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평양대성회 진행 과정 - 백광진목사님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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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 평양대성회 진행 과정 - 백광진목사님 관련


“복음심장병원은 군중 동원비 대신 지어주는 것"

조그련과 평양대성회 협상한 우리민족교류협회 송기학 이사장 인터뷰

조준영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났던 대부흥을 재현하자는 한국 교계의 목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과연 올해 평양에서 북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대형집회가 열릴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이 높다.

우리민족교류협회(이사장 송기학)는 지난해 5월 북한 조선그리스도교연맹(위원장 강영섭)과 2006년 10월 1백만 명 규모의 대성회를 평양에서 가질 것을 합의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이후 이 대성회는 주도층의 불협화음과 ‘심장병원 대가로 갖는 행사다’는 여론 등으로 우여곡절을 겪었으며, 그후 몇 차례 집회 일정이 변경되는 과정을 통해 ‘과연 성사될 수 있을까?’ 는 의혹을 받게 했다.

그러나 최근 한국 교회는 교단장협과 한기총, KNCC 대표들간의 회의를 통해 모든 교단을 아울러 평양대부흥 백주년 기념행사를 서울과 평양에서 한 차례씩만 치르기로 합의해, 평양대성회는 다시 성사될 가능성을 갖게 됐다.

지난해 5월 조그련과 계약을 성사시킨 우리민족교류협회 송기학 이사장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한국 교회가 조금만 더 힘을 합한다면 평양대성회는 전혀 무리 없이 치러진다”며 대회 성사 가능성을 예견했다.

송 이사장은 또 심장병원을 대가로 성회를 개최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에 대해 “일반행사를 치르는 데도 동원비를 주는데, 동원비 대신에 기념사업을 해서 계속 선교를 하겠다는 차원이다”고 밝히고, “심장병원을 거론한 자체도 북측이 아니라, 내가 설득을 통해 제시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송 이사장은 또 초기에 활동했던 장희열 목사, 백광진 목사 등에 대해서도 “그 목사님들 본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각자 각자가 나름대로 역할을 했고 중요한 일을 해냈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백 목사 등에 대해서는 "내려놓는다는 게 오히려 더 꼬이게 해놓았다"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으면서도 “지금도 이 성회에 함께 할 의향이 있다면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래는 송기학 이사장과의 인터뷰 전문.


▲ 우리민족교류협회 송기학 이사장 ⓒ뉴스파워


Q. 지난 5월 이후 행사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바뀌기도 하는 등 평양대성회에 대한 우여곡절이 많았다. 평양대성회 이야기가 나온 경위와 과정을 설명해 달라.
5년 전에 이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렇게 큰일인 줄은 몰랐다. 그때 당시 우연찮게 길선주 목사님 책을 읽다보니까 1907년에 대부흥이 있었다. 그러면 앞으로 5년 후면 2007년 백주년이 되는 해인데 한국 교회가 그대로 보내버리면 좀 그렇지 않겠나 싶었다. 5년 전만 해도 지금하고 남북관계가 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북측하고 얘기했던 것은 대규모 집회를 하자는 개념이 아니었다. 북측 사람들하고 이야기하면서 ‘2007년이 되면 한국 교회사에 특별한 해인데 그 일이 평양에서 일어났다. 그때 내가 한국 교계 목사님들 약 20~30분 모시고 올라갈 테니까 봉수교회에서 예배만 한 번 보자’는 거였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북측에서 ‘하려면 뽄때나게 하고 안하려면 말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결국 100만 명 규모의 대성회를 가지자는 말까지 나오게 됐다.

교계에 여러 가지 이야기가 많다. 제일 처음 여기 서명한 사람이 장희열 목사, 백광진 목사, 이분들인데 왜 바뀌었냐? 개중에는 내가 적당히 목사님들을 이용해먹고 활용가치가 없으니까 차버렸느니 어쨌느니부터 시작해서 별 이야기가 많다. 그 목사님들 본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내가 이 일을 전체적으로 이끌어오면서 느끼는 것은 각자 각자가 사명을 다했다는 것이다. 처음에 장희열 목사님이 함께 해주지 않았으면 처음 서명 자체가 쉽지 않았다. 북측에서 처음 이 이야기가 나왔을 때, ‘우리민족교류협회라는 조그만 단체가 이 큰 일을 할 수 있겠느냐?’ 했었을 때 북측에서는 보이지 않는 묵계 가운데, ‘조용기 목사가 소속된 큰 교단의 총회장이 여기에 대표회장으로 있구나’ 하는 것이 보이지 않게 역할을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그것에 대해서 사명을 한 것이다.

그 자체에 의해서 장 목사님이 조금만 지혜롭게 이걸 해나가셨다면 좀 더 좋았겠지만, 어쨌든 간에 조용기 목사님을 여기에 개입시키려는 어떤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어떤 어려움 때문에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시는 결과가 된 것이다. 거기에는 또 내 잘못도 크다. 우리 협회의 대표회장이었기 때문에 내가 그분을 적극적으로 앞세우고 했더라면 상황이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이 일이 되겠다 싶으니까 여러 사람들이 밀려들었는데, 그 과정에서 내가 교통 정리를 잘못한 것은 보이지 않게 있다.

또 어쨌든 간에 우리민족교류협회라는 단체가 계약을 해왔고, 일단은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민족교류협회가 이 일에 있어 주인이었다. 그런데 몇몇 목사님들이 나도 없는 사이에 6월 12일 기자회견을 했다. 그날이 월요일이었다. 평양을 갔다와서 목사님들과 ‘기자회견을 할 거냐 말거냐’ 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나는 기자회견을 하지 말자고 했다. 왜 그랬냐면 ‘이 상황 자체가 원체 어렵게 될 듯 말 듯 하다가 됐고, 나도 이 일에 준비해 놓은 게 없다. 갑자기 됐으니까 정리를 좀 하자’고 했다. 첫 단추를 잘 꿰야 하기 때문에 나는 기자회견하는 걸 반대를 한 것이다.

