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이만열, 고신, 보수 출신의 좌파 시각 - 고신의 모순, 이중
일제 청산 제대로 했다면 한국교회는
코닷
▲ 손자 손녀들에게 말랑말랑한 목소리로 교회사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만열 장로. (사진 제공 김태훈)
이만열 장로(숙명여대 명예교수)의 기독 청년들과 함께하는 역사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애초 30여 명으로 제한하려 했으나, "서서라도 강의를 꼭 듣고 싶다"며 의지를 불태운 수강 신청자들이 많아서 최종 마감 전 신청자까지 모두 받게 되었다. 첫 강의는 1월 5일 푸른역사 강의실에서 열렸는데, 가깝게는 광화문, 멀리는 파주에서 온 청년들까지 모두 60여 명이 강의 공간을 빼곡히 채웠다.
기독청년아카데미에서 이 장로의 강의는 처음이 아니다. 3년 전에 비슷한 강의를 열었지만, 이번처럼 큰 반응은 없었다. 수강 신청 초기부터 마치 강의 개설을 기다렸다는 듯이 등록이 폭주하고, 강의 문의가 쇄도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변화와 뜨거운 반응을 가져온 것일까?
강의 전 수강생들이 클럽에 올린 소개 글을 보면 그들의 간절한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여러 수강생은 "현재 한국교회의 모습 중 개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분, 대형 교회들의 부끄러운 모습들, 옳지 않은 사람들의 여러 행동을 보면서, 무엇부터 어디서부터 바뀌어야 하는지 그저 막막할 따름이다(한지영, 직장인)",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면 미래는 없을 거라 본다. 그동안 교회가 달려온 길을 되짚어 볼 때라고 생각한다(조광희, 신학생)", "진리가 한쪽으로 치우쳐 선포되고 성도들이 그것을 그대로 믿는 현실, 세상과 전혀 구분되지 않고 오히려 세속의 가치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현실이 시급히 개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이하나, 주부)"며 강의에 대한 굵직한 기대를 밝혔다. 이처럼 직장인, 대학원생, 신학생, 목회자, 학자 등 하는 일은 다양했지만, 한국교회에 대한 문제 인식과 변화에 대한 갈증은 동일했다.
▲ 강의 첫날이라서 모두가 짧게 인사와 소개를 나누었다. (사진 제공 김태훈)
이에 단단히 부응하기로 작심한 듯 이 장로는 첫 시간부터 그야말로 살아 있는 교회사를 술술 풀어내 주었다. 마치 살가운 할아버지가 사랑스러운 손자 손녀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말랑말랑하게 들려주는 것 같은 느낌으로 첫 강의가 진행되었다. 오랜 이야기를 회고할 때는 먼 산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하고, 첨예한 사건들을 다룰 때는 청년들의 눈을 직시하며 냉철한 기운을 내뿜으면서 뭔가를 심어 주려는 듯하였다. 때론 쓴소리를 아끼지 않으면서 2시간 30여 분의 긴 강의를 흔들림 없이 이어 갔다.
이번 강의는 이 장로가 깊게 관여한 책인 <한국기독교의 역사-3권>을 중심으로 해방 후 한국 교회사에 대한 내용을 시기와 주제별로 각각 다루는데, 이 장로는 "3권은 현재 살아 있는 사람도 많고, 매우 가까운 과거를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쓰기가 어려웠다"고 소회를 밝혔다. 또한 "이번에 실험적으로 이 책을 중심으로 청년들과 공부하는 것이다"며 강의에 대해 의미부여를 하였다. 첫 강의의 범위는 해방 후 한국교회의 재건 활동과 교회 내 일제 잔재 청산의 과제에 대한 것을 강조하였다.
