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한국장로교회 신학 100년의 회고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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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한국장로교회 신학 100년의 회고와 전망


한국장로교회 신학 100년의 회고와 전망
한국장로교 총회 설립 100주년 기획(4)

2012년 04월 22일 (일) 22:57:19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김길성 / 총신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1. 서 론

본 논문은 한국 땅에 장로교회 총회가 설립된 지 100주년을 맞이한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흐름을 회고하고, 그 신학의 정체성과 방향을 제시하고자 시도된 논문이다. 한국 땅에 복음을 전해준 초기 선교사들은 대체로 성경에 충실한 보수적인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의 신학은 선교사 본국의 교단들과 연계되어 있다. 한국에 장로교회를 세운 초기 선 교사들은 4개 선교부 소속이었다. 1889년 미국의 북장로교회와 호주장로교회 선교부 사이에 연합공의회를 조직하고 1893년에는 미국의 남장로교회가 참여하여 선교사공의회가 조직되고, 1901년에는 선교사와 한국인대표가 참여한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가 조직되어 미국의 북장로교회(미합중국장로교회 PCUSA), 남장로교회(PCUS), 호주장로교회, 캐나다장로교회에 속한 선교사들이 참여한 4개선교부에서 공의회를 통해 평양에 설립한 신학교가 평양장로회 신학교이다.

이 때문에 한국장로교회는 초기부터 영미계통의 장로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대체로 한국장로교회 전통을 영미계통의 신학전통과 유럽 특히 화란계통의 신학전통으로 크게 둘로 구분하는데, 화란계통의 신학보다는 영미계통의 신학이 한국에 뿌리를 내린 것은 초기 선교사들의 영향이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 필자는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방향을 역사 속에서 돌이켜 보고 확인하기 위하여, 이 땅에 개신교 복음이 전래된 19세기 말 격변기 시대를 돌아보고 또한 그 시대 4개 선교부를 통해 l개의 신학교를 세우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미합중국장로교회 (PCUSA)에 속한 프린스턴 신학교의 신학적 몰락을 살펴보고, 이어서 우리의 역사 속에서 한국장로교회의 출발과 관계된 신앙고백서 채택과 관련된 문제들을 고찰하고자 한다.

2. 19세기말 서구신학의 격변기에 복음전래

교회사적으로 볼 때 이단 사상은 항상 교회 주변에 맴돌거나 혹은 교회 내부 속에 침투하여 전통적인 교회를 괴롭혀 왔다. 자유주의 신학은 합리주의의 영향으로 19세기와 20세기 도전으로 기독교의 기본적 신앙을 뒤흔들어서 서구교회의 약화 내지 몰락을 가져오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여 왔다.

18세기에 이르러 유럽, 특히 독일에서는 이미 고백주의, 신학의 상아탑화, 맥 빠진 정통에 반대하여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과 합리주의에 의해 현대성경비평, 일명 고등비평(Higher Criticism)의 수용과 주관주의적 자유주의 신학의 길로 가는 대로를 열어놓고 말았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영향을 받은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의 주관주의적 자유주의 신학과 헤겔의 역사주의가 19세기와 20세기 초엽의 신학계를 지배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지성인이 기독교 진리를 과연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리고 이들은 성경의 비평적 연구 방법을 수용하여 기독교의 초자연적 메시지를 수정 없이 받아들이기를 주저하게 되었다. 이들은 인간 활동이 단순히 지적영역 외에 예술적 표현이나 삶의 신비성을 나타내는 다른 영역을 포함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낭만주의의 경향을 띄게 되었다. 이러한 정신적 환경 속에서 슐라이어마허는 그의 저서들을 발표하게 되었다. 그는 그의 <종교론>에서 “종교란 사고의 양식으로서 신조나 교리가 아니요 절대의존감정”이라고 말하고 그의 <기독교 신앙론>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체험이란 그리스도의 신 의식과 신자의 일체성 의식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받는 경험”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과 이웃으로부터 고립된 현상에서 자유로워지며 해방되어진다고 하였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신학의 출발은 성경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세계에 대한 인간이해이다. 그는 종교의 주관적인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자유주의 신학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말았다.

이와 더불어 영국에서 일어난 자연신론(Deism)과 유럽대륙에서 라이마루스(Hermann Samuel Reimarus)에 의해 제창된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연구는 스트라우스(David F. Strauss)의 <예수의 생애>(Leben Jesu, 1835), 홀츠만(H. Holtzmann)의 <예수전>(1863), 르낭(J. Renan)의 <예수전>(1863) 등을 남겨 놓았다. 이들은 한결 같이 독일에서 발달된 고등비평을 그대로 수용하여 역사적 예수의 연구에 있어서 예수의 신성은 무시되고, 복음서에서 초자연적인 요소는 모두 삭제하고 자연적인 요소만으로 인간예수의 모습을 재구성해 보고자 시도했다.

현대신학에 있어서 자유주의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슐라이어마허의 주관주의와 헤겔의 역사주의가 19세기 신학을 지배하고 있을 때 리츨(Albrecht Ritschl)은 기독교 복음의 사회성을 강조하고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윤리적 공동체로서 하나님나라의 개념을 강조하였다. 리츨은 복음의 강조점을 개인 구원에서 사회적 구원, 곧 현세적 하나님나라에 대한 관심으로 바꾸어 놓았다. 리츨의 영향은 헤르만(Wilhelm Herrmann), 카텐부쉬(Ferdinand Katten bush), 하르낙(Adolf von Harnack), 트뢸취(Ernst Troeltsch) 등의 자유주의 신학의 대표주자들에게 깊이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1919년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던져진 폭탄”으로 비유되는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로마서주석>(1919년 초판, 1921년 개정판)이 나타날 때까지 신학계를 지배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자유주의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으며, 또한 자유주의는 유주의자들에게는 일종의 결함이 아니라 지적 생동력의 표시로 또는 교화된 관용의 승리로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지적 동향의 절정으로서 ‘역사주의’가 나타났다. 역사주의라는 술어는 모든 사물들의 절대적 사실성 때문에 상대주의로 나아가는 경향을 의미하거나, 또한 역사는 고정된 모형을 따라 진행한다고 하는 신념, 곧 헤겔이나 마르크스, 헨리 애텀스, 허버트 스펜서, 윌리엄 숨너 등에 의해 발상된 신념 때문에 결정론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의미 한다. 이 때문에 일률적 발전의 원리들이 모두 과거의 사건들에 적용되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의 역사, 예수의 생애, 또한 기독교의 발흥에서 이적과 하나님의 섭리가 제외되었다. 또한 성경이 고대의 다른 문헌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벨하우젠(H. Wellhausen)같은 학자는 구약 오경과 기타 부분들의 저작에 관한 전통적 견해와 그 문학적 통일성을 의문시하였으며, 신약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도전이 있었다. 아울러, 종교들의 비교연구는 이스라엘의 종교와 바울의 종교에 대한 고대 이교사상의 영향에 관하여 의문을 제시했다. 또한 기타 세계 종교들, 특히 동양의 종교인 불교 힌두교 등에 대한 기독교의 절대 우월성과 유일진리에 대한 기독교의 주장에 회의를 표명했다.

위와 같이 모든 사물들을 역사적 발전의 관점에서 보는 이러한 지적 상황으로부터 신약 해석의 주요한 세 학파가 생겨났다. 그 첫 번째 학파가 바우어(F. C. Baur)가 이끄는 튀빙겐학파였다. 두 번째 학파는 종교사학파인데 부셋(Wilhelm Bousset)이 가장 탁월한 대변자였다. 세 번째 학파는 하르낙(Adolf von Harnack)과 말부르크대학교에서 메이천(J. Gresham Machen, 1881~1937)의 스승이었던 헤르만(Wilhelm Herrmann)으로 대표되는 리츨학파였다. 튀빙겐학파는 메이천 보다 시기적으로 앞섰으나 메이천이 독일 유학중 독일에서 아직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두 학파, 곧 종교사학파와 리츨학파는 메이천의 독일 체재 중 한창 전성기였다.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당시 자유주의에 강력하게 대응한 보수연합 운동으로서 근본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일컬어지는 메이천은 독일 유학중 말부르크대학교에서 바로 리츨학파의 빌헬름 헤르만 교수를 통해 유럽 자유주의의 진수를 맛보게 된 것이다.

