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결혼과 가정생활 [한국교회사]
분류: 교회사- 한국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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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가정생활
1922년의 어느 날 윤선이 대동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그의 형 윤석이 아무 예고도 없이 그를 방문하였다. 동생 윤선의 혼사가 결정되었고 결혼식 날짜가 여름 방학 중으로 결정되었음을 알리러 온 것이었다. 아직 한번도 그의 아내 될 사람을 본 일이 없어 당황하긴 하였으나 유교 교육을 받은 사람답게 아무런 불평없이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신부인 김예련은 당시 15살 난 처녀로서 윤선의 고향에서 6km 정도 떨어진 월암동이라는 곳은 한 농부의 딸이었다. 같은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한국 여성치고는 키가 큰 편이었고 열정적이며 열린 마음을 가진 여성이었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열정적인 면은 몇 년 후 그와 아내가 시댁에서 떠나 따로 살기까지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구습을 지닌 농부의 가정에서 자랐기에 공식적인 교육은 전혀 받지 못하였으며 한글을 겨우 아는 정도였다. 당시의 전통적인 한국 여성들이 그러하였듯이 이 신부도 부끄럼을 많이 탔다. 그녀는 남편을 피하려 하였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의"중심은 내가 자기의 남편이란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으로 감지하였다.
결혼식 후 얼마 안 되어 박윤선은 아내 예련을 시집에 남겨 두고 학교로 돌아갔다. 이 신혼부부는 신부가 단지 남편과만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가정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개념의 전통적인 결혼 관습에 순응하였다. 결혼은 단순히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뿐 아니라 아이를 낳아서 가족의 대를 잇게 하는 제도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만일 아내가 그 새 가정과 잘 맞고 남편과 시집 식구들을 잘 섬기고 아들을 낳아서 대를 잇게 해 주면 남편과의 관계가 깊건 깊지 않건 간에 그 결혼은 성공적인 것이었다.
윤선이 그의 아내와 결혼한 후 그렇게 빨리 떠나 학교로 돌아간 것이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부를 이하여 남편과 아내가 오랫동안 심지어 몇 해 동안이나 떨어져 있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다. 물론 시대가 변하고 한국전쟁 이후에 태어난 한국의 남녀들에게서 이러한 관습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현재도 남편이 외국으로 유학가는 경우에는 이러한 긴 이별이 아주 드문 일은 아니다. 과거에는 이러한 일은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갓 결혼한 박윤선의 아내가 남편이 없는 가운데 시집에서 사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내가 없는 동안에 부모님과 형님 가족들과 함께 농토에 나가 땀흘리며 힘든 노동을 하였다. 나는 방학이 되면 80여 리 밖에 있는 고향(철산군 백량면 장평동)으로 찾아가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부모를 모시고 있는 아내가 남편인 나를 반가워하면서도 그 뜻을 표시하지 못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되었다.
사람들 앞에서의 이런 조신한 태도는 교육의 결과였다. 특히 아내는 어른들 앞에서 남편에 대하여 애정의 표현을 밖으로 나타내면 안 되었던 것이다. 윤선의 아내는 곧 아들 경조를 낳았다. 윤선 자신에게와 그의 가족에게 큰 기쁨이 되었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아이는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
한번은 방학 때 집에 오니 어린 경조가 심한 병으로 앓고 있었다. 그 때 그 동리에는 병원이 없고 30리 밖에(철산읍) 병원이 있었는데 우리동리에서는 아이들이 병이 들면 그대로 방치해 두고 병원 치료는 혜택을 못 입는 처지였다. 낳고 1년 된 어린 경조는 심히 앓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때는 내가 가정에 있지 못하고 멀리 선천 신성중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박윤선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나는 공부에는 열중했으나 가사를 돌보지 못했다는 느낌이 언제나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우리가 나중에 자세히 보겠지만, 박윤선의 가족과의 관계는 "무관심이라는 단어 하나로 특징 지워질 만하다. 필자의 생각에 박윤선이 가진 중대한 결함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특히 그의 첫 번째 아내가 급작스럽게 죽고(1954) 재혼한 후, 첫 결혼에서 낳은 자녀들과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어져서 그와 그의 가까운 친지들에게 큰 근심거리로 남는다.