먼저 해방 후에 하나의 교단을 위한 노력이 많았지만, 이루어지지 못한 점에 대해 아쉬워했다. 실제로 교회에서 학교, 병원, 문서(찬송가, 교단 신문) 등을 합치려는 작업이 활발했으나 본국 선교부가 반대하여 실패했다. 또한 "1945년 9월에 감리교가 가장 먼저 재건을 선언하자, 장로교도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의 기독교에서 이탈하여 분열하고자 하였다"며 교단 분열의 초기 역사를 평가했다.
특히 교단 분열의 시초가 되었던 1, 2차 남부대회에 대해서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그대로 유지되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다소 새로운 입장을 밝혔다. 왜냐하면 "오늘날 감리교와 장로교의 차이가 별로 없고, 1905년 일치된 교회를 만들려는 정신이 있었다는 전제하에 강제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수용했다면, 한국교회가 무질서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일제가 강제로 한 것은 바람직하지는 않았다"는 전제를 확실히 붙이기도 했다.
다음으로, 강조한 것은 해방 후 일제 잔재 청산의 문제였다. 이 장로는 "해방 후 한국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었나? 그 시대의 요구에 얼마나 부응하느냐가 중요했지만, 한국 기독교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며 한국 기독교의 민족사적 사명과 사회적 책임에 주목했다. 또한 "일제 시기에 국권 회복과 독립운동이 큰 과제였다면, 45~60년까지의 민족사적 사명은 식민지 잔재 청산이 제일 중요했다"고 덧붙였다.
▲ 해방 후 한국 교회사를 공부하겠다고 추운 날 저녁에 기독 청년 60여 명이 모였다. (사진 제공 김태훈)
"철저한 신사참배 회개 운동을 비롯하여 친일, 부일 했던 인물들이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여야 했다. 제대로 청산했더라면 45년부터 우리 스스로 힘으로 한반도를 다스릴 수 있었고, 민주적인 국민 역량을 증대시킬 수도 있었다. 또한, 한국교회의 영성도 제대로 일어났을 것이고, 한국 사회를 향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을 것이다"며 교회가 제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나아가 "군부 독재 시기에는 인권 및 민주화 운동으로, 70~80년대는 북한 돕기 운동으로, 이후 계속된 분단 시기에는 민족화해와 통일 운동으로 교회의 사명이 확장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두 가지 중점 외에 개인사적인 이야기와 보수 측의 무리한 행위에 대해 일침을 놓기도 했다. 예장 고신 측 출신인 이 장로는 학창 시절에 주일에는 버스를 타면 안 되어서 2~3km나 되는 거리를 걸어 다녀 교회에 갔던 일, 주일에 학교 공부도 하지 않아서 월요일에 시험이 있을 때 일찍 자고 자정 넘어 월요일이 되어서야 공부했던 일, 대학 시절 고적 답사를 주일에 가느라 한 번도 참가하지 못했던 일 등의 개인적인 신앙 경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장로는 이런 신앙생활에 대한 철저한 보수성이 "일생을 돌이켜 볼 때 많은 교훈과 인격 양성에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고, "신앙생활에서 가장 근본은 주일을 어떻게 제대로 잘 지키느냐다"라며 주일 성수와 구별된 생활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명확한 기준과 확실한 근거 자료를 가지고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일도 자세하게 들려주었지만, 본인의 업적을 너무 과하게 강조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자제하여 균형 감각을 잃지 않았다.
보수 측의 행위에 대해서 두 사례를 이야기하였는데, 첫째는 전광훈 목사로 대표되는 보수 목회자들의 무지다. 전광훈 목사가 어느 집회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미군을 "침략자"라고 발언했다며 비하하고 노골적으로 비판했던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이 장로는 바로 대응하려 했으나, 정확한 사실 관계에 자신이 없어서 대응하지 못했다고 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실제로 노 전 대통령은 "침략자"가 아니라, "점령군"이라는 매우 역사적 근거가 확실한 발언을 한 것뿐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아 이야기하면 "반미, 종북"이라며 무리하게 비판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이처럼 "식견이 넓고, 지식이 정확하면 순간순간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며 청년들에게 학적인 도전을 주었다.
