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이 현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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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이 현필


[2009.02/빛을 따라간 사람들]이현필1


순결의 길, 초월의 길로 들어서다

출생과 신앙의 배경
이현필 선생은 1913년 전남 화순군 도암에서 부친 이승노와 모친 김오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모친은 어떤 사람이 소금 일곱 가마니를 싣고 집에 와서 아랫방에 내려놓는 꿈을 꾸고 이현필 선생을 낳았다고 한다.
이현필 선생은 어린 시절 싹뿌리라고 불렸다. 훗날 그의 제자들은 두 가지로 이를 풀이하였다. 그것은 ‘뿌리고 싹 났으니’, ‘예수님을 안 후로 싹 버렸다’였다. 그러나 이현필 선생은 자신을 ‘헌신짝’이라고 자주 불렀다.
이는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뜻도 있겠지만,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라는 뜻이었다. 이 선생은 평생에 남들이 자기를 존경하고 칭찬해 주는 것을 그 마음속으로부터 싫어했다. 자기를 선생이라고 불러주는 일을 저주로 여겼다.
이선생은 천태 보통학교를 다녔는데, 공부를 잘하여 1등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부모님에게 매 한번 맞지 않고 자랐고, 학교에서도 인정받는 학생이었다. 한번은 활을 가지고 놀다가 순사를 보고 옆에 있는 친구에게 활을 주어버린 일이 있었다. 그 비겁했던 행동이 어른이 된 후에도 늘 맘에 걸려 자기는 그렇게 비겁한 자라고 고백했다.
이현필 선생은 학력이 높지 않았으나 혼자서 독학하고 노력하여 그 실력은 대학교수나 유명한 철학자라도 마주 앉아 논쟁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선생의 집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넉넉히 살았으나, 부친의 사업실패로 집도 남에게 넘어가고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권동에 살면서 몇 십리나 떨어진 영산포까지 닭 장사를 하러 다녔다. 영산포에 일본사람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목사 이름이 관파였다. 그 목사는 구제도 많이 하고 전도를 열심히 하는 분이었다. 이선생은 그의 설교에 감화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가 1943년, 22세쯤의 일이었다.

특별한 만남, 새로운 신앙의 길로 들어서다
그 후 그의 생애에 결정적인 변화가 오게 된 것은 화순군 도암의 성자(聖者)로 불리우는 이세종 선생을 만난 뒤부터였다. 예수님을 믿게 된 후 이현필 선생이 나주군 다도면에 있던 방산교회에 다니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때 이웃에 인접해 있던 도암면 등광리에 사는 기인(奇人) 이세종이란 분이 가끔 방산교회에도 드나드는 것을 보았다.
이세종 선생은 기인이요, 도인(道人)이어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신앙이 되어서는 못쓴다.”고 늘 가르쳤다. 그는 기도 중에 “도인은 화려해선 안 된다.” 는 영음(靈音)을 세 번이나 들었다고 한다. 그를 보통 이공(李空)이라 불렀다. 그는 세상을 완전히 버리고 재산은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 살생을 하지 않고 자기 아내를 누님이라 부르며, 부부가 남매같이 살았다. 일정시대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깊은 산중에 숨어 지냈다. 그는 성경 외에 다른 책은 절대 읽지 않았다. 남의 집에서 명절 음식이나 제사 지낸 것을 보내오면 먹지 않았고, 육식을 금하고 남의 집에서 자지 않았다. 그는 천태산 기슭에 기도실을 짓고 있었다. 사방에서 모여 온 젊은이들이 그의 제자가 되어 날마다 이공을 찾아가 성경을 배웠다.
이선생도 그 그룹에 끼었다. 이공을 따라 다니던 젊은이들 중에는 강순명, 박복만, 오복희, 이상복, 수레기 어머니 등도 있었다. 그 중에서 이현필은 가장 우수한 제자였다. 이공은 이현필을 천재라 평했다. 스승과 제자는 때때로 청소강변 잔디밭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성경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 당시 이현필은 이공의 순결사상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여 논쟁을 벌였다. 이공이 주장한 순결사상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적으로만 아니라, 육신까지도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것, 즉 결혼과 부부생활까지 금해야 한다는 사상이었다. 이공과는 달리 이현필은 다독(多讀)을 했다. 이현필 선생과 오랜 세월 교분이 있었던 정인세 선생은 말하기를, “이세종은 이현필보다 세상학문에 있어서는 무식했으나, 선이 더 굵고 큰 인물이었다. 그가 그렇게 무식하면서도 유명해진 것은, 그는 성경을 한번 읽고는 한번 실행하고야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라고 했다.
한번은 이현필 선생이 이공을 찾아 갔더니 선생은 보리밥을 잡숫고 계시다가 찾아온 이현필을 보고 보리밥을 내놓으셨다. 그러면서 “먹고 가시오.”하고 거듭 권했는데 이현필은 맛이 없는 보리밥을 끝내 사양하고 나왔다. 그 후 이현필 선생은 그때 일을 회상하면서 “내가 그 때 이공이 그렇게 진정으로 권함을 순종하여 그 보리밥을 먹었더라면 나는 얼마나 복된 사람이 되었을까?”하며 그때 고집하던 마음을 뉘우쳤다. 이공은 남의 집에 가서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음식대접도 받지 않았다. 어디를 가려면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는 분이었지만, 그 제자 이현필 선생의 집에 가실 때는 자기 편에서 밥을 달래서 잡수시는 사이었다.

