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최 흥종, 강 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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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환우의 아버지"최흥종과 강순명 목사 地域 敎會史 자료
2007/03/14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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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환우의 아버지", 최흥종
거세해 성욕도 버려
소설가 문순태가 쓴 <성자의 지팡이>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단식 중인 최흥종(1880~1966년) 목사를 무등산 속 오두막으로 대학교 2학년생 손자 협이 찾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손자인 전남대학교 인류학과 최협 교수가 눈 쌓인 무등산이 펼쳐진 연구실에서 할아버지의 삶을 회고했다.
최흥종은 젊은 시절 망치란 이름으로 장터와 뒷골목을 주름잡던 주먹이었다.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잃고 엄한 계모 아래서 살던 그는 열아홉 살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계모 보란 듯이 사람을 개 패듯 패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열한 살이나 어린데도 늘 형을 챙겨주던 배다른 동생 영욱이 “성님은 사람을 때리는 게 재미있어?”라고 안타까운 듯 물었다. 훗날 의사가 되어 최흥종이 설립한 광주기독교청년회(YMCA)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해주고, 형의 자식 9남매까지 대신 보살펴준 동생이었다. 그 뒤 마음을 잡은 최흥종은 광주 양림동에서 선교 의사의 조수로 일했다.
어느 날 목포에서 활동 중인 선교의사 포사이트가 한 환자를 나귀에 태우고 왔다. 포사이트는 선교사들조차 ‘인간으로 오신 예수’라고 존경했던 인물이었다. 포사이트가 데려온 나환자는 온몸이 썩고 고름과 진물이 흘러 송장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당시만 해도 나환자를 닿기만 해도 나병에 걸린다며 나환자가 가까이 오지 못하게 돌을 던지던 시대였다. 그런데 포사이트는 환자의 겨드랑이를 양손으로 부축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 환자가 한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놓쳐버렸다. 그러자 포사이트는 “지팡이를 집어주라”고 했다. 흥종은 고름과 핏물이 잔뜩 묻은 지팡이를 짚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심으론 괴로웠다. 마침내 흥종이 용기를 내 지팡이를 집어 들어 나환자에게 건네주자 다 문드러진 나환자의 얼굴에서 작은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 순간 흥종의 가슴에 뭔가 뜨거운 것이 밀려왔다.
나환자촌 확대 요구 위해 서울까지 행진
흥종이 ‘작은 예수’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뜻하지 않게 온몸이 썩어 들어가는 병에 든 것만도 기막힌 일인데, 가족으로부터도 버림받고 이웃들로부터 온통 돌팔매질만을 받아 가슴마저 찢겨지는 나환자들의 기막힌 설움이 바로 그의 설움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뒤 흥종은 자신의 땅 1000평에 한국 최초의 나환자 수용시설인 광주나병원을 설립해 나환자들을 보살폈다. 그로 인해 광주에 나환자들이 많아지자 광주시민들은 “광주를 문둥이 촌으로 만들려느냐”며 반발했다. 그러자 여수 애양원의 전신인 나환자촌으로 나환자들과 함께 이동해 함께 살았다. 그는 한국나환자근절협회를 창설해 나환자들을 돌보았으나 여전히 갈 곳 없는 나환자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그가 단행한 것이 일제 때 큰 화제를 불러온 나환자행진이다. 그는 나환자 수백 명과 함께 무려 열하루에 걸쳐 광주에서 서울까지 행진해 총독에게 전남 고흥 소록도 나환자촌을 확대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오늘날 소록도 나환자 갱생원이 설립되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최흥종의 삶에 감명 받아 평생 소록도에서 나환자들에게 헌신하다 삶을 마친 의학박사 신정식의 책상엔 늘 사진 석장이 놓여 있었다. 최흥종과 포사이트, 예수의 사진이었다.
