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일제 시절의 여러가지 사회상 [한국교회사]
분류: 교회사- 한국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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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경제 (곡물생산 등 경제 자료)
윤선이 겪었던 가난은 당시의 조선 농부들이 보통으로 겪고 있던 것이었다. 일제의 병탄 후 한국 자본에 의한 산업 발달은 극도로 제한되었다. 쌀 생산량은 증가하였으나 이는 일본인들을 위한 것이었고, 헐값에 일본에 강제 수출을 당한 뒤 남은 쌀로 조선인들의 주린 배를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지속되는 쌀 생산량 증가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의 일인당 평균 쌀 소비량은 1921년에는 6-10말이던 것이 1937년에는 3,4말로 줄어들었다. 조선인들의 부족한 식량을 채우기 위하여 만주로부터 입에 맞지 않는 곡물이 수입되기도 하였다. 조선은 이제 일본의 식민지로서 쌀을 비롯한 농광산물의 원산지이며, 일본의 공산품을 소비하는 시장이 되었다.
일본 정부가 한반도에서의 토지조사사업을 완료한 1918년 일본인들은 실제적으로 조선 땅의 주인이 되었다. 총독부의 비호하에 제한 일본인의 숫자는 늘어났고 전통적인 조선의 농가는 소작인으로 전락하였다. 자작농으로 남을 수 있었던 대다수의 농민들은 겨우 연명할 정도였다. 1916년 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60% 이상 되는 농가가 1정보(2.45에이커)가 안 되는 땅에서 농사를 지었다. 1924년에는 44.6%의 가구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식량도 확보하지 못하였다. 수많은 조선 농부들이 매년 만주 땅으로 이주해 간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이 그곳에서 당한 고생은 지금까지도 많은 작가들의 창작 소재가 되고 있다.
박윤선의 회고에 의하면, 그의 부친은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의 가족을 잘 돌보아"그 노력에 의하여 중산계급"까지 끌어 올렸다 가난한 삶은 그의 생애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60년대 그가 총신에서 가르칠 때에 그는 "중산층"이라는 말을 때때로 사용하곤 하였는데, 그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은 그가 사용하는 "중산층"이라는 용어가 "그 당시 농부들 가운데 중산층"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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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930 일제 초기의 교육 (서당에서 현대교육으로의 전환)
1914년 박윤선의 나이 아홉 살 때 그의 아버지는 윤선을 서당에 보냈다. 서당은 한자와 중국고전을 가르치는 전통적인 마을 학교이다. 당시 일제는 이미 일본어, 일본 역사와 지리 등을 전파하기 위하여 대 도시들마다 초등학교를 세워 나가고 있었다. 박윤선이 다녔던 서당은 마을 부호의 사랑방에 있었다. 일본에서와는 달리 당시 한국에서의 초등교육은 의무교육이 아니었다. 윤선의 아버지가 그를 서당에 보내려고 결심하였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아버지의 소망을 읽을 수 있다. 비록 자신은 학교에 다니지 않았고 또 윤선을 학교에 보냄으로써 농번기에 긴요한 일손을 잃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아들이 교육받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이 희생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윤선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공부에 남다른 자질이 있었다. 특히 기억력이 뛰어났는데, 후일 자신의 어렸을 적을 기억하면서 자기 자신도 놀라울 정도라고 말한다. 그는 이때에 사서와 삼경 전문을 암기하였다. 암기와 이해력에서 뿐 아니라, 한시를 지을 때에도 항상 1등을 하였다고 한다. 후일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그 시절에는 상당히 시적인 상상력이 풍부하였던 것 같다"고 회고한다. 서당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소를 돌보아 주는 등 많은 집안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먼 전원마을에도 신학문이라는 변화의 바람이 서서히 불어오기 시작하였다. 윤선이 8년간의 서당교육을 마치고 그의 나이 열 일곱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신학문에 대한 궁금중에서 대동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이 학교는 7~80리 정도 떨어진 선천군 군산면 장곡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의 나이 때문에 또한 그가 서당에서 배운 공부 덕분에 그는 곧바로 6학년으로 편입되고 1년 후 대동학교를 그의 반에서 최고 석차로 졸업하였다. 여기서 공부할 때에도 그의 아버지는 많은 돈을 보내지 못하였다. 그가 학교로 떠날 때에 "겨우 보리 판 돈 70원"을 손에 쥐고 있었다.
