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한부선

일반자료      
쓰기 일반 자료 초기목록
분류별
자료보기
교리 이단, 신학 정치, 과학, 종교, 사회, 북한
교단 (합동, 고신, 개신, 기타) 교회사 (한국교회사, 세계교회사)
통일 (성경, 찬송가, 교단통일) 소식 (교계동정, 교계실상, 교계현실)

[신학] 한부선



한부선(Bruce F.Hunt,韓富善) 선교사 탄생 백주년을 맞이하며




그가 미국에 가서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선교사였던 아버지 한위렴 선교사의 외아들로 황해도 재령읍에서 성장하였다. 한국에서 성장하고 있는 동안 평양에 있는 외국인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한국 소년들과 격이없이 놀면서 자라왔기 때문에 한국어를 구사하는 솜씨는 한국 사람과 거의 같았고, 발음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의 음성은 부드러웠고, 한국의 정서를 나타내는 구수한 맛은 일품이었다.



한부선 선교사는 고신교단 창설뿐만 아니라 교단 창설의 핵심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고려신학교와 깊은 관계를 맺었던 선교사였다.


본래 미국 사람이지만 한국 사람이었다. 그는 1903년 6월 3일 평양기독병원에서 태어났다. 그가 미국에 가서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선교사였던 아버지 한위렴 선교사의 외아들로 황해도 재령읍에서 성장하였다. 한국에서 성장하고 있는 동안 평양에 있는 외국인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한국 소년들과 격이없이 놀면서 자라왔기 때문에 한국어를 구사하는 솜씨는 한국 사람과 거의 같았고, 발음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의 음성은 부드러웠고, 한국의 정서를 나타내는 구수한 맛은 일품이었다.



한부선 선교사는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 1919년 초여름 한국을 떠나 시카고시 서남쪽에 있는 기독교대학의 명문 튀튼대학으로 떠났다. 그는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났던 사실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였기 때문에 일본 군인들과 헌병들의 잔인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필자가 아는 한 한부선 선교사는 일본인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부선 선교사가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가 튀튼대학교 2학년때 티벳지방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 돌아온 선교사가 대학에 와서 설교했을 때 그 설교를 듣고 회심의 경험을 가진 이후였다. 1923년 한부선 선교사의 부모님이 안식년으로 미국 뉴저지주로 오자 한부선은 마지막 대학생활을 그곳에 있는 러거스대학교에서 수업하기 위하여 전학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짧은 1년간이기는 했지만 부모님과 같이 생활할 수 있었다.



1924년 9월 한부선은 프린스톤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박형룡 박사는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프린스톤신학교 3학년이었을 때 한경직이 1학년생으로 입학하였다. 프린스톤신학교에 입학하였을 때 프린스톤신학교는 보수와 진보 양 진영으로 나누어 치열한 신학사상의 싸움이 절정에 올라 있을 때였다.



1925년에 프린스톤신학생 대다수는 새로 복음주의학생연맹을 조직하여 가입하였다. 물론 한부선도 가입하였다. 당시 교장이었던 스티븐슨과 영어성경 교수였던 어드만 교수는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학생회 지도교수로 스티븐슨 교장은 어드만 교수를 임명하려고 하였으나 학생들은 메이첸 교수가 지도해 주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메이첸 교수는 가급적이면 전면에 나서기를 삼가하고 있었다. 다행히 구약학의 권위자였던 로버트딕 윌슨 교수가 지도 교수로 선임됐다.



또 한가지 언급할 것은 1924년의 미국 북장로교회 총회장은 저 유명한 보수신앙가 매카트니가 총회장으로 당선되어 다행이었지만 그 다음해인 1925년에는 프린스톤의 어드만 교수가 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어드만 교수는 스티븐슨 교장과 더불어 총회안에서 소위 ‘중간파’로 자처하면서 진보세력을 가급적이면 포섭함으로써 총회의 평화와 안정을 추구했던 인물들이었다. 결과적으로 총회안에 있던 중간파가 승리함으로써 북장로교회가 평화와 안정 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반면에 북장로교회가 좌경화되는 것과 프린스톤신학교가 빠르트 의 신학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유주의 신학을 용납하는 교육기관이 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지난 70년간 프린스톤신학교와 북장로교회는 계속적인 자유화의 세속화의 길을 걸어 옴으로써 오늘날 미국 북장로교회는 내면적으로 성직자들의 동성연애를 묵인하는데 까지 이르게되었다.