그때 목사님들이 한 이야기가 ‘집사님은 걱정하지 말아라. 한국 교계는 우리가 잘 아니까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계약하고 나서 며칠 안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북측에서 다시 나를 만나자고 북경으로 급히 좀 오라는 연락이 왔다. 아직 기자회견을 하기도 전인데 100만 명 동원이라는 게 신문에 나가버리면서 그 자체가 북측에서 문제가 돼서 이걸 수습하려고 나를 만나자고 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주일날 담임목사님(백광진 목사)께 ‘주일 오전예배 보고 오후 비행기로 북경을 갔다와야 이 일이 되어질 것 같다. 자칫 잘못하면 이 일 자체가 틀어질 것 같다’ 하니까 ‘다녀오십시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랬다.

그러면 기자회견이라는게 상식적으로 그렇지 않나. 기자회견이라는 게 몇 시간 만에 준비하는 건 없다. 기자들한테 통보도 하고 최소한 하루 전에는 계획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러면 내가 주일 오후에 나갔을 때는 이미 기자회견이 예견돼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그때까지 기자회견의 ‘기’ 자도 안 나왔다. 그리고는 내가 심양에서 북측 인사를 만나는데 당시 협회 사무장 목사님한테 전화가 급히 왔다. ‘큰일났다’는 것이다. 이러이러해서 내일 오후에 목동제자교회에서 기자회견을 한다는데 우리 협회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내가 같이 화를 내면서 ‘그러느냐?’ 하면 시끄러워질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으니까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목사님이 조금은 섭섭하겠지만 내가 들어가서 상황을 다 설명하겠다. 내일 기자회견이 끝나고 나면 우리 협회에 여러 가지 전화가 올텐데, 말이 서로 틀려지면 이 일이 될 일도 깨진다. 그러니까 아예 전화를 받지 말든가 모든 것을 나한테 미루거나 피해라’ 그랬다.

그리고는 다음날 일을 끝내놓고 들어와 보니까 일이 좀 묘하게 돼 있었다. 내가 들어와서 목사님들한테 ‘왜 그랬냐?’ 따질 수도 없고, 그때까지만 해도 ‘목사님들이 지혜롭게 잘 하시겠지’ 싶었다. 그러나 거기서 ‘최소한 우리 사무장은 모른다 할찌라도 협회 대표회장으로 있었고, 이 일 자체를 같이 서명했던 장희열 목사님한테는 어떻게 전화 한 번 안할 수 있나? 같은 목사인데, 최소한 그분을 자리에 앉혀놨어야 나중에 뭐가 되지 않느냐?’고 한 마디는 했다. 또 그날 국민일보 미션면 1면에 이게 크게 보도되면서, 1차 조간판에는 대표회장 장희열 목사님이 나왔는데, 2판에는 지워져버리고 본부장 누구해서 다른 목사가 나오고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

장희열 목사님도 한 교단의 총회장 입장에서 자존심이 있는 거고, 여러 가지 입장에서 본의 아니게 상처를 입었다고 본다. 그래서 내가 개인적으로 내 본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한 번 대화를 하려고 했다. 전화 통화는 몇 번 했는데 원체 총회장으로 바쁘다보니까 대화를 못했다. 그런데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내가 장희열 목사님만 이용해먹고 차버렸네 어쩌네 별 이야기가 다 나왔다. 내가 같은 목회 선상에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 정도 기자회견을 해서 해명하고 싶은 생각이 있지만, 지금 내가 집사로서 목사님들과 대적해서 싸움하는 꼴이 되는데 그럴 필요가 뭐가 있느냐? 여기서 끝나는 게 가장 좋다. 다만 이 성회가 잘되면 좋은 거고, 안되면 또 거기까지 하나님의 일인가보다 하고 끝나자는 식으로 하고 말았다.

이렇게 여러 번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9월 30일 원로들이 모이게 되고, 그 다음 교단장협의회가 제주도에서 모이면서 남북행사를 단일화해서 하나로 하자는 식으로 진행되어 왔다. 성령백주년 행사는 지난 1월 14일 평양에서의 기념예배로 이미 한 거나 마찬가지다. 행사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로 묶었다는 자체가 큰 성과가 아닌가 본다. 이 행사를 하든 안하든, 북한에서는 못하고 국내 행사만 한다 할찌라도 이게 매개체가 돼서 하나로 묶는 역할을 했다. 이게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봤을 때 국내 행사는 크게 무리 없이 치러질 것 같다. 평양 행사는 상대가 있는 거니까 어떤 형태로 될지는 모르지만, 다만 내가 20년 가까이 북한하고 거래를 해왔고 이번에 1월 행사로 봤을 때 한국 교회가 조금만 힘을 합한다고 한다면 전혀 무리 없이 치러진다고 본다. 얼마 전에 정부의 모 기관 사람을 만났더니 ‘이건 사변적인 일이다’ 그런 표현을 쓰더라. 6.25사변처럼 대단한 일이라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하나 되어 정부와 잘 협력해서 이 일을 치렀으면 좋겠다.



▲ 송기학 이사장 ⓒ뉴스파워


Q. 우리민족교류협회는 한국 교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언제부터 시작되었으며, 또 대북민간단체협의회나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1991년에 우리민족문화교류협회로 시작해서 1994년에 서울시에 사회단체 등록을 했다. 사회단체로 등록해 <월간 우리문화>라든가 하는 잡지와 책을 발간하면서 활동을 해왔다. 그러다 1999년 12월에 외교통상부에 한·러고려인문화교류후원회로 사단법인 등록을 했다. 그 후에 우리민족교류협회로 다시 명칭변경을 해서 지금까지 왔다.

북측과는 90년대 초부터 접촉을 했다. 북측과 여러 가지 일로 접촉을 하면서 느껴진 게 뭐냐하면 ‘북한 사업은 알려지는 게 도움이 되는 게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저 조용조용히 하는 게 좋다. 민화협이니 단체에서 몇몇 전화가 와서 ‘가입해서 같이 활동하자’는 얘기가 있기는 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일 하나 하니까 조금 주변에 알려진 것이지 그리 대단한 단체가 아니다. 또 그런 데 가입해서 대단하게 호흡 맞춰서 할 만한 재정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가입해서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것 보다는 이렇게 조용히 하자’ 해서 지내온 것이다. 단체의 성격상으로 봐서 전혀 어떠한 하자가 있거나 그런 것은 없다.

