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논의에 대한 몇가지 답변 -이세령
글쓴이: 이세령 날짜 : 2003/11/20 조회 : 150
논의에 대한 몇가지 답변
1. 날짜 경계선에 대해서
언약의 하나님에 대한 오해이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기계적인 도식적인 하나님으로 만드는 오류이다. 반대로 구약의 이스라엘이 24시간 정확히 지켰다는 증거를 대보라. 그래도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언약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고, 안식일은 언약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논리는 논리를 부른다. 그래서 인격적인 언약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요긴하다.
2. 실험적인 문서가설에 근거한 신앙고백에 대한 판단
문서설 혹은 편집설은 가설에 불과할뿐이며 그것도 결코 증명될수 없는 가설일뿐이다. 가설을 가지고 신앙의 고백의 틀 범주를 건드리면 안된다. 노아 홍수에 관련된 창6장과 7장의 문서 구분은 더더구나 학계내에서도 반박되는 상황이다. 웬함의 창세기 주석에 나타난 정교한 교차대칭 구조를 살펴보라. 우리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이 우리 역사에서 우리 정황에 맞게 우리 손으로 고백되어 만들어지지 않았기에 처음부터 친근감있게 교육되지 못하는 현실의 반성이 지적될수 있다해도 본질적으로 믿음안에서 같은 형제들의 고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지향하고 있다.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항들의 수정과 그리고 선교와 성령에 대한 현대미국 장로교회의 수정안에 적극적인 수용은 고백의 변화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논리의 시험 무대인 학계에서도 공히 공감되지 않는 가설로 공교회의 고백을 공격하는 것은 지나치다. 심지어 공교회적인 배경을 가진 진보적인 성경학자들의 글을 보라. 가설에 불과한 문서설을 가지고 자신들의 교회의 고백을 폄하하지 않는다.
3. 율법의 신구약 단속과 연속에 대해서
율법은 신약에도 동일하게 유효하다. 완성되었을 뿐이다. 성전과 관련된 제의 의식들과 폐지되기는 했지만 삭제의 의미에서 폐지가 아닌 완성의 의미에서 폐지이고, 완성의 일부분일뿐이다. 그리스도를 통한 신구약의 연속성은 향후 더 많이 강조되어야 할 부분이다. 구원을 얻는 수단으로서의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한 측면을 강조하는 것은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이 받아들이는 율법의 제3용법을 거부하는 것이다. 완성이 의미하는 부요한 의미속에 한 부분이 폐지일뿐이다. 모두 폐지라는 근거가 없다.
4. "아직"도 기다리는 안식
안식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전히 누려지지 않고 있다. 히4장은 안식에 대해서 "아직"이라고 말한다. 완전히 성취하는 때가 남아있다. 따라서 여기 지금이 천국인 것처럼 모든 것이 없어진 시대라고 보는 것이 무율법적인 태도이다. 사랑의 법의 구체적인 내용이 바로 그 율법이다.
5. 안식 후 첫날로서 "주의 날"의 주일됨에 대해서
그리고 계2:10의 주의 날은 구약과 신약의 주의 날과는 용어와 개념이 다른 안식후 첫날 개념이 교회속에서 정착된 개념이다. 안식후 첫날은 비록 일상적인 날짜 헤아림의 수단이었지만 신약에서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부활과 주일의 회집을 말하는 것 외에 사용하지 않는다.
계시록의 주의 날은 "헤메라 투 쿠리우"가 아니라 "쿠리오케"입니다. 이것이 성경 외에 첫 용법으로 등장하는 시점과 한세대도 차이가 나지 않는 주일을 가리키는 말이다(주일 회집으로 쿠리오케를 언급하는 것은 플리니의 편지, 이그나티우스의 편지, 디다케, 베드로복음서등인데 모두 2세기초 중반의 기록들이다). 이것은 보캄에 의해서 잘 설명되었고 아직 반박되기 보다는 중요성이 더해가고 있다. 이것은 양낙흥 교수의 글에도 지적되었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말하는 안식일에서 주일로의 날짜 전환에 있어 정경적 근거의 중요한 기반으로 그 중요성이 더 깊이 인식되고 있다. 부활을 근거한 주일의 개념이 아직도 남아있는 안식을 위한 안식일의 연속으로 작용되는 근거가 있다. 정경이 수용되듯이 부활에 근거한 안식 후 첫날 혹은 주의 날의 수용이 사도시대를 통해서 잘 확립되어 갔다.
하여간 주일이 교회의 회집의 날로서 의와 공평을 기반하여 땅위에 하나님의 안식을 선포하는 거룩한 날로서 지켜져야 함에는 변함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