한부선은 1927년 졸업하자 일단 선교사를 지망했다. 북장로교선교부는 선교사 지망자인 한 부선에게 묻기를 선교현장에서 자유주의자와 손을 잡고 같이 사역할 수 있겠는가를 물었을 때 한부선은 대답하기를 “자기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한부선은 선교사가 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한부선에게 신문했던 면접관은 1924년 어번성명서(Auburn Affirnation) 에 서명했던 자유주의적 성향이 농후한 선교부 기관 목사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한부선은 부모님이 일하고 계시는 한국(당시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을 받 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8년 한부선은 북장로교 선교사로서 충청북도 청주에서 첫 기간 (1928~1934)을 봉사하였다. 그는 새삼스럽게 한국어를 배울 필요가 없었다. 한부선은 부임 하자 마자 곧 선교사역에 착수 할 수 있었다.



한부선이 한국에 부임한 지 1년 후인 1929년, 스승이었던 메이첸 교수는 프린스톤신학교를 사임하고 필라델피아시에 새로이 독립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신학교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이다. 당시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안식년을 얻어 미국에 돌아가자 대다수가 프린스톤신학교에 가지 않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가서 신학의 재충전 을 하였고, 한국 학생으로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입학한 학생은 김치선 목사였고, 그 다 음으로 입학한 학생이 박윤선 목사였다.



박윤선 목사가 1934년에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입학했을 때 한부선 선교사가 안식년을 얻어 미국에 돌아왔다. 그는 신학을 더 공부하기 위해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들어가서 1935년에 박윤선 목사를 만나 알게 되었다. 한부선이 박윤선 목사보다 두 살 위였다. 당시 한부선 선교사는 박윤선 목사의 신앙생활과 학구적 태도에 감탄하여 말하기를 “자기가 안식년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갈 것 같으면 저와 같은 사람과 손잡고 같이 일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하였다.



그런데 1946년 그 꿈이 실현되어 부산 고려신학교에서 같이 봉사하였다. 한부선 선교사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그 곳에서 큰 변화가 발생하였다. 메이첸 교수는 북장로교회의 선교정책을 비판하다가 소속노회에서 제명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1935년까지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졸업생을 각 노회에서 사취하여 목사로 임명하였으나, 총회의 결정과 지시로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졸업을 더 이상 시취할 수 없게 되었다. 남은 길은 새 교단을 만드는 길 밖에 없었다. 이 때 한부선 선교사는 자신이 속하고 있던 북장로교회를 탈퇴하고 새로 발족하는 정통장로회(당시 아메리카장로회)에 가담하였다.



한부선의 결단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고독과 고난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하여 1936년 여름 그는 정통장로교회 선교사로서 새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부모와 친구들 이 속해 있는 북장로교회를 떠났던 것이다. 스승인 메이첸 교수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기 보다는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강했고, 뜨거웠기 때문이었다.


한부선은 북장로교선교사들이 없는 만주를 새로운 선교지로 정하고 만주에 있는 할빈시로 갔다. 그는 봉천노회에 가입하였다. 그가 부임한지 2년후인 1938년 9월 총대로 27회 발언 을 했다가 일본 형사의 유도로 내던 짐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는 할빈으로 돌아 가 1942년 여름 마지막 포로교환선을 타고 미국에 돌아갈 때까지 3년간 만주 할빈시를 중심으로 26개처의 한국교회를 돌아 보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다가 1941년 10월 체포 되어 1942년 6월 본국으로 송환될 때까지 9개월 동안 감옥에서 가진 간수가 가져다준 말똥 을 먹기도 하였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라면 말똥을 먹는 것 쯤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한부선 선교사가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운동을 가리켜 ‘언약운동’이라고 불렀다. 당시 한국교인들이 약 800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약 500명이 반대운동에 서명하였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날 무렵 한부선 선교사는 산디아고시에서 발행한 신문을 볼 것 같으면 해방을 맞이하여 새로 탄생하는 대한민국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주관하고 있던 임시정부를 맞이하여 그 기관을 주축으로 새로운 정부를 조직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부선 선교사는 교회이건 사회이건간에 친일파와 친일세력을 새로 수립되는 정부에 참여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견해요, 주장이었다.



