년이 되던 해로써, 교단 선교 시작이래 처음으로 4명의 선교사를 파송했
다. 이러한 선교인적 자원 확대는 교단 전체 교회의 성장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1980년대의 교회 성장은 한국 교회의 일반적인 추세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크게 놀라운 것
은 아니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고신 교단의 경우는 좀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고신
교단은 1986∼1995년까지 10년 간 수적으로 해마다 평균 33개 교회가 증가되었고, 선교사
는 총 54명이 파송되어 해마다 최소한 5명을 파송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추세는 교
단 교회의 성장에서 축적된 잠재력이 해외 선교에 추진력이 되었다는 것을 주목케 하는 점
이다.
고신 교단의 잠재력은 외적으로 표출된 단순한 교세의 성장계수 문제가 아니라 교단설립 당
시 확고하게 다져진 개혁주의 신앙의 시대적 사명감이 선교로 연계된 것을 확인케 하는 대
목이다. 그 사명감은 1997년 말 엄습한 외환 위기 때 극명하게 검증되었다. 매월 제한된 후
원금으로서는 매일 뛰어오르는 달러의 강세를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당시 일부 교단과 선
교 단체에서는 선교사들을 대거 철수시키는 사태로 이어졌고, 고신 교단 역시 위기 관리의
한계를 극복하기에는 너무도 힘이 부쳤다. 그런 위기 상황에서 고신 교단은 선교사 한 가정
도 철수시키지 않고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필자는 당시 위기 관리의 실무 책임자로서 그 급박했던 상황을 다시 기억하고 싶지는 않지
만, 다만 여기서 그 때의 상황을 언급하는 것은, 당시 선교 현지 선교사들이 총회 세계선교
부가 잠정적으로 시행한 위기관리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옴으로써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
고신 교단 선교사들은 단순히 복음을 선교하는 사역자가 아니라 교단설립 이념 실현에 훈련
된 충실한 영적 투사의 정신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아울러서 현재 교단 전
국 771개 교회(6월말 기준)와 단체의 후원 역시 매월 책정된 후원금 자체보다 교단 설립의
확고한 이념적 맥락에서 선교가 추진되고 있다는 점이 고신 선교의 미래를 더욱 밝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타이완 선교는 끝나는가 끝내는가
중국 타이완 선교는 고신 교단의 해외 선교의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선교지라는 것은
고신인이면 누구나 다 알고있는 사실이다. 타이완 선교에 이어서 인도네시아 선교 개척 당
시 타이완을 제1선교지, 인도네시아를 제2선교지로 부른 것에서도 그 상징성이 드러나고 있
다. 타이완 선교는 고신 교단의 국제적 위상을 높인 선교지 일 뿐 아니라, 고신 교단의 정
체성을 처음으로 해외 선교지에 착근시킨 선교지로서, 지난 40여 년 간 교단의 역량을 쏟
아 부은 선교지다. 고신 교단의 타이완 선교는 선교 정책상 두 가지 큰 의미를 지니고 있
다. 그 중 하나는 동남아 지역에서 개혁주의 교회건설, 다른 하나는 중국대륙 선교의 전초
기지화다. 타이완에서 개혁주의 교회 건설은 현지 노회가 조직됨으로써 정책적인 가시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중국대륙 선교는 정책적으로 연계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김으로써 바야흐
로 타이완 선교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고 김영진(1920-2001) 선교사의 경우 은퇴 무렵에 처음으로 홍콩을 방문한 적이 있다. 김영
진 선교사는 1958년 타이완에 정착한 이래 30여 년 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홍콩 나들이
를 한 것이다. 그만큼 김 선교사는 타이완 선교에만 매달렸다. 33년의 선교 사역을 마치면
서 펴낸 그의 ‘선교지 대만에서 역사하신 하나님’ 제하의 선교체험 수기에서도 오로지 선
교지 타이완에 대한 애착과 열정만 배여있다. 그는 젊은 날의 선교적 열정을 오로지 타이완
에만 쏟아 부었다. 그리고 그 타이완 땅에 묻혔다.
