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근본주의 신학의 흐름
근본주의 신학의 근간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개신교 비공개 질문 77건 질문마감률100% 2011.09.10 01:17 답변2조회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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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 신학은 19C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발로 20C초에 형성되었습니다. 근본주의 신학이 형성된 데에는 뚜렷한 근간은 없으며, 세대주의, 프린스턴 신학 등의 영향을 받긴 했으나 그것들 역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세대주의, 프린스턴 신학 등은 근본주의와 다르며, 단지 필요한 요소들만 최소한으로 취했을 뿐입니다.
근본주의의 교리는 5개 항목으로 요약됩니다(성경무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스도의 재림).
이처럼 근본주의는 자유주의로부터 기존의 보수성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형성된 만큼 새로운 사상이나 교리가 추가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기존의 것을 지키려했던 시도들이었기에 근본주의 신학의 뚜렷한 근간은 없습니다. 역사적 상황과 필요에 의해서 형성된 신학이라고 보시면 될것 같습니다.
아래에 근본주의 신학의 "신학적 배경", "발전", "개요", "약점" 등에 대해서 글을 올려보니 참고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현대사에서 근본주의가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 미국교회와 사회를 크게 병들게 했습니다. 특히 남침례교단에 아직도 근본주의가 가장 강하게 남아있고, 과거 이들이 흑인종차별을 부추기고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한국교회 내에서도 이 근본주의가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미국이야 100년전부터 시작해서 그래도 지금은 많이 사그라든 모습이지만, 한국은 이제 시작입니다. 한국교회 내에 만연한 율법주의와 우월의식, 그에 따른 정죄, 독단과 배타성, 표리부동 등이 근본주의에서 비롯되었고, 앞으로는 더욱 심해질 전망입니다.
미국교회는 근본주의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데에만 100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해왔는데, 한국교회는 어찌 될런지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안티들이 급격히 많아진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닙니다. 한시가 급하게 근본주의의 옷을 벗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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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 신학
근본주의는 극단적으로 서로 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 지지자들은 “근본주의가 원칙적으로 기독교 자체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근본주의는 성서와 역사적 기독교 신조를 믿는 현대 복음주의의 하부 그룹이요, 한 지류이다.
반면, 비판자들은 근본주의를 경멸의 뜻으로 사용하며, 비교화주의, 분리주의, 왜곡된 기독교로 평한다.
근본주의는 현대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주고 있다. 편협하고 논쟁 지향적이며, 분파주의적인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최근 근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근본주의에 대한 종래의 이해는 사회학적 해석이 일반적이었다. 고사적(枯死的) 삶의 방식을 극단적이며 필사적으로 옹호하는 것으로, 그리고 사회적 책임에 무관심한 반사회주의자 또는 분리주의자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샌딘(E Sandin)은 근본주의를 신학적이며 교리적으로 해석하였고 1980년대 들어 마스든은 그것을 문화적인 면에서 고찰함으로써 근본주의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혔다.
1. 근본주의의 신학적 배경
근본주의란 말은 하나의 특정 집단을 지칭하기보다는 넓은 범위의 지성적이며 종교적인 흐름을 가리키고 있다.
일반적으로 근본주의가 1910년대, “근본적인 것들”이 출판되던 기간(1910-15)에 시작된 것으로 본다. 그 이전에는 복음주의자와 근본주의자 또는 보수주의자와 근본주의자가 구분되지 않았다.
“근본적인 것들”이 출판된 후 극우파 보수주의자들을 근본주의자로 불리게 되었다. 근본주의라는 용어는 1920년 미국 북침례교 대회에 참가한 침례교 보수파를 가리키기 위해 침례교 잡지 편집자 로스(C Laws)가 처음 사용하였다.
로스는 근본교리를 위해 전쟁을 치룰 각오가 된 사람들을 근본주의자로 규정했지만 근본주의자 자신들은 근본주의자라는 명칭보다 보수적 복음주의자라는 명칭을 선호한다. 근본주의는 일반적으로 극우파 보수주의를 말한다.
근본주의의 뿌리에 대한 해명도 다양한데, 사회학적 해석은 1970년대 이전까지 지배적인 견해로서 근본주의를 사회적 부적응과 도시와 농촌 간의 문화적 갈등의 파생물로 파악하고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보수주의자들을 근본주의자로 보는 입장이다.
리버(R. Niver)는 근본주의가 미국 농촌문화 대 도시문화의 충돌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교리적 해석은 근본주의를 진정한 종교운동으로 간주하고 그 뿌리를 순수한 교리 전통에서 찾는 것이다.
