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올바른 성경해석관 - 상급에 대하여
/발언/1122번, 하늘나라에는 상급이 없다 - 통합측 목회자 (최정호) 2004-09-21
이 책에 대한 내용 전체가 /초기화면/연구실/자료/836번-842번, 04.5.23./에 올려져 있습니다. -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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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적 소개
서적: 하늘나라 상급과 은혜
저자: 최정호
저자는 1944년 김해에서 출생. 금성중고교를 나와 Kernel univ.에서
사회과학분야(문화인류학)을 전공했으며 장신 총신대 신대원,
California International Theological Seminary에서 성경신학을 전공
했다. 현재 석촌동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신학영어 교재외
다수가 있다.
④서적 출간 정보
'하늘나라 상급과 은혜'
최정호 지음
초판인쇄/1994.9.3.
초판발행/1994.9.8.
발행처/도서출판 총신출판부
발행인/이문규
등록번호/제13-507호
등록일자/1994.3.12
주소/영등포구 대림2동 709-2 대림 B/D 3층
전화/833-3086, 831-1321
팩스/843-5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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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
․책머리에
․서언/올바른 성경해석관에 대하여
제1장 하늘나라에 대한 올바른 지식 /11
제2장 하늘나라와 상급 /47
제3장 하늘나라와 면류관 /89
제4장 유업의 상 /115
제5장 하늘나라와 우리의 공로 /127
제6장 종말의 문턱 /159
제7장 상급이 없다면 신앙의 소망과 목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드리는 권면과 위로 /179
․부록/ 191
하늘나라 상급에 대한 설문조사
서언
올바른 성경 해석관에 대하여
「하늘나라 상급과 은혜」라는 이 책은 이미 학교에서 강의했던 내용을 다시 정리한 것으로 원제는 「하늘나라와 상급」입니다.
이 책을 발간하게 된 솔직한 나의 심정은 목회자나 평신도들의 잘못된 성경해석이 마치 전통적인 교회 안에 정착되어졌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오류들을 바로잡아 주고자 하는 뜻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에는 서구 신학이 우리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기는 했으나 우리의 무분별하고 아무런 검토 없는 수용에도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바입니다.
이 책을 쓰기 위해 나는 가능한 한 여러 목회자들과 하늘나라의 상급에 대하여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들 대부분이 하늘나라에서의 상급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대답이 없었고 평신도들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대화를 가졌던 것은 폭넓은 견해를 듣고자 했던 저자의 조심스런 처신이라 보아 독자들의 이해를 구하는 바입니다.
먼저 성경 해석에 있어서는 문자적인 해석과 상징적인 해석에 대한 바른 견해가 필요한데, 우리는 대부분 별다른 갈등도 없이 해석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제1장에서는 하늘나라의 인식에 대한 대체적인 방법을 쉽게 정리했습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성경계시는 매우 다양하지만 여기에서는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인식의 범위에서 상징, 비유 등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이것을 ‘현상’(phenomenon)이라고 하며,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는 결국 나타난 ‘현상’을 통하여 직관적 이해를 한 뒤 곧 하늘나라의 본질로 우리의 생각이 되돌아가야 한다는 현상학과 인식론을 바탕으로 해석의 방법을 정리했습니다.
제2장에서는 이 책의 본질적 문제인,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받을 것인지에 대해서 많은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해석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하늘나라에 대한 상급은 간단합니다. 흔히 우리가 하늘나라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공로로 받고, 하늘나라의 상급은 현세상에서 각자의 선행에 따른 보상으로 주어진다고 이해하여 온 잘못된 주장을 수정하고 있습니다.
제3장은 하늘나라에서 쓸 모자, 즉 면류관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알도록 구체적으로 정리했습니다. 이것은 5대 면류관이라는 극히 인간적인 망상을 깨뜨리기 위한 작업이었습니다. 이러한 면류관은 지상적 개념의 인식범위 안에서 계시된 진리일 뿐 하늘나라에서 우리가 직접 슬 모자는 아닙니다.
우리는 지상세계의 물질적 개념이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기 때문에 이해될 수 있는 것이지만 진리는 그냥 생각하는 이해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따라서 면류관은 지상적 개념에서 계시의 한 형태일 뿐 하늘나라에서 쓸 사물로써의 모자가 아닙니다.
제4장은 상에 대한 구체적인 의미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유업의 상’입니다. 여러분은 유업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습니까? 구약 이스라엘의 유업은 아브라함에게 부여된 지상세계에서의 의미가 크게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 유업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그들의 믿음에 의하여 먼 미래에 주어질 지상적 땅의 의미인 가나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지리적 가나안의 의미뿐만 아니라 지상적 이스라엘의 개념이 소실됨과 동시에 우리에게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주셨는데, 이것이 곧 유업의 상입니다.
유업이란 말은 ‘상속’ 또는 ‘상속인’이란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들의 자격을 얻은 성도가 누릴 하늘나라의 생활 그 자체를 말하므로 상급이라는 의미를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50에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을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제5장에서는 하늘나라에서 우리의 지상적 선행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겠다는 자들을 일깨워주기 위한 내용을 실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칼빈이 언급했던 두 가지의 비유가 적절할 줄 압니다.
첫째는, 밭의 소작권을 가진 자가 소유권의 명의까지 넘본다면, 소작권을 상실 당해도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를 맡은 소작 농부와 같습니다. 모든 권한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따라서 농부가 소작권 외에 동기상의 주인으로 착각한다는 것은 실로 슬픈 일입니다.
둘째는, 노예가 자기 주인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자신이 비록 천한 사람이지만 자유를 얻은 신분이라는 것을 멈추면서 자유인이라고 우긴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이전 노예의 신분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마땅할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공로는 하늘나라에서 아무 것도 아니며 그 모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제6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심판 이후에 있을 상급의 시간적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천년왕국의 유무와 착하고 충성된 종이 받을 칭찬의 시간적 의미를, 영원한 하늘나라에서는 언제쯤일지에 대한 자세한 검토를 했습니다.
그리고 제7장에서는 상급이 없다고 함으로 실망하는 이들에게 드리는 권면과 위로가 있으며, 부록으로 지금까지의 내용을 종합하여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끝으로 의문을 가진 자들을 위하여 될 수 있는 한 많은 성경구절을 인용했으며, 또 그에 따른 해석을 붙였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 여러분께 올바른 성경 해석관을 심어준다는 입장에서 최선을 다했으나 혹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연구 검토하시기 바랍니다.
제 1 장
하늘나라에 대한 올바른 지식
1
우리는 하늘나라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마치 전통처럼 믿어왔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하늘나라에 대하여 충분히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1장에서는 하늘나라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무엇인가를 정리했습니다.
그 자체만으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하늘나라
우리는 하늘나라에 대하여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하늘나라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이 확실한 대답을 못합니다. 흔히 하늘나라를 갔다 온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실상 그 이야기를 들어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꿈을 꾸었더니 하늘나라에 그가 머물 집이 없더라고 말하며, 또 어떤 사람은 쓸 모자가 없어 그 형편이 말이 아니더라고 합니다.
생각건대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다운 꿈을 꾸며, 어른은 어른에 맞는 꿈을 꾸고, 지혜로운 자는 지혜로운 꿈을 꿉니다. 따라서 꿈은 어떤 형태든 꿈꾸는 자의 의식세계에서 한정을 짓게 마련입니다.
어리석게도 많은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그 자체로서 표현이 가능한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하늘나라는 현실적으로 우리의 믿음으로만 이해가 가능할 뿐이지 그 이상은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마치 텔레비전을 보는 것처럼 채널을 다양하게 움직이려 합니다.
그래서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부득불 철학의 한 분야인 현상학(phenomenology)을 빌려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으며, 경험할 수 없는 천상의 문제를 나타내어진 현상을 빌려 표현하거나 이해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상학의 주요골자는 환원(reduktion)인데, 그것은 보이는 세계의 존재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형상의 세계로 되어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세계의 존재는 괄호에 넣어져야 하며 이것은 단지 존재하는 세계가 현상학의 바로 그 주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방법의 목적은 정당한 성경 해석을 위한 마지막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으로서 좀더 어려운 철학 용어를 빌리면 형상적 환원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사물에서부터 경험적 요소를 환원하여 사실의 본질을 그의 직접성 또는 구체성에 직관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의 전반적인 계시 형태가 이와 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어떤 현상을 통하여 직관, 회상, 상상, 그리고 판단을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려운 문제를 논의하는 것 같습니다만 사실 하늘나라의 실체는 표현이 불가능하고 단지 나타내어진 현상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한 이후 아주 작은 물리적 사실에서 단서를 잡아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야 합니다.
이러한 형상학은 착각과 오류에서 진리를 분별하는 방법을 응용한 것입니다. 착각과 오류는 경험된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는 달리 인식된 것으로 잘못된 경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현상학은 생소하지만 기독교 현상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기독교 인식론과 더불어 응용되고 있으며, 성경해석의 한 방법으로써 계시론의 기본 방법 중 하나임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천상적 계시는 비록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여 그 실체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지평적 차원에서 이성에 호소한 것입니다. 따라서 계시는 지상적 개념에서 표현되었지만 그 실체는 단연 하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그 자체만으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지상적 개념임을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을 계시의 형태 구조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인식은 지상적 표현
성경에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지상적인 비유를 통하여 그 개념을 알게 하는 내용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마태복음 13장을 보면 여러 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이것들은 지상적 개념에서 천상적 의미를 찾아 올라가는 표본이라 생각됩니다. 이 비유들이 현실적인 하늘나라에 대한 내용이든 아니면 미래의 하늘나라에 대한 내용이든 모든 무방합니다.
먼저 ‘씨뿌리는 자의 비유’(마 13:1-9)는 하늘나라의 실체적 이해를 위한 말씀으로서 하늘나라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 말씀의 뿌리가 없을 때, 또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힐 때 주어지는 내용들이며, 반대로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의 비유를 결실의 내용으로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두 번째 ‘가라지 비유’(마 13:24-34)는 예수님의 해설(마 13:36-43)에 근거하여 잘 알 수 있습니다.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 밭은 세상,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아들들, 가라지는 악한자의 아들들,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 추수 때는 세상 끝, 그리고 추수꾼은 천사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최종 의미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과 의인들을 구별하여 전자는 “풀부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며, 후자는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겨자씨와 누룩 비유’(마 13:31-33)도 이와 마찬가지로 전자는 하늘 나라의 성장, 후자는 하늘나라의 확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 ‘밭의 보화와 진주의 비유’(마 13:44-46)에서 전자는 하늘나라를 소유하기 위한 지혜와 최선의 노력을 의미하며, 후자는 상업의 원리를 일깨워주는 하늘나라의 소유에 대한 귀중한 의미입니다.
네 번째 ‘그물 비유’(마 13:47-50)는 세상 끝에 되어질 의인과 악인을 갈라놓은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런 비유적 말씀 후에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라고 묻는 것 또한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러한 비유에는 현실적 하늘나라와 미래적 하늘나라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하도록 주께서 가르치신 것이 아님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곡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는 말씀으로 비유의 말씀을 종결짓고 있는데, 이것은 하늘나라의 비밀을 배운 제자들은 풍요로운 복음의 곡간에서 진리를 방출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는 대부분 이러한 형태로 계시되어 있으며, 이 외에도 얼마든지 하늘나라에 대한 지상적 표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좀더 하늘나라의 의미를 인식론적 입장에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하늘나라의 인식을 위한 기초 지식
인식이란 말이 철학용어임에는 틀림없지만 부득불 빌려 사용합니다. 기독교 신학 안에도 ‘기독교 인식론’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식이라고 하여 그다지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의 서재에는 조명 전등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조명 수준 측정기가 부착되어 있는데, 1Lux의 밝기와 5Lux의 밝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나는 조명 전등의 예를 들어 인식에 대한 해석을 하고자 합니다. 1Lux의 밝기에 해당하는 사람의 인식에는 5Lux의 밝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인식의 입장에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철학적 입장에서 표현한다면 크게 합리론과 경험론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인식에 있어서 합리론은 절대적으로 보편타당한 인식의 가능을 주장합니다. 그것은 선천적이고 생득적인 이성에 의하여 가능한 것으로서 인식의 기본 능력이란 것입니다.
반면에 인식에 있어서 경험론은 특수적 방면을 중요시하는데, 이것은 경험에서 발생되는 것이며 감각적 경험이 지식의 근원이라고 하여 선천적 인식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인식은 경험에서 유래하여 경험이 없는 인식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나의 주장은 합리론이나 경험론을 서로 배타적인 입장에서 볼 필요가 없으며, 이 두 이론의 조화와 통일에서 비로소 인식의 성립이 가능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안에는 하늘나라의 인식에 대하여 이성과 신앙 가운데 어느 것이 우선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습니다 .일반 학문에는 이성이 주요한 내적 원리이지만 신학에서는 신앙이 주역이 된다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 양론에서 서로 순위 주장을 폅니다만 나는 이성이 우선임을 주장합니다. 어떤 입장이든 먼저 하늘나라에 대한 이성적 인식이 없으면 신앙이 주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로마서 11:19-20; 2: 14-15에서 불신자도 어느 정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도덕의 인식은 가지고 있으나 하나님의 계시를 용납하지 못하여 옳게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억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히브리서 11:3에서 “믿음으로 우리가 아나니”라는 말씀으로 신앙을 우선하는 자도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를 통한 하늘나라 인식
우리는 마태복음 25;14-30에 나타나 있는 달란트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이 말씀은 종들에게 맡겨진 책임을 결산하는 때까지 그들의 충성을 요구하는 것에 대한 비유입니다. 마태복음의 말씀을 보면, 종말적 예언에서 1-13절은 종말의 예비성, 14-30절은 종말의 충성심, 그리고 31-46절은 종말의 심판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1절에서 “그대에 천국은…”이라고 하여 하늘나라의 의미를 상기시키고 있으며 14절에 “또”라고 덧붙임으로 같은 의미를 또다시 생각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달란트 비유이지만 다시 한번 더 그 내용을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가면서 자기의 소유를 종들을 불러 각각 그들의 재능대로 나눠주었습니다.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또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는 바로 가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두 달란트를 남겼는데,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오래 세월이 지나 그 주인이 돌아와 회개하게 되었을 때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두 달란트 받았던 자는 두 달란트를 남겨 주인 앞에 내어놓았습니다. 그 주인은 종들에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고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자가 와서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에 대한 그 주인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마땅히 네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 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이 달란트 비유는 주님이 종들에게 맡겨진 책무를 잘 감당하여 결산 보고하는 날까지 관리와 책임, 그리고 이익을 남겨야 하는 상업의 의미가 있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충성을 입증해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달란트(talent)라는 말은 현실적으로 재능 또는 수식어를 붙여서 천부적인 재능이란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한 달란트는 장정의 1년 품삯의 가치임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재능이라는 의미에서 어떤 사람은 피아노나 바이올린 연주가로서, 체육가로서, 문학가로서, 전자 공학도로서 뛰어난 사람임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어떤 사람이든 크고 작은 달란트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화폐의 가치로 보더라도 달란트란 많은 양의 돈으로써 주인이 그 종들에게 준 자본금이나 투자의 의미를 가지기도 합니다.
당시 랍비 문헌을 보면, 자본과 이익은 주인에게 속하여 있었지만 만일 그 종이 히브리인이라면 종은 자신을 위하여 이 악을 가질 수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입장에서든 주인은 종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주었고, 종들은 동업을 통해 이익 배당에 참여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보면 재능이든 자본금이든 종은 주인에게 이를 남긴 사실만을 보고할 뿐입니다. 그래서 두 종은 각각 배를 남겼음을 보고했고, 한 종은 원금을 그대로 반환하여 보고하였습니다.
그 결과 두 종에게는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많은 것을 맡기겠다”라는 칭찬과 보상이 주어졌지만 한 좋은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가지고 있던 한 달란트까지 빼앗기고 바깥 어두운 데 내어 쫓겨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라고 질책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른 여러 가지 해석의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과연 이것이 주는 핵심의미가 무엇인지는 바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강의 시간에 충성된 자의 보상이나 공로가 하늘나라에서 그대로 있지 않냐는 학생들의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교회에서 듣는 성경 해석이나 설교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달란트 비유가 현실 우리의 삶 속에서 충성된 자가 되어야 하며 이 땅에서 그대로 보상이나 공로가 인정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충성된 자의 보상이나 공로가 하나님 앞에 인정될 것이며, 신앙의 목표가 바로 지상적 공로를 통하여 하늘나라에서 인정받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달란트 비유에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리라”는 것은 칭찬과 더불어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므로 많은 것을 맡기겠다는 충성의 신임장과 같은 표현입니다.
여기에서 어떤 경우이든 다섯 달란트를 받아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이나, 두 달란트를 받아 두 달란트를 남긴 종에게 모두 똑같은 칭찬과 충성의 신임장인 “많은 것을 네게 맡기겠다”고 합니다. 반면에 한 달란트를 받아 땅을 파고 감추어 두었던 종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바깥 어두운 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첫째로 충성자와 충성하지 않은 자의 구별이며, 둘째로 충성자에게 어떤 달란트이든 얼마의 달란트이든 칭찬이 같다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늘나라에서 우리의 공로가 인정된다는 것입니까? 달란트의 비유에서 충성된 두 종의 칭찬이 현실적인 것입니까, 아니면 차후 영원한 하늘 나라에서 주어진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비유 목적이 무엇입니까?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라는 말씀이 차후 하늘나라에서 충성자에게 많은 것을 맡겨 주시겠다는 의미입니까? 아닙니다. 하늘나라에서 충성자에게 부과될 달란트는 하나도 없습니다.
단지 이 비유의 목적은 예수님 당시에 이 말씀을 듣는 자들이나 오늘날 이 성경을 읽는 자들에게 충성과 충성하지 않은 종들의 구별과 충성한 자들에게 주어진 평등의 칭찬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세 가지 비유를 보면 그것은 분명히 종말의 현상을 일깨워주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에 대한 진리이며, 현재는 언덕 저 너머에 있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날에 주어질 최종 심판과 어딘가 모를 지안적 하늘나라의 도래 입문에서 주어질 지상적 개념의 칭찬입니다.
마태복음 25:1에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에서 둘 다 “하늘나라는 마치…와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늘나라에 대하여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25:1-13이 하늘나라의 예비에 대한 비유라면 마태복음 25:14-30은 그와 함께 충성심을 더 부가한 것이며, 이어 마태복음 25:31-46은 양과 염소의 분별로서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나라 곧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생명의 복과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다는 것뿐이지 다른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25장의 세 가지 비유는 모두 최종 심판에 걸려 있는 필연적 과정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사야 11:8-9
기독교 변증학을 강의하던 중에 한 학생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어린아이가 독사 구멍에 손을 넣어도 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아마 이 학생은 이사야 11:8-9에 있는 말씀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는 말씀인 줄 압니다.
또 이사야 35:8-10에 보면 천국에 대한 다른 묘사를 발견하게 됩니다.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 거기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고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 그리고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원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라”.
이사야는 이 두 내용에서 모순적인 구절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호모순이 아니라 사실과 어울리는 해석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나는 이 질문에 되물었습니다.
“여러분! 하늘나라에 독사가 있습니까, 독사 구멍이 있습니까?”
그러나 학생들은 일제히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가령 하늘나라에 독사 구멍이 있다 할지라도 어린아이가 그 독사 구멍에 손을 넣을 이유가 있을까요?”
이번에도 학생들은 모두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하늘나라에는 독사도 없고 어린아이가 독사굴에 손을 넣을 이유도 없음을 설명했습니다. 다만 이것은 지상적 표현으로 하늘나라는 이처럼 평화롭다는 뜻임을 학생들에게 상기시켰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이사야 11:8-9에 대한 주석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어떤 해석을 보면 구원이 완성된 내세에 만물이 새로워질 것을 가리키고 있는데(롬 8:19-21), 이것은 영적 의미로서 이리나 표범이나 사자나 곰과 같은 악인들도 변화를 받아서 양과 소처럼 유순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에서는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며, 그곳에서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하늘나라가 어떤 것일까?라는 우리의 의문은 지상적 개념일 뿐 전혀 그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아직도 부족합니다. 앞서 말한 어떤 주석가처럼 짐승과 같은 악한 사람도 유순해진다는 것은 표현상의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가 주어진 후에 있는 내용으로서 “악한 자들이 유순해진다”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가 도래함으로써 동시에 즉각적으로 변화된다는 의미이며, 단순히 그 나라에 평화가 가득할 것을 말합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보다 발전된 인식 문제
누가복음 16:19-31에는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비유가 나와있습니다. 이 비유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부자가 음부에 가야하는 이유가 꼭 부자라는 것 때문일까”라는 의문을 가집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의 비유에 대한 대상자는 누가복음 16:14에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말씀은 누가복음 16:1-13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합니다. 이 불의한 청지기가 미래를 대비하기 위하여 현재의 기회를 이용함으로써 현명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에 칭찬을 받았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빛의 아들들이 하늘에서 상을 확실하게 받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자신의 가진 것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단지 채무자들이 진 부채의 액수를 감하여 줌으로써 미래를 대비했다면, 그 보다 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재물을 나누어주어 영원한 집을 내다보아야 할 것을 예수님이 간접적으로 하신 말씀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를 생각해봅시다. 이 비유는 지상세계와 그 다음 죽음 이후에 오는 낙원과 음부에 대한 내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매일 호화롭게 잔치를 열어 즐겼습니다. 반면 나사로라는 한 거지가 있었는데, 그는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라도 배불리려 했지만 그것마저도 개들이 와서 주워먹고 도리어 그 헌데를 핥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거지가 죽었는데 그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고, 또한 부자도 죽어 장사되었는데 그는 음부에 가게 되었습니다.
