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고신 50년의 여정을 돌아보며 - 고신 50년을 말한다 (11) [고신]
분류: 교단- 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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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하면서
기독교보의 편집자는 고신50주년을 기념하는 특집을 마무리하면서 멀리 떠나 있는 필자에게
도 한마디 해 달라는 부탁을 해 왔다. 신통한 생각이 없으나 그래도 역사를 공부한답시고
20년을 살아왔으니 고신의 역대지략에 부견(膚見)을 더해 보고자 한다. 비록 고념(高念)은
되지 못하나 지난 역정(歷程)을 반추해 보는 것은 고신의 울타리 속에서 살아온 역사학도
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어떤 나라나 조직의 역사도 역사의 큰 강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없다
는 전제에 근거하여 역사를 보는 나의 관점을 ‘통합사적 접근’(integrative approach to
history)이라고 말해왔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역사를 서양교회의 눈으로 읽고, 서양교회의
역사를 한국교회의 눈으로 해독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굳이 말한다면 하바드의
사학자였던 프레처(J. F. Fletcher, 1934-84)의 생각과 동일하다. 고대 로마인들이 즐겨 말
했던 격언으로 말한다면, 안디옥의 강은 로마의 강 티버로 흘러가게 마련이니(Syrus in
Tiberim defluxit Orontes) 역사의 지류는 합류를 이루고, 합류는 다시 지류를 만든다. 따
라서 고신 50년의 역사를 더 넓은 강줄기를 따라 걸어가면 희미하게나마 앞길이 보인다.
‘고신’이라는 이름의 교회공동체가 기존의 교회와는 다른 별도의 조직, 흔히 말하는 교단
을 설립한지 50주년이 되는 지금은 교회(단)의 행방을 결정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에 와 있
고, 오늘의 현실은 이것을 요청하고 있다. 복음병원을 둘러싼 그 지리한 대결은 이사회 내
의 정파간의 대립과 유관하고, 그 덧없는 싸움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어 교회가 세상 앞에
서 조롱당하고 있다. 정말 우리 교회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할 것인가를 결단해야한다. 오
늘 우리가 ‘선한 싸움’의 목표를 상실했다는 점에는 의의가 없을 것이다. 이런 현실을 감
안한다면 오늘 우리는 50주년을 경축하기에는 부끄럽고, 그냥 지나가기에는 미안한 지경이
되었다.
1. 본래 교회는 이 땅에서는 나그네공동체였다.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대로 이 세상에서 유리하며(11:37),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11:16)
순례공동체였다. 소유나 재물에 대한 무관심은 영적인 자유와 함께 교회의 본질적인 기능
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자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4세기를 거쳐 가면서 안주공동체로 변
모, 변질되면서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고 애굽의 보화에 탐닉하기 시작했다. 국가권력과의
야합은 기존의 가치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 일례가 평화주의 이상의 상실, 그리고 소유
에의 탐닉 등이다. 결국 4세기를 거쳐 가면서 교회관의 변질을 초래했다. 에밀 부른너는 에
클레시아가 키르헤(Kirche)로 화하면서 교회가 변질되었다고 해석했다. 오늘 우리 고신교회
에 가장 시급한 것은 다시 순례공동체로서의 교회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순례공동체의 특징
은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충실한 교회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재물의 소유나 축적과
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나는 이미 다른 논설에서 교회는 가난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는
데, 이것은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며, 영적 자유를 누리기 위한 것이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부요 때문이다. 복음병원 문제는 오늘 우리 앞에 주어진 중요
한 과제가 되었다. 복음병원은 자선기관으로 출발했으나 외형적 확장과 함께 수익기관으로
변화되었고, 지난 1970년대 이래 30년간 복음병원은 고신교회의 분란의 진원지였다. 우리
가 분명히 확인해야 할 사항은 복음 병원의 설립정신은 가난한 자를 위한 ‘자비의 집’이
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수익기관이 되어 천안 신대원 건축 등을 포함한 교단의 재산증식에
기여했다. 이런 점 때문에 교회의 병원경영이 가져올 수 있는 문제점을 헤아릴 수 없게 만
들었고, 더 나아가서 교회 어르신들의 정쟁(政爭)의 원인이 되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복음 병원을 장기려박사의 생
각대로 명실상부한 자선병원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고신은 엄청
난 영적 유익과 ‘복음병원’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
다면 복음병원을 교회가 아닌 병원경영의 사명과 소명을 지닌 개인이나 단체가 경영토록 하
는 것이 교회의 거룩과 권위를 확보하는 일일 것이다. 이 두 가지 대안이 현실성이 없다고
여길지 모르나 병원이 현재의 체제로 유지되는 한 문제의 소재는 항상 남아 있게 된다.
