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손양원에 대한 정면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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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비판.hwp (1.3M)
이 홈의 모든 자료에 대해, 어느 날 이런 식의 반론과 매도가 들어 온다면 설명할 수 있겠는가? 우리끼리만 알고 좋아 하고 잘 나가다가 어느 날 전혀 다른 쪽에서 이 쪽의 근본을 연구하고 비판한다면 든든하게 설 수 있겠는가? 손 목사님에 대한 정면 비판이 알게 모르게 제기 되고 있습니다. 모든 비판과 모든 반론을 다 넘어 설 수 있어야 진리의 길입니다. 이 홈이 파악하기로는 애양원 내부에서 이런 반론을 상대로 설명하고 공박할 자료나 인물은 없습니다. 그냥 모든 사람이 좋게 넘어 가니 그냥 넘어 갈 뿐입니다. - 행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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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원자탄인가 조작된 영웅인가?(1)
하늘바라기
2009/07/12
http://yello1104.blog.me/140074244111
- 여수시는 손양원 성지순례코스를 보류하라 -
700억 "손양원 목사" 테마공원 조성의 문제점
2009년 2월 10일 연합뉴스의 보도에 의하면 “전남 여수시는 6·25 전쟁 중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다 북한군에 사살당한 손양원(1902-1950) 목사 테마 공원 조성 사업을 벌이기로 했다. 10일 여수시에 따르면 사업비 670억 원을 들여, 오는 2011년까지 율촌면 신풍리 사회복지시설인 애양원 일대 47만㎡를 손양원 목사 테마 공원으로 조성하기로 했다.
애양원은 손 목사가 6·25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부터 한센병 환자를 돌보던 곳으로, 여수시는 이 일대에 종교박물관, 순교자관, 디지털 종교영상관, 영성체험관, 기도회장, 수련회관, 기독혼례관, 특화병원, 숙박시설 등을 건립할 계획이다. 여수시는 전체 사업비의 절반가량을 국비로 충당할 계획이다. 여수시 관계자는 "경남 함안 출신인 손양원 목사는 여순사건 때 자신의 아들을 죽인 좌익 인사를 양아들로 삼고,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한센병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다 북한군에 의해 사살당한 순교자로, 기념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 필요가 있다"며 "국비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림1
여수시가 손양원 목사 유적지 및 테마공원 조성에 700억 원에 달하는 예산을 투입하는 계획을 세웠다. 여수시 강영식 관광문화수산국장은 “손양원 목사 순교지와 유적지를 테마공원으로 조성 세계적인 사적지로 조성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이 기사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2009년 1월 14일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나라와 민족을 위한 2009 신년조찬기도회’에 참석하여 발언한 여수시 오현섭 시장의 말을 들어보자.
“손 목사님에 대한 유적지 정비를 시 사업으로 30억 원을 들여 곧 착수한다.”
“그분의 사랑의 흔적이 묻어있는 순교지와 유적지를 보존해 숭고한 뜻을 기리고 EXPO를 찾는 전 세계 기독인들의 순례지가 되도록 하겠다.”
“여수시 10만 기독인들의 애절한 심정을 전하고자 한다.”
“여수시 5백여 교회 목회자들과 많은 성도들이 무릎 꿇고 기도하고 있다”
“EXPO는 선교를 위해 주신 소중한 선물이다. 세계 박람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를 보여드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사랑의 순교사업이 꼭 이뤄질 수 있도록 한국교회의 지원을 부탁드린다.”
<이상 ‘크리스천투데이’ 2009년 1월 16일자 ‘손양원 순교유적지, 여수시가 팔 걷고 나섰다’ 기사 참조>
일개 한 교파의 선교를 위해 국민의 혈세를 700억 원이나 투입해야만 하는가하는 의문은 이 글의 전개와 함께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우선 보도된 기사를 중심으로 손양원 목사 테마 공원 조성의 당위성을 정리해 보면,
첫째, 손양원 목사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양아들로 삼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했다.
둘째, 손 목사는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한센병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다 북한군에 의해 사살당한 순교자였다.
이 정도인데 여수시에게 몇 가지 의문에 대하여 답변을 듣고자 한다.
첫째, 우리 국민들이 손양원 목사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지 여론 조사를 한 적이 있는가?
둘째, 여수시민 중 기독인을 제외한 몇% 정도가 손양원 테마공원 추진을 찬성하는지 알고 있는가?
셋째,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손동인 ? 동신 형제가 순교를 하였는가? 아니면 이데올로기로 인한 희생인가?
넷째, 손 목사가 양아들로 삼았다는 안재선에 대한 자료를 어느 정도 갖고 있는가?
넷째, 손 목사가 나환자를 위해 봉사한 기간과 구체적인 봉사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 자료를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는가?
