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홍치모 교수 - 종교개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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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 홍치모 교수 - 종교개혁사




- 학사 학위뿐이었던 신학자
- 거창고교 교사 출신
- 서부교회와 백 목사님 자녀들까지 안부 묻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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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사 연구를 개척한 낙산 홍치모 교수

[ 2012-02-27]



< 홍치모교수>
●종교개혁사 분야 개척한 국내 제1세대 연구가

●"역사의 주권자는 하나님"이라는 확고한 세계관

●역사 자료 찾아 세계 곳곳의 현장 누벼



"정 선생 별일 없지?" 지금도 귀가 아플 정도의 찌렁찌렁한 목소리로 전화하는 그의 음성만으로는 팔순노인의 음성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근래에는 몸이 약해져 기동하기에 어려움이 많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청춘인 홍교수이다.

이 땅에 <종교개혁사> 분야를 개척하다시피한 낙산(樂山) 홍치모 교수는 우리 시대에 보기 드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고향과 어린 시절



낙산은 1931년 12월 30일 평양에서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전기 기술자였다. 그의 출생 시기에 대한 기록은 여러 가지이다. 1931년 12월 30일생이지만 1932년 1월 5일로 출생 신고가 되었고, 월남하여 가호적을 할 때에 착오로 1934년 10월 15일로 신고되었는데 이것이 그의 법적 생년월일이 되었다. 이런 현상은 월남 동포들에게는 흔히 있던 일이었고, 민족 분단의 아픔이었다. 낙산은 후일에 은퇴시기가 되었을 때 자신의 실제 생일로 계산하여 은퇴하려는 것을 주변에서 호적대로 하자고 권하여 그렇게 하였다.

낙산은 평양 성남소학교를 거쳐 평양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때 교사 중에 황장엽 선생이 있었다. 낙산은 북한에 공산체제가 자리잡자 1947년 1월에 월남하였다. 그해 3월에 경기중학교에 편입학하여 피난지 부산에서 1952년에 졸업하였다.

이 기간에 낙산의 생애에 중요한 변화가 왔다. 낙산은 경기중학교 4학년이던(오늘의 고등학교 1학년) 1949년 7월, 부산의 고려신학교에 다니고 있던 둘째 누님인 홍우길의 요청으로 고려신학교 학우회가 주최한 하기학생수련회에 참석하였다(고신측 총회 기관지 「기독교보」 2012년 1월 21일자 제15면에 "원로와의 대화"에서 낙산은 자신의 회심 경위를 자세하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 박윤선 목사의 "신앙이란 무엇인가?"라는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으며 회심의 체험을 하였다. 그후 낙산은 1950년 1월에 도림동 장로교회에서 유병관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낙산은 60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날의 박윤선 목사의 설교 본문과 제목을 기억할 정도로 큰 은혜를 받았다. 그후 낙산은 박윤선 목사를 평생의 사부로 모셨다.

그는 또한 한국 전쟁의 격랑 속에서 서울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하였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역사 탐구의 길을 걷게 한 계기가 되었다.



수련과 탐구의 길



대학을 졸업한 낙산은 경남 거창고등학교 교사로 1년간 봉직한 후 숭실고등학교 교사로 있다가 군대에 입대했다. 제대후 숭의여자고등학교 교사로 6년간 근무하다가 부산의 고신대학교 전임강사가 되었다.

이때 낙산의 삶에 또 한번의 큰 변화가 왔다. 그는 마산 아동결핵병원의 의료선교사로 와 있던 패터슨 선교사를 만났다. 한국 이름을 "배 도선"이라고 하는 이 선교사는 영국 캠브리지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으로 Bible Training Institute in Glasgow에서 1년간 수학한 바 있다. 이 학교는 발전을 계속하여 Glasgow Bible College로 발전하였고 오늘날은 다른 성서대학과 병합하여 International Bible College로 그 모습을 보이고 있는 학교이다.

낙산은 1969년 40세 가까운 나이에 직장과 가족을 두고 배도선 선교사가 소개한 이 학교로 홀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무명의 독지가가 주는 장학금으로 공부하였는데 그 장학금을 준 사람이 누군지 지금까지도 모른다.

그는 학교 강의실의 공부보다도 각종 자료의 수집, 고적답사 등 현장 공부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것은 낙산의 학문적 영역의 한 면모를 보여준다. 그후에도 낙산은 역사 자료를 찾아 세계 곳곳을 누비는 "현장 탐구의 학문"을 하였다.

낙산은 박사학위가 없었다. 공식학위는 문학사(B.A.)밖에 없었는데 1996년 12월에 미국 Biola University에서 종교개혁사 연구의 공을 인정하여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이것을 보면 그에게서 학력(學歷)보다 학력(學力)의 소중함을 더욱 느끼게 된다.



총신과의 관계



2년간의 유학을 마친 낙산은 숭의여자전문대학의 역사학 교수로서 5년간 사역하였다. 그러나 숭의여전이 경영 위기를 겪고 재단이 부도를 내자 새로운 경영진이 학교를 운영하게 되고 이 와중에 그는 학교를 그만 두어야 했다.

숭의여전을 그만두기 1년 전부터 낙산은 총신대학의 역사 과목 강사로 강의하고 있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자연스럽게 "총신대의 전임교수"가 되는 길이 열렸다.

총신대학에 있으면서 낙산은 <영국사>에 대한 글을 집중적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16세기와 17세기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상황에 대한 글들은 새로운 영역을 한국에 소개하는 단초가 되었다.

