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김상복, 할렐루야교회

일반자료      
쓰기 일반 자료 초기목록
분류별
자료보기
교리 이단, 신학 정치, 과학, 종교, 사회, 북한
교단 (합동, 고신, 개신, 기타) 교회사 (한국교회사, 세계교회사)
통일 (성경, 찬송가, 교단통일) 소식 (교계동정, 교계실상, 교계현실)

[인물] 김상복, 할렐루야교회


[목자의 고향] 김상복 할렐루야교회 원로목사

2011.10.12


[미션라이프] 나는 평양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나에게 고향을 꼽으라면 부산과 평양, 그리고 미국을 들 것이다. 현재 부산 영도제일교회는 우리 가문의 땅 위에 세워져 있다. 나의 부모님이 사시던 집터, 조부모 집, 고모님 집, 둘째 형님 집, 6·25전쟁때 우리 형제들이 평양에서 피난 와서 짓고 살았던 ‘하코방(판잣집)’ 터까지, 우리 가족들의 땅이 다 교회가 된 것을 우리는 감사를 드리고 있다.

친할머니는 1900년 호주선교사들이 처음으로 부산에 세운 일신여학교 첫 학급 여섯 명 학생 중 한 명이었다. 이 학교 교장인 독일계 선교사 넬 겔슨 목사를 통해 할머니가 처음 예수를 믿게 됐다. 부산 영도가 친가의 뿌리라면 부산의 기장은 외가의 뿌리다. 놀랍게도 친할머니를 주님께 인도하신 겔슨 선교사가 외할아버지를 전도하셨다. 하루는 겔슨 선교사가 전도여행 중 저희 외가에까지 와서 나무 밑에서 고사를 지내는 동네 사람들의 모습을 보다가 외할아버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무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신데 왜 나무 앞에서 절을 하십니까?” 이 한 마디가 외할아버지의 영혼의 눈을 뜨게 했다. “나무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렇다면 그분을 섬겨야지!” 그날로 하나님을 믿기로 정하고 부산으로 나가 큰 톱을 빌려다 나무를 잘라버리려 했다. 동내 남자들의 도움을 청했으나 재앙이 내린다고 펄쩍 뛰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혼자서 오랜 시간을 들여 잘랐다. 고목이 넘어지자 썩은 나무 복판 구멍에서 한 자나 되는 지네가 어슬렁거리며 기어 나와 논두렁으로 사라졌다.

“그동안 제사상에 바쳤던 음식을 저 놈이 다 먹었었구나.” 외할아버지는 완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섰다. 그 어촌의 최초 기독교인이 됐다. 주일이 되면 깨끗하게 빨아 다딤질로 반짝이는 흰 옷들을 입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9남매와 가정부까지 12명이 한 줄로 논둑을 걸어 10리가 넘는 고개 넘어 교회로 가는 모습은 동내의 장관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주일 아침에도 때가 묻은 옷을 입고 논두렁에 앉아 일은 하다가 외가의 주일행렬이 나타나면 “우리는 언제 저렇게 깨끗한 옷을 차려 입고 저 집안처럼 쉬어볼꼬!”하며 부러워했다고 한다. 결국 외가는 울타리 동편에 교회(현재 대항교회)를 세웠다. 이 어촌은 나에게는 두 번째 고향이다. 내 사촌들이 지금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평양은 내 영혼의 뼈대를 강하게 세워준 고향이다. 평양에서 사업에 크게 성공하신 큰 아버지의 요청으로 막내 동생인 나의 아버지는 형의 사업을 돕기 위해 어린 세 아들을 데리고 1934년 부산에서 평양으로 이사를 가셨다. 그래서 누이를 포함해 나와 내 동생들은 다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사람이 됐다. 아버지는 신앙이 별로 없으셨던 것 같았다. 그러나 외가는 종종 30일씩 금식기도를 하시는 분들이 적잖았다. 어머니는 평양에서 아홉 자녀를 키우시면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가정예배를 인도하셨다. 살을 예이는 추운 겨울 아침에도 거르지 않으셨다. 찬송, 성경, 기도, 주기도문으로 이어지는 가정예배에서 어머니는 아홉 명의 이름을 일일이 불러가며 날마다 기도하셨다. 우리 가족은 일제의 신사참배에 대해 죽기까지 저항했던 주기철 목사님이 목회하시던 평양 산정현교회에 출석했다.