다섯째, 손 목사의 국가관과 민족관 그리고 종교관에 대하여 어느 정도 파악을 하고 있는가?
문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손양원에 대한 수많은 일화가 증거나 증인이 부족하거나 혹은 전혀 없는 조작 ? 과장 ? 왜곡된 신화였다고 판명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손양원 전설에 대한 궁금증을 함께 풀어보자.
1)풀리지 않는 두 가지 의문
“우리는 이렇게 위대한 경건인, 전도사, 신앙용사, 나환자의 친구, 원수 사랑자 그리고 순교자를 가리켜 일언으로 명명할 명사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나 아마 성자라는 존호를 써야 될 것이다. 광주 형무소에 있던 일본인 간수도 손 목사님의 언행에 감동을 받아 그를 성자라고 불렀다 하거든 그의 위대한 언행 생활의 여러 방면을 아는 우리들과 세계는 그에게 이 존호를 아니 쓰지 못할 것이다. 생각건대 우리 한국 교회 역사에는 이런 성자가 일찍이 나타나지 못하였고, 세계 기독교 사상에서도 이렇게 다방면적인 성자는 보기 어렵다.
우리는 성 안토니의 경건 생활을 추모하여 그를 성자라 하나 그에게는 전도자, 신앙 용사, 나환자의 친구, 원수 사랑자, 순교자의 행적이 없는듯하고, 성 어거스틴과 성 프란시스를 성자로 숭배하나 그들에게는 가정 식구와 함께 경건 생활을 하다가 함께 순교한 영예가 없다. 유스티노와 허스와 위클립은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생명을 던져 순교했으나 그들에게는 나환자의 친구, 원수 사랑자 등의 영예가 결여되었다. 이렇게 비교하여 볼 때에 우리 손 목사님은 세계 기독교 사상에서도 그 유가 드문 성자인 것이 분명하다.
아! 손 목사님은 우리 한국과 우리 한국 교회의 70년 역사가 낳은 유일의 성자시오, 세계 교회 사상에도 유 드믄 성자인 것을 세계는 아는가 모르는가? 대한 교회의 경건한 아들과 딸들아! 가장 위대한 성자 손 목사님의 가심을 인하여 통곡하며 비가를 불러라. 그리고 위적을 성심성의로 영구히 추모하자. 그리하여 우리도 그의 가신 자취를 만의 하나라도 따라보자. 그리하면 전 세계의 신도들도 우리를 모방하여 이 위대한 성자를 추모하며 그 걸어 가신 자취를 따라 가게되리라“ <박형룡, 손양원 목사 순교 추모사, 1950.10.29, 「사랑의 원자탄 속편(안용준) 1977, 성광문화사」머리말에서 발췌 인용>
사랑의 원자탄, 사랑의 성자 등으로 알려진 산돌 손양원은 120년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다. 신사참배거부로 인한 6년간의 형무소 생활, 두 아들을 살해한 원수를 양자로 삼은 믿어지지 않는 사랑, 반평생을 나환자와 함께 생활한 나환자들의 진정한 친구, 교회와 나환자 그리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공산당에게 죽음을 당한 거룩한 순교자……
그림2
그러나 지명도에 비해 그에 대한 논문이나 논거는 너무나 적다. 특히 일차 자료라 할 수 있는 산돌의 행위나 행적에 대한 증언이나 증거의 채집, 발굴 등은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손양원의 생애를 얘기할 때, 전기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안용준의 「사랑의 원자탄」이나 손 목사의 맏딸 손동희가 쓴「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등의 내용이 모두사실인 것처럼 회자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책들은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요소가 뒤섞여 있는 전형적 전기소설이다.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이 책의 내용들이 많은 글들에 인용되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내용을 사실로 믿고 있다는데 있다.
물론 이 책들이 전하고 있는 모든 정보가 허위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기류 소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과장, 미화 등은 이 책들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지금까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보가 모두 사실이라면, 손양원 목사에 대한 전기나 관련 글을 읽을 때마다 늘 부딪히는 두 가지 의문을 풀 수 없게 된다.
첫째, 상기 인용한 박형룡 박사의 추모사에도 서술되었듯이 손 목사는 개신교단 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 국민이 존경하고 숭배해야할 위인임에 틀림없다. 물론 지구촌 모든 인류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손 양원 목사에 대한 인지도는 너무나 낮은 듯하다. 몇 가지 통계자료를 인용하겠다.
*2005년 2월 5일, CBS기독교방송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교회 120년을 대표하는 지도자로는 한경직 목사(37%), 주기철 목사(21.8%), 문익환 목사(5.6%), 손양원 목사(4.2%), 함석헌 선생(3.8%)의 순서로 되어 있다.