두 번째는 현 정권의 인사 악습에 대한 재미있는 분석이었다. 정권 초기에 주요 단체장들은 대부분 병역 미필, 위장 전입, 부동산 투기 등의 부도덕한 전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런 전력과 약점을 통치권자가 잡아 두고두고 이용하면서 함부로 대들지 못하게 하기 위한 술책이라는 것이다. 식민 치하와 해방 이후 미 군정 시기에 미군이 "친일"이라는 민족사적 약점을 볼모로 사람을 기용하고 조종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때부터 우리나라가 비틀어진 것이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뼈아픈 분석도 잊지 않아서 마냥 재미있어할 수는 없었다.
▲ 강의 후 뒤풀이로 "푸른역사" 앞 순대국 집에 왔다. 기독청년아카데미의 강의는 수강생들의 자발적인 뒤풀이에서도 계속된다. (사진 제공 김태훈)
이후 30여 분간 진행된 질의응답을 통해 수강생들의 실존적인 질문이 공유되기도 했다. 민감한 사안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을 묻는 다소 도발적인 질문 공세도 많았는데, 하나하나 차분하고 솔직하게 응답해 주면서, 수강생들의 잘못된 전제를 지적하기도 하고, 삼단논법이 쉽게 빠질 수 있는 논리적인 비약을 바로잡아 주기도 했다. 연륜과 깊은 학식이 없으면 가능하지 못할 법한 대답들이 첫 강의를 더욱 풍성하고 역동 차게 해 주었다. 질의응답까지 모두 마친 후 10여 명의 수강생은 뒤풀이 장소로 옮겨서 못다 한 이야기와 고민을 나누기도 했다. 기독청년아카데미의 강의는 강의 전 식사 교제와 강의 후 뒤풀이까지 참석해야 강의를 온전하게 듣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첫 강의는 자랑스럽고 떳떳한 사건들보다는,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많았고, 노 교수의 역사적 탄식이 청년들이 가슴에 오롯이 다가와 큰 울림을 선사한 시간이었다. 내용적으로는 한국교회의 재건 활동과 미 군정하에서 받은 큰 혜택을 맞물려 생각해 볼 수 있었고, 해방 이후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일제 청산 운동이 왜 안 되었는지를 제대로 알 수가 없음도 배웠다.
한편, 친일 문제 관련해서는 교회의 정체성을 지켜야 했다는 진보적 입장과 교회를 계속 유지했다는 보수적 입장이 첨예하게 부딪히며, 이런 논점은 이후의 역사에도 계속 반복되기 때문에 앞으로 더욱 엄밀하게 공부해야 함을 깨달았다. 특히나 오늘날처럼 역사적 과오를 자본과 권력의 힘으로 희석하면서 합리화하려는 세력들, 그리고 불의로 정의를 억누르려는 자들이 횡행하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추운 겨울날, 한국교회의 어두운 현실을 따뜻하게 밝힐 청년들이 이렇게나 많이 모인 것이 아닐까. (뉴스앤조이제공)
2012년 01월 10일
>> "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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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의 부패에 기독교인들 책임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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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열 장로의 해방 후 교회사 특강 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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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스크 승인 2012.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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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훈 (hooni0320)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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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만열 장로는 해방 후 신학교가 교단 분열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는 "한 교단에 두 개 이상 신학교를 세운 것은 교단 내에 파벌을 형성한 주요 이유 중 하나"라고 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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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앤조이> 후원으로 기독청년아카데미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만열 장로의 "해방 후 한국 교회사 특강" 두 번째 시간에는 신학교 재건 역사와 미 군정과 교회의 관계에 대해서 공부했다. 이 장로는 이날 감기에 심하게 걸려 목소리가 온전치 않았지만, 70세가 넘은 나이가 무색할 정도의 더 가열찬 기운으로 두 시간가량의 강의를 소화했다. 푸른역사 강의실에 빼곡히 모여 앉은 60여 명의 기독 청년들이 마음을 모아 힘을 불어넣어 주며 열심히 배우려는 비장한 기운도 가득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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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교 재건과 교단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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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장로는 먼저 "해방 후 신학교는 교단 분열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서로 세력화해서 하나의 신학교 만들었다. 