◀최협 교수가 무등산 오방정 앞서 할아버지를 회고하고 있다. (사진제공 조연현)
3·1운동의 주동자의 한 명으로 1년 4개월의 옥고를 치렀던 최흥종은 전라도의 시민운동, 청년운동의 대부이기도 했고 북문안교회, 북문밖교회 등 광주 지역 초기 교회들을 이끌어 광주를 기독교의 메카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좌·우를 비롯한 독립운동 단체들이 갈라져 싸움을 벌일 때도 뒷골목 두목 출신의 카리스마와 넓은 포용력을 지닌 그 앞에선 모두 하나가 되었다.
나환자들의 삶이 어느 정도 정착되자 그는 1935년 서울 세브란스병원의 친구에게 부탁해 거세를 해버린 뒤 스스로 명예욕과 물질욕·성욕·식욕·종교적 독선까지 ‘다섯까지 집착으로부터 해방’을 뜻하는 오방(五放)정을 무등산 속에 지어 홀로 살았다. 해방 뒤 김구는 오방정에 일주일을 머물며 함께 나라를 이끌어가자고 호소했으나 끝내 거부하자 ‘화광동진’(和光同塵·성자의 본색을 감추고 중생과 함께함)이라며 그를 칭송하는 휘호를 남기고 떠났다.
성경과 도덕경을 읽으며 생의 마지막 100일을 단식으로 마무리한 뒤 그가 육신을 벗자 광주 시민들은 광주 최초의 시민장으로 그를 보냈다. 그의 관 뒤엔 수백 명의 나환자와 걸인이 뒤따르며 “아버지 저희들은 이제 어찌합니까”라고 뒹굴며 울부짖었다. 문순태는 오방을 ‘우리 시대의 마지막 성자’라고 불렀다. (2007. 3. 13. 뉴스앤조이 / 조연현 한겨레기자)
강순명 목사
“남을 성자로 보는이가 성자” 노인.나환자들 돌보기 헌신
한국전쟁의 와중 전라도 광주에서 강순명(1898~1959?왼쪽 사진) 목사가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의 구걸을 지켜보고 있었다. 골목 첫 집에선 할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나왔던 사내가 걸인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문을 쾅 닫고 돌아서 버렸다. 두번째 집도, 세번째 집도 마찬가지였다. 다리를 힘들게 끌며 골목을 다 다녀도 보리쌀 한줌도 얻지 못한 할머니가 눈물을 훔치는 것을 본 강 목사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자기 집에 데려갔다. 하루하루 죽으로 연명하며, 방 두 칸에 대식구가 겨우 살아가는 비좁은 집에 식구 하나가 늘었다. 광주천 다리 밑을 지나다가도 거적때기를 둘러쓰고 죽어가던 할머니를 두고 돌아설 수 없던 강 목사는 또다른 할머니를 업고 와 집 안방에 누였다. 그렇게 집에 데려온 사람이 무려 30여명. 강 목사가 전쟁 중 데려온 걸인 할머니 때문에 강 목사 가족들은 방안에 들어가 앉을 수도 없어 한뎃잠을 자야 할 지경이었다. 그것이 천혜경로원의 시작이었다. 1952년 7월이었다.
광주시 동구 학동 천혜경로원에 들어가 70여명의 할머니들을 보니 자식도 없고 가진 재산도 없어 양로원에 들어와 살아가는 노인들은 불쌍하다는 편견이 여지없이 무너진다. 정갈한 외모에 밝은 미소들이 경로원 전체를 빛으로 감싸는 듯하다. ‘오늘이 바로 할머니의 마지막날이라고 여기고 여한이 남지 않게 모시려 한다’는 강은수(65) 원장은 강 목사의 아들이다.
