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강판녕 - 공회 접촉 고신 장로님
서부교회 강상녕 장로님(현. 서정교회) 형님 되시며 고신의 유력 장로님으로 남영환 목사님과 인연으로 공회와 여러 면에서 관계가 있었던 분입니다. 참고 자료입니다. 고신적 인물인데 행간을 잘 읽어 보면 고신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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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기억
강판녕 원로장로
1. 자라난 고향
정든 내 고향은 맑은 시냇물 석양에는 고기가 뛰노는 아름다운고장, 그리고 넓은 들판 봄에는 진달래꽃 만발하고 들판에는 자운영 꽃이 장관을 이루고 벌, 나비들이 날아들어 토종꿀을 생산하고 사방에 산으로 둘러쌓여 대나무 밭이 많은 아늑한 그 곳은 내가 자란 고성군 영현면이다.
오남매중 외동아들로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자랐던 기억이 지금도 훤합니다. 소학교 5학년까지 내 고향에서 자라다가 다른 곳에 이주를 했는데 그 당시에는 2차대전 중이라 산에 있는 솔가지를 끈어다가 송탄류의 재료로 하고 아주까리를 심어 기름을 짜서 전장에 쓰기 위해 받치고 농사를 지었지만 벼농사는 공출로 받치고 우리는 거의 보리밥과 감자 고구마 대두박을 먹었습니다.
뽕나무를 심어 누예를 치고 밭에는 목화를 심어서 우리 동네는 가을이 되면 길쌈을 하는 것이 큰 소득원 이였다. 산에는 밤을 따기 위해 높은 대나무 장대로 때려서 떨어지는 것에 맞아서 머리를 맞아 혹이 나기도 하고 밤나무에서 알밤을 발로 비벼까서 내다 팔고 감나무가 있어서 가을이면 온 동네에 붉은 감으로 꽃이 핀 것 같은 내고향 마을이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2. 소년시절
내가 다닌 학교 교장은 일본 군인 출신으로 그 사택에 들어가 보면은 다다미를 깔아서 단정하게 사는 일본 사람의 특이한 냄새가 났습니다. 나는 독신으로서 유교 가정에서 엄하게 자랐습니다.
우리 고장을 떠나 진양군 사봉면에 이사를 했고 외가까지는 십리길로 자주 외가에 왕래를 하여 외사촌 들과는 아주 잘 지냈다. 그 동네에 살 때 일년동안 6학년 공부를 했는데 항상 우등을 했다.
3. 진주 사범학교(현 교육대학교)
내가 6학년때 1945 광복이 되었다. 공부를 잘 했는데 항상 우등을 했고 어려운 사범학교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병중에 계신 아버지께서 들으시고 기뻐하던 모습이 눈에 훤 합니다.
우리집이 5칸접집의 기와집으로써 아주 큰 집이었다 한길 언덕밑에 집이였는데 봄부터 가을까지 뱀들이 지붕위로 대들보로 부엌까지 드나들었다 그걸 보면은 그당시에 14살된 나는 그 뱀을 지게 막대기로 잡아서 불에 태웠던 용감한 소년이라할까 개구쟁이라 할까 심지어는 함안 진주간에 몇만볼트의 전압이 흐르는 전선에 대나무 장대에 철사 고리를 끼위 전류를 통해 깊은 시냇물에 넣어 전기로 고기를 잡았다. 만약에 내가 그물에 들어갔더라면 14살의 나이에 세상에서 없어졌을 사람입니다. 무척 위험한 짖을 하였는데 하나님의 보호로 살았다는 기억이 납니다 무척 장난꾸러기였습니다 오남매의 독신으로 귀여움을 독차지해서 이가 흔들거려도 아플까봐 뽑지를 못했다가 덧니가 나서 치과에가 뽑은 일들은 참 무서운 일이었다.
4. 구원의 좋은 소식
우리가 진양군에 살 때 큰 누님이 의령군에 출가를 했는데 의령 칠곡이라는 곳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교회를 나가시는데 그 누님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많은 핍박으로 성경책이 몇 번 불속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큰 누님이 친정에 오실때마다 어머니 하나님 믿고 축복받고 천국 가셔야 된다고 간곡히 성경 말씀을 전하였다 그 후 시부모님들도 너무 착하고 잘하는 며느리를 인정하시어 결국에는 교회에 나가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고 온 가족이 교회에 출석하여 많은 전도를 했습니다. 또 우리 외갓집이 십리나 되었는데 그 먼길을 그 당시에 칠십정도 되신것 같은 외종조모님이 그 동네교회에 출석하시게 되어 점심때마다 찾아오셔서 우리 어머님께 강서방네 교회에 나가라고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 믿고 축복받으라 하시는 누님과 외종조모님의 권유로 교회에 출석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 나는 교회에 나가지는 않았고 기차로 통학을 했다 진주사범시절 홍순대라는 친구가 항상 전도 하기를 교회에 나가야지 희망이 있고 성공 한다는 친구의 권유에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라고 하였다 그러고 진주 중앙성결교회에서 이성봉 목사님의 부흥회에 어머니 따라 참석하여 주님을 영접하는 축복을 받았다 진주 사범학교 재학중에는 기독교 학생회를 조직하여 전도에 힘썼다.
