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한국사회와 고신 50년 - 백종국 교수 - 고신 50년을 말한다 (2) [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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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한국사회와 고신 50년 - 백종국 교수 - 고신 50년을 말한다 (2) [고신]


분류: 교단- 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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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설립 50주년 기획특집 /



우리 교단이 어느덧 희년을 맞이하였다. 희년이란 과거의 모든 굴레로부터 해방되고 새로
운 역사를 꿈꾸는 기회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보’가 이번 50주년 특집에서 지적한 바처
럼 우리는 이 기회를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이라는 고신정신을 오늘에 적합하게 되
살리고 인간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과거의 잘못된 굴레로부터 해방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고신이야 말로 분단과 독재의 역사에서 벗어나 민
주와 통일의 역사로 접어들고 있는 우리 민족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극복하고 신앙의 순결을 지킨 출옥성도의 전통은 한국 사회의 입장
에서 볼 때 갈수록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 되어가고 있다. 특히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
한 결과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절실히 깨닫게 되는 요즈음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분단의 논리에 휘말려 무엇이 옳고 그름을 덮어둔 채로 오직 목전의 이익에만 날뛰었던 우
리의 과거 때문에 얼마나 많은 혼란과 고통이 발생하였던가? 작금에 우리 모두가 개탄스러
움을 금치 못하는 부패와 부정의 역사적 근원 중 하나는 교권이나 정권에 의해 정의가 왜곡
되었던 바로 이 역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생활의 순결 또한 우리 사회가 목말라하는 고귀한 요소이다. 한국 사회의 큰 장점 중 하나
는 실용주의이지만 이 경향이 지나치다 못해 극도의 기회주의로 화하면서 사회를 받쳐줄 뼈
대가 상실 되어있는 상황이다. 한국 사회의 지성인 중 혹자는 불의와 결코 타협하지 않았
던 선비 정신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고신의 정신은 실로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강함과 실천력을 지니고 있다. 고신은 젊은 크리스천을 훈련하기에 너무도 적절한
토양을 가지고 있다. 필자도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고신 정신에 충실한 목회자였던 큰 형님
의 지도 아래서 이러한 경험을 적지 아니 겪은 바 있다.

주일날 치는 시험은 무엇이든 포기했던 일은 그저 하나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지만, 유신
시절 교련시간 임에도 불구하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했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
다. 교회의 중직자였던 교감 선생님의 중재로 기수단으로 차출되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피
해갔던 일은 극히 개인적인 은총으로 보여진다. 비록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옳지
않다고 여겨지면 고난을 무릅쓰고라도 생활의 순결을 지킨다는 태도는 지금 이 사회가 너무
도 그리워하는 덕목임에 틀림없다.

회개를 촉구하는 출옥성도들을 축출한 1952년 4월의 대한예수교장로회의 폭거는 그 자체가
바로 한국 사회의 왜곡된 맥락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일제 하에 민족 정신 보존과
국권 회복을 위해 투쟁하였던 독립운동 세력들의 존재는 분단 통치의 편의를 앞세운 미국
에 의해 대폭적으로 무시되었다. 사태를 빨리 파악한 이승만 박사는 분단의 현실을 인정하
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추구하였으나 이 때문에 그는 척결해야할 친일세력에 더욱 의
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추세는 정치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 군사, 그리고 종교 분야에 이르기까
지 광범위한 경향으로 자리를 잡았다. 예컨대 경남노회의 대표적인 친일부역자인 김길창 씨
의 안위는 김길창 씨 개인의 안위가 아니라 그와 유사한 행위를 했던 이 지역의 경찰, 군,
관료, 기업인 등 친일부역자들 모두의 관심사였다. 이러한 점이 왜 그토록 부도덕한 인물
이 막강한 교권을 누릴 수 있었는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의 원인을 언제나 남의 탓으로 돌리는 태도는 건전하지 못하다. 확
실히 당시 고신의 주요 지도자들 특히 한상동 목사의 사회 인식은 당시의 미묘한 정세를 돌
파하기에는 지나치게 협소하고 취약한 편이었다. 사실상 당시의 역사를 재구성해보면 고려
신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출옥성도들에게도 역사를 바로잡을 만한 몇 번의 기회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고신을 서울로 옮기자는 박형룡 박사의 간절한 제안이 있을 때이다. 확실히 대세는
서울 중심이었다. 비록 경남노회가 고신의 텃밭이었다 해도 그 때 이 지역적 한계를 과감
히 떨치고 일어났어야 했다. 놀랍게도 우리는 그 후 50여 년이 지나서야 한국 사회가 지방
화를 강조할 때 도리어 중앙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둘째는 1950년 9·28 수복 직전 피난지인 부산에서 회개운동이 일어났을 때였다. 한국교회
대부분은 한국 전쟁을 한국교회의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채찍으로 인식하였고 수 백 명의
교회지도자들이 박윤선 교장의 인도 하에 지난날 배교의 죄를 자복하는 기회를 가졌다. 만
일 고신측 지도자들이 이들의 회개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서울 수복의 기회를 활용하여 진리
수호와 생활의 순결을 전 교회의 목표로 승화시켰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하는 아쉬움이 남
는다.