1970년대초 샌딘은 “근본주의의 뿌리”를 출간했는데, 근본주의가 1920년대 이후에도 소멸되지 않고 강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사회학적 해석을 논박하였다. 그는 전천년설적인 천년왕국 운동과 프린스톤 신학이 근본주의를 이해하는데 단서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샌딘은 근본주의의 근원을 세대주의와 프린스톤 신학으로 보았다. 그의 의하면, 근본주의는 19세기의 서로 연합될 수 없는 두 신학의 조류, 즉 세대주의와 프린스톤 신학이 1918년도까지 공동의 적이던 현대주의 및 자유주의와 싸우려고 공동전선을 펴기 위해 형성한 일종의 연합운동이라는 것이다.
세대주의적 천년왕국주의자들은 프린스턴 신학으로부터 성경무오 교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샌딘의 주장은 근본주의 운동을 지나치게 좁은 의미로 정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는 1920년대 근본주의가 보였던 전투적이고 반현대주의적 현상들을 간과하였다.
한편, 이를 보완하여 문화적 해석이 제기되었다. 즉 1차 세계대전 이후 문화적 위기의식이 근본주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근본주의를 일차적으로 종교운동으로 이해하면서도 정치, 사회, 문화적인 측면을 주목한 것이다.
근본주의를 20세기초 미국의 환경에 의해 독특하게 형성된 복음주의 기독교의 변형으로 보았다. 근본주의자는 새 문화에 항거하고 과거 생활의 유지를 원하는 보수주의자라는 것이다.
마스든에 의하면, 근본주의는 기독교를 현대사상 속에 집어넣으려는 현대주의자들에게 대항한 운동으로서, 여러 가지 서로 모순되거나 절대로 일치할 수 없는 전통과 흐름의 모자이크였다.
그는 근본주의의 중심신학을 형성한 것은 부흥회주의와 경건주의 전통이며, 여기에 성결운동과 프린스톤 신학의 전통이 첨부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19세기 후반, 미국을 지배하던 상식실재론이 근본주의 사상의 토대가 되었고 전천년주의자들이 근본주의 형성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2. 근본주의의 발전
미국교회가 처음 받아들인 신학은 청교도들의 칼빈주의(개혁주의)적 보수주의 신학이었다.
그러나 19세기말 미국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의 득세 일변도로 변하여 갔다. 종교개혁 정신, 특히 성서의 절대권위는 과학과 인간이성의 심판으로 빛을 잃고, 고등비평가의 비판으로 해부되고 찢겨져 나갔다. 그리하여 미국의 기독교는 합리주의 여과를 거쳐 하나의 문화종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신학적 좌경화에 대한 반동으로 미국교단에서는 두 가지 운동이 태동되었다. a) 신학적 근본주의 운동이요, b) 경건주의 계통의 은사운동이다.
근본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준 것은 19세기 부흥운동이었다 1878년 나이아가라 성경대회에서 채택된 나이아가라 신조는 근본주의의 중심적인 신앙고백이 되었으며, 1895년 대회에서는 근본주의라는 용어가 성서해석의 기본입장을 진술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근본적인 것들(The Fundamentals)”이라는 소책자가 발간되던 시기를 근본주의 시작으로 간주하는 것이 통설이 되었다.
"근본적인 것들" 소책자는 1910-15년간 유럽과 미국 신학자들의 공동작업으로 총 12권이 출판되었다. 모건, 위필드, 토레이, 어드만 등 저명한 보수주의 신학자와 설교가들이 성서의 영감과 권위,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신성, 초자연적 이적과 대속적 죽음, 육체적 부활과 승천을 기독교신앙의 근본원리(5개조)로 간주했다.
영어사용권의 목사, 선교사, 평신도 지도자 등에게 무료로 300만부 이상 배포되었다. 근본주의 운동은 20세기 초반을 거쳐 조직화되었다. 1910년 미국 북장로교회 총회는 근본주의자들의 영향력에 의해 5개조의 교리를 기독교의 본질적 신앙으로 선언했다. (1916, 23년 총회에서 재확인했다.)
근본주의자와 자유주의자는 포스딕 사건을 통해 첨예하게 대립했다. 포스딕은 침례교출신 자유주의 신학자요, 저명한 설교가였다. 뉴욕 제일장로교회 초청목사로 활동하면서 1922년 6월 “근본주의자들이 승리할 것인가?” 제목의 설교를 통해 자유주의측의 공격을 주도했다.
그는 자유주의자들도 기독교인임을 강조하는 한편, 근본주의자들의 편협과 불관용을 비판했다. 반면, 메카트니는 보수주의측의 반격을 선도하여, “불신앙이 승리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포스딕에 대응했다. 그는 자유주의가 교회를 점차 세속화시키고 있으며, 저지하지 않으면 새로운 종류의 기독교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편, 1924년 총회 직후, 자유주의 측의 주도로 “어번 선언”이라 불리는 문서가 150명의 서명과 함께 발표되었는데, 총회가 어떤 교리를 본질적인 것으로 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것과, 총회가 선언한 5개조의 교리를 부정하는 내용이었다.
