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 비판 자료 모음 (6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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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회 비판 자료 모음 (6 개)


"발언/주제연구"에 올려 자료이며, 내용은 없고 자료 위치만 표시 되어 이 곳으로 이동함 - 행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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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회는 소송 전문가
지방교회에 관해 참고할 만한 내용인것 같아 링크해 봅니다.
http://cafe.naver.com/vinebranch/1554


위트니스리-개신교에는 그리스도가 없다. 여러분들이 참고해 보시길 바랍니다.
http://cafe.naver.com/vinebranch/1549


위트니스리-야고보는 최고의 혼잡가
위트니스리는 참 교만한 사람아닙니까? 아니 사도 야고보를 최고의 혼잡가로 비판을 하다니요...
http://cafe.naver.com/vinebranch/1546


위트니스리는 양태론자가 아닌가?
<펌글>
출처: 성경 진리 토론 카페 http://cafe.naver.com/vinebranch/1664
글쓴이: 과거 지방교회 출신자
위트니스리는 양태론자가 아닌가?
(*첨부 된 다량의 자료는 자료 소개의 목록 다음에 줄을 긋고 따로 소개했습니다. - 행정실)



지방교회 출신의 지방교회 비판
지방교회 출신의 김기철님의 블로그를 소개합니다. 이분은 지방교회에서 오래 생활하신 분인 것 같습니다. 지방교회에 대해 여러면에서 자신의 생각을 밝혀 놓았는데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확인"클릭하지 마시고 "x표시"를 클릭하세요. 블로그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누가 방해를 해 놓은 것 같은데 삭제된 블로그라는 글이 나오면 확인을 클릭 하지 마시고 x 표를 한후 잠시 기다리면 블로그의 내용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지방교회에 대해 김기철님 글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kim7417329?Redirect=Log&logNo=50073999563


위트니스리는 양태론자가 아닌가?
<펌글>
출처: 성경 진리 토론 카페 http://cafe.naver.com/vinebranch/1664
글쓴이: 과거 지방교회 출신자
위트니스리는 양태론자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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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이인규님이 지방교회와 토론할 때 인용했던 위트스리의 글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내가 위트니스리의 글이 의미하는 바를 밝혀 놓았으니 주의 깊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읽으면 위트니스리의 글이 양태론자들의 말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래의 주장을 하면서도 자신은 양태론자가 아니라고 우기면 그것은 듣는 사람들을 속이는 것입니다. 양태론자가 아니라고 말하려면 양태론자들이 하는 주장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위트니스리와 지방교회는 양태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주장을 하면서도 자신들은 양태론자가 아니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위트니스리가 과연 양태론자가 아닌지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아래에 인용된 위트니스리의 글이 왜곡된 것이거나 조작된 것인지 (지방)교회 사람들이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무 항의가 없으면 사실기록으로 인정한다고 생각하겠습니다.)



1. “그러므로 요한복음 3장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주셨다. 이 아들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지 말라.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이 아들이 바로 다름 아닌 그 "하나님 자신"이다. 당신이 아들을 영접할 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당신의 기도에서 당신은 그분을 아들이라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 부른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 가지 큰 비밀. 18-19쪽)”


--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당신의 기도에서 당신은 그분을 아들이라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 부른다.’ 이 부분입니다. 위트니스리의 이 말은 그가 아들과 아버지를 구별(구분)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만일 그가 아들과 아버지를 구별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아들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가 아버지와 아들을 구별하지 않고 이렇게 혼동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사야 9장 6절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2번을 볼까요?



2.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이 아들은 영원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이것은 히브리어에 따른 합당한 번역이다. 아버지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영원의 아버지이시다. 시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이 아들은 영원 안에 계신 바로 "그 아버지"이시다. 저쪽 영원 안에서 "그 분은 아버지"셨고, 이쪽 시간 안에서 우리의 시대에 "그분은 아들"로서 주신 바 되는 것이다.(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 가지 큰 비밀. 18쪽)”



