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찬송가와 현 교계 찬양에 대한 비판 - 장로교 정통 입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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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찬송가와 현 교계 찬양에 대한 비판 - 장로교 정통 입장에서


글쓴이 : 박양 날짜 : 2004/04/18 조회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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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성가 무엇이 문제인가?



복음성가(gospel)라는 말의 역사는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그리 오래지 않다. 특히 성경에서는 그 어떤 유래나 또는 역사적인 기록도 없으며 그 말 자체도 찾아볼 수 없다. 이 말은 19세기말 영국의 뉴 캐슬(New Castle)지방에서 부흥사 무디(D. L. Moody)와 그의 음악 동역자 생키(Ira D. sankey)에 의하여 시작된 복음선포의 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전도를 위해 청중을 모으는데 아주 효과적이었는데 그들이 사용한 음악들은 그 당시 많이 불리어지던 민요나 세속곡들을 사용하므로 쉽게 접근을 할 수가 있었다. 또 복음성가라는 말은 같은 시기의 복음전도자 휘틀(D. W. Whittle)의 음악 파트너인 블리스(P. P. Bliss)가 펴낸 "Gospel Songs" 라는 책에서 유래하게 되었으며 이 복음성가라는 말은 성경에 전혀 근거한 말이 아니라는 것에 유념하여야 한다.

이러한 복음성가의 성공적인 사례가 그대로 한국에 복음전파의 경로를 따라 그대로 들어오게 되면서 교회음악 뿐만이 아니라 예전적인 요소를 찾아볼 수 없는 비예전적인 집회의 형식이 한국교회의 예전의 전례가 되었다. 이러한 예전적인 요소는 70 ∼ 80년도에 절정을 이룬 순복음의 복음송의 관습이 현대에 와서는 교파를 초월하여 거의 대등소이하다고 하면 맞을 것이다. 그로 인해 성령이 먼저인지 나의 간구와 요구가 먼저인지를 분간하기 힘들다.

물론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기는 하겠지만 서양의 예배학자나 신학자들이 한국교회의 예배하는 모습을 보고 하는 말이 한국교회는 집회는 있으나 예배는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중에도 한국교회는 장로교를 위시한 여러 교파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찬송가를 제작하여 한국교회는 여러 가지의 찬송을 가지게 되었으며 또 어떤 확실한 교파에 적을 두지 못한 성도들은 여러 개의 찬송을 소유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한국 찬송가의 계보를 알아보므로 복음성가의 유래를 아는 일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최초로 감리회가 1892년에 "찬미가"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여 장로회가 1894년 "찬양가" 1895년 "찬셩시"를 제작 1908년에는 "찬송가"로 성결교가 최초로 "복음가"를 만들고 1918년에는 "신정복음가" 1930년에 "부흥성가"를 제작 침례교는 1900년에 "복음찬미"를 제작 1937년에 개정을 하였고 구세군은 1908년에 "구세군장"을 제작 1912년에 "구세군가"를 제작 현재는 "통일찬송과 합본"을 사용 성공회 1903년에 "성회송가" 1907년에 "찬미가" 1910년에 또다시 "성회송가" 1935년에 "성회송가(곡보부)" 1961년에 "성공회성가"로 현재에 이름 안식교 1911년 "찬미가"로 현재에 이름

그 후 장로교는 1931년에 "신정찬송가"를 제작하였고 1949년에는 "합동찬송" 장로교와 고려파로 갈라지면서 고려파에서는 1935년 "신편찬송가"를 제작 그후 장로교에서 WCC 가입문제로 장로교 합동과 통합으로 갈라지면서 고려파와 합동은 1962년에 "새찬송가"를 제작 사용함 통합측은 1949년 "합동찬송" 1967년에는 "개편찬송"
1983년 통일찬송가가 나오기 전 20 여 개의 찬송가가 만들어 졌다. 그 때는 그래도 각자 교파의 색깔을 가지고 찬송이 만들어 졌다.