Q. 북한 관련 사업은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됐나?
중국에 무역업을 하고 있어서 드나들게 됐는데, 한번은 연변에 가게 되었다. 당시 연변일보 사장과 교류가 돼서 개인적으로 상당히 가까웠는데, 그분이 ‘여기까지 왔으니까 압록강쪽 구경을 가자’해서 같이 가게 됐다. 그때 재미동포 노부부가 압록강가에서 대성통곡하며 울고 있었다. 연변일보 사장에게 ‘저 사람들 옷차림 봐서는 중국사람들 아닌 거 같은데, 왜 그러냐?’ 했더니. ‘여기 오면 저런 사람 많습니다’ 했다. 그때만 해도 막 중국이 개방이 되면서 교포 실향민들이 들어와서 ‘저기만 건너면 내 고향인데’ 하면서 우는 것이었다. 옆에서 보는 우리도 같이 눈물이 날 정도였다. 나는 실향민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지만 아주 충격적이었다.

차를 타고 돌아오는데 연변일보 사장에게 그런 얘기를 했다. ‘연변일보 사장이면 연변에서 우리 조선족의 지도자급 아니냐? 당신이나 나나 뭔가 해야하는 걸 안느끼나?’ 했더니 웃었다. 그런데 그때는 웃고 말았는데 그 사람도 나름대로 지식층이니까 뭘 느꼈던 모양이다. 다음에 들어갔더니 나름대로 연변대학 총장이라든지 여러 사람하고 의견을 규합해 놨었다. 그래서 ‘우리가 뭔가 한 번 만들어보자’ 그래서 탄생한 게 <우리문화>다. 북한은 형식적으로 참가했지만 어쨌든 한국, 북한, 중국이 공동으로 책을 발간했다. 그때만 해도 어렵게 만들어진 책이었다. 한국에서는 월간지 발행을 받았다 하더라도 중국정부에서 공동발행 허가 받았다는 것은 그때 우리가 최초였다. 잡지를 보면 분명히 우리 사무실 밑 인쇄소에서 찍었지만 출판은 중국으로 돼 있다.

Q. 대북사업을 활발히 해오고 있는 굿네이버스나 한민족복지재단 등 다른 단체들도 많은데, 북한이 우리민족교류협회와 협정을 맺었다. 북측에서 신뢰도가 높은 것 같은데?
사회주의 국가의 관계라는 게 우리들이 봤을 때는 비정상적인게 더 많다. 정상적으로 봤을 때 이 길로 가야 되는데, 저 길로 가는 경우가 많다. 초창기 때 대 중국관계를 하면서 늘 나왔던 말이 ‘중국은 법보다도 인간관계’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 관계 라인에서 상대편의 역량이 얼마만큼 작용이 되느냐가 중요하다. 이 일을 여기까지 해오는데, 내가 봤을 때도 내가 특별히 잘나고 그래서 이 일이 됐다고는 안 본다. 그러나 적어도 1990년도부터 관계를 맺어오고, 한 20년 가까이 한 라인과 같이 일을 해왔던 게 작용했던 것 같다. 북측 상부 관계자도 ‘10년을 넘게 보고를 쭉 받아왔는데, 단 한번도 당신이 요구한 게 없었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한 1년 정도 일하면 ‘무역을 하게 해 달라, 뭐를 해 달라’ 그러는데 나는 그게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궁금증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자기네들 무역일꾼이라든가 여러 가지 형태의 사람들이 중국에 나와 있는데 그 사람들 얘기가 ‘아무리 한국 사람들을 오래 사겨도 5년이 넘는 걸 못봤다’는 것이다. 5년이 되면 파트너가 바뀌고 싸움이 벌어지고 이러는데, 20년 가까이 아무 이유도 없이 이런 식으로 대해왔다는 것에 대해서 좋게 본 것 같다.



▲ 우리민족교류협회 현판 ⓒ뉴스파워


또 자기들 정보망에도 조사해 보니까 내가 대북사업 하면서 당했던 어려움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분들이 웃으면서 하는 얘기가 ‘이제는 자기들이 나를 밥 먹고 살게끔 만들어줘야 하겠는데 뭔 일을 했으면 좋겠냐?’ 했다. 그래서 나왔던게 골재 사업 건이다. 북한과 처음으로 골재 계약을 했던 게 나다.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 하기 전에 내가 ‘휴전선을 통해 육로로 모래를 실어올테니까 허가를 해달라’고 통일부에 최초로 갖다 냈던 사람이다. 그때 통일부에서 나한테 미쳤다고 말이 될 일을 하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김대중 대통령이 정상회담 하고 나니까 육로가 열리네 어쩌니 하는 얘기가 나오고, 결국은 실제 육로로 골재를 실어오는 사람이 생겼다.

또 지금은 한국에 북한식 식당들을 많이 있지만, 그때 이미 통일부에 ‘주방장부터 시작해서 종업원까지 전부 북한 사람으로 데려오는 평양 식당 체인을 만들겠다’고 허가를 요청하기도 했다. ‘남북교류라든 게 우리가 북한에 들어가고 북한 사람도 와야 된다. 그래야 서로간 이게 되는 거다’ 이렇게 설득을 하다가 결국은 못하게 됐다. 김대중 대통령 정상회담 하고 나서 다시 한 번 시도해보랬는데 그때는 또 북한이 문제가 꼬여있는 상황이어서 못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일이 많이 있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큰일을 하다가 안됐을 때도 자기들한테 물어내란 말도 없었고, 그대로 웃으면서 지나가고 지나가고 하는 게 북측으로서는 어떤 신뢰가 쌓인 것 같다. 그래서 북측 사람들 말로는 ‘다른 사람들은 다 못 믿어도 당신은 믿는다’고 한다.

이번 일도 참 묘하게 됐다. 일종의 자존심 싸움으로 ‘평양에서 이 집회가 되겠느냐?’하는 말에 그 사람들이 막 화를 내면서 ‘왜 못하느냐? 우리도 종교의 자유가 있다’ 해 가지고 말싸움이 붙은 게 어느 날 갑자기 일이 진행이 됐다. 지금 북측에서도 그 이야기를 한다. ‘한국의 그 많은 단체들, 몇 억 달러를 평양에다 던져주겠다는 단체도 있었는데 왜 우리한테 물려가지고 골치아파 죽겠다’는 이야기도 한다.

