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박도호 교수 - 80년대 고신 조직신학 교수, 선교사. 화란과 유럽교회 형편

일반자료      
쓰기 일반 자료 초기목록
분류별
자료보기
교리 이단, 신학 정치, 과학, 종교, 사회, 북한
교단 (합동, 고신, 개신, 기타) 교회사 (한국교회사, 세계교회사)
통일 (성경, 찬송가, 교단통일) 소식 (교계동정, 교계실상, 교계현실)

[인물] 박도호 교수 - 80년대 고신 조직신학 교수, 선교사. 화란과 유럽교회 형편


■ 기 / 획 / 특 / 집 - 역사의 현장 속으로 원로와의 대화 (14) / 박도호 교수와의 대화
“개혁된 고신교회는 항상 개혁해 가야 합니다”
2012.10.31 11:03 입력

▲박도호 교수
당시 무인가 기관으로 10년간 있던 신학연구과가 신학대학원 인가를 받아 정식 과정을 시작한 때였다. 박도호는 만 8년 동안 고려신학교에서 조교수로 교의학(조직신학) 과목을 가르쳤는데 당시 원장은 오병세 교수였고 홍반식, 이근삼, 박성복, 이보민, 김병원, 안영복 교수가 있었으며, 선교사 혹은 선교사 교수로는 하도례, 신내리, 박도호, 고재수 등이 있었다. 하도례 목사는 미국정통장로회(OPC) 선교사로 1953-87년 동안 교단을 도왔다. 미국장로교(PCA) 소속의 현요한 선교사와 신내리 선교사도 고려신학교에서 봉사했다. 1980년 화란개혁교회로부터 고재수 교수와 박도호(John M. Batteau)가 파송돼 고려신학교에서 10년 가까이 봉사했다. 화란에서 온 선교사 교수들은 고려신학교 학생들에게 개혁주의 신학과 생활을 가르쳤다. 박도호 교수는 1988년 화란개혁교회의 초빙을 받아 목회의 길을 가게 됐다. 대부분의 고려신학교 34-43회 졸업생은 그의 교의학 강의를 들었다. 그와 함께 파송 받았던 고재수 교수는 1989년 이후 카나다 헤밀턴의 카나다 개혁신학대학원(Canadi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으로부터 청빙 받아 2008년까지 가르쳤다.지난 9월에 있었던 총회에 외교사절로 참석한 그를 인터뷰 했다. 박도호 교수의 바쁜 일정 가운데 유해무 교수와 그의 아내인 옥현순 사모의 도움으로 그를 만나볼 수 있었다. 또한 고신역사기념관 관장인 이성호 교수도 인터뷰를 위해 시간을 내어 줬다.

■ 김흥식 연구원 / 고신역사연구소




■ 박도호 교수 약력



?1946년 미국 뉴욕 출생

?1968년 미국 하버드대 영미문학사(B.A.)

?1972년 미국웨스트민스터신학교 목회학(M.Div.)

?1972-75년 아이비엠(IBM)사 근무

?1975-77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수학

?1978년 네덜란드 깜뻔 자유개혁교회 신학대학교 신학 석사(Drs.)

?1980-88년 부산 고려신학교 교의학 교수

?1988-2011년 네덜란드에서 목회

?2011년 은퇴










김흥식 연구원 : 안녕하세요? 외교 사절을 인터뷰하게 되어 좋습니다.

박도호 교수 : 안녕하십니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의 정식 이름은 ‘존 마이클 배튜(John Michael Batteau)’입니다. 그리고 애칭은 ‘킴(Kim)’입니다. 한국에서 얻은 저의 마지막 애칭이지요. 누가 제 애칭을 들으면 “한국인이세요?”라고 묻기도 합니다. 저는 올해로 만 66세입니다. 제 아내는 아름다운 네덜란드인 마그릿 소네펠트입니다. 저에게는 장성한 네 자녀가 있습니다. 이 중에는 한국에서 입양한 딸 수지도 있습니다. 아직 미혼이지요. 입양할 당시 수지는 소아마비가 있었습니다. 거동하는 것이 불편했지요. 하지만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독립적으로 운전도 하고, 일도 잘 합니다. 저는 세 명의 어린 손자들도 있습니다.