갈등과 변화 그리고 순결의 길로
이현필은 이공의 사상대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신앙이 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공의 순결사상을 배우면서도 그대로 순종하지 않았다. 그는 스승을 배신하듯 22세 때 결혼을 하였다. 이현필은 다도면에 새살림을 차렸다. 제자 이현필이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공은 매우 실망했다. “참 좋은 인재를 놓쳤구나!” 하고 그는 탄식했다.
그런데 이현필 선생은 결혼생활 얼마 후에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다. 막상 결혼을 하고 보니 스승 이공의 주장이 옳았음을 통절히 느꼈다. 그러나 이미 가정을 가진 몸이니 어떻게 하나? 그러나 잘못 되었다고 깨달았을 때 좌절하거나 주저앉지 않는 것이 이현필이었다. 뒤늦게나마 이공의 사상에 귀의하여 선생의 사상을 따라야 한다고 크게 깨달은 그는 결행에 옮기려고 하였다. 결혼한 자가 순결생활을 해낼 수 있는가? 아내와 이혼해야 하는가? 이선생은 이혼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스승을 본받아 살려고 하였다. 이공은 결혼하고도 부부가 남매로 사셨다. 이세종 선생은 나이 어린 아내가 두 번이나 자기를 버리고 딴 남자에게 시집을 갈 때, 아내의 살림 도구를 지게에 지고 아내에게 갖다 준 분이다. 그 아내가 다시 돌아오니 곧 받아주었다.
이현필 선생은 아내와 동거 2년도 채 못 되는 사이 자기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싸우다가 아내를 보고 부부로 살지 말고 남매로 살자고 요구했다. 그 다음부터는 아내를 보고 매씨(妹氏)라 부르기 시작했다. 행복한 가정을 꿈꾸던 아내는 남편의 변한 태도에 어처구니도 없고 슬프기도 하여 몹시 울었다. 남편을 놓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태웠다. 어떤 때는 칼을 들고 “너 죽고 나 죽자.”고 쫓아다니기까지 했다.
엘리야의 영이 제자 엘리사에게 내렸듯이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세종의 영이 제자 이현필에게 임했다고 평할 만큼 이현필은 스승의 정신과 생활을 본받았다. 이공의 순결사상이 그대로 이현필 선생에게 전수되었다. 동광원의 핵심사상인 순결사상은 이런 경로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서리내골, 동광원의 태동
이현필 선생의 나이 30세 전후 수년간 선생은 주로 개인적으로 산에 은거하면서 금식 명상생활을 일삼았다. 산에 파묻혀 기도하며 지내던 이선생은 해방 후 1946년(33세) 남원에서 몇 십리 들어가 있는 서리내골이라는 산중에서 십여 명의 소년, 소녀들을 모아놓고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시켰다. 서리내는 이현필 선생 운동의 발상지요 산실(産室)이다.
이현필 선생은 심산유곡, 산 좋고, 물 좋고 전망 좋은 곳을 수도생활의 요람으로 선택했다. 그들은 대부분 이선생에게 감동되어 부모들의 집을 나온 젊은이들이었다. 이선생을 따라 다닌다고 교회와 집에서 쫓겨났다.
서리내 깊은 선경 속에서 그들은 이현필 선생의 인격의 감화를 받으면서 성경을 배우고, 기도하고, 노래를 부르며 훈련을 받았다. 한번 훈련 기간이 15일씩이었다. 보름 훈련하고는 쉬었다가 또 보름을 했다. 이현필 선생은 뒷산에 자주 올라가 기도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한번은 이선생이 서리내 산이 크게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선생은 그 소리를 듣더니 그것은 큰 동란이 일어날 징조라고 직감했다고 한다. 그들은 숙식을 위해 움막집을 지었다. 이선생은 남녀유별(男女有別)에 대해서는 무서울 만큼 철저하고 엄격했다.
강태형 목사(은총교회)



관리자 < webmaster@cgnews.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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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 100년 숨은 영성가를 찾아
‘맨발의 성자’ 이현필





전북 남원 지리산 서리내. 원래 이름은 선인래(仙人來)로 신선이 온다는 산골짜기였다. 이곳을 찾아온 이현필(1913~64)은 기도하러 숲 속에 들어가면 그대로 나무가 되고, 바위가 되어버렸다. 다 떨어진 옷을 입은 채 꽁꽁 언 그의 머리 위 하얀 서리에서 아침 햇살을 받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면, 새가 날아와 목석인 듯 쪼아댔다.