19세기 신학계를 지배하던 슐라이어마허의 주관주의적 자유주의, 헤겔의 역사주의, 리츨의 사회복음주의 신학은 이미 19세기 말엽부터 바이스(Johannes Weiss)나 브레데(Wilhelm Wrede)의 도전을 받았다. 그러나 1906년 슈바이처의 저서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연구>에서 치명상을 입게 되었다. 슈바이처는 말하기를 예수에 관한 올바른 이해는 오직 종말론적 관점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예수는 임박한 천국의 도래를 외쳤으나,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자 죽음으로써 그의 생애는 실패로 끝났는데 바로 이 예수의 실패야말로 영적 숭리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슈바이처의 종말론적 예수 이해는 켈러(Martin Kaehler) 에 의해 역사적 예수와 참역사의 그리스도를 분리함으로써 역사적 예수 연구에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역사적 예수는 복음서의 기록으로서는 찾을 수가 없고 오히려 복음서는 참역 사의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으로 보았다. 그로나, 복음서의 초자연적인 요소는 성경비평으로 말미암아 믿지 못할 것으로 여지없이 부서지고 이후, 신학의 초점이 사실 또는 사건으로서 의 역사에서 참 역사, 곧 실존적 도전으로서의 역사(Gesch ichte)로 옮겨가게 되었다. 칼 바르트(Karl Barth)와 불트만(Rudolf Bu1tmann)이 새 조류를 대표하는 대표자들이다.

스위스 바젤에서 신약신학자의 아들로 태어나 당시 신리츨파로 이름난 하르낙과 헤르만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11년 그는 스위스의 자펜벌에서 시골 목회를 시작하면서 성경에서 발견된 새로운 말씀의 세계를 보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유주의 신학의 옷을 벗어 던지고, 인간 중심의 신학이 아닌 신본주의적 입장에서 신학을 접근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 “위기의 신학,” “신 정통 신학,” “스위스 학파” 퉁으로 다 양하게 불려 지지만, 그에게 기록된 성경 자체는 게시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증거 요 통로였다. 그는 키엘케골의 초월주의와 변중법적 사고의 영향으로 게시와 역사를 분리하고, 게시를 본질상 역설로 이해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숨은 하나님이요, 동시에 계시된 하나님이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자요 동시에 유기된 자이다. 그에게 역사는 그 리스도 안에서 파악된 역사로, 창세기의 기사를 설화{Saga)로 이해하고, 예수의 부활은 그것 이 사실 또는 사건으로서의 역사(Historie)가 아닌 실존적인 역사(G esch ichte)로 주장하고 있다. 또한 그의 지나치게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의 전개는 구원론에 있어서 만인구원론적 경향을 면치 못하고 말았다. 반틸(Cornelius Van Til) 교수가 바르트의 신 정통 신학을 일컬어 “신 현대주의”(New Modernism)이라고 표현하여, 바르트가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 의 초월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내재를 부인한 것과, 현대주의 또는 자유주의의 성경에 대한 고퉁비평을 끝내 버리지 못한 신 현대주의 신학자로 평가한 것은 의미 있는 평가이다.

자유주의에 뒤이은 새로운 신학의 경향(신 신학)과 더불어 또 한사람 불트만이 있다. 불트만은 궁켈, 슈미트와 더불어 양식사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공관복음 전승사> (1921년)에서 복음서는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아니며, 초기 기독교인들 의 종교적 활동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소유한 복음서들이 기록되기 이전에 복음서를 구성한 단위들을 그들의 양식에 따라 구별하여야 하며, 그 당시 권위 있었던 민속 자료와 복음서의 단위 사이에 유사성이 있음을 알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복음서 의 동정녀 탄생 기사를 위시하여 광야의 시험, 변화산 사건, 이적, 부활 동의 모든 기사가 모두 신화(Myth)로 취급받게 되었다. 이 신화 처리를 위하여 그는 비신화화 작업을 제창했다. 불트만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처럼 신화적 요소를 제거하여 버릴 것이 아니라, 다만 새롭게 재해석하여 오늘의 상황에 맞도록 실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르트와 불트만으로 시작되는 신 신학의 경향을 따라. 존재의 신학을 강조한 틸리히 (Paul Tillich), 종교성 없는 기독교를 주장한 본 회퍼(Dietrich Bonhoeffer), 기독교 현실주의 윤리를 강조한 라인흘드 니버(Reinhold N irbuhr), 또한, 세속화 신학을 주장했던 로빈슨, 알 티저, 반 뷰렌, 하비 캄스, 플레처, 희망의 신학의 주창자인 몰트만( Juergen M이tmann), 기 타, 남미의 해방신학, 민중신학, 여성신학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앞에서 살펴 본대로 자유주의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슐라이어마허로부터 칼 바르트 이전까지의 현대주의 또는 구 자유주의 신학에서도, 또한 칼 바르트와 불트만으로부터 시작하는 현대신학(Contemporary Theology)의 다양한 경향 속에서도 반틸이 신 현대주의라고 부를 만큼 현대 철학에의 경도와 성경의 고동비평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1920년대와 1930년대 메이천(J. Gresham Machen, 1881-1936)이 자신이 속한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 내에서 자유주의자들과 고군분투한 것도 바로 이 자유주의의 파괴적 원 리들에 대한 그의 웅전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도, 1934년 성진 중앙 교회 김춘배 목사의 여성 임직에 대한 도전이나, 오경의 모세 저작에 대한 부인, 또한 김재준 목사의 잘못된 신학 사상 동은 때로는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게도 하였으며, 때로는 교회 분열의 원인이 되었던 것을 돌아보며 시대에 따라 유형을 달리하며 그 파괴적 함축성을 더 해 가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 사상과 신앙에 대한 우리의 경계와 주의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3.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배경

1) 프린스턴 신학교의 설립
미국의 장로교회가 남북전쟁(1861-1865년)으로 북장로교회, 남장로교회로 나뉘기 전 하나 의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로 존재할 때, 프린스턴 신학교는 미합중국장로교회의 목사양성을 위한 직영신학교로 출발했다. 프린스턴 신학교는 미국 교회사에 있어서 대부홍운동, 특히 제2차 대각성운동의 결과로 1812년에 설립되었다. 1812년 설립으로부터 프린스턴 신학교는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의 목사 양성 기관으로 출발했다. 당시 뉴저지 대학 (College of New Jersey; 현 프린스턴 대학교의 전신)이 오래 동안 미합중국장로교회의 목 사 양성기관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했으나, 1800년대 초에 이르러, 미합중국장로교회의 목사 양성기관으로서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사실이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공공연하게 지적되었다. 이리하여 대학과 구별되는 전문적인 목사양성기관의 설립이 추진된 것이다.

1811년에 7인 위원회가 학교설립에 대해 총회에 계획서를 제출하고, 총회는 그 계획서를 채택했다. 그 계획서에 따르면, 신학교는 총회에 직접 책임을 지는 운영이사회에 의해 운영 된다. 이사회는 교회에 대해 철저한 감독, 심지어 교수들이 가르치는 과목의 변경을 허락하 는 정도까지 감독권을 행사한다. 계획서는 적어도 3인의 교수를 요청했다. 각 교수는 교회에 서 안수 받은 목사여야 했다. 또한, 각 교수는 엄숙하게 미합중국 장로교회의 신앙고백과 대 소요리문답을 자기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하고, 받고, 서약해야 한다.

이후 프린스턴 신학교는 1929년 신학교 이사회의 개편 직전까지 보수적인 구학파(Old School)의 신학유산을 유지했다. 워필드(B. B. Warfield)와 메이천(J. Gresham Machen), 그 리고 구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수진의 대다수는 프린스턴 신학교가 설립자들의 의도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구학파의 전통을 보존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 말은 신 학파(New Sch。이) 입장과 자유주의 입장이 동일하다거나, 비슷하다고 하는 것을 암시하고 있지는 않 다. 조지 말스댄이 지적한대로, 미국 신 학파의 입장이 자유주의 입장과 더불어 혜스트민스터 신도게요에 서약하는 일에 대해 광의적 해석을 취함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20세기 근본주의와도 놀라울 정도로 연관성이 있다.

구프린스턴 신학전통의 마지막 주자인 메이천은 프린스턴 신학에 크게 힘입고 있다. 프린스턴 신학자들은 기독교 신앙을 파악하는데 이성의 기능을 강조하였다. 인간 사고의 능력 에 대한 자신감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에 의해 강화되었다. 프린스턴 신학자들은 칸트 이후 의 근대주의(또는 현대주의, Modernism)의 반지성주의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후기 근본주의(또는 신근본주의; Neo-Fundamentalism) 운동에서 보여진 반지성의 경향을 동시에 배격 하였다. 이들은 정통 칼빈주의가 성경에서 가르친 교리체계임을 믿었다. 이들은 성경의 영감 과 무오를 변호하는데 진력했다. 하지(A. A. Hodge)와 워필드는 성경 원본의 문자영감과 이 로 말미암은 무오를 변호했다.

그러나 성경의 권위에 대한 메이천의 관심과 성경적 일치와 순결에 대한 그의 관심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그의 선임자들이나 동료들이 제공한 신학모델의 맹목적 반복이나 모방이 아니라, 오히려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가르친 때를 전후하여 메이천 자신의 성경연구의 결과 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워필드는 메이천이 자기 시대에 그러한 것처럼, 성경에 대한 근대주의(또는 현대주의)의 비판의 많은 부분을 거부했다. 워필드는 사람이 전문방법에 대한 지식 없이는 성경을 읽어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 필경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성경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이는 성경의 명료성에 대한 워필드의 자신감을 표명하고 있다.