그 때 이 후 한국 사회에서 친일파가 득세하고 독립군의 자손들이 영락을 면치 못하는 세월
이 진행되는 것과 유사하게 출옥성도가 중심이 된 고신파도 한국교회의 소수로서 자신의 앞
가림하기에도 변변치 못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친일파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인한 상
처 때문에 자연히 신앙생활에서 수세적이고 배타적인 경향을 띄고 있었다.

특히 허순길 교수가 지적하는 바대로 교회 소송문제를 둘러싼 의견의 대립, 주일성수 견해
의 차이 문제로 인한 학교의 시련, 합동과 환원을 둘러싼 방향의 실종, 편법으로 인가 받
은 학교법인 사건, ‘법적 이사장’ 문제로 겪은 대립과 분열 등으로 외부로 발전할 역동성
을 적지 아니 손상받고 있었다. 70년대와 80년대에 여타 교단이 활발한 선교 활동과 사회
활동으로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동안에도 고신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에 골몰
하고 있었다.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목사를 배출하고 교회와 사회 봉사기관들을 운영하고 학생신앙운동
을 지속하였다는 점 외에 고신이 사회에 특별히 기여한 부분은 거의 없었다고 보아도 과언
이 아니다. 한국 사회가 군사독재로 신음하고 있을 때에도, 수많은 인권유린이 발생했을 때
에도, 천민 자본주의적 체제로 급속히 타락해가고 있을 때에도 고신교회들 다수는 별 관심
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일제 치하에서 부역하였던 자들이 만든 교단들이 마치 속죄라도
하는 양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 적극 참여하여 많은 희생을 치르고 있었다. 이제 고신 교단
은 이들에 대해 정통성을 운위할 자격을 거의 상실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사회인들이 고신에 대해 가지는 인상은 고신측 교회들이 사회 내에서 야기하였
던 교리적 문제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사례가 국기배례 문제
와 단군상 문제이다. 국기배례 문제는 1970년 초에 겪었던 필자의 사건 뿐 만이 아니다. 학
생신앙운동의 사료를 보면 이미 1940년대부터 고신측 교회의 학생들이 국기배례 문제로 학
교에서 정학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고신은 1985년에 서울시가 단군성전을 건립하겠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반대에 나선 교단
중 하나였다. 최근 홍익문화운동연합의 묘한 포교활동에 대한 대응에서도 우리 교단의 미숙
함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이만열 교수가 지적하는 바처럼 단군상 문제는 매우 조심해서 다루
지 않으면 안 된다. 단적으로 말해 단군상의 목을 자르는 일은 고신의 정신에 어긋난다. 민
족적 대의와 충돌한다는 인상을 주어서도 안 된다. 도리어 단군상 설치 반대운동이라는 계
기를 진리가 어떤 것인지를 한국 사회에 알리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적극적인 행동이 요
청된다.

국기와 단군에 대한 고신교회의 행동들은 일반 사회인들의 눈에 매우 교조적으로 보일 법하
다. 물론 한국교회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입으로는 고신파를 독선적이라고 비판하지만
심정적으로는 고신의 정통성과 순결함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역사
에 무심한 일반 시민들로서는 주로 국가 사회의 통합적 상징들에 대한 고신측의 과도한 반
응을 이해하기가 힘들 것이며, 이러한 인상들이 고신의 전도에 상당한 정도 영향을 미치리
라고 추측된다. 고신이 보다 합당한 방식으로 단군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면 이러한 양상은
앞으로도 계속되리라고 본다.

1982년 3월에 발생했던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예기치 않던 에피소드였다. 이 방화사건
에는 5명의 고신대생이 연루되었고, 그 중 문부식은 특히 주모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
건은 한국사회 전체로 볼 때 민주, 반외세, 통일을 부르짖는 학생운동의 맥락에서 발생하였
으나 가장 보수적인 기풍으로 알려진 고신대생들이 연루되었다는 점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
다. 허순길 교수의 표현에 따르자면 지난 40여 년 간 개혁주의 교회 건설운동을 해 오던 고
신교회가 당시 운동권이 지향하는 좌경운동에 가장 깊게 가담한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일반 사회인들에게보다는 고신교회 자체에 더 커다란 충격이었다.