부자가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민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으리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보편적인 해석 그 이상은 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이 부분에서 부자가 왜 음부에 가야하며, 나사로는 왜 낙원에 가야 하는지를 여러 주석가들의 해석에 맡기고자 합니다. 단지 여기서는 하늘나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하늘나라는 일원론이며 지옥은 이원론입니다. 부득불 이러한 철학적 용어를 빌려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은 어떤 경우라도 단순화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현상계에서는 일원론(monism)이 있을 수 없으며, 이원론(dualism) 또는 다원론(pluralism)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일반 철학자들은 형식의 통일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으로 세계의 통일을 수라는 관점에서 실체 개념의 길잡이로 하여 그 탐구의 결과를 일원론 또는 사유의 일원론 경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원론의 이론적 근거는 수많은 현상의 사물이 서로 배제를 일삼아 멈춤이 없으며, 사유에 의한 총괄을 용인하는 사실적 유사 관계에 있으면서도 서로 작용하며 이해하고 혼합하며 전환한다는 점에 있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현상하는 사물은 끊임없이 생성 소멸함으로 동일성이 결여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일원론은 일체의 다양성과 변화성을 배제함으로 경험적 실제로부터 얻어지는 일체의 것을 배체하게 되어 도무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다양성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수의 개념도 없습니다. 다만 일원론뿐이며, 이것은 기독교의 하늘나라만이 얻어질 수 있는 대상이며 설명적 기능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다원론적 다양성에 비해 하늘나라는 일원론적 차원에서 설명이 불가피한 것입니다. 이렇게 현상세계와 음부는 이원론 또는 다원론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좋으면 좋은 것이지 좋다가 나쁘거나 나쁘다가 다시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한번 좋으면 그것으로 계속 유지됩니다. 우리는 흔히 하늘나라에서 현실적인 지상 세계의 인식과 좋다는 개념으로 우리의 인식이 머물러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이 땅에서 불행한 생활을 했던 나사로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나사로가 과연 부자의 안타까운 몸부림과 목소리를 주의 깊게 듣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나사로의 일원론적인 낙원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부자의 형편을 먼저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 중에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봅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누가냐 하는 것은 해석상의 문제입니다.
구약 시대의 족장 아브라함이 나사로를 대신하여 부자에게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늘나라의 원칙을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실이 그대로 하늘나라와 지옥에서 확대 적용된다면 우선 하늘나라의 의미가 상실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아브라함은 족장 아브라함의 일인 역할이 아니라 나사로의 대변역할에 대한 제3자적 삽입인물로 하나님의 확고부동한 하늘나라와 지옥의 명확한 경계적 선언임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음부에 있는 부자와 자유로이 대화를 할 수 있다면 낙원과 음부의 구렁을 사이에 두고 서로 지상세계에서 알고 있던 자들이 맘대로 얘기할 수 있다는 논리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음부에 있는 부자에게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부자는 이원론적 차원에서 먼저 자신의 고통을 이길 힘이 없어 불꽃 가운데서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안타깝게 애원을 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그러나 사실 나사로는 구렁 저쪽의 음부에서, 평소에 음식 부스러기나마 주워먹고 배불리려 했던 그런 관계의 부자를 보거나 그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나는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토대로 하여 나의 경험담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서울에서 첫 목회를 할 때의 추수감사절이었습니다. 어느 부인이 찾아와 수년 전에 그녀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는데 장례식 집례를 하시던 어느 목사님이 “얘, 아무개야! 어머니를 만나려거든 꼭 예수님을 믿고 하늘나라에 가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부인은 수년이 지나도록 그 말씀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아 결국 교회를 찾아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하면서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 목사님이 하늘나라에 가면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한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무언가 불충분함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 그녀가 하늘나라에서 어머니를 만난다는 보장이 확실히 있다고 해도 딸과 어머니로서의 특정인물에 상호 지상적 인식 개념이 불필요하며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 딸이 후에 하늘나라에 간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머니가 하늘나라에서 실종되었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이겠습니까? 왜냐하면 하늘나라에서 그러한 인간관계는 전혀 인식 밖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을 놓고 성경을 찾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게 와서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어 아내를 두고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라 하였나이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추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후사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을 당하여 저희가 살아날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막 12:18-27, 마 22:23-33, 눅 20:27-40).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맘에 들지 않습니까?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오늘날 우리도 이처럼 오해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이같은 가족이나 인간관계가 없이 모두 천사와 같다고 했습니다. 천사가 결혼합니까, 가족 관계를 가집니까? 아닙니다. 하늘나라에서 구원받은 사람의 삶을 천사와 같다고 하는 것은 역시 전부 이해할 수도 없어도 현재의 인간과 같은 삶이 아님은 확실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늘나라는 일원론이며 지옥은 이원론입니다. 사실, 낙원에 있는 나사로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으며 음부에 있는 부자를 볼 필요도 없고 또 볼 수도 없습니다. 낙원이면 그 낙원의 천상적 인식에서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하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음부의 부자는 자신이 불꽃 가운데 고통을 가지며 구렁이 낀 건너편의 나사로를 바라보고 그 영광스런 행복의 모습을 바라볼 때 그 고통은 더할 것이며, 낙원과 음부의 이중적 고통을 더욱 심하게 가질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내용인 요한계시록에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는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음부의 내용을 잠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부자가 처한 “불꽃 가운데서”라는 장소적 의미와 불꽃이라는 내용입니다. 지옥은 현세적이며 지상적인 인식 개념이 더욱 뚜렷하기 때문에 불꽃이라는 것이 사실적이며, 지금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그대로의 내용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줄 압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저 언덕 너머 우리가 확연히 볼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으며, 차후 종말 이후 새 하늘과 새 탕이 도래할 때에야 비로소 인식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대한 낙원과 음부는 시간적으로 영원한 세계의 의미보다 현실 개인적 삶과 죽음 이후에 있는 즉시적인 입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에 있는 형제 다섯에 대하여 염려하며 나사로를 통하여 전도할 뜻을 보입니다만 이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더러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또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라는 간결한 내용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이제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여러분은 천년왕국에 대한 문제가 성경해석가들에 따라 견해를 달리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전천년설과 무천년설에 대한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무천년주의자들은 전천년주의자들을 세대주의와 같은 입장에서 보기 때문에 ‘역사적’이라는 말을 붙입니다. 그리고 전천년주의자들은 무천년주의자들에 대하여 후천년주의자들과 같은 입장에서 보기 때문에 무천년주의자들은 그 의견을 달리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천년왕국의 교리적 견해는 다음에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높이기 위해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0:1-10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 일 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그 후에는 반드시 잠궈 놓으리라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천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우리가 이 말씀에서 확실히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천년왕국과 사탄의 심판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것은 현세에 사탄은 결박되고 성도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하늘나라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서 확실히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천년왕국과 사탄의 심판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것은 현세에 사탄은 결박되고 성도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하늘나라라고 볼 수 없습니다.
천년 동안 왕 노릇할 자는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하니 이는 첫째 부활이라”는 말씀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입니다. 천년이라는 시간과 왕 노릇에 대한 견해에 대하여 과연 이 천년을 문자적인 천년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영적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다릅니다.
또, 베트너(boettner)의 말을 빌리면, 천년은 상식적이며 지상에서 싸우는 교회들과 세상을 떠난 성도들은 지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우리는 이미 천년왕국을 누리고 있으며 교회 시대는 천년왕국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영원한 하늘나라에서까지 왕 노릇할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왕 노릇 한다면 하늘나라에는 지배당하는 여러 계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흔히 하늘나라에서 우리가 기뻐하며 즐겨 누리는 것을 상급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확신하건대 하늘나라에서의 의미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상급을 원한다면, 또 상급이 있다면, 천년왕국에서 즉 현재의 교회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할 것인데, 어쩌면 이것이 상급의 의미를 가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많은 학생들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 우리는 교회에서 하늘나라에 가면 상급이 있다고 배웠습니다. 하늘 나라에서 과연 상급이 있습니까?”
하늘나라에서는 상급이 없습니다. 만일 있다면 천년왕국에서 행한 대로 받을 것이지만 이것도 잘못된 견해입니다. 이것은 첫째 부활(계 20:5)이라고 하는 구원의 한 방면의 의미일 뿐 결코 상이나 공로의 뜻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여기에서 시간적으로 발전한 전인류의 심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요한계시록 20:11-15을 살펴보겠습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로 심판을 받고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따라서 어떻게 보면 천년왕국 후 전인류의 심판 때에 이미 각자의 행위대로 구원과 멸망이 구분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보다 더 완벽한 미래의 하늘나라에 대하여 정확한 인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역시 요한계시록 21:1-8을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처음 땅과 처음 하늘은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세계를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이 하늘과 땅은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하늘과 땅의 형편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부득불 새로운 하늘나라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하늘과 땅의 인식 개념을 빌려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혀 하늘나라의 의미를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21:2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우선 “새 예루살렘”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새 시온성(사 60), 재건될 예루살렘(사 54장), 거룩한 땅(겔 48장)의 내용을 인용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의 광경과 새 예루살렘은 현 시안적 인식 밖의 문제로서 우리의 인식이나 지각이 그 모든 것을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루살렘이라는 경험적 인식을 빌려온 것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천년왕국 시대의 수도로 보고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궁시대로 취급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 새 예루살렘은 구약성경(사 54-55장, 겔 40-4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이것은 유대인 중심의 사상이었고 요한 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은 영원한 하늘나라의 새 표현입니다.
그러면서 새 예루살렘이 전개되는데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라고 말합니다. 이 영원한 세계는 요한계시록 18장에서 세상의 종말을 고한 후에 오는 새 세계의 새 창조를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18장을 보면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큰 땅이 환하여진지라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 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 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고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 중에서 보였느니라 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벨론 왕들이 범죄에 직접 가담하여 음행 했고, 땅의 상고들은 바벨론의 사치생활을 방조했으며, 바벨론의 번영에 간접적으로 참여했던 만국은 바벨론이 심판을 받을 때 함께 무너졌습니다.
이러한 현상과 내용은 로마시대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마다 볼 수 있는 것이며, 최종 종말적 이 예언은 로마에서 성취될 것인데, 다시는 이 세상이 존재하지 아니할 것을 “큰 맷돌 같은 돌”을 바다에 던진 내용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우리는 새 예루살렘의 외형과 그 성의 재료, 성의 생활, 그리고 음식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상징으로서 무궁한 하늘나라의 신비한 모습을 현상학적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을 뿐 그 이상은 표현과 이해가 어렵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새 예루살렘(계 21:9-27)에 대한 주석을 쓸 때 보석상에 직접 가서 보석에 대한 공부를 하고 난 뒤 책을 썼다는 재미난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별 도움이 못됩니다. 상징적 의미나 비유적 의미를 이 땅의 보석을 공부하여 문자적인 해석을 한다면, 그것은 이미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새 예루살렘을 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이러한 보석을 전문가가 아니면 어떻게 그 내용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새 예루살렘으로서 하늘나라의 직접적인 표현과 이해도 어려운데 벽옥과 수정가지 안다는 것은 퍽이나 어려운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언어 철학의 한 방법을 채택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보석들은 하늘나라의 맑음을 표현할 뿐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비유의 한 형태인 직유의 벽옥을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의 흉배에 붙이기도 했으며, 또 하나님의 속성으로 청결과 자비를 나타낸다고도 합니다.
어쨌든 벽옥과 수정은 하늘나라의 맑음의 의미를 나타낼 뿐 복잡한 다른 의미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문의 “맑더라”에서 그 의미를 확실히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숫자에 대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늘나라에서도 숫자가 필요합니까? 사실 알고 보면 하늘나라에는 수의 의미가 전혀 필요 없습니다. 하늘나라에서도 수의 개념이 지상적 인식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큰 모순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절대로 하늘나라는 수의 개념에 영향을 받지 아니합니다.
하늘나라의 인식은 시간과 공간 개념에서만 가능합니다. 시간 개념은 수학적 질서에서 비롯되며 공간 개념은 기하학적 개념에서 비롯됩니다. 그렇다고 하여 수학적 기하학적 개념 자체가 하늘나라의 본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단지 직관(直觀)이라는 표상(表象)에 불과한 것입니다.
좀 어려운 말을 빌린다면 하늘나라의 영생은 수의 존재적 질서에서 가능하며, 무한성은 공간 표상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하늘나라는 ‘크다’와 ‘작다’가 없습니다. 그 한 예로서 마태복음 5:19-20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기에서 ‘크다’와 ‘작다’의 개념은 하늘나라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작은 계명 하나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잘못된 교훈을 시정하는 표현 양식입니다.
그 다음 요한계시록 21:12-17에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 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문에 열두 지파의 이름이 있고 성터에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는데, 이것은 구약과 신약의 교회요 하늘에서 모든 세대의 성도에 대한 구원의 집합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곽은 네모가 반듯하다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상징적 의미로서 균형이 잘 잡힌 표현 양식일 뿐입니다.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180m x 12000)으로서 약 2천여km나 된다고 봅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나게 웅장함을 의미하는 것이지 실제로 하나님 나라의 성곽이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란 것이 아닙니다.
숫자에 대한 상징적 의미에 대하여 예로 들어봅시다. 바닷가에 모래알이 일만 이천 개가 있다고 합시다. 이것은 많음이나 최대량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적음이나 최소량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운동장에 사람이 일만 이천 명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적음이나 최소수가 아니라 많음 또는 최대수의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란 것은 완전한 크기의 숫자를 뜻하며 ‘일백 사십 사’라는 숫자는 선민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다음 하늘나라의 재료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진정 하늘나라의 재료가 이 땅 위의 것으로 되어 있을까요?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21:18-22을 봅시다.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성의 성곽의 기초 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성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정이라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같은 정 금이더라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이 말씀은 과연 하늘나라에도 이런 보석들이 있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상징으로서 그처럼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열거된 보석들의 이름을 모두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나 역시 모릅니다. 사실, 여기 열거된 보석의 분석은 할 필요도 없으니까요.
여러분은 계시에 대하여 상상해본 적이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계시’라는 말의 정의는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다’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것은 하나님의 의도와 뜻 그리고 하늘나라의 비밀을 드러내어 놓는다는 것으로, 그 본질적 실상이 표현으로나 인식상으로 어렵기 때문에 부득불 이 세상의 것으로 나타내 준다는 의미입니다.
자, 다시 생각해 봅시다. 과연 하늘나라가 이러한 보석으로 장식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언어 철학의 한 방법으로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는 실제의 정금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직유적 표현을 사용했습니다만 직유는 ‘성의 길’에 대한 직관적 이해일 뿐입니다. 정금에 대해서도 분석을 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보석 전문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요한도 보석 전문가는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직유나 은유는 이해를 위해 보편적 개념을 불러일으키는 해석과 의미의 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 정금의 직관적 이해를 위해 “맑은 유리 같은”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맑은 유리’는 정금의 일반적 관점을 말하며, ‘정금’은 하늘나라에 있는 성의 길에 대한 내용입니다. 정금은 맑은 유리와 같은 투명체로서 그 성의 길이 매우 아름다움을 의미할 뿐입니다.
직유나 은유는 그 본질적 주어의 의미를 한정 지워 줍니다. 절대로 그 의미를 확대하여 상상할 수 없는 데까지 이끌고 나가지 않아야 합니다. 따라서 정금에 대한 확대해석은 하늘나라에 있는 그 성의 길에 대한 의미를 오히려 그릇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계시의 한 형태는 좀 어렵지만 현상학적 인식론, 즉 영어로 말한다면 Phenomenological Epistemology인데, 도저히 계시 될 수 없는 하늘나라의 본질적인 의미를 이 땅의 것으로, 그것도 우리가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 결정지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에 대하여 이해가 됩니까? 그렇다면 이번에는 요한계시록 21:22-27에 나타나 있는 하늘나라의 생활을 살펴봅시다.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돌아오리라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고 들어오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뿐이라”.
여기의 하늘나라는 성전도 없고 해와 달도 없으며, 성문들은 닫지도 않고, 부정한 것도 없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그리스도와 늘 함께 있음으로 성전이 필요 없고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며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시기 때문이며, 출입의 자유와 가증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도 전혀 이 세상과는 다른 것이므로 하늘나라에 대한 바른 인식이 보다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늘나라의 음식에 대하여 22:1-5을 살펴봅시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
여기에 대한 주석가들의 해석은 다양합니다. 먼저 “생명수의 강”에 대하여 일부는 옛 에덴에서 발원한 네 강을 연상한다고도 합니다. 또 이 생명수의 강을 성령이라고 영적인 해석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수의 강” 그대로 이해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고 그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가 달마다 맺힌다고 합니다. 이해가 됩니까? 우리가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한다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라는 구절에 대하여 매우 큰 모순 점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23절에서는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라고 합니다. 해도 달도 없는데 어떻게 달마다 열두 가지 실과가 맺힌단 말입니까? 그리고 5절에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들은 삶의 풍성함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의미일 뿐입니다.
영원한 하늘나라에서는 시간의 구조가 필요 없고 낮과 밤도 필요 없습니다. 영원은 영원 그 자체일 뿐 시간의 구체적인 배열의 형태인 열두 달의 표현은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또 “그 생명나무의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에서 생명수의 강과 생명나무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강의 발원이 하나님과 어린양이기 때문에 이것은 영원과 영생을 의미하며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는 흔히 헬라어 원어 그대로 “고치기 위해”라고 그 의미를 정리하지만 사실 새 하늘과 새 땅은 옛 에덴이나 낙원의 회복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낙원의 회복이라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과는 전혀 다릅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만유회복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해석적 논의는 불가피한 것입니다. 만약 이 시대에 사도요한이 계시를 받는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니라 “완전한 새로운 질서 속으로 들어간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5절에 “왕 노릇하리로다”는 왕의 지배권이 아니고 왕의 영광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제1장을 공부하면서 어려움이 많았을 줄 압니다. 따라서 이 장은 하늘나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어느 정도인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끝맺으려 합니다.
제 2 장
하늘나라와 상급
2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충성하면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큰상을 받을 것입니다. 상을 받기 위해 충성하십시오.”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줄 압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모순을 지적하려 합니다.
무책임하게 말하는 하늘나라 상급
앞장에서 우리는 하늘나라에 대한 인식들을 정리했습니다. 다소 여러분에게는 생ㅇ소한 것들도 있겠지만 성경이 증명하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이번장에서는 하늘나라의 무상급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시작하기에 앞서 한번 더 물어보겠습니다. 정말 하늘나라에가면 상급이 있다고 생각됩니까? 대부분이 상급이 있다고 생각할 줄 압니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나는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없음을 강조합니다. 때로 나는 강의시간에 이런 일로 인해 성경을 잘못 알고 있다고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이 언제부터 누구에게 이런 잘못된 내용을 배워왔는지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비단 하늘나라에 대한 상급 문제뿐만 아니라 교회와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잘못된 전통 관념이 뿌리 박혀 있는데, 이제는 하나하나 정리할 때가 온 줄 압니다.
나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상급에 대하여 자주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그들은 거의가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받기 위해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잘못된 생각입니까! 교회에서 목회자들은 하늘나라의 상급을 구실로 성도들에게 충성을 요구하는 무책임한 말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집사님, 하나님께 충성하면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큰 상을 받습니다. 기도 많이 하십시오. 헌금 많이 하십시오.”
이런 식의 말은 교회에서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기도를 많이 하면 하늘나라에서 정말 큰 상을 받습니까? 헌금을 많이 하면 하늘나라에서 큰 상을 받습니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매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기도만 할 것입니다. 또한 가지고 있는 재산을 모두 교회에 바칠 것입니다.
마태복음 19:16-21에 보면 부자 청년의 재물에 대한 교훈이 나와 있습니다. 특히 21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내용으로 산상보훈 가운데 마태복음 6:19-20에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 못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두 말씀은 모두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구절들입니다. 성경말씀 그대로 문자해석을 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현실에서 우리의 제물이나 소유를 안전한 하늘창고나 은행에 그대로 보관하거나 맡겨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영생에 대한 내용입니다. 계명을 다 지킨 부자에게 예수님은 온전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소유를 다 팔아 가나나한 자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는 의미가 진정 이 땅의 보화가 그대로 하늘나라에 쌓인다는 것은 잘 못된 해석입니다. 단지 이것은 이 지상에서 예수를 좇는 자의 온전한 자격이 물질로 인하여 결정될 수 없다는 가치의 기준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후자는 그 해석이 간단합니다. 그것은 21절에서 명확하게 해석의 실마리를 풀어줍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이 말씀은 24절에서 다시 한정된 보충 설명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리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다행하게도 하나님이 하늘나라에서 물직적 책임을 지겠다는 표현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 상급과 우리의 행위
만일 하늘나라에 상급이 있다고 가정을 해 봅시다. 그렇다면 하늘나라도 이 세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얼마전, 나는 신문에서 사회 각계의 인사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 중 3분의 2를 사회에 내어놓는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녀들에게 재산을 상속해 주지 않고 사호에 환원하여 발전에 기여하고자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자녀들의 세대에서는 모두 무(無)로 인생을 출발하게 하여 평등을 심어주자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는 혜택을 누리고, 어떤 사람은 부모로부터 아무런 상속도 받지 못하는 그러한 불평등을 막자는 의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 목적은 후세대들에게 평등과 민주를 심어주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선천적으로 받은 지능이나 생물학적이고 생득적인 차이는 인정하지만 이것의 차이마저도 좁히려는 것이 바로 사회교육과 학교교육의 역할인 줄 압니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후진국일수록 생물학적 생득적 차이가 많으며 빈부의 차이도 심했습니다. 어떤 나라는 귀족이나 소수 정치인들이 백성들을 무지하게 만들어 자신들의 국어조차도 모르게 하며, 수리 능력은 물론 고등 수학은 전혀 접근도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소수의 귀족이나 정치가들이 우민정치(愚民政治)를 하여 자신들만이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방법 중의 하나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청년들에게 무상속의 계뭉을 강조한 적이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상속없이 무로 평등하게 출발하도록 하려는 사회 인사들에 대한 내용 말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저항적인 답변은 무의 평등보다 유(有)의 평등이 더 주요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가급적이면 부모가 자녀에게 무보다 유의 보편적 평등을 통하여 부모의 권위와 자녀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젊은이들의 견해는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도 빈부의 격차를 좁히고 모든 사람이 다 함께 잘 살기를 원합니다. 잘 사는 나라일수록 국민들이 중산층에 대한 호응이 높은 줄 압니다.
