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과 네델란드 개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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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과 네델란드 개혁교회


[종교개혁주간에 다시 생각하는 칼빈] 종교개혁주간에 다시 생각하는 칼빈
말씀 기초한 철저한 절제로 개혁의 공감 얻어

기독교 역사에서 바울을 제외하고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이다. 그는 당대 사람들에게 존경과 찬사를 받았던 최대의 지성인이요, 기라성같은 가톨릭 신학자들을 무너뜨린 최고의 신학자요, 제네바에 개혁의 바람을 일으킨 뛰어난 개혁자요, 영혼을 뜨겁게 사랑한 참된 목회자요, 성경을 바로 주석하여 삶에 옮긴 실천적인 주석가요, 삶 전체로 메시지를 증거한 살아있는 설교자였다. 그래서 프랑수아 방델(F.Wendel)은 그를 일러 “한 사람의 사상가를 훨씬 뛰어넘는 인류의 지도자”라 했다.

종교개혁 주간을 맞아 칼빈을 생각하며 숙연함을 감출 길이 없다. 개혁의 후예임을 자처하면서도 우리는 그의 목회와 신학 및 삶과 사상의 주변을 맴돌 뿐 어떤 빛도 드러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드러낸 태양같이 찬란한 빛에 비하면 우리는 희미한 반딧불을 깜박거리고 있는 듯하다. 더욱이 실종된 목회 능력, 생명력을 상실한 신학, 세속화된 삶, 그리고 변질된 사상 등이 오늘의 교회 현실들이다.

다시 교회가 강력한 빛을 발하고, 그 본질을 회복하여 세상을 선도해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칼빈이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개혁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참된 개혁의 방향성을 찾아본다.

흔히 역사가들은 칼빈의 개혁은 시대가 만들어 준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혹자는 그의 천재적인 학문성에 공을 돌리기도 한다. 하지만 칼빈이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개혁의 원동력은 그가 평생 동안 쌓았던 경건성이었다. 칼빈의 위대성은 학문적 업적보다는 경건한 삶에 있었다. 칼빈의 저술 의도는 기독교인들에게 경건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삶 역시 저술들의 이론을 실천한 경건의 삶이었다. 매일 성경을 연구하고, 금식과 묵상으로 일관하면서 경건을 추구해 나갔다. 오직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몸을 돌보지 않고 절제된 삶으로 일관했다. 자신을 위해서는 어떤 시간이나 물질도 허비하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았다.

그는 극심한 가난이나 헤아릴 수 없는 질병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절제와 금식으로 자기를 훈련하는 기회로 삼았다.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고 할 정도로 코감기, 천식, 소화불량, 두통, 관절염, 궤양성 치질, 결석, 악성 폐렴, 늑막염 등으로 고통을 받은 그였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루에 여덟 번씩 드렸던 기도생활, 말씀 연구에 파묻힌 경건 생활을 이어갔다. 그렇게 탁월한 경건한 삶이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끼쳐 개혁을 성공으로 이끈 주요인이 된 것이다.

칼빈의 뛰어난 경건 생활의 기초는 말씀에 있었다. 그의 사상도 철저하게 말씀에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그의 ‘기독교 강요’는 성경을 농축한 신학 대계이다. 그는 탁월한 통찰력과 지력으로 성경에서 정수를 뽑아내어 작품을 만들어냈다. 당시에 금지되었던 성경 원러를 비밀리에 습득하여 자유자재로 인용했다. 칼빈은 그렇지만 성경을 단지 인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일생 동안 성경을 한 절 한 절 강해하면서 성경 사랑의 정신을 보여 주었다. 그렇게 사랑했던 성경이 삶의 뿌리가 되었다. 그가 매일 실천에 옮겼던 삶의 거룩성은 일생 동안 추구했던 경건의 열매였다.

칼빈의 경건 생활은 밤낮으로 영혼을 사랑하고 돌보는 목자의 삶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이른바, 야고보가 제시해준 참된 경건(약1:27)의 실천이 목양의 현장에 잘 드러났다. 그는 자기의 몸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을 위로했다. 심지어 흑사병이 유행할 때조차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새벽까지 병자들을 찾아가 격려했다. 제네바에 몰려온 난민들과 가난한 사람들과 고아와 과부들까지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제네바와 스트라스부르그 사람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쏟아 부은 참 목자였다. 칼빈 시대에 제네바에서 목회했던 콜라동(Colladon)은 이렇게 증언했다. “칼빈은 자기 몸을 사르지 않았으며 건강의 상태를 돌보지 않고 힘에 지나도록 일하였다. 그는 격주로 매일 설교하였고, 매주 세 번 신학 강의를 하였다.” 그렇게 뜨거운 영혼 사랑의 목양이 가톨릭의 전통에 물들어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개혁에 공감을 얻게 된 것이다.

