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국기배례, 국기에 대한 맹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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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주간지 "한겨레21" 06년 1월 10일 발간 표지제목이
국기배례와 국기맹세 관련 집중 취재였습니다.
취재 담당 기자가 06.3.13. 20:30 경 홈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기자의 설명으로 최근 이 문제가 한겨례에 의하여 전면 부각된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이 홈에서 "위천교회 주일학교" 관련 자료를 살펴보았고
총공회 소속 제천남천교회의 1973년 국기배례사건을 파악하고 있었고
당시 구속된 제천남천교회의 강태호집사님과 통화를 했고
고신측의 김해여고 사건도 파악하고 있어 대화는 쉽게 이어졌습니다.
충분한 사전 파악이 되어 있던 분이어서
1975년 총공회의 대법원 승소 판례를 알려주었습니다.
고신의 김해여고는 대법원에서 패소했지만
총공회 남천교회 사건은 대법원에서 승소했습니다.
취재기자에게
공회의 순수신앙노선 원칙
국기배례 사건 관련 당시 국가가 총공회를 정보 사찰했던 역사
총공회의 유신정권 새마을교육 참여거부와 야당의 지원 요청을 역시 거부하고
순수 신앙단체로만 지켜온 역사 등을 설명했습니다.
일단 관련 보도 자료를 참고 자료로 올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총공회/내부게시판/에 적겠습니다.
한겨레21
2006.01.10 (제592호) 국기에 대한 맹세를 없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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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지책자 (한겨레21)
“국기에 대한 맹세” 없애자
그때 그 꼬마들의 ‘반국가적 행동’
1972년 진월중앙초등학교에서 벌어진 국기에 대한 경례 집단 거부 사건의 피해자들…교회 주일학교 교사는 ‘사상범’으로 잡혀가고 ‘문제아’로 낙인 찍힌 학생은 자퇴
▣ 광양·부산=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유신의 초입, 1971~73년에는 ‘국기 애국주의’가 한반도를 휘몰아쳤다. 국기에 대한 주목이 경례로 바뀌고 충성 맹세문이 작성돼 각급 학교에서 시행되자 많은 희생자들이 나타났다. 국기에 대해 경례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선생님에게 매를 맞았고 경찰에 끌려갔으며, 심지어 징역을 살기도 했다. 전남 광양에서, 충북 제천에서, 부산에서 어린 영혼들은 국가주의의 유령에 하나씩 스러졌다.
이 가운데 1972년 광양 진월중앙초등학교에서 벌어진 초등학생 50여 명의 국기에 대한 경례 집단 거부 사건은 군사정권의 파렴치함의 극치였다. 당시 신문과 방송에서 탈선 청소년으로 왜곡했던 진실을, 당시 사건에 연루됐던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재구성했다.
“얼른 사형됐으면 싶었어”
전남 광양군 진월면 오사리. 조계산 줄기가 완연히 내려와 섬진강이 휘도는 굽이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마을의 유일한 교회인 오사재건교회는 아이들의 배움터였다. 이웃 마을까지 합쳐 100명이 넘은 아이들은 교회에 모여 주일학교 교사인 양영례(60·당시 27살)씨와 감자를 캐러 다니고 노래를 부르고 옛날이야기를 들었다. 텔레비전은커녕 변변한 장난감조차 없던 시절, 교회는 방과 뒤 훌륭한 놀이터였고 양씨는 아이들의 인기 만점 누나였다.
△ 아이들에게 국기 경례를 거부하도록 했다며 구속된 양영례씨. 진원중앙초등학교 건물은 그때 그대로다. (사진/ 류우종 기자)
그러던 오사리에 1972년 6월 평화가 깨졌다. 진월중앙초등학교 50여 명이 집단적으로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한 것이다. 당시 중앙초등학교에 다녔던 김현호(45)씨의 회상이다.
“마을이 작은지라 학생들 상당수가 오사교회에 다녔어요. 목사님은 일제 때 신사참배와 마찬가지로 국기에 대한 경례도 우상숭배라고 말씀하셨던 것 같고. 그래서 많은 아이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았어요.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하지 않고, 선생님들도 크게 문제 삼지 않았지요.”
그런데 문제가 불거졌다. <조선일보> 7월21일치에 따르면, “6월 중순 4학년 1반 자치회에서 담임 서병수(당시 26살) 교사가 태극기에 대한 경례를 구령했을 때 교실 뒤쪽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돌아다보니 51명 어린이 가운데 21명이 일동 경례를 하지 않고 웃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조사를 해보니 경례를 하지 않은 아이들은 모두 오사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많은 수에 놀란 학교 쪽은 오사교회에 진상 확인을 요청했고, 오사교회는 “아무리 어린이라고 해도 학생들 개개인의 양심과 신앙의 자유가 있으니, 경례를 하라고 시킬 순 없다”고 답하며 옥신각신했다.
그러던 중 오사교회의 양영기 장로는 기독교인의 국기 경례 여부에 대해서 전남도 교육위원회에 문의했다. 문제가 커질 줄 몰랐고 순수하게 의견을 구하는 차원이었다. 그런데 도교위가 되레 놀랐다. 도교육청은 학교에 국민의례 지도를 제대로 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5학년이었던 김현호씨는 담임 교사에게 수차례 불려갔다. 교사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으면 퇴학당한다”고 겁을 줬다. 매일매일 반성문을 썼고 맞기도 엄청 맞았다. 그런데도 국기 경례를 하지 않는 아이들은 줄지 않았다. 경례 거부 사건은 일파만파 커졌다. 도교위는 경례 거부 행위를 ‘중대한 반국가적 행동’으로 단정해 경찰에 조사를 의뢰했고, 7월 어느 날 경찰 3명이 학교에 들이닥쳤다. 10살 남짓 꼬마들은 차례차례 심문당했다. 누가 경례 거부를 시켰느냐는 추궁이 이어졌다. 경찰은 조직을 엮고 주모자를 만들고 싶어했다. 아이들은 종아리에 피멍이 든 채 주일학교 교사인 양영례씨 집에 찾아와 울었다. 양씨에게도 이미 경찰이 들이닥쳐 두 번이나 조사한 터였다.
“날 잡아갈 것 같다는 예감이 들더라고. 사형당해도 얼른 사형됐으면 싶었어. 구속되기 사흘 전에 엄마한테 밥 해주면서 그랬지. 만약 내가 죽어도 천당 갈 테니까 걱정 말라고.”
과연 경찰들이 집으로 들이닥쳐 양씨를 차에 태웠다. 하룻밤을 지서에서 새고 이튿날 순천지방검찰청으로 이송됐다. “아이들에게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가르친 적밖에 없다”는 양씨에게 담당 검사가 그랬다. “다른 교회에 물어보니까, 그 사람들은 다 국기 경례를 한다고 그러는데, 너만 왜 그러냐. 미안하지만 하는 수 없다.”