*2003년 2월 12일, 기독교연합신문이 창간 15주년을 맞아 기독교인터넷방송인 C3TV와 공동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현재 한국교회를 이끌고 있는 지도자로는 조용기(여의도순복음교회)? 옥한흠 목사(사랑의교회)가 손꼽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로는 김진홍(두레마을 대표) ?옥한흠 목사가 공동 1위에 올랐다.
*2008년 12월 17일, 시사저널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분야별 인물 중 개신교에서는 조용기 순복음교회 원로목사가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선정되었다. 조목사는 지난 5월 순복음교회 당회장에서 물러난 후 사랑과 행복나눔 이사장을 맡아 봉사 활동에 헌신하고 있다. 옥한흠 목사 2위, 김삼환 예장 총회장 3위, 한경직 목사 4위, 하용조 온누리교회 목사 5위, 홍정길 남서울은혜교회 목사 6위이다.
*2008년 7월 10일, 제34회 전국장로회수련회에 참가한 장로 1,792명을 대상으로 전국장로의식 설문조사에 따르면, 별세한 목사 중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한경직(78.0) 손양원(8.3) 주기철(5.9) 길선주(2.1) 임택진(1.5) 기타 한완석 이기풍 이중표 김기수 이상근 강신명 김광현 김동익 순이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손양원 목사는 한국인들뿐 아니라 개신교인들에게 조차, 가장 존경받는 인물도 아니며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로도 선정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기독교의 영원한 성자로 숭앙받고 있는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나 프란체스코보다도 위대하다고 할 수 있는 손양원 목사의 업적과 인격에 대하여 왜들 그렇게 모르고 있을까?
두 번째 의문은, 상기에 거론된 모든 영웅, 성자들은 존경받는 만큼 비판도 그만큼 함께 받고 있는데, 다만 손양원 목사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 등의 글이나 자료는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손양원 목사, 그도 분명히 인간이다. 설령 그가 성자로 칭송받더라도 그를 비난하거나 문제점 등을 지적하는 부류가 분명히 있어야 자연스럽지 않은가? 만약 그가 무결점의 인간이라면, 상기 통계 자료는 분명히 수정되어야 할 것이요, 문제점이 있는데도 지적하는 이가 전혀 없다면, 이 또한 그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해야만 될 것이다. 손양원 목사에 대한 이 두 가지 의문을 해소하는 작업을 지금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그림3
“……팔왕 카페에서, 아니 이 국군이 주둔한 이 집에서 승주 교회까지는 불과 십 분이면 왕복 될 거리였건만 한 일 년 되는 것 같은데 아직 안돌아온다. 웬일일까? 하는데 트럭보다 일찍이 헐떡헐떡하고 씨근씨근하면서 들어서는 두 학생 제민이와 동희! 동희의 키는 작고 얼굴은 조그마하나 어딘지 모르게 똑똑한 것 같이 보이는 어린 여학생이다. 얼굴에는 수심이 있는 것 같다. 가쁜 숨을 죽이면서 들어오는 것은 사람이라기보다도 험악하고 딱딱해진 이 집안 공기를 먼저 난화 시키는 천사 같았다. 일동은 이 여학생을 경이와 호기로 맞이했다. 이를 보는 국군에게
『이 애가 손 목사 따님이요. 죽은 두 학생의 누이동생입니다. 』하고 나 목사는 매우 조급한 마음으로 소개하였다.
『네 이름이 무엇이지?』하고 물었다. 비록 어린 학생이나 반말은 할 수 없는 모양이다.
『손동희 입니다.』그 대답 소리가 분명하고 의외로 냉정하다. 손이란 성이니 틀림없는 손 목사와 관계된 아이요, 동희라고 하니 틀림없이 죽은 동인 동신의 남매 되는 아이 같다.
『몇 살이지?』하고 물으니
『열 넷 이예요.』한다. 일동은 그 말에 벌써 한 풀 꺾였다.
『너 언제 순천에 왔지?』
『오늘 아침에 일찍이 집에서 떠나 왔습니다.』
『왜 왔지?』
이 말을 물을 때 나 목사는 눈을 감았다. 하나님! 예수여! 라고 기도하는 모양이다.
『우리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 오빠들을……』
『그래!』
『둘 죽인』하더니 눈물이 북받치는 듯이 이를 꼭 물고 울음을 참는 듯하더니
『사람을 죽이지 말 뿐』하고 울음 섞인 음성으로
『아니라 때리지도 말고 살려 주면 살려 주면……』하더니 엉엉하고 울어 버린다. 동희는 말을 더 계속 못했다. 이 소리를 들은 재선이의 부모를 위시하여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 국군도 눈물이 나오는 것을 어찌하랴! 나 목사나 제민이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나 목사의 지금까지의 말이 일호도 틀림없다는 것이 증명된다는 정도를 지나서 동희의 말은 이 팔왕 카페 안에 떨어진 사라의 원자탄이요, 평화의 원자탄이요, 진리의 원자탄의 폭발이었다. 이 자리는 눈물의 수라장으로 변했다.