-- 위트니스리의 유추해석은 이것입니다.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불리우고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우니,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이다.’ 이것이 그의 해석입니다. 그러나 위트니스리는 여기서 큰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한 가지 오류 때문에 그는 혼돈에 빠지고 양태론자들과 같은 주장을 하게 됩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구별(구분)합니다. 인성으로 볼 때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로서 사람이십니다. 그리고 신성으로 볼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십니다. 이 양성은 혼합되지 않으며 구별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첫째, 그 둘이 합해져 제3의 어떤 존재가 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둘째, 사람은 사람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지, 사람이 하나님이거나 하나님이 사람인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양성’이 합해졌지만 구별된다는 말의 뜻입니다. 이런 뜻으로 본다면 이사야서 9장 6절을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을 때 아들 혼자 계셨던 것이 아니라 아들 안에 아버지가 함께 계셨다. 그래서 그분은 아들이시면서도 아들이라 불릴 뿐 아니라 아버지라 불리운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을 위트니스리는 ‘아들이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버지라 불리우는 것’이라고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저쪽 영원 안에서 그분은 아버지셨고, 이쪽 시간 안에서 우리의 시대에 그분은 아들로서 주신 바 되는 것이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들은 영원 안에서도 아들이시고 아버지는 영원 안에서도 아버지라고 구별하여 말하지, 아버지와 아들을 혼동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이 말씀을 근거로 하여 아들을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성경을 양태론적인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오해한 것입니다. 아들과 아버지가 하나라는 말씀은 어떤 물질적인 하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 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아버지가 아들이 되기도 하는 그런 상태가 아닙니다. 성경은 아들과 아버지를 영원히 구별하며, 혼합하거나 혼동하지 않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이 말씀도 아들이 곧 아버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들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그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며 일을 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보는 것이지 아들이 곧 아버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한 번도 ‘내가 곧 아버지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으며 자신과 아버지를 혼동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이제 3번을 봅시다.



3. “어찌 주님이 기도하시는 아들과 그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가 될 수 없겠는가? 기도하는 것을 듣고 계시는 아버지는 기도하는 아들이시며, 기도하는 아들은 또한 그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이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 323쪽)”



-- 위트니스리의 혼동을 보십시오. 아들이 아버지이고 아버지가 아들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혼동을 넘어 혼돈입니다. 그는 말로는 아들과 아버지를 구별한다고 하나 실제로는 아버지와 아들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런 증거를 대면서 말하는데도 자신은 그래도 아들과 아버지를 구별한다고 말하면 그는 ‘구별’이라는 말의 의미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런 딱한 사정을 보다 못한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그에게 충고했지만 그는 그 충고를 듣지 않았습니다.



4.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아들이 아버지이고 주님이 그 영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그들이 충고할수록 나에게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말할 힘이 더 생긴다. 나는 성경에 따라 아들이시고, 사람이 되셨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우리 그리스도가 오늘 아들일 뿐 아니라, 아버지와 그 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령48쪽)”


-- 아들이 아버지이고 주님이 그 영(곧 성령)이라고 말하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이것은 양태론 이단자들과 위트니스리와 지방교회의 사상이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는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고 했는데 성경 어디에서 그렇게 말했습니까? 그의 주장이 그러할 뿐 성경은 ‘아들이 아버지’라거나 ‘주님이 그 영(성령)’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지방교인은 위트니스리가 ‘주님이 그 영’즉 ‘과정을 거치고 완결되신 생명주는 그 영’이라고 말했지 ‘주님이 성령’즉 ‘아버지, 아들, 성령 할 때의 그 성령’이라고 한 것은 아니라고 변명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같은 문장에서 ‘아들이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고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을 같이 두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주님이 생명주는 영’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성령’이라는 뜻으로 말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충고했던 것입니다. 위트니스리가 ‘그 영’을 ‘성령’과 구별하여 말하기도 하고 구별하지 않고 말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구별하지 않고 ‘성령’과 같은 의미로 말한 것이 분명합니다.

고린도 후서 3장 17절의 ‘주는 곧 영이시니’라는 말씀은 ‘아들이 곧 성령’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으나(고전15:45) 위트니스리의 주장처럼 ‘아버지, 아들, 성령’ 할 때의 그 ‘성령’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 ‘성령’이 되셨다면 그것은 ‘아들’과 ‘성령’의 구별이 없어진 것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충고했던 것인데 위트니스리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살려주는 영’은 ‘성령’과 분리되지 않고 하나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둘이 구별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위트니스리는 살려주는 영과 성령을 구별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오류입니다. 그가 분리하지 않는 것은 맞는데 구별하지 않는 것은 틀립니다.

위트니스리와 지방교회가 오류에 빠진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의 말이 교묘해서 그 오류를 보기가 쉽지 않고 지적하기도 어렵습니다.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뱀장어 같아서 잡기도 어렵고 많은 사람이 쉽게 미혹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래의 글을 읽으면 그가 양태론자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5번을 보겠습니다.



