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보수교계 입장에서, 현 교계 실상에 대한 비판 발언 몇 가지 소개
글의 순서
1.교회 내 여자의 위치에 대한 비판
2.목회자들의 박사학위에 대한 비판
3.주일예배 형식화와 율법화를 비판
4,타교회 교인 끌어 오는 전도 비판
5.찬송을 변질시킨 것에 대한 비판
6.목회자들 사욕채우기에 대한 비판
7.박사학위 대신 십자가 촉구하는글
8.예배의 타락 탈선을 비판 하는 글
9.예배당과 성도의 구원을 혼동비판
10.목회자의 권위와 욕심에 대한 글
11.사순절 등으로 변질 되는 부활절
글쓴이 : 박0 날짜 : 2004/04/15 조회 : 15
1.성경 속의 여자
벌써 터져버려야 할 것이 늦게나마 터지고 나니 곪아 썩어져 악취를 풍기
던 것이 이제는 그 마지막 발악을 부리고 있다. 마치 여자들이 때를 기다
렸다는 듯이 말이다. 결국은 평등이라는 것을 빌미로 여권신장이요 남자
의 머리가 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들도 그 가증한 손으로 남자의 머리
에 손을 얹고 안수하겠다는 말이다. 하기야 남편이 성도요 장로요 집사라
면 얼마든지 목사로서 안수할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다른 여러 말로 이유를 들기 전에 불신의 세상에서도 이런 법은 존
재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련한 인간들에게 자연(특히 동물의
세계)을 통해서 배우게 하였고 그보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계시(성경)
를 통해서 엄격하게 규제를 하고 있다.
하와가 타락하여 범죄하기 전에도 이미 여자는 남자의 부속품(지체)인 하
나의 갈비뼈로 만들었으며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니
라(창 2:23)"고 하였다. 그리고 여자를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아담의 "돕
는 배필(창 2:20)"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하와가 범죄한 후의 결과는 단순
히 돕는 배필로서가 아닌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
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
릴 것이니라(창 3:16)고 전보다 더 엄격한 법으로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더 이상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여자라는 이름 그 자체만으로도 결코 남자의 머리가 될 수 없으
며 더욱이 남자를 주관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세워놓았다.(딤전 2:12 - 여
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종용할지니
라. 그 이유를 딤전 2:13-14 -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
라 고 하였다.) 이러한 법 아래 있던 초대교회 당시에도 여자들의 소란함
과 교만심은 고린도교회를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그 당시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전에는 많은 여 사제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매춘행위로 자신들의 목숨을 이어가며 살았다. 이러한 세상풍습
을 바라본 바울의 심정은 마치 세상의 여 사제들을 보는 심정에서 한 말
이 아니겠는가 라고 생각도 해 본다.
그러나 이러한 법이 시대에 밀리고 환경에 밀리고 평등이라는 것에 속고
여권신장이라는 발악에 기가 죽고 권위를 자랑하던 총장님들도 박사목사님
들도 모두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역시 치맛바람
이 거세긴 거센가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기독평론신문」4면에 이봉룡이라는 여자가 자신도 목
사라고 "여목(女牧) 당위성에 대한 성경적 고찰"이라는 글을 올렸다. 참으
로 가소롭기까지 하지만 하나의 성경적 근거라고 하니 부득불 간략하게 밝
힌다.
막15:38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운명하실 때"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된 것은 이제는 누구나 지성소에 들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하였다. 또 이어서 히10:19-20 말씀을 이용하
여 이 휘장 사건의 증거와 증언을 토대로 칼빈은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하
였으며 이것이 장로교인데 여목은 강단에 설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찢으신 휘장을 다시 닫으려는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말
하면서 마치 유대교의 오류를 재현하려는 무지의 소치라고 하였다. 그리
고 또 이런 자들은 십자가를 부인하는 자들이라고까지 하면서 비아냥거리
고 있다. 그리고 막7:8-9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라고 한 말씀을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고 하였다.
먼저 이봉룡씨가 이용한 성경은 전부가 여자 자신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임
을 깨닫기 바란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과 여자가 목사가 되는 것에
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말씀이다. 또 막7:8-9을 인용해서 한 말은 참말로
적반하장인 격이다. 본인이 인용한 말씀들을 볼 때 누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으며 또 누가 창조의 질서를 어지럽히며, 단순히 남자에게 도전하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도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자들을 깨달아
야 한다. 여기 칼빈의 만인제사장설을 논하고 있는데 그러면 칼빈은 디모
데전서 강해를 한번 읽어보기를 바란다. 칼빈은 딤전2:9에서 "염치와 정절
로 자기를 단장하고" 라고 하였는데 여자들은 자신들이 지은 원죄의 염치
를 반드시 깨달아야 하며 기저귀의 썩어 죽은피를 볼 때마다 하나님께 도
전했던 염치와 부끄러움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위에서 언급한 대
로 여자들은 남자를 주관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남자의 다스림을 받아
야 하는 것이 여자라고 이름하는 것 그 자체에 있으며, 또 아울러 창조와
함께 받은 질서의 근본임을 깨닫기를 바란다.
이봉룡씨에게 다시 재론하고 자 하는 것은 이봉룡씨가 성경적인 근거한 말
씀과 바울이 인용한 고린도전서나 디모데전서의 말씀을 생각해 볼 때 어
떤 말을 더 섬기며 더 지켜야 하는가를 깊이 깨달으시기를 바란다. 이봉룡
씨가 언급한 말씀에서는 여자가 목사가 되어도 된다는 근거는 어느 주석학
자도 그런 어거지식의 해석을 한 일은 없다.
여자들이여! 들으라 하나님의 계명을! 성경은 어느 시대 어느 누구에게나
항상 현실적으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여자들은 아마도
창조론이나 고린도전서 11장이나 목회서신이라고 일컫는 디모데전서는 평
생 읽지를 못할 것이며 또 읽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것을 읽는 날에는 자
신들이 불법자임을 알기 때문이다.
바울은 깨닫지 못하는 여자들에게 그 이해력을 돕기 위해 지체를 들어 설
명을 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들로서 각 지체마다의
본분이 있다고 말이다. 왜 하나님께서 남자만 만들든지 아니면 여자만 만
들든지 하시지 않고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는가 말이다. 또 이봉룡씨가 갈
3:28을 언급했는데 그 말씀은 남자나 여자나 같은 인격체로서의 동등을 말
한 것이지 질서로서의 말씀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 상고하여 보시기 바란
다. 그래서 더 확실하게는 남자와 여자는 둘이 아니요 하나이라고 하셨는
데 한 몸에 머리가 둘이라면 그것은 병신이요 기형인 것이다. 그리고 지
체 중에도 다른 어떤 나타나는 부분에서 만드신 것이 아니고 가슴 살 속
에 뭍인 갈비뼈로 한 것은 여자는 감추어지므로 그 본분을 다하도록 한 것
이다. 그런데 갈비뼈가 가슴살을 찢고 밖으로 튀어 나왔다면 그것은 빨리
수술을 하여야 한다. 그리고 원위치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문화의 발달이 낳은 것 중에 가장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는 것이 있다
면 여자들의 사회진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여자들은 그 말
을 인정하지도 안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곧 이혼율 1위의 때가 머지 않았다. 이 모두가 여권신장이라
는 독소가 들어오면서부터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음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
이다. 게다가 호주제 폐지론 자들의 망령이야말로 결국에는 가정의 법도마
저 허물어버리자는 것이다. 한 말로 자신의 씨도 근원도 모르는 무법자들
이라고 하면 맞을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가정의 원리는 결코 그럴 수
는 없는 것이다. 가정의 파괴가 사회의 파괴로 국가의 파괴로 인류의 근본
질서를 파괴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특히 고린도전서 11:1-16 까지는 교회가 여자들을 향한 경고장이다. 그리
고 16절에 가서는 이렇게 단호한 말씀으로 입을 막아버린다. "변론하는 태
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
가 없느니라고" 말이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이방신들을 섬기는 여 사제들
에게 있을 법 한 일들을 교회에서 행해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봉룡씨 당신이야말로 주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법도를 저버린 유대교주
의가 아닌가요?
이 모두가 말씀을 떠난 교회, 말씀을 떠난 목사들의 소행이 아니고서 어
찌 한점의 두려움도 없이 여자에게 삼위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며 안
수를 한다는 말인가.
현재 한국의 무인가신학 인가신학 거의 대다수가 여자목사제도를 폐지하
면 신학교 자체가 마비가 된다. 그러므로 신학교 최우선의 생존 수단이 여
목제도이다. 이 모든 교단의 신학교들이 보수요 심지어는 칼빈주의라고까
지 하고 있다. 이들 신학교들은 이미 하나님의 법을 떠나 예수를 팔아먹
은 가롯유다와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가! 한국이나 세계 어느 나라이건 진
정으로 하나님의 사명을 받들어 신학생을 양육하고 있다고 하나님 앞에 부
끄럼 없이 대답할 신학교가 과연 몇이나 존재할 것인가? 특히 한국의 신학
교들은 회개를 하여야 한다. 지금도 엉터리 학위를 사고 파는 신학교며 목
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학위를 준 자들도 문제이지만 그것을 당연하게 받
은 자들 또한 회개하여야 할 것이다.
감신대 기독교윤리학 교수이신 박충구씨가 "성차별은 한국교회의 전근대
적 구태"라는 글을 썼는데 참으로 여자목사를 인정하는 교단의 교수답게
글을 썼다. 그런데 여러 말로써 평하기 전에 "여성들에게 부여하신 하나님
의 거룩한 형상"이라고 하였다. 또 "기독교의 경전을 문자적으로 읽는 보
수주의자들의 비판능력 없는, 치유 불가능한 비이성적 주장에서 극단적 형
태로 나타난다"라고 하였는데, 그러면 여자들이 경전의 법에도 없는 목사
가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부여하신 거룩한 형상인가요? 그래서 무식한 목
사들에게 경전이 지체를 들어 바울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요! 경전이 문
자적이든 아니든 간에 여자가 해야할 것과 남자의 할 것은 반드시 구별되
어져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답이다. 성경의 윤리를 떠난 문화적이요 시대
적인 윤리는 진리가 될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바울이나 예수 그리스
도께서는 결코 여자들을 소홀히 대하거나 경망되게 대했다는 사실이 없다.
그러함에도 여자를 사도로 부르시지 않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말
씀이시기 때문이며 또한 창조의 법이요 질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
만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에는 이러한 규례가 없다고 일축해버
린 의미를 깊이 깨달아야 한다.
이제는 불법으로 안수한 남자 목사들과 교단들이며 신학교들에게는 회개하
는 길만이 살길인 것을 깨닫기 바란다.