Q. 북측 파트너가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이다. 일부에서는 조그련이 민화협이나 다른 단체들에 비해 힘이 없는 단체여서 행사 진행이 어렵지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처음 이 일이 진행됐을 때 한 5년을 끌다가 마지막 단계에서 우리 정부로부터 어렵게 승인을 받았다. 그러면 ‘북한 어느 단체하고 할 거냐?’는 말이 나왔다. 그때 북쪽에 중간에서 일했던 분이 하는 얘기가 ‘민화협’하고 하라고 했다. ‘그래야만 당신이 고생을 덜하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때 내 나름대로 ‘적어도 한국 교회가 선교를 안하려면 모르거니와 선교를 하려고 한다면 어떠한 어려움이 있고 힘들더라도 조그련 자체를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과거에 ‘중국 삼자교회는 엉터리니까 간섭을 하지 말라’ 그랬는데 결국은 중국 삼자교회를 중심으로 중국이 지금 부흥하고 있다. 북쪽도 마찬가지다. 조그련이라는 놔두고 다른 어떤 단체와 해서 선교를 하려고 한다면 그건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사이비든 엉터리든 그걸 떠나서 그 정부가 인정하는 단체를 변화하게끔 만들어가는 게 더 쉽지 생뚱한데서 자꾸 일하려고 하면 되겠나? 그래서 ‘조그련하고 하겠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이 행사를 조그련하고 하면 조그련 자체가 힘이 없기 때문에 당신이 고생한다’ 그랬다. 그래도 내가 ‘고생하는 건 감수할 테니까 조그련 하고 하자’ 해서 조그련 하고 일이 진행된 것이다.

또 북조선의 권력의 구조는 어느 한 기관이 특별나게 설치게끔 되어 있지를 않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게끔 묘한 구조가 돼 있다. 영역 자체가 종교행사이기 때문에 누구하고 손 잡고 일을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조그련하고 일을 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조그련이 다른 데서 지시를 받아서 했을 때 그 사람들의 기분하고, 자기들이 바로 했었을 때 기분은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조그련 분들도 조금 불안해 하지만 신이 나 있는 것이다. 자기들 말로는 ‘지금 조그련 성립 이래 최고의 일이다. 이게 선교가 아니냐’는 식으로 강변을 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잘했다고 생각한다. 또 일하는 데 조그련하고 해서, 그쪽 힘이 약해서 내가 일하는 데 어려움이 있냐면 전혀 없다. 지금 현재 문제는 북쪽이 문제가 아니라 남쪽이 문제다. 북쪽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이번에 1월 14일에 헤어지기 직전에 조그련 강영섭 목사님과 오경우 목사님과 차를 마시면서 얘기를 했다. ‘만약에 이 일이 진행된다고 한다면 남쪽과 북측의 어떤 교회가 만나서 백주년 행사를 했다는 자체도 교회사에 남고 중요한 일이고, 또 그걸 기념해서 병원을 하나 짓는 것도 남는다. 그러나 그보다도 눈에 보이지 않게 남북교회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서로 불신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고 했다. 내가 이 일을 5년 가까이 추진해오면서 남과 북의 교회 양측에 서로에 대해 불신이 많다. 한국 교회 지도자급 목사님들이 북측을 바라보고 있는 불신은, ‘그 사람들은 완전히 거짓말꾼이고 사기꾼이라’는 것이다. ‘정상회담도 하루씩 연기해 버리는데, 그 행사가 되겠나? 그날 직전에 안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북측이 남쪽 교회를 바라보는 불신은, ‘수많은 사람이 와서 약속해놓고도 제대로 지켜지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이 일이 어렵게라도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눈에 보이는 것은 병원이 남고, 대형행사를 했다는 역사가 남을지 모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남북간의 신뢰감이다. 이건 한국 교회가 수천명의 선교사를 보내는 것보다 큰 기반을 만드는 기틀이 될 것이다. 나는 그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남북 교회가 60년간에 쌓였던 불신을 해소시킬 수 있다는 것은 앞으로 무한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일이라고 본다.

Q. 대회 일정이 자꾸 바뀐 이유는?
우리가 바꿨다든가 북측이 바꿨다든가 그런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 내부가 이 일을 피치 못하게 바꾸게 만든 것이다. 내가 주일학교에서 배우고 내가 알고 있는 신앙관에서는 적어도 복음 전파, 선교는 일종의 도전이요 개척이다. 그런 차원에서 봤을 때 50~60년 동안 닫혔던 선교의 문이 열렸다. 거의 불가능했던 북한의 선교의 문이 열렸다고 본다면, 한국 교회는 선교의 문이 열렸다는 데 포커스를 맞춰야 한다. 그런데 ‘왜 열렸는가?’. ‘안열려야 될 게 왜 열렸나?’, ‘뒷배경은 뭐냐?’, ‘뭐를 주고 할 거냐?’ 이런 식으로 한국 교회가 이 일을 바라보는 포커스가 크게 틀렸다고 본다.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처음에 이 일이 시작됐을 때 적어도 한국 교회가 ‘북한이 왜 열렸는가?’, ‘병원을 지어주기로 했는가?’ 이런 걸 따지기 전에 ‘이런 계기가 왔다면 한국 교회가 이걸 어떻게 이용할 건가?’, ‘어떻게 구체화시킬 건가?’ 하는 측면에서 연구하고 검토했다면 그동안 왔다갔다 했던 이 모든 것이 잠들 수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북한 교회와 정정당당하게 맞서서 이 일을 북한하고 약속했던 그 날짜에 계속하면서 이 일을 진행해 올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는 ‘그것은 사기꾼 일이니 어쨌느니’ 하면서 지지부진하게 됐다. 나로서는 약속한 날짜는 다가오는데 어떡할 수 있겠나? 미룰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5월 4일에 계약서를 썼는데, 북측에서는 너무 촉박하다는 걸 2006년 10월에 본 대회를 하자고 설득했다. 2007년 성령백주년 행사로 한국 교회가 붕 떠 있는데 내가 자칫 잘못했다가는 한국 교회 성령백주년 행사하는 데 방해했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 나는 당겨서 10월에 하자고 했다. 나는 그때만 해도 장희열 목사님이라든가 여러 목사님들이 ‘이거 계약만 하면 대단한 일이다’ 하길래, 계약만 해놓으면 한국 교회가 응집력 있게 하나로 뭉쳐서 금방 치를 줄 알았다. 그리고 북한에서 100만명을 모아 주겠다고 하고, 한국 교회 목사님들은 와서 설교만 하면 되는 건데 10월도 충분히 가능하겠다 싶었다. 북측에서도 ‘안되는데 안되는데’ 하다가 사인을 했다. 그런데 계약하고 들어와서 보니까 ‘이건 사기네, 안되는 일이네, 강영섭 위원장을 만나보니까 그거 거짓말이라 그러네’ 별 이야기가 다 있었다. 오죽했으면 통일부에서 담당직원을 평양까지 파송해서 이걸 확인했겠나.