고신이 한국사회에 가장 크게 기여한 바는 아마도 좋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는 점일 것이
다. 예컨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과 남북나눔운동을 이끌고 있는 손봉호 교수와 이만열 교수
등은 1980년대 후반부터 고신의 정신인 ‘진리의 실천’과 ‘생활의 순결’을 한국 사회에
서 일반화하는 일에 크게 공헌하고 있는 고신 출신 지도자들이다. 많은 신학자들은 생활의
순결에 교리적 부문뿐만 아니라 검소와 절제, 나눔과 같은 실천 부문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애와 공평과 정직은 하나님 나라의 주요한 특징이다. 과거에 많은 고신 지도자들은 이 점
에 있어서 소극적이었으며, 도리어 기독교윤리의 강조가 ‘오직 믿음으로’를 손상시킬지
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선각자들의 노력으로 지금은 기독교윤리
실천운동과 남북나눔운동, 희년선교회 등 여러 기독교사회단체들에 다수의 고신교회들이 적
극 참여하고 있으며, 이 단체들은 민주화와 남북통일, 구제와 사회 선교 등 여러 분야에 좋
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실상 고신교단이 배출한 인물들이 주도하고 있는 이 운동들은 한국 사회에서 매우 중요
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 사회가 극좌와 극우의 극한적 대립으로 인해 혁명적 상
황으로 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부패한 본성에 대한 인식을 바탕
으로 한 점진적 개혁의 길을 열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은 혁명이나 쿠데타보다 훨씬 어렵
고 더 많은 희생이 꾸준히 요구된다. 진리의 수호를 위해서는 어떤 희생이라도 기꺼이 무릅
쓴다는 고신정신으로 무장이 되어있는 이러한 지도자들을 하나님께서 고신교회를 통해 보내
주셨다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큰 위로이다.

이 글의 목적은 고신의 과거를 조망하는 것이지만 사회 참여적 관점에서 고신의 미래에 대
해 약간의 조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고신의 희년은 한국 사회에 아름다운 기회가 될 수
있다. 기념 교회를 개척하고 기념 건물을 짓는 일과 아울러 한국 사회가 가장 간절히 목말
라하는 것을 제공하여 우리의 희년을 주님 앞에 산 제사로 드릴 수 있다. 그리하여 고신교
단이 다음 희년을 맞았을 때 우리 자손들이 지난 2002년에 고신이 희년을 맞이하므로 우리
사회에 이만큼 인애와 공평과 정직이 증가할 수 있었다고 평가할 그런 기회가 되기를 간절
히 기도하는 바이다.












번호 : 61 등록일 : 2002-06-26
교단설립 50주년 기획특집 / 고신 50년을 말한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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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 교단 설립 50주년을 기념해서 고신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이 무엇이며, 고신 교단이 지향하는 신학적 입장이 한국교회의 신학발전에 기여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이번 기획 특집에서 필자에게 맡겨진 일이다. 그런데 먼저 짚고 갈 것은 “정말 한국교회의 신학이란 있는 것인가?” 라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한국교회의 신학이란 결국 일찍이 선교 신학자 요한네스 벌까일 박사 (Johanes Verkuyl)의 말처럼 “번역신학 또는 화분갈이 신학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어떤 서양 신학자들의 책들을 번역해서 그 노선을 따르는가에 따라서 결국 신학의 색깔이 구분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신은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순교자의 신앙노선을 따르려는 확실한 깃발이 있었기에 그것이 커다란 에너지가 되어서 개혁주의 신학노선을 힘차게 외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특히 고신의 창설자였던 한상동 목사의 감화력과 영권이 진리 운동의 깃발로 모이게 했고, 세속주의와 인본주의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커다란 함성이 되었다. 그 후에 고신의 신학적 정체성과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이 되었다.


■ 고신신학의 정체성과 방향

한상동 목사는 신학자는 아니었지만 한국교회의 가장 암울한 시기에 오직 진리운동의 투사로서 옥고를 치르면서 이른바 산 순교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모습이 고신 교단 뿐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에 커다란 감화력과 영향력을 미쳤다. 한상동 목사는 신학자가 아니고 신앙가 이긴 해도 그의 설교와 사상과 삶이 고신 교단의 버팀목이 되었음을 누구도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한상동 목사는 신학적인 저서를 남긴 일은 없다. 하지만 그의 설교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외쳤고,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울면서 권면했다. 비록 신학적 자기 체계는 세우지 못했으나, 그것은 바로 개혁주의자들의 사상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한상동 목사의 사상과 삶이 고신 신학의 배경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고신의 신학이란 한 마디로 1946년에서 1960년까지 15년까지의 ‘고신의 박 교장’ 즉 박윤선 박사의 신학적인 입장에 기초를 두고 있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고 선교사들이 강제 출국되기까지 한국의 보수 신학의 대변지였던 ‘신학지남’(神學指南)이 폐간되고, 평양신학교의 교수로 있던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 등은 일본 또 만주로 망명길에 오르고, 만주 봉천 신학교에서 광복의 때를 기다렸다.