본인은 모든 글을 올릴 때마다 칼빈의 성경사상을 종종 기록하여 하나님
말씀의 거룩함을 더 높이고자 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 외에는
어떠한 곳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 외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떠한 것도 생각지 않을 것
혹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 정신이다.
.............기독교 강요 중에서.............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 당시에도 수많은 여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가
돕는 자들로서 그들의 임무를 즐거이 수행했다. 바울도 예수님을 본받아
여자들을 제자로 삼지를 안았다.
이제 우리는 다시 남자와 여자라는 창조의 원리로 되돌아가 보자 창세기
2:24에서는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
을 이룰지로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남자와 여자는 결코 둘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더욱 중요하고 본질적인 여자의 의미는 여자가 남자에게 속해
있을 때 비로써 여자로써의 존재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남자를 돕는 배필
로서 말이다. 위에서도 밝힌바 대로 한 몸에서 결코 머리가 둘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타락이 무엇인가? 바로 자리의 이탈이다. 하나님의 번성과
충만의 명령은 남자만으로도 아니며 여자만으로도 아니다. 다만 그 둘이
하나일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의 존재의 의미는 남자 속에 있
을 때 그 빛이 나타나는 것이다. 다른 흙에서가 아닌 남자의 부속품의 하
나인 갈비뼈에서 여자를 창조한 의미를 한번 더 깊이 생각들 하시기 바란
다.
그러니 남존여비사상이니 가부장제도니 평등이니 여권신장이니 호주제 폐
지니 하는 따위의 망령들일랑 던져버리시고 말씀에 순종하셔서 돕는 배필
인 아내로서 사모로서 아름다운 여자의 길을 가시기 바랄 뿐이다.
"그대들은 하나님께서 이름 한 여자이기 때문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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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0 날짜 : 2004/04/15 조회 : 30
2.고신에는 가짜 박사가 없는지요?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그 학위가 우리나라의 신학박사 학위가 아니고 외국의 학위일 경우 정말 자기 손으로 자기 지식으로 영어로 혹은 다른나라의 말로 논문을 쓰고서 받은 학문인지를 조사해 보시면 참으로 깜짝 놀랄 분이 그런 학위를 소유하고 박사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고신의 선배들이 아니면 옥중에서 순교한 고신의 선조들이 아신다면 예끼놈 하고
볼기를 치실 것이외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 되는 강단에서 박사가운이라! 외들 그러십니까? 칼빈이 그렇게 가르치셨던가요?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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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0 날짜 : 2004/04/15 조회 : 20
3.안식일과 주의 날에 대한 오해
이 글의 제목을 붙임에 있어서 조금 망설임이 없지 않았다. 왜냐하면 안식이라는 말과 주일이라는 의미는 어떻게 보면 같은 의미인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율법이 미완성품이라면 복음은 완성품의 차이이다. 그러면 복음에는 율법이 필요가 없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간단한 예로 간음한 여인을 바리세인들이 예수 앞에 세웠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율법으로 떳떳하게 예수 앞에서 복음과의 한판 대결을 벌렸다. 하지만 결과는 넉 다운으로 완패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너를 송사 한 율법은 어디에 있느냐! 물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주인이신 주님마저 나도 너를 정죄치 않는다고 하시고 다시는 범죄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율법의 요구를 하셨다. 복음은 율법을 폐함이 아니요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심이 주님께서 의도하시는 것이다. 정죄의 법인 율법과 용서의 법인 복음 말이다.
이제 조금 이해가 되었으리라 생각하고 안식일과 주의 날(주일)의 의미를 바로 깨닫고 그동안 안식의 율법에서 벗어나 복음의 주의 날로 환원하기를 바란다.
아직도 우리의 신앙하는 용어에서도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보다 여호와 하나님이 더 위대하고 높아 보이고 또 익숙해 있다. 그리고 예배당이라는 용어는 잊은 지 오래고 교회보다 성전이 더 거룩하게 느껴지며 예배라는 말보다 제사라는 말이 더 권위가 있고 실제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며, 강단이라는 말보다 제단이 더 권위 있고 거룩해 보이고 십일조는 참으로 엄숙하고 귀한 제물처럼 여기고 연보는 푼돈을 내는 듯 별스럽지 않게 여기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율법과 복음에 대한 이해의 차이이다. 더 크고 놀라운 차이는 종의 개념과 백성의 개념에서의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과 자녀의 개념에서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차이 말이다.
우리의 신앙은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참 의미도 모른 체 얽매인 신앙이요 율법의 종노릇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곧잘 성수주일이라는 말을 잘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목사들의 입에는 성수주일이 복 받는 지름길이라고 빠짐 없이 외쳐댄다. 과연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성수주일인가? 저도 목사고시에서 주일성수에 대한 시험을 치른바가 있다. 그 중에 중요한 것의 하나가 사사로운 일이나 오락을 금하는 것이며 더욱 실제적인 것은 가난한자 병든 자 시험에 든 자들을 방문하여 그들을 위로하고 기도하고 구제하며 또 이웃에 전도하는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 공동체적인 의식적인 예배는 필수적이지요, 이제 우리는 주의 날(주일)에 대한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전에 위에 나열한 시험의 답안처럼만 지켜진다면 참으로 성수주일을 했다고 해도 참으로 위대한 것입니다.
주일의 본론적인 입장을 말하기 전에 세계는 고사하고 현 한국교회들의 주일의 개념과 예배나 성수주일의 개념은 과연 어떠한지 한번 짚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 1부 2부 .....이단으로 이름난 성락교회는 10부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면 과연 수많은 부들로 나누어서 예배하는 목적은 무엇일꼬? 그 중에 제일 보편적인 예로 아주 순수한 입장에서 한 가족의 전체가 다 집을 비우고 예배에 참석을 못하니까, 1부나 2부에는 늙은이들이 3부 메인 예배는 아빠 엄마와 가족들이 참여하기 위해서 시행한 것으로 아주 좋은 의미로 받아드릴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러나 오늘의 몇 부로 나누어 드리는 예배들의 개념은 완전히 인본주의 길을 열어놓은 것일 뿐이다. 주일이지만 급한 일 관계로 부득이하게 출타해야 할 경우이다. 이런 이유는 인간적으로 볼 때는 참으로 이해가 가며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러나 현실의 경우는 그렇지 않고 참으로 낯뜨거운 일들로 1부나 2부에 참여하고 그래도 축도는 받아야 복을 받을 터이니 축도가 끝나기 무섭게 뒷좌석에 앉았다가 출행랑을 놓는다. 이러한 관행들이 성도들을 끌어 모으려는 인위적인 것인 반면에 그 이면의 문제는 오히려 성도들에게 주일을 범하게 하는 악법을 자행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더욱 문제는 주일 한 날을 지킴에 있어서도 어떻게 하면 쉽게 편하게 자유스럽게 지키려 하는 자들이 안식일이 아닌 주의 날(주일)의 의미를 알 리가 있겠는가? 율법의 안식일은 7분의 일일이다. 율법의 십일조는 레위인을 제외한 열한지파가 드리는 십분의 일이다. 신약의 주의 날(주일)은 주의 첫날이며 또 그 첫날의 의미는 모든 날을 의미하며 연보는 모든 것이 주의 것임을 알고 즐겨드리는 전부의 개념이다.
이제 본론적인 주의 날(주일)의 의미를 새겨보고자 한다. 아직도 교회나 목사들이 성수주일을 강요하는 뉘앙스는 다른 날들은 별 의미가 없고 주일 그 한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들이 어떤 삶을 살았건 간에 주일만 열심히 지킨다면 일단 그들의 신앙에 좋은 점수를 준다. 물론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신앙의 입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하긴 목사가 성도들을 일일이 따라다니며 그들의 삶을 지켜볼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부모도 자식들을 그렇게 할 수 없음과 같다고 하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가정이나 교회가 어떤 교육을 어떻게 가르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예배에서 무엇을 드리며 무엇을 받아 오는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가인과 아벨은 다 같이 하나님 앞에 자신들이 거두어들인 제물들로 하나님께 드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열랍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는데 그 중요한 문제는 가인에게는 네가 악하므로 분을 내는가? 하시고 아벨에게는 아벨과 함께 제물을 받으셨다고 하셨다. 하나님 앞에서는 제물을 드리는 그 한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제물을 드리기까지의 삶이 어떠했는가? 말이다.
이와 같이 주의 날(주일) 역시 1부 2부 ......드리는 예배의 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주간의 삶을 어떻게 드리고 있는가? 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천주교 신자들이 오히려 우리보다 깨끗하고 솔직한 신앙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한 주간을 살아가면서 무슨 죄이든 간에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므로 이제 사함을 받았으니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나온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서 사하여주시던 말던 신부에게 깨끗이 전가하였으니까 말이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주의 날에 대한 의미를 바로 깨달아야 할 것이다. 먼저 우리가 날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여야 한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주의 날(주일)이란 결코 한 날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모든 날을 요구하심이다. 우리는 오순절 성령사건 이후 그들의 삶이란 주의 날이라는 한 날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들은 날마다의 삶이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으며 살아가니 믿는 자들의 수가 날마다 더 했더라는 결론을 얻었다.
우리가 예배에서 중요한 사안의 하나는 성도들과의 교제(코이노니아)이다. 그 교제의 근본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눔에서부터 출발한다. 주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인 형제들이 찾아 왔을 때 주님의 대답은 누가 내 어머니며 누가 내 형제인가? 라고 반문하시며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부모요 형제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눈 자들에게는 모두가 한 가족이다. 그래서 저들은 모든 것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모든 소유를 팔아 골고루 나누고 하나도 핍절한 자가 없었다고 하였다.
예배가 거창하고 오케스트라가 울리고 아름다운 합창이 우렁차고 제사장 같은 목사가 율법을 낭독하고 헌금함이 넘쳐나고 축복기도가 성전을 울리고 축도로 마음 뿌듯하게 돌아간다고 해서 주의 날을 지킴이요 성수주일을 지켰다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의 종교적인 의식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그러함에도 교회들은 색다른 예배의 어떤 의식이나 형식들을 변경해 가며 온갖 프로그램으로 좀더 자극적이고 시각적이며 소위 축제라고까지 하며 법석들을 떨고 있다. 그래서 좀 진보적이요 개혁적이라고 하는 교회들은 열린예배, 드라마예배 등 잔치들을 벌이고 있다.
예배가 군중들을 모음에 목적이라면 이보다 더한 난리들을 피운다고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지만 예배란 교회의 분위기가 거룩하고 엄숙한 예배의식과 철학이 술술 넘치는 설교, 면죄부를 사듯이 수표로 헌금하고 축복하고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하는 바 짐승의 죽은피로 드리는 가증한 제사가 아닌 산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라고 하셨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예배 자를 보지 못하시므로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다.