이 세상에서도 이런 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있는데, 하늘나라에서조차 상급을 인정한다면 이 세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음을 인식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또 충분히 이해되어져야 할 내용입니다.
이 세상에 있고 없는 차이 때문에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갈등을 가집니까? 우리는 이런 것 때문에 이웃과 싸우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죽이는 불행한 사태까지 생겨나기도 합니다. 이 세상이 이럴 정도로 불행한데 하늘나라에서까지 상급과 그 등차가 있다면 그 얼마나 불행한 일이며, 따라서 자연히 평화도 깨뜨려지고 말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의 상급과 이 세상의 재물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있다면 이 세상에서의 가가자 형편에 따라 그 상급이 좌우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상급은 이 땅위에서의 우리의 유무(有無)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은 가지지 못한 사람보다 더 유리할 것입니다. 가진 자는 가지지 않은 자보다 어떤 면으로든 조금이라도 더 하나님께 드릴 것이니까요. 물론 가지지 않는 자가 가진 자보다 더 많이 하나님께 드리는 경우도 있겠지만 보편적이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유나 행위로 하늘나라의 상급의 등차를 결정짓는 어리석은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한번 잘 생각해봅시다. 한 교회 안에도 천차만별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녀노소가 있고, 학벌과 출신도 다르며, 재산의 유무도 다르고, 가진 재능까지도 각자 다릅니다. 이렇게 볼 때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보다 더 유리한 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는 지나치게 가진 자가 많기 때문에 가지지 못한 자가 비례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며, 가진 자의 소유만큼 못가진 자는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것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이 땅 위에서도 갖지 못한 자가 가진 자와 더불어 사는 것을 극복하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하늘나라에서조차 상급의 등차가 있다면 그 얼마나 극복하기 어렵고 슬픈 일이겠습니까!
교회 안에는 여러 종류의 직분이 있습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그리고 기관에 따라 다양한 직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 직분들이 정말 하늘나라에서 상급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됩니까? 목사가 장로보다 하늘나라의 상급에 더 유리하다면 모두 목사만 되려고 할 것입니다. 장로가 집사보다 하늘나라에서 더욱 유리하다면 모두 장로가 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유리하다고 하여 모두 목사가 된다든지 장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회의 직분이 하늘나라의 상급을 좌우하지도 않지만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늘나라에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상급은 전혀 없습니다. 교회의 직분에 대한 내용을 좀더 언급한다면 이해하는 데 퍽 도움이 될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은 권위직이 아닙니다. 게다가 인정을 받기 위한 직분도 아닙니다. 오늘날은 거의가 교회의 직분을 직능에 따른 기능면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주신 개인의 직능에 따른 기능에 의하여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합니다. 목사라고 해서 교회의 전부가 아니며, 주일학교 어린이라고 해서 하찮은 존재도 아닙니다. 이것은 인격상의 가치적 등차가 아니라 단지 직능에 따른 기능적인 의미일 뿐입니다.
만일 교회의 직분으로 평가를 좌우한다면 하늘나라에서도 그대로 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있다면 우리가 무엇을 요구할 것입니까? 지금 목사라고 해서 하늘나라에서도 목사입니까, 지금 장로라고 해서 하늘나라에서도 장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목사도, 장로도, 그리고 집사도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원칙은 어느 누구나 평등한 기쁨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2:43-47에 기록되어 있는 초대 교회의 생활 가운데 유무상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리라”.
위의 말씀에 대해서 공산주의 발상이라고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그들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던 초대 교회의 진정한 평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내용에서 일부사람이 공산주의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이유로는, 첫째 이것은 신앙적 열정에서 출발했으나 공산주의는 정치적 이념에서 제정된 것이며, 둘째 이것은 내적이며 자발적인 것이나 공산주의는 외적이며 강제적이며, 셋째 이것은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이며 이를 위해 많은 순교를 했으나 공산주의는 사람을 죽이고 피를 흘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양자는 다같이 붉은피로 상징되고 종국적 복락을 주장하나(천년왕국과 공상왕국),그방법과 양태는 극히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평등생활은 순수한 신앙에서 출발한 자연 발생이라고 합니다만 그것은 표현적이나마 그 내용적으로도 잘못되었습나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상 일시적 현상이었으며,
공산생활이 아니라 있는자 와 없는 자의 무조건적인 나눔이었습니다.
이같은 발상의 원인은 사도들의 기사와 표적에 있었고, 이러한 내용의 목적은 성경 그대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데 있으며, 집에서는 떡을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적인 공산주의가 아니라 성전과 집에서 신앙을 잘할 수 있는 하나의 방도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유무상통을 동한 평등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켰다는 일면을 엿볼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J.B.Scott(커버넌트 구약학 교수)의 말을 인용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그들 가운데 궁핍한 사람들에게 주기 위하여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물건들을 팔았습니다. 갑자기 그들은 복음이 그들의 신앙고백에서만이 아니라 생활방식에 있어서도 커다란 변화를 주었음을 깨닫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가운데 가난한 자들을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태도가 교회 역사를 통해 꾸준히 지속되지 못한 것은 그 사람들의 실패가 아니라 후대의 덜 헌신된 교회 지체들의 실패였습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모습은 부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공동체룰 보면 잘 알 수 있으며, 그들의 적극적인 신앙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향한 평균에 대한 교훈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는 너희의 유연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연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자도 있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라 (고후8:13-15)
바울은 마게도냐와 헬라지방의 교회에서 나타났던 유모의 고려에 대한 정신을 고리도 교회의 신자들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평균이란 영어 equal(헬라어로는 이소스)
에서 유래된 말인데, 여기서는 equality(이소테스), 즉 동등, 평등, 공평이란 의미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과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골 4:1)
여기서도 바울은 공평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상전의 윤리은 의와 공평입니다. 이것은 사회과학적 입장에서 볼 때 공동체의 기본 강령이기도 합니다. 의와 공평만니 사회와 국가를 번영하게 하며 그렇지 못할 때는 퇴폐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공평은 어렵습니다. 이것은 단지 하늘나라에서만 이루어질 표현상 우리의 상급입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8:14에서 말한 평균의 의미는 바로 裕(유)餘(여)와 부족의 공평입니다.
성경에는 이 외에도 빈부간의 서로 도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평등이나 평균, 그리고 공평이라는 말을 단지 물질적 입장에서 언급한 것 같으나 사실은 모든 입장에서 언급한 것 같으나 사실은 모든 입장에서 이해되는 평등의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의 삶도 평균을 원하는데,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있다는 것은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오해인 것입니다.
가령, 이런 경우에 우리는 어떻게 상급에 대하여 판단을 할 것입니까? 어느 교회에 믿음생활이 충실한 두 사람의 장로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런데 이 두 사람 모두가 하나님과 교회앞에 신실하며, 어느 한 부분도 차이가 없이 동질의 평균 신앙을 소유하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단지 한 가지 문제는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인 K라는 장로는 세상에 소문이 날 정도로 부자라서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사람이며, 다른 사람인 L장로는 그와는 반대로 너무나 가난한 사람이라 물질적인 교회 봉사는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물질을 많이 소유한 K장로가 가난한 L 장로보다 교회의 봉사나 사회에 공을 더 많이 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여러분은 달란트 비유를 들어서 많고 적음에 구애받지 않고 적은 것으로도 큰 충성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이러한 물질 불평등이 하늘나라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일반적인 인식을 깨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두 장로 중 어떤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많이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K장로입니까, 아니면 L장로입니까? 혹자는 그것에 무슨 신경을 쓸 필요가 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물질이 많은 사람이 적은 사람보다 선행할 기회가 많을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이 예가 하늘나라의 상급에는 부당한 것이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예를 전제로
한 것은 두 사람 모두 하나님과 교회 앞에 신실하며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세상에서 소유하고 있는 물질의 부유와 빈곤에 따라 하늘나라에서 상급의 등차가 있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현세대와 오는 세대의 상황을 고리로 연결지어 인간 자신의 어떤 소유나 선천적인 우월성이 그대로 오는 세대에 반영된다면 이것은 마치 이교도들의 신앙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교도들 가운데 불교를 믿는 자들은 현세의 삶을 통하여 전생에 내가 어떻게 살았으며 내세에 어떻게 살 것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나는 기차 여행중 우연히 어느 여승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왜 중이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설에 입각하여 현재 자신이 중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전생에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알 수 있으며, 또 내생에 어떤 사람으로 환생하여 살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자선과 생의 행적에 따라 어떤 사람이 될 수 잇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르면 만일 기독교의 대세의 진리가 인간의 현실적 공로에 좌우된다면 불교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상급에 대한 어원을 생각해봅시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상(reward)이라는 단어가 여러번 나오고, 상급이란 단어는 4번 나옵니다. 특히 바울서신에서 이 말은 기독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설명하기 위하여 원형 경기장이나 투기장의 도보 경기에서 인용한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성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린도 전서 9:24에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짓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고 얻도록 이와 샅이 달음질하라”고 하며, 빌립보서3:14에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하고 있습니다.
상(브라베이온)운 골로새서 3:15의 “주장하게 하라”인 ‘브라베네토’(let rule)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고전서 9:24에서 말하는 살은 문자 그대로 도보경기의 생생한 표현에 사용되고 있으며, 빌립보서 3:14에서는 다름 비유형태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9:24의 상은 무엇입니까? 먼저 이것이 하늘의 문제입니까, 이니면 이땅의 문제입니까? 이것을 하늘의 상으로 해석한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문자 그대로 생각한다면 하늘에서 상을 얻는자가 하나뿐일 것이며, 이 상이 하늘의 구원에 관한 것이라면 구원을 얻을 자도 하나뿐일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상은 운동선수들이 달음질하여 상을 얻는 것처럼 노력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 다음 빌립보서3:14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는 무엇입니까? 무엇을 향하여 좇아갑니까? 분명 “푯대를 향하여”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푯대는 상 자체는 아니지만 경기의 결승점으로서 상을 받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주석가들에 의하면 “우에서 부른 부름”을 상에 대한 동등소유격으로 보고 있으며, 이것을 우리가 그대로 인정한다면 상의 의미일 것입니다. 따라서 상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늘나라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오직 한일”(빌 3:13)은 가문의 자랑이나 종교적 지위, 학식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이것들을 해롭게 여기면서 그의 참된 목적에만 전력을 다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붙들린 바 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부리심의 소망이며 하나님이 그를 부를 경주의 상인 것입니다.
바울의 달음질 경주에 대한 비유는 마치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는 노력에 의한 성공이 상을 받는 조건이라고 말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공로, 즉 인간의 공로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노력의 집중을 강조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상
구약성경 가운데에는 주로 전도서나 잠언에서 상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 상급이라는 단어는 다니엘 5:17, 창세기 15:1, 시편 127:3, 사 40:10 등에 나타나 있습니다. 전도서 4:99:5, 잠언 11:18에서 상은 구약 히브리어로 ‘사카르’이며, 잠언 13:13에 나타난 의미는 히브리어로 ‘슈브’입니다.
먼저 전도서 4:9에서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이요”는 단편적으로 둘의 합심에 대한 좋은 결과를 말하며, 전도서 9:5에서 “무릇 산 자 죽을 줄을 알되 죽은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는 죽음에 대한 무의미를 상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잠언 11:18에서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는 악과 의에 대한 반의대구적 의미에서 의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아울러 잠언 13:13에서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느니라”는 것은 계명에 대한 멸시와 두려움에 대한 엄청난 결과를 상으로 표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모든 상에 대한 언급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하늘나라의 문제입니까. 아니면 땅의 문제입니까? 이제는 여러분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식견을가졌으리라라 믿고 대답을 줄이겠습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상
고린도전서 9:24에서 사도 바울이 상에 대한 문제를 언급했고, 골로세서 3:24에서도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고 상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인 25절에서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고 하고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 이전에 먼저 23절의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위의 말씀들은 인간 윤리로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결정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칫 오해를 해서 하늘나라에서 하늘나라를 차지하는 것 외에 어떤 다른 것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크리스천인 종이 그 상전에게 주께하듯 충실하게 한다면 그대로 유업의 상을 받을 조건이 된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그 이외의 의미는 하나도 없습니다.
반대로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는 종이 잘못할 때에 받을 형벌을 말합니다. 이 말씀 은 상선벌악의 양면성을 대조하여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살고있는 자들에게 주는 윤리적 강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히 10:35).
이 말씀도 역시 전후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0:19-39에서는 믿음의 전진에 힘써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34절을 보면 앞절에 이어 “너희가 갇힌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담대함을 가진 자는 큰 상을 얻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10:35에 있는 이것은 ‘미스도스’(임금, 급료, 보응)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큰 상”이란 39절의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란 구원의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므으로 요한2서 1:8을 봅시다.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역시 이것도 복음전파에 따른 내용으로서 그리스도의 육체의 임하심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입니다. 이 상이란 말은 헬라어로 ‘미스도스’로서, 구원의 의미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외에도 요한계시록 11:18을 보면 “이방인들이 분노하메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킬 때로소이다 하더라”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 전에 이방의 분노가 하나님의 진노가 부딪치는 최후 결전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 나타난 상은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라는 내용으로 보아 모든 죽은 자들이 흰 보좌 앞에 블리어 최종 심판을 받게 되는 것으로 심판대에서 있을 일입니다.
여기에서 상 받을 자들과 멸망받을 자들은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그리고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이며, 멸망을 받을 자들은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주석을 보면 언급해서는 안될 내용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선지자들, 성도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두고 세 가지로 신급의 등차를 두어 말합니다.
그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다면, “ 여기 세 가지로 신급을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성도들 중에서 다시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들, 둘째는 성도, 즉 성결된 생활을 한 자들, 그리고 셋째는 단순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평신도들, 대소는 귀족급의 상류계급과 노예급의 하류계급을 가리킨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심판 때 피할 수 없는 과정으로서 반드시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심판 때의 행위보응은 인정하지만 이 지상세계의 선지자, 성도, 그리고 평신도라 하여 계급을 따지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무론대소”에서의 “대소”가 상하류 계급을 가리킨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 “물론대소”는 우리말로 ‘크거나 작거나’(To the small and to the greate), 즉 ‘어느 누구나 논할 것없이’라는 입니다.
그런가 하면, 여기에 나타난 상의 문제를 요한계시록 21:1-4; 22:3-5과 동일하게 보고 있는데, 사실을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은 심판 때에 있을 일이고, 요한계시록 21:1-4이나 22:3-5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한 이후 영원한 하늘나라의 문제로서 둘은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요한계시록 22:12은 이 계시록의 결론 부분으로서 22:1-5과는 다른 내용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상은 그리스도가 속히 오실 내요으로서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주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행한 대로 갚아주리라”는 이 내용과 일관하여 구약(욥 34:11, 사 40:10 등)을 인용하지만, 이것은 현세적 보응과 심판 때의 보응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주리라”는 말씀은 무엇을 갚아주신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죄사함을 받는, 즉 죄의 용서를 받게 한다는 것이며 각 사람이 엄중히 심판을 받는 종말의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신약성경에 기록된 상에 대하여 알아 보았는데, 대부분 최종 심판 심판의 날에 있을 구원에 대한 의미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줄 압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알 수 없는 상급의 등차를 인식하기 쉽습니다만 사실은 상이란 칭찬과 저주의 구별인 것이며, 칭찬받을 자들의 칭찬은 우리가 상세히 알지 않아도 될 문제입니다.
베드로전서 1:7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다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서의 상의 의미
산상보훈의 복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5.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6.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7.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8.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 내용을 팔복이라고 합니다. 먼저 복을 받을 수 있는 조건과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조건들 뿐입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하나님이 왜 불가능한 조건을 내세워 복을 주실 것인가를 의심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하나하나 자세히 생각해 봅시다.
먼저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복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다. 그럼 과연 우리가 심령이 가난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심령이 가난할 수 있는 근본이 있단 말합니까? 이것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의 마음은 똑같이 욕심이 많아서 많이 가지기를 원합니다. 옛날 사람이라고 하여 욕심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단지 욕심의 표현방법만 다를 뿐이지 욕심의 근본은 지금과 동일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성경구절을 암송하거나 설교 본문으로 읽을 때에 마치 우리의 심령이 텅빈 가난한 자처럼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흔히 이 팔복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전반부는 자기 완성의 길이며, 후반부는 남을 위한 봉사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우리는 스스로 자기 완성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까? 이 역시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남을 위한 봉사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까?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가난한 자”란 아주 적은 수입을 가지는 자로서 거지로 방도 좋을 듯하며,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가난한 자를 천대시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난한 대중을 구원하실 계획이셨고, 당시 사회의 복의 개념은 다분히 외적이며 물질적이었음도 여러 주석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심령의 가난을 통한 하늘나라 소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복음서 전체를 놓고 볼 때 예수의 재물에 대한 교훈은 거의 3분의 1이상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재물이나 소유에 대한 말씀을 복음서의 전체 맥락으로 보아도 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강단 메시지의 내용은 재물의 선용에 관한 것이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과제는 하늘나라를 소유하는 것이라고 장담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불가능합니다. 이 본무을 읽으면서 ‘심령이 가능한 자’가 된다는 것은 저 하늘나라의 문제이지 우리의 해결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 소극적이며 부정적입니까? 그런 생각은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그 착각들이 문제인 것입니다.
성자들의 욕심을 아십니까? 주위를 살펴보십시오. 성경 말씀을 그대로 빌린다면 성자들은 욕심 때문에 하늘나라르 소유할 수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복의 내용이 조건적으로 애통, 온유, 의에 주리고 목마름, 긍휼, 마음이 청결, 화평, 그리고 의를 위한 핍박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도 역시 우리에게는 불가능합니다. 사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하늘나라를 소유할 만큼 우리 스스로가 감당할 능력은 없습니다.
이런한 내용과 비슷한 것으로서 고린도전서 13:4-7의 사랑의 본질에 대해 다룬 말씀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에 대한 성경구절을 즐겨 암송도 하며 또 곡을 붙여 노래하기도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특히, 고린도전서 13:3에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유로도 구제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수도 없습니다만 만일 내어 준다할지라도 우리에겐 사랑이 부족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나타난 사랑에 대한 본질은 우리로선 감히 흉내도 낼 수 없을 것이빈다. 아니라구요? 그렇다면 성경을 다시 봅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정말 우리는 사랑하는 일에 오래 참습니까?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불쾌함이나 노여움을 얼마나 참습니까 물론 이 말씀은 고린도교회 당시의 문제이기도 하지만시대마다 생각할 수 있는 보편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각자 ‘오래 참음’의 실패를 경험했을 줄 압니다. 따라서 ‘오래 참은’의 근본적ㄱ인 의미는 범죄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로 해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줄 압니다.
그 다음 “사랑은 온유하며”입니다. 이 온유는 ‘오래 참음’과 관계가 있는 실천적인 선입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움으로 다른 사람을 감싼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친절한 행동을 말합니다.
그 다음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입니다. 이 투기는 작의 우월성으로 남을 증오하고 형편없이 낮추려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인데, 이것은 앞의 내용과 관계가 있습니다. 남이 잘되는 것은 볼 수 없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약간만 잘 되어도 크게 자랑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봅니다.
그리고 “교만하지 아니하며”입니다. 교만은 모든 죄의 근원입니다. 어떻게 보면 교만은 속옷과 같습니다. 교만의 속옷을 한번 입기만 하면 벗을 수 없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겉옷은 쉽게 벗을 수 있어도 속옷은 부끄러워 쉽게 벗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 다음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입니다. 앞에서 투기하는 자, 자랑하는 자, 그리고 교만한 자는 필경 무례히 행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진정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예의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남녀가 서로 사랑한다고 합시다. 한 사람이 자주 거짓말을 하여 신뢰도 없고 책임감도 없다고 한다면 그 사랑은 모두 헛소리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곧 무례한 것입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음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 다음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입니다. 우리는 성내기를 쉽게 합니다. 정말 성내지 않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많은 기도를 강조합니다.
“여러분, 기도를 많이 하십시오. 새벽 기도회에 나오십시오. 철야 기도회에 나오십시오. 가정 기도를 하십시오.” 등등 말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열번 기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차라리 한 번 성내지 마십시오.”
우리는 기도의 양을 맘껏 채워 놓고도 한 번 성을 냄으로 그 기도가 무효로 돌아가는 경험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입니다.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받은 해나 악에 대하여 두고 두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생각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생각해서 안될 것은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악에 대해서는 말입니다.
그 다음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입니다. 이것은 반의대구로서 기뻐해야 할 가치는 진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불의를 기뻐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2).