필자는 지금도 김영진 선교사가 은퇴 무렵에 왜 홍콩을 방문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
다. 홍콩 방문의 목적은 아마도 중국대륙 선교 상황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을 터인 데,
그 때는 중국대륙 개방 10여 년이 지났으며, 베이징 정부는 이미 자본주의 시험기를 끝내
고, 경제 개방에 따른 자신감의 탄력으로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정책을 선회하려하던 때
다. 말하자면 시기적으로 중국 대륙과 관련된 선교적 정보원 위치인 홍콩의 주가는 이미 폭
락 상태였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 때였을까 라는 의문을 지금도 지울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한중(韓中) 국교는 제1선교지 타이완에 대한 선교적 관심도를 떨어뜨렸고, 한
국 교회의 타이완 선교 관심이 중국 대륙으로 집중된 현재 상황에서, 고신 교단의 타이완
선교에 대한 정책 방향이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타이완 선교지를 지켜온
황병순 선교사가 7월 초 안식년 차 귀국했다. 현재 타이완에는 후속 선교사가 파송되지 않
은 공백 상태다. 향후 황병순 선교사의 거취에 관하여 아는 바는 없지만, 만약 황병순 선교
사가 차기 사역의 선교지를 변경할 경우 ‘타이완 선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과제가
남게 된다.
전통적인 세계 선교구도 개념 극복해야
기독교 선교는 오랜 기간동안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와 더불어서 종교적(이교) 장벽에 부딪
혀 온 것이 사실이다. 20세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기독교의 이런 선교 장벽은 간헐적으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구 소련공산당의 해체, 중국의 경제 개방, 유럽에서 냉전 종식 등 경
제와 정치 등 다양한 변화 속에서 전통적으로 구도화된 종교 블럭, 즉 이슬람권, 힌두권,
불교권의 종교적 장벽도(속단하기에는 조심스럽지만) 세계화의 추세와 함께 서서히 걷히기
시작하는 조짐이 보이고 있다. 서남 아시아의 이슬람권은 중동전쟁을 계기로 1970년대를 전
후하여 무슬림의 대거 이민 행렬이 이루어졌고, 힌두권 역시 최근 정보기술(IT) 산업에 편
승하여 영어권으로의 인력 송출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불교권 역시 변화의 바람을 외
면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전통적인 종교 블럭의 이런 급속한 변화는 기독교 선교의 선교구도 개념의 변화를 촉구하
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슬람의 경우 서부 아프리카 모로코에서 동남아 인도네시아 및 필리
핀, 말레이시아, 중국, 중앙아시아로 이어지는 큰 띠를 형성하고 있으며, 미국과 영국에서
도 가장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실정이다. 바야흐로 이슬람은 세계를 메카화 하는 선
교 전략을 펴고 있다. 고신 선교는 세계 이슬람의 동향을 면밀히 주시하면서, 전문화된 이
슬람 선교 전략팀을 구성하여 실제적인 이슬람 선교 정책과 전략 수립은 물론, 이슬람 선교
의 인적 자원을 폭넓게 발굴하여 강도 높은 훈련으로 대응해 나가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공 사석에서 조심스럽게 제기되어 왔던 말이기는 하지만, 고신 선교는 이제 총회
상비부로서의 정치적 부속기구 같은 인상에서 탈피, 기능적으로 독립, 전문화되어야 할 단
계에 와 있으며, 그런 충족 요건이 충분히 갖추어졌다고 생각된다. 선교지에서 10년 이상
산전수전을 겪은 경력 선교사들이 바로 고신 선교의 원대한 미래를 밝게 하는 자원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향후 고신 선교의 발전은 획기적인 기구개편에 달려있다고 본다.
이병길 목사-영천교회 담임, 전 선교부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