아직도 한국교회의 예배는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산에서 드리는 우상 앞에 제사하는 식의 무당예배(부흥집회)를 드리며 아니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율법적인 제사(현대교회의 의식화된 예배 즉 천주교식 미사/제사법)를 드릴 뿐,곧 이때라고 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이미 종교화되었으며 "집회는 있으나 예배는 없다"는 서양의 어떤 예배학자가 한국교회를 향하여 한 말이 기억난다.
삶의 제사가 아닌 가인의 제사를 외면 하셨듯이 삶의 예배가 아닌 주의 날이라는 의미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제단이 제사장들이 서서 가증을 떨고 있는 제단이 아니라 우리들의 일터가 제단이 아니라면 우리의 행하는 의식이 제사이든 예배이든 하나님과의 관계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거창한 건물 성전이, 성전이 아니라 우리가 거룩한 성전이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왜 우리의 제사를 산 제사라고 하였는가? 우리가 거룩한 성전이므로 거룩한 제사가 필요하며 우리가 거룩한 것은 우리 속에 거룩하신 분을 모시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므로 성전의 도구가 거룩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도구가 거룩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의 공동체는 삶의 공동체로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지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어떠한 예배도 어떠한 주의 날도 존재적 가치가 있을 수 없다고 하겠다.
이러므로 우리는 성도로서 주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이며 가족이라고 하는 존재는 모두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이요 또 우리들이 살아가는 그 삶이 우리의 삶이 아닌 그리스도로써의 삶이라고 고백했지요 그래서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찬송의 삶이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말 그대로 주의 날(주일)이란 온전히 주님을 위한 모든 날임을 바로 깨달아질 때 비로소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참 예배요 참 주의 날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주의 날(주일)과 거룩한 예배가 회복되지 않는 한 교회는 여전히 예수를 다시 못 박는 성전들이 잡초들처럼 솟아날 것이요 성도들의 피를 제물로 받아 챙기는 제단들과 제사장들이 판을 칠 것이기 때문이다. 가짜 성전들을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된 목자님들이여! 참 성전인 성도들, 주님께서 부탁한 양들을 위해서는 얼마나 애타게 답답하고 가슴치며 애통해 하셨나요?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서 잃은 양을 찾아 광야로 나섰지요.
성도 여러분! 아직도 건물성전이 거룩해 보이고 주의 날(주일)보다 안식일이 더 종교 스럽고 박사가운을 두른 목사들이 제사장처럼 보이시고 예배라는 말보다 제사라는 말이 더 참으로 여기며 푼돈 같은 연보보다 세금 같은 십일조가 좋으시다면 여러분들은 여전히 종의 굴레를 벗지 못함이요 몽학선생의 종들이며 초등학문을 답습하고 있는 존재일 수밖에 없지요
구약의 역사 속에서, 많은 사건들 속에서,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리스도 한 분을 낳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으며, 바울이 왜 그토록 율법과 복음에 대한 의미를 절규하듯 토로하셨을까요? 그래도 건물이 성전이라고 속이며 제사장이 되려하여 제단을 만들며 율법의 요구니 십일조는 당연하며, 일천 번제가 복되다하고, 십계명의 안식일이니 그 날만은 거룩할찌어다 하십니까?
보십시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는 도다(갈 3:25)"라고 하셨으며 참으로 귀하고 또, 더 명쾌한 말씀은 갈 2:18말씀에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셨다. 지금도 유대인들이 통곡의 벽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메시아를 보내주시기를 기도하는 자들과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가요?
이제 성경 한 구절을 소개하소 마치려 합니다. 갈 3:23-29 중에 26절을 보면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율법의 종이 아님이 분명하질 않습니까?
성경 어디에도 어떤 날이 주의 날이라고 한 곳은 없다오 그러니 모든 날이 주님의 것으로 여기는 자들에게는 항상 모든 날에 예배하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결코 절기와 날들에 있지 않고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에게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들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라"고 고백한 바울의 참 신앙을 본 받으며 모든 날들을 주의 날들로 드려지기를 바랍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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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0 날짜 : 2004/04/15 조회 : 10
4.고기 잡으러 가자!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그의 발걸음은 갈릴리 바닷가 어부들에게로 향하신다. 그리고 그들을 부르시면서 하신 말씀이 곧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마 4:17)"라고 하셨다.
그 후 그들은 3년이라는 세월을 사람을 낚는 어부의 교육을 받게 된다. 수많은 기적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복음으로 인한 새 생명의 탄생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 자신
만이 생명의 근원이시며 참 복음이심을 깨닫는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과 함께 그분이 오신 목적을 이루어가시는 것을 보게 된다. 주님께서 3년이 넘는 공생애 동안에 주님이 누구이신가를 교육했지만 제자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 물음에 자신 있게 대답한 제자는 베드로였다. 그러나 그 고백마저도 "그것을 네게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고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저들이 깨닫지 못하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므로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신다. 제자들은 그때까지도 깨닫지 못하고 요한을 제외한 모든 자들이 자신들의 살았던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면서 남긴 말이 "고기 잡으러 가자"라는 말이다.
그래서 저들은 평소대로 배를 타고 고기들이 있는 곳으로 배를 몰아 그물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갈릴리바다에서 뼈가 자란 저들이지만 저들이 이제 과거의 어부들이 아니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졌으니 얼마나 저들이 무지했던가를 알 수가 있다. 저들은 자신들이 과거의 고기를 잡던 어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요 21:5)"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요 21:6)"
이제 저들에게 예수가 없이는 한 마리의 고기도 잡을 수가 없음을 깨닫게 하신다. 그리고 저들의 양식은 고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임을 다시 깨닫게 된다.
그 후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물을 가지고 세상 깊은 바다로 나아가 3천명 5천명을 넘어 날마다 그 수가 넘치는 기적의 어부들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오늘의 어부라고 하는 목사들에게 예수가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물론 반드시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는 것은 궁궐 같은 교회요 제사장 같은 화려한 제복을 입고 박사가 있고 유명세가 있을 뿐 참 그리스도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저들은 고기를 잡으러 깊은 바다(세상)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시장으로 가서 잡은 고기를 다시 잡아가고 있다. 쉽게 말해서 가난한 교회들은 손 투망으로 땀을 흘려가며 한 마리 두 마리 잡아다가 채워놓으면 큰 교회들은 작은교회 옆에 와서 쌍끌이 어선처럼 작은교회들이 애써 잡아놓은 고기까지 싹쓸이로 도적질을 하고 있다.
신학교를 세워놓고 후배 목사들은 끝이 보이지 않도록 줄을 섰는데 학장이다 총장이다 하면서 나눌줄은 모르고 자신들의 배만 채우는 악덕 업자들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래서 저들은 1년에 몇 백명이, 몇 천명이 불어났느니 하면서 신문에 대문짝 만 하게 혐오스런 자랑을 하고 있다. 저들 자신들이 도적인줄을 모르니 어찌하겠는가 말이다.
저들은 틀림없이 바울의 전도방법이나 선교방법을 배웠을 것이며 예수님의 전도방법도 다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저들에게는 바울은 물론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더 더욱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저들은 성도를 물질인 고기로 생각하며 숫자 불리기에 혈안이 되어서 세상의 굿판을 벌이듯 강단은 이미 쇼-장이 되었고 말씀은 철학이나 코미디가 되었으며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라 주식회사가 되었고 목사는 재벌이 되어 세습을 하고, 성도들 또한 눈들이 멀어서 그런 악을 보고도 악으로 여기지 못한다. 결국 봉사가 봉사를 인도하니 둘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가 없으니 예수의 전도를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니 저들은 지금도 고기 잡으려 바닷가가 아닌 도적질 할 어시장을 두루 살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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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0 날짜 : 2004/04/15 조회 : 14
5.찬송을 도적질 하는 자들!
본인의 홈페이지에 찬송이 노래인가? 라고 올렸다. 그래서 찬송이 뜨거워지면 마음 문이 열리고 설교 말씀이 마음 판에 쏙쏙 박힌다나요! 그렇다면 무엇이 뜨겁게 부른다는 것인가? 찬송의 전체도 아니요 한 절만 가지고 수 십번 최면 하듯 부르면 속에서 열이 올라와 신바람 나는 것이 뜨거운 것인가? 이 말은 본인이 거저 가상적으로 지어낸 말이 아니라 이러한 형태는 순복음을 비롯한 소위 오순절 파 교회들의 모습이며 여기에 더욱 부채질을 한 것은 사악한 부흥사들의 소행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면 결코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이제는 이러한 작태들이 교파 교단 구분할 것 없이 손뼉을 안치면 믿음이 없는 자요 이방인이 된다. 소위 유명한 부흥사들 마다 자신의 18번 곡들이 있다.
소위 찬양으로 마음의 문이 열려야 자신의 거짓말들이 먹혀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입이 찢어지도록 배가 터지도록 축복을 한다. 부흥회를 한다고 하는 교회의 목사들에게 한번 물어 봅시다. 요즈음 한국의 교육행정이 완전히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 학교 수업이 부족해서 밤 열시가 넘도록 보충수업을 하는가 했더니 그 보충 수업은 학교 선생이 아닌 유명한 학원 강사들을 초빙해야 한다고 하니 이 도대체 지금껏 학교는 무엇을 가르쳤기에 또 학교 선생은 무엇이고 유명한 학원 강사는 무엇인가? 학교 선생들은 모두 쓰레기들만 갖다가 채워 놓았는가? 본인이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교회의 목사는 무엇 하는 존재인가? 물론 한번씩 별미를 먹는 것도 좋지만 그것이 부흥을 위한 본질이 아니질 않는가 말이다.
실제적인 말로 심지어는 목사 자가용 사주기 위해 부흥회를 여는 교회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중 제일 잦은 것이 건축을 위해서다. 이것들이야말로 부흥을 도적질하는 자들이다. 성경에 특히 신약교회에 건축을 하였다는 구절은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 당시의 문화적이든 아니면 가난 때문이든지 이유를 막론하고 그들의 교회는 마가 다락방과 같은 가정교회이었다. 오순절의 놀라운 역사로 하루에 3천명 5천명의 새 신자들이 몰려 왔어도 그들이 소위 성전이라고 하는 건물을 지은 일이 없다. 다만 가정에서 저희들이 떡을 떼며 잔을 마셨고 그리고 그들의 전부를 나누었고 공유하였다. 그러니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으며 날마다 수가 더 하더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던가?