또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 3:3-4)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것들로 미루어 볼 때 진리는 기쁨과 함수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다음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입니다. 자, 우리는 지금까지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찬양을 들으며 기뻐했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읭 사랑의 실천은 너무나 어렵기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이렇게 되기를 원하나 어렵기 때문에 이를 위해 힘쓰고 애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산상보훈의 팔복을 생각해봅시다. 특히, 마태복음 5:11-12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여기에서 우리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상에 대한 것입니다. 흔히 이 세상에서 예수의 복음을 위해 순교를 당한 자들에게 큰 상이 있을 것이며, 적당하게 믿다가 죽은 사람은 부끄러운 구원과 상이 적다는 것을 쉽게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웃지 못할 해석상의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 주를 위하여 욕, 핍박, 그리고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씀과 더불어 하늘에서 너희상이 크다고 하는 것입니다. 흔히 이 구절을 해석하기를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요건은 믿음이며, 거기에서 상을 받는 것은 행함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핍박을 통해 하늘나라에서 상을 받는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며, 앞서 선지자들의 이러한 내용도 그 자체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상의 표현원리일 뿐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힘과 능력은 인간적일 수 없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이 아니면 절대로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의 마지막 재림 때 이루어질 심판의 의미로서 이 상의 개념은 종결될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시민의 생활
마태복음 6:1-18을 봅시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희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 6:1-4).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의 외식적인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과 비교하여 보면 구제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교훈을 알 수 있습니다.
“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에서 이 의(rightousness)를 어떤 번역성경에서는 구제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거나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얻지 못할 것이며, 자신의 의와 구제행위에 나팔을 분다면 이미 자기 상을 받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외식하는 자들이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많은 사람이 모이는 회당이나 거리에서 구제를 하며 떠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구제는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것이지만 여기에서 주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하듯 은밀히 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거나, 자랑하거나 나팔을 붊으로 자기 상을 이미 받은 것으로 간주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구제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설정하는 것이 마땅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팔을 불지 마라”는 것은 그 당대에 유대인 사회의 실제적인 내용이기도 합니다. 구제를 하기 위하여 나팔을 불었다는 것은 인정되지만 현실적 우리에게는 자신의 구제를 알리기 위해 자랑을 하거나 떠들지 말라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주의하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안에서 구제하는 데 마음을 쏟으며 더 많은 것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의 진리가 시대와 문화에 상응하는 것이라면 큰 모순일 것입니다.
오늘날은 T.V, 라디오, 그리고 신문이나 잡지 등의 매스컴을 통해 얼마든지 객관적으로 나팔을 불 수도 있겠으나, 위의 말씀의 취지는 구제하는 개인이나 교회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종종 교계신문을 통해 선교를 위한 교회 홍보 또는 농어촌 교회를 돕겠다며 서류 제출을 요구하는 도시 교회들을 봅니다. 이를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외식이나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과시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의하라”, 그리고 “상을 얻지 못하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생활 가운데에서 종종 이런 문제를 두고 어려움을 당합니다. 아무리 교회 헌금이나 개인의 구제를 감춰두려고 해도 잘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느 개인이 헌금을 많이 하며 구제를 한다는 것은 어느 교회에나 있을 수 있으나 그 본인이 은밀히 하기를 노력해야 할 것이며, 둘째는 주변이 그런 행위를 침묵해 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위의 말씀에서 “상을 얻지 못하리라”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는 자로서 자기 의의 행위를 나타내 보임으로 스스로 상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자신에게는 곤고만 있을 뿐입니다.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는 나팔을 붊으로 보상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상을 얻지 못하리라”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에서, 외식을 하지 않거나 나팔을 불지 않았다고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것이라는 추측은 잘못된 것입니다. 단지 이 말씀도 사람 사이에서 주어진 내용도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께서 갚으신다고 한 말씀에서 잘 이해가 될 줄 압니다.
의와 구제에 대해 오시하거나 사람에게 보이려고 힘쓰지 마십시오.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핫비시오. 이말은 정말 왼손이 모른단 말입니까? 이것은 그만큼 은밀해야 할 구제에 대한 과장표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어떻게 갚아주신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무엇을 갚아주신단 말입니까? 우리는 상에 대한 기대감도 필요없습니다. 상을 근거로 한다면 은밀한 의나 구제는 은밀한 그것으로 이미 심령에 최대의 상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저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증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5-8)
앞에서 언급했듯이 구제는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것이지만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은밀하게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그런데 위의 말씀을 보면 기도는 은밀하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어야 하는데도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정규적인 기도의 장소를 회당을 정했습니다(행 3:1, 눅 18:9-14). 이것은 포로기를 전후로 하여 하루 세 번씩 하는 기도를 말합니다(단6:10, 행10:9). 그래서 기도하는 시간에 외출중이면 길에서도 기도를 했으며, 나중엔 이것이 형식이 되어 오히려 외출하여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위를 보고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누구에게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그렇지 못합니다.
나는 오래 전에 선배 목사님께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교회 부흥에 꼭 필요한 것으로써 새벽기도회 때 성도들보다 30분 먼저 교회에 나와 강단에 무릎을 꿇고 가끔 주여! 주여!라고 외치기만 해도 새벽기도회 때 나오는 성도들은 감동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아, 우리 목사님은 밤새도록 교회를 위해 기도하셨구나. 정말 기도를 많이 하셔. 새벽마다 교회에 가면 밤새도록 기도하고 계신다고.”
이렇게 성도들이 칭찬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30분 먼저 나왔는데 성도들은 밤새도록 기도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골방만이 유효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은밀한 기도를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지 못할 때 “저희는 이미 상을 받았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 상의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곧바로 보상의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새벽 기도회에 나갔으니 보상이 있을 것이다. 밤새 철야 기도를 했으니 큰 상이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기대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보상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닙니다. 30분 기도한 어떤 성도가 30분 기도한 것만큼 무엇을 기대한다면, 그리고 보상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정말 할 만할 것입니다. 정말 그렇다면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하여 누구나 그만큼의 보상을 받을 거이며, 아예 하루종일 기도만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알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기도를 많이 해왔습니다. 그렇지만 기도한 만큼 기대에 찬 응답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나는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여러분! 기도한 만큼 응답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거의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응답이 없다는 것은 잘못된 기도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늘 기도에 대한 강조의 말을 들어왔습니다.
“기도 많이 하십시오. 기도는 만능입니다. 기도는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나 기도에 대한 참된 방법은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기도는 은밀하게 하는 것이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해서 교회에 엎드려 계속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도 기도를 하는데 형식적으로 하는 이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여 시간 메꾸기, 기도 바톤받기, 그리고 하루 24시간 중 시간의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고 하여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인간의 목적대로 모든 것을 변화시켜 주신다고 믿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하여 그것이 자랑이 되고 뽐낸다면 그것은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이며, 자기 상을 이미 받은 것입니다.
상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이 땅에서 상을 받았다는 것입니까,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까? 여기에 나타나 있는 상이란 영원한 하늘나라의 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여 기도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현실적인 상도 아닙니다. 이렇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흔히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라고 합니다. 또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호흡한다고 하여 하나님께 호흡의 대가를 지불해 달라고 한다는 것은 정말 모순입니다. 호흡하는 자는 호흡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상을 이미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대화한다고 하여 그 대화의 대가로서 상을 바란다면 그것은 날강도와 같은 생각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바라는 상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이라면 모두 호흡할 것이며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호흡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기도의 방법을 제시하신 주님의 말씀을 차치하더라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개는 기도를 너무 잘해, 조금도 막힘이 없이 술술 기도하잖아.”라고 칭찬합니다. 그러나 기도와 상에 대한 문제는 우리가 관계할 일이 아닙니다. 기도는 어디까지나 기도로 끝나야 하는 것이지 상과 연관시켜서는 안됩니다.
그 다음 금식에 관한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6:16-18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마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한다면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은 것입니다. 신앙자라면 대부분이 금식을 한번 정도는 했을 줄 압니다. 따라서 얼마나 힘이 들고 어려운지도 잘 알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럴 정도로 사람에게 내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금식에 대한 성경적 역사를 살펴보면, 개인적인 것(창37:34, 삼상 31:13, 삼하 1:12; 12:21), 국가적인 것(느1:4), 슬픔의 표시(마9:14-15), 죄의 회개(fp16:29-31, 시35:13; 69:10, 단 9:3) 등이 있으며, 모세시대는 율법으로 속죄일에 금식했고, 포로기 이후 국가 수난의 기념으로 일년에 네 번씩 금식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일주일에 두 번씩 목요일과 월요일에 금식으 했습니다.
위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금식에 대한 불필요나 금지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릇된 금식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금식할 때에 사람에게 보이므로 동정과 칭찬을 받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구제, 기도, 그리고 금식에 대하여 함께 공부했는데, 이것들이 외식이라면 저희는 이미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구제는 다른 사람에게, 기도는 하나님께, 그리고 금식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모두 “사람에게 보이려고”(마6:1, 5, 16) 함으로 무효가 된다는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은밀”이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마 6:4, 6, 18). 이 말씀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와 “은밀한 중에”라는 두 말씀은 서로 상반관계가 있는 것인데, 이것은 하늘나라에서 상을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고 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강조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경에 없는 하늘 나라의 상
지금까지 마치 캄캄한 동굴을 지나온 듯한 기분입니다. 아니, 지금도 캄캄한 동물에 있는 느낌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제껏 하늘나라의 목적이 상급에 있다는 것을 아무런 부담과 고민도 없이 들어왔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좀더 캄캄한 동물에서 헤맬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광명한 세계가 전개될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 할 우리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고린도전서 15:41을 보면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성경구절의 해석을 막연하게 하는 자들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 앞절을 보면,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두 구절의 전후 관계를 잘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가 지상에서 복음에 충실하고 합당했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해의 영광에 거하게 되고 주님을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보다 낮은 등급의 영광을 받게 될 것“ 이라고 합니다.
단지 이 말씀은 부활된 몸이 현재의 몸과 다른 것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35절은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인데 첫째 어떻게 살며, 둘째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입니다. 첫째 물음에 대한 답변은 ‘뿌리는 씨’의 비유입니다.
사실, 우리는 부활의 구체적인 방법을 알 길이 없습니다. 현대 과학이나 생물학 그리고 생기론 같은 것으로는 부활과 생명을 해석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바울의 첫째 물음을 씨뿌림의 비유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력의 의미를 말해주려 할 뿐입니다.
씨뿌림을 통하여 부활을 설명하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실적 입장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씨를 뿌려 그것이 자라나서 열매를 거두는 것은 파종과 성장 그리고 번식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지 부활의 실체를 설명한다고는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하기를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body)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seed)뿐이로되 하나님의 그 뜻대로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형체를 주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알갱이입니다.
바울의 설명도 과학적이지만 자연법의 설명은 아닙니다. 부활의 의미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씨앗의 생명력 그 자체를 설명하는 것으로 부활을 설득은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둘째 질문인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가 문제입니다. 40절에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라고 하며, 이어 해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 그리고 별과 달의 영광이 다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부활 때 각자의 부활체에 등급이 있다는 것입니까? 정말, 해석상의 어려운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구절을 보면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라고 하여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단지 여기에서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행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 그리고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다는 것 때문에 등치가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평신도들은 부활 후 성도들에게 영예와 영광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에서 이런 차이를 염두에 두고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바울은 부활 후 성도들이 각자 그들의 상태로부터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를 논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육체와 죽은 성도들의 육체가 마지막에 받을 육체와 어떻게 다를 것인가에 대하여 논한 것입니다.
칼빈의 말을 빌린다면 가장 정확한 해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칼빈은 부활의 직유를 사용함으로 어떤 모순되는 암시를 바울이 제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해와 달과 별의 광채와 영예가 각각 다르다고 하여 이것이 부활 때에 각자의 차이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육신이 어떤 질적 변화를 가질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 때에 우리가 서로 질적인 차이가 있다면 현재 각자의 삶의 질적 차이가 그대로 반영된다고밖에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42-44절을 보더라도 이원론적 차이를 문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유고가 신령한 몸의 차이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이 의미를 보다 더 정확하게 하려면 다음 성경을 연결하여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을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5-49).
하늘나라의 근본 의미
하늘나라, 우리는 이것을 원합니다. 그러면서도 그것만으로는 만족을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 외에 다른 무엇을 요구한다면, 마치 이것은 경기자가 일등의 의미보다 부수적인 상품, 즉 부상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것보다도 더한 것이빈다.
우리는 인본주의적인 신앙에 더 집착합니다. 너무 인간 본위적인 것은 구원 외에도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얼마나 칭찬 받을 것이 있어 행위 보상을 원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대한 감동이나 기쁨을 글자 그대로 상상합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가치성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우선이냐 예수 그리스도가 우선이냐 라는 것은 잘못 생각하면 모순인 것 같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기에다 상급까지 부가하여 마치 상급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지금까지 교육받아 왔고 또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만약 하늘나라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그곳은 이미 하늘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하늘나라는 장소의 개념이 강합니다. 하늘나라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느 지안적 세계를 상상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하늘나라의 그 실상을 먼저 지안적으로 상상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며, 하늘나라는 무엇입니까? 무엇으로 하늘나라의 가치를 따집니까?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기 때문입니까,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기 때문입니까, 그 성곽이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이 정금이며 유리같기 때문입니까, 열두 기초석의 보석이 벽옥, 남보석, 옥수 녹보석, 홍마노, 홍보석, 황옥, 녹옥, 담황옥, 비취옥, 청옥, 그리고 자정이기 때문입니까?
하늘나라의 가치 기준을 사도요한이 본 보석으로 정한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한 보석들이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돌만큼 쌓여 있다 할지라도 그 자체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이 하늘나라이며 그 하늘나라의 가치 기준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성도들에게 행위대로 상들 주는 곳이 아니며 그 가치가 우선이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의 참된 가치 기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체입니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생각하는 지리적 하늘나라를 전제로하여 지옥에 가 계신다면 곧 그곳이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상급이나 하늘나라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나라이며,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사는 곳이 곧 하늘나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인간 본위의 하늘나라를 꿈꾸며 생각한다면 아직도 우리의 교회는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뭔가 영양이 없는 약간의 조미료에 매력을 느끼는 것뿐입니다. 조미료는 음식의 맛을 돋구는 것뿐이지 음식 자체가 아니며, 우리의 주식과 영양이 될수 없습니다, 마치 우리가 상급이나 하늘나라의 화려함을 우선으로 생각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도구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지난 88올림픽 때 쿠웨이트에서 온 두 사람의 유고선 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브델과 히삼이었습니다. 아브델은 미혼이고 히삼은 결혼을 했다고 자신들을 소개했습니다. 이들은 공군 장교로서 비행기 조종사들이었습니다.
히삼이 말하기를, 쿠웨이트에는 이슬람교가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지만 자신의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매일 예수. 예수, 예수만을 말한다고 했습니다.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예수이고 저 세상에서도 예수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제2장의 내용은 퍽 복잡하고 지루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 여러 곳을 찾아보면 확실하게 하늘나라의 무상급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 3장
하늘나라의 면류관
나는 얼마전 어느 목사님을 만났는데 그분의 말을 빌리면, 하늘나라에는 5대 면류관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자랑의 면류관(살전2:19), 둘째는 의의 면류관(딤후4:8)
셋째는 생명의 면류관(계 2:10) 넷째는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그리고 다섯째는 석지 않는 면류관(고전 9:25)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면류관이란 무엇입니까?
하늘나라 최대의 상급으로서의 면류관
면류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거의 동일합니다. 그것은 하늘나라에서 최대의 상급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찬송가 544장이 생각납니다.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항상 찬송 부르다가 날이 저물어 오라 하시면 영광 중에 나아가리
열린 천국 문 내가 들어가 세상 짐을 내려 놓고 빛난 면류관 받아 쓰고서 주와 함께 다스리리. 눈물 골짜기 더듬으면서 나의 갈길 다간 후에 주의 품 안에 내가 안기어 영원토록 살리로다
열린 천국문 내가 들어가 세상 짐을 내려 놓고 빛난 면류관 받아 쓰고서 주와 함께 다스리리.
나의 가는 길 멀고 험하여 산은 높고 골은 깊어 곤한 나의 몸 쉴 곳 없어도 복된 날이 밝아오리
열린 천국 문 내가 들어가 세상 짐을 내려 놓고 빛난 면류관 받아 쓰고서 주와 함께 다스리리.
한숨 가시고 죽음 없는 날 사모하며 기다리니 내가 그리던 주를 뵈올 때 나의 기쁨 넘치리라
열린 천국 문 내가 들어가 세상 짐을 내려 놓고 빛난 면류관 받아 쓰고서 주와 함께 다스리리.”
나는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기쁨과 소망이 넘쳐 흐릅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면 영광 중에 나아가 주의 품안에 안기어 영원토록 살며 그 복된 날이 밝아올 때 기쁨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찬송가는 가사에서 모순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의 무거운 짐을 모두 내려놓고 빛난 면류관을 쓰는 데만 모든 희망을 걸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는데, 좀더 구체적으로는 1장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현상학적 인식론을 통한 기쁨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 찬송가를 부르면서 진정 하늘나라에서 면류관, 즉 모자를 쓸 줄 믿고 있습니다.
면류관에 대한 대표적인 예화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한국교회에 오래도록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정확하지는 않아도 대강 이러한 내용입니다.
어느 장로가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교회에서 가장 공로가 있는 자로서 헌금도 제일 많이 하고, 목사에게 신임도 받으며, 교회의 앞자리에 앉아야만하는 자로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같은 교회에 직분도 없고 보잘것없이 초라한 한 할머니가 있었는데, 예배 때마다 오는지 가는지 조차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말석에 앉아 조용히 기도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이 장로가 꿈에 하늘나라에 갔다고 합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이곳 저곳을 살피는데 어느 방에 빛나는 면류관이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여러 종류가 있어 평소에 교회에서 공로가 가장 많았던 장로인지라 스스로 가장 큰 면류관이 자기의 것인 줄 알고 머리에 썼다고 합니다.
그러나 큰 것부터 가장 작은 것까지 모두 써보았지만 자신에게는 하나도 머리에 맞질 않았습니다. 실망한 장로가 어쩔 줄을 몰라하는데 한쪽 구석에 개털모자가 있어서 그것을 써 보니 머리에 꼭 맞더라도 합니다.
꿈을 깬 장로는 평소에 자신의 잘못된 신앙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말석에 앉던 남루한 할머니를 선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설교 중 이 예화는 어느 누구나 한번쯤은 신자들에게 그 나라의 실상이 이러하며 면류관을 쓰기 위해 하나님께 충성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들려준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면류관의 의미
면류관이란 말은 헬라어로는 ‘스테파노스’로서 그 뜻은 ‘에워싸다’(to encircle)인 ‘스테포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래서 면류관은 둘러싸여 있는 것(that which surround)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스테포’가 사용된 경우는 왕이(왕하 11:12) 헬라의 경주에서 승리한 자에게(고전 9:25) 공석에서 영광이나 기쁨의 표시로(사 28:1) 각각 사용되던 것이었습니다.
역시 성경에서 사용된 면류관은 모두 허위(pseudo)의 언어입니다. 우리는 가끔 언어철학에서 허위언어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표현기법으로서 직설적 표현보다 더 수사적인 표현 방식입니다.
가령, 벼가 자 익은 가을 들판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야, 들판에 벼가 누렇게 익었구나.”
이것은 누구나 쉽게 표현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어떻습니까?
“야, 황금 물결이로구나.”
이 말로도 우리는 가을 들판에 벼가 누렇게 익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어의 표현은 이렇게 엉뚱한 면도 있습니다. 정말 벼가 잘 익은 가을 들판이 황금입니까, 또 그것이 물결입니까? 그리고 황금이라고 하여 오항금 연구를 하고 나서 잘 익은 벌판을 표현할 것입니까, 물결이라고 하여 바닷가까지 가서 물결을 보고 돌아와서 표현을 할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잘 익은 가을 벌판의 허위동등(pesudoequivalence)인 것입니다.
이것을 때로는 상징표현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면류관도 왕, 승리자, 기쁨의 표시로 사용한 모자로서 영어로는 일괄적으로 crown이라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면류관
신약성경을 보면 면류관이란 용어가 문맥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면류관이 하늘나라의 상으로만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면류관이 하늘나라의 상으로만 사용되는 전용단어로 알고 있지만 요한계시록 12:3을 보면, 용의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또 요한계시록 13승이 열 면류관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고린도전서 9:25에는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전절을 보면 달음질하는 자가 상을 얻는데, 그 상을 얻는 자는 하나인 것처럼 우리도 이와 같이 달음질 하라고 합니다. 또 25절에는 절제자와 비절제자 사이에 면류관이 다른데, 전자는 썩을 면류관이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여러 측면에서 면류관이라는 허위 언어를 사용한 것에 대하여 찾아볼 수 있는데, 하늘나라에서 받을 5대 면류관이 우리는 최대상급임을 고집하는 자들을 위해 다음 항에서 상세히 언급하려 합니다.
5대 면류관
5대 면류관, 나는 이런 면류관에 대하여 노래처럼 들어 왔습니다. 또 하늘나라에는 이러한 면류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5대 면류관은 표현방법일 뿐 하나도 그 자체의 의미를 찾아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5대 면류관을 보면,
1. 자랑의 면류관(살전 2:19)
2. 의의 면류관 (딤후 4:8)
3. 생명의 면류관(약 1:12, 계 2:10)
4.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5. 썩지 않는 면류관(고전 9:25)
1. 자랑의 면류관
데살로니가전서 2:19-20을 보면,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먼저 데살로니가전서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가 성공적일 때 유대인들의 폭동으로 말미암아 베뢰아로 갔으며, 다시 아덴까지 좇겨갔다가 그 교회가 걱정이 되어 결국은 디모데를 파송했습니다.