5. 6ㆍ25전쟁
사범학교 5학년때 6.25전쟁이나 외갓집으로 피난을 할때 인민군을 불시에 만났는데 외삼촌께서 내 조카인데 신앙이 좋은 기독교인이라고 소개 했다. 그 사람이 정확히 들었더라면 잡혀가서 어떻게 되었을까?
전쟁당시에 학교가 불타고 공부할 장소가 없어 진주성 촉석루와 서장대에서 공부를 했다. 때론 진주 여고를 빌려 공부를 했는데 한꺼번에 좁은 입구를 나오면서 많은 학생이 넘어져 한 여학생이 기절을 했다 지금도 그 여학생을 만나면 어떻게 살아났나 지금은 기절을 하지 않느냐는 장난을 치기도 했다.
6. 교원과 군생활
진주 사범을 졸업하고 진양군 진성면에 배치를 받았다 이병근과 정양순과 나 세 사람이 부임했는데 이병근은 고향이 학교 앞이고 나는 그곳에서 몇 십리 떨어져 있어 교장선성님 사택에서 선배 정지용선생과 자취를 했다 그래서 얼마동안 4학년 담임을 맏았다 교사 생활을 하던중 갑자기 군 입대 영장을 받아 나는 국비로 공부를 했지만 징집 1기까지는 입대 영장을 받게 돼 어머님의 애태운 모습을 보면서 잘다녀 오겠다고 떠나 제주도로 갔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가는 도중 너무나 멀미를 많이 해서 의식을 잃을 정도였다 제주도에 내려 보니 제주도의 땅은 검고 도로는 흙먼지로 차가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지금은 포장이 잘 되어 있는데 그때만 해도 그 어촌마을이 외진 곳이였다 훈련소에 들어가서 그날부터 훈련을 받는동안 진주 사범을 나왔기에 행도(반장) 직책을 받아 일 했다. 훈련소는 밥 한그릇을 받으면 둘이서 나눠먹었기 때문에 배골은 시절이였다. 나는 행도라서 밥이 한그릇 나왔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너무나 힘겨워 했다 사람의 얼굴이 아닐 정도였다. 주일이면 제일 기쁜 날인데 나는 단체로 모슬포 교회에 걸어서 출석을 했다 그날이 제일 좋은 날이였다. 모슬포 교회에는 한번도 빠지지를 않았다 장교 후보생 시험에 합격하여 그후 보병학교에 입교 해 훈련을 받았는데 훈련이 엄하고 힘들었다 다시 포병학교 시험에 합격을 했다 하나님께서 내게 항상 좋은 기회를 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토요일에는 어머님이 진주에서 오실때 너무 멀미를 많이 하셔서 차를 타시기가 힘들어 하십니다. 광주까지는 그때는 한 열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오셔서 민가를 빌려 밥을하고 고기를 구워 놓고 기다리시는 어머님이 너무 좋았다. 지금도 어머님 생각이 많이 납니다 훈련을 다 마치고 육군 소위가 되어서 집에 왔을때 친구들은 교사가 되어 있었다 내가 배치받은 진성국민학교에는 십년후배 김기재 전부산시장이 교편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때 학생인 최창기가 동래 구청장이다 내가 한해만 늦게 태어났더라면 군입대 하지 않고 교편생활을 했을 것이나 후회하지 않는다. 징집 1기로서 한창 정쟁중 장교훈련을 받고나니 휴전이 됐다 전방 6사단 포병대대에 배치 돼고보니 무서운 대대장이였으며 부대대장은 순한 분이였다.
누구도 대대장 앞에서는 벌벌벌 떨었다 그때 나는 보급관의 직책을 받아 사병이 몇 명이 있었다 나는 차가 있어 화천시내에 많은 부흥회에도 참석했다. 목사 사택에서 자기도 하면서 주님을 섬기며 교회에 봉사하여 총각 집사가 됐다 박태선계통이 사방 다니면서 부흥회를 했는데 참석을 하지 않았다 우스운 이야기로는 성격이 활달한 유치원 담임선생이 있었는데 은근히 저를 마음에 두고 결혼할 생각이 있었다고 담임 목사가 그러했다 강집사를 너무 마음에 두고 있으니 어떻게 생각하는냐고 묻기에 저는 전혀 생각이 없다고 했다 하루는 저녁에 부대대장 부인이 교회 집사였는데 함께 화천읍내에 같이 가지고 해 명령에 따라 갔다. 부대장 운전을 하고 가다 언덕을 들이받아 사고가 나서 죽을뻔했다. 그후 나는 치료를받았으며 군대에 있을때 집사가 되고 교회를 잘 섬겼다고 생각이 든다 그때 전도열이 얼마나 많았던지 육군대위로 포병마크보다 십자뺏지를 달고 다녔다. 제대후 강판녕이는 군목이다라는 소문이 났다.