그렇게 되다보니까 한국 교회에서는 거의 안될 것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데, 마침 북쪽에서 연락이 오기를 ‘100만명을 동원하고 갑자기 이 일을 하려고 보니까 10월에 사람 동원이 불가능하다. 조금 미루자. 겨울에는 할 수 없는 것 아니냐. 내년 3월로 미루자’, 그래서 1차 2007년 3월로 넘어간 것이다. 본의 아니게 2007년이 되버린 것이다. 그러면 3월로 미뤄놓고라도 한국 교회가 하나되서 빨리 하면 되는데, 이게 장희열 목사 손에서 있다가 이리 넘어가고 저리 넘어가고, 나는 뒤에서 가만히 있는데, 앞에 선 사람들이 이리 끌고가고, 저리 끌고가고 하면서 일이 뒤죽박죽되고 계속 안되는 것이다.

북측과 중국에서 계약을 마치고 장희열 목사님, 백광진 목사님과 택시를 타고 오면서 ‘목사님 이거 이런 식으로 풀어갑시다. 들어가서 기자회견 한다든가 그러지 말고, 이 자체가 한국 교회에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일 같은데 일단 들어가서 한국 원로들을 초청해서 설명회를 가집시다. 그래서 자문도 받고, 그러면 그게 자동으로 기자회견이 되면서 어떠한 상황이 되겠습니다’ 그랬더니 모 목사님 하는 말이 ‘집사님 가만 있으라. 이건 목사들이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간섭하지 마라’고 했다. 그때 내가 하자는대로 그걸 밀고 나갔더라면 문제는 달라졌을 것 같다. 지금도 큰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그때 당시 원로들을 다 모아놓고 ‘이렇게 계약을 해왔습니다. 어떤 식으로 풀었으면 좋겠습니까?’ 그랬으면 문제가 조금 달라졌을 것 같다. 그런데 이걸 40대들 목사님들이 자기들이 한다는 식으로 들고 나오면서 일이 어려워졌다. 지금이라도 어쨌든간에 한국 교회가 하나로 합해져 이 일이 치러지게 된다니까 다행스럽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아직도 내가 봤을 때는 넘어야 될 산이 상당히 많은 것 같다.

Q. 일정이 변경된 게 심장병원 건립 모금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던데?
모금은 우리가 아직 시도도 해보지 않았다. 지금 모금이라는 말은 나와야 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이 행사를 하고 그 행사를 기념해서 병원 하나 짓는다 하는 것이 왜 나왔냐 하는 것을 한국 교회가 분명히 알아야 한다. 내가 북한에 병원 하나 지어주는 조건을 댔던 게 아니다. 그때 당시에 100만 명이란 소리는 북측에서 나왔다. 서울에서 100만 명 동원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평양 입장에서 100만 명을 동원하기가 쉽지 않다. 북한 종교법이 18세 이하는 종교집회에 참석을 못한다. 그렇다고 노인들을 데려다가 2시간 동안 앉혀놓을 수도 없는 일이다. 노인들을 뺀다면 북한에서 가장 많은 군인들이 거기 올 수도 없다. 그렇다면 평양 시내에서 100만 명을 동원하려 한다면 전국에서 징집을 해 와야 한다. 적은 일이 아니다. 그러면 100만 명을 동원해서 3박4일 동안을 평양에 주재시키려면 먹고, 자고, 교통비, 이 동원비용을 누가 책임질 거냐? 하는 것이다.