그러던 중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박해 가운데에서도 믿음을 지킨다는 대견스런 소식에 감격하여 바울은 이 편지를 썼으며, 또한 이에 감사하여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으로 지칭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에서 여러 주석가들의 해석을 살펴보면 거의가 같은 맥락에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에 대한 해석에서 바울은 자신이 전도한 신자들이 구원을 받아 심판의 날에 면류관으로서 소망, 기쁨, 그리고 자랑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보편적인 해석은 바울의 자랑의 면류관은 이러한 사실이 이루어질 때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받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주석가들의 해석이나 오늘날 교회 목회자들, 심지어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같은 입장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소망, 기쁨, 그리고 자라의 면류관은 다 같은 사실로서 그리스도의 재림 때 교회의 구원이 완성되므로 얻어지는 주관적, 객관적 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주어진 상은 보상의 개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기독교 2천년 역사 속에서 우리는 성경 해석의 모순에 대한 난관을 극복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오직 믿으로 구원을 받으나 그 구원에는 보상이 따른다는 내용에 대해 말입니다. 정말 보상이 따릅니까? 보상이 따른다는 해석들을 마태복음 5:12, 고린도후서 5:10 등을 인용하여 이해시키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먼저 마태복음 5:11-12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이 책 2장에서 언급한 대로 예수님의 산상보훈 중 팔복의 마지막 내용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러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여기에서 대체적으로 주석가들은 이 기쁨의 근거는 하늘의 상급과 선지자의 전례를 따르는 것이며,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에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요건은 믿음일지라도 그곳에서 상받는 것은 행함을 따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를 위해 고난을 받는 자의 상급을 클 것이며, 이것은 재림 때에 이루어질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산상보훈의 말씀에 대한 논리적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논리적 문맥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부득불 하나하나 다시 정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자, 생각해 봅시다. 심령이 가난해야 한다면, 현실적 우리의 삶에서 가난해야 된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미래의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가난해야 된다는 말입니까? 잠시 시간적인 이해가 해석의 선행조건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영원한 미래의 하늘나라에서는 조금도 심령이 가난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현실적 세상에서 심령이 가난해져 한다는 의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역시 동일한 시간적 의미임을 발견합니다. 저 영원한 하늘나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나라에서 우리는 구태여 복을 얻기 위해 애통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어 팔복의 논리적 구조에 대한 여덟 가지 복의 근거는 모두 현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주 성경 해석에서 오류나 모순을 가지는 것은 논리적 구조에서 처음 전제가 현세적이면 재진술이나 결론도 현세적이기 때문입니다.
해석상의 난점이 있다 하여 전제와 결론의 구조나 의미를 달리하기도 하는데, 한국교회에서는 해석이 어려운 부분은 영적 해석이라는 연막탄을 터뜨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팔복중 칠복이 현세적 요건이나 복이라면 마지막 여덟 번째도 현세적 요건과 복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머지 한 부분만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받은 미래의 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도 해석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위대한 주석가요 신학자인 칼빈의 해석을 그대로 인용하여 정리하겠습니다. 칼빈은 마태복음 5:10의 해석을 위해 11,12절에서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12절의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입니다. 칼빈의 주석에서 글자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인용(한구어 역)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말씀은 불공평한 욕을 먹을 때 당황하지 않을 방편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이다. 우리의 마음이 일단 하늘을 향해 들려 올려지게 되면 끝없는 기쁨의 근거가 거기서부터 문을 활짝열고 우리에게 나와 모든 슬픔을 삼켜버리고 만다. 로마 가톨릭 교도들은 이 상이라는 말을 가지고 우리를 속이는데, 이 거짓을 들춰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이 상과 공로 사이에는 아무런 상호관계가 없으며, 이 상에 대한 약속은 그냥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가운데 가장 선하다는 사람의 선행이라도 얼마나 흠과 모순투성인가 하는 점을 생각할 때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칼빈의 주석을 재해석한다면, 먼저 “우리의 마음이 일단 하늘을 향해 들려 올려지게 되면 끝없는 기쁨의 근거가 거기서부터 문을 활짝열고 우리에게 나와 모든 슬픔을 삼켜버리고 만다.”는 것은 성경의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라는 부분의 해석이 될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 말씀이 주는 시간적 의미는 영원한 하늘나라가 아니라 이 세상의 현실적 의미임을 직시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로마 가톨릭 교도들은 이 상이라는 말을 가지고 우리를 속이는데, 이 거짓을 들춰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이 상과 공로 사이에는 아무런 상호관계가 없으며, 이 상에 대한 약속은 그냥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칼빈 당시의 내용으로서 오늘날 소위 기독교라는 명분 아래 건전한 교회의 목회자들도 대다수가 하늘나라에서 상이 있다 하며, 이것을 전제로 하여 충성과 봉사와 선행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칼빈은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우리를 속이는데, 이 거짓을 들춰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한 것입니다. 칼빈은 단도직입적으로 이 상과 우리의 공로 사이에는 아무런 상호 관계가 없이 거저 주신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런 해석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조금도 두려울 것 없이 하늘나라의 상에 대하여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없음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들 가운데 가장 선하다는 선행이라도 얼마나 흠과 모순 투성인가 하는 점을 생각할 때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칼빈은 말합니다.
과연 우리의 선행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정당한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앞에서 상을 받을 만큼 행위가 선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에게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시고 하늘나라를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그 외의 상을 더 받겠다고 하니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감에 더 마음을 쏟는 것과 같습니다.
그 다음 고린도후서 5:10을 찾아봅시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여기에 대한 해석의 첫째 내용은 죄의 심판이 아니라 행위에 대한 심판으로 생각합니다. 문맥을 보아 이것은 분명히 옳은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 심판은 보상의 심판이며, 선한 일을 많이 한 성도는 구원의 자리에서 많은 상급을 받을 것이고, 악한 일을 한 성도는 무슨 형태든지 부끄러움을 받는다는 해석을 좀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 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만한 가치가 있어서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택하신 자들을 행한 은혜의 표현인 것입니다.
전절인 9절에 보면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된 내용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는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드리는데 그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칼빈의 해석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5:10의 해석을 보면, “악한 행동에는 거기에 마땅한 처벌이 따르지만 선한 행위를 보상함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그 행위의 가치나 공로를 참작하시지 않는다. 우리의 어떤 행위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만큼 그 모든 면에 있어서 완벽하고 충분하지 못하며, 더 나아가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게 하는 유일한 길은 전체 율법을 다 만족시킴으로써만 가능한 것인데, 그 정도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유일한 대비책은 하나님이 자신의 무상의 친절에 따라서 우리를 용납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우리에게 전가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를 그의 호의로 받아들인 다음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행위를 은혜롭게 받아주시며 보상이 따르는 것도 바로 이러한 분에 넘치는 용납이다. 하나님이 선한 행위를 보상하신다는 말 속에는 우리가 값없는 은혜로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이 부정되지 않는 것으로만 본다면, 여기에는 전혀 모순된 점이 없다.”고 하고 있는데, 이것을 이해한다면 칼빈이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지키거나 따르지 못할 뿐 아니라 어느 하나도 완벽하게 행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5:10의 말씀을 히브리서 10:17-18과 거꾸로 뒤집어 생각해보면 이러합니다.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사의 영원성에 대한 진리로서 죄와 불법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시겠다는 말씀에 믿음과 신뢰를 가진 것입니다. 이 말씀이 최후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어떻게 이해될 것입니까? 과연 그 심판대에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죄를 하나하나 기억할 수 없다든지, 아니면 기억하지 않겠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기억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절을 보면 “이것(죄)을 사하셨은즉”이라 말하고 있는데, 우리의 죄를 사하셨어도 마지막 심판 때 주님만을 기억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죄를 다른 사람에게 일일이 발표할 이유도 없지만 주님과 당사자와의 관계에서는 주님만이 기억하실 것이라는 내용이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악 간의 행함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는 것, 즉 행위보상과 보응도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위를 따라 상을 받는다는데 대한 인식을 바로 정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시상대 위에서, 그리고 만인이 보는 앞에서 심판에 따라 보상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죄사함 받은 성도들의 죄를 기억하실 수 있듯이 각자의 보상은 현세적 보상방법이 아니라 주님만이 아시는 보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의 면류관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의(디케)라는 용어도 해석이 어렵습니다. 정의적 해석 그대로 올바름이라고 한다면 그 해석이 과연 충분합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좀더 구체적인 해석으로써 판결이나 집행의 원칙적인 올바름이라고 해도 불충분합니다.
여기에서 굳이 상급을 논한다면 나는 수직적 상급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직적 상급이라는 것은 인간과 인간사이에 서로 비교할 수 있거나 자랑할 수 있으며, 많다 적다는 갈등이 있을 수 있는 그러한 수평적 상급이 아니라 주님만이 각 개인의 행위를 기억하고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수직적 상급은 주님만이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구원받은 성도는 행위에 관계없이 자신이 가지는 기쁨으로 동일하게 만족할 것입니다. 만일 행위에 따라 기쁨의 만족도가 다르다면 하늘나라는 진정한 하늘나라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약 신학자인 G.E 레드라는 사람은 그의 책 「신약 신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심판 교리에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있다. 경험되는 종말론과 미래적인 종말론 사이에 끝임없는 긴장은 심판교리에서도 발견된다. 칭의(의롭다 하심)는 역사 속에서 일어난 종말론적인 사실이다. 그것은 심판자의 호의적인 결정에 의하여 죄책으로부터 방면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동시에 심판은 믿는 자들에게도 종말론적인 사실로 남아 있다.
우리가 소망하는 의(갈 5:5)는 최후 심판날에 무죄 선고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야 하는데(고후 5:10), 이 심판대는 또한 하나님의 심판대이기도 하다(롬 14:10).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칭의 때문에 심판날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롬 8:1; 33-34).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는 그의 행위에 대해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생애는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게 되고, 각 사람은 몸으로 행한 일에 대하여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그가 행한 일을 따라서 적절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F.V.Filson). 이러한 심판은 운명을 결정하는 심판이 아니라 가치를 평가하는 심판이며(P.E.Hughes), 정죄 또는 무죄 선고가 아니라 신자의 생활 가치 또는 무가치에 따라서 보상 여하를 결정하는 심판이다.“
이제 이 본문의 주제인 자랑의 면류관에 대하여 종결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어떤 해석에서는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각자의 행위에 따라 자랑의 면류관을 쓸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오해이며, 바울 당시에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강림 때 자랑할 만한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2. 의의 면류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자에게니라”(딤후4:7-8).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을 보면 의로운 보응으로 주는 면류관, 영원한 의로 주는 면류관, 그리고 의인의 의에 대한 상급으로 주는 면류관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렇나 상급을 기대하고 있으며,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보상에 대한 생각이 그들의 신앙의 일차적인 목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유형의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이 면류관을 물질적 개념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면류관은 사물이 아닙니다. 쉽게 표현하여 상징으로 볼 수 있으며, 구체적인 언어철학의 분석은 현상학적 인식의 범주에서 다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의는 믿음을 지킨 자에게 주는 것으로 면류관이라는 대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로써 의롭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로 여긴다는 말입니다(롬 4:3).
그러므로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5-8)는 말씀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으로 생각합니다.
가령, 일반 성경주석가들의 해석은 면류관이라는 용어가 성경 여러 곳에 나옴으로 이것들을 나열하여 “썩지 않는 면류관, 시들지 않는 면류관, 자랑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이라고 하며, 이것들은 성도들이 내세에서 받을 상급을 다각적으로 말한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성경에 나타난 5대 면류관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하늘나라에서 다섯 개의 면류관이라는 모자를 사용한다는 의미도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신을 선한 싸움을 싸우는 사람, 달려가 마지막 골인지점까지 완주한 사람, 그리고 믿음을 지킨 자로 표현하면서 마지막 심판 때 재판장되시는 주님께서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죽음을 앞에 두고 부활의 날을 바라봄과 동시에 ‘의의 면류관’과 ‘의로우신 재판장’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을 보면 분명히 마지막 심판 때에 있을 보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의에 대한 내용은 주로 로마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로마서 4장에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칭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9 이하를 보면 아브라함의 의에 대한 내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의는 인간의 주관적 입장에서는 믿음으로 보지만 객관적 입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이를 확증할 수 있는 말씀은 로마서 4:23-25 말씀입니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을 위한 것이 아담 그리스도죄의불순종순종정죄칭의사망생명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위의 말씀을 보면, 사실 의의 면류관을 기대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우리의 사소한 선행이나 행실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의 행위를 공로로 치켜세우려 하는데,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통하여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베푸신 칭의(의롭다 하심)가 행위보상과는 전혀 어긋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음을 통해서 값없이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베풀어진 칭의와 행위보상은 완전한 일치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즉, 인간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에 대하여 보상을 해주실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이 보상이라는 것이 고작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 인간의 선행에 있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은혜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의 행위를 보아 주시는 것이며, 우리의 행위가 보상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보상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라고 남용할 정도이면서도 정작 하늘의 보상이나 상급은 인간 자신들의 행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종종 두 가지 잘못을 저지르는데, 첫째는 우리의 선행으로 하나님을 보상의 채무자로 여기는 것이며, 둘째는 구원의 근원이 하나님의 극진하신 은혜 외에 또 다른 무엇이 있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의 능력이 하나님을 꼼짝 못하게 할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의 모순이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3. 생명의 면류관
야고보서 1:12을 보면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구절도 역시 면류관에 대한 내용입니다. 시험에서 승리하여 믿음의 정당성을 인정받은 후에는 약속된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인 우리의 투쟁으로 면류관을 받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거짓된 생각입니다.
이와 함께 생명이라는 용어도 역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생명이 무엇입니까? 생명에 대한 해석을 할 수 있습니까? 생물학자나 의학자도 정확하게 분석할 수 없습니다. 또한 성경학자도 신학자도 해석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생명의 본질적인 해석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우리의 이해란 영생이라는 개념일 뿐 생명 그 자체의 본질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어느날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미국 L.A에 사는 잘 아는 어느 분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건강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한번 생명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생명에는 영과 육이 있는데 우리는 생명에 대한 절실함이 있으며, 이 생명의 문제가 우리에게는 최대의 가치있는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0 하반절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이 면류관을 소유하는데 있어서는 성도의 환난이 전제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 죽기까지 그리스도께 충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최고가치는 사물적 인식인 면류관으로 동일한 의미를 줍니다.
그러나 이 면류관은 생명도 아니며 그렇다고 생명이 면류관도 아닙니다. 단지 추엇앟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데 그 가치의 표준을 면류관으로 표현한 것 뿐입니다.
생명의 면류관! 이것은 신자에게 최후에 주어질 면류관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면류관이란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라는 해석 불가능한 것을 면류관이라는 지상적 개념에서 이해를 시키는 계시의 표현방법일 뿐입니다.
따라서 생명과 면류관은 같은 의미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이란 최대의 자격을 갖춘 자에게 주는 것이므로 달리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는 모자 콘테스트를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한다면, 생명이라는 의미를 면류관이라는 최대가치의 평가로 하나님께서 상으로 주시되 무상으로 또는 값없는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 상이 아닙니다.
4. 영광의 면류관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 5:3-4).
본문은 베드로를 통하여 장로들에게 말씀하신 권면의 내용입니다. 장로들은 하나님이 맡기우신 양을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오직 본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권의 남용이나 강압적 태도와는 반대되는 내용으로서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영광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도 이러한 자에게는 상급의 보상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상급을 주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때는 재림의 때로서 그 상급은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표현이나 계시의 한 형태일 뿐 다른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의 ‘시들지 아니하는’이란 헬라어로 ‘아마란트’라고 하는데, 이것은 시들지 아니하는 곳에서 온 단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시들지 아니하는 면류관은 ‘아마란트’로 만든 면류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하늘에서 받을 것은 영원불멸의 영광의 면류관이라는 것이 특징인데, 이것을 문자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또한 하늘나라에서는 과연 ‘아마란트’로 된 면류관을 장로들만이 쓴다는 것입니까? 성경에 나타나 있는 문장 구조로 보아 이것은 단지 장로들에게 권면한 말씀이며, 이것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오늘날 목회자들에게 주어질 면류관으로 이해를 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평신도들에게는 이 말씀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 내용을 오늘날 교황에게 적용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허구일 뿐입니다.
위의 내용대로 해석한다면, 결국 5대 면류관을 주장하는 자가 평신도라면, 그는 전혀 이 면류관에는 해당 사항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역시 영광의 면류관도 영광의 의미를 지상적 표현으로 그 의미를 알게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면류관이라는 모자를 쓸 이유도 없고, 또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장로(목회자)로서 하나님의 맡기우신 양무리를 위하여 자원하여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즐거운 뜻으로 하며, 교권자가 되지 말고 본이된 자에게 하늘나라의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자신을 장로로서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로 서두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벧전 5:1). 따라서 목회자는 고난의 증인이 되어야 하며 결국은 하늘나라에서 영광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5. 썩지 않는 면류관
고린도전서 9:24-27에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자제에 대해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것과 다투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는데, 상 얻는 자가 하나임으로 그 상을 얻기 위해 달음질하라는 것은 이토록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 절제의 문제인데, 그것은 승리하기를 다투는 자는 자제해야 할 것이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 말은 운동 선수이든 아니든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는 모두 일종의 훈련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승자에게 주는 솔잎이든 월계잎이든 이 모든 것은 시들거나 썩고 맙니다. 그러나 영원한 하늘나라의 면류관은 마르지도 않고 썩지도 않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썩지 아니할 면류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단지 지상에 있는 면류관과 대비하여 하늘나라의 영원히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을 얻고자 하는 일념의 표현일 뿐입니다.
그럼, 과연 하늘나라에서 면류관이라는 모자를 쓰겠다는 것입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 단지 하늘나라의 영원불멸의 의미를 말하는 것뿐입니다.
지금까지 5대 면류관에 대하여 다각적으로 표현된 의미를 이해했을 줄 압니다. 사실, 5대 면류관이라는 말은 터무니 없는 것입니다. 자랑의 면류관은 교인들의 신앙과 행위에 근거한 바울이 말한 면류관일 것입니다. “너희가 아니냐”가 바로 그런 증거입니다.
그 다음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그리고 썩지 않는 면류관은 각각 문장과 문맥에 따라 그 내용을 달리 하지만 면류관의 의의와 방법은 모두 같은 것입니다. 자랑, 의 생명, 영광, 그리고 썩지 않음을 이 지상에서의 승리자에게 수여하는 면류관으로 그 의미를 다양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면류관에 대한 내용은 줄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면류관이 보다 더 선명하게 하늘나라에 있을 영화로움과 기쁨에 대한 다양한 표현으로 이해했다면 만족할 것입니다.
제4장
유업의 상
4
“유업의 상”이라는 말의 내용을 보면 ‘유업’과 ‘상'이 같은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3:24에 “유업의 상”이라는 말씀이 있으며 그 뒤에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유업‘과 ’상‘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봅시다.
구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유업에 개념
구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유업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현세적이며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점진적으로 그 유업이 확대되어진 내용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창세기 1:28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그 땅을 인간에게 소유하도록 하시고 경작케 하셨으며, 또 향수케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 이후 인간이 범죄하여 타락했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선택된 백성에게 유업으로 주셨습니다.
그 유업의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에덴 동산을 창설하신 후 그곳에 인간을 살게 하셨습니다(창 2:8). 따라서 에덴동산은 인간을 위해 창조된 하나님의 선물이며 유업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세상 어느 부분에서 살도록 위치 선정을 해주셨는데, 창조 역사에는 에덴 동산으로 말미암아 위치가 설정되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곳은 하나님이 인간 아담에게 할당해 주신 선택된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옮기신 데는 목적이 있습니다(창 2:15). 그것은 에덴동산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기 위한 관리자의 임무를 주기 위해서였으며, 또한 그곳을 정당하게 관리함으로 즐거움을 얻게 함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인간이 범죄함으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으며 근본된 토지를 경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확인을 요구하는 것이며, 노동의 문화, 땅의 문화로서 생계를 유지하도록 일감을 맡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창세기 11장까지는 하나님이 없는 철저한 이간 타락의 역사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유업으로 주신 땅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가운데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아담이 가인을 낳았고,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습니다. 가인은 죄를 다스리는 자가 되었고(죄라는 단어가 처음 나옴), 결국 그의 아우 아벨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여호와의 앞을 떠나 에덴 동편 놋이라는 땅에 망명하여 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창 4:16).
이 놋 땅의 의미는 ‘망명한 곳’으로서 전혀 안식과 평화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땅인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휴식이 없이 영원히 방랑하는 땅을 말합니다.