배고픈 그 시절 그는 “내가 먹으면 다른 사람 먹을 몫이 줄어든다”며 굶기를 밥 먹듯했다. 뱃가죽이 늘 등에 붙어 있어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눈이 가슴까지 쌓인 어느 날 새벽 남몰래 길을 나섰다. 3일 동안 먹은 것이라곤 없는 상태였다.



당시 다른 수도자들과 함께 기도하던 여성수도자 금남은 행여 이 선생이 눈밭에 쓰러지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어 다른 동료 한명과 몰래 뒤를 밟았다. 눈이 너무도 많이 와 어디가 땅이고 어디가 벼랑 끝인지 구분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현필은 사뿐 사뿐 날듯이 나아갔다. 둘은 선생의 발자국만을 밟으며 따라갔다. 이현필은 그렇게 오감산까지 무려 40리를 걸었다. 오감산 산막에서 홀로 수도 중인 제자가 눈 속에서 얼어 죽지 않았을까 밤낮으로 기도하다가 몸소 눈밭을 헤치고 그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



전북 남원시 대산면 운교리 남원동광원에서 이현필을 따르는 30여명의 수도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김금남(79)원장은 스승을 회고하다 그의 사랑이 다시 느껴지는 듯 한동안 입술을 떤 채 말을 잊지 못한다.

이현필은 대중설교를 하지 않았다.



오직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예수처럼 대했다. 그는 광주와 무등산 일대에서 여순반란사건과 6.25 뒤 거리를 떠돌던 수많은 고아들과 폐병 환자들을 거두었다. 그는 맨발로 눈길을 걸으며 탁발을 해서 고아와 환자들을 먹이면서 돌보다 결국 자신도 폐병에 걸려 51살에 귀천했다.

이세종 선생에 감화해 수도, 신분 불문 누구나 귀히 여겨 “장돌뱅이 중에도 의인 있다” 자신도 폐병에 감염돼 ‘귀천’



? 노구의 몸에도 스승 이현필의 삶을 따라 철저한 자급자족을 위한 노동과 감사로 살아가는

남원동광원 식구들.






예수 그리스도 이후 최고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프란체스코와 이현필을 평생 탐구해온 은성수도원 창립자 엄두섭 목사는

“이현필은 프란체스코와 비교해 봐도 누가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인물”이라고 평했다.



또 함석헌의 스승 유영모는 아들뻘인 그한테서 빛을 본 뒤 광주(光州)를 빛고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를 들은

함석헌에 의해 빛고을이란 말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이현필은 전남 화순군 도암면에서 태어났다. 10대부터 기독교를 접해 전도사 생활을 하며 평범한 목회자가 될 수

있었던 그의 삶이 송두리째 바뀐 것은 ‘도암의 성자’ 이세종을 만난 뒤였다.



이세종은 “나 같은 사람이 또 하나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그가 바로 이현필이었다. 이현필은 스승처럼 아내와

육적인 관계를 단절하고 정절의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화순 화학산에서 4년, 지리산에서 3년간 기도하던 중

신비체험을 통해 거듭났다. 그때부터 그의 눈은 육안에서 영안으로 바뀌었다.



광주에서 600명의 고아들을 돌볼 때 그를 따르는 동광원 식구들은 자기 자식들을 고아들 속에 넣어 똑같이 길렀다.

걸인이나 창녀를 대할 때도 그는 천사처럼 귀히 대했다. 높고 낮고, 더럽고 깨끗한 육안의 시비 분별을 벗어난

영의 눈이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든 어떤 물건이든 천히 여기면 자기도 천해진다고 했고, 사랑과 생명은 하나요,

사랑과 빛은 하나이며 십자가의 피는 사랑이요, 생명이라고 했다.



그에겐 기도시간이 따로 없었다. 삶이 곧 기도요. 일이 곧 기도였다. 모든 것은 자급자족이었다. 그는 배부를 때

배고픔을 대비하라고 했고, 살아있을 때 죽음을 생각하라고 했다. 이처럼 철저히 미래를 준비하게 했고, 실내로

들어갈 때도 언제든 나올 때를 대비해 바깥쪽을 향해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들어가는 준비성이 몸에 배도록 했다.



또 밥을 먹을 때 한 숟가락씩 덜어 굶주리는 사람을 돕자는 일작운동을 펼쳤다. 이런 동광원의 훈련은 박정희에 의해

새마을운동 초대 연수원장으로 초빙된 그의 제자 김준에 의해 새마을지도자 훈련으로 이어졌다.