△ 1972년 경례 거부 사건 즈음 주일학교 아이들이 사진을 찍었다. 맨 왼쪽이 양영례씨. (오사교회80년사)
7월22일 양씨는 구속됐다. 국기·국장을 비방한 혐의, 형법 106조 위반이었다. 사상범 취급을 받은지라 면회도 안 됐고 독방을 썼다. 그해 재판부는 양씨에게 징역 8개월, 집행유예 1년6개월을 선고했다.
양씨는 1개월여를 순천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보석으로 겨우 풀려났다. 8월 말이었다. 교도소를 나가는데 떡대 좋은 교도관이 가로막았다. “자, 이 새로 나온 맹세문 봐라. 이거 외우기 전에 절대 못 나간다.” 종이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충남에서 시행되던 국기에 대한 맹세를 문교부는 그해 8월9일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했다.)
다시 돌아온 오사리 마을은 뒤집어져 있었다. 하룻밤에 ‘반국가 사범’으로 몰린 아들딸을 둔 주민들은 교회와 주모자 격인 양씨를 멀리했다. 주일학교에 찾아오던 아이들의 발길도 끊기기 시작했다.
소문 안 난 곳으로 조용히 시집가다
양씨의 어머니는 “큰애기가 사상범이 돼서 잡혀갔다”는 사람들의 쑥덕거림이 듣기 싫어 하루 내내 섬진강가나 뒷산에 올라가 기도를 했다고 한다. 양씨는 그해 12월에 경상도 땅 고령으로 서둘러 시집을 가야만 했다. 어머니는 “감옥에 갔다온 처녀를 누가 데리고 갈 것이냐? 소문 안 난 곳으로, 될 수 있으면 멀리 시집가야지 않것냐”고 위로했다.
김현호씨는 2년 뒤 근처 진월중학교로 진학했지만,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자퇴했다. 과거 ‘전적’이 있던지라 교사들은 “나라가 있어야 교회가 있는 법이다. 교회와 학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했고, 공부하는 시간보다 벌 서는 시간이 많았던 김씨는 스스로 자퇴를 선택하고 부산으로 떠났다. 매일 양심의 시험대에 서느니, 다른 길을 찾고 싶었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 양씨는 전남 순천으로 돌아와 난 재배업에 종사하고 있고, 김씨는 부산에서 기독교 서점을 운영하며 교회개혁 운동에 헌신하고 있다. 김씨는 “그 일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내 자신의 도덕적 기준을 세우는 계기가 됐다”며 허허 웃었다. 그들은 지금도 국기에 대한 경례(맹세)를 하지 않는다. 유신의 ‘국가 종교’가 신앙과 양심, 그리고 인생을 참혹히 짓밟았던,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받지 못했고, 아직껏 국기에 대한 경례가 양심을 저버리는 일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어요”
1973년 김해여고 경례 거부 사건으로 제적되고 인생을 짓밟힌 사람들
△ (사진/ 박승화 기자)
박명순(49)씨는 기자를 만나길 한사코 거부했다. “그때 기자들처럼 왜 이렇게 괴롭혀요? 난 그때 생각만 해도 아프다고요. 내 인생에서 그 부분을 떼어내고 싶어요!”
어렵사리 본 박씨의 얼굴이 붉어지고 손이 떨렸다. 박씨가 1973년 9월 김해여고 1학년을 다니던 때였다. 그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적됐다. 12월22일 찾아간 경남 김해여고는 제적된 박씨의 생활기록부를 이미 폐기한 상태였다.
1973년 김해여고 국기 경례 거부 사건은, 문교부의 국기에 대한 맹세 암송 교육 지침 직후에 터졌다. 사건은 9월18일 교실에서 경례를 시키던 한 교사와 이를 거부하던 학생과의 언쟁에서 시작한다. 이 일로 국기 경례가 학교 안에서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연이은 교련검열대회를 준비하는 제식훈련 도중 35명의 국기 경례 거부자가 적발됐다. 학교는 이들의 이름을 게시판에 붙여놓고,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모욕을 당하도록 했다. 학교는 경례를 한다고 다짐할 때에야 이름을 지워줬다. 끝까지 남은 사람은 박씨 등 6명이었다. 윤아무개 교장은 이들을 기어이 제적 처분했다. 박씨 등은 기독교계 학교인 브니엘고로 옮겼으나, 윤 교장이 “제적된 학생은 타 학교에서 수학할 수 없다”며 교육청에 이의를 제기해 반년도 채 다니지 못하고 퇴교당해야만 했다. 당시 일부 신문은 김해여고 학생들을 ‘탈선 청소년’으로 묘사했다. 학생들은 법원에 제소했으나, 3년여의 재판 끝에 대법원은 학교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3학년을 다니다 제적된 류영화(51)씨는 “잔인한 시대”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정규 수업 일수에서 열흘만 더 채우면 됐는데, 끝내 졸업장을 받지 못했고, 여태껏 그것이 인생의 걸림돌이 돼왔다”며 “지금이라도 나머지 수업 일수를 채워 졸업장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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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맹세문은 전체주의적이다”
국기에 대한 맹세문 지은 충남교육청 장학계장 유종선씨 최초 인터뷰
1972년 문교부가 충남 맹세문을 수정해 확산시키면서 더욱 국수주의적으로 변화
▣ 대전=글·사진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대한민국 정부도, 대한민국 정부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수구보수 세력도 관심 없었던 국기에 대한 맹세의 저자를 <한겨레21>이 찾아냈다. 유종선(85)씨. 그는 1968년 충남도교육청 장학계장으로 일하며 교육감의 지시로 맹세문을 지었다. 그러나 그의 술회는 충격적이었다. 그는 지난 12월27일 인터뷰에서 “지금의 맹세문은 전체주의적”이라고 말했다.
유씨는 그해부터 충남 각급 학교에서 시행되던 맹세문이 1972년 문교부가 전국 학교로 확대하면서 일부 문구가 수정돼 의미가 변질됐다고 증언했다. 그는 1921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줄곧 교육 관료의 길을 걷다가 퇴임해 현재는 소일하고 있다. 인터뷰 장소인 대전 유성구의 한 음식점으로 자전거를 타고 온 그는 40년이 다 돼가는 기억을 더듬더듬 풀어내기 시작했다.
‘정의와 진실’ 대신 ‘몸과 마음을 바쳐’로
정부 공식 자료에는 국기에 대한 맹세가 1968년 충남 학교에서 먼저 시행됐다고 나와 있다.
△ 1968년 국기에 대한 맹세를 만든 유종선씨. 그는 "정의와 진실" 이라는 문구가 빠진 것을 아쉬워했다.
=1968년 1월 조중엽 충남도교육감이 부임했다. 조 교육감은 교육지표로 ‘충무정신’을 내세웠다. 그리고 애국애족, 자주자립, 창의창조, 염결무사, 감투필승 등 충무의 5대 정신을 제정했다. 학생들에게 충무정신을 가르쳤고, 충무소년단을 만들었고, 아산 현충사 옆에 충무수련원을 지어 아이들을 입소시켰다. 이와 더불어 국기에 대한 맹세문을 제정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경례만 했지, 맹세문을 낭송하진 않았다. 이때부터 충남 각급 학교에서 맹세문을 낭송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이 손수 챙기며 충남 아산 현충사의 성역화 작업을 추진하고 있던 때였다. 조 교육감도 여기에 호응하기 위해 충무정신 교육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던 것 같다. 국기에 대한 맹세는 거기서 비롯됐다.