또한 성경무오의 교리를 매우 해로운 교리로 간주했다. 어번선언을 둘러싸고 찬반입장이 첨예하게 대립, 논쟁이 계속되었고 장로교가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1919년 북침례교회, 남침례교회, 캐나다 침례교회는 필라델피아에서 세계기독교 근본주의 협회를 창립하였다. 목적은 문서, 자유주의자와의 논쟁, 성서대회 등을 통해 미국인의 신앙생활의 우선순위를 성서적 기독교에 두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1923년 침례교성서연합을 조직하였고 1932년 근본주의 침례교단이 창립되었다.
근본주의 운동은 1920년대 절정을 이룬 후,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유로는 a) 현대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패배한 것과 b) 근본주의 운동의 내부갈등과 분열이었다.
1925년 근본주의자와 진화론자의 대립으로 일어난 원숭이 재판에서, 고교 교사가 학생들에게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을 금한 테네시 주의 법령을 위반한 혐의로 진화론을 가르친 교사가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에 대해 언론과 여론은 근본주의를 비난하고 현대과학에 대한 근본주의자측 변호인의 무지를 폭로하였다. 이 재판의 여파로 근본주의자들은 몽매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고 교권투쟁에서도 패배하여 교단 주도권을 상실하여 소수파로 밀려나게 되었다.
한편으로 근본주의는 신복음주의와 전투적 근본주의로 분리되었다.
신복음주의는 근본주의자들의 논쟁지향적이며 반지성주의적인 경향과 사회 문제에 무관심한 태도에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해롤드 오켄가, 칼 헨리, 빌리 그레이엄 등의 지도 아래 크게 성장하였다.
또한 근본주의는 전투적인 근본주의와 온건한 근본주의로 나뉘어졌다. 전자는 자유주의를 관용하는 교단으로부터 분리를 강조하며, 그런 교단에 속한 근본주의자와의 교제도 거부하였다. 밥존스대학 설립자인 밥 존스가 여기에 속한다.
온것한 근본주의는 엄격한 분리주의를 주장하지 않는 그룹으로 무디 성서학원, 달라스 신학교, 탈보트 신학교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근본주의가 약화되었으나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다. 1930년대 일부 근본주의자들이 새로운 교회와 교단을 창립하면서 신근본주의 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1929년 메이첸은 프린스턴신학교 교수직에서 물러난 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 1936년에는 점차적으로 자유주의화하는 북장로교에 대항하여 정통주의 장로교회를 설립했다.
1941년 메킨타이어(C. McIntire) 주도로 반현대주의적인 미국교회협의회(ACCC)와 1948년 WCC에 대항하는 국제기독교협의회(ICCC)가 창립되었다. 성서침례회는 급성장하여 북미대륙에서 가장 큰 근본주의 교단이 되었으며, 약 1천여 지회가 조직되어있다.
근본주의는 본래 보수적인 종교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문화, 사회, 정치분야에까지 확대되었다. 2차 대전이후 미국의 근본주의는 정치적 보수주의와 제휴하였다.
근본주의자들은 종교는 물론, 사회 및 정치문제에서도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연합이 가능했다. 1970-80년대에 급속히 성장한 근본주의는 팔렐(J Palwell) 주도로 정치적 행동그룹인 “도덕적 다수파”(The Moral Majerity)를 창설하여 레이건 대통령 등 정치인을 위한 선거운동에 깊이 관여하였다.
3. 근본주의 신학 개요
근본주의는 성서와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믿는다. 교리 대부분이 프로테스탄스 정통주의 교리와 거의 동일하다. 근본주의는 한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했던 신학을 부분적으로 또한 평신도의 관점에서 되살려낸 것이다.
근본주의 교리는 5개 조항, 즉 성경무오 및 그리스도에 대한 4대 교리(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육체적 부활-재림)로 요약될 수 있다.
성경무오가 성서의 초자연적 기원을 강조하며, 나머지 교리는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기원을 나타내는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은 5개 조항을 기독교 신앙의 근본 원리로 받아들이지만, 그 외에도 그리스도의 기적, 인간의 전적인 타락 등의 교리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근본주의 교리의 중심점은 성서이다. 성서의 무오와 축자영감, 성서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강조한다.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다. 강한 전투성이 복음주의자와 근본주의자를 가르는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천년왕국설은 근본주의의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근본주의는 사회참여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중요한 도구로서 전천년설을 사용하였다.