오늘의 교회의 모습들을 이야기한다면 자주 내 입이 더러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 중심의 도적들"이라는 글을 쓰려고 한다. 이미 다른 글들에서도 대략은 밝힌바가 있다.
왜 찬송을 도적질하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인가? 한국교회는 목사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부흥사들의 18번이 곧 목사를 섬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니올시다. 목사들이 스스로 양심 있게 하는 말 "종" 그렇다. 성도들의 종이다. 종이 어찌 감히 하나님의 성도들을 깔본다는 것인가?
그리고 목사들이 부를 쌓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부에 걸 맞는 것이 명예가 아니던가? 부가 넘치니 그 부로 명예도 취하는 것이 순서가 아닌가? 그래서 이들을 두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탈취한 자들이라고 하였다.
이제 찬송의 본론으로 가서 찬송의 본질은 하나님 자신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만물들을 창조하시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찬송은 하나님 영광의 결과이다. 우리가 찬송을 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이미 영광거리를 만드시고 우리는 그 영광을 보고 감격하고 깜짝 놀라면서 나타나는 것이 찬송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모세와 함께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영광을 바라보고 체험하며 홍해를 건넜던 백성들의 결과에 곧 바로 나타난 것이 찬송이요 춤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말로서 찬송이라 춤이라고 하지만 내가 그 당시 그 현장에서 그런 체험을 하면서 찬송을 하였다면 과연 어떻게 찬송을 하였겠는가. 가령 이렇게 표현을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마치 미치광이의 행동을 보았다고 하면 맞을 것이다.
법궤를 메고 왔을 때 다윗을 기억해보면 조금 이해가 갈 것이다. 거기서 말하고 있는 다윗 자신의 춤이라는 것은 춤이 아니라 한마디로 발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하체가 드러났겠는가? 그렇다고 우리가 날마다 다윗처럼 혹은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렇게 찬송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이요 능력이요 찬송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고 하셨다.
바로크시대의 음악을 노래하고 유명한 작곡자의 찬송을 노래하고 유명한 성악가가 노래하고 절기에 맞추어서 노래한다고 결코 찬송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본인의 글에 "예배하는 자가 예배한다"라고 하였듯이 찬송은 삶의 표현이지 노래 따위의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될 때에 그 곡이 보잘 것 없어도 그 심령에서 감격하여 분출되는 고백이라면 그는 하나님께 최고의 찬송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온갖 수다한 형태의 예배들이 문화라는 구실들을 앞세워 온갖 작태들을 벌리고 있다. 거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곧 음악이다. 소위 세상말로 한다면 완전 굿거리 장단에 춤추는 격이라고 한다면 결코 틀린 말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결코 찬송의 본질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잘못 착각하기를 할아버지가 손자들 노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식으로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큰 죄악을 범하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좋아서 혹은 신바람이 나서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라서 즐기는 것이라면 그것은 나를 위해 나를 위한 노래이지 하나님과는 절대로 무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네가 찬송하기 전에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의 모습을 보았는가? 그리고 어떤 놀라운 기적들보다도 죄로 죽었던 내가 구원을 얻었다는 그 깜짝 놀랄 은혜를 안다면 복음송(CCM)따위나 소위 몸 찬양이라고 하는 워쉽댄스 같은 것은 스스로 멈추고 말 것이다. 우리가 찬송이라고 하는 그 말 자체에는 하나님 외에 어떤 존재도 끼어들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찬송은 하나님이 만드셨으며, 하나님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이 부를 찬송도 친히 만드셔서 주신 것이 곧 시편가 라고 어거스틴이 고백을 하였다. 지금 우리의 찬송가는 참 찬송인 시편가를 도적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찬송가를 찬송이라고 부를 때는 가슴이 아프다. 비록 시편처럼 진품 찬송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중 찬송가라고 일컫는 것들은 고작 10 ∼ 20%에 지나지 않는 것이 현재의 통일 찬송가이다. 본인이 조그만 신학교에서 찬송가학을 가르치면서 더욱 안타까운 것은 백 여곡에 지나지 않는 찬송가를 아는 수준은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다. 앞으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된다고 하면서도 말이다.
한마디로 현재의 통일찬송가는 찬송가라고 이름하기에는 거리가 먼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제대로 못 부르면서 또 새로이 찬송을 만든다? 그동안 찬송가공회가 먹을 것이 없었던가? 지금도 교파간 교단간 머리 싸움을 벌이고 있다. 가르치지 않는 찬송가는 또 만들어서 어찌하겠다는 것인가? 더욱이 목사들이 찬송가를 모르면서 배울 생각들은 하지를 않는다. 그러니 성도들은 목사의 찬송수준을 넘을 길이 없는 것이다.
혹 목사가 잘 부르던지 아니면 혹 잘 못 불러도 마이크로 성도들의 찬송이나 도적질 않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다. 성도들은 마이크 소리에 눌려서 마음껏 찬송하지 못하므로 성대 자체가 완전히 낮아지고 말았다. 그것은 자신의 바른 성대로 노래를 제대로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1절부터 끝 절까지 연속으로 부를 수 있는 힘이 없어졌다. 본인은 노래를 쉬거나 딴청을 해도 마이크의 레코드판 틀어 논 듯한 목사의 찬송이 있으니 염려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목사님들! 당신들도 성도요 하나님께 찬송하는 자들이오니 마이크는 말씀만 위해 사용하시고 이제는 그만 성도들에게 찬송을 되돌려 줍시다. 루터가 회중 찬송을 만든 이유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계에서 씌워서 나오는 시끄러운 소리가 아닌 성도들의 아름다운 악기의 소리를 원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랍니다.
우리가 찬송을 모를 때 배우기 위해서 하던 버릇을 아직까지도 성도들을 무식꾼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리고 전체의 성도가 찬양대이어야 하지만 그래도 훈련된 찬양대가 있어서 찬양을 올린다면 그 때는 목사로부터 모든 성도들이 같이 일어서서 찬송을 드려야 하지요 왜냐하면 찬양대의 찬송이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더 무서운 도적질은 성도들의 삶의 찬송으로 목사들의 배를 채우고 있다는 것이지요 에스겔 34장의 모든 말씀은 일점일획도 거짓 없이 오늘의 목사들을 향한 말씀임을 알고 회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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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0 날짜 : 2004/04/15 조회 : 8
6.주를 아는가?
1990년도를 기해서 우리의 가슴 속 깊이 조용히 감동을 준 복음송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위의 제목처럼 "주를 아는가?"이다. 이 복음송은 그 유명한 세계적인 스타 조용기 작사 그의 아내 김성혜씨의 곡으로 본인도 그 곡을 노래할 때면 가슴이 뭉클해 오곤 했다.
오늘에 와서는 그런 노래는 흘러간 노래들 중에서도 완전히 기억도 할 수 없는 잊혀진 노래가 되고 말았다. 이 노래가 유행할 당시만 하더라도 아주 조금이나마 신앙의 순수성을 맛볼 수 있었던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런 노래가 있었던가 하는 것쯤은 생각할 필요조차 없게 된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이 된다. 왜냐하면! 오늘의 교회들은 예수를 잃어버리거나 아예 내버린 교회들이 많으니까요! 지금 크리스천들이나 목사들에게 "주를 아는가?" 라고 묻는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안다고 대답을 할까요?!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고백도 베드로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게 하셨다고 하셨다.
조용기씨가 김성혜씨가 진정 주를 아는가? 그러면 지금도 주를 안다고 고백을 할 수가 있겠는가? 천만의 말씀이외다. 그는 필연코 정신이 멀쩡하게 살아있는 동안에는 다시는 주를 안다고 고백할 수가 없을 뿐더러 자격도 없다. 그 이유는 왜냐? 라고 묻는다면 그 사람은 바보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있어왔던 사건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복음송을 주름 잡던 최○○씨는 간통으로 인해 그 모든 명성들을 스스로가 짓밟고 말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솔한 회개가 없었다는 것이다.
본인은 구태여 최 아무게의 사건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용기씨 같이 기업화하고 부를 쌓고 하면서도 강단에 서서 거룩한 듯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하는 꼴을 보노라면 분노가 치밀러 오른다. 그러나 이 뿐인가?
그리스도를 본 받아야 할 목사들이 조용기를 본 받아 대형화하고 기업화하고 세습을 하고 최고의 영화를 누리고 있는 자들을 어찌 다 셀 수 있겠는가! 최고의 보수교단이라고 하는 서울 고신도 결국 부와 명예 앞에서는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나 보다. 그래서 뉴스엔조이라는 사이트에서는 이렇게 탄식을 하고 있다. 결국 "너마져 세습을 하는구나"라고 하였다.
그렇다. 수 백억의 아방궁 같은 성전을 짓고 그것을 감히 누구에게 넘겨준다는 말인가? 그는 현재까지 독재중의 독재로 석00 목사라는 일인체재로 경향교회의 역사는 세워져 왔다. 그동안에 그 수많은 부교역자들이 거쳐갔는데 어찌 한사람도 후계자를 발견하지 못했단 말인가? 아니면 자신의 뒤를 이을 한사람의 인재도 양성하지 못한 엉터리 지도자였다는 말인가?
그리고 왜 많은 경향인들(선두교회 조석연 목사 외 6-70개의 교회)이 석00 목사라는 자에게서 등을 돌렸는가? 나는 지금도 부자교회로 부를 누리는 박사목사들이며 골프체를 들고 다니며 호텔에서 회의를 하며 세습을 당연시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아는가?"라고 묻고 싶다. 주님께서는 겨자씨 같은 12제자들로 기독교의 역사 곧 복음의 역사를 이끌어 왔다는 사실 앞에 겸허히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고려신학교 자육게시판에는 재학생, 졸업생, 교직원 외에는 글을 올릴 수 없도록 해 놓았다. 그렇게 정정당당한 학교와 교단이 무엇이 그렇게 쿠린데가 많은가! 이미 경향교회나 석00 목사라는 자는 세상이 다 알도록 담을 수 없고 씻을 수 없는 수치를 드러내고 말았다.
바울이 바라본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셨던가를 기억하기를 바란다. 세상을 이기는 정예부대는 결코 많은 숫자로 이뤄지지는 않는 법이다. 기드온의 3백 용사들이요 여호수와며 갈렙 같은 아주 작은 무리들이다. 오히려 수백, 수천, 수만, 수십만이라는 성도들을 어디서 도적질을 한 것인가? 하나님의 능력을 약화시키며 자신들을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호령하는 자들이 아닌가?