박윤선이 서당에서 받은 교육의 의미에 대하여 이제까지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다. 그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아마도 회심하기 이전의 삶이 "진정한" 삶이 아니었던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당교육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글이 하나 있기는 하다. 박종칠은 서당의 공부를 통하여 박윤선이 한국인의 심성과 성품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후일 박윤선 자신이 과거에 자신이 받았던 유교 교육의 가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렇게 배움의 코스를 변하여 새로운 학문 세계에 들어서고 보니 과거 10년 동안 한학을 배운 것은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후에 대학교와 신학교를 거쳐 미국에 가서 신학 연구과를 마치고 보니 과거에 배웠던 한학으로 동양철학이 기독교와는 반대되는 것이지만 그런 것을 앎으로 그와 대조되는 기독교 신학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실감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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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초등학교 교육상황)
당시에 시골 소년이 신학문을 가르치는 초등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은 예외적인 특혜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1911년 일제는 <사립학교령>을 발표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조선에서의 교육의 목표가"충성스럽고, 복종적이며. 유능한" 천황의 신민을 양성하는 데 있다고 한다. 일본 내에서는 초등교육이 의무적이었으나 조선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1919년에서 1935년 사이에 조선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의 수는 88,827명에서 186,145명으로 증가한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아직도 전학령 인구에 비하면 2.2%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강한 유교적 배경을 가진 시골 소년에 불과한 박윤선이 대동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고, 하나님의 섭리가 합께 하였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대동학교에서 박윤선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였다. 우선 대동학교는 남년 공학이었다. 이제껏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완고한 유교적 환경에서 자라온 젊은 박윤선으로서는 여학생들이 같은 교실에 앉아서 같은 과목을 배우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여학생반을 별로 쳐다보지도 않았고 또한 학생회에서 활동하는 일이 있어도 오늘날 소년들처럼 활발하게 나면 교제가 없었다. 나는 그것이 옳은 줄만 알았다."
또한 박윤선은 난생 처음으로 수학이나 일본어 같은 새로운 과목들에 접하게 되었다. 1920년 11월 이후 총독부는 모든 학교에서 일본어와 일본 역사와 일본 지리를 의무적으로 가르치도록 명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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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 한문 공부와 신학
박윤선에게 유교는 기독교의 연구와 이해를 위한 전 단계일 뿐이다. 박윤선은 이를 통하여 동양인들의 삶의 방식의 잘못된 점을 교정해 주려 하였다. 유교가 가치를 가지는 것은 기독교와 대조되어 후자의 우월성을 증명해 줄 때뿐이다. 박윤선의 저술에서 이와 같은 유교의 평가는 되풀이되어 등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유교가 박윤선에게 무의식적으로 끼친 영향의 가능성에 대하여 고려해 보아야 한다. 한국인 치고 이 길고 긴 유교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잇는 사람은 없다. 박윤선 자신을 포함한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바와 같이 유교는 한국인들의 사고와 심리를 형성에 준 가장 영향력 있는 요인이다. 박윤선 자신도 결국 자신의 인생관을 형성해 준 결정적인 시기 가운데 8년이라는 긴 기간을 유교의 정전들을 공부하면서 보냈다. 그는 무려 1천 쪽도 넘는 유교의 경전과 그 주해서들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암기하였던 것이다. 유교가 그의 삶과 신학에 미친 영향에 관한 문제는 더 깊이 연구되어질 필요가 있는 주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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