결핵환자를 돌보다 결핵에 감염돼 피골이 상접한 그를 업고 다녔던 한영우(78) 장로는 “선생님은 의인은 교회 안만이

아니라 장돌뱅이 가운데도 있다고 했다”며 “그의 사랑은 어떤 틀에도 갇히지 않는 우주적 사랑이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광주 귀일원에서 중증장애인을 돌보고, 전북 남원, 장수, 경기도 벽제, 광주 무등산,

전남 화순, 함평, 진도 등에서 노동수도공동체를 일구어 호의호식과 출세와 성공과 승리의 대로가 아니라

절제와 양보와 헌신의 좁은 길을 말 없이 걷고 있다./2007한겨레신문/남원·광주·화순/조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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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19일 오후 2시 경기도 벽제의 웃골(上谷)에 있는 신앙과 사랑의 공동체 "동광원(東光園)" 에서는

조촐한 추모행사가 열렸다.
이 공동체를 있게 한 "맨발의 성자" 이현필(1913~64) 선생의 37주기를 기념하는 자리였다.

이현필은 일생 거지나 병자와 함께 살다 병으로 숨진 "한국의 성 프란체스코" 로 불린다.

이 자리에는 박공순(71) 할머니(흔히 수녀로 불린다) 등 여덟명의 이곳 식구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목회자들,

그리고 "풀무원" 의 창업자인 원경선씨, 서경원 전 국회의원 등 50여 명이 참석했다.

이현필의 애제자로 그의 생활철학인 순결.청빈.순명(順命)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총각" 김준호(76)씨의 모습도 보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토착신앙 공동체인 동광원은 50여년 전 스승 이세종의 뜻을 받들어 이현필이 만들었다.

고생을 복으로 알고 살며 봉사를 실천하는 노동 수도(修道)단체다. 이현필의 뜻을 따라 현재 이런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전국적으로 50여명에 이른다.

이같은 실천적 사랑의 중심인물, 즉 정신적 지주가 다석 유영모다. 다석은 해방직후인 1948년 이현필을 만나

서로 감화를 주고 받는 선후배이자 동료가 됐다.

다석은 1년에 한두번씩은 전국에 산재해 있는 동광원을 돌며 설교를 하곤 했다. 벽제의 동광원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금 있는 할머니 중에도 그 때를 기억하는 이가 많다. 박공순씨의 회고다.

" "철학박사님" 이어서 말씀이 어려웠지요. 그래도 열심히 설교를 듣고 나면 나중에 그 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말씀이 힘찼는데, 특히 문자 한 자 가지고 뜻풀이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

당시 수녀들은 다석을 "진달래 할아버지" 라 불렀다. 다석은 "아름답게 피기보다는 지는데 보람을 두는 꽃 같다" 며

진달래를 유독 좋아했는데, 이현필은 다석의 그 "진달래 정신" 이야말로 수녀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석은 이들의 묵묵한 실천을 독려하는 뜻에서 가산도 쾌척했다.

서울 구기동의 집을 판 돈으로 광주직할시 동광원 본원(지금의 귀일원)에 있는 "진달래교회" 를 짓는 비용과

1만평의 터를 마련해 준 사람이 다석이었다.

다석과 이현필의 맥은 오북환(93.장로)-김준호를 비롯해 김준(75), 김정호(전 목포대 교수.71) 등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박정희 정권 시절 새마을지도자연수원 원장을 지내는 등 실질적인 책임자였던 김준(전 전남대 교수)은

다석으로부터 "농촌으로 돌아가야 한다" 는 정신을 배웠다. 이 때문에 원시 새마을운동의 사상적 원류를

다석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이같은 사회적 실천 못지 않게 다석은 "인간됨" , 즉 도(道)를 향한 금욕수행에서도 본보기를 보였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그의 금욕정신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 김흥호(82.前 이화여대 교수)다.

김씨는 "그저 선생을 흉내낼 뿐이다" 고 겸손해 하지만 그 지극한 정진은 산란한 현대인들에게

경종이 될 만하다.

다석은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네가지 독소, 즉 탐욕과 치정(癡情).진에(瞋□.지식욕).허위(虛僞)를

끊기 위해서는 하루 한끼 먹고(一食), 정욕을 참고(一言), 바로 앉으며(一坐), 거짓이 없어야 한다(一仁)고 말했다.

다석은 인간의 하루살이 일생은 이처럼 늘 같아야 한다는 뜻에서 오늘을 "오!늘" 이라 풀이했다.

김흥호는 다석의 "오!늘사상" 을 생활 속에서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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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필(李鉉弼, 호:방림, 1913~1964)
2006.09.26 17:26 | 역사신학 | soodosacho

http://kr.blog.yahoo.com/soodosacho/1263


이현필(李鉉弼, 호:방림, 1913~1964)





일생을 절식하며 맨발 벗고 다니면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였다. 금욕, 청빈, 순결을 몸소 실천한 선생은 동광원을 통해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 예수를 닮으려는 그의 열성은 철저하고 진실했다.