5. “마찬가지로 아버지, 아들, 성령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 하나님의 세 방면이다. 예를 들어 얼음은 물이 되고 물은 수증기가 된다. 즉 한 실체가 세 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그 실체가 수증기의 상태에 이를 때에 우리가 호흡하는 데 유용하다. (하나님 297쪽)”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얼음과 물과 수증기로 설명하는 것은 양태론자들이 가장 잘 쓰는 수법입니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절대로 이렇게 설명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아버지가 아들이 되고 아들이 성령이 되어 결국에는 아버지와 아들은 이름과 역사(歷史)만 남고 실체는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수증기는 과거에 물이었다. 물이었을 때 많은 일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수증기가 되어 더 이상 물이 아니다. 그리고 이 수증기는 물 이전에 얼음이었다. 얼음이었을 때 많은 일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얼음이 아니다. 지금은 얼음도 없어졌고 물도 없어졌고 수증기만 있다’ 이 논리로 하나님을 설명해 보십시오. 오늘날 아버지와 아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분이 됩니다.

위의 예로 하나님을 설명하는 사람은 아주 명백히 아버지와 아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트니스리와 지방교회는 여전히 아버지와 아들의 존재를 시인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주장이 성경과 같은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아버지와 아들의 현존(現存)을 시인한다는 것은 이제는 수증기가 된 ‘얼음’과 ‘물’을 시인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경과 다른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의 양면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양태론자라는 정죄를 받지 않기 위해 자신을 포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는 양태론을 주장하면서 겉의 말로는 정통삼위일체론 뒤에 가서 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정통삼위일체론자로 착각하게 됩니다.

양태론자라는 정죄를 받지 않으려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말할 때 ‘얼음, 물, 수증기’ 논리를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그들의 술수에 속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래의 수박 비유에서도 위트니스리는 아버지와 아들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6. “아버지는 온전한 수박으로 설명된다. 아들은 조각난 수박으로, 성령은 수박의 즙으로 설명되어진다. 이제 여러분은 요점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일 뿐 아니라 아들도 된다. 그리고 아들은 아들일 뿐만 아니라 성령이 되기도 한다. 바꿔 말하면 이 수박은 먹기 위한 조각도 되며, 우리 안에 있는 즙도 된다. 그 수박은 먹혀진 후 없어진다. 본래 그 수박은 식탁 위에 있었지만, 그것을 먹은 후에 그 수박은 온 가족 속에 있는 것이다”(하나님의 경륜, 55-56쪽).“


-- 위와 같은 비유도 양태론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비유입니다. 아버지가 온전한 수박이고 아들은 조각난 수박이고 성령이 수박 즙이라면, 아버지가 계실 때는 아들과 성령이 계시지 않았고, 아들이 계실 때는 아버지와 성령이 계시지 않았고, 성령이 계시는 지금은 아버지와 아들이 계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위의 문단에서 그는 분명히 ‘없어진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온 가족 속으로 들어가 완전히 소화된 수박은 더 이상 수박이 아닙니다. 통수박도 없어졌고 조각난 수박도 없어졌고 수박 즙도 없어졌습니다. 사람 속에 남은 것은 영양소와 배설물입니다. 그것을 두고 누구도 ‘수박’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배설물도 없어지고 양분은 사람의 일부분이 됩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성령이 사람 속으로 들어온 후에는 아버지도 아들도 성령도 없어지고 사람의 영과 합해진 ‘한 영(고전6:17)’만 남습니다. 이것이 그의 신학입니다. 그의 이렇게 빗나간 ‘수박신학’에서 신성을 모독하는 참람한 ‘신화(神化)교리 - 하나님이 사람 되심은 사람을 하나님 되게 하려 하심이라 (신격에서가 아니라 생명과 본성에서)’도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이 같은 그의 주장이 한 면으로는 맞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완전히 틀렸습니다. 이것은 한 면으로도 맞지 않는 것이며 어떻게 보아도 맞지 않고 완전히 틀린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수박에 비유하는 것 자체가 양태론자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7번은 성육신에 관한 글인데, 여기서도 위트니스리는 양태론자들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7. “전통적인 가르침의 영향 때문에 우리는 온전한 하나님이 아닌, 아들 하나님만 성육신이 되셨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실상 신약은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신약은 하나님이 육신 안에 나타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온전한 하나님이 성육신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신약의 결론, 그리스도 78쪽)”


-- 여기서 위트니스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들 하나님만 성육신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하나님, 그의 표현대로라면 온전한(?) 하나님이 성육신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성경을 얼마나 왜곡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위의 문장에서 그는 ‘신약은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고 말한다.’고 말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성경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요한복음 1장 1절을 볼 때 ‘말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 성령 하나님’과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 ’아들 하나님’입니다.