맹세문은 누가 만들었나.
=조 교육감이 애국애족을 해야겠는데, 맹세문을 만들어 보급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다. 추진 부서가 중등교육과로 떨어졌고, 당시 장학계장이던 나와 사회과 담당 장학사인 김아무개씨가 상의해 만들었다. 미국의 일부 주에서 행해지고 있는 맹세문을 참고했다. 유럽도 찾아봤는데, 대부분 국가에는 없더라. 조 교육감은 이미 숨졌다. 살아생전에 자신이 맹세문을 만들었다고 말을 하고 다녔다. 나는 공무원으로서 상부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다.
학계나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했나. 전 국민이 외우고 있는 맹세문인데 최소한의 연구나 토론, 의견 수렴 등의 절차가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런 건 없었다. 당시엔 ‘집안일’이라고 생각했다. 충남 지역 학교에서만 시행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한 달 만에 과장과 국장의 결재를 마쳤고 교육감도 좋다고 말했다.
그런데 충남도에서만 시행되던 맹세문 암송이 어떻게 전국적으로 퍼지게 됐나.
=구체적인 계기는 나도 잘 모른다. 다만 충남도교육위의 맹세문 암송이 모범적이라고 봤기 때문에 1972년 문교부가 전국적으로 확대한 것 같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당시 김종필 총리가 충남 당진의 한 초등학교에 가서 국기 게양대 아래 맹세문이 써진 것을 보고 다른 학교도 충남을 따르라고 지시했다는 말도 있더라.
현재의 맹세문을 보면, 충남 도교위의 맹세문의 뼈대를 이어받고 있다. 그러나 충남 맹세문과 몇 가지 표현이 다르다. ‘조국의 통일과 번영’이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으로, ‘정의와 진실로서’가 ‘몸과 마음을 바쳐’로 바뀌었다.
외부인사 만난 것은 처음
=전체주의적인 냄새가 나지. 나는 정의와 진실이라는 문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정의와 진실로서 충성을 다한다는 것이라면, 국가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는 충성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다른 말로 국가의 행위가 정당할 때에만 충성하겠다는 것인데. 정의와 진실을 향한 애국이 무조건적인 애국으로 둔갑했다.
=그렇다. 사실 나도 맹세문을 작성할 때 ‘몸과 마음을 바쳐’라는 문구를 넣을까 고민한 적이 있었다. ‘충성을 다한다’는 문구와 대구가 맞았으니까. 하지만 전체주의적이고 국수주의적이라서 그만뒀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문교부가 최종 확정한 맹세문에서 그 문구가 살아났다. 씁쓸했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거부하다가 피해받은 사람이 많다.
△ 1963년 현충사 충무공 영정 앞에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연설하고 있다. (사진/ 연합)
=우리야 교육감이 시켜서 맹세문을 만든 것이다. 문교부에서 전국적으로 확대했을 때는 우리의 손을 떠나 있었다. 그렇게 정치적으로 이용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때가 그런 시대였다.
1972년 문교부에서 맹세문을 수정 확정해 전국 학교에 지시할 때, 충남 맹세문의 작성 경위나 의미 등에 대한 문의가 있었나.
=나로선 그런 문의를 들어본 적이 없다. 문교부에서도 전문가를 참여시켜 맹세문을 제정하진 않았을 것이다. 충남 맹세문을 조금 고쳐서 냈을 뿐이지.
맹세문 제정 이후 30여 년 동안 정부나 국책 연구기관에서 사료 정리를 위해 찾아온 적이 있나.
=없었다. 국기에 대한 맹세문에 대한 일로 외부 인사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기에 대한 맹세는 박정희 유신 체제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한다는 것도 섬뜩하고. 강압적인 내용의 맹세문을 바꾸거나 폐지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어떻게 말할 수 있겠나. 한자로 알 ‘인’(認)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나. 말씀 언 변에 참을 인 자가 붙어 있다. 내 마음이 그렇다.
1968년 충남도교육위 국기에 대한 맹세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의 통일과 번영을 위하여 정의와 진실로써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1971년 전남도교육위 국기에 대한 맹세
나는 태극기 앞에 몸과 마음을 바친다. 나는 나라와 겨레를 지킨 태극기 앞에 몸과 마음을 바친다
1972년 문교부 국기에 대한 맹세(현재 시행 중)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교육관료와 유신체제의 합작품
박정희의 현충사 성역화 작업에 편승해 충남 교육감이 충무정신을 내세워
국기에 대한 맹세는 교육관료의 충성 경쟁과 유신체제의 애국주의 드라이브가 결합돼 탄생됐다.
박정희 애국주의의 주요 역할 모델은 충무공 이순신이었다. 그는 충남 아산 현충사를 민족의 성역으로 만들었다. 그는 1966년부터 1977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현충사 성역화 작업을 시도하면서 성역화 실무자회의에도 참가했고, 공사현장에도 자주 모습을 비쳤다. 박정희는 재임 18년 동안 충무공 탄신일 행사에 14번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충사에는 박정희의 친필 현판이 달려 있다.
충남 제2대 교육감 조중엽씨가 1968년 1월 부임하자마자 “충무정신 이어받아 충남교육 건설하자”는 교육지표를 내세운 것은 이러한 최고 통치자의 정서에 부합하자는 전략이었다. 조 교육감은 1971년 충남도청에 들른 대통령 앞에서 관련 브리핑을 하고 모범 충무소년대원의 일화를 보고했다.
“지난해 10월 중학교 3학년에 재학하고 있던 강석호군은 모범 소년대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부조리한 생활을 해 항시 어린 가슴을 조이고 괴로워해야만 했습니다. 우연히도 강군은 불치의 병마에 걸려서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됐을 때, 병석에서 아버지를 불렀다고 합니다. ‘아버지! 아무리 사회악이 심하다 할지언정 이순신 장군과 같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바르게 살아가주십시오! 그리고 나의 머리를 현충사 쪽으로 향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강군은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피어린 충고를 듣고 학교에 찾아와 두 명의 장학금을 기탁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는 “충남에서 교육지표로 충무정신을 내세운 것은 대단히 좋은 착상이다. 이 갸륵한 학생의 이야기를 산 교재로 채택해 이용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충무정신 교육의 전국적인 확대를 지시했다. 충남에서만 시행되던 국기에 대한 맹세도 그해 전남도교육위에서 자체 작성해 시행하더니, 이듬해에는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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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나는 ‘잠재적 마초’들의 노래
초등학교 교사가 바라본 국민의례와 애국주의를 통해 존재감을 확인하는 아이들…전체주의가 ‘삶의 양식’으로 자리잡은 사회에선 ‘뻔한 길’만 남아있을 뿐
▣ 이계삼/ 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
‘전체조회’(애국조회)라는 고약한 모임은 지금도 학교에 살아 있다. 아이들은 한 줄로 기다랗게 늘어서 멍하니 천장을 보거나, 신발로 바닥을 비비거나, 앞에 선 아이를 쿡쿡 찌르거나, 끝없이 히히덕거린다. ‘육체’와 ‘시간’이 서로를 뭉개고 누르면서 벌이는 지루한 싸움의 풍경.