이현필(李鉉弼, 호적에는 李鉉鼎으로 되어 있음)선생은 1913년 1월 28일에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용하리(권동)에서 출생했다. 이곳은 나주군 영산포나 남평에서도 산을 타고 30여리 떨어진 산골짜기에 있으며 주변에 화학산과 천태산(혹 개천산)이 있다. 아버지 이승노(李承老), 어머니 김오산(金烏山) 사이에 3남매가 출생했는데, 현필은 어머니 나이 27세 때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과 누나가 있다. 막내로 자라서 일곱 살까지 어머니 젖을 먹고 자랐다고 한다. 꼿꼿한 성격은 부친을 닮았고, 인정이 많고 따뜻한 점은 효자댁 출신의 어머니를 닮았다.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열 살이 되기까지 권동집에서 자라면서 천태보통학교를 다녔다. 이 학교는 본래 서당이었던 것을 후에 학교로 승격한 것인데, 현필은 4년 동안 언제나 1등으로 공부하여 졸업했다. 그가 보통학교를 졸업한 것이 그의 전 학력이다. 그후 현필은 혼자서 독학하고 노력하여 많은 책을 읽고 사상이 깊어 그 실력이 대학교수와 논쟁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청년이 되어 다도면 면서기(茶道面 面書記) 시험에 응시하여 형과 함께 합격했으나 형만 서기로 다니고(후에 다도면장까지 지냄) 이현필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서기로 봉직하는 일을 시작하지 않았다.







어릴 때 이름은 싹뿌리라 불렀는데 그 이유는 전해지지 않는다. 후에 제자들이 이를 ‘뿌리고 싹 났으니’ 혹은 ‘예수를 안 후는 싹 버렸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선생은 자칭 ‘헌신짝’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뜻으로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죄인이라는 뜻이다. 일생 남들이 자기를 존경하고 칭찬해주는 일은 그 마음속으로부터 싫어했다.





이현필의 집은 예수를 믿기 전에 넉넉히 살던 집안이었으나 부친의 사업 실패로 자기가 살던 집도 남에게 넘어갔다. 그 후 너무도 가난하게 살아 그는 돈을 벌어 고생하는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드리기 위해 옛집을 다시 사고 싶었다. 그래서 권동에 살면서 몇 십리 떨어진 영산포 읍에서 닭장사를 하러 다녔다. 당시 영산포에는 일본사람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일본인 교회가 하나 있었다. 담임목사는 관파라 불렀는데 그는 사람들에게 구제도 많이 하고 열심히 전도하던 분이었다. 이현필은 그를 만나 처음으로 예수의 복음을 듣고 그의 설교에 감화를 받아 예수를 믿기로 했다고 한다. 이때가 13세였을 때였다(1925년). 그의 나이 17세 때 서울 기독 청년학관(YMCA)에서 영어와 성경을 공부했는데 이때에 원경선 선생과 서로 알게 되어 서로의 교제가 평생 계속되었다. 그의 나이 21세때(1933년)에는 전남 광주 신안동교회 전도사로 시무하기도 했다. 이때 백춘성 장로와 알게 되었고, 백장로는 일생을 통하여 이현필을 도왔고, 동광원 사람들과 교제도 하였다.





3. 분홍비늘꽃 Epiloum angustfolium

과 명 : 바늘꽃과






이현필의 신앙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분은 예수를 믿고 방산(芳山)장로교회에 출석하면서 만난 등광리의 이공(李空, 이세종)선생이었다. 이곳은 용하리에서 10리 떨어진 중촌(中村)마을로 이공의 고향이다. 방산교회는 이 두 사람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교회로 지금은 등광리교회(1999년 초부터 현재 정칠영목사 시무)가 되었다. 그를 따라다니며 성경을 배울 때 부친은 아들을 보고 미치광이를 찾아다닌다고 꾸짖었어도 이현필은 그냥 계속 다녔다고 한다.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후 1948년 9월 1일에 남원 지리산 골짜기 ‘서리내’에서 몇 사람을 모아 성경을 가르친 것이 최초 “한국 기독교 토착 신앙공동체”운동을 시작한 시발점이었다. 몇 달 후 서울의 Y총무인 현동완선생이 보내준 기금으로 정인세와 함께 광주에서 동광원(이현필은 歸一園이라 함)을 세워 고아원 운영에 적극 지원을 하였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고아들의 숫자는 순식간 600명으로 불어났다.