통일찬송가 비판

그러나 통일찬송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부터 찬송의 본질은 빗나가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한국교회가 낳은 최고의 오점으로 기록되고 있다. 왜냐하면 통일찬송의 질적인면에서 보면, 먼저 신학적인 검증과 작곡 작사자의 선별과 음악의 질적인면과 특히 교회라는 본질에 있어서는 예배를 먼저 생각해야 함에도 통일찬송에서는 예배적인 요소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결교나 침례교가 만들어낸 부흥성가와 복음찬미가를 통일찬송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그 후 통일찬송가의 평가는 한마디로 찬송가라고 명명하기에는 너무나 저속하기가 짝이 없다고 하는 것이 예배학자들이나 교회음악가들의 후평이었다. 예배를 무시하거나 망각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것이어서 그 결과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신앙마저 바꾸어놓고 말았다. 한마디로 이기주의 신앙으로 교파주의 개교회주의 사상은 더욱 팽배하여 이제는 그 도를 넘어 무속이요 무당문화로 전락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한때 미국이나 유럽에 불었던 대형화 바람이 한국에는 대형화를 넘어 기업형 교회로 그 절정을 이루었으며, 또 미국이나 유럽의 교회들처럼 무너질 날이 불 보듯 뻔하다.

1980년 이후 성도의 수는 감소하고 있으며 무분별한 수평이동으로 대형교회로 몰리면서 개척교회는 문을 닫고 성도들의 신앙은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대다수의 성도들에게서는 더 이상의 회개의 감정도 눈물도 사라진지 오래다. 그래서 이산 저산 이 제단 저 제단 패역한 세대가 구하는 표적들만 바라면서 온갖 사이비 집단에 종들이 되어 지금도 죽어 가는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모두가 입술의 열매처럼 나타난 개인 체험주의적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복음성가의 결과라고 한다면 당장에 노발대발할 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물어야 할 것이 있다면 지금 교회가 부르고 있는 통일찬송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 많은가? 아니면 인간을 향한 것이 많은가? 또, 성도들이 찬송가를 많이 알고 있으며 또 찬송가를 많이 부르고 있는가? 아니면 복음성가를 많이 알고 또 많이 부르고 있는가? 양심 것 대답하기 바란다. 그의 증거로는 많은 신학교에서 찬송가학을 가르치면서 실제적으로 경험한 바이며, 교회들의 주보에서도 그 증거는 확실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10대 20대 30대들에게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통일찬송가는 아예 부르지 못할 노래로까지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현대의 교회는 젊은이 따로 늙은인 따로 자신들만의 노래에 취해있다.

이러한 때에 목사들이나 교회음악 지도자들은 찬송도 잘 구분하여 선택하고 부르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래서 칼빈이나 루터 시대에는 음악을 모르면 목사가 되지 말라는 일화도 나왔다. 왜냐하면 음악자체를 잘못 사용하면 신앙에 큰 문제를 가져오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음악 자체가 갖는 위력이란 가사를 뛰어넘어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칼빈은 한때 교회악기라고 할 수 있는 오르간마저도 사용을 금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오늘 우리들 앞에 나타나고 있지를 않는가? 그래서 나는 젊은이들에게 음악에 심취되어 춤을 추지 말고 성령에 이끌리어 춤추기를 바랄 뿐이다. 특히 온누리교회에서 발단이 된 찬양과 경배라는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말 그대로 우리가 찬송이라고 할 때는 그 대상이 반드시 하나님 한 분임을 확신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예배하는 행위에서는 찬송이라는 것은 더욱 그러하기 때문이다. 교회란 예배를 위한 성도들의 공동체임을 바로 깨닫는다면 결코 복음성가가 우리의 부르는 주류의 노래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며 예배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본인은 찬송이 노래인가? 라고까지 글을 쓴 바가 있다. 왜냐하면 찬미의 제사란 노래나 음악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물이라는 본질은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나 또 다른 연보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제물이요 우리의 삶이 산 제사요 제물임을 안다면 찬송은 반드시 하나님 영광의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교회들은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처럼 "의와 인과 신"에 대해서는 관용하고 회향과 박하와 근채의 십일조인 물질만을 강조하는 바로 기복을 신앙을 조장하여 물질이 곧 축북의 근본이요 신앙의 잣대인 것으로 강조하니 이것이 무당들과 무엇이 다를 바가 있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소위 오순절이라고 하는 교단의 어떤 교회의 목사 왈 성령세례의 열매는 곧 물질의 축복으로 나타난다고 설교 때마다 입에 거품을 머금고 외치고 있다. 소위 무당문화를 몰아내자고 하는 자들의 소행이다.

