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이세종, 이현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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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 이단, 신학 정치, 과학, 종교, 사회, 북한
교단 (합동, 고신, 개신, 기타) 교회사 (한국교회사, 세계교회사)
통일 (성경, 찬송가, 교단통일) 소식 (교계동정, 교계실상, 교계현실)

[인물] 이세종, 이현필


I. 이공(李空)의 생애와 사상1. 예수를 몰랐던 시절
맨발의 성자로 알려진 동광원의 창시자인
이현필 선생의 스승이 바로
?이공[李空] 이세종 선생(1880-1942)이다.
?
이공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가난한 형님 밑에서 자라났다.
남의 집 머슴이 되어 일만 알고
?글을 배워본 적이 없었지만 어떻게 한글을 깨쳤다.
?
정직하고 충직해서 틈틈이 짚신을 삼아서
형님께 드리고 일년 품삯을?형님께 양도하였다.
이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난리가 나서 다 못살아도
?그이만은 살 것이라고 칭찬했다.
장성해서는 형님들을 가까이 모시고 도와드렸는데
형님들의 가산이 차츰 늘어나 살만큼 되자
그제야 결혼을 생각했다.
?
나이 30세에 14살의 시골 처녀와 결혼하였다.
살림을 차린 후 지게를 맞추고
“이 지게가 다 닳도록 일해서
그간에 살림을 이루리라” 결심을 하고
이른 새벽부터 일을 나섰다.
?
겨울이면 콩 잎사귀 죽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저축하고
형님 댁의 살림도 보살펴 드렸다.
마침내 그 마을에서 제일 큰 부자가 되었다.
?
마을 사람치고 그에게 빚을 지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전답도 늘었지만 잘 입지도 않고 잘 먹지도 않고 살았다. 이렇게 이공 자신은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면서 일가친척들은 자주 도와주었다.
?
그 동안 얼마나 지게를 지고 일을 했던지
?지게가 다 닳아져 어린애라도 질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결혼 후 15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었다.
자식을 보고 싶은 소망에 무당을 불러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무당이 하라는 그대로 복종을 하면서
정성과 지성을 다해 아들 낳기만을 고대하였다.
그러나 무당의 지시에 따라 산당을 짓고
공을 들였지만 자식이 생기지 않았다.
아무리 지성껏 공을 들여도 헛됨을 알고
그해 이사를 했다.
?
2. 성경과의 만남과 회개
이공 이세종은 우연히 붉은 거죽의 한글로 된 책을
보았는데 하나님을 찬송하는 책이라 하니까
첫눈에 마음에 들어 빌려다 읽고,
얼마 후 “또 다른 책은 없는가?” 묻자
그들이 구약을 빌려주어 성경을 보게 되었다.
?
이공은 구약을 창세기부터 자세히 읽어 가는 중에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보게 되었는데 자신이 이제까지 신당을 짓고 상을 차리고 촛불을 켜고 떡을 차리고
백지로 꾸며 복을 비는 그 제도가
구약시대 성전의 제사의식과 흡사함이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신구약 성경을 공부하던 그이는 마침내
아들 낳게 해달라고 무당에게 공들이고 복 비는 것이 헛된 것이며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죄임을 알게 되었다.
?
그래서 그동안의 미신 행위를 청산하고 산당에 꾸며놓은 모든 제사 기구들을 불살라 버렸다. “너희는 너희의 복이라 타라” 하시며 모든 것을 버렸다.
그 동안 공들이는 데 쓰던 모든 기구들을
다 일소한 후에 무당에 공들이던 그 열성을 하나님께로 돌려 정성을 바쳐 기도하며 말씀을 살폈다.
?
머슴들의 휴식처인 사랑방에서, 창세기 일장 일절부터
하루 밤에 한 절씩 암송하기를 몇 달을 하고,
성경 읽는 산당까지 마련하여 탐독하다가
복음에 통하였다.
?