평화의 천사가 갖다 떨어뜨린 사랑의 원자탄!
과거 청춘 남녀를 범죄에 몰아넣던 팔왕 카페!
범죄 한 반도를 처벌하는 국군 주둔소로 되어 진 이 자리!
이 범죄의 소굴에서, 죄를 심판하는 이 자리에다, 진정한 심판자…정의와 사라의 사자에게서 받아 평화의 천사가 던져준 이 사랑의 원자탄!
아들은 아들대로 범죄를 부인하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비판 없이 애걸을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내 자식이라고 변명을 하고, 국군은 국군대로 법을 주장해서, 권리와 사랑이 갈등처럼 일어나는, 인정과 법이 산마처럼 얼크러지는 이 자리에,
내 입장을 잊어버리고 덤비는 나목사, 내 아들 없애고도 원수를 살려달라는 손 목사, 내 오빠 잃고도 아버지 심부름 온 동희가 던져주는 희생과 사랑에 얼킨 사랑의 원자탄!
이는 한갓 팔왕 카페 안에서만 폭발되고 말 것이냐?
트럭 소리에 정신이 난 국군은 나 목사더러 학련으로 함께 가자고 했다. 이렇게 해서 학련에 가서 상의한 후
『나 목사님께 일임합니다. 상관에게도 말씀드리겠습니다.』하고는 다른 사형수를 데리고 트럭을 타고 사형장으로 가버렸다." <안용준, 사랑의원자탄, 성광문화사 p209~211>
<사랑의 원자탄> 중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의 하나이다. 두 아들 동인, 동신을 죽인 원수인 안재선의 구명을 탄원하여 양아들로 삼아 손재선(일부 자료에는 동인, 동신의 이름 중에서 한자씩 따 손인신)으로 개명시켰으며 그를 개종시켰다는 장면은 그 다음에 등장하는데,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도 거의 같은 내용이다. 문제는 이러한 감동적인 사건이 왜 그 당시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다. 잠시 60여 년 전, 여순 사건이 발생 한 1948년도로 돌아가 보자.
당시 언론과 문인들은 손양원 미담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공산주의 사상이 한번 머리에 들어가면 어떻게 사람이 지독하게 되는 것을 아십니까? 여수 진주에서 생긴 일인데 여학생들이 카빈총을 치마 속에 감추어가지고 우리들 국군장교와 병사들을 유도합니다. 오라버니! 하고 재생의 환희에서 부르짖는 듯 우리들을 환영합니다. 무심코 앞에 갔을 때는 벌써 치마 속에서 팽! 소리가 나며 군인들은 쓰러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깜찍한 일을 보십시오. 이것들은 나이 겨우 열여덟, 열아홉 살 되는 것들입니다. …(중략)… 이러한 여중학생 몇 명을 잡아다가 고문을 했습니다. 그 꼴을 보느라고 너는 총살이다 위협했더니 처음엔 부인을 하며 엉엉 울다가 하나, 둘, 셋 하고 구령을 불러서 정말 총살하는 듯한 모양을 보였더니 "인민공화국 만세"를 높이 부릅니다. 기막힌 일이 아닙니까? 평시에 학교 교육이 얼마나 민족적인 육성에 등한시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남는 노릇이올시다. 학교에 다닙네 하고 공산주의의 이념만을 머리에 집어넣는 공부를 한 셈이올시다.” <박종화, 남행록(환상의 여학생 부대), 동아일보 1948년 11월 21일>
그림4
인용한 글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반 국민의 뇌리에 여순 사건을 부정적 이미지로 남아있게 한 박종화의 남행록 중 소위 ‘환상의 여학생 부대’ 중 일부이다. 1948년 10월말, 진압군이 여수와 순천을 탈환하자, 이승만 정부는 문화계와 종교계를 대표하는 유력 인사들을 현지에 파견하여 대국민 홍보에 이용하였다. 상기 박종화 외 이헌구는 ‘잔인무도한 귀축들’ ‘천인공노할 귀축의 소행들’이란 표현을 사용하였으며 김광섭은 ‘인간성 상실’ ‘저주의 보상’ 등의 용어를 사용하여 봉기군의 만행을 고발하였다. 시인 김영랑은 「절망」이라는 시에서 봉기군들이 ‘악의 주독에 가득취한’ 채 양민을 ‘산 채로 살을 깍기여 죽었나이다. 산채로 눈을 뽑혀 죽었나이다. 칼로가 아니라 탄환으로 쏘아서 사지를 갈갈히 끊어 불태웠나이다’ 라고 선동하기도 했다. <이상 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재의 구축,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여순사건 56주년 추모 ‘여순사건 공동 수업 자료집’에서 발췌 p30~34>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여순 사건의 홍보를 위해 동원되었던 모든 문인들이, 공산당의 만행을 폭로하면서도 국군과 기독교도의 선행이 대비되는 이 아름다운 광경을 왜 널리 알리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다. 당대의 문호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치졸한 표현을 쓴다든가 월탄처럼 왜곡된 정보를 가공한다든가하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아도 좋을, 기막힌 소재를 왜 외면했는가하는 점이다. 문인들 뿐 아니라 당시 여순사건의 보도 경쟁에 선봉이었던, 평화신문 ? 국제신문 ? 동아일보 등의 언론들도 손동인 형제의 미담을 약속이나 한 듯 모두들 침묵을 지켰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림5
손동인 형제의 순교에 대한 증인이나 증거나 너무 허술하다.