프린스턴 신학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를 충실히 따랐다. 워필드와 다른 프린스턴 교수진은 1903년 신도게요의 개정을 강력히 반대했다. 이는 그 개정이 개혁주의 성격을 약 화시킬 뿐만 아니라 넓어지는 교회로의 길을 준비한다고 하는 인식 때문이었다.

찰스 브릭스(Charles Briggs)의 경우만 해도, 교회가 그를 포용할 만큼 충분히 넓어져야 한다고 하는 점증하는 인식이 장로교회 안에도 있었다. 그러나 통일과 평화를 갈구하는 열망이 종종 교회의 성경적 순결을 희생하게 된다. 광교회주의에 대한 경향은 수많은 근본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의 진영에서도 현존하는 바, 필경 신학적 다원주의와 기독교 교리에 대한 현대주의적 무관심, 그리고 장로교회 안에 보수세력의 쇠퇴로 인도했다.

2)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들 사이의 갈등
1914년 로스 스티븐슨(J. Ross Stevenson:1866-1939)씨가 프린스턴 신학교의 학장으로 임명된 사건은 프린스턴의 신학적 좌경화에 불을 당겨 놓은 셈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장 차 스티븐슨은 신학교 이사회를 해체하고 새 이사진으로 재편성하는데 주역을 담당한 인물 이 되기 때문이다.

당시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수였던 메이천은 스티븐슨에 대하여 “신학교에 대한 그의 학 문적 공헌은 프린스턴의 표준이하”라고 말하면서도, 그 사람의 신앙의 “명백한 순수성”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티븐슨의 순수성에 대한 메이천의 판단은 점차 수정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스티븐슨은 프린스턴의 강한 보수주의에 대한 매우 잘 알고 있었을 뿐 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학장직을 수락했다. 그러나 그는 신학교를 교단내의 포용주의 주류와 일치시킬 목적과, 또한 자신을 교수회의 의장 및 대표자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신학교의 실질적 권한소유자로 만들 대권을 취하는 목적의 일환으로 그 직을 수락했다. 그는 일단 학장에 취임한 후, 신학교에 대한 지식의 목표를 분명히 하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프린스턴 신학교]는 결합된 교파와 기관이다. 신학교 학장으로서 나의 포부는 신학교가 미합중국장로교회의 어떤 특별파벌이 아닌, 전체 미합중국장로교회의 어떤 특정파벌이 아닌, 정체 미합중국장로교회를 대표하게 하는 것이다.”

메이천은 스티븐슨의 이런 정책이 미합중국장로교회 내에 현존하는 정 반대의 사상경향 을 수용하여 역사적 정통노선을 표방해온 프린스턴을 파괴하는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는 분 명한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프린스턴 신학교 신약학 교수였던 암스트롱 (W illiam Park Armstrong)은 말하기를, 신학교가 설립자들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라면, 프린 스턴은 마땅히 교회 내에 설립자들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라면, 프린스턴은 마땅히 교회 내 에 구학파(Old School)의 전통을 대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6) 프린스턴 신학교의 역사적 입장을 묻는 한 질의서에서 당시 캐시퍼 하지(Caspar Wistar Hodge)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프린스턴 신학교가 전체 교회의 신학교가 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다시 발하면, 우리의 교리적 표준문서의 해석에 있어서 보편화된 자유허용 때문에, 교회헌 법 아래에서조차도 그 역사적 입장을 떠나지 않으면 교리적으로 전체교회를 대표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교수회의 대다수는 본 기관이 구학파라고 알려진 교리적 관점과 역사적으로 맥을 같이해 왔다.”

사실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회의 대다수는 캐스퍼 하지와 동일한 입장을 천명했다. 그러므로 교회 내에 모호하고 때로는 이단적 교리의 관용을 요구하는 스티븐슨 학장의 유세는 프린스턴의 정체성에는 분명 낯선 것이었다. 만일 스티븐슨 학장과 같은 관용주의 보수주의자들이 없었더라면, 미합중국 장로교회내의 자유주의자들이 교단 및 프린스턴 신학교를 결 코 장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스티븐슨 학장은 1920년 총회 시에 채택을 위해 ‘복음주의 교회의 유기적 연합계획’에 대한 다수안을 제출했다. 스티븐슨 학장 퉁이 제출한 ‘다수안’은 1920년 총회결의에 의해 각 노회에 수의 하도록 보내졌다. 그러나 결과는 미합중국 장로교 회 총회산하 320 노회 중에서 151개 노회가 반대하고, 찬성은 100 노회뿐이었다. 이리하여 스티븐슨 학장 퉁이 추진했던 ‘연합계획’은 노회들의 반대에 부딪혀 수포로 돌아갔다.

프린스턴 신학교 안에는 비록 소수이기는 하여도 스티븐슨 학장이 추구하는 광교회주의 에 동의하는 교수들이 있었다. 이들은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프린스턴의 신학적 화경화에 실제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이 사실이다. 리취 스미스 교수(J. Ritchie Smith)는 이단재판으로 장로교 목회에서 쫓겨난 찰스 브릭스(Charles A. Briggs)가 성경무오를 부인할 것이 옳은 일 이었다고 옹호했다. 또한 프레드릭 레춰(Frederick W. Loetscher)교수는 유럽에서 하르낙 문하에서 수학했고, 또 그는 개인적으로 독단론을 싫어한다고 말하고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 회 대다수의 논쟁적 경향에 당황해한다고 말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교수는 역시 찰스 어드만 교수(Chanrles R. Erdman, 1866-1960)였다. 훗날 레퍼츠 레춰 교수(Lefferts A. Loetscher)는 어드만 교수를 평하면서, “그는 자신의 목회경력 때문에 순전히 탁상공론식의 태도에서 풀려난 사람”이라고 말했 다. 어드만은 ‘파즈닥 논쟁’에 대해서도 “사람이 충실하지 않다면 법에 따라 처결하자”고 말하는 것 외에 가급적 언급을 회피했다. 어드만은 자신이 총회장에 출마한 1924년 총회에서, 교리적 갈동의 문제가 교회의 적극적 목회를 붕괴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는 자신의 입장 을 표명했다. 그는 자신의 관용적 평판 때문에 보수주의자 매카트니(Clarence E. Macartney)를 상대로 총회장에 출마하였으며, 소위 총회내의 온건파와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조지 말스멘의 표현을 빌리면,“관용의 대변자로서의 찰스 어드만의 존재는 이후 수 년 동안 이어질 분쟁의 향방 을 가름 할 만큼 의미심장했다.”

그러나 어드만의 모호한 행동 뒷면에 그가 성경무오성에 대한 제한된 견해를 가졌다고 하는 사실은 1920년대와 30년대 미합중국장로교회 논쟁에서 그가 취한 행동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롱필드 교수는 어드만의 분명치 못한 이런 태도에 대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특히, 어드만은 자신을 근본주의자로 기술하고, 동정녀 탄생, 몸의 부활, 그리스도 의 육체적 귀환 등과 같은 교리들을 받아들이지만, 적어도 1920년대 중반까지 그는 성경무오성에 대한 제한된 견해만을 지니고 있었다. 장로교논쟁의 와중에서 그는 다 음과 같이 썼다. “[사도적 저자들의] 증언의 주제와 실내용이 보편적 진리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제한적이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진리였다. 그분에 대한 그들의 중언에 있어서 그들의 말과 그들의 저술은 그의 성령 의 인도 때문에 오류가 없으며, 믿을만하며, 권위가 있게 될 것이다.”

결국, 1920년대와 30년대 미합중국 장로교회 안에 격렬했던 논쟁 속에서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수로서 어드만은 광교회주의의 물결에 휩싸여 그들의 도움을 받아 총회장을 지내기 는 했지만, 신학적으로 보수인체 하면서도 자유주의자들을 지지하는 중립주의를 취함으로써 스티븐슨 학장을 도와 프린스턴 신학교가 재편되어 좌경화 하는데 크게 공헌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의 뒷면에는, 비록 당시에는 보수주의자인체 하였으나 훗날 그가 공언 했듯이 성경의 영감과 무오에 대한 그의 분명치 못한 태도가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하는 결정 적인 역할을 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정직하지 못한 한 사람의 신학적 태도가 신학교와 교단 의 물줄기를 돌려놓는 결과를 역사의 교훈으로 남겨놓았다.