다시 말하노니 하나님께서는 뚱땅거리고 쿵쿵거리며 마이크를 총동원하여 귀를 멀게하며 마치 성령의 충만을 가장하는 노래도 또 대 오케스트라의 우람찬 음악도 그야말로 무당 굿하듯 삼신 할멈을 부르듯 괴성을 지르는 주여! 삼창도 이제는 그만 하라시고 우리들의 상한 심령의 소리에 귀 기울이신다. 어떤 악기도 없어도 좋다 노래를 못해도 좋다. 그러나 오히려 주님께서는 우리의 심령의 줄을 조이시고 퉁기시며 그 소리를 즐기시고 계신다.

오랜 세월동안 한국교회의 교파간의 문제가 종종 불거나왔고 이로 인해 교회일치운동이 일기시작하면서 그 대책의 일환으로 통일찬송가를 제작(1983년)하였다. 그러나 교회일치운동은 찬송가 하나만의 통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또 다시 십 수년 전부터 새로운 찬송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으며 그 해결의 실마리는 잘 풀리지 않고 있다. 혹 어떤 찬송가로 새로 거듭날지는 모르겠으나 교회라는 이름하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문화 예술 정치까지도 예배를 바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어떤 것이라도 용납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사실은 성도들의 일상생활 자체가 예배적인 관계 속에서 삶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거룩한 안식일이요 주일이라는 의미는 종교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더욱 교회들의 안타까운 사실은 지금 미국을 통해서 들어오고 있는 CCM이라는 노래들은 예배와는 무관할뿐더러 그 출처가 신앙인에게서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 상업성의 성질을 훨씬 많이 띠고 있다는데 깊이 고려를 해야할 것이나 꿩 잡는게 메라는 격으로 교회들은 이미 쇼장으로 변한지가 오래이다. 그리고 교회의 환경과 장소의 대소를 고려하지도 않은 채 무분별하게 음향장치를 설치하여 이미 성도들의 귀는 아주 세미한 소리를 경청하는 것에 멀어진지 오래다. 왜냐하면 이 모두가 음악적인 상식의 무지에서 온 것이라면 맞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목사들은 예배는 거룩한 것이라고 말로는 잘 강조를 하고 있다.

특히 예배 중에서의 찬송이란 어느 한 사람이나 한 부류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함에도 성도들의 찬송을 도적질하는 무지한 행동들이 이제는 당연시되었으니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뭔가 맥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라고 생각들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줄곧 빠르게와 신나게 부르는데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성령이란 그렇게 해서 충만을 입는다거나 성령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성령을 인식할 때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라는 의미를 깊이 깨달아야 한다.