2. 흔히 교회의 변질은 4세기 이후로 생각하지만 윌리엄 커닝햄(W. Cunningham)은 이런 변
질은 이미 2세기에 시작되었다고 지적하면서 그 뚜렷한 증거가 성직계급(prelacy)의 출현이
라고 지적했다.
하나님 나라의 법은 ‘섬기는 자가 가장 큰 자’(눅22:26)이지만 인간적인 다스림, 곧 교권
체제, 그리고 성직자의 계급구조는 교회를 급격히 변질시켜 인간 중심의 권력구조로 개편했
다. 그 정점이 교황직이라는 점은 다 아는 일이다. 그런데 한국의 장로교회에도 이런 형식
의 교권이 심화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중세교회의 구습이 역사의 창
고 속에나 있음직한 과거지사가 아니라 오늘의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개 교회의 자율과 독
립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연합을 중시하기에 장로교회는 노회와 총회를 두고 있으나, 이
치리회가 영적 보살핌(overseer)의 범위를 넘어가고 있다. 어떤 교단은 이 폐해를 줄이기
위해 제비뽑기를 권장하기도 하고 노회장이나 총회장이니 하는 장(長)을 의장(議長)으로 개
칭하여 대의적 중재기능으로 제한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고신교회에도 교권이 심화되고 있다. 연원적으로 말하면 고신은 교권의 최대의 희생
자였으나 이제는 그 교권을 탐닉하고 있다. 선거공영제를 도입하고 출마자들이 지역을 순회
하며 정견발표를 하는 일이 발전된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근원적으로 말해서 그 장
(長)이란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문제시하지 않고 있다. 그것이 순례공동체
의 행로인가? 그 장(長)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고, 아니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될
때 고신의 존재의의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담임목사라는 말보다는 당회장이 선호되고, 노
·총회장 선출이 우리의 관심이 되는 한 교회의 본질적인 영역에 대한 관심은 희박해 질
수 밖에 없다.
3. 이와 관련하여 고신교회가 50주년을 기념하면서 넘어야 할 과제는 믿음으로 하지 않는
정치운동으로부터 자유 하는 일이다.
사회나 조직에 대한 개인의 의무에 대한 문제는 고대 헬라인들 사이에서부터 부단히 제기되
어 온 질문이었다. 인간은 본래 정치적인 동물이라는 점은 플라톤의 공화국에서 정의된 고
전적인 표현이다. 교회라는 조직체에도 개인의 의무를 묻게 되고, 이를 수행함에 있어서 인
간관계나 친,소관계에 따라 상이한 의견 집단이 있을 수 있다. 정치란 원래 구성원 공동의
선을 추구하고 공정한 분배를 위해 필요한 다스림이다. 그런데, 못된 정치는 공동의 선을
추구하지 않고 자파나 해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분배되어야 할 권력을 독점하려고 한
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장(長)자리를 독점하고, 자파의 이익을 추구한다. 이런 경향이 심화
되면, 의(義)나 인(仁)이나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영광 같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적 가치
마저도 헌신짝처럼 버리게 된다.
우리 고신의 현장에서도 이런 정치행위, 파벌, 정파가 없었다고 누가 부인할 것인가? 선거
철이 되고 총회가 되면 긴장이 감돌고, 이기느냐 지느냐하는 혹독한 격전지로 변한다. 이
런 정치행위는 건실한 연합을 파괴하고 내적인 균열을 가져온다. 수구파도 개혁파도 그것
이 정치운동이 아니라면 정치적인 행위라는 오해를 받지 않도록 처신해야 한다. 설사 그런
곡해의 소지가 있다는 점만으로도 자중하는 것은 신자가 가질 수 있는 덕목에 속한다. 정치
집단은 해 집단의 독점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 외에도 자파의 주장만이 옳다는 일방성, 수
(數)와 세(勢)에 의존하는 특징이 있어 이를 쉽게 판별할 수 있다. 교단 정치로부터 자유하
는 목사나 장로가 많을수록 교회에는 희망이 있다.
