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의 곡)
찬송의 중심은 가사에 있습니다. 곡은 의미에 맞는 곡이 부여됩니다. 시가 먼저 생기고 좋은 시에 곡을 붙일 때 작곡하기도 하고 기존의 곡을 붙이기도 합니다. 그 시가 좋은 찬송이 되도록 은혜 되는 곡이 붙지 않으면 찬송을 부르면서 사람들에게 뭔가 이상하다 느낌을 주어서 부르지 않거나 다른 곡으로 자연스레 바뀔 것입니다. 꼭 찬송가를 위해 만든 곡이라야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곡이 붙은 경우)
곡조 자체는 은혜롭더라도 많은 사람이 불교에서 부르던 노래로 알고 있는 노래를 찬송가에 붙였다면, 찬송가를 부르면서도 뭔가 좀 이상할 것이라 은혜롭지 않을 겁니다. 8, 13, 15장은 독일, 스웨덴 민요를 편곡했습니다. 각 찬송에 어울리기 때문에 세상 노래지만 그 시대 사람들이 찬송으로 쓰일 만큼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붙였을 것이고, 지금까지 잘 내려와서 은혜로운 찬송으로 잘 불리고 있습니다.
(일제시대 노래의 불편)
철도창가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한번 검색해보았습니다. 철도창가는 일제시대 때 한국에서도 널리 불린 곡이었습니다. 학도가라는 항일운동에 쓰였다하는 대중가요에도 붙었으니 한국 사람으로써도 노래에 대한 인식은 좋았습니다. 더욱이 그 노래를 아는 사람도 드물어졌기 때문에 그저 은혜로운 찬송가로써의 인식이 더 크기 때문에 문제 없어 보입니다.
(194장과 76장의 곡)
공회의 보수주의는 무조건 과거가 좋은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때 최대한 조심하자는 의미에서의 보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든 연구해봅니다. 실제로 확정하기까지는 조심합니다.
백영희 목사님께서 서부교회 계신 1980년대에도 194장은 5장곡으로, 76장은 45장 곡으로 불렀습니다. 1989년 이전까지 공회가 바꿔 부르던 곡과 89년 이후 찬송가 곡으로 부르던 곡을 가지고 다시 비교하며 어느 것이 좋은지 의견을 들어보기 위해 이렇게 곡을 바꿔서 올려보게 되었습니다.
1. 한국 교회 찬송의 초기
한국의 선교 초기에 서양의 찬송곡은 너무 수준이 높아서 일반 교인이 부르기 어려웠습니다. 전국의 초기 교회의 수준이 그랬습니다. 찬송 반주도 없었습니다. 한국식 옛날 타령에 익어 있던 초기 시골의 교인 무식한 분들에게 오늘 기준으로 좋아 보이는 이 곡들이 선교사들과 서양민들에게는 괜찮은데 한국 교인들에게는 너무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래서 교파와 상관 없이 초기 한국교회의 찬송곡은 대부분 한국식으로 불렀으며 흉내내기는 어렵고, 곡의 어려운 부분은 대충 타령식으로 고쳐 사용했고 76장처럼 곡 전체가 어렵고 마음에 들지 않은 곡은 당시 아주 쉬운 주변의 곡을 사용했습니다.
해방 후 한국 사회가 빠르게 서구화 되고 교회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찬송 중심의 타 교단은 조기에 찬송곡 그 모습으로 갖췄으나 공회는 교인의 구성 수준과 공회의 보수성 때문에 일제 초기 모습이 오랜 세월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공회조차 대부분 교인들이 찬송의 곡을 척 보는 순간에 실제 부르는 곡과 차이가 많다 보니 공회도 언젠가 바꿔야 했고 실제 그렇게 바꾸어 졌습니다.
2. 철도 창가
성경목록가 45장은 백 목사님이 그냥 쉬운 곡에 붙여 사용하게 했는데 이 곡은 교파에 따라 곳곳에 간단간단하게 붙여 활용했다고 들었습니다. 곡의 원래 출처를 굳이 따지자면 이방인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어느 시대나 그 사회에서 부르던 주변 곡에 찬송 가사를 붙인 경우는 적지 않습니다. 이는 찬송이 될 "감동"이 터쳐 나오는 이들은 주로 음악성이 없어 세상 곡을 빌린 것입니다. 예배당은 예배당답게 건축하면 더 좋겠지만 공회는 예배당식 건물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습니다. 주변의 보통 건물들처럼 짓습니다. 공회는 찬송의 가사는 낼 수가 있으나 찬송의 곡을 만들 분이 없기 때문에 세상의 건축 자재로 예배당을 짓듯이 찬송가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일본풍이라는 문제는 신앙의 세계에서 기본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한국 예배당이 서구식이든 스위스식이든 일본식이든 상관이 없는데 한국의 진보측에서 일본식은 무조건 거부적인데, 교회든 국가든 한국은 일색을 탈피할 수 없는 구조적 역사적 이유가 있습니다. 탈피하고자 해도 탈피가 되지 않는데 일본식에 거부감을 가지게 되면 신앙에 손실이 적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문답" 게시판의 과거 자료에 "찬송"과 "일본" 등으로 검색하면 참고할 내용이 있습니다.