전천년설을 옹호하는 세대주의가 근본주의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전통적 전천년주의자들과 세대주의자들은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을 믿고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며, 자유주의자와 대항해 싸움으로써 근본주의 형성에 신학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근본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문자적, 육체적 지상재림을 기독교 신앙의 근본 원리로 간주했지만, 재림의 때와 방법에 대하여는 통일된 견해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들 중 많은 수가 전천년주의자와 세대주의자였으나, 모든 전천년주의자가 세대주의자는 아니다. 또한 모든 근본주의자가 반드시 전천년주의자도 아니었다. 근본주의자 중에는 후천년주의자 및 무천년주의자도 있었다.
4. 근본주의 신학의 약점
한 시대에 필요에 의해서 일어난 신학운동이 그대로 남아있을 수는 없었다. 20세기 초엽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일어난 근본주의 운동은 신근본주의로 변질되었고, 한 시기의 공헌이 이후에는 문제점으로 뒤바뀌는 불행한 유산을 남기게 되었다.
이러한 이질화 현상으로 인해, 초창기 근본주의 운동의 대표적 지도자들로 알려진 메이첸, 반 틸 등도 자신들이 근본주의자로 불리워지는 것을 원치 않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오켄가, 칼 헨리 등 50년대 후기에 활동한 신복음주의 신학자들도 신근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근본주의자 대신에 복음주의자 혹은 신복음주의자로 알려지기를 원하는 실정이다.
a) 부정적 사고방식
자유주의 신학에 대응하여 싸워오면서 부정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러한 부정주의가 내적으로 작용하여 교리문제가 아닌 지엽적인 문제 혹은 시행방법 상의 차이 때문에 불필요한 분쟁이 야기되었고, 끝내는 교파가 갈리고 단체가 분열되는 현상을 빚게 되었다.
1936년 정통 장로교회가 북장로 교회에서 분리하여 나온 뒤에 버스웰과 메킨타이어에 의하여, 다시 수년 후에는 전천년설과 기독교인의 자유에 관한 의견 때문에 갈라져 나와 설립한 성경장로 교회와 훼이스 신학교가 계속적으로 자체분열의 악순환을 거듭하기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근본주의는 극단적 세대주의, 강단 위주의 선풍주의, 과격한 감정주의, 사회적 은둔주의, 열광적 찬송주의 등의 평판을 면치 못한다.
지엽적 문제를 극대화시켜 교회의 정치쟁점으로 삼아 다른 견해를 갖는 형제들을 정죄하고, 교회의 평화를 해치는 결과를 초래하기를 사양치 않았다. 이러한 경향은 바리새주의의 범람이 우려되는 신근본주의 운동에서 쉽게 간파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
b) 자기반성의 결핍
성서를 항상 자기편에 두고 상대방을 비성서적인 이유로 비판하는 비판습성이 체질화 되어, 혹시 있을지도 모를 자신의 비성서성을 돌아보는 자기반성의 결핍을 초래하였다. 자기방어의 습성이 자아비판의 눈을 가려버리는 불행을 가져온 것이다.
c) 신학발전의 기피
20세기초엽 도전받는 보수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제기한 신학적 가치인 근본주의 5대 교리를 표방함으로써 그 싸움의 성격을 천명하였다.
그들의 신학적 표현은 기념비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메이첸의 저술 “기독교와 자유주의”, “바울종교의 기원” 등은 당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해박한 신학적 답변이요, 정통적 기독교 변증이었다.
그러나 30년대 후반 근본주의 운동은 점차 반(反) 지식주의적 경향으로 기울고, 신학 발전의 기피현상을 빚게 되었다. 그들은 자유신학 자체를 신학발전의 결과로 보고 신학연구를 멀리하거나, 신학교육을 포기한 채, 성서학교(Bible Institute)를 많이 세워 전도자 양성에만 주력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근본주의가 5대 교리를 안고 성서학교 수준에서, 단순한 전도자 양성에만 힘쓰는 동안, 오늘의 신학적 판도에서 보수신학을 위해 신학적 변증과 폭넓은 신학연구를 통하여 전 신학계에 공헌할 수 있는 실력 있는 신학자를 양성하지 못했다.
오늘의 근본주의가 신근본주의로 변질된 가장 큰 원인은 신학적 빈혈증과 독선적 배타주의 때문이다.
근본주의 운동이 처음 일어날 때 보여준 보수신학의 변증적 노력은 독선적 바리새파주의로 전락하여갔고, 이 과정에서 근본주의 운동은 극단적 신근본주의 및 온건한 근본주의로 나뉘게 되었다.
온건한 근본주의는 a) 웨스트민스터와 칼빈신학교를 중심한 개혁주의적 입장, b) 달라스와 탈봇 신학교를 중심으로한 세대주의적 입장, c) 풀러 신학교 등이 주도하는 신복음주의적 입장 등으로 나뉘어 신근본주의의 약점들을 극복하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