한부선의 특징은 ‘진실’그 자체였다. 그는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허식을 싫어했다. 그는 한국과 한국국민을 사랑했고, 어디를 가든지 한국을 비난하는 사람에게 한국을 변호해 준 애국자였다.


그는 정부에서 주는 상을 받고도 남는 인물이지만 그런 것하고 인연이 먼 사람이었다. 그의 탄생 100년을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고신 교단은 가슴에 손을 얹고 그의 행적을 기리면서 그와 나를 비교해 보는 것이 어떨지 착잡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2003년. 기도교보 / 총신대 홍치모 교수)







#. 이 paper는 2004년 2학기 한국교회사 시간에 paper로 제출한 내용이다. 내용이 많이 부족하다. 한부선에 대해 거창하게 쓰고 싶었는데 맘만 그랬지 실제 그러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글쓴이 미상)



“한부선 목사의 한국교회에서의 존재의의”



본 소논문의 의도는 다음과 같다.
한부선이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력은 심오하며 탁월하다.





서론



한국교회는 100년의 선교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역사의 물줄기 가운데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 두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주 심플하게 ‘잘 알려진 인물’과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 대별된다. 순교신앙의 상징으로 대변되는 주기철 목사, 사랑의 원자탄으로 유명한 손양원 목사 등이 ‘잘 알려진 인물’군(?)으로 분류될 것이다. 그와 반대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 군에는 오늘 우리가 살펴볼 ‘한부선 선교사(목사)’가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한부선 목사의 가문에 복음을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한부선은 아버지 한위렴 목사와 함께 한국 땅에서 선교사로 헌신하였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한위렴 목사의 배턴을 이어받아 한부선은 선교사로 헌신하였던 것이다.



본 서는 한부선 목사가 한국 교회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력에 대하여 ‘신사참배반대운동’1)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본론



한부선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를 이어 (한국에) 충성!’할 마음은 아니었다. 그는 원래 한국 땅을 선교지로 정한 선교사는 아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선교사는 “보냄을 받는 자”라는 인식 속에서 다른 사역자들이 가기를 마다하는 지역이라도 하나님의 뜻이면 가겠다는 마음으로 선교부의 결정을 기다렸다2). 한부선은 자신을 항상 “한국산”(Made in Korea)이라고 소개하고 한국말을 능통하게 구사하던 그였다3). 아버지가 선교사였던 한부선은 아버지의 선교지였던 한국이 자신의 고향이었다. 그의 외모는 분명 미국인이었지만, 그의 정신은 완연한 한국인이었다. 그런 그의 자질이 풍성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아버지의 대를 이어 한국으로 선교지를 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자신을 맡겼다. 결과적으로 볼 때 그는 또 다시 한국을 품게 된 것이다. 한부선이 ‘한국’을 미리 선교지로 정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이 반감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자신을 던지는 순전한 신적 무모함(?)은 그의 고매한 인격을 더 드러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 그의 사역지인 한국 교회에 그의 순수한 믿음과 도전적인 자질이 선한 영향력을 미쳤음에 틀림이 없다.