강순명은 원래 모태신앙이었으나 아홉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열세살 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청년기를 방황으로 보냈다. 그러면서 광주의 뒷골목에서 이름을 떨치던 ‘박치기 명수’였다. 형 태성의 눈물 어린 호소로 순명은 마침내 교회를 나가고, 이발 기술을 배워 이발소를 차려 새 출발을 했다. ‘돌아온 탕아’였다. 그는 그해 수피아여고를 나온 재원 최숙이와 결혼했다. ‘광주의 대부’ 오방 최흥종 목사의 장녀였다. 대인은 대인의 싹을 알아본 것일까. 당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의사의 청혼을 거절하고, 부모도 없이 뒷골목이나 누비던 이발사를 사위로 맞으려 하자 집안 식구들은 모두 기가 막혀 했지만 최흥종 목사는 보물을 얻은 듯 만족해했다.
◀ 아버지 강순명목사의 뜻을 이어 ‘오늘이 할머니의 마지막날이라고 생각하고 모시고 싶다’는 강은수 원장이 천혜양로원 할머니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 조연현)
순명은 이듬해 만학도가 되어 일본에 유학해 중학교에 입학했다. 살림은 아내가 일본 유학생들의 밥을 해주어 근근이 이어갔다. 일본에서 2년째. 도쿄대지진이 일어났다. 이틀 만에 도쿄 인구 300만명 가운데 16만여명이 죽고, 10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해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지자 일제는 분노의 화살을 ‘조선인’에게로 돌렸다. ‘조센징들이 혼란한 틈에 도둑질을 하고,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면서 일인들은 미친개처럼 조선인을 찾아 닥치는 대로 칼로 베고 찔러 죽였다. 도쿄에서 그렇게 학살당한 조선인이 무려 5천명이 넘었다. 우에노공원으로 피신한 순명은 눈물을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지은 죄를 조금도 씻지 못했습니다. 제가 죄를 청산하도록 사흘만 시간을 주십시오!”
눈물의 기도였다. 폭포수 같은 눈물이 그치자 말할 수 없는 평화가 밀려왔다. 그는 그 때 여생을 온전히 주님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
회심 1년 뒤 귀국한 순명은 기독교청년회(YMCA)에서 농촌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전주 서문교회 배은희 목사와 함께 독신전도단을 만들어 일제의 수탈로 피폐해진 농촌으로 파고들었다. 독신전도단은 청년들이 3년간 시간을 내 홀로 농촌에 들어가 헌신하며 주간엔 일하고, 저녁이면 부녀자와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고, 주일이면 교회에 봉사하는 삶으로 농촌에서 초대교회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나섰다. 독신전도단은 농촌 협동조합과 소비조합을 조직해 농촌경제를 구조적으로 개선하는가 하면, 늘 기초 상비약을 준비해 환자들을 치료하기도 했다. 그때 독신전도단으로 그를 따라나섰던 이들이 ‘맨발의 성자’ 이현필과 ‘해남의 등대’ 이준묵 목사 등이다. 순명은 그때부터 병에 걸려 가족으로부터 버림 받은 폐병환자와 나환자를 업어다가 돌보았다. 그는 언제나 말보다는 삶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증명했다. 첫부인이 결혼 17년 만에 6남매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뒤, 평양여자신학생 장신애는 처녀의 몸으로 고아원에 들어간 셈 치고 순명의 삶에 동참했다. 바로 강은수 원장의 어머니다.
강순명 목사는 해방 뒤 서울에서 연경원을 만들어 기독교 청년들을 훈련시켰다. 직접 골목길을 누비며 남의 아궁이를 고쳐주고 쌀을 얻어와 청년들을 먹여살렸다. 그러나 그가 거둬주었던 한 집사가 소유권 등기를 해놓지 않은 것을 알고 연경원을 자신의 소유로 해버렸다. 주위에선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며 이를 갈았으나, 그는 “주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한다”며 두말없이 한강 다리 밑으로 떠났다. 그는 그런 고난을 당하면서도 누구에게서나 그만의 장점을 발견해내 칭송하곤 했다. 그리고 “남을 성자로 보는 자가 바로 성자이며, 남을 마귀로 보는 자가 바로 마귀"라고 했다. (2007. 3. 6. 뉴스앤조이 / 조연현 <한겨레> 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