이렇듯 개혁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던 칼빈의 가장 큰 원동력은 그의 경건 생활에 있었다. 경건을 실천한 삶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개혁에 성공한 것이었다. 오늘의 교회는 칼빈의 경건으로 돌아가야 한다. 삶의 거룩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경건을 삶의 모든 분야에 드러내서 빛을 드러내야 한다. 그런 삶의 경건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교회 개혁의 출발선이요, 현대 그리스도인이 나아갈 길이다.

송삼용 목사 기자 등록일 2004-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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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주간에 다시 생각하는 칼빈] 신학 목적은 “바른 삶 적용”
하나님 중심 사상에 집중…목회적 관심 잊지않아

정말 한국의 가을은 아름답다! 한국의 가을만큼은 스위스나 캐나다의 단풍과도 바꿀 마음이 없다. 거기다 종교개혁 기념주간까지 이 화려한 가을에 함께 있으니 감사한 마음이 가득하다. 오늘 우리는 단풍 든 나무 사이를, 찬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 위를 조심스럽게 거닐면서, 487년 전 저 유럽의 독일과 스위스에서 참으로 장엄하게 개혁을 외친 이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깊은 영성과 비전을 나눌 수 있으니 감개무량하다. 그러면서도 착잡한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종교개혁의 후예들, 한국의 기독교를 바라볼 때 ‘통곡의 기도회’를 드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황금의 신에 정신을 잃어버린 교회 지도자들, 경영부실로 인하여 부도에 허덕이는 교단들, 끝없이 핵 분열하듯 갈라지기만 하는 독한 이혼병에 걸린 교회와 교단들, 주님이 그토록 경계하던 물거품 같은 명예욕의 덫에 걸려든 세속화에 앞장서고 있는 사람 사람들, 한 마디로 돈과 명예, 세속화와 지역주의의 올무에 걸려서 헤어나지 못하는 한국 교회는 우리의 비극이요, 슬픔이 아닐 수 없다. 분명 21세기 우리 한국 교회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거대한 과업이 있건 만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487년 전 독일의 종교개혁자 루터는 당시 영적으로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는 중세교회를 향하여 진정으로 자유할 것을 호소했다. 무엇이 진정한 기독교인의 자유인가를 외쳤던 것이다. 다름 아닌 1520년 11월 세상에 나온 루터의 명저 ‘기독교인의 자유’였다. 여기서 루터는 두 가지 자유를 외친다. 첫째는 죄로부터의 자유이며, 둘째는 사랑에 의한 섬김의 자유, 기꺼이 종이 되는 자유였다. 우리 한국 교회도 아름다운 축복의 계절, 결실의 가을에 알찬 열매를 주께 드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 우리는 가라앉은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우리의 신학의 근원을 이루었던 깔뱅을 한 동안이라도 묵상하길 원한다. 근원을 돌이켜 볼 때 우리가 어디에 있어야 하며,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여 참으로 무겁게 짓눌러오는 21세기의 숙제를 교회는 침착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늘 원전으로, 처음 사랑으로 돌아갈 것을 외쳤다. 곧 성경으로, 하나님께로, 교회의 본질로 돌아가는 일이다! 번잡스러운 생활을 내려놓고 계시의존묵상을 이제 시작해야 하겠다.

오늘 신학자들은 칼빈의 신학이 어떻게 교인들의 실생활에로 파고들 것인가에 대하여서는 별 관심을 갖지 않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칼빈은 신학의 내용과 아울러 실생활에로의 적용을 위한 전달에 큰 목회적 관심을 늘 잊지 않았다. 교리문답의 형식을 갖고 있는 ‘기독교강요’도 사실은 일반 성도들에게 어떻게 종교개혁 교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춘 책이며, 변증보다는 프랑스 교인들을 가르치기 위한 목회적 목적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쓴 칼빈의 의도는 학자들의 칭찬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제네바 시민에게 기독교의 신앙내용을 간결하고 명료하게 말하려는 것이었다.