교회에서 무당 굿판 하듯 한다는 말이 나오게 된 동기가 바로 복음성가를 하나의 무당의 굿판을 벌이듯 사용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특히 이단들이나 사이비종교 또 성령을 앞세운 교단들일수록 더욱 그러한 모습으로 노래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음악적 목적은 성령의 역사를 힘입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라는 매체를 통해 체면의 도구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듯 한국교회의 부흥사들이 사용하고 있는 복음성가는 거의 체면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찬송가학에서도 밝혔지만 찬송이란 결과적인 것이지 찬송을 뜨겁게 하므로 은혜를 입거나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저들은 주여! 삼창과 신들린 듯 빠르고 신나게 부르는 것을 가지고 성령의 충만을 위장하고 있을 따름이다. 성경 어디를 찾아보아도 찬송이라는 매체는 먼저 하나님의 영광이 있은 후에 깜짝 놀라고 또 감격한 그 결과적으로 반드시 드러나는 것이 찬양이요 찬송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목사도 예배하는 자이지 예배를 받거나 평가하는 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합창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합창은 말 그대로 단체가 한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한 사람이 자기만의 소리를 낸다거나 아니면 자신만 큰소리를 낸다면 그 합창은 깨어지고 만다. 그래서 목사는 설교 때에만 마이크를 사용하고 찬송할 때는 마이크를 끄고 성도들과 한목소리로 찬송해야 한다. 또 목사가 찬송 할 때 마이크를 사용치 말아야 할 이유는 목사가 음악을 전공하거나 아니면 그 음악을 정확히 부르는 자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대다수 목사들이 그렇지를 못하다. 반주자는 잘 반주를 하는데 목사는 반주와 다른 음으로 다른 속도로 부르면 성도들은 어쩔 수 없이 마이크 소리에 따라갈 수밖에 없다. 이런 모든 이유가 자기식의 복음성가를 전적으로 부르면서 영원히 뿌리를 내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마이크를 사용하게 된 역사는 음악을 모르던 시절에 음악을 가르치기 위해서 인도자가 불렀던 것이지 아는 찬송을 가지고 마이크로 노래하는 것은 오히려 바른찬송에 방해가 되며 부르는 자의 감정마저 빼앗아 가는 것이 된다. 천주교가 종교개혁 이전에는 성도들이 찬송을 부르는 권한은 존재하지를 않았다. 그래서 사제들이나 따로 훈련된 자들에 의해서만 불리워 졌으며 성도들은 관객들일 뿐이었다. 이렇듯 교회들의 문제는 이제 그 한계를 넘어, 진정 성도들의 찬송소리는 들을 수가 없고 잡다한 악기들의 소리에 성도들의 귀는 이미 식상해 있다. 음악은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강하게 적당한 곡선을 그리며 불리워져야 하는데 시종일관 때리고 부수듯 빠르다 못해 광란에 이르도록 온통 소란의 연속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수만 가지의 악기소리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감격의 소리 믿음의 소리를 원하신다는 것을 목회자들은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목사들이 성도들의 감정마저 일원화하려는 것이 문제이다. 한 성령 안에서도 각기 받는 은사가 다르듯이 느끼는 감정도 다르기 때문인데도 말이다. 이러한 사례는 성령을 주장하는 자들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을 자지우지하면서 성령을 자신의 체면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 저들은 그러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마치 성령이 충만한 것처럼 날뛰고 있다. 성령의 은사의 마지막 단계가 절제이다. 성령님은 인격으로 다가오시지 무질서로 역사하시는 법은 성경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부흥사들은 집회를 시작하면서 주로 복음송을 이용하여 성령의 역사가 아닌 체면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교회의 예배는 이런 부흥회 스타일의 예배의식을 추구하여 왔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개념이 아니라 예배를 보는, 다시 말해서 쇼를 구경하고 스트레스를 풀고 돌아가는 형식으로 그 예배는 문턱을 넘어서면서 텅 비고 식은 냄비처럼 세상에서 요란하기만 한 것이 오늘날 교회들의 열매이다.

본론적으로 복음성가는 한마디로 예배와는 무관한 것임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특히 성경에서 요구되는 복음성가는 존재하지 않으며 굳이 복음성가라고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복음찬미가(gospel hymn)가 되어야 한다. 복음찬미가란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참 복음이며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복음이다. 고로 찬송 자체가 복음인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의 찬송은 하나님을 찬송할 때 항상 이적이 나타났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복음송은 나의 고백이요 간증이지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아님을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일컫는 복음성가란 인간 개개인의 신앙고백일 뿐 하나님을 향한 예배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되며 교회 밖에서 전도를 위한 노래가 그 본연의 임무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예배하는 자들의 공동체에서는 찬송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지금도 늦지를 않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바른찬송을 가르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당신은 지금 구원의 감격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러면 복음송이 아닌 찬송을 드리십시오! 당신에게 기쁨이 넘치고 있습니까? 그러면 복음송이 아닌 찬송을 부르십시오! 당신이 주님 때문에 고통과 환난을 당하시고 계십니까? 그러면 복음송이 아닌 찬송으로 승리하십시오! 당신에게 감사하실 마음이 있습니까? 그러면 복음송이 아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영광의 찬송을 드리십시오!

우리는 곧 잘 초대교회의 오순절 성령의 폭발적인 역사를 다시 주십사 하고 목이 터져라 부르짖는데 그러나 오순절의 역사는 그렇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성령 충만한 삶이 먼저 하나님께 영광으로 나타났으며, 또 그들은 날마다 새 노래로 하나님께 찬송을 드린 그 결과로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으므로 날마다 하나님의 역사요 교회의 역사는 큰 힘을 얻게 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계시록에서의 24장로들의 찬송이 어떤 것인가에 관심을 돌리고 하나님이 들으시는 날마다 새 찬송을 삶 속에서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