김 연구원 : 이번 총회 외교사절로 오신 것으로 압니다. 한국에는 오랜만이시지요?

박 교수 : 제가 한국에 온 목적은 자매교회인 고신교회와 두 관계교단인 합신과 독립개혁교회에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의 공식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네덜란드교회의 공식 대표이고 외국교회와 관계를 유지하는 ‘베베카’(BBK, Betrekkingen met Buitenlands Kerken 화란자유개혁교회의 교회친교부서) 위원회의 일원이지요. 저 역시 한국에서 일정을 갖는 동안 고신의 다우리교회에서 설교하고, 고려신학대학원과 고신대학교의 외국인 목회학 과정, 수원의 합신대학원에서 강의하는 것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신의 친구들과 사귀고 1980-88년, 고재수와 함께 지냈던 부산을 보고 싶기도 했지요.



김 연구원 : 교수님의 유년 시절을 듣고 싶습니다.

박 교수 : 저는 미국인으로서 1946년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매사추세츠 캠브리지에서 자랐습니다. 저의 부친은 하버드대학의 기계공학 교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려서부터 저희 집을 방문하는 다양한 유명 인사들을 보면서 자랐지만 그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아직 그들이 인상적이지 않았고 부럽지도 않았거든요.

제가 다닌 미국의 성공회는 영국 성공회의 분과였고 매우 자유로웠습니다(liberal). 성경적이지 않았지요. 아직도 여전히 대부분 자유롭습니다. 물론 동성애도 허용하고요. 이 교회에 다니던 저는 희생적인 죽으심과 놀라우신 부활로써 나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시고 망가진 피조세계를 구속하는 구주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저의 종교적 사상은 타인에게 선을 행하고 세상이 더 좋은 곳으로 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세계관은 실존주의 취향을 갖고 있는 인본주의였지요.



김 연구원 : 어떻게 회심하고 신앙을 갖게 되셨나요?

박 교수 : 1964년 하버드에 입학하여 영미문학을 전공하게 되었는데, 그때 룸메이트와 함께 요한복음을 배우는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순복음 교회를 다니면서 은사운동을 했어요. 한동안 그 친구를 따라 은사주의 운동에 참석해 방언도 하고, 치유 사역도 했습니다. 사람들도 마구 쓰러졌어요. 저도 이 운동에 참석하면서 그것이 신앙인줄 착각했지요. 그런데 많은 기적들이 신빙성이 없었어요. 암을 치료받았다고 한 여인은 결국 죽었었고, 방언들은 각 개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 역시 그랬지요. 은사주의 운동은 반지성주의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혀 균형적이지 않았어요. 단적으로 그들은 저에게 “인간적인 지식은 사탄적인 것이기에 배울 필요가 없으니 하버드대학을 그만두고 나오라”고 권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같은 해인 1964년 가을, 장로교인이었던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 목사님이 하버드에 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명석한 강의를 하였는데, 그것이 후에 그의 명서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The God who is There)’(1968)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의 강의를 통해서 저는 정통 기독교 신앙을 확신하게 되었고 세속적인 인본주의를 지양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제가 아직도 전적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비로소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성경을 전적으로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게 되었지요. 이 강의를 계기로 저는 개혁주의와 칼빈주의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칼빈주의를 알게 되면서 사탄에 대해서도 올바른 시각을 갖게 되었어요. 은사주의 운동에 참여할 때에는 사탄에 대해 많이 치우친 이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개혁주의를 통해서 은사주의를 극복한 것입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일일이 성경본문과 비교하면서 읽었습니다. 그가 남긴 많은 주석을 읽으면서 ‘이것이 나은 신앙이고, 바른 기독교 진리이며, 보다 성경적이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기록하기보다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기록했습니다. 그의 신학의 기본은 성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진학하기로 했습니다.








김 연구원 : 한국, 고려신학교에 오시기 전에는 어떠셨나요?

박 교수 :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다닌 후, 돈을 벌기 위해 아이비엠(IBM)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3년간 근무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던 중 화란의 라브리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라브리는 쉐퍼가 있었던 곳인데, 기독교 연구기관입니다. 특히 저는 라브리를 좋아하는데, 그곳에서 제 아내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만나고 두 달 만에 혼인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를 거쳐서 깜뻔의 자유개혁교회의 신학대학교에서 수학했습니다. 자유대학은 사상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깜뻔의 신학교를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1977년 깜뻔으로 오게 되고 신학석사(Drs.)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김 연구원 : 깜뻔에서 학위를 마치시고 고려신학교로 오셨군요.