▲ 우리민족교류협회가 지난해 5월 조그련과 맺은 평양대성회 관련 계약서 ⓒ뉴스파워



북측에서는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동원한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동원해 달래서 동원을 해주는데 그 비용은 너희가 내는 것 아니냐’ 그랬다. 그건 당연한 것이다. 우리나라도 정치집회 할 때 여의도에 사람을 모으면 한 사람당 5만 원씩 번다고 하는데, 100만 명을 동원하려면 계산해보니까 동원비용이 수백억이 들겠다 싶었다. 그래서 내가 북측한테 ‘이 행사를 단순히 남쪽의 요구에 의해서 어떤 기독교 행사 한 번 해줬다는 것으로 보지 말라’고 했다. 그때 당시에 대북인권결의안이 유럽연합으로 해서 유엔에 상정돼 있었는데, 그 인권결의안 초안을 보여주면서 ‘여기에 종교의 자유가 없다고 했다. 이러한 때에 북한이 정말로 그게 아니다. 전 세계에서 하지 못한 대중집회를 평양에서 했다 하면 적어도 전세계가 바라보는 평양에 대한 시선이 달라진다. 그러기 때문에 이건 아무 조건 없이 하자. 그 대신 우리가 그만한 돈을 가지고 북한이 필요한 기념사업을 하나 해서 그걸 근거로 계속 도와주마’ 그랬다. 그래서 나온 이야기다. 그러면 100만 명이 됐든 10만 명이 됐든 한국에서 그 정도 집회를 하려면 광고비로부터 시작해서 동원비가 안들어가나? 적어도 그건 우리가 감안을 해야 되는 것이다. 동원비를 주면 준 걸로 끝나버린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그럼 뭐를 해주겠나?’ 그래서, ‘당신들이 먼저 제안을 해보라’ 그랬더니 첫째, 평양에서 전세계에 견줄만한 양로원이 필요하고, 두 번째는 특수한 교육시설을 하나 했으면 좋겠다. 그러고, 그 다음에 병원이 나왔다. 그래서 나름대로 ‘이걸 단순히 기념사업으로 지어준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앞으로 활용가치가 있는 게 어떤 것인가?’ 생각했다. 선교의 밑바탕으로 활용해서 계속적인 관계로 할 수 있는 게, 돈이 좀 들더라도 전문적인 것이면 제일 좋겠다 싶었다. 한국 교회에서 모금할 때도 학교나 양로원 지어주자는 것보다는 병원이 좋겠다 싶었다. 그래서 내가 ‘병원으로 하자’고 했다. 그리고 그때 설득한 것이 ‘상징적이라도 병원 내에 교회를 하나 허락해라. 한국의 병원에는 원목이라고 해서 목사 한사람이 주재하는데 그 사람이 막 전도하는 게 아니다. 아파서 실망하고 있는 사람들한테 기도해주고 용기를 북돋아주고, 그 자체가 치료다’ 그랬다. 그러니까 ‘그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병원 이름에 ‘복음’자를 넣어 달라고 했다. 그때 그 사람들 하는 말이, ‘송 이사장 뭘 몰라도 한참을 모른다. 우리 정부가 로마 카톨릭에서 한국 사람이 아니어도 좋으니까 신부 한 사람만 평양에 주재시켜주면, 국교를 정상화시키면서 경제지원을 해주겠다는 것도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걸 계속 밀고 당기고 해가지고는 결국은 ‘복음병원’으로 하기로 했다. 그 사람들 하는 얘기가 ‘만약에 진작 복음이란 소리를 우리가 허가해줬으면 그 정도 병원은 10개도 더 얻었다’는 것이다. 평양 시내 주석궁에서 내려다보이는 한복판에 복음병원이라는 것은 대단히 상징적인 것이다. 거기다 병원 안에 교회가 있고, 한국에서 파송하는 목사가 24시간 병원에서 주재한다고 보면, 이 자체는 앞으로 평양 선교에 새로운 계기가 되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안하고 있다고 할찌라도 목사가 주재했다는 그 상징성 때문에 상황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사를 중심으로 한국 교회가 하나 돼서 잘만 한다고 하면은 평양에 NGO 사업이라든가 다른 차원으로도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

Q. 심장병원 건립이 대성회에 대한 조건부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조건부가 아니라도 본다. 일반행사에서도 행사를 치르는 데 동원비를 준다. 동원비는 줘야 할 것 아니냐? 그러면 이 상황에서 병원을 지어주지 말고, 저들이 요구하는 동원비를 준다면 그건 조건이 아니고, 병원은 조건이라고 할 수 없는 것 아니냐? 동원비를 안주는 대신 기념사업을 해서 앞으로 계속 선교를 하겠다는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이건 조건이 아니다. 북측이 우리한테 ‘이걸 해주면 그 집회를 하게끔 해주겠다’ 하는데, 이건 잘못된 것이다. 협상을 한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 양심을 걸고 얘기하지만, 그 반대로 된 것이다. 내가 요구해서 된 것이다. ‘제발 이 동원비를 빼고 이걸 하자. 이게 명분도 있고 앞으로 여러 가지 입장에서 났다. 지금 동원비를 한 5천만불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걸 해놓으면 나중에 1억불어치의 가치가 있으니까 이걸 하자’ 이랬다. 이건 어떤 면에서 내가 조건부를 걸었던 거지 북측이 걸었던 게 절대 아니다.

며칠 전에 어떤 목회자가 어느 신문 인터뷰에서 ‘북한에서 어떤 대가를 단돈 1원이라고 요구하면 안한다’ 그러는데, 과연 그게 성경적이고 선교적인 차원의 생각인가 정말 의문이 간다. 초창기 때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미국의 선교사들이 아무런 투자 없이 들어왔는가? 그 다음에 이 일을 하면서 가장 안타까운 게, ‘종교단체도 아니면서 나서서 한국 교회를 업고 이런다 저런다’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적어도 이 상황에서 종교단체가 됐든 뭐가 됐든 어느 단체가 길을 열었느냐 하는 것은 목사님들 눈에 보여야 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길이 열렸다는 것에 목사님들은 착안하고 ‘어떻게든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인가?’ 하는 차원에서 포커스가 맞춰줘야 한다. 누가 저 길을 열었냐? 쉽게 말해서 옛날에 수많은 선교사들이 선교를 할 때 선교지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놨는데, ‘저게 누가 열었는가?’ 해 가지고 ‘이 사람이 한 곳은 가고, 저 사람이 한 곳은 안가겠다’ 했던 것이 세계 교회사에 있나?


▲ 조그련과 체결한 복음심장병원 관련 계약서 ⓒ뉴스파워

Q. 초기 참여했던 정삼지 목사, 백광진 목사, 박원영 목사 등이 빠진 것이 대회 개최에 대한 신뢰도를 저하시켰다는 지적이 있다.
목사님들 일이 돼서 조심스럽다. 내가 잠실동교회 나가게 된 동기는 이 일 때문에 나가게 된 것이다. 내가 안수집사인데 안수를 받았던 교회는 따로 있다. 아내가 원래 고향이 잠실동이어서 1년 전에 먼저 나가게 됐고, 잠실동교회 목사님은 내가 필요할 때 자문도 받고 여러 가지 교류를 해오다가 아내가 ‘이왕이면 목사님과 같이 기도하면서 이 일을 진행하면 좋겠다’ 해서 잠실동교회는 2006년 1월 1일부터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1년을 못 채우고 결국은 다시 나오게 됐다. 백 목사님이 잘했느니 못했느니보다도 서로간에 마음의 앙금이 남아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설교를 듣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목사님도 부담스러울 것 같고, 일단은 내가 적응이 안돼서 일단은 옛날 다녔던 교회에 다니고 있다.