3) 해리 에머슨 파즈딕 논쟁
사실, 1920년대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 내의 논쟁은 대부분은 해리 에머슨 파즈딕(Harry Emerson Fosdick, 1878-1969) 이라고 하는 인물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는 본래 침례교 목사였으나, 뉴욕에 있는 제일 장로교회의 부목사가 되어 달라는 청을 받고, 침례교 교적을 옮기지 않고 바로 장로교 강단에 선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근본주의 대 근대주의 논쟁과 관련하여 특별히 기억할만한 것은 그가 1922년 5월 21 주일 아침 설교시산에 “근본주의자들이 이길 수 있을 것인가?"하는 제목으로 당시 근본주의자들을 비난하는 설교를 하 였다는 사실이다. 파즈딕은 자신의 설교에서 신학적 관용에 대해 호소하고, 성경의 무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육체적 귀환 동은 비필수적 교리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그는 개인적으로 통 교리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파즈딕의 설교는 즉각적인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메이천 교수의 친구요, 필라델피아에서 목회 하던 클라렌스 에드워드 매카트니 목사(1879-1957)는 “불신이 이길 수 있을 것인가”라 는 제목의 설교로 응수했다. 이후 매카트니는 1922년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 대응하도록 헌의 하게 하는 데 앞장섰다.

이에 뉴욕노회는 총회의 지시를 받아 파즈딕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서, 어떤 행동도 취하 지 않았다. 특히 1923년에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기를 거부하는 두 젊은이, 헨리 반 듀센과 케드릭 레이먼에게 강도사 인허를 허락하고, 이들은 결국 장로교 목사가 되었다. 이중 반 듀센(1897-1975)은 뉴욕 유니온 신학교 교수와 학장이 되었다. 이러 하듯 뉴욕노회는 유니온 신학교 졸업생들을 목사 안수하면서 교단 내에서 자유주의 물결의 선봉이 되었다. 1923년 총회는 보수주의자 월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패배하고, 자유주의의 지지를 받는 촬스 위살트가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위살트는 그의 선출에 대해 “관용에 대한 숭리”로 표현했다.

1923년 총회는 1910년 총회에서 채택한 “근본주의 5개조”에 대해 다시 확인하는 순서를 가졌다. 다시 총회가 뉴욕노회로 하여금, 파즈딕이 속한 교회가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에 일치하도록 지도하도록 결정했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일들에 대해 총회원 85명이 서 명한 항의서를 총회에 제출했다. 이듬해 1924년 총회 재판국은 뉴욕노회로 하여금 파즈딕이 장로교인이 되도록 청하게 하였다. 그러나 파즈딕은 신도개요에서 서명하는 일을 거절하고, 뉴욕 제일 장로교회에 사표를 제출했다. 그러나 그의 사표는 1925년 3월에 이루어지도록 했 다. 마지못해 사표를 수리한 교회는 그에게 동 교회에서 설교할 수 있도록 대기초청기간을 연장해 준 것이다.

4) 오번 선언서 사건
이 일이 있는 후, 1923년 12월 26일자로 149명의 장로교 목사의 서명과 함께, 총회가 1910년, 1916년, 1923년에 걸쳐 근본교리 5개조를 모든 목사 후보생들에게 서약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하는 선언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뉴욕 오번에 본부를 두었기 때문 에 이 선언서이 이름을 훗날 “오번 선언서”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선언서는 대담하게 성경과 역사적 신조들은 무오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또 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대속 육체 불활 이적 동의 교리들은 “이론”에 속하며, 총회가 이들 교리들을 교회 내에서 강도사 인허, 임직 동에 대한 필수교리로 선포하는 것을 위헌이 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말하기를, 총회가 산하 노회로 하여금 그렇게 투표함이 없이 노회로 하여금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교리에 제한하는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동 선언 서 주장자들은 자신들을 신학적 혁명아 내지 급진주의자들로 제시하기보다는 온건파로 제시 하고, 또 복음주의자들 또는 진정한 화해론자들로 제시했다.

이 오번 선언서가 나오기 수개월 전에 메이천은 『기독교와 자유주의』라는 책을 출판하고 (1923년), 자유주의는 기독교와는 뿌리가 다른, 자연주의에 기초한 별개의 종교형태라고 명 쾌하게 지적했다. 동 선언서는 이듬해 1924년 5월까지는 1,283명의 장로교 목사들이 이 선 언서에 서명했다. 이리하여, 역사상 가장 폭발의 가능성이 많은 총회의 하나로 꼽히는 1924 년 총회는 미시간주 그랜드 래피즈에서 모였다. 이 총회에서 보수주의의 기수 클라렌스 매 카트니가 프린스턴 교수였던 찰스 어드만을 누르고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헌의부에서 오번 선언서 발행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그 내용과 서명자들에 대해 아무런 행동도 없이 통과시켰다. 시애틀 제일장로교회에서 목회 하던 매슈즈(Mark Allison Matthews)가 이 문제를 위원회에 넘기자고 제의했다. 이후, 총회 재판국은 교회가 특별하게 그 근본교리들을 정의하지 아니했다고 말하고, 총회가 직분자들에게 교리시험을 시행할 아무런 권리도 없다고 판결했다. 이리하여 1910년에 채택하고 1916년 1923년에 걸쳐 확인 된 “근본주의 5개조”는 이제 장로교내에서 위헌이라고 하는 판결이 나고, 「오번 선언서」에 서명했던 자유주의자들의 숭리로 돌아갔다. 문제는, 교단의 지도자들과 관계자들이, “근본주의 5개조”의 위헌에 집착한 나머지, 교단 내에서 성경과 역사적 신조에 정면 대항한 ‘오번 선언서’에 서명한 이들 같은 자유주의자들을 처단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태도로 취한 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교회는 이 사건을 계기로 종교다원주의, 포용주의 입장을 수용하고 이를 천명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5) 1925년 이후
이듬해 1925년은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치명적인 해였다. 조지 말스멘은 1925년올 보수세 력이 이해를 계기로 급작스럽게 약화되는 분수령으로 보았다. 같은 해 유명한 브라이언 (Willian Jennings Bryan, 1860~1925)이 테네시주 데이튼에서 열린 원숭이 재판에서 충격을 받고 소천했다. 보수주의자들에게 불행한 한 해였다.

1925년 총회는, 1924년 총회에서 패배한 찰스 어드만을 총회장으로 선출했다. 또한 헨리 반듀센과 케드릭 레이먼을 인허했던 뉴욕노회에 대해, 총회는 동정녀탄생에 대한 믿음은 장로교 목회에 필수적인 것으로 판결하고, 뉴욕노회로 하여금 교회의 표준문서에 일치하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판결했다. 이 조치는 총회 내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치명적인 조치였다. 그래서 헨리 슬로은 코핀(Henry Sloane Coffin, 1877-1954)은 자유주의자들을 대신하여 항의서를 제출했다. 이에 찰스 어드만 총회장은 총회의 문제들을 연구할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의하고, 이에 “15인 위원회”가 구성되어 다음 총회에 보고하기로 했다. “15인 위 원회”에는 자유주의자들과 소위 교회의 순결보다는 “화평”을 지향하는 보수주의자들로 구성 되었다.

이듬해 1926년 총회는 「오번 선언서」를 논의하기조차 거절하고, 1년 더 연장하여 이듬해 총회에 문제들을 소상히 보고케 허락했다. 또한 총회는 프린스턴 신학교 내의 문제를 조사 할 수 있는 위원회 구성을 허락했다, 1927년 총회에서, “15인 위원회"(the Peace Commission of Fifteen)는 1910년 채택한 “근본교리 5개조”를 무효로 하고, 교회가 그 근본 교리들을 정의한 적이 없다고 선언했다. 총회는 이것을 별다른 토의 없이 받아들였다. 또 한 총회는 프린스턴 신학교 문제에 대해서도 신학교가 두 이사회(재단이사회와 운영이사회) 아래 운영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두 이사회의 통폐합을 건의했다. 총회가 이미 자유주의자들과 포용주의를 관용하는 소위 “온건파”에 의해 장악되어진 것이다.

이 건의안은 1929년에 채택되어 33인으로 구성된 하나의 새 재단이 사회를 구성했는데, 구 재단이사회에서 11명, 구 운영이사회에서 11명 그리고 범교회적으로 선출한 11명, 도합 33명으로 구성하고, 새 정관은 학장의 권한을 확장하고, 새로 구성된 재단이사회에는 오번 선언서에 서명한 2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이 때문에, 메이천(J. G. Machen)을 비롯한, 월슨(Robert D. Wilson), 앨리스(0. T. Allis) 등이 프린스턴 신학교를 나와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이 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는 카이퍼, 반틸, 머리, 매크리, 스톤하우스, 울리(R. B. Kuiper, C. Van Til, John Murray, Allen Macrae, Ned B. Stonehouse, Pa비 Woolley) 교수 퉁이 가담 하여 학생들올 가르쳤다. 한편, 프린스턴 신학교는 1936년 잔 매케이(John A. Mackay)박사 를 스티븐슨의 후임 학장으로 선출하고, 1939년에서 신정통신학자 에밀 브룬너(Emil Brunner)를 조직신학 교수로 받아들이고, 발트주의자 홈리히하우젠 교수(Elmer G. Homrighausen)를 기독교 교육학 교수로 받아들이고,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와 교류하게 되었 다. 당시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의 교장은 바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교리를 부인하여 목 사 안수가 지연되었던 헨리 반듀센이 1936년 이래로 학장을 맡고 있었다.