그후 창조의 안식일에 대하여 언급이 있은 후 출애굽기의 십계명을 통한 안식일의 언급이 있기까지 하나님은 안식일에 대하여 침묵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면 안식이 없고 고독을 느낍니다. 그래서 가인은 제사행위를 통해 하나님ㄴ께 나아가려 했지만 그의 불성실로 말미암아 아주 하나님과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가인은 하나님을ㅇ 떠난 인간 문명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에 입각한 문명의 출발입니다. 창세기 4:17부터 가인의 계보가 시작되고, 하나님이 없는 문명과 문화가 시작되었브니다. 문화의 창조와 직없으 변화는 타락한 인류 전체의 문제로서 이 사회 발전의 4대 요점인 노동, 교육, 국방 및 상공업과 타락한 인간의 애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회 발전의 결과는 사람을 죽이는 살인이었습니다. 아담이 가인을 통해 얻은 7대자손인 라멕의 악의 노래는 범죄한 인간의 죄의 주장을 엿볼 수 있습니다(창 4:23). 이것이 곧 인간 죄악의 확대입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내가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 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범죄, 가인의 살인과 더불어 라멕에 와서 죄의 완성을 볼 수 있으며, 오만한 인간, 죄악의 노래와 풍류를 좋아하는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아내들은 아다와 씰라인데, 아다는 ‘아름답다’라는 뜻이고 씰라는 ‘사치, 그림자’란 뜻입니다. 이들은 악을 조장하는 천박한 여자들로서 오늘날도 천박한 여자일수록 사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창세기 5장에서 셋의 계보로 하나님의 구속사의 통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셋은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유일한 종교적 첫 행위였으며, 아담이 셋을 통한 십대 자손에서 노아가 태어났습니다. 가인의 후손은 교활하며 문화, 문명, 이기심, 그리고 불경건의 특징이 있지만(창 4:16-24), 셋의 후손은 하나님께 헌신과 순종(창 4:25-26), 하나님의 교제를 기뻐하며(창 5:22),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었습니다(창 6:8).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셋 자손)과 사람의 딸들(가인의 후손)이 통혼을 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인간의 일을 일백 이십년으로 정하시고 창조한 사람들을 지면에서 쓸어버리실 것을 말씀하시고 노아에게 은혜를 입히셨습니다.
홍수를 통한 심판과 그후 사건들이 주목되는데, 그것은 그의 아들들, 셈과 함과 야벳입니다. 노아의 아들들로 인하여 백성이 온 땅에 퍼졌습니다(창 9:19).
그후,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저주가 주어지며 형제의 종이 될 것을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아울러 셈은 여호와를 찬송하게 했고 동생 야벳을 창대케 하셨으며,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 종이 되게끔 하셨습니다(창 9:26-27).
그후 노아의 아들 가운데 함의 아들 구수가 니므롯을 낳았는데, 이를 가리켜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창 10:8)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니므롯의 행적은 시날 땅(바벨론)이 중심이었으나 나중에는 앗수르로 건너갔습니다(미 5:6). 거기서 니므롯에 의하여 바벨탑을 쌓게 되었으며(창 11:1-9), 이것은 곧 아담과 그의 아들 가인과 후손이 하나님의 명령에 직접적으로 반대된 목적으로 성과 대를 쌓았던 일입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의 시작입니다.
창세기 12장에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는데, 그 부르심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쫓겨난 후 11장까지는 하나님이 없는 인간역사의 발전이며, 비로소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 새로운 창조와 구속의 통로를 여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 족속에서는 전혀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를 열 만한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숭배자들이었지만(수 24:2, 창 31:19; 35:2) 이러한 족속 가운데에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하나님이 선택 속에 그를 두셨던 것입니다.
선택의 개념은 ‘구별’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거룩해서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셨으므로 거룩한 백성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나무와 완전히 교통이 단절된 인간에게 희생제사의 길을 제공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언약은 곧 현세적 미래의 유업이었습니다. 이 땅은 가나안을 말하는 것으로서 아브라함이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창 12:7-8).
하나님은 이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은 결구 아브라함을 통하여 약속하신 유업을 이삭, 야곱, 그리고 열두 지파를 통해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여 축복의 땅으로 허락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축복의 땅으로 충분합니다(창 26:3; 2:13-15). 이것은 곧 하나님의 성소 및 성전의 선정을 위해 지정된 곳이었습니다.
역시 구약성경은 여러 곳에 가나안을 유업 또는 기업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기업을 약속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가 되게 하려는 의도를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현세적 유업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이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유업의 개념
우리는 먼저 구약시대는 그 유업이 현세적이며 아브라함을 통한 그 자손들에게 확대되어 성취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유업이 영원한 하늘나라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갈 3:15-16). 아울러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면, 유업의 상속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가 3:29; 4:7).
야고보서 2;5-6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한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는 말씀은 부자가 가난한 자를 괄시하지만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택한 하늘나라의 유업을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위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할 공평과 고정에 대한 교훈입니다. 가난과 부의 현세적 측정으로 불공평한 처사가 오늘날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현실적 공평이나 공정의 요구는 하늘나라의 유업에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두고 잘못 판단된 예를 들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 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여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그렇지만 대체적으로 세상에는 가난한 자와 부자 사이에는 깊은 골이 지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보편적으로 판단이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일반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이러한 것들을 볼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야고보는 가난한 자에게 오히려 믿음을 부요케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가난한 자를 축복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원리이며 내세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실 것을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아울러 고린도전서 6:9에는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가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남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현실적 죄의 목록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는 진리의 가능성을 이해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5:50에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말했는데, 분명히 이것은 부활과의 관계에서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대비하여 육있는 자와 신령한 자, 땅에서 난 자, 즉 흙에 속한 자와 하늘에서 나신 자에서 결코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inherit)으로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유업에 대한 최상의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4)
유업의 정의
유업이란 마른 헬라어 ‘클레로노모스’(상속인, 후사)에서 유래한 ‘클레로스미아’(상속, 계승, 상속물)란 의미입니다. 특히 골로새서 3:24에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라는 말씀은 이같은 뜻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업과 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볼 만한 것입니다.
믿는 성도는 어떤 인간관계이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할 것이며 사람에게 주께 하듯하고 소홀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가 유업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이 유업의 상에 대한 올바른 견해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상전을 섬김으로 그리스도께서 그 수고에 대해 지불하실 것이며, 마침내 영화로운 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유업의 상이란 무엇입니까? 구약이 당연히 현세적이며 물질적인데 비해 신약은 내세적이며 영적인 것입니다. 대체로 본문에 나타난 유업의 상을 현세의 일상적인 물질적 보상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며, 무엇인가 하늘나라에서 지상의 소유개념에 대한 자리바꿈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유업의 상을 무엇으로 생각합니까? 나는 이 세상에서 종이었으므로 내세에서는 아들의 유업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유업은 상속 또는 상속자의 의미임으로 절대로 상속을 받을 수 있는 자격자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유업의 상이란 물질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적 의미가 강조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 유업의 상이 인간 행위에 있는 듯하나 실상은 하나님의 공평, 즉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으시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21:7을 보면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위의 말씀은 전절들을 받은 유업의 내용이며 그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이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있을 우리의 위로이며 상급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업의 상이 바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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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없다면 하늘의 소망이나 기쁨, 그리고 현재의 세상에서 주의 일을 할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자들을 주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대체적으로 하늘의 상급을 상상할 때 터무니 없는 물질적 보상의 개념으로 간주하려 합니다.
하늘나라의 무상급론에 대한 반론자들의 내용
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하늘나라의 무상급론에 대한 반론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반론에 조금도 염려치 안흔 것은 성경이 말하는 확실한 내용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체적으로 목회자들이나 평신도들은 하늘나라에서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지상적 개념의 상급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간절히 갈망하며 가지기를 원하는 것처럼 공로보상을 물질적 개념으로 이미 고정되거나 확정적 사실로 믿고 기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제1장에서 제4장까지 많은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해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충분한 부분을 보충정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되어 재정리하겠습니다.
학교에서 강의하던 중 나는 몇몇 학생들로부터 무상급론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질문은 단지 상급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없으면 무슨 소망으로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할 것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신앙입니다.
또 어떤 이는 “하늘나라에서 왜 상급이 없겠느냐? 성경에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준다고 했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했지 않느냐?”고 반박합니다.
그러면서 “성경에는 상이 있다고 하는데 왜 상이 없다고 하느냐, 나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 말에 대해 나는 성경은 문자적 해석이 되어져야 할 부분이 있고 문자적인 해석이 되어서는 안될 부분이 있음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마 무상급론에 대한 나의 말에 기분이 상했을지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에게 무상급론에 대한 반박의 말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해 봅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 주석가들의 주석이나 일반 기독교 책들을 살펴보거나 주변 목회자들이나 평신도들을 만나 얘기를 해보아도 모두가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있다고 합니다.
때로 나는 일반적으로 모두가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있다는 말에 자신의 해석에 대한 회의감을 가지며 실망할 때도 있었으나 칼빈의 주석이나 기독교 강요를 읽으면서 역시 칼빈주의는 무상급임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여기에서 성경해석의 시비는 피하고 기독교 2천년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변함이 없으나 정당한 성경 해석적인 면의 발전은 고무적임을 강조합니다.
지금까지 교회에서 들어왔던 상급은 성도들에게 많은 충성과 하늘나라에서 구원 외에 또 다른 소망을 안겨준 줄 압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늘나라의 상급에 대한 가치성을 어디에 두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늘나라의 무상급론에 대해 반박과 적대감을 가지면서도 “당신은 하늘나라에서 무슨 상을 받을 것이요?”라고 물으면 구체적인 답변은 못하고 “뭔가 상이 있겠지요. 면류관 또는 열 고을이나 다섯 고을을 다스리며 왕 노릇을 하지 않겠느냐?”는 이런 반문 정도가 고작입니다. 그러면 나는 열 고을이나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것이 무슨 상급이며, 면류관을 쓰는 것과 왕 노릇하는 것이 무슨 상급이냐고 재반문합니다.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기대하는 자의 수치
나는 프레드 캐더우드라는 사람이 쓴 「오직 주님께만 영광을」이란 책을 읽어 보았는데, 그 내용은 돈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책의 한 예를 들면 “우리는 하나님께 빚지고 있습니다. 십일조는 모세 율법 이전에 있었으며 그 이후에도 계속 존속합니다.” 등등의 항목을 열거하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수입을 사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정도의 내용은 우리도 이미 교회 생활을 통하여 잘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신앙과 행위를 통해 영원한 상급과 관계를 짓고 있는데, 그것은 큰 모순입니다. 우리 신앙의 행위와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면 그것으로 이미 끝난 것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하나님께 빚지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임무수행을 했다고 해서 상을 받을 권리를 내세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또 십일조를 드리거나 구제나 선행을 하나든 것으로 하늘나라의 상급을 받겠다는 것도 오만한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으로나 신앙으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상급의 대상이 못됩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믿는 자로서 당연한 의무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네 부모를 공격하라”는 계명을 준수했다고 한다면, 과연 이것이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받을 이유입니까?
이 외에도 신약성경에 주님이 원하시는 선행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이 말씀을 순종했다고 하늘나라에서 엉뚱한 상을 바란단 말입니까? 그 다음 구절을 보면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위의 말씀에 견주어 볼 때 우리의 선행은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받는 이유가 아니라 단지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지 못한 자는 정말 주님 앞에 수치스러울 것입니다.
프레드 캐더우드는 세상적 현실에 적응하듯이 우리는 자신의 상급이 하늘에 있다는 영적 현실에 적응해야 하며, 미래의 새 생활(하늘나라)을 위해 보화를 투자하든 말든 모든 사람이 똑같은 보상을 받는다면, 내세에 투자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에게 주어야 할 궁극적 이유는 하나님이 영원한 상급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공로로 구원을 받은 자는 이 세상 생활에서 선행과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를 위해 충성하고 믿음을 경주하며 선행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 신앙의 행위가 하늘나라의 상급에만 얽매여 있다면, 정말 부끄러운 신앙일 것입니다.
신상보훈 가운데 주님이 율법의 완성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l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17-20).
이것은 율법의 완전성에 대한 교훈이며,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 즉 자신은 율법의 지극히 작은 것 중 하나를 범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그것을 지키라고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지극히 작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버리고’는 문맥에 따라 다르지만 요한복음 5:18에서는 ‘범하다’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 중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은 죄를 범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지키라고 가르치는 것은 하늘나라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대부분이 자신은 계명을 범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지키라고 가르친 경험이 있을 줄 압니다. 그렇다면 이미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구언 외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 다음 구절에서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는 것은 이미 19절 상반절에서 우리의 불가능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완전한 율법에 우리 모두가 겸손하여 굴복하지 않을 수 없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더욱이 20절을 보면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함으로 율법의 의미든 믿음의 의미든 그 기준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늘나라의 ‘작다, 크다’란 의미를 상급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준수로 그 공효가 하늘나라까지 미친다는 것은 절대로 상급의 우무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주님 앞에 지극히 작은 계명 중 하나라도 지신은 실천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는 교훈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율법 준수의 공효는 무효인 것입니다.
어떤 경우 율법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의 크고 작음, 즉 상그븡ㄹ 결정하는 조건이 되다고 한다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약 2:10-11)는 말씀에서 상급은 이미 무효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율법의 완성은 모세의 율법보다 완전하여 “살인하지 말라”라는 것 이상으로 남을 미워하거나 노하는 자에게 살인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 되며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간음치 말라”라는 율법의 완성으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한 가지도 우리의 행위실천이나 정신적 세계에 있어서 주님 앞에 정당할 수 없습니다. 흔히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공로로 받으며 하늘의 상급은 우리의 행위, 즉 율법을 지킴으로 얻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전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 부끄러움과 수치뿐입니다.
현세상에서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
마태복음 19:29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내용과 병행하는 구절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있는데, ‘여러 배’를 받는다는 이것을 하늘나라의 상급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을 위해 우리의 소유나 친족관계까지도 포기할 수 있단 말입니까? 역시 이 구절은 우리의 신앙세계에서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은총의 내용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 배’의 선행 조건인 것입니다.
‘여러 배’ 라는 이것이 하늘의 상급처럼 생각이 되다면,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는 ‘금세에 있어’라는 내용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주를 위해 소유의 희생을 치르면 이 세상에서 ‘여러 배’ 또는 ‘백 배’를 받는다는 역설인 줄 압니다.
그 다음 내용을 보면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입니다. 이것은 현세적 구원의 차원을 넘어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상속받는 지대한 은총의 상급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생은 전혀 인간 자신의 공적이나 공로, 그리고 선행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힘입어 양자된 우리에게 상속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영생을 쟁취할 수 없는 것처럼 하늘의 상급도 쟁취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야고보 형제의 하늘나라에 대한 야망
마태복음 20:20-28(막 10:35-45)에 세베대 아들의 어미인 살로메가 그의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인가를 구했습니다.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 20:21).
여기에서 “주의 나라에서”라는 말이 매력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아직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림자조차 나타나지 않았는데, 세베대의 아들들은 벌써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주의 나라에서 있을 일들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소서”라는 살로메의 부탁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오히려 그들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허망한 야망에 눈이 어두워지면 진정한 것을 바라볼 수 없게 됩니다. 그들은 하늘나라 대신에 주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십자가는 뒤로 한 채 엉뚱한 것을 꿈꾸며 높아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지상적 메시아인 줄 알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허망한 꿈을 꾸는 자들에게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물음은 그들의
터무니없는 하늘나라의 야심을 시정해 주는 것으로서 십자가와 주님을 따르는 자의 고난을 제시해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잔을 통하여 그들의 뻔뻔스런 입에 재갈을 채우신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정의의 전쟁은 두려워하면서 승자의 전리품에만 눈을 돌리는 자들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야심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늘나라에서 모든 것을 가질 터인데, 그 외에 엉뚱한 것을 개인적으로 더 소유하겠다는 것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는 누구의 것입니까? 하늘나라의 영광을 한 개인만이 소유하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 다음 주님의 말씀은 “내 좌우 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영원한 하늘나라로 우리를 불러들여 유업으로 주신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상이나 어느 누가 더 우월할 것인가는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이것은 주님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관에 있음을 말씀하고 있으나 해석상의 문제는 바로 주님의 심리적인 표현 방법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아예 하늘나라에는 이런 우편과 좌편이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라고 하실 수 있겠지만 아버지의 영역에 맡기신 것은 그리스도의 목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의 통로를 열어주신 것입니다.
요한1서 3:2을 통하여 보더라도 아직 알지 못하는 미래의 하늘나라에 대하여 지나치게 상급이나 우월한 것을 쟁취할 것이라고 우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의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므나 비유에서 상급의 차이
먼저 누가복은 19:12-27을 읽어 봅시다.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들어와서 은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두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는 것을 취하고 심지 않는 것을 거두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는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저희가 가로되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나는 위에 나와 있는 므나 비유에서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거나 다섯 고을 권세를 차지하는 것을 상급으로 해석하는 자들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달란트 비유는 한 가지 면만을 취급하고 있지만 므나 비유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취급하고 있습니다.
역시 이 두 가지 비유의 공통되는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먼 나라로”라는 장소적 비유를 통하여 자신이 왕권을 얻어 오기 위해 긴 여행을 떠나야 하며,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의 종들에게 돈을 맡겨 장사하게 하여 이(利)를 남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누가는 이 주인을 ‘어떤 귀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므나 비유의 배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주님의 제자들이 많은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세 차례에 걸쳐 수난과 죽으심의 예고를 하시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것이 지상적이며 현실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착각에 대해 주님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라는 이 비유의 암시적인 내용을 자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 이후 오랜 세월 동안 각자에게 상업의 원리인 이익을 남기는 달란트나 므나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분명히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과 더불어 재림의 심판주로 오실 때까지 기간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심으로 제자들의 미래에 있을 심리적이며 예언적인 말씀까지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14절 하반절에 있는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주님의 나라를 두고 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며, 주를 위해 상업의 원리를 적용하여 이익을 남기는 복음의 상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는 나눠준 달란트가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로 차이가 있지만 므나 비유에는 나눠준 므나가 모두 동일합니다. 어떤 경우이든 이것은 주님의 지상적 부재(不在) 기간 동안에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며, 일하지 않고 앉아 있거나 누워 있다는 것은 큰 잘못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사실, 이러한 비유도 엄밀히 따지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인 구원을 활용하는데 있어서 자신을 적용시키는 자는 하나님께 큰 이익을 드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이러한 충성은 사면을 성실히 수행하는 자신들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익을 남긴 달란트 비유나 므나 비유가 상급의 원리는 아닌 줄 압니다. 마태는 상급의 표현이든 아니든 간에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했으며, 주님의 좋은 것들로 복된 부요함에 참여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므나 비유에서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잇는 자에게 주라”는 것은 하늘나라에서 지상에 있는 경제적 관념에 부합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란트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나라는 침노하는 자가 빼앗음
어떤 사람은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전후 관계를 보지 않고 인간의 의지로 노력하면 하늘나라도 침노할 수 있다 하여 역시 상급도 침노하는 자가 차지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펴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이에 관한 성경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마태복음 11:12을 보면 “세레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라고 하고 있으며, 같은 내용으로 누가복음 16:16을 보면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성경 구절을 읽을 때마다 정당하지 못한 직관으로 하늘나라를 침노하여 쟁취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의 상급도 우리의 쟁취 능력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침노를 당하나니”는 침범한다는 말의 수동태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침노를 당하나니”라고 했으며, 누가복음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세례요한의 전파 이후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밀려 들어와서 그들이 하늘나라를 소유한다는 것이 지배적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행위를 따라 심판
이제 그리스도의 심판에 대한 보편성을 생각해봅시다. 로마서2:1-16에 있는 내용을 읽어 봅시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무릇 율법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율법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송사하여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이 말씀의 내용을 요약하면, 유대인은 율법으로 심판을 받을 것이며(롬 2:12), 율법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그들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 즉 자신들의 양심에 의하여 심판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이론상으로는 사람들이 선행을 기초로 하여 심판날에 살아남을 수 있음을 시사하지만, 바울은 사람들이 빛에 따라 살지 못했음을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 2:6-7에 보면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지만 쓸데없고 하찮은 행위를 따라 상을 얻겠다는 우리의 잘못을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무엇으로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흔히 우리는 행한 대로 갚아주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에도 구원 외에 인간의 행위에 대한 상급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구원받은 자들의 구원 외에 그들의 선행에 따라 상급의 심판으로 알고 있지만 두 가지 형태인 영생과 그 반대인 노와 분, 그리고 환난과 곤고로 구별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전에 영화롭게 하기로 결심하셨던 사람들을 성별시키기 때문에 그들의 선행을 빛나게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어떤 공로나 공적을 보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본문의 문맥으로 보아 선행자에게 어떤 보상이 주어질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 그 보상의 진가나 그러한 것들의 가치를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어떤 행위가 보상을 받기 때문에 그것이 공로가 있는 것으로 추측하거나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반대로 버림받는 자의 사악함을 정당하게 보복하여 벌하심으로써 주님은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그들에게 도로 갚으실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 참고 선을 행하는 자들이 선행을 계속함으로써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이라고 말하지만, 신자들이 영생의 하나님 외에 어떤 다른 엉뚱한 것을 목적으로 하여 획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할 때에는 반드시 그의 나라의 복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7절 말씀의 의미는 선행하기를 힘씀으로써 썩지 아니함을 얻고자 노력하는 자들에게 준미은 영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공로로 보상을 바랄 것이 아니라 보상을 받을 각오로 선행을 한다면, 반드시 주님이 주시기로 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는 이 말씀이 진리인 것입니다.
또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을 맡은 일꾼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4:1-5을 보면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서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내용은 목사든 어떤 직분자이든 일꾼으로서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 충성을 다해야 할 임무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꾼들은 결국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으로 불러질 것인데, 첫째는 사역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며, 둘째는 지나치게 인간 위주의 높은 평가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관리를 맡은 자가 충성하지 않는다면, 주인의 뜻에 합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충성자’를 두고 정직한 마음과 지식을 가지고 참되고 순결한 사역의 임무를 감당해 가는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판단의 문제를 제시하는 입장에서 5절에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서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각 사람의 특성을 편견과 야심을 가지고 보았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사람들을 과대평가 혹은 과소평가를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각 개인의 공적을 결정하면서 인간 이상의 권위를 행사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복잡한 것들을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까지 그냥 숨겨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행동이나 마음속에는 서로가 잘 알 수 없는 은밀한 것들이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인들처럼 마치 자신들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 어떤 사람에게는 면류관을 주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불명예를 준다고 해도 이러한 판단과 심판은 절대로 그리스도께 있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의 상금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의 칭찬을 하나님의 정직하신 판단 기준에 맡길 때 있을 내용입니다.