동광원은 한마디로 “한국 기독교 수도원”이었는데 순결(철저한 남녀유별), 노동, 수도, 선행, 정직, 성실, 책임, 희생의 정신을 실천해 나갔다. 효소법을 개량한 농사를 시작했고, 모든 공동체 멤버는 직접 노동을 하여 자급자족했으며, 최소한 양만 먹고 최대한 남긴 농산물을 팔아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구제하는데 사용했다. 노동을 중요하게 여기며, 근검절약하고 사치를 피하고 현대문명을 거부하는 점에서는 재침례파(Anabaptist, 미국 오하이오주와 펜실베니아주를 비롯한 10여개 주에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살고 있음)인 아미쉬(Amish) 공동체와 통하는 점이 있다. 김용기장로의 가나안농군학교가 일종의 농촌계몽운동이라면, 동광원은 순수한 신앙운동이었다.





현재 동광원은 남원에 그 본부를 두고 있으며, 여러 곳에 분원이 있다. 화학산 기슭 도암의 ‘청소골짜기’(정규수 수녀, 1948년 10월, 고아원운동 발상지; 고아와 머슴출신 한영우집사는 1953년에 들어와 동광원 수녀들의 농사일을 돕고 있다), 중촌(中村)의 화순(6?25때 피신처, 김춘일 수녀가 1953년에 들어와 현재 ‘큰 언니’역할을 하고 있다), 도구밖골(도구봉) 가마터, 문바위, 이세종 선생의 유적지와 무덤, 각시바위, 소반바위, 바람재, 전남 함평, 진도, 경기도 벽제 계명산(수녀의 마을), 무등산 등지에 있다. 광주 동광원은 5?16직후 정부에 의해 폐쇄 조치되었다가 1965년에 다시 귀일원(초대 원장=정인세 1909~1991, 초대 총무 및 2대 원장=김은연 1920~1991)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재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선생은 주로 암굴에서 수도를 했고, 손수 움막을 지어 기거했으며, 깨끗한 동정(童貞)생활을 실천했다. 부인 황홍윤은 광주에서 목회하던 백영흠 목사의 처제인데 결혼 직후부터 이선생은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것을 거절했고, 거지와 고아들을 끌고 다니면서 집안살림을 돌보지 않자 한때는 ‘칼을 품속에 숨기고’ 다니며 살해할 기회를 노릴 정도로 남편을 미워하였다고 한다. 한 때 다른 집으로 개가하였지만 노년에 병이 들어 도장리로 돌아와 회개하고, 정월례집에서 3년간 기도하며 살다가 1998년 83세로 소천하여 이세종 부인 ‘한골 어머니’의 묘 옆에 묻히었다.





6?25동란 때 공산당이 광주로 진입하기 직전 피신하지 않고 남아 있던 수피아여학교 교장 유화례선교사를 화학산 문바위, 박적골, 도구박골 등지에서 정성껏 숨겨주었다. ‘인공치하’ 5개월 동안 100여 동광원 식구들과 함께 피신생활을 한 것이다. 이때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동광원은 수도생활과 성경공부 지도하는 일 외에, 고아들, 폐결핵 환자들 돌보아 주며, 지체 장애인 300여 명 돌보고 있다. 그의 말년에 성경공부 모임이 절정을 이루었는데, 밤나무골 남나무 집에 백 여명의 제자들이 매양 선생의 말씀을 사모하여 모여들었다.





이현필선생은 건강이 좋지 않아 마침내 폐결핵에 걸려 고생하기도 했으며 자주 각혈을 했다. 죽음을 예상한 선생은 자기가 고요히 죽을 장소를 찾으러 서울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남녀 수십 명의 제자들이 광주역에서 눈물을 흘리며 환송을 하였다. 오북환, 김준호, 정인세가 동행했다. 서울 신촌 부근 넝마주이 거지굴에서 마지막 숨을 거둘 준비를 하면서 밤중에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제자인 정인세, 오북환에게 먼저 가라고 해서 이 두 분은 자리를 비웠고 김준호는 곁에 남아 있었다. 아마 선생은 옛날 광주 양림다리 밑에서 거지생활을 하던 시절을 회상하며 죽는 순간도 거지하고만 함께 있으려는 듯했다. 다음날 정인세는 다시 돌아왔다. 선생은 반가워하면서 김준호와 정인세 두 제자에게 마지막 신앙간증을 하였다.





“저는 이 시간까지 예수님을 섬김에 있어서 선행위주를 해왔습니다. 오늘 지금 저는 그 동안 잘못 믿어온 점을 자백합니다. 우리 예수님의 보혈만이 저를 구원한다는 것을 저는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는 일평생 오늘까지 밥이 귀한 줄 알며, 밥만 좋은 줄 여기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제게는 물이 제일 귀합니다. 생명수가 귀합니다. 이 물을 마셔야 저는 살고, 이 물을 마시지 않는 날엔 저는 죽습니다. 선행으로는 구원 얻지 못합니다. 예수님 보혈로만 구원을 얻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예수님 보혈이 내 몸에 한 방울 흘러 들어오면 저는 삽니다. 제가 앞으로 걸어갈 걸음은 주의 보혈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뛰어 들어갈 것입니다” 선생의 요청대로 정인세가 이를 종이에 받아 적었다.