박윤선이 교회 지도자로서 가정생활에서 모범을 봉이지 못하였다는 정후는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그러나 현재의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그를 비난하지는 않아야 하겠다. 그가 살던 시대는 구세대와 신세대 사이의 과도기였다. 17세 소년인 윤선은 전통적 유교적 윤리에 따라서 결혼을 하였다. 이 윤리에 의하면 아이를 키우는 것은 전적으로 아내의 책임이었다. 남자들은 바깥 일만을 해야 하였다. 전통적인 가정에서의 남편과 아내의 역할 분담은 매우 철저하여서 아내는 가사에서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다. 가정을 영위해 나가는 것, 심지어 돈 문제까지도 전적으로 여성의 몫이었고, 아내가 남자의 일에 간섭하지 않아야 하는 것만큼이나 남자도 여자의 문제에 간여하지 않았다. 그의 일생을 통하여 박윤선은 이런 유형의 삶을 살았다. 그는 자신의 봉급을 얼마나 받는지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돈 문제에 관하여는 거의 무관심하였다. 봉급은 뜯지도 않고 그의 아내의 손으로 넘어갔으며, 언제든지 돈이 필요할 때면 아내에게 요구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는 죽을때까지도 이발료가 얼마인지를 몰랐다고 한다.
박윤선이 그의 가정 문제에 대하여 경직되고 완고한 태도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너무 심한 말이기도 하고 부정확한 말이기도 하다. 그는 단지 하나밖에 모르는 고지식한 학자였을 뿐 다른 사람의 필요에 대하여 돌보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아내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사례가 하나 있다. 그가 신성중학을 졸업할 즈음에 있었던 일이다. 그는 항상 그의 아내에 대하여, 특별히 아들이 죽은 후에 더욱더 안쓰러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신학문을 공부할 수 없었다는 데 대하여 유감스런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내를 데리고 가서 공부시켜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여자는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여자는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던 그의 어머니는 며느리를 놓아 보내려 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자는 아내를 등에 업고 밤에 도망치듯 몰래 빠져 나왔다. 그의 아내와 함께 기숙사에 살수 없어서 방 한 칸을 새 얻어 살면서 아내에게 읽기와 쓰기의 기초를 가르쳤다. 그리고는 보성여학교에 아내를 입학시켰는데 이 일은 그의 친구들 사이에 "기록적인 사건"이었다.
당시의 시대를 고려해 볼 때 이 일은 지대한 용기와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윤선은 어머니의 뜻을 거역하고 아내의 편을 들었는데, 이 일은 효도를 모든 덕의 근원으로 가르쳤던 유교적 사고방식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이었다. 옛 조선에서는 효도가 만행의 근원이라고 하였고 이를 어길 때에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부모들은 자녀에 대하여 복종과 존경을 강요하는 절대자이다. 더욱이 당시에는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고 따라서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모두 믿고 있었다 이 당시의 남자들은 자기의 아내에게 공부를 가르치지 않고 아무 이유 없이 때리거나 소리지르는 등 마치 동물처럼 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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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삶을 사는 데는 고통이 따른다 특별히 그의 가족들이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그는 그의 식구들과 외식한 기억이 없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203) 그의 아내는 그의 식구들이 1974년 미국으로 이민가면서 비행기를 탔을 때가 남편과 처음 여행한 것이라 말하였다.(204) 주석 쓰기에서 가장 큰 기쁨을 누리는 사람에게 취미나 여가생활이 차지할 자리가 없었다. 박윤선이 본 유일한 영화는 드밀(Cecil B. DeMile) 감독의 <십계>였다. 그것도 많은 사람들이 꼭 보아야 한다고 해서였다고 한다.(205) 신문을 읽지도 TV를 보지도 않았던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가 즐겨 보았던 단 하나의 TV프로그램은 「동물의 왕국」과 같은 다큐멘터리 필름이었다. 연속극은 주인공들이 헛갈리고 내용을 따라갈 수가 없었고, 코미디 프로를 보아도 전혀 웃지를 않았다.”(206) 죽는 날까지 가정의 형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동네 가게의 생필품 값이 얼마인지를 전혀 몰랐다고 한다. 이런 종류의 삶은 그의 가족에 대한 “무관심”내지는 “무시”를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첫 아내의 장남은 그 아내가 1954년 교통사고로 죽고 박윤선이 재혼한 후 특히 무관심 속에 버려졌다. 후일 박윤선은 자조적으로 후회한다.
나는 주석 집필과 연구 생활 때문에 가족과 함께 소풍 한번 간 적이 없었고 가정을 돌보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로 자녀 가운데는 나의 기대같이 되지 못한 안타까운 일도 있어서 지금도 기도할 뿐이다.
1980년의 인터뷰에서 그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긴다.