‘전체조회’라는 고약한 모임에서…
이 모임은 언제나 국민의례라는 충성의 서약으로 시작한다. 나는 대열의 맨 뒤로 슬그머니 빠진다. 이 학교에서, 교사라는 직업인으로 살아가는 내가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은 ‘조국’과 ‘민족’이 아니라는 믿음 때문에 나는 어설픈 ‘불복종’을 감행한다. 그리고 이제 나는 국민의례 때마다 김선일이 떠오르고, 앞으로는 전용철 아저씨와 홍덕표 할아버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으므로, 굳은 얼굴로 대열의 맨 뒤에 멀찍이 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물론 나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아니다. 그리고 나에게는 ‘총’ 대신 ‘감옥’을 택한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결연한 용기도 없다. 소박하게 말하자면, 나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무언가를 응시해야 하는 의식이 사무치게 싫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갈수록 부끄럽기만 한, 이제는 수치와 모멸의 감정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내 조국의 상징 태극기 앞에서, 가슴에 손을 얹고,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노라는 맹세의 주문을 듣고 있어야 한다니.
△ 학교는 전체주의를 삶의 양식으로 가르친다. 한 초등학교의 입학식에서 아이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김경호 기자)
나는 그간 <한겨레21>을 구독하면서 독도 문제를 다룬 특집이나 우리 사회 소수자들을 옹호하는 기사들에서 우리 사회의 남성주의, 국가주의적 성향을 문제 삼는 <한겨레21>의 관점에 공감해왔다. 국가주의건 남성주의건 모두 ‘전체주의’의 한 변종일진대, <한겨레21>의 이 모든 노력은 최소한 우리 사회에서는 ‘전체주의’에 대한 가장 예민한 촉각이었다. 그 기사들을 통해 내가 배운 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목마름을 느꼈다는 것도 고백해야겠다. 예컨대 이제는 대학 면접·구술 고사에서도 ‘양심적 병역거부’ ‘동성애’ 같은 소수자 관련 문제가 출제되고, ‘톨레랑스’라는 말은 웬만한 고등학생도 알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독도, 황우석, 새만금, 천성산, 쌀수입 개방, 이라크 파병과 같은 굵직굵직한 사안 앞에서 ‘국익’이라는 도깨비 같은 수사로 포장된 이 전체주의적 성향은 좀체 수그러들지 않는 것 같다. 이것은 조·중·동과 <한겨레>의 힘의 차이인가, 보수 정당들과 민주노동당의 의석 수의 차이인가, 아니면 교총 회원과 전교조 조합원의 수의 차이인가.
‘안락한 삶’을 향한 반복된 루트들
<한겨레21>의 기사들을 통해 느꼈던 나의 목마름을 이런 질문으로 환언해보자. (국가주의, 남성주의를 위시한) ‘전체주의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이데올로기인가, 삶의 양식(樣式)인가.’ 만약 전체주의가 이데올로기라면 왜 학교 현장에서 ‘통일교육’ ‘양성평등 교육’이 공식적인 교육과정 속에 등재되고, 국가인권위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할 것을 권고하는 커다란 변화를 겪으면서도, 정작 학교 현장에서 전체조회는 사라지지 않으며, 국민의례와 같은 폭력적인 의식에 대해서는 아직도 문제 제기조차 할 수 없는가. 왜 우리 아이들은 적지 않은 교사들의 노력에도 여전히 장애인을 ‘애자’라고 부르고, 동성애자를 ‘뵨태’로 느끼며, 독도 문제나 황우석 사태에서는 어른 세대 이상으로 폭발하면서 ‘잠재적인 우익’으로 ‘잠재적인 마초’로 성장해가고 있는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국가주의, 남성주의, 그리고 그것들이 뭉친 ‘전체주의’는 이데올로기로 이 사회의 표면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삶의 양식’으로 이 사회에 깊숙이 뿌리박았다는 것이다.
△ 황우석에 열광하는 네티즌들은 국가주의의 어두운 단면이다. 논문 조작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12월24일 "아이러브 황우석" 인터넷 가페 회원들은 서울 청계천에 모여 황 교수를 위한 성탄 촛불 기원 행사를 벌였다. (사진/ 연합)
전체주의가 ‘삶의 양식’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모두는 ‘안락에 대한 희구’와 ‘그 안락을 박탈당했을 때의 공포’로 꽁꽁 묶여버린다. 따라서 아주 작은 일탈도 자신의 전 존재를 걸어야 하는 모험이 되고, 모두에게는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뻔한 길’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 아이들은 ‘안락한 삶’을 향해 나 있는 반복된 루트를, 이를테면 학교와 학원, 텔레비전과 판타지 소설과 컴퓨터 게임을 오가면서 짓무르도록 답습한다.
언젠가 나는 <구운몽>을 가르치면서 ‘성진’이 꿈속에서 ‘양소유’로 태어나 현세의 부귀영화를 맘껏 누리듯이, 너희가 직접 꿈속의 ‘양소유’가 되어 폼나게 살다가 꿈에서 깨는 과정을 써보라는 과제를 준 적이 있었다. 내 의도는 너희가 지금 갖고 있는 현세적 성공과 관련되는 ‘욕망의 판타지’를 한번 양껏 펼쳐보라는 것이었다. 판타지 소설이나 비슷한 유의 텔레비전 드라마에 익숙한 그들이었기에 충분히 가능한 과제라 여겼지만, 결과는 의외였다. 너무나 앙상한 도식, “사법고시에 패스해 온갖 연예인들 거느리며 살다가 꿈에서 깼다더라”는 졸가리로 일관하는 글들이 넘쳐났다. 그 글들에는 구체적 삶의 세계가 없었다. 그것은 성적이 우수한 아이건 그렇지 않은 아이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것은 나의 억지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비록 확대된 해석일지라도 이런 경향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에는 중요한 문제가 깔려 있다. 우리 시대의 아이들에게는 그 나이와 세대에 고유한 ‘구체적인 경험의 세계’에 대한 감각이 결정적으로 퇴화해버렸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부모 세대의 욕망이 구축한 시스템의 상자 안에 갇혀버렸다. 그들은 사물과 진정한 교섭을 이룰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학교 교육이, 어른 세대가 가르치려는 가치,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다만 본능적인 회의의 대상이다. ‘경험’이 없는데 어찌 그 경험의 알짬, ‘가치’가 자리잡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 가치의 니힐리즘,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족·친구 집단 같은 실체적 공동체건, 국가·민족 같은 상상된 공동체건)에서의 존재감의 확인, 그것밖에는 없다.