밤이면 기도하고 낮에는 말씀을 읽곤 하는 생활을 수개월 동안 계속 하였다. 마침내 그이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진실한 신자가 되었다.
?
아들을 낳겠다는 마음도 깨끗이 사라졌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자식들을 얻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제 하나님만 열심히 섬기며 전도도 하였다.
그이의 전도로 마을 사람들이 다 믿게 되었다.
이웃마을까지 전도하고 간증도 하고 어떤 때는 식사도 잊고?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공경하자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런 그이를 보고 미쳤다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 동리마다 전곡을 나눠주고 길가는 나그네나 거지들이 오면 모두 대접해 보냈다.
3. 모든 빚을 탕감해줌
그이는 그에게 빚진 자들을 낱낱이 다 불러들였다.
그리고 갚을 수 없는 빚들은 다 탕감해주고 빚 문서인 차용증서는 그 자리에서 불태워 없이한 후에 “빚은 다 받았으니 안심하라.”며 위로했다
?
. 빚진 자들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고 나서
?이제 그에게 빚진 사람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
물건을 꾸어간 사람들에게도 “그냥 다 가지라.”했다.
일대 희년을 선포한 것이다.
?
그 마을에서는 전무후무하게 희한하고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꿈처럼 믿을 수 없는 그런 일이 사실이었다.
모두가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겪고 기쁨이 넘쳤다.
그리고 산에나 들에 나가서 일군들이 흔히 하는 대로
남의 콩 한 포기라도 뽑아먹었던 기억이 있으면
그 임자에게 찾아가 자복하고 다 갚았다.
?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구차한 대로 무엇이나 다 도와주었다. 곡식은 모아두었다가 노인과 어린이가 있는 가난한 집에 나누어주었다.
?당신 자신은 콩 잎사귀 얼마도 아까워 못 먹고 살면서 그렇게 했다.
그러자 일년에 으레 한 두 번은 아프던 몸도 모든 병이 물러가 건강해지고 기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소경이 아니면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믿어라”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따라 믿기 시작했다.
면사무소에서는 그의 선심에 감동하여 그 이름을 새긴 비석을 세워주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의 깃발을 들고 신도들과 함께 나와서 오직 하나님만
공경할 것과 자기의 명예는 나타낼 것이 없으니
?비석을 당장 넘어뜨려라 했다.
?
?“내 손으로 이 사람들을 시켜서 비석을 없앨 수는 있으나 당신들이 세워놓은 비석을 차마 그럴 수 없으니
?당신들 손으로 무너뜨리시오” 하고 권유했다.
?
면장과 면민들은 “이왕 비용을 들여서 세운 것이니
그대로 두자” 하며 말을 듣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안 무너뜨리면 그이 자신이 없애겠다고
완강하게 나오자 할 수 없이 면민들은 그 자리에서 땅을 파고 묻었다.
4. 오직 말씀으로
그는 배부르기를 구하지 아니하였다.
그에게는 금식이 더 좋은 식사였다.
?
성경을 들고 있으면 해가 뜨는지 해가 지는 지도 몰랐다. 밤이나 낮이나 분간이 없었다. 어쩌다 병이 나면 곡기를 끊었다.
?
?병중에는 죽이나 숭늉이나 미음도 먹지 않았다.
평소에는 쑥 범벅이니 콩잎사귀 죽 같은 아주 거친 음식이 주였는데 병중에는 아예 아무것도 먹지 않고 병석에서 일어나기까지 금식했다.
?
그이는 아파도 매양 약을 거의 쓰지 않았다.
그러면서 말했다. “사람들이 죽고 싶다고 하지만 병이 나면 약을 쓰는데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약이다. 의의 약이다.
이 약을 쓰면 죽어도 죽지 않는다.
썩어도 썩지 않는 생명의 몸으로 부활한다.
몸은 아무 때 썩어도 썩는 것이니 그대로 버려두라.”
?
그이는 오래 아프면 “이제 죽을 것이라” 하고 죽음을 기다렸고 회복되면 살려주신 것을 감사했다.