양의 탈을 쓴 곽선희 목사는 자식에게 200억이라는 거액으로 개척교회를 세워주었다니 이것들이야말로 예수를 팔아먹었던 가롯유다보다. 무엇이 나은 것이 있는가? 이 모든 자들이 껍데기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해놓고 속으로는 자신들의 아성을 만들고 있는 자들이 아닌가?
예수를 말하는 자들이 바울을 말하는 자들이 어찌 감히 교회(성도)들을 자기의 것으로 사용하고 있는가?
저들은 천국도 지옥도 안중에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지금도 복음이라는 어망들을 펼치며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있다.
그대들이여! 주를 아는가? 그대들이여! 주를 아는가? 그대들이여! 주를 아는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죄인의 몸을 입고 오신 주를 아는가? 그런데 그대들을 어떤 자리에서 어떤 부를 누리고 있는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는데 그대들은 어떤 아방궁들을 만들고 있는가?!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는데 그대들의 머리는 몇 개나 되는가?! 남의 터에는 교회를 세우지 않겠노라고 한 바울의 고백도 잊어버린 체 쌍 끌이 어선처럼 대형버스로 몇 안되는 성도들 마저 도적질 하는 그대들이여! 주를 아는가? 주를 아는가? 대답들 해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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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0 날짜 : 2004/04/15 조회 : 15
7.십자가 박사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 목사들에게는 박사학위 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이제는 웬만한 목사들은 박사학위 한 두 개쯤은 가지고 있다. 지금도 신학교는 물론 독자적으로도 박사학위 장사에 혈안이 되어 있다. 두말할 것 없이 이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들은 차라리 목사가 되지 말아야할 존재들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목사의 진정한 의미들을 알기나 하고 목사가 되었는가? 말이다. 하나님께 진정 목사로 부름 받은 자들은 결코 박사가 되어야 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학문을 연구하고 배우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빌 2:6-8)
신학이란 말 그대로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요 그분의 사랑의 증표요 사랑의 극치인 십자가의 죽으심을 배우고 깨달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신학이라는 학문의 전부라고 하겠다.
신학과정을 볼 때 적게는 3년 보편적으로 6 ∼ 7년의 세월을 거쳐서 목사의 자격을 얻게 되는데 그 수많은 기간 동안에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만 바로 깨달았다면 결코 박사라는 허황(虛荒)된 교만들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먼저 우리가 본론에 이르기 전에 바울의 수많은 십자가의 고백들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배웠으리라 믿는다. 그리스도를 체험한 바울의 고백 중 중요한 고백은 십자가를 아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는 것이다.(빌 3:8) 이러한 바울의 고백을 바로 받는 신앙인이라면 감히 박사라는 생각조차도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의 희생과 겸손, 더 나아가 십자가를 말하는 자들이 어찌 하나님의 말씀의 앞인 강단에서 박사가운이 웬 말인가 말이다. 그것이 진짜이든 가짜이든 박사가운은 학교에서 행사 때나 자랑하는 것이 아닌가? 이미 그들은 하나님 앞에 거짓을 들어냈으며 목사이기를 수치로 여기는 자들임에 분명하다. 목사가운의 원래 모습은 하나님 앞에 죽은 자의 모습으로 검게 입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목사가운은 더 이상 제사장의 에봇이 아니다. 그렇다고 천주교 신부들이 입는 제복은 더욱 아니다. 감리교 성결교, 성공회 기타 몇몇 교단의 목사들은 천주교 신부들의 모습을 좇아가노라고 로만칼라를 한 셔츠를 입고 목사임을 자랑하고 있다. 목사가운을 입기 전에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할 것이다.
교회와 목사들의 타락상은 세상도 용납하지 못하는 행위들을 부끄럼 없이 자행들을 하고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교회 가짜 박사 목사들이 90%는 족히 넘을 것으로 안다. 그리고 인간의 양심 교역자의 양심으로 나는 부끄럼 없는 박사학위를 받았노라고 할 자가 몇이나 있겠는가? 또 그들이 영어로 제출된 논문의 한 줄이라도 제대로 해석은 고사하고 읽기나 할 줄 아는지 모른다. 자고로 익은 곡식은 고개를 숙인다는 진리도 잊어버렸는가? 박사목사들에게는 천주교 신부의 옷인 로만칼라 식으로 박사목사 제복을 만들어 장사를 한다면 몰라도 떼돈을 벌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감히 고개를 쳐드는 자가 누구인가! 다시 말하지만 목사들이 휘황찬란(輝煌燦爛)한 박사가운을 입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할 것이다. 바울의 배설물의 사상을 입고 그리스도의 섬김이 무엇인가를 바로 깨닫는 자라면 결코 가운이라는 자체조차도 가증 된 것으로 여길 것이다.
자칭 박사목사님들이여! 바울의 배설물 철학과 칼빈의 묘비 없는 무덤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기독교강요를 소설처럼만 읽었어도 감히 목사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를 깨달았을 것이다. 목사보다 박사에 매력을 느끼고 가짜 박사도 개의치 않는 자들이여! 차라리 천주교 신부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2천년 전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인 세례요한의 소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한 말씀이 오늘 한국교회들의 누구를 두고 한 말씀이겠는가 말이다.
생명을 팔아 허식을 사는 삯군 목자님이며 제사장님들이여 하나님의 심판이 결코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외다. 주님은 자신을 제물로 드려 우리를 성전 삼으셨는데 그대들은 가짜성전들을 세운다고 진짜성전인 성도들의 피를 제물로 삼는 자들이여! 다시 말하노니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어느 목사의 한국교회들을 향한 글의 제목에서처럼 우리는 이런 자들을 일컬어 "십자가의 원수 된 자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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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0 날짜 : 2004/04/15 조회 : 11
8.예배는 존재 하는가?
이 글을 쓰기에 앞서 어떤 제목이 적합한가 하여 조금은 고민을 하다가 한국교회들이나 성도라는 존재들로서의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문제가 무엇인가 생각하며 그저 간단히 생각하게 된 것이 예배라는 본질적인 의미를 떠올리게 되어서 제목으로 삼았다.
그리고 본인이 대학원 졸업 논문을 최초의 제목을 변경하여 5년 후에 "삶으로의 예배"라는 제목으로 졸업을 하게 되었다. 또 한가지 저의 글을 읽는 분들에게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본인은 말솜씨나 글솜씨가 아주 모자라는 편임을 이해하시기를 바란다. 그래서 내용들이 때로는 두서가 없고 들쭉날쭉 한 부분이 많음을 이해 바란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온지도 1세기가 훌쩍 넘었다. 그에 따라 한국의 문화 역시 서구화에 뒤질세라 전통이란 하나의 문화적 유산으로 남아 있을 뿐 현대 생활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우리의 기호 역시 서구화가 체질화되었다는 증거임에 틀림이 없다. 또 더욱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전 세계가 1일 권으로 말 그대로 지구촌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통이 좋아도 우리의 입맛은 이미 서구화에 잘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 몇 마디 쓴 글이 세상의 이야기가 아닌 교회의 이야기로 이해하였으면 하는 마음이다. 마치 이것은 문화적인 변화가 르네상스로부터 시작하여 현대를 바라본다면 이해가 될 듯도 싶다. 보편적인 입장에서 르네상스의 출발은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의 출발이며 그 이후 인간문화는 점차로 감성적이며 자극적인 방향으로 그 도는 현대에 이르러 극한(極限)에 달해있다. 그 변천을 가장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 바로 음악이라는 매체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어떤 장르라고 꼭 집어 이렇다고 하는 음악에 대해서는 현대인들에게는 별 의미를 주지 못한다. 그래서 음악을 위시해서 모든 문화들이 전통, 정통, 크로스오버를 넘어 어떤 형식이라고도 할 수 없는 테크노, 퓨전시대 곧 분별 없는 혼합주의에 향방 없이 또 다른 어떤 것이 불거져 나올지도 모르는 현실이다.
이러한 모습이 오늘 현대교회들의 모습이라면? 조금은 의아해 하시는 분들이 없지는 않을 터이다. 이쯤 생각하고 기독교와 예배 혹은 교회와 예배라는 명제 하에 서로가 양분되어도, 또 양분될 수도 없는 것임을 전재로 하고 문제점들을 돌아보며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의 관건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모든 종교들이 명칭만 조금씩 다를 뿐 그것이 갖는 의미는 거의가 예배라는 개념과 별 차이가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특히 현대교회들의 현실은 어느 종교들보다 더 종교적인 것이 교회라는 이름 하에서의 예배의 형태이다. 어느 오순절파 교단에서는 한국교회를 무속신앙에서 출애굽 시키자고 입에 거품을 물 듯 외치고 있는데 그들 역시 이기주의요 팽창주의에 목숨을 걸고 있다. 우선 오순절의 대표적인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모습 속에서 과연 성경이 밝히고 있는 교회의 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는가? 먼저 묻고 싶다.
성결교파에서 오순절로 갈라서게 된 동기가 방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밑도 끝도 없는 논리다. 방언 때문에 또 하나의 교파가 생겼다면 그 성령의 역사는 틀림없는 거짓임에 분명한 것은 성령은 언제나 하나이지 둘이나 셋으로 갈라지게 하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대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방언은 어떤 것인가 그중 한가지 확실한 것은 방언은 남에게 덕이 되지 못한다. 즉 유익이 없다는 것, 곧 이것은 성경이 요구하는 이타주의에 반대되는 철저한 이기주의다. 그래서 성경은 예배의 공동체인 교회에서는 잠잠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방언이 오순절의 모체라면 오순절이야말로 이타주의에 위배되는 이기주의의 산실임을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너무고 뚜렷하고 확실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지를 않는가? 성경을 제대로 알고 교회라는 매체를 제대로 알고 예배를 바로 아는 자라면 결코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교회로 보는 자는 결코 없을 것이며 세상 기업이라고 해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단체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물결이 20-30년의 세월 속에 모든 교회들이 순복음화로 체질화가 되었다.
어떤 목사들의 말을 빌리면 순복음교회가 숫자부흥과 잘 맞아떨어진 것은 6-80년도까지 한참 어려운 시기에 병 고침과 축복이 너무나도 현실에 맞는 것이 되었다. 이리하여 로버트 슐러 목사의 적극적인 사고방식의 하면 된다 라는 이념이, 신앙이 아닌 곧 신념을 심어주었고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들에 심어진 기복신앙이요 무속적인 신앙의 근본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그로 인해 교회들은 무신론주의 사상인 이성주의 경험주의 합리주의이며, 또 팽창주의 실적주의 혼합주의 편의주의로
교회들은 온통 우상 덩어리로 똘똘 뭉쳐 우상 하나님을 부르고 우상 십자가를 붙들고 복달라 복달라 괴성들을 외치고 있는 것이 오늘 교회들의 모습이요 성도가 아닌 무속 종교인들로 전락했다면 틀린 말이겠는가?