자동차 없는 교수



낙산은 학교 생활에서 여러 가지 일화를 남겼다. 1980년 학내 사태가 악화되고 학생들의 데모가 격렬하였다. 학생들은 이사들의 차량을 전복시키기까지 하였는데 이것을 본 그는 "평생 자가용 승용차를 소유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지금까지 그것을 지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운전을 배우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급하면 가까이에 살고 있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모든 차가 자기 차가 될 정도로 그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동역자의 길



필자는 낙산이 총신대에 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필자의 남편이 고신 출신이고 SFC출신이기에 낙산과 "형님", "아우"하면서 50여 년을 보낸 사이이니 필자도 자연스럽게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필자가 총신에서 강사로 강의하고 있을 때 그도 강사로 강의하였다. 그후 낙산은 숭의여전의 경력을 인정받아서 바로 부교수가 되었고, 필자는 여자가 대학교수가 될 수 있느냐고 하여 임시전임, 전임대우를 거쳐 전임강사로부터 시작하였다. 교육부의 임용허가는 같은 날로 났지만 학교 안에서는 ??현실의 원리??가 엄격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는 2000년 은퇴할 때까지 학교의 여러 보직을 맡았다. 그런데도 그는 진실하고 어떻게 보면 "순진하다"고 할 정도로 정도를 걸으려고 노력했다. 일례를 들면, 총신이 대학에서 대학교로 체제가 바뀌고 김의환 목사가 총장으로 부임을 했을 때였다. 그때 부총장 후보로 낙산이 거론되었고 거의 확정적이었다. 당시에 부학장을 맡고 있던 모 교수가 한 학기 후에 은퇴를 하게 되는데 부총장으로 은퇴를 하면 평교수보다도 연금 등의 여러 가지 혜택을 받는다고 하여 부총장이 되고 낙산은 그 교수가 은퇴할 때까지 자리를 양보하고 한 학기를 기다렸다. 그 사이에 학교 안의 정치교수 그룹들이 합심하여 모씨를 부총장으로 옹립하자 낙산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기?? 신세가 되었다.

이런 상황을 겪으면서 낙산은 필자에게 "할 수 없지 뭐. 하고 싶은 사람이 잘 하라지"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는 서운하고 억울할 것 같지만 그는 그것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진실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생활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에 항상 직설적인 표현을 하는 사람이지만, 그는 또한 눈 앞에 보이는 것에 매달리지 않는 풍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그러한 면모를 잘 나타내 주는 것으로는 고신측 총회 기관지 「기독교보 」 2012년 1월 21일자 제15면의 다음과 같은 "원로와의 대화"를 참조하면 좋을 것 같다.

"교수님의 삶의 여정에 영향을 준 이념이라 할까 정신은 어떤 것인가요?" 라는 김흥식 역사연구원의 질문에 낙산은 이렇게 답변을 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거짓말하지 않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 아니겠어요?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 보이는 사람 앞에서 진실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할 수 있겠어요? 내 철학은 거짓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중요한 것은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 삶의 철학입니다"



폭넓은 활동 무대



그는 각종 활동에 열심이었다. 한국성서유니온의 이사와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각종 학회에도 활발하게 참석하였다. 그의 활동 가운데는 1985-1988년에 한국공연윤리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는데, 각종 영화들을 사전 검열하는 일을 하였다. 선정적이거나 폭력적 장면을 잘라내는 일을 하였는데 그때 그가 본 영화(개봉 전의 원본)는 헤일 수 없을 정도였다.



낙산의 기독교적 역사관



낙산은 종교개혁사 분야의 저서와 논문들로 이 분야를 개척한 국내 제1세대 연구가이다.

그의 기독교 역사관은 첫째, 주권자로서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전제하고 있다.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역사를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그의 학문적 자세였다. 둘째, 그는 기독교 역사가들이 인간의 양면성을 전제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경적 가치관에 따라서 인간의 활동을 규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낙산은 여러 권의 책을 출판했다. 1977년에 간행한 「종교개혁사」는 그의 처녀작이며 이 분야에 개척자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1983년의 「북구 르네상스와 종교개혁」도 이 분야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다. 이 책은 미시간대학교 역사학 교수인 알버트 하이마(Albert Hyma) 박사의 논리를 보완한 것이다. 1991년에 출간한 「스코트랜드 종교개혁과 영국혁명」 역시 같은 맥락에서 저술된 책이다. 1998년의 「영미장로교회사」는 장로교회의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연구서이다.

그는 여러 편의 논문과 서평을 「신학지남」에 발표하는 등 끊임없는 연구물을 발표했고 은퇴 후에도 지속적인 연구를 하고 있다.



은퇴 후의 모습



그가 2000년에 은퇴한 후 이미 10년이 흘렀다. 낙산은 총신 교수 말기부터 심장병으로 인해서 고통을 겪었다. 낙산이 전화를 하지 않거나 우리가 전화를 해도 받지 않으면 낙산의 가까이 살고 있는 신충훈 박사에게 전화하여 낙산의 건강이 어떤지 살펴보라고 부탁한다.

하나님이 부르실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은데 한가지 아쉬운 것은 그가 힘들게 한평생 수집한 자료들이 한곳에 모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총신대학교에 자료 확보를 말하였으나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었고, 자료의 일부는 새에덴교회로 가고 일부는 낙산이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에 기증하였다.

자료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영국과 미국의 고서점을 누비며 구한 자료들이 총신대학교 박물관이나 도서관에 보관되었다면 후학들을 위해서 얼마나 좋을 것인가?

낙산은 역사의 격랑 속에서 살아 왔다. 어린 나이에 월남하였고, SFC를 통해서 개혁주의 신앙으로 무장하였다. 그는 교회의 장로로서 중요한 영역에서 섬기며 한평생 책을 가까이 하면서 살았다. 남은 세월동안 하나님이 주시는 건강을 유지했으면 좋겠다. ◇




필자 정정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