5. 신비체험
어느 해 겨울 이상한 중병이 나서 두어 달을 아팠다. 열병에 신음하면서도 병원에도 가지 않고 약도 먹지 않았다.
?
?“예수보다 좋은 의사가 어디 있으며 신약보다 좋은 약이 어디 있느냐?”하며 버텼다. 열흘 이상 아무 것도 먹지 않았는데 하루는 밤에 제자 이상복에게 산에 있는 예배당에 데려가 주기를 바랐다.
?
죽어도 산당의 기도실에서 죽겠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소원이라 생각하고 들어 드리자 해서 업고 가는데 가죽과 뼈만 남아서 가볍기가 나무 같아 무게를 느낄 수 없었다. 추운 겨울인데 불도 없이 차가운 냉방에 뉘여 놓았다.
?
이상복은 당시 20대의 청년인데도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팔 다리를 주물러 달라 해서 주무르는데 여의치 않았다. 한 밤에 이공의 몸은 반쯤 굳어지고 정신은 혼미해졌다. 이공은 제자에게 자기 몸을 힘껏 흔들어 달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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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정신이 돌아오자 그의 몸이 화끈 달아올랐다. 제자에게 뜨거워서 못 견디겠으니 연못의 얼음을 깨 오라 했다. 물을 떠다 머리를 축이고 몸을 문지르라고 한 후 다시 몸을 일으켜서 못 가로 갔다.
?
?못 가로 가서 옷을 벗고 얼음을 깨뜨리고 퍼낸 물을 온몸에 끼얹었다. 몸에서 김이 무럭무럭 올랐다. 이렇게 세 차례나 얼음물로 샤워를 했다. 의아해 바라보는 제자에게 “이제야 정신이 드는군.” 했다.
?
그때 이공은 건너편에 이상하게 빛나는 광채를 보았다. 이공은 이상복에게 “저기 정자나무 밑에 무엇이 안보이시오?” 하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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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
“그럴 것이요. 영의 눈이 열려야 보이지
육안으로는 안 보일 것이요.”
?
이렇게 말하는 이공의 얼굴에는 감격과 기쁨이 가득했다. 초자연적인 힘이 쏟아짐을 체험했다.
?
그의 열병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옷을 입고 뛰어 나와 마을로 내려갔다. 그리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사람이 사는 것은 밥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증거 하였다.
6. 오직 하나님께 감사하라
명예나 칭찬은 마귀의 대접으로 알고 똥처럼 피하였다. 칭찬을 마귀의 시험으로 알고 남이 높이는 것을 아주 싫어하였고 심지어 마음이 교만해질까봐 상에서 음식을 먹는 것도 싫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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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을 받은 이들이 감사의 사례라도 하면
“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저에게 감사하다고
하시오?
저를 시험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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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인에게 무엇이라도 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들으면 “하나님께 감사하시오” 하고 가르쳤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았으면 내 먹을 것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당신들에게 줄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그이는 사람을 대접하는데도 차별이 없었다.
?
거지에게 대접해도 꼭 당신 집에서 잡수시는 대로 대접했다.
누구나 귀한 손님을 대접하듯 꼭 같이 접대하였다.
그것이 주는 이에게 복이 된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주는 것이 오히려 화가 된다고 가르쳤다. 이런 바른 가르침이 곧 사랑이라 하였다.
7. 겸손과 사랑
당신은 또 절대 교만을 몰랐다.
옷만 다른 사람보다 낫게 입어도 마음이 교만해져서
다른 사람을 낮추어보게 된다고 낡은 검정색 무명옷만 입었다. 먹는 것 입는 것이 거지만도 못하였다.
?
한번은 어떤 분이 식혜를 갖다 드리면서 선생님께서 잡수시고 싶어 하신 음식이라 올렸다고 했더니
두어 번 떠 잡수신 후에 숟가락은 놓고
?“이놈이 진즉 나무끄렁에라도 치어죽지 않고
이때껏 산 것이 이것을 못 잊어 못 죽었는가?” 하며
?통곡하였다.
