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교회 반세기의 회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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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교회 반세기의 회고 (2)


번호 : 91 등록일 : 2004-03-10 ■ 고신 교회 반세기의 회고 (2) -최해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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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6.25 동란의 발동
1948년부터 호림부대의 활동으로 남침계획을 저지하다가 전멸을 당하다시피 했다. 1949. 5-
8월까지 웅진지구에 침투한 적군을 격퇴한 것이 저 유명한 옹진전투이다. 그러다가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4시를 기해서 인민군 25만의 대군이 전 전선에 걸쳐 일제히 기습공격
을 감행, 4만8천명의 아군은 중과부적으로 밀려서 개전 3일만에 서울을 뺏기고 파죽지세로
밀려가다가 1950년 6월 27일 UN군의 즉각 개입으로 3년 1개월의 전쟁 끝에 1953년 7월 27
일 휴전협정의 성립으로 전쟁은 일단 끝이 났으나, 이래 50여년간 북괴의 도전은 끊이지 않
은 채 긴 역사를 이어온 것이 한국의 실정이다. 세계 역사상 이와 같은 사례는 한번도 없었
다. 참전국은 16개국이었으나 간접지원국까지 합하면 45개국이었다. 3년 1개월간 계속된 전
투에서 국군 전사 14만 1천명, UN군 전사 3만 7천 8백명, 전상 71만 7천 83명, 민간인 사
망 24만 4천 7뱍 68명, 인민군 피학살자 12만 8천 9뱍 36명 등 총 6백만명의 희생자가 나왔
다.
이때 우리 교단이 시행한 특별한 사항은 ①초량교회에서 모인 전국 목사 장로 기도회에 박
윤선 목사를 강사로 김인서 목사의 고백, 요나가 고래 배속에서 회개한 것 같이 우리는 고
려파 속에서 회개했다고 말했다. ②복음병원 개설: 영도에 천막을 치고 전상자와 일반 환자
를 무료로 진료하였다. ③평양에 올라가서(한부선 목사와 한상동 목사) 강단에 서려고 했으
나 이미 올라간 목사들에 의하여 고려파 목사를 세우지 않기로 결의했기 때문에 부득불 사
가에서 예배를 보고 곧 남쪽으로 내려와 버렸다.

10. 고신교단의 탄생
1) 옥중성도들의 구상
한상동 주남선 등 옥중성도들은 한국교회의 범죄와 타락을 탄식하면서 기도하는 중에 교회
재건의 계획을 구상하였다.

2) 출옥성도들의 규합
한상동 주남선 손양원 이인재 손명복 제 목사들이 회합하여 박형룡 목사를 교장으로 초대하
여 한국교회 재건을 위한 구상을 논의하였다. 1946년 4월 전 만주 심양(봉천) 동북신학교
교수였던 박윤선 목사와 함께 신학교 설립을 논의하였고, 당년 6월 23일부터 8월 23일까지
진해 해군하사관학교 교사에서 신학강좌를 열었다.
1946년 7월 남영환 전도사를 만주로 파견, 박형룡 목사를 초빙해 왔다. 남 목사의 말에 의
하면 서해 바다를 항해해 오면서 풍랑을 만나 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동년 9월 20일 박윤
선 목사를 교장서리로 하고 부산 금성중학교 교사를 빌려서 고려신학교를 개교했다.

3) 박형룡 박사의 상경 사건
1947년 10월 14일 박형룡 목사가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 1년 만에 상경, 장로회신학교
교장으로 전임하고 다시 박윤선 목사가 교장직을 맡게 되면서 사실상 한국 장로교는 분열
의 씨앗을 품게 되었다.
1951년 5월 부산 중앙교회에서 열린 총회 속회에서 한상동 목사 추출을 결의, 9월 8일 명도
요청으로 5백여명의 교인들이 주영문 장로의 집 마당에서 우산을 쓰고 예배를 드림으로서
삼일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래 10년 간 서울의 장로회 신학교와 부산의 고려신학교 양대세력으로 성장하다가 1959년
9월 24일 소위 3천만원 사건으로 장로교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소위 총회파가 분열되면서 한
국교회의 분열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11. WCC와 NAE, 그리고 ICCC
본 교단은 그간 반신신학, 반공산주의, 반캐톨릭주의를 표방한 ICCC와의 우호관계를 유지해
왔다. 한편 장신측 소위 총회파는 WCC와의 관계속에서 교세확장을 힘써오고 있었다. 그리
고 다른 한편 한국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기장측은 처음부터 현실주의와 신신학편에 소속되
어 있었다. 그러던 중 WCC가 제공한 3천만원 사건으로 NAE측이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
다가 1959년 9월 24일 오후 7시 대전 중앙교회에서 소위 3천만원 사건으로 총회파가 승동측
과 연동측으로 분열되었다. 연동측은 WCC를, 승동측은 NAE를 표방해서 싸움을 벌였다.
본 교단은 오랫동안 ICCC와의 친우관계를 유지해 왔으나, 정식회원 교단으로는 가입하지 않
고 다만 옵저버로만 참가해온 것은 한국교회의 다른 교단들과의 일치를 원해왔기 때문이
다. 그런데 총회파가 양대 교단으로 분열되자 칼 맥킨타이어와 홀드크로프트(허대전) 등
ICCC 맴버들이 대거 몰려와서 승동측 교단을 선동하여 일대소란을 일으켰다.
이때 NAE 본부에서는 한국교회의 분열과는 상관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자 보수측은 ICCC
에 적극 동조하게 되었다. ICCC 대표 일행은 서울과 부산 대구 등 대도시를 순회하면서 WCC
의 용공성을 폭로하면서 대대적인 집회를 열었다. 강사는 주로 매킨타이어 박사였고, 통역
은 당시 서울대 종교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상복(후일 목사)씨 였다.