이러한 교회요 성도라는 존재들에게 과연 예배라는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말이다. 백일기도며 일천번제 드린다고 큰 소리로 공포를 하고 다니엘 금식이니 모세의 금식이니 예수님의 금식이니 하면서 교회에 온통 광고를 하여 부산들을 떨고, 이 모두가 성경이 요구하지도 않는 짓들이며 오히려 하나님 됨을 욕되게 하는 작태들임을 바로 깨달아야 할 것이다.
소위 초대교회라고 일컫는 오순절 이후의 교회들에게서 확실히 찾을 수 있는 것은 사랑의 교제(코이노니아)이다. 그들의 받은 말씀과 떡을 나누고 잔을 나눈 것은 육의 피를 받은 부모나 형제의 관계는 아니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은 재산 모두를 팔았다. 그리고 하나도 부족함이 없이 나누었다. 그리고 바로 이웃으로 나갔다. 또 그리고 이웃에게 같은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 졌다. 그러니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으니 날마다 믿는 자의 수가 더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현대교회들이 이런 예배의 형태를 알겠는가? 혹 안다고 한들 백여명의 성도만 넘어도 이런 진정한 교제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수백 수천 수만 수십만 하면서 위세를 자랑하는 교회들이 하는 따위의 예배는 이미 돈 놓고 돈 먹기식 사업일 뿐이다.
초대교회들이 하루에 3천명 5천명 씩 회개하고 돌아 왔어도 그 많은 숫자로 교회를 이룩한 것이 아니라 각 지역의 가정교회 즉 마가 다락방 같은 교회였다. 예배의 가장 알찬 열매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이루어지는 사랑의 교제이다. 그것이 없는 오늘 교회들의 예배는 종교적인 행위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극장의 영화를 보는 것도 아닌데 소위 화상예배라 하여 지 교회를 두고 장사들을 하고 있지를 않는가? 교회가 크든 작든 성도가 많아져서 목사 혼자서의 한계를 넘으면 나누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의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코 말하지만 수백명부터 수십만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도들이 자기의 양들인 것처럼 생각하는 목사들은 이미 그 목회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을 대신 하고있는 교만 된 자들임을 알아야 한다.
확실히 말하거니와 "예배하는 자만이 예배 할 수가 있다"라고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간단한 설명으로 예배의 삶을 사는 자만이 예배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그것을 발견하게 된다. 가인도 아벨도 그들은 다 같이 그들의 소득인 첫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아벨의 제물은 열납을 하였으나 가인의 제물은 거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항해 네가 악하다고 하셨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삶이 없는 형식에 지나지 않은 악한 제물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고백을 잘 깨달아야 한다. 왜 바울인가? 그는 율법의 완전한 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를 만난 후부터 그의 삶 속에는 오직 예수 밖에는 존재하지를 않았음을 그의 여정에서 항상 나타났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수많은 바울의 서신서들을 통해서 상고하여보았다. 그의 고백 중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요 주를 위한 것임을 고백하면서도 그는 이렇게 고백을 한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이다. 바울의 예배하는 삶이란 어떤 때나 어떤 장소에 대한 의미는 전혀 존재하지를 않았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바울의 이런 사상을 빌어 어거스틴의 고백 또한 심오한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는 이렇게 고백을 하였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무엇을 가지고 나아갈 것인가? 사실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한가지 가지고 갈 것이 있다면 우리의 "상한심령"이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오순절의 초대교회의 역사들을 수없이 말하면서도 오늘 우리의 예배라는 형식이나 의식들 속에서는 그 모습을 찾아보지 못한다고 단언을 한다. 특히 자칭 오순절파라고 하는 교단에서도 그 모습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예배는 제사가 아니다. 그렇다고 오늘날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키는 그런 의식적인 예배는 더욱 예배일 수 없으며, 또 그 날이 성수주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이 주일이 아니라 모든 날이 주일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어떤 날이나 어떤 장소에서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들이나 목사들이 이런 말들을 과연 이해할 것이겠는가?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의 예배라는 의미는 율법주의 예배들로 체질화되었기 때문이다. 율법이 폐하였음에도 십계명은 여전하고 십계명이 여전하니 안식일이 존재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일요일이 거룩한 날이요 구별된 날이요 성수주일이기 때문이다. 만일에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이는 반드시 이단 삼단이요 적그리스도라 당장에 출교감이 된다.
우리는 수많은 이유나 논리로 말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살으셨던 모습과 제자들이나 바울의 삶 속에서의 예배하는 것이 어떤 모습이었나를 조금이나마 떠올린다면 오늘 우리의 예배를 결코 예배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왜 성전을 뒤집어엎어 시면서 너희가 내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다고 호통을 치시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가? 성경은 결코 세상을 향해 말씀하심이 아니라 교회들을 향해 말씀하시고 계심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누가 제사장이요 서기관이요 바리새인인가? 저들이 소위 성전을 지키던 자들이 아닌가? 오늘의 교회들이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해 성전들을 지으며 제사장들의 행세를 하며 십일조의 세를 갈취하며 주일이 안식일이라 거룩히 지키라 하지 않는가?
이들에게는 결단코 예배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어거스틴의 이런 말이 기억이 난다. "그대가 사업을 하면서 거짓이 없이 정당한 이를 남긴다면 그대는 이미 예배를 하고 있다" 라고 하였다. 그렇다 이것이 율법이 존재하기 전 아벨의 제사 방법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만 받으신 것이 아니라 아벨과 함께 제물도 열납하셨다는 것이다. 예배는 소위 성전이라고 하는 교회에 있지 않으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물이 십일조에 있지 않으며 찬양과 경배라고 축제의 한마당이 되어 광란하듯 하는 무리들 속에도 예배가 있지를 않으며, 온갖 기적을 일으키며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게도 없으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교묘히 탈취하는 박사목사들에게도 없으며, 예수 없는 우상 십자가를 매달아 논 교회에도 없으며,
오로지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는 자이며, 상한심령 밖에는 내어놓을 것이 없는 이들에게 예배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자가 바로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자들임을 깨닫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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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0 날짜 : 2004/04/15 조회 : 6
9.질서는 아름다운 것!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질서 그 자체다 라고 글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문화명령이 인간의 범죄와 함께 저주를 받게 되고 그러므로 인간에게 주어졌던 다스림과 정복이란 점차로 그 힘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문화명령에 앞서 창조주 곧 하나님과의 회복이 먼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되 반드시 상대적으로 만드셨으나 그 상대는 결코 상충(相衝)하지 않으며 상호관계(相互關係)로 조화(造化)하도록 하셨다. 특별계시를 알기 전 벌써 우리는 자연이라는 만물들을 통해 깨닫게 되는데(하늘과 땅, 빛과 어둠(낮과 밤), 물과 불, 동서남북, 산과 바다, 남자와 여자, 생과 사, 앞과 뒤, 길고 짧고, 넓고 좁고, 좌와 우, 선과 악 등 특히 전도서 3:1-8에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이 모두가 창조세계에서는 어느 하나만의 존재가 아닌 조화(造化)라는 불변의 법칙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질서란 결코 일방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관계가 그렇듯 남자와 여자가 하나라는 존재적인 입장에서는 인격적인 평등을 말할 수가 있으나 남자와 여자라는 관계성은 조화의 관계로 질서적인 관계성을 반드시 인정을 해야 한다. 사라가 그의 남편 아브라함을 주(主)라고 하였듯이 말이다. 특히 더 실질적인 표현은 교회는 신부요 예수 그리스도는 신랑이라는 관계 말이다.
타락이 어떻게 왔는가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 피조물이라는 존재의식을 망각하면서 일어난 것이 아닌가? 또 여기서 한가지 더 깨달아야 할 것은 하와가 먼저 범죄 하였음에도 사람(아담)이 범죄 하므로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곧 아담의 지체인 하와가 범죄 한 까닭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라고 한 의미를 바로 깨닫기 바란다.
우리가 남자와 여자라는 조화의 비밀을 바로 이해한다면 오늘과 같은 오만 불순하고 질서를 파괴하는 일 따위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말에 내유외강(內柔外剛)이라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본시 여자는 연약하나 부드러우며 아름다움을 주셨으며 그 유순(柔順)함으로 남자의 돕는 배필로 주신 것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주님께서도 여자들을 사랑하되 고아와 과부를 더 생각하라고 하시지 않으셨는가 말이다. 물론 성경에서 수많은 여자들이 선지자로 제자로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 순간들은 남자들에 대한 징벌이었을 뿐 그러한 상황적인 사건이 지속적이지 않았음을 알지 않는가?
그리고 구약이나 신약이나 또 현대에서도 남자라고 다 제사장이나 목사나 장로나 집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별하신 레위지파 중에도 30세 이상 남자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 당연한 사실인데 어찌 하나님께서 여자라는 본질적으로 설 수 없는 자리에 선다는 것은 교회가 교회이기를 거부하듯 여자가 여자의 본질을 거부하는 것이며 이것은 곧 질서의 파괴요 창조주를 우습게 보고 다시 도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물론 이런 당연한 질문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만인이 제사장들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구약에 레위지파라고 다 제사장이 되었는가? 결코 그러하지 않았다. 그렇듯 신약시대는 만인이 제사장이라고 만인이 다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니질 않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지체를 만드시고 손이 하는 일이 좀 어색하거나 잘 못한다고 손을 잘라내고 그 자리에 발을 대신하시지는 않으신다는 것 쯤은 이해를 하신다면,
물론 요사이 남자 목사님들이 하는 꼴을 볼라치면 구역질만 나시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여자라도 산수갑산에 갈지언정 한번 주먹을 휘두르고 싶습니다. 그러니 남자가 뭐 여자보다 힘이 있고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질 않습니까?
이토록 무분별하게 여자목사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여자들의 권익을 넘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창조의 법과 권위에 도전하는 것임을 만만 깨달으시기를 바랄 뿐이지요
이러한 원리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음악이라는 것입니다. 음악은 시작과 끝이 있으며 높고 낮음이 있고 길고 짧음이 있고 빠르고 느림이 있고 기쁘고 슬픔이 있으며 물 흐르듯 질서 속에 이루어지게 만든 음악은 우리의 마음의 활력을 불어 일으키며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더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위에서도 반복되는 말이지만 남녀의 관계란 조화의 원칙을 벗어나서는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가 없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요즈음 스포츠를 통해 성대결을 벌이는 코미디를 목사의 세계에서도 만들어보자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요? 구약시대 신약시대 선지자 사사 몇몇이 있었다고 그것을 빌미로 당신들이 말하는 남녀 평등이 아닌 여남 평등이요 더 나아가서 여자 총회장을 만들어 남자들의 콧대를 완전히 꺾어 보시겠다는 것이 아닌가요?