한부선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부모가 사역하고 있으며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한국으로 파송 받게 되었다. 그가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 선교사 후보생으로 지원했을 때에 선교부에는 어번선언4)에 서명한 간부가 있었는데, 그가 한부선에게 선교지에서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하겠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 때, 한부선은 장로교의 목사로서 그렇게 하는 것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답변했다. 그리고 한부선은 “모든 장로교 목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에 정직하게 동의해야 하며, 그렇게 한다면 어떻게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였다. 이 문제에 대하여 긴 토론을 함으로 그는 선교사 후보생의 자격을 박탈당하리라 생각했지만, 결국 1928년에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었다5). 한부선의 이러한 면모는 그의 삶에서 대범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담도있는 모습은 “신사참배문제”6)를 대하는 태도에서 더 잘 드러난다. 1938년에 있었던 제27회 총회에서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할 때 더욱 강렬하게 나타났다. 그는 신사참배결의에 대한 강한 반대의사를 표명하면서 일어서서 “회장, 항의합니다”라고 외쳤다. 그러다가 그는 일경에게 붙잡혀 갔다. 이처럼 프린스톤 출신 가운데 박형룡과 한부선 같은 이들에게는 신학과 사역에 분명한 일치성이 존재하고 있었다.7) 천주교와 감리교도 신사참배문제에 대해서 타협하는 입장을 취하였고 한국장로교회도 타협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타협의 시대적인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그 물살을 역류한 인물이 바로 한부선이었다.



김양선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 운동 분포 및 지도자들은 크게 평안북도의 이기선 목사, 평안남도의 주기철 목사, 경상남도의 한상동 목사, 만주의 한부선 선교사, 전라남도의 손양원 목사 등 다섯 군(群)으로 대별했다.8) 선교사들의 ‘신사참배문제’에 대한 태도들은 다양한 견해가 표출되었다. 그것은 선교부와 선교사 개인의 신학적 입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부선은 철저한 "신사참배반대운동‘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는 1939년 봄에 모인 봉천노회 때에 다음 총회에서 지난해에 결정한 신사참배 문제를 취소하도록 건의하자는 동의를 하였느나 부결되었고, 봉천노회는 종교법안을 이행치 않는 한부선에게 그의 “주장이 옳기는 하나 시국상 할 수 없는 일이니 차라리 당회장 시무를 그만 두라”는 권고를 내렸다. 이에 한 부선은 그런 조치를 노회가 취한다면 봉천노회에서 제명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당장은 실행되지 않고 6개월 후 다음 노회에서 제명되었다.



신사참배를 가결한 이후, 적지 않은 교회지도자들과 성도들은 한국의 여러지역과 만주에서 반대운동을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당시의 상황을 한부선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제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사람은 모두 정부로부터 광신자 취급을 당했으며, 심지어는 교회법마저 인정하지 않는 자로 낙인 찍혔고, 어떤 경우에는 그들의 행동 이면에 정부에 대한 반역의 동기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이제는 모든 사람은 독자적으로 처신해야 했다. 한국 교회는 바야흐로 “결단의 골짜기”에 당도한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만주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한 한부선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전폭적인 믿음을 가장 중요한 선교의 토대로 삼았다. 한부선이 봉천노회를 떠난 이후 2년 만에 집회처가 8개에서 23개로 증가하였으며 더욱 은혜스럽게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한부선은 경찰의 요시찰 인물로 낙인 찍혔고 그의 구금은 시간 문제였다. 결국 한부선은 1941년 12월 7일 일본 가미카제 특공대의 진주만 기습 공격이 감행되기 한달 보름 전인, 동년 10월 22일에 일경에 의해 붙잡히고 말았다.9)