나를 정말로 힘들게 한 일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주석을 계속 쓰지 못할 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하여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208)
박윤선의 가까운 친구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안다. 그의 첫째 부인에게서 낳은 자녀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209) 어떤 사람들은 그의 가정생활에서의 약점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의 주변에 좋은 역할 모델로 살았다. 또한 그가 웨스트민스터에서 공부할 동안 존 머레이(John Murray)도 또한 그러했다. 그의 친한 친구 중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프린스톤을 떠나 웨스트민스터를 세운 분들은 자유주의와의 싸움에 완전히 헌신한 분들입니다. 그들의 유일한 소망은 하늘에 있었고 결혼과 같은 세속적인 기쁨은 그들의 안중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모범 때문에 그들에게서 배운 사람들도 가정생활이나 세속적인 일을 게을리 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210)
그러나 공정하게 말하면 박윤선이 미국에 갈 떄는 이미 성인이 된 상태였고 결혼도 하였다. 외국에서 유학하면서 이런 악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그가 자라난 유교적 문화의 배경에서 박윤선의 행동을 이해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자기가 자라난 문화적 배경을 뛰어넘어 이를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박윤선도 그의 자녀들이 대들고 불평할 때 매우 당황하기도 하고 혼란스럽기까지 하였다.
너희들 웬일이냐? 내가 아버지로서 못해준 것이 뭐가 있느냐? 밥을 먹여 주지 않았니, 학교를 보내지 않았니?(211)
이 점에서 박윤선은 분명 그 자신의 아버지보다는 훨씬 나았을 것이다. 유교 문화권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을 위하여 가정생활을 희생하는 일이 허다하였다. 특히 박윤선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지상의 어떤 일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영광스럽고 가치있는 일이라고고 믿었기에 더 그러하였을 것이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박윤선은 그 일을 선택하였고 그 대가는 혹독하였다. “온 세상이 다 ?윤선을 성자라고 떠받들어도 그 자신의 자식들은 이 위대한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지는 못하였다.”(212) 결과적으로 그의 자녀들은 불순종의 길로 나아갔고 박윤선이 이 장성한 자녀들과 화해를 시도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213)
또한 박윤선의 시대에는 한국교회에서 목회자들을 위한 상담 프로그램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목회자들은 교회를 위하여 가정을 희생해야 한다고 하는 암묵적인 기대 같은 것이 있었다. 한국의 저명한 신학교수 가운데 한 분은 박윤선의 시대 혹은 그 이전의 시대에 모법적인 가정생활을 한 목회자를 한 사람도 찾을 수 없다고 탄식하였다.(214) 박윤선이 공부하던 1930년대에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도 실천신학 과목 가운데 결혼과 가정생활의 상담 코스가 포함되어 있는 박윤선이 가정생활에서 모법을 보이지 못하였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가 존경받는 교회 지도자였기 때문에 그의 이러한 약점은 목회자는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가정을 희생하는 혹은 희생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전통을 강화시켜 주었다. 누가복음 9 : 61이하를 주석하면서 박윤선은 이렇게 말한다. “가정을 애착하는 인정도 귀하지 않은 바 아니나, 다만 그것이 천국의 일에 지장이 되는 경우가 있다면 우리는 단호히 그것을 배척하여야 한다.”(216)
아버지로서 박윤선은 가장 큰 바램은 그 아들들이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는 가장 고결하고 영광스런 직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의 주석에는 그의 탄식이 이렇게 나타나 있다.
목사의 자손 중에는, 목사의 희생적 생활과 빈곤한 생활에서 배울 줄 모르고 도리어 원망하며 자기들은 목사가 안 되려는 결심을 하는 자들이 있다. 그것은 주를 따르기 위하여 희생하는 자에게 협력해 주지 않는 태도니 큰 죄라고 생각된다. 그것은,(1) 하나님 앞에 희생 드림을 반갑게 여길 줄 모르고 고기나 탐하는 비느하스의 죄요, (2) 주님을 따라 세상을 버린 그 심정을 몰라주는 악독한 죄다.
그는 가족을 버리기까지 주님을 따라갔다. 그에게는 주님을 따르는 것만이 유일한 진리요 축복이었다. 그런데 그의 유기한 가족이 그 뜻을 본받지 않으면 그 죄악은 큰 것이다.(217)
박윤선에게는 나이 47세에 교회를 사임하여 생활비가 없었으나 아내와 열 자녀가 불평 없이 살았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가정이 이상적인 가정이었다.(218) 박윤선은 가정은 주를 따르기로 결심한 자들이 버려야 할 최초의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과연 가정은 쓸쓸한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유일한 곳이니 만큼, 우리는 가정을 너무 사랑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219) 성경 주석 시리즈는 1979년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박윤선은 가의, 저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도를 위하여 너무도 바쁜 삶을 계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