사실 이 미담은 구성도 너무 조잡하고 증거나 증언도 허술하다. 한 번쯤 생각해보라. 진압군이 술집(팔왕 카페)에서 반란군을 취조한다는 게 그대는 믿어지는가? 예수를 증거 하다가 두 형제가 함께 순교했다는 증언도 십 사오 세 되는 ‘윤순웅’이라는 학생뿐이다.<사랑의 원자탄 p167> 더욱이 일개 장교가 살인 혐의가 있는 반란군을 피해당사자의 누이 말만 믿고 감동하여 풀어줄 수 있었겠는가? (비록 불법이었지만)계엄 하에서!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은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김득중이 어느 정도 제공해준다.
여순사건 당시 기독교인 학살은 없었다.
그림6
덧붙여 몇 가지 참고할 만한 정보가 더 있다. 순천이 점령당한 1948년 10월 20일부터 23일 까지 사흘 간, 순천지역에서 인민재판에 의해 많은 우익인사들이 처형당한 것은 맞다. 10월 27일 자 영국 외무성 문서에는 미 외교관 보고를 인용하여 300명의 경찰과 비공산주의자 시민들이 반군에게 학살되었다고 적혀있다. 진압군측은 400여 명의 경찰관이 사살당한 것으로 추산했다. <순천지역 여순 사건, 진실 ?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p514참조>
“순천의 경우에는 반군의 점령기간이 여수에 비해 짧았음에도 인명피해는 상당히 많은 편이다. 점령 3일 만에 반군과 좌익 세력은 약 500명 내외의 경찰 및 우익인사를 처형하였다. 그 가운데 순천경찰서장 梁癸元과 광복청년단장 李正烈 등 경찰과 우익인사 60-70여명은 경찰서 부근에서 학살당했다. 순천지역의 좌익세력이 주도한 피해자는 경찰과 청년단 등 우익인사들이었는데, 경찰 희생자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여수와 순천지역의 좌익세력은 경찰과 우익인사를 처단하면서 인민재판이라는 형식에 의지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미군 측의 기록이 그러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처형대상이 된 우익세력으로는 한민당 관련 인물이나 부르주아지, 지주계급, 대동청년단, 학련 등 우익청년단체 등이었다.”
<홍 영 기(순천대 사학과 교수), 文獻資料와 證言을 통해본 麗順事件의 피해 현황 p6~7>
한편 이승만 정권, 사회부가 파견한 종교단체 대표단의 보고서에 의하면 “신자와 교회의 피해가 적었다” 고 기술했다. <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재의 구축,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여순사건 56주년 추모 여순사건 공동 수업 자료집에서 발췌 p35>
실제 그 당시 순천지역의 유명한 목사나 기독교 지도자들이 처형되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이것은 여순사건 초기, 반란군들이 내세운 6개항의 기초 강령에도 나타나있는데, 종교 문제에 대한 거론은 일체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대목은 아래와 같다.
그림7
두 형제가 죽은 날인 10월 21일은 반란일(10월 19일)로 부터 겨우 삼일 째 날이었다. 종교 탄압을 할 시기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 당시 반란군이 기독교를 탄압했다는 내용은 그 어디에도 없다. 산돌의 두 아들은 이데올로기에 희생당한 정치적 죽음이었지 결코 순교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오히려 광주 지방 검찰청 순천지청의 차석 검사였던 박찬길의 경우, 그는 조만식의 제자이자 기독교도였지만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조작된 혐의로 23일 오전, 경찰에게 총살당했는데, 여순사건 당시에는 기독교도=우익이라는 등식이 아직은 성립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김득중, 여순사건 왜곡보도의 과거와 현재 참조>
손양원 목사의 경우, 두 아들이 순교했다는 것을 믿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의 바람이었을 지도 모르고. 문제는 확실하지 않은 사실을 왜곡하여 선교의 수단으로 삼는 몰염치이다. 이러한 조작은 먼 후일, 2004년도 이라크에서 어이없이 죽은 김선일 그리고 뒤이어 3년 후 아프칸에서 안타깝게 작고한 배형규 목사를 순교자로 둔갑시키는 예로 계승되고 있는듯하다.