박 교수 : 그렇습니다. 1979년 깜뻔에서 학위를 마쳤는데, 저에게 한국에서 가르치겠느냐는 제의를 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한국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고 말했지요. 저는 매우 놀랐습니다.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내 역시 저와 마찬가지로 매우 놀랐지요. 이후에 저희는 이 일에 대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누군가를 원하고 있고, 내가 자격이 된다면 비록 내가 아무런 계획과 지식이 없지만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1980년, 저는 네덜란드 교회의 파송을 받고 대학 동료 고재수(Niek H. Gootjes)와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1970년 이래로 고신교회는 네덜란드 교회와 자매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단으로부터 한국의 고려신학교로 신학을 가르치러 가라는 요구를 받게 된 것입니다.



김 연구원 : 고려신학교에서 전성기를 보내셨지요?

박 교수 : 1980-88년, 우리는 당시 부산에 있었던 고신교회(단)에 속한 고려신학교에서 교의학을 가르쳤습니다(고재수 교수는 89년까지 가르침). 고려신학교에 왔을 때, 한국식 이름이 필요하다고 하여 이근삼 박사님께서 ‘박도호’라고 붙여주셨습니다. ‘고재수’라는 이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학교의 선배 교수는 이근삼, 오병세, 홍반식 이었습니다.

말씀 드린 대로 저는 만 8년간 부산의 고려신학교에서 교의학을 가르쳤습니다. 처음에는 통역과 함께 영어로 진행하였는데, 후에는 한국어로 가르쳤습니다. 교의학 과목 중에서도 성령론, 기독론 그리고 종말론과 같은 과목이었습니다. 당시에도 고려신학교에는 외국인 학생이 있었습니다. 인도와 대만에서 온 학생들이었지요. 이들에게는 영어로 가르쳤습니다. 또한 복음병원에서는 영어로 설교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복음병원에 영어예배가 있었지요. 한국어를 조금 배웠습니다만, 현재는 안타깝게도 대부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김 연구원 : 당시 고려신학교의 상황은 어떠했나요?

박 교수 : 한 번의 강의에 약 50명의 학생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저를 도와주는 조교도 있었습니다. 유해무 교수님도 제 학생은 아니었지만 조교였지요.

한국 신학생들은 일반적으로 형편이 좋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이 가난했어요. 부산 역시 가난한 도시였습니다. 아주 적은 사람들만이 자동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리에는 주로 택시나 버스가 지나다녔지요(저는 기아에서 나온 승합차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데리고 부산을 다닐 수 있었지요).

학생들의 편차도 컸습니다. 수업에 대한 이해도가 탁월한 학생이 있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도 있었습니다. 아주 다양한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중에는 배우고 주말에는 전도사로 사역했습니다.

저의 수업방법은 우선 강의 내용을 작성하면 조교가 고쳐주고 그것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질의응답시간을 가졌지요. 학생들에게는 좀 지루한 방법이었습니다.








김 연구원 : 교수님의 한국생활도 힘드셨겠지요.

박 교수 : 그런데 저는 한국을 즐겼습니다. 한국인들이 좋았고, 기후와 계절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가을에는 아름다운 색들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휴가 기간에는 강원도와 지리산도 가보았습니다. 부산에서 지낼 때, 해변에 자주 나갔습니다. 해운대에 가기도 했는데, 당시 부산에는 외국인이 적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 주위에 둘러싸기도 했습니다. 금발이 신기했겠지요.



김 연구원 : 고신에서 가장 영향을 받은 분이 있으신가요?

박 교수 : 어려운 질문입니다. 저는 고려신학교의 개교와 고신교회(단)에 대해서 많이 들었습니다. 1930년대 이래로 있었던 일본의 신사참배에 저항하여 한상동 목사님을 중심으로 한 역사이지요. 아마도 그의 생애야말로 저에게 그리스도인의 신실함과 그리스도를 따라 핍박받는 신앙인의 가장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한기태, 한명동 등의 인물들이 저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 연구원 : 네덜란드로 돌아간 이후 어떻게 지내셨나요?