12. 합동과 환원
1) 한일관의 닭고기 사건
10년 전 우리 교단을 이단시하고 경멸하던 승동측 총회가 궁지에 물리자 합동을 제의해 온
것은 극히 이례적이었다. 박형룡 목사를 비롯한 승동측 중진 인사들은 서울 종로 한일관 식
당에 한상동 박손혁 황철도 목사 등 본 교단 중진들을 초청, 닭고기 반 마리씩으로 식사를
제공하면서 눈물로 합동을 제의해 왔다. 60년대 초 우리나라의 경제가 GNP 70불 시대였으니
까 그때의 한일관이라면 한국 최고의 레스토랑이었고, 치킨의 접대는 가장 값진 대접이었
다.

2) 교단의 합동
1960년 12월 13일 서울 흥천교회에서 열린 고신측 제10회 제2차 임시총회에서 188명 중 가
178명, 부 8명, 기권 2명으로 총회파 소위 NAE측과 합동하기로 가결했고, 1960년 12월 13
일 오후 5시 30분 승동교회당에서 역사적인 합동총회가 개최되었다. 이때 결정된 합동 10
개 원칙 가운데 핵심이 되는 몇 가지 결정사항이 있었다. ①총회 총대와 학교 이사는 양측
동수로 한다 ②영남지방 3개노회(경남 경북 부산)는 고신측 노회로 통합, 기타지역은 총회
파 노회로 통합한다 ③찬송가는 고신측에서 8년간 연구, 편집하여 이미 출판에 들어간 새
찬송가를 합동기념판으로 출간하여 사용한다 ④신학교는 단일화하여 고려신학교는 총회신학
교 부산분교로 한다 등이었다.
이 합동원칙은 1년도 못되어 총회파의 일방적인 다수 횡포의 결의로 폐지되었다. 신학교 이
사를 15:5로 개편하고 졸업반 학생 10명을 서울의 소위 옐로우 신학교로 보내는 동시에 부
산분교는 학생모집을 금지시키는 결의를 하고 말았다. 신학졸업반 학생 10명은 서울로 갔으
나 신앙사상의 불일치를 이유로 일제히 부산으로 내려와 버렸다.
한편 각 지역 노회 가운데 다른 곳에서는 총회파 노회에 각각 편입이 되었으나 영남지방 노
회들은 고신측 노회에 귀속하지 않고 적반하장으로 고려파가 회개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관
용을 베풀어 받아들인 것이라고 거짓말만을 일삼아 왔다.

3) 환원
(1) 제45회 총회의 ICCC 파동 : 1961년 9월 21일에 개최된 제45회 총회가 부산 남교회당에
서 열렸을 때 ICCC의 기금으로 예배당을 세운 서울 평안교회의 K목사와 대구의 P목사, 그리
고 J목사 등이 선동해서 총회를 ICCC에 가입시키려고 백방으로 노력하므로써 찬반양측이 격
돌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소란 가운데 현호택 장로의 긴급동의로 ICCC와의 단교선언을 했
다.
(2) 고려신학교의 복교 선언 : 1962년 10월 17일 신학교 경건회 시간에 한상동 목사가 갑자
기 복교선언을 했다. 이때 학생회의 성명서가 나오고 변순재 최기채 이재기 등 극소수를 제
외한 절대 대수의 찬성박수가 터져 나왔다.
(3) 고신총회 재개 : 1963년 9월 17일부터 20일까지 부산 남교회당에서 제13회 총회가 개최
되었다. 이것은 합동측과 합동한지 34개월만에 환원하게 된 것이다.
(4) 보류파의 합동측 가입과 고신측 잔여교회들의 잔류 : 보류파란 월남해 온 목사들이 송
상석 목사의 끈질긴 소송문제를 거론, 보류한 분들인데 충현교회와 이현동교회 등이 있었
다.
(5) 신학교와 복음병원 건물 신축 : 한부선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당국의 지원으로 송도
에 신축건물을 세웠다. 환원당시 신학교 건물을 등기하고 복음병원은 방치되었던 것을 박손
혁 목사가 이사장 자격으로 개인명의로 등기했다가 곧바로 정식으로 등기했다.
(6) 박윤선 목사의 안식일 문제 : 00선교사가 안식년 귀국시 목요일 출발예정인 배를 타고
짐을 실었는데, 주일날 떠나게 되어 배에 가서 송별예배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택시가 고
장이 나서 주일예배에 참석을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되어 범천교회에서 모
인 노회에서 격론 끝에 이사회에서 사과를 요구했다.
박윤선 박사는 경건회 시간에 사면을 표현하고 서울로 가버렸다. 이것이 박목사의 두 번째
탈교사건이었다. 첫 번째는 소송문제로 탈교, 서울 개혁신학교 설립을 했다가 윤봉기 목사
의 끈질긴 간구 끝에 복직했으나 이번에 또다시 사퇴하므로써 박윤선 목사는 본 교단과 영
영 이별을 하고 말았다.
(7) 3박사의 귀국과 고려신학교의 재도약 :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최해일 목사(증경 총회장)
■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