제네바의 동역자 파렐의 권고에 따라, 1년 후 제네바에서 직접 자신의 ‘기독교 강요’ 초판(1536)을 요약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 만큼 현장의 교회를 사랑하고 아끼는 목자로서의 균형을 잃지 않았던 큰 신학자 칼빈을 만나게 된다. 그의 1537년 판 ‘기독교강요 요약’을 눈여겨보면, 우리는 참으로 이 책이 칼빈이 추구하였던 그대로 단순, 평이, 명료한 내용으로 가득한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겨냥한 실제적인 내용임을 우선 확인하게 된다. 이 책 제1장에서 칼빈은 인간의 존재 목적을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그리고 그분을 경외하는 것으로 강조한다. 신학자의 진정한 경건이 무엇인지를 위엄 있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칼빈 신학의 요점은 한 마디로 하나님 중심 사상이다. 하나님 중심 사상이란 이 말의 뜻을 헨리 미터의 말을 빌려 설명을 부친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고조하는 신자가 있다면, 그는 칼빈주의자이다. 가는 데마다 그의 시종일관한 사상은 하나님이다. 이 사상은 칼빈주의 신학의 전체를 착색하는 황금 실이다. 만사가 하나님에게 달렸다. 종교는 인간을 축복하는 것일지라도 인간을 위하여 있지 않고, 결국은 하나님을 위하여 있다.”

루터가 심오한 내적 경험에서 은혜와 믿음으로 그리고 구원자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갔다면,칼빈은 무엇보다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아는 일에 집중하고 여기서부터 그의 모든 신학행위를 시작했다. 진정으로 칼빈주의 신학을 따르는 이라면 이러한 칼빈의 추구가 자신의 신학을 포함한 전반적 생의 추구와 어떤 상관성이 있는지를 깊게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주도홍 교수 기자 등록일 2004-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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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487주년 특집-개혁 교회의 큰 샘, 네덜란드 - ?개혁신학 세계화의 견인차 - 캄펜 신학대학교
성경 향한 불같은 ‘열정의 150년’ 칼빈주의 실천적 견인차…개혁신학 국제화 목표, 인재양성 진력

종교개혁이후 17세기와 18세기를 지난 네덜란드 사회는,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1795년에 프랑스 군대가 네덜란드에 입성한 후, 1810년에는 프랑스에 완전히 합병되고 말았다. 당시 네덜란드에는 사회적 불안정과 분열, 그리고 세속주의가 풍미하게 되었다. 1813년에 네덜란드 왕실이 옹립되면서 새로 형성된 왕실 개혁교회는 권위주의화 되어갔으며, 신학도 교회 현장과 상관없이 세속화 및 사변화 되어갔다.

그러자 헨드릭 더 콕을 중심으로 종교개혁의 정신과 도르트신조의 신앙고백으로 돌아가자는 개혁 운동이 경건 운동과 더불어 일어나는데, 이것이 바로 캄펜신학대학교 출현의 직접적 원인이 된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일단의 개혁교회들이 1834년에 네덜란드 왕실 개혁교회와 결별하게 되는 ‘압스케이딩’(분열: Afscheiding)이 발생한다. 그것은 네덜란드의 전통적인 영성이었던 삶 속에서의 경건을 회복하고, 신학과 교회 사이에 다리를 놓고자 하는 교회와 신학 개혁에 대한 열망이 당시 네덜란드의 사회적 경제적 배경 속에서 열매 맺은 것이었다. 이 ‘압스케이딩’의 교회 개혁 운동은 1854년 12월 6일에 캄펜에 신학교를 세움으로, 학문성과 실천성을 겸비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캄펜신학대학교의 공식적인 출발이 되는 것이다. 이 교회 운동은 1869년에 총회를 열어 기독개혁교회(Christelijke Gereformerde Kerken)라 지칭했다.

한편, 1880년에 영역주권을 주창하면서,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자유대학교’(de Vrije Universiteit)를 세운 아브라함 카이퍼를 따르는 일단의 교회들이 1886년에 네덜란드 국교회를 떠나게 되며 이를 ‘돌레앙찌’(슬픔: Doleantie)라고 한다. 압스케이딩의 교회 가운데 기독개혁교회에 잔류할 것을 고수하는 일단의 교회들을 제외한 대다수 교회들과 돌레앙찌의 교회들이 연합하여, 1892년에 네덜란드개혁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를 형성하게 되며, 이때부터 캄펜신학대학교와 자유대학교는 형제 대학의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이 네달란드개혁교회 안에서 십분의 일에 해당하는 교회들이 1944년에서 1945년에 신학적, 정치적 이유로 분리해 나가 31조파 혹은 프레이허마크트(Vrijgemaakt)교회를 세웠으며, 같은 캄펜에 신학대학교를 수립하게 되었는데, 주로 한국의 고신 교단과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캄펜엔 현재 두 개의 신학대학교가 존재하고 있으며, 필자의 글은 주로 한국의 합동 교단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본래의 캄펜 신학대학교에 관한 것이다. 바로 이 캄펜신학대학교에서 개혁교회 교의학(Gereformeerde Dogmatik)의 저자이자 위대한 개혁주의 조직신학자인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가 1883년부터 1902년까지 거의 20년을 교수로 역임했으며, 개혁주의 성경신학의 거봉인 헤르만 리델보스(Herman Ridderbos) 교수가 평생을 사역했다.