짧은 요약
위에서 살펴본 대로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유럽과 미국대륙에서 자유주의 신학과 신정통신학이 교회와 신학교를 강타하던 시기 동안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을 받아 들 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20년대와 1930년대 미국장로교회 안에서의 근본주의자 대 현대 주의자 논쟁이 정점을 이루던 이 시기에, 미국장로교회 안에 일어났던 그 논쟁이 1930년대 한국장로교회 안에서도 유사하게 재현되었다. 한국 땅에 복음을 전해준 초기 선교사들은 대 체로 성경에 충실한 보수적인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의 신학은 선교사 본국의 교단들과 연계 되어 있다.

한국에 장로교회를 세운 초기 선교사들은 4개 선교부 소속이었다. 미국의 북장로교회(미 합중국장로교회, PCUSA), 남장로교회(PCUS), 호주장로교회, 캐나다장로교회에 속한 선교사 들이 공의회를 조직하고, 1901년에 평양에 설립한 신학교가 평양장로회 신학교이다. 이 때 문에 한국장로교회는 초기부터 영미계통의 장로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대체로 한국장로교회 전통을 영미계통의 신학전통과 유럽, 특히 화란계통의 신학전통으로 크게 둘 로 구분하는데, 화란계통의 신학보다는 영미계통의 신학이 한국에 뿌리를 내린 것은 초기 선교사들의 영향이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이후 한국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 채택은 자연스럽게 영미계통의 것을 수용하게 되었다.

4.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근거

해방 이후 한국의 장로교회는 그 동안 맛보지 못했던 신앙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가운 데 급속도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분열이라는 짧지 않은 아픔의 터널을 지나야 했다. 감리교의 분열의 주된 원인이 교회의 주도권 싸움에 있었던 반면에 장로교회의 분열은 경건과 신학을 명분으로 내세워 일어난 분열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지적과 같이, 비록 장로교의 분열에 있어서도 교권과 정치적인 이유가 분열을 일으키는 요소 중의 하나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겠으나 더 중요한 원인은 신학적인 문제였다는 점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의 그 한 가운데에는 신학교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1)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측) 신앙고백
로마가톨릭 신자가 한국에 온 것은 도요도미 히데요시(풍신수길) 휘하의 고니시 유기나가 가톨릭 신자였다는 것과 그와 함께 그레고리오 데 쩨스페디스 신부가 함께 1592년 이 땅에 침입자로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승훈이 처음으로 천주교회당올 세운 1784년부터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토마스 목사님이 순교한 1866년까지 로마 가톨릭 교회는 신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주지 않았고, 성경의 일부라도 번역하려고 계획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개신교(Protestant Church)의 선교활동은 처음부터 성경의 전수였다.

한국에 처음으로 성경을 전해준 사람은 영국인 바질 홀(Basil Hall)이었다. 그는 배의 합장으로 1816년 황해도 백령도와 청도 근방에 상륙하여 한문성경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중국에서 선교하던 독일 선교사 칼 구츨라프는 동인도회사의 통역관으로 1832년(순조32년) 황해도 대청도, 소청도 등에 와서 정박하고, 충청도 홍천, 금강 입구에 상륙하여 선물과 함께 성경책을 반포하였다. 그리고 1866년 대동강 변에서 순교한 토마스 목사와 1884년 알렌 의사의 활동, 그리 고 알렌 의사의 편지로 말미암아, 이듬해 미국에서 파송한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의 내한은 한국 땅에서 본격적인 선교활동의 시작을 알리게 되었다. 한국장로교회는 선교사들의 선교사역 초기부터 성경번역(1887년 예수성교전서 발간)과 한국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 채택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 시대(1901~1906년) 동안, 1904년에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5,000부가 출판되었고, 이듬해 1905년에는 교회의 신경을 공의회가 채용하게 되었고, 다시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소집된 제l회 노회(독노회)에서 신경과 규칙을 정식 채택하게 되었다. 또한 이날 저녁에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서경조, 한석진, 송인서, 양전백,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 일곱 사람이 목사로 장립을 받았다.

곽안련 박사가 1919년에 발행된 <신학지남>에 기고한 “조선예수교장로회신경론”이란 제 목의 글에는 1905년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에 보고한 대로 12신조의 채택과 관련된 내용 이 다음과 같이 비교적 소상하게 실려 있다:

“조선장로회 신앙의 표준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일[첫째]은 신경이요 이[둘째]는 성경소요리문답이니 제2[그 둘째]는 이백육십 년 전에 영국에서 저술한 것인데 지금 수십 국 방언으로 번역이 되고 만국장로회에서 거진[거의] 다 채납[채택]하여 사용하느니라.”

고 기록하여, 12신조와 성경, 소요리문답(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처음부터 교회의 공적인 신앙고백으로 선포된 것을 밝힐 뿐만 아니라 12신조와 성경 소요리문답의 연계성을 지적하고 있다.

한편, 우리의 12신조는 그 영어원문이 본래 인도의 영국선교사들이 준비한 것을 인도장 로교회가 교회의 신조로 채택한 것을 12개 신조와 승인식은 그대로 두고, 앞에 나오는 “서 언”은 일부 수정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와 독노회에 보고하고 교회의 공적 신조로 채택하게 된 것이다. 대한예수교 장로회(합동)은 1907년 독노회시 12신조와 성경 소요리 문답(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정식으로 채택하게 되었고,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와 대요 리문답은 “성경은 밝히 해석한 책인즉, 우리 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독노 회시 결의 하였으나, 그 후 1963년 제 48회 총회에서 정식으로 채택되어 웨스트민스터 신도 게요 및 대소요리문답 전체가 교회의 신앙고백이 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헌법에 따르면, 12신조는 서언, 신조, 승인식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12신조는 헌법의 맨 앞자리에 위치한 “차례” 바로 다음인 21페이지에서 24페이지까지 실려 있고, 끝부분에 승인식이 있어서 다음과 같다:

“교회의 신조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한 것으로 내가 믿으며 이를 또한 나의 개인의 신조로 공포하노라.”

라고 기록되어 있다. 12신조는 교단의 공적인 신조임과 동시에 교단에 속한 모든 신자의 “개인의 신조”인 것으로 표명하고 있다. 그리고 12개항으로 되어 있는 “신조” 앞에 붙어 있는, 12신조의 “서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이 아래 기록한 몇 가지 조목을 목사와 강도사와 장로와 집사로 하여금 승인할 신조로 삼을 때에 대한예수교장로회를 설립한 모교회의 교리적 표준을 버리려함이 아니요, 오히려 찬성함이니 특별히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와, 성경 대·소요리문답은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으로 인정한 것인즉 우리 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알며 그중에 성경 소요리문답은 더욱 우리 교회 문답 책으로 채용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12신조는 “목사와 강도사와 장로와 집사로 하여금 승인할 신조” 로 삼았음을 밝히고 있고,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와, 성경 대?소요리 문답은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으로 인정한 것”과 동시에 “우리 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이 내용은 우리 헌법에 밝힌 대로 목사와 강도사 장로와 집사의 임직식과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 더 분명해진다. 장로와 집사의 임직(정치 제13장 제3조)에 5개항의 서약과 , 강도사의 인허서약(정치 제14장 제5조)에 4개항의 서약과, 그리고 목사의 임직예식(정치 제15장 제10조)에 7개항의 서약을 요한다. 그 중에서 위의 서약 중에서 각각 첫 2개항은 서로 동일 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

①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 믿느뇨? ② 본 장로회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 및 대·소요리 문답 은 신구약 성경의 교훈한 도리를 총괄한 것으로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받아 신종하느뇨?“

라고 본 교단에서 임직 받을 모든 “목사와 강도사와 장로와 집사”에게 그들의 임직 시에 물어서 확인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 헌법에 기록된 내용을 종합해 보면,

①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 및 대소요리문답(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은 본 교단의 공식적인 신조인 것이 분명하고 ②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은 본 교단에서 사역할 목사와 강도사와 장로와 집 사들이 승인할 자신의 신조인 것이 분명하고 ③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은 서로 연계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고 ④ 12신조에 대하여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은 보완관계에 있다고 보겠다.

2) 고신의 신앙고백
해방(1945년)이 되었을 때, 한국 장로교에는 두 개의 신학교가 있었다. 이북에 있었던 평양장로회신학교와 서울에서 김재준 목사가 주도하는 조선신학교가 그것이다. 그러나 원래 한국의 장로교를 대표하는 평양장로회신학교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때를 맞추어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하여 자진해서 무기 휴교에 들어갔다. 반면에 서울의 조선신학교는 신사참배 문제와 상관없이 그 기간 동안에 세워졌으며(1940) 친일파적인 인사들에 의해 주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을 더 나아가 자유주의 신학을 고수하는 인사들이 운영권을 쥐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조선신학교는 해방 전후로 독무대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신사참배로 인하여 옥고를 치르던 성도들이 출옥 후에 당시의 신학교 상황을 볼 때 조선신학교에서 목사후보생을 양성한다는 것을 용인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일제 말엽에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옥에 갇혔던 목사들과 망명 중이던 교회 지도자들은 뜻을 같이하여 보수신학의 보루였던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이어서 보수신학교를 새로 세워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의하여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1946년에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고, 1952년 10월에 이르러 결국 고려신학교롤 중심 한 고신 총회가 출범하게 된 것이다.