4. ‘믿음의 선한 싸움’은 바울의 신앙적 삶의 현존(dasein)이었다.
우리의 선조들이 일제하에서는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싸웠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
다. 우리의 역사를 알 것 같지 않는 정몽준 의원도 명예학위를 수여받는 자리에서 “신사참
배에 항거하고…”라고 인사했다고 한다. 하기야 구청장이 와도 신사참배를 말하고, 신사
(紳士)와 신사(神社)를 구별 못해도 신사참배를 말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그 선조들의 의를
언제까지 향유하고 있을 것인가? 우리에게는 그 시대 시대마다 싸워야 할 영적 싸움의 대상
이 있다. 우리는 1950년대 이후 무엇을 위해 싸워왔던가? 교회의 거룩과 순결을 위해 우리
가 무엇을 기꺼이 포기했던가? 고신이 별도의 치리회를 구성한 이후 교회재산 확보를 위한
싸움, 경남노회와 부산 노회를 축으로 한 송상석, 한상동과 그 주변의 대결, 소위 반고소
의 분리와 재연합, 복음병원을 둘러싼 대립, 이사회의 갈등, 그것이 믿음의 선한 싸움이었
던가? 우리의 역사 속에 점철된 니사아활(泥死我活)의 대립을 회개하는 일은 다시 한번 회
개운동을 전개하고, 50주년을 기념하여 제2의 쇄신운동을 전개하는 일일 것이다. 이것은 설
립 50주년을 기념하는 그 어떤 행사보다 신령한 유익이 있을 것이다.
5. 교회 역사라는 더 넓은 역사의 강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보게 된
다.
그것은 교회는 하나님의 사람을 키워야한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중세수도원이 유효한 의미
를 주는 것은 사람을 키웠고, 그들이 그 시대의 신학과 교회를 주도했다는 점이다. 제네바
아카데미를 통한 칼빈의 인재양성의 의지는 교회 옆에 학교를 세우는 장로교 전통을 세웠
고, 이 전통위에 섰던 스코틀랜드가 유럽의 다른 나라보다 빨리 개화되는 동기기 됐다.
1953년 김재준은 자유주의사상으로 총회에서 축출되었으나 그의 제자들이 다음 세대 한국교
회 신학을 주도했던 것은 사람을 키우려는 그의 의지의 결과였다. 그 반대의 경우로 흔히
박형룡의 이름이 회자되고 있다. 오늘 우리는 사람을 키워야 한다. 건물을 세우기보다 우선
하는 것은 기독교적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다. 단군상 건립 반대 데모는 우리에게는 유효한
대처일 수 있으나 절대다수의 비신자들에게 이성적으로 호소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오늘 우
리 시대에 제기되는 갖가지 질문 앞에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기독교적 인재양성이야 말
로 고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데 유익할 것이다. 예
컨대, 고신이 50주년을 기념하면서 100명의 젊은이들이 최종학위를 얻을 수 있도록 장학지
원을 결의한다면 한국교회 정도가 아니라 온나라가 깜짝 놀랄 것이다. 바른 지도자를 키워
야 교회가 산다. 고신의 앞으로의 과제는 영력과 지력과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고자 하는 인
재를 양성하는 일이다.
■ 맺으면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자기 자신들을 과객(過客), 곧 나그네라고 불렀다. 그래서
교회는 ‘그 도성에서 여행하는 교회’였다. 물론 이런 전통은 아브라함의 생애 여정에서
시작하여 이스라엘백성들의 유랑의 역사와 이를 해석한 히브리서의 기록 속(히11:13-16)에
이미 현시되어 있지만, 그것이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삶의 양식이었다. 저들에게는
이 땅에 대한 미련이나 이 땅에서의 영화나 이 땅에서의 부나 권력에는 낯설었다. 오직 천
국에의 소망 때문에 이 땅의 것들에 연연치 않을 수 있었다. 총회에서나 이사회나 복음병원
에서 주도권을 잡은들 그것이 무엇이 유익하며, 잃는다고 무슨 미련이 있을까? “내 마음
은 저 하늘의 구름같이 유유하다”던 중국 시인만큼이라도 우리 마음을 비울 수 있으면 고
신의 교회에는 그나마도 평화가 깃들 것 같다. 우리 고신이 이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 상 규 교수
·고신대학교
·현 메쿼리대학교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