안재선은 왜 기독인이 되기를 포기했을까?
이 사건이 더욱 수상 한 것은, 손양원이 양아들로 삼았다는 안재선의 행적이다. 전설에 따르자면, 산돌의 양아들은 독실한 기독인이 되었어야 마땅하며, 그의 은혜를 사방팔방에 선전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작고할 때 까지 신동인 형제의 죽음이나 손 목사와의 관계에 대하여 늘 침묵을 지켰다. 그러면 지금도 생존해 있는 안재선의 아들 안경선의 육성을 들어 보기로 하자. 2004년 6월 27일 국민일보 보도에 의하면,
“저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관계를 고3 겨울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알게 됐습니다. 손 목사님의 유복자인 손동길 목사님께서 저를 찾아와 ‘내가 너의 작은아버지다’고 말씀하시면서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책을 주셨습니다. 그 책을 읽고서야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았습니다.”
“안 목사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크리스천이 아니었다. 교회를 가라고 권하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야 손 목사님의 가족과 아버지가 계속 왕래하고 지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신학을 전공하고 목회자가 되려고 하셨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눈총 때문에 이룰 수 없었고 결국 세상 사람의 눈을 피해 숨어 사셨던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의 권유에 따라 전도사까지 되었던 안재선은 이후 왜 기독인이 되기를 포기했을까? 그리고 왜 본래의 성씨로 돌아갔을까? 게다가 자신의 아들에게 조차 손양원 목사와의 관계에 대해 침묵을 지켜야만 했을까? 정답과 상상은 그대의 몫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만 덧붙이겠다. <사랑의 원자탄>의 저자인 안용준 목사에 의하면 육본 보도과의 각본 검열을 거쳐 「향(香)」이란 연극을 상영했다고 했는데 <사랑의 원자탄 p211~212 참조> 손양원 생존 시 군에서 이러한 연극을 상영해야할 필요는 무엇이었을까? 손양원 전설의 두 번째 큰 주제는 나환자와 함께한 일생이다. 이것도 진실은 무엇인지 함께 알아보기로 하자.
3)손양원은 과연 입으로 나환자의 고름을 빨았을까?
“손양원은 나환자 공동체 애양원의 목회자로 복귀하여서 그곳의 사람들을 극진히 사랑했다. 중환자의 환부에다 입을 대고 피고름을 빨아내기까지 그들을 사랑했다. 감염을 각오한 ‘순교정신의 목회’였다.” <한국교회 순교영성의 바탕 미래목회포럼 장신대 임희국 교수의 발제문 중에서 발췌>
‘손양원 목사 순교 기념관 사진 보기’에서는 부산 감만동에서 목회를 할 때, 한센환우의 환부를 빨았다고 기록되어있지만, 손동희의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p67에 의하면 애양원 시절 “나병의 환부에는 사람의 침이 좋은 약이 된다며 피고름을 빨아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고 주장하고 있다. 아무튼 손양원 목사가 입으로 나환자의 고름을 빨았다는 전설은 이제 사실로 회자되는듯하다. 이쯤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손양원은 의료 목회자가 아니었다.
손양원은 목회가 주업인 목사인가 혹은 의사 면허가 있는 의료 목사인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손양원 목사의 재임 전후 애양병원과 애양교회의 책임자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제공하겠다.
그림8
손양원이 한 달 정도 애양병원의 원장을 임시로 겸임한 적은 있다. 그러나 본연의 임무는 목회였다. 그가 의술을 공부하거나 누군가에게 사사 받았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이러한 사실을 무엇을 뜻하는가? 손양원 목사가 입으로 나환자의 고름을 빨았다는 전설이 맞으면, 그는 무면허 의료 행위를 했다는 뜻이다. 게다가 나병에 감염도 안 되었다 하니 그는 초인이든가 아니면 하나님이 언제나 보호하는 특별한 사람이든가, 둘 중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손양원 목사가 나환자와 함께했던 시간은 얼마나 될까?