서울 신촌 대피호 굴속에서 사경을 방황하다가 문득 깨달아진 이 날의 경험이 있는 뒤부터는 이현필선생의 분위기는 보다 부드러워졌고 깊은 사랑의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일반 교계에서 이현필을 산중파 금욕주의자라고 불렀다. 그 말대로 지금까지 그는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으며 죽어도 약을 쓰지 않았다. 이공(李空)처럼 절대로 살생을 하지 않았다. 길을 걸어갈 때 보통 사람들보다는 배나 느리게 천천히 걸으면서 길가의 개미, 지렁이 등 곤충벌레가 밟히지 않게 목숨을 가진 것을 주워 옮겨 놓든가 피해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일평생 그는 한잔의 커피도 한 점의 고기도 들지 않았다. 몸소 청빈하게 순결하게 살면서 예수를 닮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의 철저한 금욕생활 자체에 대한 교만을 가지지 않고 죽는 순간까지도 항상 부족한 죄인임을 고백한다. “제가 오늘 이대로 죽으면 저는 천국에서 예수 앞에 역적 같은 놈이 되리라는 느낌을 가집니다. 그 동안 제가 절대선행을 강조해 왔던 고로, 저를 따르는 이들을 온통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을 만들어 버렸습니다…나는 위선자입니다. 나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구원 얻을 사람이지 선행이나 금욕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임종을 앞두고 깨달은 것은 예수 보혈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다. 물론 그의 과거의 신앙도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신앙이었다. 그런데 그의 제자들이 선생의 금욕생활 자체를 우상화하지 않을까 염려되어 이를 다시 강조한 것이다. 그의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2천년 전 유대땅 골고다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바로 지금 이 시간 어쩔 수 없는 나의 마음에 뚝뚝 떨어져 오는 예수님의 보혈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구름국화 Erigeron thunbergii var. glabratus







평생 고기를 한번 잎에 대지 않던 선생이 신촌에 있는 거지 굴에서 기진맥진해 있을 때 굴비 국물을 달라고 해서 떠 드릴 때 제자들이 당황했다. 물론 후두결핵으로 그 국물을 넘기지는 못했지만, 금욕주의보다 복음이 우선임을 몸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자체 자신이 죽고 나서 율법주의파나 고행을 위주로 하는 어떤 파가 생길까봐 몹시 염려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그의 급성 결핵병이 어느 정도 치유가 되어 위험한 고비를 넘기게 되었다. 병이 좀 회복된 후 이때의 심경을 술회하면서 “내가 저지른 이 파계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모든 사람들이 듣게 된다면 그 동안 나의 금욕주의, 고행, 불살생 때문에 나를 존경하고 따르던 제자들이나 청년들 중에 크게 실망하여 소동이 일어나 격분하여 나를 위선자라 혹은 정신이 돌았다고 욕하고 혹은 나를 저버리고 떠날 것이고, 혹은 더 분하게 생각하는 이는 몽둥이로 나를 때리며 동광원에서 쫓아내기까지라도 할 것임을 각오하면서 고기를 먹은 것이라”고 말함으로 인간 이현필을 우상화하려던 당시 제자들의 움직임을 과감히 뿌리치고 오직 예수의 복음만이 남아야 함을 강조했다. 그렇게 예수를 닮으려고 애쓰던 이현필선생.





1963년에 광주로 내려와 최흥종목사의 주선으로 제중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물론 혼자 입원하기를 거부하여 결핵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제자 김준호와 함께 입원하게 되었다. 사실 병원에 간 것은 자신 때문이 아니라 김준호를 입원시키려는 생각이 더 많아서 그렇게 한 것이다. 후두결핵병이 걸린 것이다. 기침과 가래가 심하고 목이 아파서 말을 못했다. 한동안 병이 심해서 40일간이나 목으로 물도 삼키지 못했다. X-ray를 찍어보니 속립성 결핵인데 이 병은 결핵균이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지는 급성 전신결핵이었다. 결핵약이 나오기 전에는 속립성 결핵에 걸렸다 하면 모두 사망하고 마는 무서운 결핵이었다. 여성숙 의사를 비롯한 의료진들의 정성어린 치료로 회복이 빨라 열흘 후에는 겨우 목소리가 나오게 되었단다. 이리하여 3개월간 병원 음식도 비교적 들면서 치료를 받던 중 퇴원하겠다고 한다. 평소 약을 쓰지 않고, 고기나 생선도 먹지 않던 이선생이고 보면 3개월간 병원에 입원한 것도 길었다. 특히 치료에 효험이 되는 약을 주어도 먹지 않고 모았으며, 주사도 거절하여 여성숙 담당의사가 권유하였더니, ‘우리 한국의 결핵환자들이 이 약을 다 먹을 수 있게 되면 나도 먹겠습니다’고만 했다. 아직 병이 완치된 것이 아니었고 겨우 고비만 넘긴 상태인데 퇴원하고 말았다. 심지어 여의사가 주사기에 약을 담아서 왕진을 하여도 막무가내 거절하여 그냥 돌아왔단다.2) 김준호는 6개월간 입원하여 건강이 많이 회복될 수 있었다.