사랑 노래는 그들의 절망인가
한 달여 전 우리 학교 아이들과 3박4일간의 수련활동에 참여했을 때, 각 반의 재주꾼들이 장기자랑하는 자리에서 불렀던 노래를 나는 유심히 들은 적이 있다. 그 노래들은 대부분 내가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들은 대개 ‘사랑’을 다루고 있었는데, 아주 극단적인 상황, 이를테면 ‘너에 대한 사랑 하나로 이 세상에서 내가 겨우 사는데, 너는 죽었다. 혹은 그걸 남에게 빼앗겼고, 나는 지쳤다. 그러니 이제는 나도 죽을 것만 같다’는 식이었다. 이것은 원래 사랑 노래의 고전적인 도식일 따름인가.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사랑’들은 1천 년 이상의 까마득한 시간대로 비약한 신비화된 사랑이었고, 하나같이 처절한 비극이었고, 그래서 극단의 사랑이었다. 삶의 형상, 일상의 곡절 속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사랑의 형상은 없었다. 문득 나는 느꼈다. 아이들이 불쌍했다. 그 노래들의 밑바탕에는 삶과 세계에 대한 그들 나름의 ‘절망’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 아이들이 부르는 장중한 발라드와 고음에서 터져나오는 절규가, 자유와 일탈의 모든 가능성을 거세당한 채, 희망도 없이, 오로지 ‘안락한 삶’만을 위해 학원에서 학원으로, 입시에서 입시로, 감시와 처벌, 통제과 규율 속에서 이리저리 떠밀리면서 한 살 두 살 나이만 키워온 아이들의 황폐한 내면의 한 풍경이라고 느꼈다. 그들은 존재감을 갈구하는, 불안하고 가련한 어린 짐승이었다. 그 아이들이 타자에 대한 관용과 힘없는 것들에 대한 연민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그야말로 ‘모험’이었다.
△ 학교에서 주입되는 국가주의 훈육 체계를 거부하면 불이익을 받알 수밖에 없는 한국 사회. 군국주의 교육을 본뜬 교련은 그 우울한 초상이다. (사진/ 한겨레)
그래서 아이들은 제 존재감으로 육박해오는 것들에 열광한다. 학교에서 하는 전체 모임은 그토록 지겨워하고, 국민의례의 태극기에는 무덤덤한 아이들이 월드컵 공간에서는 붉은 악마가 되어 “대~한민국”에 눈물 흘리며 제 존재감을 확인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국민 영웅’ 황우석을 흠집내는 ‘진보주의자’들에 분노하고, 독도를 제 땅이라고 우기는 ‘쪽발이’들과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한다. “아니, 왜, ‘우리 땅’ 독도를 건드리고, ‘우리’의 영웅 황우석 박사에게 가탁된 내 존재감을 박탈해가느냐”고 말이다.
경험을 돌려다오, 경험을!
나는 우리 사회의 국가주의, 남성주의를 피부로 느끼고, 점점 ‘애국주의’에 열광하는 아이들의 흐름을 조금이라도 되돌리기 원하는 지성이 있다면, 그 노력은 단연코 이데올로기 차원의 투쟁이 아니라 아이들을 ‘자연’으로, ‘경험’의 세계로 돌려보내기 위한 투쟁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이야말로 근본적인 몸부림이다. 국가주의, 남성주의를 정연하게 비판하면서도 김훈의 <칼의 노래> 같은 마초적 허무주의, 우익적 사무라이 근성이 넘쳐흐르는 소설에 가슴 설레는 아이가 있다면, 그에게는 삶의 양식이 아닌 다만 ‘이데올로기의 혼란’이 있을 뿐이다. 가치의 니힐리즘, 아이들의 애국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은 ‘경험’ 그 자체에서 싹터오를 수 있다.
도덕 교과서의 파시즘
보편 윤리보다는 국가에 대한 희생정신만 강조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한국인의 국가주의는 학교에서 내면화된다. 국기를 신성시하는 교육은 주로 도덕 교과를 통해 전달된다. 교육부가 펴낸 초등학교 1·2학년 바른생활 교과서의 교육과정 해설서를 보면, ‘나라 사랑하기’가 ‘내 일 스스로 하기’ ‘예절 지키기’ ‘다른 사람 생각하기’ ‘질서 지키기’와 함께 5가지 주요 덕목으로 다뤄진다.
1학년 과정에서는 국기 바르게 달고 바른 자세로 애국가를 부르도록 한다는 지도사항이 소개돼 있다. 2학년에는 무궁화를 사랑하고 잘 가꾸는 교육을 하도록 돼 있다. 교육부가 제7차 교육과정 시작과 함께 1998년 펴낸 <초등학교 교육과정 해설>을 보면, 이 시기 주요 지도사항으로 △국기에 대한 경례 방법 알기 △무궁화 동산 만들기 △간첩신고 요령 알기가 나와 있다. <중학교 도덕 2>의 223쪽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애국·애족하는 마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 자신이 국가와 민족에 대한 애착을 느끼는 마음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마치 우리가 어렸을 때에 어머니 품에 안겨서 느꼈던 포근함이나 안도감처럼 자연스러운 사랑의 느낌과도 같은 것이다.”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는 <도덕교육의 파시즘>이라는 책에서 “원래 도덕은 국가나 민족의 경계 안에 가둘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육에서는 선과 악의 문제가 국가나 민족의 당파성으로 해소된다”고 말한다. 나라에 대한 자랑스러움에서 국가에 대한 개인의 의무감과 희생정신을 이끌어내고, 도덕적 인간의 전형은 국가를 위해 애쓰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래서 도덕 교과서의 단골 사진은 국립묘지 풍경이다.
이광연 전국도덕교사모임 대표는 도덕 교과서가 이러한 국가주의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제시대의 수신 과목에서 반공·도덕, 국민윤리, 다시 도덕으로 이름을 바꿔왔지만, 보편 윤리를 애국이라고 주입하는 데선 큰 진전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도덕 교과서는 애국에 대해서 한 번도 질문을 던진 적이 없다”며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일본의 군국주의를 비판하면서, 국익을 위해 이라크에 파병하는 데에 대해선 아무런 말도 없는 것처럼, 교과서는 애국(국익)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아이들이 스스로 도덕과 윤리에 대해 생각하는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주의 도덕 교과서라 할 수 있는 현 도덕 교과서의 집필진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이들은 서울대 국민윤리교육과 교수진으로 알려져 있다. 전두환 정권 때 각 대학에 신설된 국민윤리교육과는 민주화 이후 윤리교육과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서울대는 옛날 이름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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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며 일장기나 물어뜯을까?”