박 교수 : 1988년, 저는 네덜란드로 돌아갔고 목사로서 세 교회를 목양하였습니다. 하나는 잔담(Zaandam, 1988-93), 하나는 바허닝언(Wageningen, 1993-2001), 하나는 행정수도인 스흐라벤하허라고도 하는 헤이그(Hague, 2001-11)에 있었습니다. 작년에 저는 사역에서 은퇴하고(2011), 위트레흐트라는 조금 큰 도시 옆에 위치한 알셀스타인(IJsselstein)이라는 동네에 살고 있습니다. 현재는 제 자신과 교회를 위한 다양한 과제들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은퇴하는 것이 그만 멈추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김 연구원 :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의 상황은 어떤가요?

박 교수 : 통계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네덜란드의 인구는 1650만 명 가량입니다. 그중에 가장 비율이 높은 교회는 가톨릭이며, 450만 명 정도입니다. 이들은 주로 라인강 남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톨릭신자 중 5퍼센트 정도인 9만 명만 성당에 갑니다. 그들의 다수는 성탄절이나 부활절처럼 일 년에 몇 차례만 참석할 따름이지요. 그리고 180만 명가량의 기독교인이 있는데, 이 중 절반인 90만 명이 예배에 참석합니다. 그러나 이 중 30만 명의 교인만 개혁주의 교회에 가입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전체 개신교의 인구 가운데 60% 가량은 성경적이지만 나머지 40%는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사역자의 경우는 반대로 60퍼센트 가량이 자유롭습니다. 전체 개신교 인구와는 반대이지요.

우리 교회(단)는 앞에서 말씀드린 30만 명의 개혁교회에 속해있습니다. 아이를 포함해서 약 12만 3천여 명 가량 됩니다. 이는 유럽 안의 정통 개혁주의 진영에서 가장 큰 교단입니다. 아펠도른신학교가 속해있는 화란개혁교회는 7만 5천 명 정도인데, 두 교단이 하나 되기 위해서 노력 중입니다. 우리 자유개혁교회는 290여개의 지역 교회와 300여명의 교역자, 50여명의 은퇴 교역자가 있는데, 조금씩 감소하는 추세입니다. 매년 약 백 명씩 줄어들지요. 복음주의 교회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 교회에는 알미니스트와 재세례파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김 연구원 : 고신교단과 신학교에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박 교수 : 1980년대부터 한국이 경제적으로 많은 성장을 경험하면서 교회도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교권도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커지고 교세가 커졌지만 개교회주의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교단과 신학교도 생겼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기 교회만 최고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교회의 하나 됨을 생각하고 연합해야 합니다. 선교적인 관점도 필요하지요. 오히려 가톨릭교회는 하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공인된 성직자들이 있어서 어디서나 활동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하나 되는 일에 힘쓰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상황 속에서 고신교회(단)는 반드시 성경적 가르침을 견지하고 신실한 신학교를 이끌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신교단과 신학교는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특히 신학교는 학문적 수준을 유지해야 합니다. 낮아지면 안 됩니다. 학문적 성취도 이루어가야 하지요. 유해무, 신득일 교수로부터 고신교회가 개혁주의보다는 복음주의에 가깝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교회가 교리문답을 통해서 고백적인 일치를 회복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성품과 삶과 윤리적인 면도 개혁해 가야 합니다. 신앙의 개혁은 교회를 넘어 전 세계로 확장해가야 하고 매일 이루어져야 합니다. 개혁된 고신교회는 항상 개혁해 가야 합니다.



김 연구원 : 총회기간 유해무 교수님 댁에 머무시지요?

박 교수 : 네 맞습니다. 한국에 오면 그와 연락하고 지냅니다. 1988년, 제가 네덜란드로 돌아가고 얼마 되지 않을 때, 유해무 교수는 고려신학교를 졸업하고 네덜란드로 왔습니다. 고려신학교를 졸업하고 왔기에 개인적으로 만나서 친분을 나눴습니다. 후에 그가 박사과정을 마무리하면서 자신의 논문을 발표할 때, 제가 질문하기도 했습니다.



김 연구원 : 바쁜 일정 중에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박 교수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