예상대로 선생의 파계(고기도 먹고 약도 쓰다)로 많은 제자들이 떠나갔고, 심지어 그를 위선자라고 평하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선생은 신촌에서 고기국물로 입 다신 것과 제중병원에서 한번 약을 쓴 일 외에는 다시 과거의 습관대로 고기도 약도 입에 대지 않았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 본격적으로 제중병원 전도를 시작하였다. 그후 계속 그는 독신생활을 강조했다. 경기도 벽제 계명산으로 임종하러 갈 때 행한 고별(유언) 설교도 끝까지 동정(童貞)을 지키는 순결주의만은 양보하지 않았다. 선생과 동광원의 순결주의는 참으로 엄격하고 철저하여 이들 나름대로 독특한 해석을 가지고 있다. “끝까지 동정을 지켜라. 깨끗이 살아라. 청빈 생활을 사랑하라. 음란은 죄다. 동정을 지키고 깨끗이 살아라”





1964년 정초 해마다 하는 대로 광주 방림에 있는 동광원에서 한 달 동안 연속하는 수양회를 인도할 때 건강상태가 극히 악화되었다. 한번 하는 강론시간이 적어도 두 세 시간씩 계속했는데도 시종 그냥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하였다. 강의가 끝나면 무릎이 굳어져 일어서지 못하며 제자들이 양쪽에서 겨드랑이를 끼어 부축해 세웠고, 거실까지는 업어다 모셨다. 누우면 또 다시 송장 같았다. 한 달간의 수양회를 그렇게 인도하고 나서 자신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 평소 마음에 둔 경기도 벽제 계명산 분원에서 지냈다. 도착한지 엿새만에 세상을 떠났다. 임종의 자리는 계명산 속, 동광원 분원에서 500미터나 더 산중으로 들어가 옛날 현동완 선생의 산장자리에서였다. 1964년 3월 16일 저녁, 선생은 혼수상태에서 영적인 대화를 하고 있던 것을 조정은 수녀가 들었다. “예, 예, 저는 죄인입니다…예…” 혼자의 독백이었다. 그리고 조금 후 “할렐루야, 할렐루야” 찬송을 불렀다. 그제서야 조정은 수녀는 따뜻한 물을 들고 방에 들어가서 ‘선생님 아까 새벽에 누가 왔습니까?’ 물으니 “주님께서 내일 새벽 3시에 오라고 하셨습니다.”





다음날 산장의 새벽은 너무도 고요했다. 병든 이선생은 아랫목에 누워있고 왼편에는 계명산 수녀 원장인 김한나 수녀, 오른편에는 일생 잠시도 선생 곁을 떠나 본 일이 없는 김준호, 방구석에 김희옥 수녀, 조정은 수녀가 앉아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두 수녀에게 정결을 지킬 것을 당부하며, 준비된 선생의 수의(壽衣)로 깨끗이 빨아둔 누더기 옷 바지저고리로 갈아 입혔으나 죽는 사람은 그런 옷이 필요 없다면서 도로 헌 옷을 입은 그대로 묻어 달라고 당부했다. 관(棺)도 쓰지 말고 자기는 죄인이니 거적대기에 싸서 내다 파묻으라고 유언을 남겼다. 무덤은 평토장(平土葬) 우로 하라면서 죄인의 시체니까 아무도 모르게 하고 아무나 함부로 밟고 다니게 하라고 했다.



최후의 순간이 가까워 오면서 이선생은 기도하기를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하고파 무척 애썼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고자 할 때마다 주님은 저를 피하셨습니다. 주님! 저는 지금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오 기쁘다! 기쁘다! 오 기뻐! 오메 못참겠네. 아이고 기뻐! 이 기쁨을 종로 네거리에라도 나가서 전하고 싶어. 제가 먼저 갑니다. 다음에들 오시오!” 하고 눈을 감았다.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얼굴은 하늘을 향하여 쳐다보면서 마지막 호흡을 내 쉬었다. 1964년 3월 17일 새벽 3시 정각이었다. 이리하여 만51세의 향년으로 별세하셨다. 이때 그의 외모는 80된 노인보다 더 연로해 보였다고 한다. 그의 무덤은 벽제 계명산에 있다.












입력시간 : 2009년02월03일12시47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