‘불쾌한 국수주의’ 국기 경례를 거부하는 솔그룹 ‘윈디시티’ 리더 김반장
국익이 진실을 가리는 사회에서 음악계도 민족주의 정서를 건드리면 대박 터져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국기 경례(맹세)에 대한 결연한 거부는 아니더라도 평소에 국민의례를 할 때 딴청을 피우거나,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지 않는 ‘비애국자’들은 의외로 많다. 이들은 “나는 몸과 마음을 바칠 만큼 나라를 사랑할 깜냥도 없고, 더욱이 맹세는 섬뜩하다”고 말한다.
솔그룹 ‘윈디시티’의 리더인 김반장(31)도 그들 중 한 명이다. 지난해 12월30일 <한겨레21>의 표지모델로 사진을 촬영하러 온 그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종교인도 아닌 일반인 김반장이 국기에 대한 맹세를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사회의 진보는 착각이 아닐까
국기 경례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까?
=어릴 적에 친구들 가족과 함께 서울 아세아극장으로 <서유기>를 보러 갔어요. 영화 시작 전에 애국가가 나올 때 다른 사람들은 일어나 가슴에 손을 얹는데, 전 그냥 앉아 있었어요. 그러니까 친구 아버지가 “넌 왜 안 하냐”며 뭐라 하시더군요. 집에 오면서 아버지가 그랬어요. 사람들이 일어나면 같이 일어나는 게 좋다고.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가도 국기강하식 때가 되면 막대기처럼 서 있을 때였으니까. 지금 보면 불쾌한 기억이었어요.
국기에 대한 맹세문을 찬찬히 뜯어본 적이 있나요?
=문구가 너무 민족주의적이고 국수주의적이에요. 요즈음엔 미국의 일방주의·제국주의가 이슈화됐지만, 우리 안에도 그런 게 있는 건 아닐까요? 국기에 대한 맹세가 바로 그걸 내면화했다고 봐요. ‘인류의 평등’을 위해 다짐했으면 몰라도.
국기에 대한 경례나 맹세를 하나요?
=하지 않아요. 음악을 하기 때문에 할 기회도 별로 없지요.
△ (사진/ 류우종 기자)
우리의 국가주의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세요?
=황우석 사태는 국가주의적 훈육 체계의 폐단이 그대로 드러난 것 아닐까요? 며느리도 모르는 국익 때문에 진실이 가려졌잖아요. 줄기세포 유무가 초점이 아니라 국익을 지키는 게 관심사였잖아요. 전체의 맥락이 호도됐지요. 바로 그 근원은 국가주의였고요. 제 홈페이지에 그런 생각을 올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야, 그러다 몰매 맞는다”며 주위에서 만류해 못 올렸죠. 한참 있다가 다른 음악 사이트에 올렸는데, 악플이 얼마나 많이 달렸던지. 사회가 파편화되다 보니 사람들이 공동체를 느끼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2002년 월드컵 때 태극기를 보면 괜스레 눈물을 흘린다던지.
많은 생각이 들었겠네요.
=우리 사회가 진보했다고 하는데, 어쩌면 착각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같은 때에 “우리 쌀을 살려달라”며 외친 농민 2명이 죽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황우석을 두둔하는 데 힘을 쏟고 있었으니. 같은 논리라면 농민의 죽음에 대해서도 분개했어야 하는데. 국수주의의 모순이죠.
음악계도 국가주의적 한계에서 자유롭지 않을 텐데요.
=음반을 낼 때에도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와 같은 정서를 건드리면 대박이지요. 내일 콘서트에서 일장기를 물어뜯을까? 하하. 그런 정서가 상업화되고 있죠. 그렇지만 그게 진정성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고.
한국 음식은 자랑하고 싶다
그래도 어릴 적부터 국가주의를 체내화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그런 성향을 보일 때가 있을 텐데요. 외국에 나가서 삼성 간판 보면 자랑스럽지 않아요?
=하하. 이제 그렇지 않아요. 독일의 한 친구가 그러더군요. 한국의 자랑스러운 기업이 삼성이면 바깥에서 바가지 새는 것도 잘 알아야 한다고. 무노조 경영이 그 지역에서 문제가 됐잖아요. 옛날엔 반가웠지만 지금은 별 느낌 없어요. 오히려 수많은 세파를 뚫고 자리잡은 재일 조선인들에게 동질감을 느끼지요. 아, 자랑스러운 거요? 한국 음식은 자랑하고 싶어요.
국기에 대한 맹세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나라가 민주사회라면 반드시 폐지해야 돼요. 토론과 설득을 통해서 교육이 이뤄져야 하는데, 이건 당위만 말하고 있잖아요. 우리 아들딸이 이 시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웃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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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에 대한 맹세’ 없애자
처음 누가 만들었는지 정부조차 모르면서, 아직도 거부자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나라…박정희 정권이 병영국가를 위해 1972년 만든 그 충성의식을 계속해야 할 것인가
▣ 부산·김해·대전·순천·광양=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국기에 대한 경례(맹세)를 거부하는 솔 그룹 "윈디시티"의 리더 김반장.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국기에 대한 맹세문을 작성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국기·국장 등 국가 상징물을 관리하는 행정자치부 의정팀의 한 관계자는 12월23일 다음과 같이 말했다.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국기에 대한 맹세는 1968년 충남 도교육위원회(도교위)에서 제정해 산하 초·중·고등학교에서 시행하면서 시작됐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1972년 문교부가 시·도 교육위원회에 국기에 대한 맹세 교육 실시 계획을 시달하면서 전국으로 확대됐지요.”
행정자치부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곧바로 충남 도교위에 문의했다. 그러나 이들조차도 자신이 만들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무조건적인 애국, 섬뜩한 문구
교육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행자부 자료에 따르면, 교육부의 전신인 문교부 편수국이 ‘태극기에 대한 맹세문의 암송 보급안’을 작성했다고 나와 있으나, 교육부는 처음 들어본다는 반응이었다. 교육부 관계자는 “대부분의 공문서의 기록 보존 연한이 다 되어 확인하기 힘들다”고 답했다.
전 국민이 외우고 있고, 전국의 학생들이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 읊고 있는 국기에 대한 맹세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적어도 정부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몰랐던 것뿐만 아니라 맹세문에 대해서 한 번의 재검증은 물론 사료 정리조차 하지 않으려 했던 사실이다. 아무도 국기에 대한 맹세에 대해 성찰하지 않았고, 습관처럼 외우기만 했다.
<한겨레21>의 취재 결과, 1968년 충남 각급학교에서 시행되던 국기에 대한 맹세문은 1972년 박정희 유신의 초입 때 정치적 목적으로 왜곡된 것으로 밝혀졌다. 다섯 달 동안 44명의 심의위원이 달라붙었던 국민교육헌장과도 달리 작성 과정 또한 졸속적이었다(18~19쪽 참조). 최초로 충남 각급 학교에서 시행된 국기에 대한 맹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유신 체제를 열면서 박정희는 국기를 내세워 애국주의를 고취시켰다. (사진/ 국가기록원)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의 통일과 번영을 위하여 정의와 진실로서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여기서 ‘정의와 진실로서의’ 충성이 문교부 맹세문에서 ‘몸과 마음을 바치는’ 무조건적인 충성으로 바뀌었다. ‘조국의 통일과 번영’은 국가의 영원함을 기원하는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으로 둔갑했다. 문교부는 충남도의 맹세문을 몇 자 바꿨지만, 의미의 변화는 상당하다.