한 교단에 두 개 이상의 신학교를 세운 것은 교단 내에 파벌을 형성하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다"고 말하며 강의를 시작했다. 해방 직후 한국교회에 주어진 시급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교회의 재건과 함께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 재건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순조롭지 못했다. 일제 잔재 청산 문제와 교회 재건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갈등과 분열이 잦아지면서 신학교 재건 문제도 교권 쟁탈전의 한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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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신학교가 교단 정치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총회 직영 신학교를 졸업해야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장로는 "신학교가 총회 직영이 되면서 교단 지도부를 구성하는 정치 세력의 신학적 성향이 신학교 교육의 내용과 방향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 되었고, 신학교가 교단 정치에 휩쓸리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신학교가 교단의 지원하에 있으면 교단의 정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교단이 원하는 신학으로 신학교를 제압하고 있다. 총회신학교와 고려신학교는 교단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고 있다. 너무 심하다고 할 정도로 교단의 간섭을 많이 받는다"며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신학교와 교단의 밀접한 관계에 대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그래서 합동신학교처럼 교단에 소속되지 않은 신학교도 생겼다"라며 본인이 공부하고 가르치기도 했던 학교를 소개했다. 이 장로는 박사과정 중에 1985년에 합동신학교에서 정식으로 신학을 공부했고 신학생들에게 교회사를 가르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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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 영감설 강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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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서 축자영감설과 목적영감설에 대한 신학을 소개해 주었다. 성경의 한 글자 한 글자에 영감이 있다는 주장과, 구원의 목표에 대한 영감이라는 두 주장을 칠판에 직접 기록하면서 자세하게 설명했다. "바르트 이후에 보편화한 영감설은 원어 성경 자체의 영감설보다는,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통해 말씀하시는 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입장이다. 하나님께서 성경 읽는 사람에게 말씀해 주시는데, 그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뜻이다. 한편, 비평학은 문자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사회 문화에 대한 것도 따진다. 그러면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적 말씀이라기보다 상대적인 말씀이 된다. 예를 들어 구약의 보복법이 함무라비 법전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축자영감론자들은 "그렇게 볼 수 없으며, 두 법이 의도하는 것은 다르다고 주장한다"고 설명했다. 성서신학에 대한 전이해가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간단하게 풀어서 쉽게 설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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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단, 미 군정과 기독교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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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교회사 이야기로 돌아와서 "분단과 기독교와의 관계" 부분을 다루었다. 이는 "상당히 중요하다"고 말하며 구부러진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실제로 한국사 연구자들 가운데 분단과 관련해서 기독교에 책임을 묻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이념적으로 반공을 주장했고 휴전 당시에도 휴전을 반대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이 장로는 "이런 문제는 민족사에서 기독교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기독교의 위상 또한 그렇다. 극우적 지도자의 교회(김홍도 목사의 금란교회 같은 교회)는 지금도 이념적으로 너무 극우의 입장에 치우쳐 있다. 남북 관계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다른 사상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며 김홍도 목사가 작년에 "쓰나미가 하나님의 심판"이라 말했던 것을 극우적 관점의 예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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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대한 신학적 해석으로서 "성경을 보면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적과 싸우기도 하지만, 신약에서 예수님이 보여 주신 모습은 싸우는 것이 아니다. 