2004년 5월에 네덜란드에서 가장 큰 두 개의 개혁교회들이 170년 만에 공식적으로 연합하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했다. 이 두 개혁교회의 교단은 캄펜 신학대학교가 속해있던 네달란드개혁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와, 네덜란드의 왕실이 속해 있던 네덜란드개혁교회(Nederlands Hervormde Kerk)이다. 여기에 극소수의 소규모 네덜란드 복음주의 루터교회가 합세해서, 네덜란드개혁교회(Protestant Churches in the Netherlands)가 새롭게 창립된 것이다. 캄펜신학대학교는 교회의 신학교라는 그 역사적 전통을 그대로 이어 여전히 이 네덜란드개혁교회(PCN)의 신학교로서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

그러므로 캄펜신학대학교는, 네덜란드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멀리 보면, 이미 14세기부터 시작된 교회 내 교회개혁운동과 16세기 칼빈의 종교개혁과 17세기 칼빈주의 운동을 그 원점으로 삼으면서, 직접적으로는 19세기와 20세기 전반기의 세속화, 사변화와 권위주위화에 맞선 교회 및 신학개혁과 사회개혁운동, 그리고 21세기의 교회 연합운동의 역사를 담지하고 있는 수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네덜란드 개혁주의는, 칼빈주의 사상과 삶의 뿌리요 그 실천적 전파의 견인차 역할을 해 왔다. 네덜란드 개혁교회를 통해서 스코틀랜드 등 영국과, 미국, 캐나다, 호주, 헝가리, 루마니아의 트랜실베니아지역, 남아공은 물론이고, 인도네시아와 수리남 등에까지 이 개혁교회의 신학이 전해졌다. 물론 그 개혁신학이 한국 칼빈주의와 한국 개혁교회에 미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캄펜신학대학교 150주년 학술회의 자료집의 서문이 잘 말해 주듯이, 이 대학교는 신학적 학문 세계와 교회 현장에 필요한 세계적인 인재를 양성해온 사역에 매우 큰 긍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네덜란드는 물론 프랑스와 독일의 대학에서도 수준 높은 교수들을 영입하여, 개혁교회의 신학교로서 교회에 방향을 제시하는 개혁신학과, 그 개혁신학의 세계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 단적인 예로 이번 개교 150주년 개념 학회를 위해서 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수여받은 전 세계의 모든 졸업생 개혁 신학자들을 항공료와 체재비 일체를 지원하여 이번 학회에 초청한 일이다.

개혁신학의 국제화라는 것은 다시 표현하자면, 각 민족과 사회 공동체에 개혁신학과 복음의 정신에 입각한 신학자, 기독교 지도자를 세운다는 것인데, 이런 정신에 입각해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우리만큼 매우 준비된 장학 제도를 통해서 동유럽과 아시아와 남미와 아프리카의 우수한 신학도들을 초청해서 신학을 공부하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과 함께 남아공 기독교 운동을 이끌었던 알란 부삭(Alan A. Boesak)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캄펜신학대학교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던 경우였다.

한국의 적지 않은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이 대학에 유학하여, 칼빈의 종교개혁 사상에 근거한 개혁주의 신학을 연구한 후에, 한국의 칼빈주의적 신학대학과 장로교회의 목회 현장에서 한국 개혁신학의 확립을 위해서 학문적 노력을 쉬지 않고 있다.

150주년 컨퍼런스를 기념해서 출간한 책인 ‘종교개혁의 열정’(Passion of Protestants)의 서문을 보면 이 대학에서 의미부여 하고 있는 명확한 방향성을 엿볼 수 있다. 진정한 종교개혁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어 본 후에, 성경을 향한 불같은 열망(the fire of passion: for the Scriptures)을 언급하면서 이것을 기념 서적의 제목으로 정한 이유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처럼 종교개혁 사상의 가장 중심적인 모토중 하나는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이다. 성경과 성경의 정신에 근거한 열정으로 부단히 개혁되는 교회가 되도록 신학하는 것, 즉 개혁신학의 고전적인 명제인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된다’(Ecclesia reformata est semper reformanda)는 것이 이번 학회의 근간에 흐르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글=안인섭 교수

(총회신학원 역사신학)





김은홍 기자 등록일 2004-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