성경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인 하나님이 육신 된 그분에 대해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합니다. 육신 된 그분이 ‘독생자’ 즉 ‘아들‘이 아닙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구절에서 ‘말씀’이 ‘아들 하나님’을 가리킨다는 것은 웬만한 사람이면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위트니스리는 여기서 억지를 부립니다. 성경에 나와 있지도 않은 부분을 첨가하여 ‘온전한(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하나님’이 성육신 되셨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아버지가 아들 안에 함께 계셨던 것은 사실이나 이 사실을 가지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하나님이 성육신되셨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성경이 ‘성령으로 잉태되셨다’고 말하면 우리도 그렇게 말해야 하며, 성경이 ‘아들 안에 아버지가 함께 계셨다.’고 말하면 우리도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위트니스리는 성경의 표현에 그치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더하여 ‘아들이 육신이 되셨을 뿐 아니라 아버지도 육신이 되셨고, 성령도 육신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과 전혀 다른 주장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이지 ‘아버지’가 육신이 되거나 ‘성령’이 육신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이런 구별이 없을 때 결국에는 ‘성부고난설’까지 주장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래 8번의 그의 주장은 더욱 심각합니다.



8. “삼일성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전체적으로 충분치 않으며 "삼신론"에 가깝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합할 때, 하나님은 뒤에 남아 계시지 않으며, 그리스도가 보좌에 남아계시지도 않는다. 이것은(아래 문장들은) 기독교가 주는 인상이다. 그들은 아버지를 한 인격으로 생각하여 또 다른 인격이신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성취하게 하시고 그 후 아들은 또 다른 인격이신 그 영을 보낸 것으로 생각한다. 전통적인 생각으로는 그 영이 믿는 이들 안으로 오실 때, 아버지와 아들은 보좌에 남아 계신다. 믿는 이들이 기도할 때, 그들은 아버지 앞에 엎드려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침을 받는다. 신격을 세 분리된 인격들로 나누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라, 니케야 신조의 교리이다.(439쪽)”



-- 1)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합할 때, 하나님은 뒤에 남아 계시지 않으며, 그리스도가 보좌에 남아계시지도 않는다.‘ 어떻게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을까? 성경을 제대로 읽는 사람이라면 해석할 필요도 없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합할 때도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보좌에 앉아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위트니스리는 하나님의 영이 믿는 사람과 합할 때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보좌를 떠나 믿는 사람에게 오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더 이상 보좌에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너무 황당한 주장이며 성경 진리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난해한 어떤 부분에 대해 해석을 달리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된 사실을 시인하는가 부인하는가 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위트니스리는 하나님의 영이 믿는 사람과 합해진 오늘날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보좌에 계시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 위 문단에 들어있는 위트니스리의 다른 비판을 살펴봅시다. ‘그들은 아버지를 한 인격으로 생각하여 또 다른 인격이신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성취하게 하시고 그 후 아들은 또 다른 인격이신 그 영을 보낸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이렇게 비판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고 말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을 보내셨다고 말합니다(요6:57, 14:16. 15:26). 예수님께서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위트니스리는 이 말씀을 성경의 계시가 아니라 다만 니케아 신조라고 말합니다. 그가 위의 예수님 말씀을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그렇다면 그는 고의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항했다는 말이 됩니다. 이 어떠한 악행입니까?

3)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엡 3:15)’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기타 여러 말씀에 근거하여 성도들이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인데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이 성경의 계시가 아니고 니케아 신조란 말입니까? 터무니없는 주장입니다.

4) 위트니스리는 ‘구별’을 모두 ‘분리’로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와 아들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의 이런 혼동 때문에 그는 양태론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앞에 엎드려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성경적인 실행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신격을 세 분리된 인격들로 나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근거로 하여 아버지와 아들을 구별하는 태도를 향해 ‘분리’한다고 말하는 것을 볼 때 그는 ‘구별’하는 것을 ‘분리’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와 아들을 구별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그가 왜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향해 ‘삼신론에 가깝다’고 정죄하는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가르침에는 이와 같은 오류의 체계가 상당히 많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직접적인 말씀조차 무시하고 대항하는 위트니스리의 가르침을 무조건 옹호하는 지방교회는 과연 성경을 진리로 믿는 사람들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