고신교단은 고려신학교롤 중심으로 배태되었다. 고려신학교는 해방이후 교회쇄신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되었고 해방된 조국에서 자유주의자들에게 한국교회의 장래를 맡길 수 없다는 신학적 동기에서 설립되었다. 고려신학교의 설립자인 한상동목사와 주남선 목사는 자유주의 신학을 3가지 점에서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첫째로 현실 타협적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그 시대의 조류나 대중 이데올로기에 영합한다고 보았다. 둘째로는 신앙고백적 투쟁력을 약화시킨다고 보았다. 즉 일제하에서 신사참배가 강요되었을 때 자유주의 신학은 이에 대한 저항을 약화시키거나 투쟁력을 제거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셋째로는 불신앙의 신학이라고 보았다. 이 점은 고려신학교를 설립할 때 한 학생이 신학교 개교일에 낭독한 입학식사(入學式辭)에서 분명히 밝혀져 있다.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이러한 인식 때문에 한국교회를 자유주의자들의 손에 맡길 수 없다는 것은 그들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이러한 신념으로 1946년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는 가운데서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또 이 와 같은 역사인식으로 고려신학교는 이념적으로 옛 평양신학교를 계승한다고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고신은 1969년 제19회 총회 시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와 대요리문답을 교단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채택한(1969년) 것은 17세기 당시에 작성한 신앙고백을 비교적 그대로 받아들였으나, 그 뒤 1975년 9월 제25차 총회에서 합동과 달리 34장, 35 장을 원래의 고백서에다 첨가를 시켰다. 오병세 교수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이 신앙 고백이 개혁주의 신학의 성숙한 표현이지만 18, 19세기의 선교운동과 아울러 새로운 강조점이 신앙고백에 삽입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미국판에는 제34장 ‘성령에 관하여’라는 장과 제35장에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관하여’라는 장이 첨가되어 총 35장이 되었다”라고 그 필요성을 밝히고 있다.

고신과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은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를 교리적 표준으로 삼고 있다. 다만 고신측은 우리와 달리 제34장 ‘성령에 관하여’라는 장과 제 35장에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관하여’라는 장이 첨가되어 총 35장이 되었다. 두 장이 첨가된 것올 제외하면 두 교단의 신도게요는 각 교단의 해석자에 따라 단어의 배열의 차이가 나며 그 뜻은 거의 동일하다. 다만 고신측과 합동교단의 헌법책의 배열상 위치가 다르게 실려져 있다. 고신측은 신앙고백이 제일 앞에 12신조가 제일 뒤에 편재되어 있는 반면에, 합동 교 단은 12신조가 제일 앞에 있고, 신도게요가 제일 뒷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3) 기장의 신앙고백
1948년 제 34차 총회에서 당시의 총회 직영신학교였던 조선신학교의 자유주의 신학 흐름에 대하여 제동을 걸었다. 즉 보수주의 학자들을 증원하여 자유주의 교수들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그들을 감독하기 위한 조선신학교 개혁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안은 조선신학교 측의 맹렬한 반대로 말미암아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정통 보수신학을 지지하던 교단지도자들은 1948년에 조선신학교의 자유주의 교육에 대한 포괄적인 대응책으로 창동 장로교회에 모여 서울에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 다. 이 때 설립된 신학교가 바로 장로회신학교이다.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세운 장로회 신학교는 제 35차 총회에서 별 어려움 없이 인준을 받았다. 이로 인하여 세 개의 신학교가 장로교 안에 설립 존재하게 되었고 그 이후 총회는 세 개의 신학교 문제로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급기야 세 개의 신학교를 중심으로 장로교가 세 개로 분열하게 되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다음의 글은 제35차 총회의 분위기를 잘 묘사해 주고 있다.

“1949년 4월에 열린 제 35차 총회는 교회의 일치를 위협하는 몇 개의 날카로운 문제들에 직면했다: 이미 세 조각난 경상남도 노회; 전혀 교과 과정올 개편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자유주의 지향 신학교; 총회 인준을 받으려고 하는 보수주의 독립신학교; 이제 자신들의 신학교에 의해 대표되는 각각 교회 개혁을 위하여 프로그램을 주창하고 나선 교단 내의 세 집단”

이때로부터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의 씨앗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고신 측과의 분열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장로교회는 또 하나의 분열의 진통을 겪게 되었다. 기장 측의 분립이 그것이었다. 고신 측과의 분열이 신학적인 문제와 행정적 및 정치적인 이유가 뒤얽긴 복잡한 것에 기인한 것이었다면, 기독교장로회와의 분열은 단순하고도 명백한 신학적인 문제로 인한 것이었다. 기독교장로회의 신조는 역사적 산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장로회의 신조를 만들었던 역사를 살펴보면 신조를 만들고자 했던 이유와 원인을 찾아볼 수 있게 된다. 기장의 1972년 ‘신앙고백서’ 작성의 주도자는 김재준 씨였다. 따라서 기독교장로회 의 신앙고백서에는 제시된 김재준 씨의 성경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1953년 기독교장로회가 분리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성경관의 문제였다. 이와 같이 성경관의 문제는 기장 분리와 ‘신앙고백서’ 작성의 분명한 이유였다.

기독교장로회가 연구한 20세기의 신앙고백들은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작성된 것으로 고 백이라기보다는 선언서라고 부르기에 적합한 것이다. 기독교장로회가 이런 신앙고백들을 연 구하고 이런 고백들을 모범적이라고 한 이유는 ‘그러므로 300년 동안 장로교, 개혁교회들의 표준신조로 사용해 온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오늘 한국에서 계속 사용하는 것은 부적당하다’라는 논리를 확립하기 위함이다. 전경연은 웨스트민스터 신조 뿐 아니라 12신조에 판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다시 웨스트민스터 신조나 예수교 장로회 신조를 벌어다 읽어선 안 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상으로, 기독교장로회가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게 된 경위를 살펴보았다. 경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기독교장로회가 신앙고백서롤 작성하고자 한 이유이다. 그 이유는 한국교회의 바른 신앙을 고백하기 위함이 아니라, 웨스트민스터신조를 옛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자신들 의 신학에 맞는 새로운 고백올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신앙고백은 시대의 선언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고백이며 온당한 진술이다. 따라서 성경이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도 그 가치를 발하며 진리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인 만큼, 성경에 기반한 신앙고백이라면 시대와 상관없이 그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기독교장로회 는 오늘 우리 시대에 맞는 신앙고백을 고집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에 적용될 때에야 말씀이 된다는 잘못된 성경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4) 통합의 신앙고백
통합과의 분리는 WCC에 대한 신학적, 교리적 입장의 차이였다. 195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2회 총회록에 따르면, 에큐메니칼연구위원회(위원장 한경직 목사, 서기 정규오 목 사)의 보고서에 위원회의 입장을 말하되, “친선과 협조를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과거에나 현재에도 참가하고 있으니 계속 참가하기로 하며, 단일 교회를 지향하는 운동에 대하여서는 반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듬해인 1958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3회 총회는 “국제적인 교제와 사업에 관하여 우리 교회와 신앙 처지에 손상이 없도록 한다”고 결의하였다. 그리고 1959년 제4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WCC문제로 인하여 총회장이 정회를 선언한 후 (9월 28일), 연동측이 총회정회 후 속회(11월 23일)를 기다리지 못하고 이탈(9월29일 속회) 하는 아픔이 있었고, 합동측은 정해진 날짜에 총회를 속회(11월 23일)하여 “WCC를 영구히 탈퇴하고, 소위 WCC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기로” 결의하였다.

박형룡 박사의 WCC에 대한 입장은 통합측이 분리되기 l년 전 1958년 <신학지남>에 발표된다. 박 박사의 견해 표명과 더불어 장로교회는 WCC에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의 그룹이 극명하게 나뉘게 되었고, 견해를 달리하는 두 그룹은 이후 서로 총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문제를 두고 대치하게 되었다. 결국 1959년 9월 28일 대전에서 열린 제44회 대한 예수교장로회 총회는 WCC문제로 양분된 두 파의 세력 간의 치열한 다툼으로 이어졌고, 마침 경기노회의 총대를 받아들이는 문제를 두고 격돌하게 되었다. 이에 당시 총회장이었던 노진현 목사는 중경총회장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을 숙의해 줄 것을 제의하고, 중경총 회장들의 제의에 따라 I I월 23일에 서울 승동교회에서 속회하기로 하고 정회하였다.