특히나 45장의 곡은 원곡이 일본의 ‘철도창가’라는 곡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https://youtu.be/bIvPSJU-e_I
찬송의 중심은 가사에 있습니다. 곡은 의미에 맞는 곡이 부여됩니다. 시가 먼저 생기고 좋은 시에 곡을 붙일 때 작곡하기도 하고 기존의 곡을 붙이기도 합니다. 그 시가 좋은 찬송이 되도록 은혜 되는 곡이 붙지 않으면 찬송을 부르면서 사람들에게 뭔가 이상하다 느낌을 주어서 부르지 않거나 다른 곡으로 자연스레 바뀔 것입니다. 꼭 찬송가를 위해 만든 곡이라야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곡이 붙은 경우)
곡조 자체는 은혜롭더라도 많은 사람이 불교에서 부르던 노래로 알고 있는 노래를 찬송가에 붙였다면, 찬송가를 부르면서도 뭔가 좀 이상할 것이라 은혜롭지 않을 겁니다. 8, 13, 15장은 독일, 스웨덴 민요를 편곡했습니다. 각 찬송에 어울리기 때문에 세상 노래지만 그 시대 사람들이 찬송으로 쓰일 만큼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붙였을 것이고, 지금까지 잘 내려와서 은혜로운 찬송으로 잘 불리고 있습니다.
(일제시대 노래의 불편)
철도창가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한번 검색해보았습니다. 철도창가는 일제시대 때 한국에서도 널리 불린 곡이었습니다. 학도가라는 항일운동에 쓰였다하는 대중가요에도 붙었으니 한국 사람으로써도 노래에 대한 인식은 좋았습니다. 더욱이 그 노래를 아는 사람도 드물어졌기 때문에 그저 은혜로운 찬송가로써의 인식이 더 크기 때문에 문제 없어 보입니다.
(194장과 76장의 곡)
공회의 보수주의는 무조건 과거가 좋은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때 최대한 조심하자는 의미에서의 보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든 연구해봅니다. 실제로 확정하기까지는 조심합니다.
백영희 목사님께서 서부교회 계신 1980년대에도 194장은 5장곡으로, 76장은 45장 곡으로 불렀습니다. 1989년 이전까지 공회가 바꿔 부르던 곡과 89년 이후 찬송가 곡으로 부르던 곡을 가지고 다시 비교하며 어느 것이 좋은지 의견을 들어보기 위해 이렇게 곡을 바꿔서 올려보게 되었습니다.
1. 한국 교회 찬송의 초기
한국의 선교 초기에 서양의 찬송곡은 너무 수준이 높아서 일반 교인이 부르기 어려웠습니다. 전국의 초기 교회의 수준이 그랬습니다. 찬송 반주도 없었습니다. 한국식 옛날 타령에 익어 있던 초기 시골의 교인 무식한 분들에게 오늘 기준으로 좋아 보이는 이 곡들이 선교사들과 서양민들에게는 괜찮은데 한국 교인들에게는 너무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래서 교파와 상관 없이 초기 한국교회의 찬송곡은 대부분 한국식으로 불렀으며 흉내내기는 어렵고, 곡의 어려운 부분은 대충 타령식으로 고쳐 사용했고 76장처럼 곡 전체가 어렵고 마음에 들지 않은 곡은 당시 아주 쉬운 주변의 곡을 사용했습니다.
해방 후 한국 사회가 빠르게 서구화 되고 교회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찬송 중심의 타 교단은 조기에 찬송곡 그 모습으로 갖췄으나 공회는 교인의 구성 수준과 공회의 보수성 때문에 일제 초기 모습이 오랜 세월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공회조차 대부분 교인들이 찬송의 곡을 척 보는 순간에 실제 부르는 곡과 차이가 많다 보니 공회도 언젠가 바꿔야 했고 실제 그렇게 바꾸어 졌습니다.
2. 철도 창가
성경목록가 45장은 백 목사님이 그냥 쉬운 곡에 붙여 사용하게 했는데 이 곡은 교파에 따라 곳곳에 간단간단하게 붙여 활용했다고 들었습니다. 곡의 원래 출처를 굳이 따지자면 이방인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어느 시대나 그 사회에서 부르던 주변 곡에 찬송 가사를 붙인 경우는 적지 않습니다. 이는 찬송이 될 "감동"이 터쳐 나오는 이들은 주로 음악성이 없어 세상 곡을 빌린 것입니다. 예배당은 예배당답게 건축하면 더 좋겠지만 공회는 예배당식 건물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습니다. 주변의 보통 건물들처럼 짓습니다. 공회는 찬송의 가사는 낼 수가 있으나 찬송의 곡을 만들 분이 없기 때문에 세상의 건축 자재로 예배당을 짓듯이 찬송가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일본풍이라는 문제는 신앙의 세계에서 기본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한국 예배당이 서구식이든 스위스식이든 일본식이든 상관이 없는데 한국의 진보측에서 일본식은 무조건 거부적인데, 교회든 국가든 한국은 일색을 탈피할 수 없는 구조적 역사적 이유가 있습니다. 탈피하고자 해도 탈피가 되지 않는데 일본식에 거부감을 가지게 되면 신앙에 손실이 적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문답" 게시판의 과거 자료에 "찬송"과 "일본" 등으로 검색하면 참고할 내용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