종과 주인의 대한 착각
우리는 종입니까, 아니면 주인입니까? 우리는 종이라고 하면서 언제부턴가 모르게 주인의 자리에 앉으려 하고 있습니다. 종이 주인에게 당연히 부과된 일을 수행함에는 사례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우리도 주님께 사례받을 만한 일을 행한 것이 아니고 단지 당연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계명이나 명령을 모두 수행했다 할지라도 하지 않으면 안될 의무를 가진 종들입니다. 율법에 명한 어떠한 행위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했습니다. 이것은 또한 필연에 의하여 구속되어 있는 것만큼 그런 경우에는 자발적으로 기분좋게 선을 행한다고 자랑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저 유명한 크리소스톰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는 노예가 가지고 있는 재산과 같은 것인데, 그것은 권리상 주인에게 속한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찾아볼 수 잇습니다. 누가복음 17:7-10을 보면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고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노에나 종의 신분인 자신이 어떤 경우라도 주인의 요구 이상으로 충실히 일했다는 예는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주님을 향한 충성, 봉사, 그리고 희생 따위는 전혀 맞지 않는 사치스런 사례를 요구하는 종의 오만인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주인의 요구에 충분히 충성을 다했다 할지라도 역시 우리의 신분은 노예나 종인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행위와 비교해 우리 자신의 행위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야의 말을 빌리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찐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 1:1-12)고 하고 있습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말을 빌리면 종된 이스라엘이나 오늘날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는 어떠한 공로나 공적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어떻게 자신을 가지고 변호할 수 있는가 하는 이것이 문제입니다.
다윗의 말처럼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라는 고백이 곧 우리의 신실한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말을 빌리면 종된 이스라엘이나 오늘날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는 어떠한 공로나 공적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어떻게 자신을 가지고 변호할 수 있는가 하는 이것이 문제입니다.
다윗의 말처럼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라는 고백이 곧 우리의 진실한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종의 신분으로서 주인의 명령에 응할 처신력이 하나도 없습니다. 진정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침묵만이 있을 것이며, 자랑이나 요구 따위는 하찮은 것일 뿐입니다.
여기에서 칼빈의 두 가지 비유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만일 누군가 다른 사람의 호의로 말미암아 밭의 소작권(한국적 개념)을 얻은 자가 소유권의 명의까지 자기의 것으로 하고자 한다면 그 따위의 은혜를 망각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소작권을 상실당해도 마땅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만일 어떤 노예가 자기 주인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자신이 본래는 천한 사람이지만 자유를 얻은 신분이라는 것을 감추고 나면서부터 자유의 몸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이전 노예의 신분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마땅한 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에게 부여된 호의를 누리는 올바른 방법은 다만 우리가 받은 것 이상 무엇 하나도 주장하지 않고 선한 일의 창시자를 찬미하는 것을 가로채는 일은 적어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율법준수나 선행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
우리의 주변에는 주님을 위해 세상에서 인연을 끊고 희생과 봉사를 하고 있는데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없다면 정말 살맛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너무나 계산적이며 이기적일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절대적인 선행과 다른 사람들의 악행을 비교하여 스스로 승리감을 가집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선행에 대한 우월감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율법준수나 선행을 스스로 신뢰하거나 자랑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율법준수나 선행은 인간 자신의 행위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의 내용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여 주장하고 계신다는 것이며, 이로 인하여 선한 행위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율법준수나 선행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있으며 조금도 우리에게는 공로의 흔적이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거스틴의 간증고백을 들어봅시다.
“나는 내 손으로 행한 것을 칭찬하지 않겠습니다. 그 이유는 행여나 하나님이 나의 행위를 살피실 때 공로보다는 오히려 죄된 것이 더 드러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 바라는 것은 ‘내 손으로 행한 것을 경히 보지 마소서’라고 할 따름입니다. 내가 행한 것보다 내 속에서 당신의 행함을 보소서. 왜냐하면 당신이 내 행한 것을 보신다면 정죄할 것밖에는 보시게 된다면 거기에는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든 내 속에 선행이 있다고 하며 그것은 모두 당신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Augstinus, 「Psalms」시 137:8).
칼빈은 여기에 다음과 같은 해설을 붙입니다. 첫째, 그가 선행한 것이 무엇이라도 있다면 하나도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둘째 설사 선행했다 치더라도 무수한 죄의 무덤 속에 묻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로부터 양심이 행위를 보게 도리 때 확신보다는 도리어 더 두려움과 놀라움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자기가 한 선한 일을 전적으로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끝까지 이루어 주시기를 기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행은 축복의 근거도 아니며 그것은 다만 은혜를 주시는 원인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으나, 이것은 이해상의 문제입니다.
우리 구원의 효과적인 원인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고 실제적인 원인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에 있으며, 매개적인 원인은 성령의 조명, 즉 신앙에 있고 최종 목적 원인은 하나님의 크신 인애의 영향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긍휼에 의해서 영생의 기업을 주시기를 작정한 자들에게 보통 경륜에 따라 선행을 통해서 그것을 차지하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영생은 그리스도의 피공로로 얻는 것이며, 하늘나라의 상급은 우리의 선행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선행으로 영생을 인출한다고 하면, 그것은 모순이 될 것입니까? 이것은 선행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의롭게 하시고 그 다음에 영화롭게 하시기 위하여 은혜의 일종으로 선행을 수반케 하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의는 바로 믿음
만일 우리의 의가 행위로 인하여 이루어진다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 완전히 무너져야 할 것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주께서 주시는 믿음에만 의존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스슷로 오만하여 구원이 하나님께 있다 하면서도 순간적으로 자신 행위에 초점을 맞추려 합니다.
로마서 8:30, 32에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안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주어진 구원입니다.
의는 행위입니까? 믿음입니까? 이러한 물음에 역시 의는 믿음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어떤 행함으로 인한 공적에다 돌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구절로 마음이 기울어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함이 어떤 큰 가치를 인정받는다면, 그것을 가지고 행위로서 의가 인정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완전무결한 행위적 율법을 준수할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털끝 만한 죄책이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 행위를 통하여 의롭게 될 수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믿음의 행위가 필요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공로와 하나님의 인정
우리는 공로라는 이 말을 두고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자랑이라도 하듯이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공로를 그리스도의 심판에 관련하여 행위에 우선을 둔다면, 그러한 사람의 신앙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어거스딘은 「성도의 예정에 관하여」에서 “인간 공로는 아담을 통하여 멸절되었으니 잠잠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이 지배하도록 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자신들의 공로에 아무것도 돌리지 말고 오, 하나님! 모든 것을 당신의 긍휼에만 돌릴 것이나이다. 사람이 갖고 있다는 모든 선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 속에 찬미할 만한 것이 있다면 모두가 자기 자신의 공적으로부터 일어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긍휼로부터 온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거스틴의 말대로 선을 행할 능력뿐만 아니라 전적 타락한 인간으로서 선 그 자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행위 공로는 아무 가치 없는 쓰레기와 같은 것입니다.
이어 크리소스톰은 그의 「창세기 설교」에서 “우리의 행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값없이 받은 뒤에 따라 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답례요 빚이지만 하나님의 선물은 은총이요 자애요 커다란 관대일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버나드는 그의 설교에서 “공로에 관해서는 자부할 것도 없지만 만일 공로가 없다면 심판을 받기에 충분하다.” 고 했습니다.
나는 자신의 공로가 하나님 앞에 인정되지 않을 것이며, 곧 상급이 상실될 것이라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과 교회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공로나 자의식에 지배되는 기준을 둔 상급에 그 목적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확실한 이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로라고 하는 불안과 초조를 가진다는 것은 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이렇게 하기도 어렵지만 그 어느 한 부분을 행했다고 하여 그 자체가 공로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부인”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은 온데 간데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공로에다 마음을 집중한다면 빨리 그 마음을 비워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죄인이며 어느 부분도 하나님 앞에서는 불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들의 삶 속에서 한 부분도 주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이 반복하여 그 민족을 깨우쳤듯이 지금도 우리를 깨우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제각기 엉뚱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들어오면 모두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 자신들의 일에 분주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면서도 자신의 공로를 치켜 세우려 합니다.
선행은 하늘나라 상급의 조건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달란트 비유나 므나 비유를 생각할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의 대열에 포함되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전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이나 그리스도의 명령이 요구하는 것만큼 우리는 전혀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모든 것을 다 행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주님 앞에 무익한 종에 불과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가령 율법이나 명령의 완전 준수가 있을 수 없지만 완전한 준수를 했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무슨 공로가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대인 관계에서 세파에 시달려 때가 묻었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 말속에는 자신의 때묻음이 자신의 마음속으로부터 하수구에서 오염된 물이 흘러나오듯 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 의하여 때가 묻었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17:1-4에 있는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과연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한 적이 없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앞에 칭찬받을 만한 것이 있으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는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최선의 행위라 할지라도 하나님 심판대 앞에 소환당할 때는 인간의 수치와 부끄러움뿐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모독적인 야심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행함에 대한 보답인 것처럼 여김도 잘못된 것입니다.
간혹 히브리서 13:16을 들어 공로를 인정받겠다는 자들이 있습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라틴어 본문은 “인자와 구제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그와 같은 제물에 보답하신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의 구조가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말의 변조는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는 이유가 됩니다.
칼빈의 말을 빌리면 “그러한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용납되는 것이다.”란 의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규범을 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것은 우리의 선행이 언제나 많은 불순한 것으로 더럽혀져 있는 만큼 당연히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노하고, 또 분노를 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함은 상급을 받을 가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세뿐만 아니라 내세에서까지 한없는 은혜로 상급을 받게 되는 것, 곧 이 상급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나는 또 칼빈의 말을 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우리가 은혜를 받으며 은혜 위에 또 은혜를 쏟아 주시는 것을 행위라는 공로에 돌려 은혜로부터 떼내버리는 것은 성경 교훈에 반대되는 것이다.” 고 합니다.
값없이 주시는 선물을 아십니까?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 1:16)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다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는 말씀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제 6 장
종말의 문턱
요한계시록 20:1-10에 보면 천년왕국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각자가 견해를 달리하고 있는데, 그것은 문자적 해석이냐 상직적 해석이냐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녀동안 왕 노릇하리로다”도 해석의 방법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칭찬의 상급
지금까지 상급이 없다는 성격적 논리를 주장하여 해석해 왔습니다. 이제는 6장에서 확실하게 결론을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흔히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있다는 자들에게 어떤 상급이 있느냐고 물으면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꼭 면류관은 아니더라도 다른 뭔가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며, 몇 고을을 주시겠다는 지상적 땅의 개념 그대로를 표현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이들의 말처럼 뭔가를 주실 것이라는 의도는 없으며,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말씀으로 인간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기대가 가득 찬 것에 대하여도 침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상급에 대한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마25:25) 라는 말씀 말입니다. 면류관을 쓰겠다는 자들에게 주실 완벽한 상급은 그리스도의 구원, 영광, 의 등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들은 하늘나라의 모든 것임을 의미할 수 있는데,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공유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모든 것 외에 또 다른 사유를 원합니다.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자신의 것을 말입니다.
이런 심리적 현상은 현실 세계에서 자본주의의 특징인 사유 재산에 지배되어 왔기 때문에 하나르나라에서도 나의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칭찬은 언제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까? “착하고 충성된 종”이란 칭찬 말입니다.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영원한 하늘나라의 도래가 있기 전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우리는 그리스도의 칭찬과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는 보상적 언급의 시가와 영원한 하늘나라의 상급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위해 그리스도의 재림의 대하여 언급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경 여러 곳에서 이미 확실하게 가르쳐 주고 있으며, 이것은 당연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야 할 필연적인 문제입니다.
우선 재림 전의 큰 사건들을 보면, 첫째 하늘나라의 복음이 세계 만방에 전파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마 24:14, 막13:10, 롬11:25). 이것은 이 세상이 철저하게 복음화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며, 둘째로 이스라엘의 회개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로마서 11장에서 시간의 종말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대부분이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하여 전망하고 있으나 그것은 그 민족이나 국가적 옛 회복이 아니라 단지 전국민의 회개에 대해서만 가르치고 있습니다.(롬11:11-32). 그러면서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종말의 날에 이스라엘의 상당수가 주님께로 돌아올 것을 확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적그리스도의 출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높이며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무리들을 가르킵니다. 그리고 넷째는 표적과 이적과 기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 현상들을 보면 전쟁, 기근, 지진, 박해와 순교, 거짓 선지자의 출현, 하늘의 무서운 징조, 그리고 하늘 권세들이 진동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마24:29-30 막13:24-25 계21:25-26)
그 다음으로 재림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재림의 시기로서 주님이 언제 오시느냐가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는 천년왕국설의 다양한 주장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재림의 목적은 미래의 영원한 시대와 존재, 그리고 상태를 소개하시기 위하여 주님이 오실 것이며, 죽은 자의 부활과 최종 심판의 큰 사건을 계시하고 완수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재림과 천년왕국의 다양한 주장에 의하여 우리는 심판과 상급에 대한 확실한 윤곽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천년왕국과 부활
천년왕국에 대한 문제는 요한계시록 20:1-6에 있는 내용을 근거로 어떤 사람은 이것이 예수님의 재림 전이라 하며, 어떤 이는 재림 후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전혀 천년왕국이 없다고 하는데, 결국 이것들을 전천년설, 후천년설, 그리고 무천년설로 나누어 주장하고 있습니다.
먼저 전천년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의인을 죽음에서 일으키실 것이며, 유대인들을 회개시켜 그들로 하여금 성지 이스라엘로 복귀시키고, 유대 왕국을 재건시켜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이 천년동안 왕국을 통치할 것이라는 설입니다.
이 설의 유효 적절한 주장은 예수님의 재림시 다윗 왕국의 영광스런 재건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 계셨을 때 왕국의 건설을 꾀하셨으나 유대인이 회개할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것을 재림 때까지 연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셨는데, 결국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함께 불러모으신 교회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회개시키기에는 불충분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나타나셔서 긴 잠에 빠져 있는 성도들을 흔들어 깨우고 살아 있는 신자들을 가려내어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베풀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 땅에는 그동안 고난의 시기가 올 것이며 이스라엘이 회개하여 성지로 돌아올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고난의 시대가 종말에 접어들 때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의 백성들을 심판하실 것이며, 그때 양과 염소의 구별이 있고, 사탄이 천년동안 감금되어 적그리스도들은 파멸되고 고난의 시대에 죽은 신자들이 부활하여 천년왕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 왕국은 세계적인 주도권을 가진 유대인의 왕국으로 재건될 것이며, 그리스도와 그의 성도들은 예루살렘에서 다스리고 성전과 희생제사는 다시 회복도리 것이라는 설입니다.
천년왕국이 지난 다음 사탄과의 최후 결전이 있는 후에 영원한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 다음 불신자들의 부활과 흰 보좌 앞에서 그들에 대한 심판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교회는 하늘로 올라가고 이스라엘은 영원히 이 땅에 남게 된 다는 것입니다.
천년설에 대한 해석적 오류는 부당한 문자적 해석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과 신약성경은 영적해석을 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이 이론은 하나님의 왕국을 지상적인 미족적 왕국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이것은 영적이며 우주적인 것이며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이론은 천국이 현실적 실재라고 표현하고 있는 무천년왕국설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성경구절들과 모순되는 것들입니다.(마 11:12; 12:28, 눅17:21, 요18:36-37, 골1:13)
반면에 성경에는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을 동시적인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요5:28-29 행24:15). 이러한 의인의 부활이 마지막 날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6:39-54; 11:24), 이 이론은 의인의 부활을 악인의 부활에서 천년간이나 떼어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이론은 성경에서 3중의 부활과 4중의 심판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설은 영광을 누리게 된 성도와 육적인 죄인이 죄와 죽음이 아직도 만연되어 있는 이 세상에서 함께 살 수 있다는 문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해서 실패한 것입니다.
벌코프의 말을 빌리면, 요한계시록 20:1-6에서 잘못 발견한 것으로서 이 구절은 하늘의 광경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결코 유대인이나 지상적인 만족적 왕국 내지는 팔레스타인을 지시하고 있는 구절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러한 천년왕국설의 이론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의 논란이 있으나 여기에서는 어느 한 가지를 주장하자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급에 대한 성격과 가치성에 대한 논의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아 천년왕국설의 유무에 대한 문제를 재론한 것입니다.
천년왕국을 차후 지상세계에서 이루어질 것으로 확실하게 본다면,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할 자들의 내용을 생각해 볼 만할 것입니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배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하니... 그들이 하나님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계20:1-6).
여기의 왕 노릇이 과연 상급의 내용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결국 천년왕국설은 이 지상세계와 영원한 하늘나라와의 중간 기간에 있는 것으로 본다면, 역시 하늘나라의 상급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무천년왕국설자들의 주장대로 전혀 이 지상세계와 영원한 하늘나라의 중간 기간이 아닌 현실적으로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라면 더욱이 상급의 문제는 우리의 상상 밖의 문제로 돌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핸드릭슨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은 자들의 영이 현실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한다고 합니다.
최후 심판과 상급의 내용
최후 심판의 가장 극적인 장면은 요한계시록20:11-15입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는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리라."
이 말씀에서는 그리스도의 최후 심판에 있을 상급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미 본서 제5장에서 최종심판에 대하여 약간 언급했듯이 과연 심판의 핵심진리는 행한대로 보상과 보응하시는 행위보응의 가치성을 어디에 두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천년왕국설이 유효한다면, 세상 끝의 심판은 필연적으로 천년왕국의 과정을 겪고난 뒤에 올 것이며, 여기에 대한 복잡한 시간의 구조는 피하고 상급에 대한 문제가 우선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최후 심판은 요한계시록 20장에서 말한 대로 생명책과 행위책에 의하여 전자는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책이며, 후자는 행위에 따라 심판받는 멸망의 책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입장에서 구원받은 서도라 할지라도 행위에 대한 심판은 받아야 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3:11-15).
바울은 여기에서 은유법을 사용하여 “그날”이라는 최후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에 있을 두 가지 부류를 확실하게 한정 지워주고 있습니다. 한 분류는 금, 한 분류는 은, 그리고 보석이며, 한 부류는 나무, 풀, 그리고 짚입니다.
당시 고린도인들은 인간의 천사를 받으려는 야망이 강했으므로 이러한 바울의 말은 그들에게 정확한 판단의 기준을 일깨워줄 수 있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각자 자신의 사역에 성실해야 함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접합한 교훈이 될 것입니다.
결국 이런 두 가지 부류는 공력의 시험을 받을 터인데 그 시험의 표준은 불입니다. 이 불은 해석자에 따라 견해를 달리하는데, 어떤 이는 마지막 심판의 불 그 자체를 말하기도 하고, 칼빈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금, 은, 보석과 나무, 풀, 짚에 대하여 시험했을 때 전자는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나 후자는 소멸되고 말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심판은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천사에 기대를 걸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영접하는 것으로 만족을 누리는 것은 어리석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심판날에 (그때) 이후에 있을 것인데, 그것은 불에 의하여 그 공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15절의 말씀인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는 어떤 경우든 구원을 받되 상급은 영원히 보존되는 금, 은, 보석과 같은 행위로 인해 상을 받는다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여기의 ‘상’과 ‘해’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기초에 근거를 두지 않으면 그 해석이 오류와 모순에 빠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 성경의 전체적인 주제는 ‘건축자인 전도자’로 보아도 좋고, ‘건축자인 신앙자’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10절에 오직 터를 닦아 둘 자는 예수 그리스도시며 이 터 위에 다른 사람이 건축을 하는데, 각각 어떻게 세우든 조심할 것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특히, 14절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는다는 상과 벌의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으나 이미 5장에서 인간 공로나 공적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님을 언급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성경구절은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에 해당하는 시간적 의미 외에는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심판이 영원한 하늘나라에 이르기까지 연장되거나 그대로 적용된다면 지금까지 언급해 온 상급의 문제는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칼빈은 단지 부르이 시험을 통하여 공력이 그대로 있거나 불타버리고 없거나 간에 전자는 그 공력이 그리스도의 날을 잘 견딘 후에라야 칭찬과 상을 받을 것임을 말하며, 상에 대해서는 자신의 책「기독교 강요」를 참조하라고 합니다.
또한 칼빈은 자신의 행한 사역의 실패를 솔직히 인정하면서 또 금이 용광로에서 정련되 듯이 하나님의 자비가 그들을 정결케 하신다면, 더구나 하나님이 때때로 자신의 백성들을 고난으로 연단하시며, 불(성령)의 방법으로 백성들의 무지를 고치시고 제거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칼빈 역시 이런 것을 십자가로 생각하고 있으며 자신의 해석이 모든 건전한 판단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만족시키리라는 것을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심판의 날은 인간 공력의 결과에 따라 상과 벌을 받을 시기로서 그 상의 가치는 칭찬, 즉 달란트 비유나 므나 비유처럼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리라”는 것 외에는 생각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같은 의미로서 고린도후서 5:10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나는 역시 이 구절에 대하여 잘못된 해석을 하는 자들에게 반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우리가 나타날 때 행위 보상을 구원과는 관계없이 다루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위 말씀에서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에 따라 받는다는 구절로 볼 때 분명히 구원과 관계가 없다고 생각되지만 사실 그리스도의 완벽한 구원에 입각하지 않으면 우리의 행위가 주님 앞에 스스로 완벽한 선행을 한 것으로 인정받는 것이 됩니다.