이후 총회의 결정에 불만을 품은 회원들이 총회가 정회된 이튿날인 9월 29일 아침 대전에서 특별열차를 타고 서울로 와서 서울의 연동교회에서 전필순 목사의 사회로 단독 속회를 열었다. 이 모임이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제44회 총회 결의대로 11월 23일에 서울 승동교회에서 총회속회를 기다리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예정대로 정회된 총회가 11월 23일 승동교회에서 속회되었을 때 연동측 총대들은 참석하지 않고 소위 합동측 총대들만 참석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9월 29일 단독으로 속회했던 연동측 총대들은 이날 새문안교회에서 한경직 목사의 사회로 총회를 열었다. 이리하여 고신(1952년)과 기장(1953년)의 분열 후에, 다시 통합(1959년)이 분열하는 역사적인 아픔을 갖게 되었다. 1959년 총회 분열의 중심에 WCC 문제가 있다는 것은 역사가들이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분열의 조짐은 이미 193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중반에 감리교회에서 한국선교 희년을 기념하여 <아빙돈 단권성경주석>을 번역하여 출판하게 되었는데, 이 주석에 장로교 목사 몇 명이 참가했는데 그중에 한경직 목사는 김재준 목사 등과 함께 주석 출판에 관여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총회에서 조사를 명했을 때, 한경직 목사는 피의자의 자리에 서고, 박형룡 박사는 조사위원의 자리에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53년 기장이 분열하기 전, 한경직 목사는 조선신학교에서 김재준, 송창근 목사와 함께 교수하는 일에 동참 했다. 한경직 목사는 복음주의 신앙을 가졌으나 진보적인 인사들과 계속 교제하고 협력해 왔으며, 1959년에는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찬동하고 통합측 분리를 주도한 인물이 되었다.

통합측 신앙고백서는 전체 6부로 나뉘어 있으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부 사도신경”이다. 1부에는 사도신경이 실려 있으나 새 번역을 사용하여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고백하던 사도신경과는 다르게 번역되어 있다.
“2부 신조”로 되어 있다. 2부에는 12 신조가 수록되어 있다.
“3부 요리문답”이다. 3부에는 소요리문답 107문이 실려 있다.
“4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이다. 4부에는 1647년 제정된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 33장외 에 제34장과 제35장을 추가 수록하고 있다.
“5부 대한예수교장로회신앙고백서”이다. 통합측에서 1986년에 재정한 신앙고백서를 담고 있으며, 서문 외에 전체 10장을 수록하고 있다.
“6부 21세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이다. 1997년에 작성되었으며, 3개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Ⅰ. 예배용”은 짧은 고백서를 담고 있고, “II. 21세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는 전체 6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바로 뒤에 “우리의 사명” 4개를 수록하고 있다. “III.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381)”는 381년 범교회적공의회 제2차 회의에서 제정한 신조를 수록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통합측의 1986년 신앙고백서를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1986년에 발표된 통합측의 신앙고백서는 서문 외에 전체 10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고백서의 공식 명칭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이다. 1986년 통합측 신앙고백서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외적 특정은 그 내용의 전개 순서이다. 이 고백서는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와 같이 “성경, 하나님,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순서대로 언급되지 않고, “성경,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인간”의 순서로 그 내용을 전개시키고 있다. “성령”이라는 하나의 항목이 따로 있는 것도 이러한 전개와 그 맥을 같이 한다. 이 부분은 나중에 더 자세하게 다룰 내용인데, 통합측 신앙고백서는 그 논리 전개가 성경이 말하는 “창조-타락-구속”의 순서를 따르고 있지 않다.

1986년 통합측 신앙고백서는 제l장에서 “성경”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데, 모두 7개 절로 그 내용을 정리하고 있다. 그 첫 번째 것은 성경을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는가에 관한 것 이다. 이 신앙고백서는 1장 l절에서 “우리는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대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임을 믿는다”라고 언급하고 있고, 3절에서는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 바로 다음에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제1장 성경]
3.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 성경은 인간의 말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요, 따라서 거기에는 인간적 요소와 신적인 요소가 함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자가 지니고 었던 시대적이며, 문화적인 배경 등 인간적인 요소들을 그의 섭리를 성취하기 위하여 사용하셨으므로 성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신앙고백서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인간적 요소”와 “신적인 요소”가 함께 있음을 분명하게 밝혀 말하고 있다. 이것은 신적인 계시가 인간을 통하여 기록되었다는 것과 다른 의미이다. 더 나아가서 이 신앙고백서는 성경 “안에” 신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이 신앙고백서가 표현하고 있는 “성경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과 “성경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분명 다른 표현이다. 이 고백서는 이와 같이 성경 안에 “신적인 요소”와 는 구별되는 “인간적 요소”가 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 매우 낯선 것들이다.

우리는 이 고백서에서 성경에 대해 말하는 것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칼 바르트 (Karl Barth, 1886-1968)의 “성경관”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된 말씀’과 ‘기록된 말씀’으로 나누어 이해하였다. 바르트는 이러한 내용 에 대해서 자신의 <교회교의학>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성서는 따라서 그 자체 그 자체 안에서 하나님의 일어난 계시가 아니니, 실로 교회 선포 그 자체가 그 자체 안에서 대망된 미래의 계시가 아닌 것과 같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또 우리가 듣게 되는 성서는 이미 일어난 계시를 중언한다. ... 다시 말하거니와 성서 그 자체는 그 자체 안에서는 하나님의 일 어난 계시가 아니며,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됨으로써 성서는 하나님의 일어난 계시를 중언하고 또 성서는 중언의 형태 안에서의 하나님의 일어난 계시이다.”

그는 계시는 ‘행동’인 반면, 성경은 ‘기록’이라고 생각하였고, 그러기에 계시는 직접적인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성경은 “인간의 말”이라고 여겼다. 즉 계시는 신적인 요소로 보고 있는 것이고, 이 계시가 기록된 것이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에는 ‘신적인 요소’와 ‘인간적 요소’가 함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서 본다면, 계시는 성경을 낳게 되고, 그러기에 계시는 성경보다 궁극적 우월성을 갖는 것이 된다. 성경과 계시를 구분하는 일관된 기독론적 사고는 칼 바르트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의 자신의 <교회교의학> 1권 하나님 말씀론, <교회교의학> 2권 신론, <교회교의학> 3권 창조론, <교회교의학> 4권 화해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정되었던 구속론(종말론)을 기독론적 사고를 가지고 일관되게 전개 해 나가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전개를 하게 되면 “창조-타락-구속”의 내용 전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화해론’으로서의 그리스도 사건이 전체의 중심이며, 이것에 모든 다른 것들이 모이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트 신학은 ‘기독론적인 보편주의’라고 불리게 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그리고 화해론적으로 이해하는 바르트의 신학은 우리가 살피고 있는 신앙고백서에 매우 잘 드러나고 있다.

“[제3장 예수 그리스도]
2.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되신 그리스도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이다. 이 계시는 자연에 나타난 계시나(시 19:1-4, 롬 1:20), 구약성경의 예언적 계시(히 1:2)이상이요, 모든 계시의 완성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이므로 사람은 그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없고(요 1:18, 14:9), 그가 보여 주신 이상의 하나님을 알 수도 없다. …그리스도교는 그와 같은 요소를 가지면서 도 그 신앙의 근거를 오직 그리스도의 계시에 두는 계시종교이다.
3.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대속의 죽음은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드린 화목제물이었으며, 범죄로 인해 멀어졌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케 하셨다.”

바르트의 신학을 파악한 이후에, 1986년 통합측 신앙고백서를 보게 되면, 그 전개 순서 와 내용이 “기독론적인 보편주의”와 “화해론”에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 하게 된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이중 예정(선택과 유기)을 말하고 있으며, 그러기에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는 이 부분을 “3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부분에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에서는 구원을 “하나님의 택하심”에서 시작하여 고백해 나간다. 그러나 1986년 통합측 신앙고백서에서는 구원을 “그리스도의 화목케 하심”에서 시작한다. 또한 이 고백서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구원”이나 “하나님의 유기하심”의 개념을 언급하 지 않는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의 다음 내용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 br/>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 제3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3.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의 작정으로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생을 얻도록 예정하시고, 다른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선정하셨다.
6.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정하신 것처럼 그의 뜻의 영원하여 지극히 자유로운 경영에 의해 그들로 영광에 이르도록 하는데 있어야 할 모든 방편 들을 먼저 정하셨다. …그러나 택함을 받은 자 외에는 다른 아무도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을 받지 못하고, 유효적 부름을 받지 못하고 칭의 양자 성화 구원되지 못한다.”