백광진 목사님이 같이 계약에 참여한 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왜 그러냐면 그분이 처음부터 논의 과정에 다 참여했던 게 아니라, 내가 다 해놓고 마지막 계약할 때 담임목사로서 ‘목사님 같이 나가십시다’ 해서 모시고 가서 우리 직제에도 없는 본부장 제도를 그 자리에서 만들어서 사인을 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는 중요한 게 아니다. 어쨌든 그 이후에 계약을 하고 평양을 다녀올 때 과정에서도 문제는 잘못됐다.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진다. 국민일보 스크랩을 쭉 보면 알겠지만 백 목사님이 본부장 형태로 갔다는 걸로 계속 보도되면서 그 자체도 문제는 좀 있었다. 왜 그러냐면 그 당시에 그냥 같이 일하러 갔던 거지 단장으로 갔던 게 아니다. 그런데 그쪽에서 의도적으로 어떠한 것을 하려고 보니까 단장 형태로 해서, 그렇게 계속 나오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일이 필요 없이 파생이 됐다. 반면에 그 이전에 이미 해왔던 장희열 목사님은 계속 부각이 안됐다. 장 목사님은 더 큰 역할을 했었으면서도 조용히 있어버리니까 그러는데, 백 목사님은 계속 이걸 필요없이 일을 진행하다보니까 계속 얽혀지고 필요없는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이다. ‘이용만 해놓고 찾네’ 어쨌느니 별 이야기가 다 나왔다.

서로 헤어지기 전에 정삼지 목사님이 ‘저녁을 사겠다’ 해서 만났다. 저녁식사를 얻어먹고 새벽1시까지 토론했다. 민승 목사도 있었고 나도 있었다. 9월 30일 원로모임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그분들과 여러 가지 토론을 하면서 서로 ‘이것은 된다, 안된다’ 했었을 때 우리는 ‘이거 이런식으로 하지 말고 원로들하고 같이 어울려야 된다’고 했다. 그분들은 ‘자기들이 지금 하고 있는 페이스대로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그분들이 우리에게 ‘그러면 잠시 나가있으라, 우리들끼리 의논해서 계속 우리가 이 일에 참여할 건가 말건가 결정해서 내일 아침 백 목사를 통해 통지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출근을 하자마자 전화가 왔다. 백 목사님 하시는 말이 ‘집사님 우리는 이거 조용히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이미 원로목사님들하고 그렇게 한다는데 우리들이 해야 될 역할도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이 보니까 우리들이 도리어 집사님 일 해나가는 데 방해가 되는 것 같아서 조용히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집사님 염려하지 마시고 일을 소신껏 해나가십시오. 우리는 뒤에서 기도만 하겠습니다’ 했다. 말 한대로 토씨 하나 안틀리다. 그래서 내가 두말 하지 않고 ‘목사님 고맙습니다’, 그 말 하고 끊어졌다. 그랬는데 정말 조용히 물러나신 장희열 목사님은 이 일에 대해서 이만큼도 어떤 간섭도 없었고, 도리어 미안해서 항시 나를 피하다시피 하는 식으로 돼있는 상황인데, 조용히 내려놓겠다는 것이 이것은 희한하게 꼬아놓은 것이지 내려놓은 것이 아니다.

그분들이 손을 놓은 이후 여러 가지 소문이 확대 재생산되면서 ‘100억 정도만 투자해도 될 것을 송기학이 혼자 가서 한국 교회를 대표해서 150억짜리 병원 지어준다 그랬다. 50억은 중간에서 먹으려고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말이 안된다. 남북협력 사업에 있어서 50억이 아니라 단돈 5천만 원도 통일부 규제에 있다. 그게 간단치가 않은 것이다. 서로가 마음을 안 상하고 하나가 되가지고 뭉쳐가도 어려웠던 일이 본의 아니게 분열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어쨌든 이 일을 하면서 그분들이 나름대로 역할을 했고 중요한 일을 해냈다. 지금도 민승 목사님이나 저나 그런 생각이다. 원로들하고 이런 식으로 조직이 될 때 내가 첫 마디로 ‘지난번에 뛰었던 그분들 그 포지션 그대로 인정한 조직이면 제가 하겠다’ 그랬다. 정삼지, 백광진 목사님 등 그대로 인정하자 그랬다. 지금도 마찬가지 입장이다.

Q. 대통령 선거 등 국내 정치적 변화에 따라 행사 개최가 불투명할 수도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6자회담 결과에 따라 이게 좌우된다 그러는데, 6자회담이 잘되면 잘되는대로 이 일은 잘 될 거고, 안되면 안되는대로 북한의 입장에서는 ‘대내외적으로 우리는 폐쇄적이지 않다. 미국이 우리를 억압한다’는 것을 공표하기 위해서라도 이 일은 한다고 본다. 단 중요한 것은 우리 한국의 정치적 변화인데, 내가 봤을 때는 목사님들이 이것 자체를 어떤 정치적인 용도로 이끌고 들어가지만 않는다면 국내 행사는 모르지만, 북한 행사 자체는 정치적인 것과 민감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단 병원 짓고 이런 문제점에 있어서 대북지원사업의 일환이 되기 때문에 조금은 정치적인 영향은 벗어날 수 없겠다. 우리나라는 ‘대북지원을 하지 말아야 된다’는 쪽과 ‘해야 한다’는 쪽으로 나눠져 있는 입장이다.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는 ‘지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쪽이 우세한 쪽으로 되어지고 있기 때문에 조금 변동은 있겠지만, 그러나 이것이 송기학이라는 한 사람으로 했을 때는 영향을 받을지 모르나, 한국 교회 공동의 이름으로 한다고 했을 때는 어느 정당, 어느 반대파에서도 이걸 가지고 시비는 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런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한국 교회 전체가 어우려져서 해야 한다는 게 제 소신이다.