그로부터 해방과 광복이 이를 때까지 한국교회의 신학은 공백기였다. 말하자면 신학이 없던 시대였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조선신학교의 자유주의 신학의 깃발에 맞서서 이른바 대한예수교 장로교 신학교 즉 총신이 평양신학교의 후신으로 세워지고, 그전에 이미 고신이 태동했다.

총회신학교 측은 자유주의 신학 노선에 맞서서 일찍이 마포삼열 목사가 전해준 대로 옛 미국 북 장로교회가 지켰던 보수주의 신학과 신앙을 지키는데 앞장섰다. 자유주의 대 보수주의로 대칭 되면서 총신의 깃발은 보수주의 운동의 맹주가 되었다. 그런데 꼭 같이 그레샴 메쳰과 코넬리우스 반틸 박사의 영향을 받은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는 신학적인 입장이 완전히 같으면서도, 박형룡 박사는 교의 신학적인 변증을 하면서 보수신학을 지키려고 했다.

이에 반해서 박윤선 박사는 보다 주경 신학적인 입장에서 ‘신정통 신학’ 곧 빨트 신학을 비판하면서 칼빈주의적 성경해석학에 초점을 맞추었다. 특히 1950년대 초 박윤선 박사가 얼마간 암스텔담 뿌라야 대학교에서 유학하고 온 후부터 그의 신학적 색깔이나 화두는 당연히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노선을 줄기차게 외쳤다.


■ 박윤선 박사와 ‘파숫군’

박윤선 박사의 신학적 입장은 그의 주석은 말할 것도 없고 고려신학교 잡지였던 ‘파숫군’지(紙)에서 10여 년 간 가장 확실하게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즉 박윤선 박사는 파숫군지에다 거의 1년 동안 ‘칼빈주의란 무엇인가?’란 제목으로 헨리미터(H. H. Meeter)의 ‘칼빈주의 기본 사상’을 발췌해서 연재하였다. 그 외에도 박윤선 박사의 성경주석 전부에 나타난 칼빈과 아브라함 카이퍼, 헬만 바빙크, 리델보스, 흐로솨이퍼, 도예베르트, 볼렌호번 등 거의 모두가 화란 칼빈주의자들의 사상을 소개하고 있다. 박윤선 박사가 고려신학교를
떠나기까지 그는 고려파의 대변인이었고 고려파의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박윤선 없는 고려파는 생각 할 수 없을 만큼 그는 고려파를 대표하는 신학자였다. 1937년에 박형룡 박사는 부트너(L. Boettner)박사의 ‘칼빈주의 예정론’을 번역하면서 교의적으로 칼빈주의 입장을 고수했다면, 박윤선 박사는 카이퍼와 바빙크에 심취하면서도 헨리미터의 칼빈주의를 그대로 번역 소개하였다.

박윤선 박사의 칼빈주의는 우선 포괄적인 삶의 체계로서 칼빈주의를 소개했다. 특히 주목할 것은 ‘파숫군’지에 실렸던 박윤선 박사의 첫 번 글은 ‘칼빈주의의 기본 원리와 칼 빨트의 기본 원리’란 제목 아래서 양자의 차이점을 지적한 학술적인 논문이다. 그는 이 글에서 “설교에 있어서 칼빈과 빨트의 차이점”, “계시 문제에 있어서 칼빈과 빨트의 차이점”, “기도에 있어서 칼빈과 빨트의 차이점”을 지적하고, “칼빈주의 최대 표현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위기 신학”에서 칼빈주의와 신 정통주의 차이점을 명백하게 지적했다.

그런데 고신의 신학적 화두는 이른바 보수주의 또는 복음주의라는 말보다 개혁주의 또는 칼빈주의란 말에 더 익숙해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런 개혁주의 신학운동은 한상동 목사의 순교자적 영성에 증폭되어, 적어도 1960년대 중반까지 그 시대의 사명을 다하면서 교회와 신학 운동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박윤선 박사와 한상동 목사가 갈라지고 박윤선 박사가 총신의 교수와 교장으로 오면서 신학의 강조점은 총신의 보수주의 신학이 개혁주의 신학으로 힘을 얻게되고 그 후 합신의 신학적 정체성에도 힘을 실어주게 되었다.