‘정의와 진실로서’ 충성하는 것과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행위자의 개인적 양심과 도덕적 판단에 기초하지만, 후자는 무조건적인 애국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태극기가 자랑스럽지 않아도 자랑스러워야 하고, 대한민국은 한없이 빛나고 영화스러워야 하며, 그런 조국에 몸과 마음을 바쳐야 한다. 조국의 정의와 진실에 대한 성찰은 빠져 있다. 사람의 감성에 따라 느끼는 바가 다르겠지만 섬뜩한 문구다. 지난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정재훈(19)씨는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엄숙히 충성을 맹세할 때마다, 내 마음을 누군가에게 내놓는 것처럼 느껴졌다”며 그래서 이젠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3선개헌 뒤 애국주의 고취 운동
국기에 대한 맹세가 전국으로 확대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어땠을까.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는 “1971~72년은 박정희 정권이 병영국가로 전환하던 시기”였다며 “그때부터 오후의 국기 하강식 때 걸음을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등 각종 국가주의적 통제 시책이 강화됐다”고 설명했다. 이때는 박정희 정권이 위협을 느끼기 시작하던 때였다. 국민적 반대 속에 3선개헌을 강행하고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었으나 김대중 후보에게 패배를 가까스로 모면했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영속적 지배체제인 유신을 계획하며 국민들을 다잡았고, 국기를 사용해 무조건적인 애국주의를 고취시킨다. 1971년 3월에는 영화관에 애국가 필름이 돌기 시작했고 국기 사랑하기 운동이 펼쳐졌다. 1972년 5월3일 <조선일보> 1면에는 박 대통령이 여성경제인연합회로부터 태극기 1만 폭과 국기함 1만 개를 받은 뒤, 낙도와 벽지 주민들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국기를 존중하는 마음이 바로 애국이며 우리는 국기를 통해 올바른 국기관을 확립해야 한다”고 말한다.
△ 박준규군은 2003년 국기 경례 거부 문제로 고교에서 입학을 거부당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마치 다른 나라인 것 같다"고 말했다. (사진/ 윤운식 기자)
그러나 군사정권의 최상층부에서 계몽하기 시작한 ‘국기 애국주의’는 민중의 저변에서 선량한 피해자를 양산했다. 교단 위의 선생들은 회초리를 들고 경례를 하지 않고 맹세문을 외지 않는 학생들을 적발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반국가사범을 색출한다며 학교에 들이닥쳤고, 한 학교마다 수십 명의 학생들이 제적당하거나 자퇴했으며, 학생들을 조종했다고 지목받은 사람들은 징역살이를 했다.
충북 제천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김동길(45·가명)씨는 1973년 그 일로 인생의 여정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하루에 국기에 대한 경례를 10번을 넘게 해야 했어요. 아침에 학교 정문에서 국기를 바라보며 한 번, 조회 때 한 번, 그리고 매 수업시간이 시작될 때마다 한 번씩, 마지막으로 하교하면서 국기 하강식까지…. 나는 경례를 안 하기 위해 후문으로 다녀야 했지요.”
김씨의 종교(여호와의 증인)를 감안해 평소에 문제 삼지 않던 교사들도 애국주의 열풍이 불자 그에게 국가와 종교 가운데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교무실을 뻔질나게 드나들던 어느 날, 경찰이 찾아와 그를 오토바이에 태웠다. 경찰서에 가 조사를 받은 이후 그는 자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곧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잡화점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15년째 차를 닦으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12월23일 취재진과 만난, 한때 성적으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고 반장 선거에 당선됐던 모범생 김씨의 얼굴에는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회한이 서려 있었다.
학칙이 헌법보다 우선한다는 판례
유신의 시대만이 아니다. 유신의 악습은 34년째 지속되고 있다. 지난 11월 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는 김아무개씨는 갑자기 교감의 호출을 받았다. 학부모가 국민의례를 하지 않는 김 교사의 자질을 문제 삼았다는 것이다. 그는 “나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이며 종교적 신념 때문에 국민의례를 하지 않는다”고 설명했지만, 학부모의 민원은 교육청에까지 닿았다. 결국 주위 사람들의 중재로 원만히 해결됐지만, 그는 교장한테서 “징계가 불가피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으며 몸을 떨어야 했다.
2003년 박준규(17)군은 고입 면접 전형서에 “종교적 신념상 국기 경례를 하지 않으니 양해해줬으면 한다”는 말을 썼다가 경기 의정부 영석고에서 입학을 거부당했다. 이유는 ‘국가·사회·학교의 기본 정신에 위배되는 사상이나 특수종교를 가진 학생은 불합격 처리할 수 있다’는 학칙 때문이라고 했다. 경기 도교육청에 질의를 했지만, 도교육청은 1976년 김해여고 제적 사건의 판례를 들며 정당한 학생선발권의 행사라고 답했다.
△ 경기도 교육청은 "정당한 학생선발권의 행사"라며 학교 쪽 편을 들었다.
지난 12월23일 만난 박군은 가족과 함께 의정부에서 1시간여 떨어진 포천 운천으로 이사해, 시골 고등학교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박군은 “우리나라가 이해되지 않는다. 마치 다른 나라인 것 같다”고 덤덤히 말했다.
군사정권이 종언을 고한 지 20년이 다 되어가지만,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관성의 법칙은 유신시대 그대로다. 당시 박준규군 사건을 맡았던 이민희 전 경기 도교위 장학사는 12월29일 전화통화에서 “국민의례는 정규 교육과정인 행사교육의 일환으로, 이 교육 프로그램을 참여하지 않겠다는 학생을 뽑을 이유가 없다”며 기존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1976년 김해여고 대법원 판례가 있는 이상 법적인 근거가 있다”고 밝혔다.
김해여고 사건은 국기 경례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973년 여고생 6명이 제적당한 사건이다. 당시 학생들 쪽은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당했다고 소송을 제기했지만, 1976년 대법원은 “(학생은) 학교의 학칙을 준수하고 교내 질서를 유지할 임무가 있을진대… 원고들의 종교의 자유 역시 그들이 재학하는 학교의 학칙과 교내 질서를 해치지 아니하는 범위 내에서 보장된다”며 학교 쪽의 손을 들어줬다. 학칙이 헌법상의 종교와 양심의 자유보다 상위에 있다고 한 놀라운 판결이었다.
이 대법원 판례가 유효한 이상 국기 경례(맹세)를 하지 않은 공무원이나 학생 혹은 국민은 누구라도 언제 어디서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경례 거부가 국기 비방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대한민국을 모욕할 목적으로 국기를 비방할 경우 형법 106조에 따라 1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5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1972~73년 구속된 이들도 모두 이 조항을 적용받았다.