그래서 이러한 일들을 놓고 안과 밖을 속 시원히 까뒤집어 보자는 것이 아니겠어요? 어디 한번 까벌려 볼까요? 그러면 당신들은 먼저 한 손으로는 눈을 가릴 것이고 즉각 또, 한 손으로는 코를 막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이외다. 속 내장들이 속에 갇혀만 있으니까 도무지 못살겠다고 해서 까뒤집어 놓았더니 흉물스러운 것은 고사하고 밖으로 나와서는 한시간도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포근하고 부드럽고 아늑한 엄마의 품 그 모습이 여자의 더 없는 모습이 아니며 남자의 넓은 가슴을 만들어 가라고 갈비뼈 하나로 여자의 이름이 탄생한 것이 아니던가요? 옛날에 명동에서 사장님! 하고 부르면 남자들은 다 돌아보던 시절도 있었듯이 요즈음 여자들 모인 곳에 목사님! 하면 모든 여자가 돌아본다나요?! 더 꼴불견인 것은 부부가 목사라 이건 뭔가 몰라도 한참 모르는 쯔,쯔,쯔,쯔
2004년 1월 5일 8개 교단이 연합하여 엠버서더 호텔에서 신년하례식을 참석하였지요 그동안 말만 들었는데 그 귀한 자리에 가게되었으니 참으로 기대가 많았지요, 부흥사의 대명사 격인 신00 아무게 순복음의 이인자 격인 엄00 아무게 부흥사의 모사꾼 이00 아무게 자칭 오순절 대부격인 이00 아무게 부흥사계에 뜨는별 윤00 아무게는 불참하고 기타 한가락 한다고 하는 아무아무게들 중에 홍일점여자목사, 신유의 대가라나!
더욱 놀란 사실은 축사를 맡은 모 아무게가 내뱉는 말 "부흥사가 살아야 한국교회가 산다" 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천벌을 받을 소리다. 우리 한국교회를 누구가 망쳐 놓았는데 부흥사들이 한국교회를 살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닌가? 그동안 우리 부흥사가 한국교회를 망쳐놓았으니 우리가 회개하고 한국교회를 다시 세웁시다! 라고 했다면 참으로 기립박수를 받았을 것이다.
그날 소위 예배라고 하는 모습에서도 저들은 아니올시다 라고 답이 없었다. 성도들의 혈세로 1인당 3만5천원씩이나 하는 양식을 먹는 자들의 양심에 성도들의 눈물어린 헌물의 손길을 한 순간이라도 생각을 하였던 자들이라면 결코 그것은 아니올시다! 그런데 한술 더 떠서 큰소리로 내뱉는 이00 아무 목사 왈 이런 호텔에 목사들이 와야지 중들이 오는가? 라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저런 자가 소위 오순절을 거품을 품으면서까지 노래하고 성결을 자랑하고 그리스도를 말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함부로 내뱉고 있지를 않는가?
또 한번 더 놀란 것은 곳곳에 여자목사들이 몰려 앉아 있는데 한 여자 목사가 눈에 띄는데 그 여자는 아마도 창녀이거나 아니면 사창가 포주이거나 아니면 다방 마담의 모습이지 아무리 보아도 그 여자는 한 말로 걸레이지 목사가 아니라는 것은 같은 여자들의 눈총들에서 이미 말들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헤비급 몸매에 거들먹거리며 부흥사 대부 신00 아무게씨에게 찾아가 악수를 나누고 고수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하는 꼴을 보면서 그 자리가 어떤 자리라는 것은 다시 설명하기조차도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다.
여자들의 타락한 이유가 무엇이던가요? 하나님과 같이 되며 하나님을 대신 하려는 교만과 탐심에서 비롯됨이 아니던가요? 그렇듯 남자 목사들이 잘못하면 하나님께서 벌하실 터이니 여자들이 남자들을 벌하는데 사용되는 도구가 되시지 말라는 것이외다. 하나님께서는 벌하는데 사용한 도구들은 반드시 멸하고 말았다는 사실들을 기억하시기 바랄 뿐이요! 이제 곧 재림 하셔서 남녀 없이 우리 모두가 주님의 신부로 맞을 때까지는 그대들은 여자로 우리는 남자로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심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함이 아니던가요?
그래서 다시금 그대들이 시대를 핑계하고 가부장을 원망하고 평등을 가장하여 성경은 구 시대적인 것으로 버렸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왜곡되어버린다면 더 이상 교회에도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아시고 그대들이 특히 이런 말씀은 보시기도 싫으며 그대들에게는 저주스런 말씀이라 파기시켰으면 좋으련만 그렇다면 성경의 권위가 말이 아니지요 하오니 다시 한번 상고하시라고 적어 봅니다. 베뢰아 교인들이 신사적인 것은 저들은 항상 성경을 상고하여 보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대들도 그런 신사적이 자가 되시라고 몇 구절 올렸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가리는 것을 대신하여 주셨기 때문이니라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고전 11:1-16)
여기서 중요한 말씀들을 생각해 본다면 바울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본 받은 것처럼 너희도 나를 본 받아라 고 하는 것이며, 질서로서는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며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고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 받았다고 하였고 인격적인 평등을 위하여는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고 한 말씀과 더 더욱 중요한 말씀은 이러한 "논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는 이런 법(관례)이 없느니라"고 한 사실에 깊이 깨닫기를 바란다.
어떤 결론을 내려도 그대들에게는 답이 없을 터이니
진리의 말씀 한마디로 마칠까 합니다.
세상의 역사나 성경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분이 하나님이 심을 기억하시기 바립니다
더욱이 창조의 질서를 무시하시고
성경을 이루신 일은 단 한번도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보겠다고 하던
그 영원한 범죄를 다시는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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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0 날짜 : 2004/04/15 조회 : 10
10.그대가 거룩한 성전!
언젠가 김진홍 목사의 기독교를 향한 TV 대담시간에 하신 말씀이 기억이 난다. 내용인 즉은 한국교회의 타락의 가장 큰 이유는 목사가 섬기는 자가 아니라 목이 빳빳하도록 대접을 받기 때문이며 더더욱 무서운 것은 교회가 물질을 쌓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물질의 사용은 목사의 방법대로 사용하여 치부를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소위 대형교회 목사님네들은 신형 모델이 나오기가 무섭게 차를 바꾸고 있다. 그것도 목사가 신경을 쓰지 않아도 이미 성도들에게 철저한 교육이 되어 있으므로 서로 앞다투어 갔다 바치기 바쁘다. 그래야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은 따논당상일 터이니 말이다. 그러니 이러한 자신의 치부로도 부족해서 자손만대를 이어가며 부를 누리고자 세습을 정당화하는 도적이요 삯군들이 아닌가!
그래서 한 때는 신랑감으로 목사가 1위를 달린적도 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의 말씀은 한 점도 거짓이 없음을 알 수가 있다. 목이 곧고 높아지기를 좋아하고 섬기기보다 섬김 받기를 좋아하던 목사들이 이제는 그 명성이 크든 작든 목사라는 신분은 이루 추악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런 시점에서 과연 목사들이 스스로 성직자라고 자신 있게 말들을 할 것인가? 어떤 이유에서건 하나님 앞에 성직이라는 존재는 없다. 있다면 우리 모두가 성직자들이다. 우리들의 모두가 만인제사장들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세상은 악하고 교회는 거룩하다고 하는 자들의 가르침은 어떠한가? 그렇다면 교회 밖에서 하는 일은 세상일이요 교회 안에서 하는 일은 모두가 거룩한 것인가? 이 모두가 목사들이 교회라는 실존을 전혀 아는 바가 없이 만들어낸 것들이기 때문이다. 마치 교회를 스님들이 도를 닦는 절간처럼 생각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적이 드문 산중에 있는 절간들이 신선한 것처럼 건물교회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교회는 왜 거룩하며 또 왜 거룩해야 하는가?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교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이기 때문이며,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건물이 아니며 또 건물교회를 거룩하다고 할 수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건물교회를 성전이라고 하는 자들이나 건물교회를 거룩하다고 하는 자들은 하나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자들이다.
고신측이나 합동측의 교회들의 표어는 거의가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이라고 한다. 그 중에 교회 중심이라는 의미를 전혀 모른체로 개교회 중심이요 자기교회 중심으로 착각들을 하여 완전히 이기주의로 자기들의 배불리기에 혈안들이 되어 약한 교회들의 성도들을 마구 도적질들을 하고 있다. 이 모두가 자기 건물 교회를 중심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숫자 크기를 자랑하고 박사목사를 자랑하고 옆에 교회는 굶어 죽어도 해외 선교를 자랑하고, 이런 교회들이 어떻게 하나님 중심을 말하고 말씀 중심을 말한다는 말인가? 참으로 가증한 것들이 아니고서 어찌 교회가 거룩하다고 거짓말들을 하는지! 정말 저들이야말로 하늘이 무섭지도 않은가? 라고 묻고 싶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건물교회에 가두어 굶주리게 해 놓고 소위 거룩한 주일이라고 찾아와 하나님의 배가 터지도록 포식을 시키고 있지 않는가? 그것도 먹을만한 것으로 포식을 시킨다면 하나님께서도 여한이 없으실 터인데 말이다.
성전이 세워지기 전의 성막은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장소이셨다. 그와 같이 오늘 우리 성도들이 곧 움직이는 성전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는 건물 교회나 건물 성전이 아닌 두 세 사람이 모인 모든 성도들과 함께 계신 곳이 성전임을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사실을 모르고 목사가 된 자들은 아마도 하나도 없을 것이다.
교회란 어떤 건물의 공간의 틀에 갇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빚을 져서라도 크게 지어 놓고 빈자리 채우기 운동을 벌리고 있는 것이 오늘 교회들의 관행이요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어떤 모양이나 형체를 가지신 분이라면 교회라는 공간 속에서의 일주일은 아마도 지옥과 같았으리라고 생각이 든다. 감옥에 갇힌 죄수 면회하듯 하며 찾는 하나님을, 하나님께서 당신들에게 무엇을 하시기를 바라는가?
소위 거룩한 교회며 거룩하다고 하는 성도들이여! 하나님께서는 어떤 날(주일이라고 하는)에도 어떤 절기에도 속하시지 않으셨으므로 모든 날이 주의 날들로 모든 날이 거룩함이 아닌지요! 또, 우주만물이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이신데 가증한 건물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사기치는 일들일랑 그만 접어두시기를 바랍니다.