한부선의 자녀들은 감옥에 투옥되어 있는 한국인 성도들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 안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야말로 믿음의 제단 위에 놓여져 있었다. 그들의 자녀들의 건강을 진찰한 의사로서 증언할 수 있는 것은 어려운 시련이 다가왔을 때 하나님께서 저들을 돌보셨다는 사실이다. 헌트 여사도 아이들의 아빠가 감옥에 갇히고 의료 선교사들마저 9개월 동안 구금되어 있을 때와 전쟁포로 수용소에 머물 때만큼 건강했던 적이 없었다고 말하였다. 어느 날 두 살 된 쌍둥이 딸인 메어리에게 “아빠 어디에 계시지?” 물었을 때에, “아빠는 예수님을 위해 감옥에 있지요, 아멘.” 이라고 대답했다.10) 이러한 정경은 한부선의 삶과 사역에 있어 한부선의 아내 한가태 여사의 헌신이 없었다면 결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한부선은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되어 고생하다가 포로 교환의 일원으로 아프리카를 거쳐 미국으로 추방당했다. 광복과 더불어 한국으로 귀환하여 제 33회 총회(1947, 제2차 남부총회)에 참석했다. 서기가 이른바 메이첸파 선교사 한부선을 알아보고 그의 이름을 호명했다. “한부선 씨.” 그러나 답이 없었다. “한부선 씨.” 그 때 한부선은 조용히 일어서서 “나는 이 총회의 회원이 아닙니다.” 고 답했다. “나는 치리를 받고 있는 자입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진다.11) 이 대목은 한부선의 진리에 대한 확고부동한 처신과 자세를 보여준다. 한부선은 총회가 우상숭배를 비롯한 과거사 문제를 우물쭈물 넘기려고 한 것에 제동을 걸었12)던 것이다. 과거사 청산에 대한 우유부단한 자세에 일침을 가하는 “나는 이 총회의 회원이 아닙니다.”라는 한부선의 발언은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문제에 대해 진지한 자성과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한부선은 한국교회사에 있어 ‘강장제’와도 같은 역할을 한 인물이다.



1940년 7월 일본 경찰은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전국적으로 일제히 검거했다. 2,000여 명의 기독교인들이 검거되었는데, 그 중 70여 명의 지도적인 신자들이 장기 복역을 하다가 50여 명이 감옥에서 순교했으며, 나머지는 해방과 더불어 출옥하였다.13) 한부선이 순교의 제물이 되진 않았지만 그가 끼친 영향력은 그 누구와 비할 데가 없을 것이다.



일제시대의 신사참배로 인한 한국교회의 분열의 맥은 현대교회에도 이어지고 있다. 괄목할만한 한국교회의 성장에 대해 감사하면서도 이러한 분열에 대한 한부선의 안타까움은 그지없다. 그래서 그는 교회가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을 늘 강조하였다. 그는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9-10)는 성경말씀을 좌우명으로 삼고 평생을 하나님 사역에 임하였다. 1976년 5월17일에 부산 남교회에서 열린 그의 선교사역을 마감하는 예배에서도 이 말씀을 언급함으로 화합을 향한 그의 일관된 관심을 표명하였다. 무엇보다도 한부선은 개혁신앙을 신봉하는 교단 간의 화합을 매우 중시하였다.14) 박응규 교수는 한부선의 해방 후 선교사역의 특징들에 대해서 첫째, 개혁주의 신학의 확산, 둘째, 전도의 열정, 셋째, 학생신앙운동(Student For Christ)의 초석, 넷째,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벗15) 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부선의 한국에 대한, 한국교회에 대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 비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과 열정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환경과 조건들과 경험들의 필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한국교회는 한부선 선교사에게 심오한 복음의 빚을 지고 있음을 깊이 체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결론



한부선은 한국교회에 ‘강장제’와도 같은, ‘칼슘제’와도 같은 인물임을 확인하였다.



해방 후 한국 장로교회는 성경적 원리와 장로교 전통에 의해 복원되지 않았다. 특히 신사참배 참여로 인한 교회의 변절과 타락에 대한 분명한 해결의지 없이 표류하는 상태에서 한부선은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과 과정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그 당시 고려파와 함께 동역하면서 많은 시련과 비판을 받아왔지만, 한부선의 철저한 개혁신학에 대한 인식과 교회의 회복과 개혁에 대한 노력들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역사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한부선이 한국 교회 성도들과 끝까지 고난을 함께 하며 남긴 흔적들은 결코 지울 수 없는 의미를 남겼다.