나눠 주고 양보하고 매 맞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따르는 것이 기독교다.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부활의 승리가 올 수 있다. 기독교 정당에서 주장하는 것도 그래야 한다. 종북 세력 척결을 위해 기독교가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오늘날 반복되는 역사적 과오를 질타했다. 또한 "교회 내에 아직도 극우주의자들이 더러 있다. 참 안타깝다. 안타깝다"며 안타깝다는 말을 연신 거듭했다. 아픈 가슴을 애써 쓸어내리는 듯한 표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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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미 군정과 교회의 우호적 관계에 대해서도 직격탄을 날렸다. "성공회와 구세군을 제외한 대다수 교단은 미국에서 전래하였다. 교회나 선교 단체에서 미국인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교회는 대체로 친미적이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미 군정에서 일한 한국인 관료 중에 기독교 신자가 많은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많은 기독교인이 미 군정의 관료나 통역으로 일하며 이른바 통역정치를 통해 해방 정국에서 긴밀한 영향력을 미쳤던 것이다"며 준비한 PPT 강의안을 세밀하게 읽었다. 또한 "미 군정 소속의 선교사와 선교사 후손들은 군정청의 관리나 고문이 되어 교회에 큰 힘이 되었고, 이에 미 군정은 친기독교적 태도를 보였다. 연합국 최고사령관 맥아더 등의 미 군정 담당자들도 공산주의와 같은 전체주의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건국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기초로 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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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만열 장로가 목감기에도 불구하고 60여 명의 기독 청년들에게 열강하고 있다. (사진 제공 기독청년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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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에 우호적인 미 군정의 태도를 잘 보여 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는 일제 재산의 처리 문제였다. 일본 종교 단체들이 남기고 간 많은 재산이 미 군정의 관할을 받는 적산(敵産)으로 분류되었는데, 그 자리에 교회나 학교와 같은 백 개가 훨씬 넘는 기독교 시설이 들어섰다. 그에 대한 실례로 "영락교회도 터를 잡았을 때에 그런 식으로 얻었다"고 소개했다. 이처럼 일본 신사와 조합 교회의 재산 대부분이 기독교에 불하되었던 사실은, 오늘날 그 정당성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을 안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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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탁통치에 대한 교회의 태도 아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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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관계를 충분히 고민하며 생각해 볼 여유 시간 없이 강의는 계속 이어졌다. 그만큼 다루어야 할 중요한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순서대로 국가 재건 시기 신탁통치 논쟁에 대해 다루었다. "세 가지 노선(중도파, 좌파, 우파) 가운데 한국교회 대다수가 따랐던 것은 친이승만계 노선이었다. 해방 정국에서 남한의 교회는 반탁 및 단정 노선을 지지함으로써,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 수립에 기여했다. 교회는 당시 한국 사회의 다양한 건국 운동 세력과 대화하거나 연계 맺기 어려웠다. 당시 우파가 압도적이었던 교회 내에서 좌우 합작을 주장하는 일은 금기에 가까웠다. 당시 중도파나 좌파가 절대다수를 점했던 남한 전체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종교들의 정치적 태도와 비교해 보더라도, 해방 정국에서 개신교의 일관된 우파 성향은 두드러졌다"며 다소 복잡하게 꼬였던 교회의 신탁 논쟁에 대한 견해를 간단히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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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붙여 이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담도 밝혔다. "영락교회 같은 곳에서 통일 문제를 강의하면 살벌함을 느낀다"고 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해 강의를 하면, 어떤 사람이 "공산주의에 대해서 무엇을 아느냐"고 물어보며 따졌다고 한다. 부모가 북한에서 희생당한 모습을 보고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들에게는 이처럼 역사적 트라우마(심리적 외상)가 강하게 있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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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지금 와서 과거 신탁통치 문제를 더 지혜롭게 처리해야 하지 않았냐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고 한다. 