그건 그렇고, 신사참배 문제로 형무소에 구금되어 있던 1940년 9월부터 1945년 8월까지를 제외하곤 늘 나환자와 함께 했다는데 과연 진실일까? <사랑의 원자탄> p358과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p270에 의하면 손 목사가 해방 후 순교 직전까지 부흥 집회 수는 93곳이며 설교 회수는 교회 예배를 제외하고 2천 회가 넘었다고 한다. 일 년에 400회 이상 타지에서 설교를 했다는 뜻인데, 이 말이 진실이라면 여수 애양원에 있던 날은 며칠이나 되었을까? 애양원 나환자들이 손 목사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날은 한 달 중 과연 며칠쯤이나 되었을까?
결국, 부흥회 회수가 조작되었든가 아니면 나환우와 언제나 함께 했다는 손양원 전설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될 듯하다. 다음은 출옥 이전, 손 목사와 나환자와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보는 차례다.
“1926년 3월, 경남 성경 학교에 입학을 하고 동인이가 한 살이 되었을 때 부산 감만동 한센병자 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감만동 교회는 600여 명의 대부분이 한센병자들이었다. 손 목사의 첫 사역지가 이렇게 한센병자와 연결된 것이 훗날 그에게 사랑의 순교자가 되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그는 알 리가 없었다. 손 목사는 감만동 교회에 시무 중이었던, 1929년 3월 6일에 경남 성경 학교를 졸업했다.
원래 감만동 교회는 1934년까지 매견시 선교사가 목회를 했으며 손 목사는 외지 전도하는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교회로 청빙이 되었었다. 사명을 받은 손 목사는 경남 울진 방어진과 남창에 교회를 세웠고, 부산 서구 부민동에도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개척했다. 교회 개척에 전념을 했지만 시간이 나는 대로 감만동 교회에서 설교도 하고 환우들을 보살피기도 했다.……” <애양원교회 홈페이지, ‘손양원 목사의 생애’에서 일부 발췌>
손양원의 첫 부임지가 나환자 교회임은 맞다. 그러나 그의 주 업무는 외지 전도였으며 실제로 밀양 수산, 울산 방어진, 울산 남창, 부산 남부민, 양산 우너동 교회 등의 개척에 큰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부산 감만동 교회에 재직 중인 1926년 3월부터 1929년 3월까지 3년에 걸쳐 경남성경학교를 다니기도 했는데, 학업과 가정생활 그리고 교회개척 등을 병행하는 고달픈 생활 중 나환자들을 보살피는 시간이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한편 손양원은 무교회주의자인 김교신이 발행한 성서조선 사경회 인도사건으로 감만동 교회를 1932년 사임하고 부산 남부민 교회에서 1934까지 시무한다. 그 후 그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는 등 학업과 그 외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전념한 것으로 보인다. 즉 부산 남부민 교회부터 애양원 교회 부임까지의 기간인 1932년부터 1939년까지 8년 동안 나환자와의 관련 일을 한 흔적은 전혀 없다는 뜻이다. <표 2: 손양원 목사 연보 참조>
다시 정리를 해보자. 손양원 목사가 목회를 한 시기는
*1926년부터 1932까지인 부산 감만동 교회에서 6년 간 학업과 외지 전도사 생활,
*1932년부터 1939년까지 8년간의 학업과 신사참배반대운동 기간,
*1939년부터 1940년까지 2년간의 애양원 교회와 신사참배반대운동 기간,
*1940년부터 1945년까지 6년간의 투옥기간
*1945년부터 1950년까지 6년간의 애양원 생활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손양원 목사가 나환자와 접촉할 수 있었던 시기는 부산 감만동 교회, 투옥 전 ? 후의 애양원 시절 정도이다. 대략 12,3년간인데, 이 중 감만동 시절은 애양원 교회 홈페이지에서도 밝혔듯이 “시간이 나는 대로 감만동 교회에서 설교도 하고 환우들을 보살피기도 했다” 는 정도였고 출옥 후에는 2천 회가 넘는 부흥회 집회 관계로 나환자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기에도 설교에도 나환자에 대한 관심이나 사랑 표명은 없었다.
한편, 손 목사는 다수의 옥중 일기를 남겼는데, 그의 아버지 손종일 장로에게 4편, 부인 정양순과 아들 동인 등 가족에게 12편 그 외 옥종면 북방리에 사는 신도들에게 3편 등이 전해지고 있다. 문제는 그토록 애정을 갖고 있다고 하는 나환자들에게는 단 한 편의 서신도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부산 감만동 환우들에게도 애양원 나환자들에게도 손 목사는 전혀 안부를 묻지 않았다. 그가 남긴 다른 서신들에도 나환자들에 대한 걱정과 소식 문의는 거의 없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손양원 목사가 나환자들을 보살피며 그들과 함께 생활한 것은 맞다. 그러나 세간에 알려진 바와 같이 나환자의 아버지, 나환자의 피고름을 입으로 빤 성자 등의 이미지는 분명히 과장되었거나 왜곡된 정보임이 틀림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누가 왜 왜곡을 했을까? 이 문제는 조금 뒤에 다루기로 하겠다. 참고로, 실제 나환자의 아버지란 호칭이 부끄럽지 않은 최흥종 목사에 대한 정보를 아래에 인용하겠다.