애국의 훈육체제는 계속된다
권혁범 대전대 교수(정치학)는 “2000년대에도 국가주의에 입각한 훈육체계는 지속되고 있다”고 말한다. 2000년 12월 야구선수 조성민과 탤런트 최진실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맡은 한 교수가 “요사이 일부 연예인들의 무질서가 사회 문제로 불거지고 있다. 공인인 두 사람이 잘사는 것은 사회적·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이라고 했다는 말의 이면, 연말 동창회 시작에 앞서 퍼지는 애국가 소리,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논문 조작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애국주의 네티즌, 논문 조작을 폭로한 문화방송 의 광고 중지 사태 등은 국가주의 훈육이 갖고 있는 위력을 보여준다.
△ 2005년 9월 한 봉사단체가 행사에 앞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우리는 30년 넘게 아무 의심 없이 이런 의식을 거행해 왔다.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권 교수는 “이번 황우석 사태에서도 보이듯이, 한국 사회에선 자유·평등과 같은 가치에 대한 윤리적 고민이 선행되지 않고 애국만이 우선 가치로 떠오른다”며 “어릴 적부터 의심 없이 해오던 국기에 대한 맹세와 같은 관습들이 한국인의 국가주의를 떠받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에서 국가는 이미 도덕적으로 고정된 실체이며 국가에 대한 비판적 질문은 봉쇄된다. 국기에 대한 맹세의 거부권도 주어지지 않는 현실에서 국가의 우월성에 의문을 품거나 국가에 대한 복종 의식을 극복하기란 힘들다. 권 교수는 “적어도 현재의 파시즘적인 성격의 맹세문은 바뀌어야 하며, 시행되더라도 공무원이나 군인 등 국가와 관련한 한정적인 집단으로 제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실보다 애국이 앞서는 시절은 계속되고 있다. 아이들은 지금 ‘정의와 진실’에 대해 성찰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는 다짐만 계속하고 있다.
국기에 대한 경례·맹세 관련 주요 일지
1893년 1월 태극과 4괘가 그려진 기를 국기로 사용토록 왕명으로 공포(고종 20년)
1949년 10월 국기제작법 공포
1968년 3월 충남도교육위, ‘국기에 대한 맹세’ 시행
1968년 12월 국민교육헌장 제정
1971년 3월 극장에서 애국가 영화 상영
1972년 7월 전남 광양 진월중앙초등학교 국기 경례 거부 사건, 주일학교 교사 양영례씨 구속
1972년 8월 문교부, ‘국기에 대한 맹세’ 암송교육안 지시(문교부 장학 1011-688)
1972년 12월 유신헌법 제정
1973년 4월 전남 해남 신죽교회 이아무개 전도사 국기 모독 혐의로 구속
1973년 9월 경남 김해여고 국기 경례 거부 사건, 6명 제적
1973년 충북 제천 지역 학교에서도 무더기 제적 사태
1980년 10월 국기에 대한 경례 때 맹세 병행 실시(국무총리 지시 제23호)
1984년 2월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제정·공포
1996년 12월 학교·군부대를 제외한 곳에서 국기의 연중 24시간 게양 가능
2002년 11월 월드컵 계기로 국기 문양과 태극 문양 등을 각종 물품에 활용할 수 있도록 국기 규정 보완
2003년 5월 유시민 열린우리당 의원 “국기에 대한 맹세는 파시즘의 잔재”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가 보수 신문의 공격을 받음
황국신민서사의 추억
일제시대 천황에 대한 충성 구호, 50년대 반공 구호로 이어지는 맹세의 역사
국기에 대한 맹세는 일제시대에 복창하던 황국신민서사와 흡사하다. 월요일 아침 애국조회는 물론 결혼식 때도 암송됐다는 황국신민서사(아동용)는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2.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께 충의를 다합니다. 3. 우리들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고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천황에 대한 충성 구호가 반공 구호로 바뀌었다. 당시 교과서 표지 뒷면에는 ‘우리의 맹세’가 실려있었다.한홍구 교수는 “이는 당시 군인들이 외우던 국군맹서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리의 맹세는 다음과 같았다. 1.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딸,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2.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침략자를 쳐부수자. 3.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
국기에 대한 맹세가 전 국민의 일상으로 침투한 건 박정희 정권이 유신으로 치닫던 무렵이었다. 1968년 충남에 이어 1971년 전남이 자체적으로 맹세문을 만들어 시행했고, 1972년에는 문교부가 전국 학교로 확대 시행했다. 1980년에는 국무총리 지침에 따라 학교뿐 아니라 전 국민이 국기 경례를 할 때 맹세를 병행하도록 했다.
현재 대통령령인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 3조는 국기에 대한 맹세의 문구와 실시 방법을 명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때는 맹세문을 낭송해야 하고, 애국가를 주악할 경우에는 생략할 수 있다.
‘맹세 강요’는 국제적인 위법
강제 결의안에 위헌 판결 내린 미 연방대법원, 필리핀 대법원도 허용 안 해
△ 2004년 3월 "충성의 맹세"를 거부하는 시민들이 연방대법원 건물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EPA)
미국의 ‘충성의 맹세’(Pledge of allegiance)는 1892년 침례교 목사인 프란시스 벨라미에 의해 만들어졌다. 각 주에 따라 실시 여부와 회수가 다르지만, 공립학교에 다니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다음과 같은 맹세문을 암송한다. ‘나는 미합중국 국기와 그 국기가 상징하는, 나누어질 수 없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와 정의를 베푸는, 하느님의 보호 아래에 있는 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합니다.’
미국에서도 ‘국기 애국주의’ 열풍이 분 적이 있었다. 1942년 웨스트버지니아주 교육위원회는 공립·사립학교에 ‘국기에 대한 맹세’를 강제하는 결의안을 채택해, 맹세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에게 퇴학 처분을 내리고 맹세를 하지 않는 한 재입학을 불허했다. 그러나 이 조처는 얼마 안 돼 대법원의 심판을 받았다. 연방대법원은 “특정 신념을 언어 또는 행동으로 고백하도록 시민에게 강제할 수 없다”며 이 조처가 연방헌법에 위배된다고 판결했다. 2002년 6월 제9순회연방항소법원은 맹세문 가운데 ‘하느님의 보호 아래’라는 문구가 연방헌법 1조의 ‘국교 금지’ 조항을 위반했다고 판결했다.
필리핀에도 비슷한 판례가 있다. 필리핀 정부는 1955년 모든 공·사립학교에 국기 경례를 실시하도록 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그러다 1990년에는 세부 지역에서 경례를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 학생들이 퇴학당해 사회적 논란이 됐다. 대법원은 1994년 “국민의례를 강요당할 수 있다는 발상은 현 세대 필리핀 국민의 양심과 조화를 이루지 않고 자유로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유럽에서는 전 국민이 외우고 있는 맹세문이 없을뿐더러 학교에서 국기·국가 교육을 받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이런 논란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국가 가사를 모르는 사람도 허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