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부흥에 끼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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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부흥에 끼친 영향


산둥에서도 태국에서도 실패했던 네비우스의 선교정책

(abcy2k)
[2005-05-20]

[발췌]

통상적으로 한국 교회 부흥의 비결을 <네비우스 정책>의 공헌으로 인식하는 경향들이 있다. 특히 한국 장로교의 경우 더욱 그런 경향이 농후하다. 사실 <네비우스 정책>이 한국 교회에 이바지한 공헌은 무시할 수 없다.

<네비우스 정책>이란 1890년 중국 산동성 지역의 미 북 장로교 선교사 죤 네비우스(John Nevius 1829-1893)를 주한 선교사들이 초청하여 선교정책 세미나를 개최하였는데, 그가 소개한 선교정책을 1893년에 조직된 선교사 공의회에서 수정 . 보완하여 한국의 선교 정책으로 채택한데서 붙은 명칭이다.

그가 소개한 선교정책을 클라크(Charles Allen Clark)는 "자력전도(自力傳道; self-propagation), 자치제도(自治制度; self-government), 자급운영(自給運營; self-support)" 등으로 요약하였다.

이 정책의 중심 이념은 피선교지 교회가 외국인 선교사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립적으로 발전해 가도록 유도함으로써, 능력 있고 강인한 교회로 키우는 것을 주요 과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 선교정책은 네비우스 선교사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고, 영국 국교회 성직자로써 선교협회 서기로 재직하였던 헨리 벤(Henry Venn)이 실시한 3대 자급원리(三大 自給原理 : three-self Principle)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가 주창한 삼자원리(三自原理)란 선교지의 교회들이 "독립적으로 행정"(self-governing)하고, "자급 자족"(Self-supporting)하며, "자체적으로 선교(Self-propogating)"하는 교회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19세기말의 선교는 대개 이런 방향으로 움직여 가고 있었고 네비우스도 그런 영향을 받은 것이지 그가 독창적으로 개발한 것은 아니다.

네비우스는 중국 산동성에서 이 정책에 근거하여 선교를 실시하면서 동양인의 사고와 풍습에 맞도록 수정 . 보완하였고, 이것을 중국보(中國報)라는 논문으로 발표한 일도 있는데, 내한한 선교사들은 대개 이 논문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강사로 초빙하였다.

이런 선교정책은 한국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들의 필요에 의하여 수립된 원칙이지 한국인들이 자신들을 위해 만든 규칙은 물론 아니다. 그리고 이런 정책은 선교사들에게는 선교의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필요했겠지만 정책이 곧 부흥의 근본 원인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무엇인가 석연치 못한 부분이 있다.

그렇게 주장하는 가장 큰 원인은 선교사가 내한하여 공의회를 조직하고, <네비우스 정책>을 체택하기에 앞서서 이미 한국의 교회들은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이 사실(그래프-1과 그래프-2를 참조)을 어떻게 네비우스 정책과 연관지어 설명할 수 있는가? 만일 선교정책이 수립되기 전에는 미미하던 성장이 정책 수립과 함께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면 충분히 납득이 되겠지만 역사적 사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매우 껄끄러운 부분이다.

이제 다음의 글을 읽으면 <네비우스 정책>을 절대시하는 마음이 약간 수그러들 것이다.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함을 받은 마을 사람들의 일부는 이제는 반대로 자기들의 친척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그들은 또한 "자립의 모본을 보여 주었는데, 교회 확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 마을에서는 그 후의 다른 많은 곳에서와 같이 복음이 선교사들을 앞질러 전파되었는데, 선교사들은 언더우드 목사와 마찬가지로 이방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을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기 위하여 마을들을 방문했던 것이다.

사실 한국 교회의 교인들은 선교정책 때문에 움직인 것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감사와 영혼을 구원하려는 뜨거운 열정, 그리고 복음 전도의 사명을 수행하려는 진실성 때문에 복음을 전하였다고 주창하는 것이 <네비우스 정책> 이전의 부흥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될 것이다.

더욱이 당시는 외침(外侵)의 위협을 받아 국가의 독립이 위협을 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 교인들은 독립의 소중함을 절대적으로 느끼고 있었고, 이로 인하여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에서마저 자주력을 상실하면 안되겠다는 강한 자주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자주의식이 자력으로 전도하고, 자력으로 교회를 설립하는 동기가 된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역사적 정황론(歷史的 情況論)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한국 교회가 부흥한 기초는 바로 역사적 환경의 산물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역사적 환경론으로는 자립에 대한 의지는 설명할 수 있겠지만, 복음을 받은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구령(救靈)의 열정과 사명감은 설명하지를 못한다. 먼저 뜨거운 사명감과 복음 전도의 실천이 있은 후 교회를 자주적으로 이끌겠다는 의지와 결단이 있게 되는 것이지, 역사적인 형편이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전도해야겠다는 결단이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네비우스 정책>에도 자주적인 정신이 숨어 있었고, 이런 정신의 공통분모는 역사가들의 시선을 한국인의 사명의식보다는 <네비우스 정책> 쪽으로 비중을 두게 하였다. 이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며, 이로 인하여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부흥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만일 <네비우스 정책> 자체가 우수했고, 그 정책만 있으면 기적적인 부흥을 가져올 수 있다면 다음의 두 가지 질문에도 분명한 대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첫째, 중국의 교회는 네비우스가 직접 선교하였고, 더욱 확실한 <정책>을 구사하였을 터인데, 중국 교회는 과연 기적을 이루었는가?

이 질문은 한국과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 어느 국가, 어느 지역에 대하여도 적용되는 질문이다. 과연 부흥되지 못한 지역의 교회들은 선교정책의 빈곤 때문이었을까? 그런 지역에서는 왜 <네비우스 정책>을 도입하지 않았을까?

둘째, 한국의 감리교는 <네비우스 정책>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로교 다음으로 큰 교단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정책보다 중요한 것은 현지인들의 의식이다. 이것을 더 중요하게 강조하여야만 한국 교회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질 것이며, 이것은 한국 교회만 아니라 세계 어느 국가, 어느 지역의 선교에서도 적용되는 동일한 원리라고 하겠다.


추신 :

덕택에 기독교사의 미스테리라는 "새벽기도회"부흥사가 시작 된다지요???
덕택에 안창호선생님들을 위시한 많은 기독교계 인사들이 교회를 등을 졌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