Q. 천정배 의원이 병원건립추진위원장이다. 천 의원과의 관계는?
며칠 전 천정배 의원 사무실에서 ‘한 번 만나자’고 연락이 와서, 제가 가서 보좌관하고 이야기를 했다. 그쪽에서 하는 이야기가, ‘자기들은 어떤 정치적인 것에 의해서 이걸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찾아와서 간절히 이야기했을 때 충분히 좋은 일이고, 정치를 떠나서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어서 위원장을 맡아서 도움을 드리려고 했다. 그런데 맡고 나서부터 정치적으로 변화가 오면서 자기들이 큰 도움을 드리지를 못했고, 앞으로도 자기들이 봤을 때 자기 정치 일정이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도움을 드리는 것 보다 자칫 잘못해 피해를 줄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좀 번민스러운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고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내 입장에서도 ‘우리가 그때까지만 해도 솔직히 천 의원님이 어떤 역할을 좀 해주기를 바랬고, 지금 상황에서는 피차간에 도리어 어려워질 개연성이 있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또 자칫 잘못하면 어느 날 갑자기 천 의원님이 뒤로 물러나면, 주변에서 송기학이 천 의원님이 잘 나갈 때는 여기 앉혀놓고 이용해먹고 또 차버렸다는 얘기가 분명히 나온다’ 그랬다. 그래서 ‘우리가 이 조직 자체를 어느 정도 사회적인 명망이 있고 정치인이 아닌 사람으로 추대를 해서 하고, 그 밑에는 여야 구분없이 정치적 신앙지도자들이 공동위원장으로 참여하는 조직을 꾸미고 싶은데, 천 의원님 뒤로 빠지지 말고 같이 공동위원장으로 이름을 넣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백프로 좋다고 했다. 그런 식으로 조직을 해서 통보를 해 달라고 했고, ‘일단은 추진위원장직은 물러나는 것으로 하자’ 해서 서로간에 원만하게 합의를 봤다.

추진위원장은 나름대로 몇 분하고 협의를 하고 있다. 일단은 중요한 게 이달 말이 돼 봐야 가시화 될 것 같다. 왜 그러냐면 한국 교회가 다 어우러지는 모습이 공식화됐을 때는 우리가 좀 더 능력있는 분을 모실 수 있고, 그렇지 않고 계속 목사들끼리 싸움하는 형태로 비춰지면, 지금 상황에서는 그만큼 빈약한 사람을 모셔야한다는 결론이다. 모셔놓고 또 그분을 ‘뒤로 물러나라’ 할 수는 없는 거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조금 시간이 가더라도 한국 교회가 이달 27일경에 정식으로 발표를 해 준다고 하니까 기다리고 있다. 거기에서 한국 교회 전체가 어우러지는 모습이라면 어떠한 분도 협력을 해 줄 것 같으니까, 그때 정치적으로도 크게 개입 안하고 이런 분들로 해서 모셔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Q. 이번 1월 14일 북한 방문에서 3월 예비성회를 논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외 결정된 사항들을 말해 달라.
당초 1월 달에 예비성회를 하기로 했는데 한국 교회가 준비가 잘 안되다보니까 30여명이 가서 기념예배를 드렸다. 거기에서 조그련과 ‘추운 데 벌벌 떨면서 예비성회를 하는 것 보다 날씨 풀리면 3월에 정식으로 예비성회로 하자’고 합의했다. 한국 교회만 준비된다면 3월 마지막 주 정도 정식으로 예비성회 형태로 평양에서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아직도 몇몇 중요한 목사님들을 만나보면 ‘안된다. 기념예배는 보고 왔을지 모르지만 3백명, 5백명은 안받아들인다’고 한다. 그래서 적어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예비성회를 해야 할 것 같다. 4월에는 4월 15일 태양절이라고 해서 북한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김일성 생일이 있기 때문에 4월 말이나 5월로 넘어가는데 그러면 너무 늦어질 것 같다. 그래서 가장 좋은게 늦어도 3월 말 정도에 2박3일 정도 평양에서 한 몇천명 보이는 군중집회를 한번 시도해봤으면 하는 게 내 생각이다. 북측에서도 동의를 했다. 그런데 한국에서 갈 사람이 준비가 안된다고 하면 이번 1월달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또 연기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계 어른들에게 제가 하나 주문을 했다. 여기에 더 이상 우리민족교류협회 송기학이 개인적으로 나서야 될 사항이 아니고, 나는 일단 심부름꾼으로 밑에서 일하는 조직의 일원으로서 이번에 바라고 싶은 것은 적어도 한국 교회가 한국 교회다운 모습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이 행사를 어느 개인이나 단체가 해서는 안 되고 꼭 한국교회 이름으로 해야 한다고 요구할 만큼 큰 사업이라면 이번 예비행사부터 한국교회다운 모습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이번 1월에 숫자는 30여명 가까이 올라갔지만 북측에서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목사님들은 한두 분밖에 없는 입장이다 보니까 상당히 내 입장이 곤란했고, 북측도 곤란해 했다. 한국교계에 크게는 스물 몇 개 교단이지만 군소교단까지 포함하면 수백개가 되는 걸로 아는데,그렇다면 적어도 예비성회만큼은 한국교계가 이단으로 치부하지 않는 교단장은 이번에 싹 같이 갔으면 좋겠다. 평양에 구경하러 가는 개념이 아니다. 한국 교회가 하나 되서 백주년의 부흥을 다시 한 번 일으켜보자는 목적이기 때문에 최소한 총회장들은 다 갔으면 좋겠다. 그 다음에 욕심으로는 부총회장, 총무, 총회 북한선교부도 같이 가면 좋겠다. 그러면 제3의 입장, 교계가 아닌 밖에서 한국 교회를 봤을 때도 ‘총회장들 3,4백명이 평양을 갔다’, 이건 말이 아니라 실제로 보여지는 것이고, 정부가 봤을 때도 이 행사 자체를 함부로 못하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총회라고 해도 총회장 한 명 북한 갈 수 있는 경비 정도는 내놓을 수 있다고 본다. 최소한 총회장들은 다 가자는 것이다. 이번 3월 행사는 몸으로 보여주는, 하나 되는 모습이 됐으면 좋겠다는게 내 소망이다.

본 성회는 10월말쯤으로 북측에 이야기를 해놨다. 9월에는 각 교단마다 총회들이 있어 힘들다. 또 8월은 너무 덥고 해서 10월 정도에 성회를 하자고 했다. 이 성회가 단순히 한 번 가서 성회 한 번 하고 끝나는 일이라면 5월도 상관이 없겠지만, 이 성회는 2007년의 마지막 하이라이트고 또 이 성회를 준비하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한국교회가 회개하는 운동이라면 시간이 중요하다. 북한을 위해서 최소한 몇 개월은 기도를 한 다음에 올라가야만 사건이 벌어져도 벌어지는 것이다. 이번 1월 같은 상황은 안 벌어져야 한다. 날짜는 이번 27일 조직위원회 구성되면 거기서 재논의돼서 다시 조정이 될 것이다.







2007/02/07 [21:05] ⓒ 뉴스파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