지금도 평양을 생각하면 통스러웠던 날들이 떠오른다. 일제가 물러가자 공산정부가 들어서서 예수 믿는 이들이 학교에서 핍박을 받았다. 주일날 교회대신 학교에 오라는 것이었다. 예수 믿은 아이들은 교회로 갔다. 선생님은 월요일 아침이면 교실 앞으로 아이들을 불러 놓고 때렸다. 심지어 쇠파이프로 아이들을 때리기도 했다. 고통 속에서 한명씩 교회를 포기했다. 그러나 산정현교회 아이들을 항복하지 않았다. 한번은 나를 학교 뒤 언덕 위로 끌고 가 우리 반 아이들이 몰매를 주기도 했다. 이같은 고통은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이어졌다.

6·25전쟁으로 유엔군이 중공군의 참전으로 후퇴를 하던 어느 날 밖에서 놀다가 집으로 막 들어오자 두 형과 누이가 보따리를 들고 어머니 앞에서 작별인사를 하고 어딘지 떠나려 했다. 내가 어머니 앞에 서자 어머니는 나를 바라보시더니 “이 애도 데려가라”고 하셨다. 형은 나에게 “가자”고 했다. 평생 이산가족이 되는 순간이었다. 우리 형제는 피난민들과 함께 천신만고 끝에 12월 어느 날 본래의 고향 부산 영도에 도착했다. 갑자기 나타난 네 명의 10대들을 고모 집에서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나는 따로 떨어져 시내에 사시는 이모집으로 보내졌다. 이모님 가정은 고려신학교가 있는 부산남교회에 다녔다. 나보다 어린 아이가 다섯이나 되는 이모집에서 중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고독을 새벽기도로 달랬다.

6·25 전쟁 중 고신교단은 학생들을 철저하게 훈련했다. SFC라는 학생운동이었다. 한상동, 박윤선, 한부선, 박손혁, 이상근, 한명동, 박손혁, 안용준, 이약신, 전성도, 황철도 목사 등 순교적 신앙을 갖고 계신 분들의 불타는 설교와 기도가 한국교회에 제2의 부흥 열기를 일으켰다. SFC 하기와 동기수양회는 신앙의 불가마였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하던 중고등학생 시절 나는 목숨을 건 신앙을 가진 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믿음생활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또 대학생 시절에는 낭비 없이 살아가는 신앙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나는 철저하게 주일성수를 했다. 또 새벽기도, 수요예배, 토요 철야까지 빠지지 않았다.

나에게는 미국이 또 하나의 고향이다. 대학 졸업 후 유학을 가 26년을 그곳에서 살면서 세 딸을 낳았다. 목회를 하고 교수생활도 했다. 신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교회에서 9년을 목회했다. 한인교회에서는 11년간 목회했다. 미국 신학교에서 19년간 교수로 있었다. 나는 미국사람들 속에서 생활화된 신앙을 배웠다. 차분하면서도 확실한 신앙과 일상생활, 균형잡힌 인격과 섬김으로 몸에 배인 미국 신앙인들의 아름다움을 교회와 신학교에서 느끼며 볼 수 있었다. 미국은 나에게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한 좋은 고향이 돼주었다.

1984년 나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해오던 어머니와 동생들을 평양에서 만났다. 그 기쁨, 그 감사, 그 찬양,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다. 나는 너무 좋아 울음 대신 활짝 웃었다. 어려서 오르내리던 모란봉, 을밀대, 대동강, 보통강, 산정현교회 자리, 내가 수없이 매를 맞던 학교 건물 등 잊을 수 없는 평양, 평양은 나에게는 한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이자 나의 고향이다. 그리고 나에게 참된 영적인 고향은 나의 어머니이고 주기철 목사이시다.

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






김 목사는 서울대 문리대, 미국 훼이스신학대학원을 거쳐 그레이스신학대학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워싱턴신학대 조직신학 교수, 볼티모어벧엘장로교회 담임목사 등을 거쳐 1990년 할렐루야교회에 부임했다. 지난해 말 할렐루야교회 원로목사가 된 그는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세계복음주의연맹 회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