해방된 지 67년이 지났는데도 통일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통일 정부를 세우려고 투표를 했다면 공산당 지지자가 더 많이 나타났을 것이라 우려하는 사람도 있다. 이에 대한 이 장로의 입장은 "만약 당시 신탁통치 반대 세력이 강했다면, 북한도 같이 반대했더라면 통일이 일찍 이루어졌을 것이다. 북한에서는 반탁론자들이 희생당하고, 남한에서는 친탁론자들이 희생당했다. 당시 신탁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이었다는 주장에 대해 오히려 반탁으로 일원화되었다면 통일이 빨라졌을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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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정권의 부패에 기독교인들의 책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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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서 "기독교 정신을 토대로 국가를 재건해야 한다는 주장이 해방 정국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며 기독교 국가 재건론의 화두를 던졌다. 초대 정부의 기독교 영향력은 정부 내 고위직 가운데 기독교인이 많았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초대 국회의원 208명 중 약 21%인 44명이 개신교인이었을 정도다. 이는 당시 인구 대비 신자 비율이 5%에도 미치지 못했던 점에 비춰 보면 매우 높은 비율이다. 여기서 "이승만 정권 내의 높은 기독교인 비율은 그 정권의 부정과 부패에 기독교인들의 책임이 적지 않음을 말해 준다.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하여 앞의 여러 통계와 설명 내용을 제시한 것"이라며 기독교인들에게 이승만 정권의 부패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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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에 우호적이었던 미 군정, 교회와 정치가 분리될 수 없다는 생각, 공산주의에 대한 위기감, 해방 정국의 열띤 국가 재건 분위기 등도 기독교인들이 현실 정치 및 건국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이는 "하지만 정치와 선거 같은 여러 민주적 제도에서 기독교 정신이 잘 드러나야 하는데, 부정 선거 등으로 잘못된 사례를 남김으로써 기독교 정권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승만 정권 시기에 민주주의를 근착시키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한편 "해방 이후 한층 제고된 기독교의 위상과 풍부한 교회의 인적 자원은 기독교인들이 해방 공간에서 많은 정치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었다"며 긍정적 역할도 짚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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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 있는 교회사의 재밌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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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북한 교회의 입장은 시간상 빨리 넘어갔는데, 대신 이 장로가 북한에 방문하여 직접 본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김일성 어머니인 강반석의 무덤에 한문 성이 진주 강(絳)으로 쓰여 있다. 원래는 편안할 강(康)이어야 하지만 잘못 쓰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관계자에게 지적하긴 했지만 듣고 고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재미있게 이야기했다. 또한 "북한 기독교 인구의 1/3이 가입한 북조선기독교도련맹의 1기 총회장이 김익두 목사이다. 황해도 신천박물관에 가보니 첫 방에 "미제 앞잡이 선교사 놈들"이라는 글귀를 적어 놓았다. 옆에 그 앞잡이가 된 한국 사람을 나열해 놓았는데, 거기에 김익두도 포함되어 있다"며 생생한 경험담을 소개해 주어 수강생들의 주의를 환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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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이 장로는 1982년 미국을 여행할 때부터 시작한 여행 기록을 담은 여행 일기 중 민족 통일 문제와 관련된 일기를 모아 <민족통일여행기>(지식산업사, 2005년)이라는 책으로 엮었다. 이 장로가 저술하거나 관여한 서적과 많은 학술 자료들을 살펴보면 얼마나 깊고 오래, 또한 폭넓게 연구하고 활동을 해 왔는지 알 수 있다. 가히 "걸어 다니는 역사 교과서, 살아 있는 교회사"라고 불릴 만하다. 공적으로 출판 및 발표된 내용 외에 이 장로 개인이 깨닫고 경험한 내용을 이렇게나 가까이서 직접 듣고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가슴이 벅찼다. 이 장로가 강의 말미에 "시간 맞추는 재주가 없어서…"”라며 질의응답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하고 강의를 마친 것을 미안해했지만, 수강생들은 적잖은 배움과 감동을 받은 덕에 "괜찮다"고 무언(無言)의 감사 인사를 건넸다. 충분히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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