7. 제대후 취직
이제 취직을 해야 되는데 교사 복직은 제일 쉬운 길이였는데 나는 교육 행정으로 갔으면 했다 그래서 장도영 육군본부참모총장실로 찾아가서 경상남도 도청에서 근무하고 싶으니 도지사에게 추천 해 줄것을 건의 했다. 신상의뢰서를 공문으로 작성하여 주기에 김규진 경상남도 도지사를 방문하여 그분께 편지를 전달하고 그후에 경상남도 문교사회국 문정과에 교사로 배치받았다 하지만 교사는 출근부 맨 끝이라 출근부 도장을 찍을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에 군경력을 합치면 주사급에 해당되기 때문에 지사에 건의 해 주사겸교사로 발령 받았으며 이 직급은 대한민국에 처음이며 서열이 크게 올랐다.
8. 5.16혁명
문정과 근무시 5.16혁명이 나서 도청을 앞문에서부터 불량배들이 처들어오는데 야단이 났다 나는 경남 도청의 뒷 담장을 훌쩍 뛰어 넘었으나 김성태 장학관님(당시 초량교회 장로)이 담장을 못 뛰어넘어 당황하시고 겨우 피신을 했다 그때 피신을 안했다면 큰일날뻔했던 기억이 난다. 5.16이 진정이 되고 질서가 회복이 되어 근무를 했다 육군준장이 도지사가 되어 부임하고 잠시후 전출하고 양찬우 육군사단장 하시던 얼굴이 잘생긴분이 도지사로 부임하셨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호랑이처럼 보였지만 덕장이였다. 어느 초등학교에 도지사가 순시한다는 통보에도 숙직 교사가 파자마 바람으로 나왔다가 혼이 났다.경상남도 전체가 벌벌떨었다 내무장관으로 가면서 인간 몰못드란 책을 출판하고 특별히 착실한 기독교인 강판영이라고 기록해 주어서 늘 잊지 않고 있습니다.
9. 결혼
나는 어머니께서 선보시고 정해주신 처녀와 결혼하였으며 보수동에 살면서 도지사 비서실에 근무 했다. 그 당시 아내가 점심때가 되면 따뜻한 도시락을 아이를 업고 찾아와 전달했다. 남편을 너무 잘 섬긴다고 좋은 소문이 널리 났다. 나는 대신동에 방을 얻어 살고 있는데 연락이 왔다 보수동 성결교회 담임이신 한인업목사님이 사택에 같이 살자고 하셔 그곳에서 부엌도 없는 방한칸 시절이지만 그때가 행복했고 지금도 너무나 생각나고 그리워 집니다.
목사님이 병이 나서 내가 업고가서 병원치료를 받았다. 돌아가신 한 목사님이 늘 생각 납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공무원으로 대학 진학을 했지만 진주에 계시는 어머님생활비도 보내드리고 생활도 해야하기에 항상 쪼달려 아내는 결혼반지까지 팔아 학비를 댔다. 대학을 졸업후 호봉이 크게 올라갔다. 그때는 대학 출신이 많지가 않았다. 지정과 중기계장으로 발령받아 계장이 됐다 과장이 동기생이였는데 친구지만 잘 섬겼다. 지방 행정 참사로 승진 하였고 감사 계장으로 또 승진하여 감사 실장의 보직을 받아 잘못된 일을 바로 잡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했으며 재미있는 일로는 거재군 감사시 외식을 금하니까 준비한 소고기는 못팔아도 지금까지 보지 못한 좋은 감사였다는 후문이 났다함. 행정 참사는 사무관급이다. 행정 고등정형 시험을 처서 보름동안 교회 기도실에서 공부를 했다. 마지막 면접때 김상조 서울대 교수가 시험점수가 형편없다고 하기에 낙심이 돼서 나오는데 하늘이 노랬다 헌데 후에 알고 보니 담력시험을 본 것이였다. 내무부 친구 성해기(전부산부지사)로부터 합격의 소식을 들었다. 교회에서 기도드리면서 공부를 하니 하나님께서 머리를 맑게 해주셔서 합격한 일에 대하여 감사드렸습니다.
행정고등정형 합격하고 어깨가 으슥해졌다. 그 후 시장군수 인사가 있어 양산군수로 반령 받았다. 군수는 모든 공무원이 원하는 직책이였는데 하나님 은혜에 감사드리며 부임을 하게됐다.
[출처] 행복한기억1|작성자 강성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