이 부분에서도 역시 칼빈의 말을 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악한 행동에는 거기에 마땅한 처벌이 따르지만 선행의 보상에는 하나님이 그 행위의 가치나 공로를 참작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어떠한 행위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정도로 그 모든 면에 있어서 완벽하고 충분하지 못하며, 더욱이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자신의 행위로 기쁘시게 해드리는 유일한 길은 전체 율법을 다 만족시킴으로써 가능할 것인데, 이것은 어느 누구도 완전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유일한 대비책은, 하나님이 자신의 무상의 친절에 따라 우리를 용납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전가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를 의롭게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자신의 호의로 받아들인 다음,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행위를 은혜롭게 받아주심과 아울러 보상이 따를수도 있는 것은 바로 분에 넘치는 용납입니다.
따라서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선한 행위를 보상하신다는 말씀의 의미를 우리가 값없는 은혜로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이 부정되지 않는 것으로만 본다면, 여기에서는 전혀 모순이 없을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그리스도의 심판 때에 선악간에 행한 대로 받지만 그리스도의 구원에 근거한 것만으로도 우리는 기뻐하고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심판의 과정
어떤 이는 그리스도의 심판 때에 구원을 받았고 죄를 기억도 하지 않겠다는 약속에 의하여 선행만 기억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망각하실 능력도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 때에는 사실 그대로를 심판하실 것이며, 심지어는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은 마음의 생각까지도 보고 처리하실 것입니다.
이제 심판날의 판결에 대한 공포를 생각해 봅시다.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내용은 각 사람에게 신판의 언도를 두고 자신뿐만 아니라 공공연히 발표되어 적어도 모든 관계자들이 알게 될 것이라고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역시 1장에서 부득불 인식에 대한 논의를 했던 것처럼, 이것은 인식의 견해 차이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때 그리스도인의 심판은 인간의 인식 작용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 개체의 절대적 심판일 뿐 상대적 심판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에 그 심판의 표준을 두겠지만 결국에는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이 서로 관계되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시비와 억울함을 폭로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의와 은혜가 찬란히 빛날 것이라고 보지만 결코 수평적 심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거꾸로 뒤집어 말한다면, 상급도 상대적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평가로 끝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최후 심판의 과정에 대한 묘사를 진정 어느 차원까지 문자적으로 해석하며 이해해야 할지 매우 어렵습니다. 따라서 상징의 의미나 문자 의미의 올바른 판단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영원한 하늘나라
지금까지 천년왕국의 문제, 그리고 그리스도의 최후 심판과 상급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언급했습니다. 이제는 최종 정리로서 영원한 하늘나라의 상급에 대한 유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상급의 유무에 대한 내용은 그 반대편인 악인의 최후 상태를 말함으로 더 확연히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1)악인의 최후 상태는 영원한 형벌로서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악인의 처소: 악인이 갈 곳은 영원한 지옥이라는 것을 이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영원한 고통의 처소를 ‘게헨나’라고 합니다. 이것은 영원한 고통의 처소로서 상징되는 예루살렘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를 말합니다.
또한 마태복음 18:9에서는 지옥불로 말하고 있으며, 그 앞 절에는 영원한 불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풀무불(마13:42)과 불못(계 20:14-15), 옥(벧전 3: 19), 무저갱 (눅 8:31), 그리고 어두운 구덩이 (벧후 2:4) 등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모두 하나의 처소를 뜻하면서 하늘나라와 관련하여 그 위치를 바깥 어두운 곳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지옥은 차후 심판 다음에 오는 것으로 이 세상의 ‘불’을 그대로 옮겨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악인의 형벌에는 등급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 11: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 11:24)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눅 12:47-48)
이 구절들은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의 형벌을 다른 성들과 비교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악인의 형벌에 대한 등급을 의인이 받을 상의 등급에서처럼 공정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악인의 형벌에 등급이 있다면 분명히 의인의 상에는 등급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적절한 성경 해석상의 논평일 것입니다.
그 다음 의인의 최후 상태를 생각해 봅시다. 의인의 최후 상태를 두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내용은 비장한 우리의 신앙적 이해를 요구합니다.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새로운 창조일까, 아니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세상의 갱신일까 라는 점입니다.
특히 개혁파 신학자들은 시편 102:26-27을 인용하여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세상의 갱신으로 견해를 좁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내용을 살펴봅시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여기에서 해석의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절에서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두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라고 했기 때문에 여기에서도 해석의 같은 원리를 채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하늘도 손으로 만드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인간이 창작할 때에 손을 사용한다는 것을 그대로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옷은 입으면 낡아서 다시 의복을 바꾸어 입을 수 있는 것처럼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천지의 갱신이 아닙니다. 이것 역시 앞 뒤 문맥을 보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영원성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2:27-28을 보면,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심이라”고 했는데, 이것도 전혀 천지의 갱신이랄 수 없는 내용입니다.
혹자는 현존 만유 갱신설을 주장하여 창조는 완성을 예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실패는 있을 수 없으며, 구속은 중생을 예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속과 회복을 받아 완성을 볼 것이고, 세상이 새롭게 되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지구가 멸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부활은 회복을 예상하므로 그리스도의 신체적 부활은 교회를 인도하여 육체의 부활을 긍정하게 하였음으로 신체의 부활과 신천지는 유추로 서로 연결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것을 재창조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의 면목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또 용해는 변형이라고 하는데, 베드로후서 3:10에서 그 내용을 결정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의 형태이며 새 하늘고 새 땅과는 전혀 관계 없는 내용입니다. 또한 제한된 범위의 변화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어떤 경우라도 이것은 표현상의 문제일 뿐 전혀 다른 새로운 현상계가 전개도리 것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을 다른 말로 표현하여 ‘새로운 질서’라는 함축 용어를 통하여 매듭짓고자 합니다.
그래서 새 하늘고 새 땅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차원과는 당리 전혀 다른 새로운 질서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상급의 등차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옥은 이원론으로서 형벌의 등차가 있으나 하늘나라는 일원론으로서 모두가 기쁨 가운데 사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제 7 장
상급이 없다면 신앙의 소망과 목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드리는 권면과 위로
7
하늘나라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차서 인간의 공로나 공력은 그 영광에 묻히고 말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은 현실의 지상적 문제임과 동시에 영원한 하늘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상급이 없다고 염려하는 신자들에게 권면과 위로를 드립니다.
권면과 위로
결론을 내리면서 상급을 기대했던 성도들에게 권면과 위로를 드립니다. 혹시 여러분은 깊은 밤 어딘가 알 수 없는 미로의 골짜기를 밤새 걸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조금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때가 되면 아침의 밝은 태양이 모든 어두움을 몰아내고 미로의 골짜기로부터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하늘나라의 상급과 무상급에 대한 어두운 골짜기를 헤맨 것 같습니다만 이젠 지난밤 미로의 경험이 소망의 세계로 전환될 것입니다.
6장까지의 긴 내용은 완벽한 무상급론의 완결점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거의 우리의 인식 범위에서 이해가 될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하늘나라와 우리의 상급은 거의 각자의 인식에 따라 견해를 달라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인본주의의 야망과 요구로는 전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뒤집어 놓을 수 없을 것이므로 하늘나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합니다.
인식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어느 모임에서 나는 철학교수에게 인식론에 대하여 질문을 했습니다.
“나는 철학 가운데 인식론에 대하여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하여 그가 확실한 답변을 하지 못함을 보고 나는 아쉬워했습니다. 인식론을 다른 말로 바꾸면 기독교 안에서는 영성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성이란 하나님의 성령이 각자의 심령에 들어가는 형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해석의 정당한 법칙을 경과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의미도 줄 수 없습니다. 흔히 우리는 하늘나라를 우리가 생각하는 지상적 개념으로 추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절대로 많다와 적다, 크다와 작다, 길다와 짧다 등으로 비교될 수 없는 곳입니다.
또한 하늘나라는 개개인의 관계에서 대립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정말 하늘나라에서 대립이나 차별이 있다면 진정한 하늘나라가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용어를 빌린다면, 이원론 또는 다원론에 입각한 하늘나라는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이제 하늘나라의 영광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칼빈은 하늘나라의 상급이나 공로에 대하여 우리 인간에게는 전혀 자격이 없음을 말하면서도 그 영광은 각자가 다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마저도 부당한 말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의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영광을 계시하는 분이십니다. 이 영광은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 모세를 통하여 이 산에 회집을 시켰습니다. 그때 산 꼭대기에는 구름으로 덮였습니다. 성경의 구름이나 무지개 등은 자연 조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육일 동안 산을 가리더니 제 칠일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출 24:16).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현시안적인 계시적 표현은 구름을 통한 영광이었습니다. 영광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카보트’이며 문자적인 의미는 ‘무겁다’, 즉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으로 표현되어 무겁게 드리워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시내산에서 그의 백성들에게 알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또 가나안 땅을 향해가는 백성들이 광야에 통과할 때 영광의 구름이 성막과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시온산 위에 솔로몬의 성전이 봉헌되던 날에도 이 구름이 나타났습니다.
역대하 5:13-14을 보면 “그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 속에 그 백성들은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영적 임재를 통하여 자신의 영광을 계속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광이 머무는 곳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드리워진 영광의 본질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할 수 없습니다. 또 소유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합니다. ‘돌린다’는 이 말 속에는 기본 전치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광으로 나타내어 주시면 곧 그것을 되돌려 드린다는 말입니다.
하늘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리도전서 15:41의 말씀처럼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라고 하여 영광이 우리의 전유물적인 의미를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의존하여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며, 바로 그곳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공유하는 기쁨의 곳입니다.
하늘나라에서 과연 상을 받을 것입니까? 스스로를 돌이켜보십시오. 하늘나라에서 면류관을 쓸 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착용하고 있는 옷이나 구두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늘나라는 토탈 패션가게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상이 없어 염려합니까? 전혀 염려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러한 염려가 하늘나라에까지 그대로 옮겨진다면 하늘나라로서의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는 그렇게 유치한 상 때문에 존재하는 곳이 아닙니다.
마지막 권면과 위로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상을 받기 위해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신앙이 선행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누가복음 17:7-10에서 종에 대한 겸손을 교훈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고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고서도 종으로서 의무를 준행했을 뿐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함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은 현재 우리들의 신분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양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 또는 통치를 경험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겸손이 공로가 되어서가 아니라 단지 그러한 하늘나라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것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울의 서신에 나타나 있는 사역적 용어로 우리도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로마서 8장이나 갈라디아서 4장에는 아들의 명분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하나님 앞에 종이 되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까?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과연 여러분은 딜레마에 빠질 필요가 있을까요? 이 두 가지 신분 가운데 하나를 택할 이유가 있다면 당연히 아들의 신분을 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14-17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종의 내용이 어떻든 간에 아들에 대한 신분은 아버지의 후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의 신분을 주셨습니다. 하늘나라의 모든 영광과 기쁨을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릴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종은 종으로서의 사역적 내용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아무리 수고를 해도 종에게는 돌아올 분깃이 없고 다만 주인이 허락했을 때만 부분적으로 차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갈라디아서 4:4-7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도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후사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했는데, 이것은 율법과 그리스도를 두고 율법 아래에서는 종이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되었음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떤 내용의 종이든 종은 어디까지나 종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하늘나라의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 하여금 공유하도록 하셨습니다. 어느 부분도 따로 남겨 두시거나 아니면 부족한 것이 있어 미래를 위하여 비축도 할 필요가 없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주셨습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종이었지만 그리스도로 하여금 아들의 신분을 얻었는데도 다시 종의 신분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이것은 사역적 면을 고려하지 아니한 표현입니다.
하늘나라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좋고 더 많은 상을 받겠다는 것은 죄악의 본질에서 생산되는 열매입니다. 이러한 지상적 개념이 하늘나라에까지 그대로 적용된다면 영원한 하늘나라도 별수없이 죄악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상급이나 상급의 등차를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같이 생각되지만 진정 지혜로운 하늘나라의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하는 아들의 신분임을 깊이 생각하고 감사드려야 할 것입니다.
보상과 은혜
나는 이제 레드 (G.E.Ladd)의 말을 빌려 ‘보상과 은혜’라는 제목으로 보완하려 합니다.
예수님의 교훈들 중에서 여러 구절들이 하나님 나라의 축복은 보상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사상은 공적과 보상의 교리를 상당히 중요시하였고, 어떤 면으로는 이것이 예수님의 교훈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인 듯합니다. 장차 핍박에 대한 상과 (마 5:12), 원수사랑에 대한 상 (마 5:46), 순전한 마음으로 구제한 상 (마 6:4), 그리고 금식에 대한 상 (마 6:18) 등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주인과 품꾼 또는 종의 관계입니다. (마 20:1-16; 24:45-51; 25:14-30)
상은 때때로 행한 대로 엄격하게 시행되는 것 같고 (마 5:7; 10:32, 41이하; 25:29), 보상도 때때로 의무를 수행한 정도에 따라서 약속되며 (마 5:19; 18:1-4, 막 9:41, 눅 19:17, 19), 벌도 이와 마찬가지로 측정됩니다 (마 10:15; 11:22, 24, 눅 12:49 이하).
이와 같은 구절들 속에서 예수님의 교훈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공적 개념과 밀착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유대적인 개념에 의하면, 상은 양적으로 지불되는 보수였습니다.
그러나 보상에 관한 교훈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밝혀주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상에 대하여 언급하셨지만 공적의 윤리를 주장한 적은 없습니다. 신실함은 상 받을 것을 생각하고 실천되어서는 안됩니다. 상 자체는 전적으로 은혜에 속합니다. 상에 대하여 언급된 비유들은 결국 모든 상이 은혜의 문제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많은 신실성을 실천하였을지라도, 그는 아무것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의무를 행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눅 17:7-10). 일한 결과와는 상관없이 신실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상도 있습니다 (마 25:21, 23). 그 보상은 하나님의 나라 자체입니다 (마 5:3, 10).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예비한 자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마 20:23; 25:34). 심지어 봉사할 수 있는 기회까지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마 25:14 이하).
따라서 상은 공적과 관계없이 자유롭게 주어지는 은혜이기 때문에, 봉사의 정도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마 19:29; 24:47; 25:21, 23, 눅 7:48; 12:37).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 갈구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눅 12:31).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변호에 의한 것이지 인간의 경건한 행위 때문이 아닙니다 (눅 18:9-14).
관대한 이 은헤의 선물은 소경, 앉은뱅이, 문둥이, 귀머거리를 고치시고 죽은자를 살리시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 하는 일에 의하여 예시됩니다 (마 11:5). 포도원에서 일하는 품꾼들도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받아야 할 품삯입니다.
이러한 교훈과 관련하여 볼 때, 우리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교훈에 순종한 대가로 주어지는 보상이라고 결론지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인 선물일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내 맡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현재적인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로서 주어질 것입니다.
부록
하늘 나라 상급에 대한 설문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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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 상급에 대한 설문 조사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있다는 주장은 어느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목회자 3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의 결과입니다. 불충분한 통계학의 모순을 제거하기 위해 가능한 설문 조사 내용을 가장 적절한 순서대로 나열했습니다.
이 설문은 모두 18문항으로 구성되었으며, 전국 각 지역에서 모인 목회자들의 어느 모임에서 즉시 이루어진 설문 통계이므로 정확하리라 확신하며, 편견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100분율을 기준으로 하여 10%이하는 편의상 반올림하여 처리했습니다.
제 1문항
문 : 하늘나라에 상급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 여기에 대한 답변은 100%가 ‘있다’로 답했습니다. 제 1문항의 ‘있다’라는 대답은 제 10문항과 제 11문항에서 모순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제 10문항과 제 11문항에서 다시 한번 검토하겠습니다.
제 2문항
문 : 상급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누구로부터 그 사실을 들었습니까?
답 : 이 문항의 대답에서 50%는 목회자로부터이며, ‘스스로’가 40%, 그리고 무응답이 10% 였습니다.
제 3문항
문 :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구체적으로 무슨 상급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 이 문항은 응답자들의 주관적 대답이었으므로 소위 5대 ‘면류관’이 50%였으며, 그 다음 ‘믿음에 대한 행실’이라는 대답이 10%, ‘성경대로’가 10%, 그리고 무응답이 10%였습니다. 이러한 대답 중 ‘면류관’이나 ‘믿음에 대한 행실’은 흔히 교회 안에 아무런 신학적 배경이 없는 통례적인 해석의 인식으로 생각됩니다.
‘면류관’을 하늘나라 상급의 통칭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제 6문항인 ‘면류관을 쓴다면 옷을 입거나 구두도 신는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문항에서 ‘그렇지 않다’는 응답자가 50%, ‘그렇다’가 40%, 그리고 무응답자가 10%로서 다소 장난스런 질문이지만 확신이 없는 대답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또 ‘면류관’은 쓴다고 하면서도 ‘그렇지 않다’라는 대답도 모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 4문항
문 : 상급에 대한 말씀이 성경에 나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 이 문항의 대답은 ‘있다’가 90%, 무응답자가 10%였습니다.
제 5문항
문 : 하늘나라에서 면류관을 쓴다면 어떤 면류관을 쓰고 싶습니까?
답 : 이 문항은 하늘나라의 상급 중 최대 최고의 상급으로 5대 면류관(생명, 의, 영광, 자랑, 썩지 않는)에 100% 대답을 했습니다.
제 6문항
문 : 면류관을 쓴다면 옷을 입거나 구두도 신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 이 문항은 제 3문항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제 7문항
문 : 살아가면서 불평등한 현실 때문에 고민한 적이 있습니까?
답 : 이 문항은 ‘있다’가 80%, ‘없다’가 20%였습니다. 이 문항의 의도는 현실 세상에서도 불평등하다면 많은 갈등과 어려움으로 하늘나라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이 주어지는데, 이것은 제 10문항과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 8문항
문 : 불평등한 현실 때문에 고민한 적이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답 : 이 문항은 ‘정치나 사회구조’가 80%였고, 무응답이 20%였습니다.
제 9문항
문 : 이러한 불평등이 현실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 이 문항은 ‘없다’가 50%, 그리고 ‘어느 정도 있을 수 있다’가 50%로 현실적으로는 불평등의 요소가 제거되기 어렵거나 좀더 평등의 사회가 될 수 있다는 심리적 바람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 8, 9문항은 결국 제 10문항을 의도로 했기 때문에 다음 문항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제 10문항
문 : 만일 하늘나라에도 불평등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답 : 이 문항은 ‘있을 수 없다’가 60%이며, ‘별 상관없다’가 40%였습니다. 그렇다면 제 1문항에서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에서 100% ‘상급이 있다’고 한 것에 대한 모순된 대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상급이 있다면 개인마다 등차가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지상적 인식에서 상급이 많은 자와 적은 자 사이에 시비와 갈등이 생길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또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은 신학적 해석을 근거로 한 답변이 아닌 모순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제 11문항
문 : 자신은 관연 하늘나라에서 상을 받을 만한 공로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 이 문항은 ‘있다’가 40%, ‘없다’가 50%, 그리고 ‘잘 모르겠다’가 105였습니다. 우선 하늘나라에서 상을 받을 만한 공로가 ‘있다’라고 응답한 40%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공로로 구원을 받았다는 구원의 문제 외에 또 다른 자신의 공로를 세울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 하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럴듯한데, 그것은 자신은 공로를 내세울 수 없지만 우리의 행위 속에 하나님 나름대로의 공로의 판단 기준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혀 없다’는 50%의 응답자는 제 1문항의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내용과 상반된 대답을 함으로 설문 내용의 응답에 대한 일관성이 없다는 데서 많은 목회자들의 성경관과 신학관이 정립되지 못했음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제 12문항
문 : 하늘나라에서 상이 없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답 : 이 문항에서 ‘실망한다’가 10%, ‘실망하지 않는다’가 10%, 그리고 ‘상관없다’가 80% 였습니다.
제 14문항
문 : 상이 있다면 언제 받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 이 문항의 응답은 ‘영원한 하늘나라’가 90%, 그리고 ‘최후의 심판 때’가 10%였습니다. 이러한 응답은 ‘최후 심판때’와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한 확실한 시간적 구분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구원과 상급이 심리적으로 더 지배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 15문항
문 : 당신은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아들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답 : 이 문항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겠다는 것이 100%였습니다. 심리적으로 유도한다는 입장에서 1. 종, 2. 하나님의 아들, 3. 잘 모르겠다 라고 했는데 모두 2번에 응답했습니다. 이 문항은 제 10문항을 보면 더 확실해 질 것입니다.
제 16문항
문 :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과연 상을 원하겠습니까? 아니면 아버지의 후사가 되어 하늘나라에서 상속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답 : 이 문항은 응답자가 100%가 아들로서 상속을 원했습니다.
제 17문항
문 : 상속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합니까?
답 : 이 문항 역시 응답자의 100%가 상속 외에 ‘필요 없다’라고 대답함으로 상급의 유무에 대한 상반된 모순을 나타내며, 제 15, 16, 17 문항에서 하늘나라에서는 우리의 공로나 상급이 없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상속을 받는데, 사유가 아닌 공유의 의미가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제 18문항
문 : 하늘나라에서 개인 소유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 이 문항에서 ‘가능하다’가 30%, ‘불가능하다’가 70%였습니다.
대체적으로 위의 18문항에서 대답한 내용을 보면 하늘나라와 상급에 대한 신학적인 재해석이 요구되며, 응답자들의 일관성이 없는 상급의 이해는 우리의 모두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가능하다면,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있다 또는 ’없다‘라는 상반된 성격 해석에 따른 공개 강좌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