더 나아가 한부선의 삶과 사역 자체가 한국교회와 민족 앞에 “살아 있는 지표(a saving index)”의 역할을 하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도성인신의 의미를 그의 선교사역에 적용한 인물이었고, 비록 겉모습은 미국인이었지만, 그의 표현에 의하면 “국산품(made in Korea)" 미국인 선교사로서 한국인을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한국의 위기와 시련 속에서 함께 울며 역사적 질고를 함께 나누었던 진정한 한국인이었다. 그는 기독교 신앙과 실천적인 삶을 통하여, 인종과 민족, 그리고 문화의 경계를 초월하여 전해지는 복음의 능력을 몸소 실천한 살아있는 전설을 우리에게 남기고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쳤다.16)



2003년 6월 28일, 한부선 출생 10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한부선이 일평생동안 마음에 두고 ‘유모’(살전 2:7)처럼 ‘아비’(살전 2:11)처럼 사랑하고 사역하였던 곳이 바로 한국이고 한국교회였다. 한국교회는 한부선의 발자취를 쫓아 온 민족과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득 안은 채 한부선이 남긴 ‘하나됨’의 과업을 안으로는 분열된 한국교회의 일치를, 밖으로 온 열방의 복음 안에서의 하나됨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각주>


1)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2: 1910-1960」(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4), 676.
“신사참배문제는 한국의 교회가 직면하였던 가장 중대한 문제였다.”



2) 박응규, 「가장 한국적인 미국 선교사: 한부선 평전」(서울: 그리심, 2004), 106.
‘한부선은 자신의 입장에서 선교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역지의 필요에 따라 파송되기를 원했으며, 궁극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하심을 따라 어느 지역이든지 가고자 하였다.’



3) 최덕성,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서울: 본문과 현장사이, 2000), 50.



4) 박응규, 상게서, 80.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와 같은 논쟁은 나로 하여금 말씀을 더욱 주의 깊게 찾게 했으며 내 신앙을 더욱 넓고, 깊게 그리고 확신 있게 해 주었다.”



5) 박응규, 상게서, 106-107.



6) 김영재,「한국교회사」(서울: 이레서원, 2004),212-215.


‘신사참배는 종교의식 아니라 국민의례이며, 예배 행위가 아니고 조상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감리교의 지도자들이 있었다. 반면에 남장로교 선교부의 총무 다비 풀톤(Darby Fulton)은 일본에서 출생하여 신도(神道)가 어떤 것인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신사참배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근본 문제와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즉 유일신론이냐 다신론이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라고 하였다.



7) 최덕성, 상게서, 50; 박응규, 상게서, 250-251.
신사참배의 형태를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정춘수, 정인과, 홍병선, 강병주 들은 내선 일체형 또는 황국신민화형이고, 채필근, 김관식, 양주삼 들은 현실순응적 융통형이고, 송창근, 전필순, 조승제 들은 교회보호형이고, 한경직, 김재준, 함태형 들은 형식적 순응형이라고 분류할 수 있다......형태야 어찌되었든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자들 가운데서도 한경직, 송창근, 김재준 등은 미국 선교사들의 신학적 입장에 비판적 입장을 취했음이 자명하다. 한경직은 그의 스승이자 미국 유학까지 보내 준 은인인 방위량 선교사가 제 27회 총회에서 부당한 신사참배가결에 항의하다가 경관에 의해 제지당할 때에도, 비통한 마음을 품으면서도 바라보고만 있었지만, 한부선은 대담하게 그 부당성에 대해 항의하였다.



8) 박용규, 상게서, 718-719.



9) 안용준, 「태양신과 싸운 이들」(서울: 세종문화사, 1972), 174-175: 박응규, 상게서, 276-294에서 재인용.



10) 박응규, 상게서, 278.
11) 최덕성, 상게서, 51.
12) 최덕성, 상게서, 53.
13) 김영재, 상게서, 221-222.
14) 박응규, 상게서, 431.
15) 박응규, 상게서, 428-451.
16) 박응규, 상게서, 469-471.



<참고도서>


김영재,「한국교회사」(서울: 이레서원, 2004).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2: 1910-1960」(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4).



박응규, 「가장 한국적인 미국 선교사: 한부선 평전」(서울: 그리심, 2004).



최덕성,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서울: 본문과 현장사이,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