나환자의 아버지 최흥종도 의료행위는 하지 않았다.
“……선교 활동에 전념하고 있던 중 1909년 4월3일 급성 폐렴으로 순교한 오웬 의사를 치료하기 위해 목포에서 활동 중이던 포사이트(Wiley H.Forsythe)의사가 목포에서 광주로 급히 오다가 ……그때 이 여인을 정성을 다해 치료해 주던 광경을 지켜보았던 윌슨이 1909년 여름 인근 봉선리에 작은 집을 짓고 한센병자 20여명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 후 최흥종 목사가 제공한 1000평의 땅에 45인 수용시설로 출발하여 환자가 늘어 갔으며 윌슨과 제중원 사무원 최흥종과 이만준 등이 3년간 전도를 해서 1912년 영국 에딘버러에 있는 영국 한센병자 협의회로부터 2천 달러의 도움을 받아 한센병자 수용소, 진료소, 교회등을 마련하게 되었다.……1925년 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1번지에 터를 마련하고 광주에서 옮겨올 준비를 했다. 서서히 옮겨오기를 시작해서 1928년에 한센병자 600여명이 옮겨와 지금의 애양원을 이루게 되었다. 손양원목사는 1939년7월14일 부임해서 교회를 목회 했으며 1945년9월10일부터10월15일까지 병원 원장을 겸임했다.” <애양원 교회 홈페이지 ‘애양병원’에서 발췌>
“……어느 날 목포에서 활동 중인 선교의사 포사이트가 한 환자를 나귀에 태우고 왔다. 포사이트는 선교사들조차 ‘인간으로 오신 예수’라고 존경했던 인물이었다. 포사이트가 데려온 나환자는 온몸이 썩고 고름과 진물이 흘러 송장이나 다름없어 보였다.……그 뒤 흥종은 자신의 땅 1000평에 한국 최초의 나환자 수용시설인 광주나병원을 설립해 나환자들을 보살폈다. 그로 인해 광주에 나환자들이 많아지자 광주시민들은 “광주를 문둥이 촌으로 만들려느냐”며 반발했다. 그러자 여수 애양원의 전신인 나환자촌으로 나환자들과 함께 이동해 함께 살았다. 그는 한국나환자근절협회를 창설해 나환자들을 돌보았으나 여전히 갈 곳 없는 나환자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그가 단행한 것이 일제 때 큰 화제를 불러온 나환자행진이다. 그는 나환자 수백 명과 함께 무려 열하루에 걸쳐 광주에서 서울까지 행진해 총독에게 전남 고흥 소록도 나환자촌을 확대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오늘날 소록도 나환자 갱생원이 설립되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최흥종의 삶에 감명 받아 평생 소록도에서 나환자들에게 헌신하다 삶을 마친 의학박사 신정식의 책상엔 늘 사진 석장이 놓여 있었다. 최흥종과 포사이트, 예수의 사진이었다.……나환자들의 삶이 어느 정도 정착되자 그는 1935년 서울 세브란스병원의 친구에게 부탁해 거세를 해버린 뒤 스스로 명예욕과 물질욕, 성욕, 식욕, 종교적 독선까지 ‘다섯까지 집착으로부터 해방’을 뜻하는 오방(五放)정을 무등산 속에 지어 홀로 살았다. 해방 뒤 김구는 오방정에 일주일을 머물며 함께 나라를 이끌어가자고 호소했으나 끝내 거부하자 ‘화광동진’(和光同塵·성자의 본색을 감추고 중생과 함께함)이라며 그를 칭송하는 휘호를 남기고 떠났다.”
.<한겨레신문, 2007-02-13, 한국기독교 100년 숨은 영성가를 찾아 ④ ‘나환우의 아버지’ 최흥종에서 발췌>
상기 일화가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한 것 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가 시무했던 애양원 교회와 애양병원의 설립에 최흥종이 크게 기여했다는 것 그리고 소록도 나환자 병원의 건설에도 이바지했다는 것은 사실임에 틀림없다. 즉 나환자 치료에 물질적으로 기여했으며 제도적인 기틀을 만드는데 큰 공헌을 한 공로로 후세 사람들이 ‘나환자의 아버지’라고 불러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최흥종에게도 나환자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았다는 전설은 없다. 물론 그 이외 나환자와 관련된 수많은 의사, 목사, 선교사들도 그러한 전설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없다. 이제 손양원 신화에서 조금씩 눈을 떠야 할 때가 아닌가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