십일조 많이 하고 성전 건축헌금 많이 하는 것이 복이라고 가르치는 삯군 목자들이여! 하나님의 심판이 결코 그대들을 넘어가지 않으실 것이외다.
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산상수훈의 말씀으로 참된 복을 가르치셨던가요?! 하나님 나라는 그런 가시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미 하나님 나라가 너희 속에 임했다고 하시는 말씀이 믿어지는 자들에게는 보이는 성전, 보이는 축복에는 큰 관심이 없는 법이지요, 그런데 지금도 어떻게 하면 사기를 잘 처서 거룩한 성전을 하나 지어볼까 하여 사기꾼 부흥사들 아니면 나도 이렇게 사기를 처서 성전을 잘 건축한 전과자들을 초청하며 성도들에게 잔뜩 짐을 지어주며, 온갖 골머리를 앓고 있는 목자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보화를 하늘에 쌓으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일러 놓고 땅에다 자기 보화를 쌓고 있는 박수무당 같은 자들이 누구란 말인가? 또 권위주의 물량주의 대형주의가 교회라는 본질을 상실하여 영적인 매춘시대에 창기들이 누구란 말인가?
맹세코 말하노니 땅에 보화를 쌓고 있는 교회나 성도들에는 결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외다. 눈에 보이는 성전 눈에 보이는 보화들을 자랑하지 마시고 그대들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있는가 근심하며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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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양 날짜 : 2004/04/15 조회 : 31
11.내가 예수다!
참으로 놀라셨죠? 그러나 하도 예수가 많이 나타나니 그리 놀랄일도 아니지요 하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읍시다! 우리들의 전도 모습이다. 그러면 소위 성도라고 하시는 분들 예수를 믿으십니까? 아니면 예수를 알고 계십니까? 현재 한국의 기독교인들의 수가 일천만 혹은 일천 이백만 참으로 놀라운 숫자이지요 또 교회들의 수는 어떻고요 목사도 십 오만이 넘는다나요! 그리고 교파는 얼마나 될까요?
세계의 10대(껍데기만 큰 교회)교회들이 한국에 있다나요! 박사목사도 세계 1위 그러니 단연코 가짜박사목사도 세계 1위 교파의 수도 세계 1위 가짜 예수도 세계 1위 부흥사도 세계 1위 삯군 부흥사도 세계 1위 노숙자 목사도 세계 1위
우리는 이런 자들에게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읍시다! 라고 해야 하지요 하지만 예수는 믿는 것으로만 되질 않지요 알아야 하지요 여기서 안다라고 하는 것은 그분과 동침하였다는 것이지요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이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심 같이 그래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은 것처럼 너희도 나를 본 받으라고 하셨지요
예수! 그분은 누구이신가요? 그분이 하나님이시오 창조주이시오 말씀으로 우리에게 영존하시고 계시는 분이 아니신지요? 그러면 그분은 왜! 오셨으며 왜! 고난을 받으셨으며 왜! 십자가에 죽으셨던가요?
그분은 왜! 성전을 허무시고 또 왜! 우리를 자신이 친히 거하실 성전으로 삼으셨던가요? 그래서 보이는 육체가 아닌 영으로 우리 속에 거하실까요? 우리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나 청년의 시절들을 상상해 보았다면 과연 그분의 삶이 어떠했으리라 생각이 드나요?
그분과의 만남의 대상들은 또 어떤 자들이었나요 또 그분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복이 무엇이던가요? 예수를 아는 자만이 누리는 복이 곧 산상수훈이 아니던가요? 오늘날의 교회들의 모습이 광야교회라고들 하지요 그러면 광야교회들의 모습은 어떠했나요? 그들은 먹어야 믿었고 마셔야 믿었고 보아야 믿었고 그러나 그들은 체험적이고 보았다고 하는 믿음 때문에 보이지 않는 가나안은 들어갈 수가 없었지요
현대의 교회들의 모습이 광야교회와 무엇이 조금도 틀림이 있나요? 율법아래 있는 자는 심판을 받으리라는 말씀도 오늘의 광야교회들에게는 무의미할 뿐이지요 저들은 예수가 아니기 때문에 성전을 지어야만 구원을 얻을 것으로 믿고 있지요, 저들은 예수가 아니기 때문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한 저주까지도 스스로 따라 행하지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신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하셨음에도 율법인 열가지(십계명) 계명이 더 위대하게 보이지요 그래서 주일을 안식일처럼 주일만 거룩한 날로 연보는 푼돈이요 십일조가 복의 근원이라.
이 모두가 예수가 되기는커녕 예수도 없고 십자가는 우상이요 하나님은 대리석 성전에 가두어 놓고, 이들을 두고 "내가 예수다"라고 하는 것이지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합당한(롬 12:1)"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위의 말씀들의 근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라는 말씀 속에서 우리의 존재는 종도 아니요 백성도 아니며 그리스도의 신부들이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가?
그런데 성전을 짓고 제사장 같은 목사 안식일을 주일로 회복시키고 제단이라 일컫고 십일조를 제물로 착취를 하고 안식년이다 희년이다 추수감사절이다 크리스마스다 고난주간이다 부활절이다 하면서 거둬들이는 혈세를 받으며 교파의 수장들이 되기 위해 세상보다 더 악한 부정들을 자행하고 내가 최고가 되어야 교회나 교단이 산다는 식으로 하나님이 하는 목회가 아닌 자신이 하나님이 된 자들! 그것도 부족해서 자식에게까지 대물림하는 도적들! 이런 예수가 되시렵니까?
아니면 바울처럼 "나의 내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한 고백처럼 참 예수의 모습이 되시렵니까? 예수는 성전이라고 하는 교회에도 제단에도 우상십자가에도 없으며 우리가 예수님의 거룩한 성전이 아니던가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예수가 산 것"이지요
그러므로 나는 반드시 예수가 되어야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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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0 날짜 : 2004/04/15 조회 : 27
사순절은 없다!
옛날에 그러니까 약 40년 정도가 되었는지....... 몬도가네 라는 영화가 있었다. 그 영화는 한마디로 엽기적인 사건들을 다룬 영화이다. 그 영화 중에 필리핀으로 기억이 되는데 사순절 기간에 고난의 행렬이 끊이질 않는다. 어떤 자는 가시로 또는 칼로 자해를 하며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며칠 전에도 필리핀의 한 마을에서 가시체로 몸을 치며 또 사순절 기간에 무려 15명이나 십자가에 못을 박는 행사를 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은 어린 딸이 출생시 위험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자신의 딸을 낫게 해 주시면 자신도 주님처럼 십자가에 12번이나 못을 박히기로 약속하는 기도를 올렸더니 그 딸이 나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실제로 십자가에 달려 못에 박힘을 받았다.
필리핀은 완전히 천주교 국가이다. 그들은 스스로 천주교의 고행이 허구임을 나타내고 있다. 아직도 수 십 년을 전통처럼 행하고 있는 천주교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욕되게 하는 사악한 행동을 주님께서 오시는 날까지 계속할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서도 십자가에 매달리는 짓거리들을 하고 있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부활절로 현재는 사순절 기간으로 지키고 있다. 또 어느 단체에선가 십자가지고 행렬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짓들을 하는 것인지 참으로 울분이 치밀어 오른다. 이들은 필시 예수를 모르는 자들이며 나무에 달리신 예수님의 고통과 죽으심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자들이다. 이것이야말로 사악한 천주교의 행위를 스스로 답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성경에 누가 십자가를 지며 고난을 기린 적이 있던가? 전설이기는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바로 십자가에 달릴 수 없어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제자들은 모두가 순교로 그들의 생을 마감하였다.
주님의 죽으심이 그런 허탄한 작태를 보이라고 죽으심이 아니다. 부활절 행사를 위해 항상 1년 전부터 준비를 하고 있는 단체에 의해 해마다 부활절 행사는 치루어 진다. 거기에도 머리들은 기부금이 많다. 회장단 부회장단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이름들이 오른다. 그 경비 또한 만만치를 않다. 수많은 인력, 금전, 시간 등 지금쯤 준비하는 기관은 눈코 뜰 사이가 없을 것이다. 작년에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 합동 부활절 예배에 참석하였다. 참으로 썰렁하기 짝이 없었다.
과연 부활절의 의미가 이러한 행사로 인해 교회나 성도들에게 무엇을 심어주고 있는가? 어차피 이러한 행사는 그 본질이 성경의 요구가 아니며 오히려 그 귀중한 물질만 허비하는 또 아니면 어떤 단체의 먹이사슬에 불과 할 뿐이다.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어떤 행사를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다시는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는데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본인도 한 때는 절기를 신봉하는 것이 원칙인 양 교육을 받고 사순절 기간에는 영광송이나 할렐루야 곡이나 또 밝은 곡은 삼가야 한다고 인식을 하고 그렇게 수년을 지휘하여 왔다. 하지만 신학을 바로 배우면서 이 모두가 주님의 요구가 아님을 깨닫고 찬송은 언제나 밝고 명랑하며 기쁨과 환희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왜! 지금, 아니 오늘 우리 속에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는 고난 속에 계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천주교처럼 아직도 예수님의 시체의 모양을 십자가에 매단 체로 엄숙하고 고상한 척 하는 가증한 짓들은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사순절이요 고난 주간이요 부활절이라는 것 때문에 생겨난 것이 천주교의 산물인 브라질의 대축제 살인의 축제 카니발이 아니던가? 사순절이 오기 전에 실컷 먹고 마시고 춤추며 광란을 즐기자는 것이 아닌가? 이런 것들이 천주교가 가지고 있는 양의 탈을 쓴 음녀의 모습이다.
지금은 고난을 슬퍼하거나 근심된 가증한 얼굴을 할 때가 아니다. 주님은 그런 가증한 의식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신 분이시다.
그래서 기독교의 전례는 죽은 자들을 위한 제사도 없으며 추모라는 교묘한 거짓말도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곧 깰 때가 오기 때문이다.
우상종교에 지나지 않는 천주교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있고 제사가 있고 지옥 갈 자도 돈푼이나 갔다 바치면 연옥에서 들리워 낙원으로 간다나! 참으로 개도 웃을 일이다. 이 어리석은 자들이어 들어라! 주님은 2천년 전에 이미 부활을 하셨다.
주님께서는 어떤 것도 기념하라 하시지도 않았으며 생각도 하라 하시지 않으셨다. 왜 그러셨을까?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절기들을 팔아먹고 예수를 팔아먹고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지금 목사들은 부활절의 헌금 돈 보따리를 머리 속에 잔뜩 그리고 있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십자가에 원수 된 자들이여! 너희 속에 심어준 부활을 버리지 말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