통합측 신앙고백서는 위에 인용한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와는 달리 유기와 관련된 내용을 버리고,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한 내용을 약화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칼 바르트에게서 전형적으로 발견되는 점이다. 바르트는 기독론의 두 본성을 예정론에 적용시킨다. 그는 여기에서 ‘선택’과 ‘유기’의 대칭 구조로 구원을 설명하지 않고 일원론적으로 설명하였다. 즉 그리스도만 선택과 유기를 당하시며, 그러기에 모든 사람은 유기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예정론은 비록 스스로 보편예정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여도, 보편예정을 암시하고 있다. 바르트는 이중 예정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선택 받았고, 다른 이들은 버림받았다고 이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이 ‘버림을 위해’ 자신을 택하시고, ‘선택을 위해’ 인간을 택하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바르트는 하나님의 예정을 시간 이전의 영원한 영역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본다. 즉 영원 이전에 타락한 인간을 의로운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 스스로 저주와 죽음, 그리고 지옥을 맛보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예정론은 “타락전 예정론"(supralapsalism us)에 속하며, 철저히 기독론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인 이중 예정론을 수용하기는 하지만, 이것을 다시 일원론적인 것으로 수정하고 있다.

구원과 관련된 바르트의 인식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그는 “창조-타락-구속”의 질서를 “타 락-은총-창조”의 순서로 바꾸어 놓고 있다. 또한 더 나아가서 그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 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되었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만인이 구원을 얻은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만인 화해론(A llversoehnungslehre)와 만인 구원론(Allerloesungslehre)을 구분한다. 그러나 바르트가 명시적으로 보편구원론을 주장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은총의 선택론은 낙관주의적이며, 그러기에 필연적으로 보편 구원론으로 추론되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짧은 요약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같은 장로교회 안에서도 신앙고백의 차이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합동측과 고신측은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와 대소요리문답을 그대로 교단의 신앙고백으로 수납하고 있다.

합동측의 경우는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미국의 보수장로교회들이 그러하듯이, 일부 수정 외에 그대로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고 있으며, 고신측의 경우, 신도게요 전체 33장 외에, 제34장과 제35장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 다른 점이지만, 전체적으로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고 있다 는 점 이 합동측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기장측은 이미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를 버리고, 새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것이 확인되었고, 신학적으로도 바르트적이며 자유주의 신학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통합측의 경우는 12신조와 웨스트민스트 표준문서들을 부인하지는 않았으나, 새 신앙고백서의 작성으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그 새 신앙고백서의 내용에 따라 과거의 문서들 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표준이 되고 말았다는 점에서 바르트 신학과 성경비평학을 수용하는 교단의 정체성을 살펴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이유 때문에 장로교회 또는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교단들 사이에서도 엄청난 신학적 차이가 있음을 각 교단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 고 교단의 이러한 신앙고백의 분위기 속에서 교육을 받고 교단의 신학교에서 양육되는 목사 후보생들과 교단의 목회자들의 영적분위기 또는 실제 설교사역에 있어서 제기되는 심각한 문제들이 지적되어야한다고 하는 점이다.

5. 결 론

원래 한국장로교회는 초창기부터 보수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해서 자라온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한국장로교회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인데, 초창기에 와서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은 한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보수주의적 신앙을 가진 분들이었다. 특히 유일한 장로교 신학교였던 평양신학교의 보수주의적인 성격은 설립자인 마포삼열 박사의 회 년 기념 연설 가운데 “나는 사도 바울이 결심하였던 바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이외는 다른 것은 전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는 말속에 잘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보수주의 신학의 근저에는 성경의 무오를 철저하게 강조하는 성경관이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그들은 이미 받은 보수신앙 고수를 외쳤던 것이다.

이러한 정통 보수주의 신학 위에 세워진 장로교회는 점차로 시간이 흐르면서 자유주의 신학에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이것은 초기 선교사들이 전수해 온 보수적인 성경관과는 상당히 다른 서구의 현대적 성경해석이나 관점이 한국장로 교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김의환 교수는 한국의 장로교회에 자유주의 신학이 침투하게 된 경위를 (1)잠복기 (2)발아기 (3)성장기 동 3단계로 설명한다: 첫째로 잠복기는 1934년에 있었던 <신학지남> 권두언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를 말하며 둘째로 발아기는 1934년에서 1940년까지 즉 조선신학원이 설립될 때까지를 의미하고, 셋째로 성장기는 조선신학원이 생긴 뒤에 조선신학교 출신들이 한국 신학계에 진출한 이후를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다.

기장 측과의 분열이 신학적인 문제에 기인된 것이라면 그것은 단연 자유주의 신학이 문제의 핵심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분열의 원인을 그 근원부터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 신학과 정통 보수주의 신학의 신학적인 갈등과 대립을 발생 초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이다. 물론 이러한 신학적인 갈등이 본격적으로 표면화 된 것은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이다. 1930년대 이전에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두드러지게 내놓고 한 국교회 앞에 자기의 자유주의 신학을 학적으로 발표한 적이 없었다. 즉 노골적으로 자신들 의 신학을 밝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1920년 초 일본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들이 1920년대 말부터 한국에 귀국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한국에 돌아와 세계 신학사조를 한국교계에 소개하면서 한국에는 소위 신학적 다양성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에서 신학을 배우고 들어온 송창근 채필근 김재준과 같은 인물들은 진보적인 신학을 소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신학은 정통 보수적인 신학과는 배치되는 것으로서 당시 이러한 신학적 갈등이 처음으로 표면화된 것은 평양 산정현교회의 담임이었던 송창근 목사의 사임이었다. 강규찬 목사가 은퇴하고 그의 후임으로 들어온 송창근 목사의 신학이 기존 보수주의 신학에 기초하여 신앙생활을 한 성도들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었으니 그 교회의 장로였던 조만식 장로 동 보수적인 교우들의 반대로 말미암아 결국 사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로부터 한국교회의 보수, 진보 간에 간격이 벌어지고 있었음을 예시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기장 측의 문제는 신학적인 문제였음을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신학 적인 문제는 기장 총회 안에서도 쉽게 가라앉지 않고 지도자들 간에도 계속해서 문제가 될 것임을 예시하고 있다. 또한 분립하면서 선교사로부터 자립을 강조하던 기장측은 1955년에 캐나다 선교회와 협력관계를 수립하였다.

한국장로교회는 올해로 총회설립 100주년을 기념하게 된다.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로 나라 잃은 슬픔을 맛보았고, 다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이를 거부하여 폐교한 1938년까지 평양신학교는 칼빈주의 보수정통신학을 가르쳤고, 평양신학교가 폐교한 후 일제의 허락 을 받아 설립된 조선신학교(1940년)의 신학적 노선에 반대하여 고려신학교(1946년)가 독자 노선을 취한 것은 총회적인 아픔으로 남게 되었으나 장로회신학교의 설립(1948년)으로 폐교 전 평양신학교의 신학전통을 이어가게 되었고 다시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가 해체 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가 정식으로 총회직영신학교로 출 범하게 되었으며, 조선신학교는 끝내 신학적 자유주의 노선을 고집하여 기장을 세우기에 이르렀다(1953년).

박형룡 박사는 <신학지남> 1976년 가을호에 실린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라는 논문에서 한국장로교회의 출발에 대하여, “대한 예수교 장로회는 청교도적인 영미 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선교를 받아 출발하고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교의와 규례의 표준으로 채용 하여 수행함으로 한국에서의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의 교회가 된 것이다"라고 말하고, 신학교와 교단 신학의 특징에 대하여, “대한 예수교 장로회의 신학적 전통은 청교도적 개혁주의 장로교회의 그것이다. 그것은 구주 대륙의 칼빈 개혁주의 신학에 영미의 청교도적 특징을 가미한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다”라고 제시한다. 박형룡 박사는 역사적 개혁주의 정통 칼빈주의 신학이 교대적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말하고, 여기에 청교도 장로교 신학을 덧 붙여서 한국장로교회의 특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박형룡 박사가 자신의 저서 외에 주로 자신의 입장을 논문으로 발표한 <신학지남>(1975년)에는 “신학지남의 한국신학사적 의의”가 실려 있다. 박 박사는 이 논문에서 <신학지남>의 창간호부터 시작하여 자신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까지의 장로교회 신학사상의 역사 적 과정을 개관한 후,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를 교리적 표준으로 신봉하는 한국 초대 장로회 선교사들의 신학은 청교도적인 동시에 개혁주의적”이라고 제시하고, “이 성경적 보수주의 신학은 그 내용 성질에 있어서 칼빈개혁주의 정통신학”이었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한 다.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우리의 선배들이 한결 같이 어렵고 힘든 여건 속에서도 역사적 개혁주의, 정통 칼빈주의, 청교도 장로교신학의 전통을 붙잡고 오직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목회를 지향해온 결과라고 생각 된다. 특히 한국장로 교회는 WCC 이전 역사적 개혁주의 전통을 지켜온 신학과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 하다. 이제 후학들은 선배들이 섰던 정통 칼빈주의, 역사적 개혁주의의 터 위에 서서 새 시대를 호흡하며, 미진한 부분들을 개척하는 지혜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