■ 제2세대 신학자들

고신에서 박윤선 박사의 이탈은 커다란 교단적 손실이긴 해도 한국 장로교회 전체에 미친 영향으로 본다면 긍적적 시각도 없지는 않았다. 박윤선 박사 없는 고신은 교단의 폐쇄성과 맞물려 그토록 개혁주의 노선을 부르짖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적 한계를 벗어 날 수도 없었고 다른 장로교단에 미친 영향은 미미하였다.

다만 이근삼 박사의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 신학 전통을 잇기 위한 노력은 크게 평가되어야 했다. 이근삼 박사의 칼빈주의에 대한 관심은 여러 소 논문에서 나타나는데, 이는 아무래도 1960년대 이전의 화란 뿌라야 대학교의 칼빈주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교회 전체에 신학적인 영향은 별로 없었다. 아마 이근삼 박사의 개혁주의 대학건설의 비젼이 오늘의 고신대학교를 발전시킨 것이라고 보면서도 개혁주의 대학교로 가려고 할 때 여러 가지 환경적 여건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고신에서 신학적인 대변인으로서는 오병세 박사를 들 수 있다. 물론 이근삼, 오병세, 홍반식 등 세 박사들은 실제로 박윤선 이후의 교수들로서 이미 초기 고신의 영향력을 잃은 후 차세대들임을 부인 할 수 없다. 특히 오병세 박사의 경우 그는 신학자이면서 교정 가이며, 여러 번 고신의 학장을 역임 한 바 있다. 오 박사는 한국 신학계에 크게 영향을 끼칠 만한 저서를 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 박사는 ‘개혁주의 신행협회’를 실질적으로 이끌면서 많은 개혁주의 입장에서의 저서들을 번역하도록 일한 것은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 개혁주의 신행협회는 불란서의 피에레 말셀(P. Marcel)박사나 화란의 뎅그링크(J. D. Dengerink)박사들이 주동되어 세운 국제적인 기구였고, 박윤선 박사가 한국에 가져왔으나 한국에서는 독특하게 고려파를 중심으로, 특히 오병세 박사를 중심으로 발전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행협회의 번역서들은 모두가 믿을 수 있고, 권할 만한 책들인 것은 사실이다. 아마도 고신의 신학적 향방을 은연중에 말한 것은 바로 개혁주의 신행협회의 번역서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물론 개혁주의 신행협회는 총신의 교수들도 가담하기는 했으나 오병세 박사의 영향 아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결국 고신의 박윤선 이후에 교수들이 한국 신학계에 개혁주의 신학노선으로 철저히 영향을 끼치려고 할 때, 새롭고 창의적 저서들이 쏟아져 나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소 기대에 미흡한 점도 없지 않다. 결국은 입으로의 개혁주의 보다 확실하게 저서로서 한국교회 앞에 내어놓아야 했었다. 그것은 아마 부산이란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 때문이라고 감히 평가하고 싶다.

물론 고신이 한국 신학계에 미친 영향은 실로 컸었다. 그러나 고신대학교로서 즉 기독교 인문대학교가 됨으로서 그 옛날 순교자적 신앙과 개혁주의 신학노선을 깃발로 들고나올 때와 비교하면 다소 빛이 바랜 느낌도 없지 않다. 물론 고신대학교는 옛날 아브라함 카이퍼가 뿌라야 대학교를 세워서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높이려던 위대한 꿈을 따라서 대학교로 발전했다. 그것은 고신만 그런 것이 아니다. 총신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신학교들이 대학교가 되면서 세상에서의 권위도 못 찾고 개혁신학을 철저히 지키지도 못해서 신학의 순결성을 점차 잃어가고 있는 것도 아무도 부인 할 수 없다.

박윤선 박사가 고신을 떠나고 고신의 대변지였던 ‘파숫군’지가 폐간되었을 때 이미 고신은 그 시대의 사명을 다했고, 새롭게 자기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 있어야 했다. 밖에서 본다면 고신은 지나치게 과거 지향적인 삶에 머물러서 회상하기보다는 다가올 미래를 적극적으로 대비하고 맞서 싸우기를 바란다. 곧 신학의 세속화와 종교다원주의, 그리고 모든 자유주의적인 신학적 상황에서 개혁주의 신학, 곧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뼈를 깎는 아픔과 도전 정신을 가지고 한국 신학계를 향한 새로운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