?
?또 찰밥을 해오자 찰밥을 붙들고 가난한 사람들 생각이 나서 잡수시지 못하고 눈밭을 누비며 찰밥을 할 수 없으리만큼 가난 한 집들을 찾아다니며 나눠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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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기 쌀이 생기면 가난해서 농사도 짓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다 돌려주신 다음에야 비로소 당신 입에 넣으셨다.
그이는 언제나 세상의 명리를 뜬구름처럼 생각하고
어디를 가던 이익을 구하지 아니하였다.
꽃 한 송이를 볼 때도 탐이 나서 가면 허방에 빠져 넘어지고 다리가 부러질 것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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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덕을 베풀기를 좋아하였고 빼앗기는 것을 얻는 것보다 즐거워하였다. 일가친척들이 와서 빼앗아 가고 행패를 부려도 그들의 요구보다 더 많이 베풀었다.
?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주고 송사하여 속옷을 갖고자 하는 이에게는 겉옷까지 주고자 했다. 한번은 그이의 살림살이를 욕심내서 빼앗고자 위조문서를 세우고 위증을 내세워 그의 살림살이가 모두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나섰다.
?
그러나 그는 일언반구의 반론이나 변론도 없었다.
그이는 오직 탄식하며 말하길 “이제 내가 죽을 때가 당도한 것이라” 했다.
길을 가다가 훼방하는 이가 있으면 언제까지라도 기다리다가 그 사람이 허락해야 길을 떠났다. 핍박과 능욕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면류관으로 생각했다.
8. 정직과 진실
겉꾸밈이 없었다.
속이고 외식하는 자는 예수와 원수가 된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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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하나님을 능멸하는 것으로 알고 자기밖에는 추한 것이 없다고 여겼다.
아무리 나환자라도 추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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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서로 악수하고 반가운 듯하지만
속에는 시기와 질투로 가득한 것을 보고 한탄하였다.
?
오직 진실만을 사랑하였다. “내가 주는 밥은 죄가 안 될 것이다.”하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는 겉으로 주면서 속으로 아까워한다거나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
?안과 밖이 전혀 다름이 없다는 것이 그이의 즐거움이요 자랑이었다.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실천하시며 속을 다스리는 것이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길이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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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나를 시기 질투하고 미워하고 욕하며 해치는 것이?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진실성이 없는 것을 더 두려워하였다.
?
남이 나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의 거짓이 나를 해치는 원수라고 알았다.
9. 모든 것을 버리고
그이는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다.
?몸도 자기 것이 아니고 마음도 자기 것이 아니었다.
자기 것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다 버리고 오직 주님께 의탁하였다.
?
밤중이라도 주님께서 인도하시면 어디든지 따라 나섰다.
한번은 밤중에 감동이 있어 집을 나가서 십리나 떨어진 마을의 뒷산에서 날이 새기까지 쪼그리고 앉아있다 왔는데 얼마 후 예수의 이름이라고는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그 마을에 교회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것도 그이가 밤새 앉아 있었던 바로 그 앞집이었다.
재산도 모두 주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믿었다.
누가 손해를 끼쳐도 주님께서 알아서 처분하신 걸로 믿었다. 모든 생명을 아끼고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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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초와 꽃나무를 심고 잉어를 기르면서 무척 기뻐하였는데 사람들이 그것들을 꺾어가고 파가고 잡아가는 것을 보고 인심의 악독함에 한탄하며 울었다.
마음과 뜻을 오로지 하나님을 섬기는데 몰두했다.
?목사 장로들이 와서 믿음의 도리나 덕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한없이 기뻐하고 좋아하였지만
?
말이 희미하게 세상이야기나 쓸데없는 이야기로 되면
같이 담론을 하다가도 낯빛이 침울한 모습이 되어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언제나 주님의 도리가 아니면 입을 열지 않았다.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옮기지도 않았다. 누가 와서 궂은소리를 해도 나쁜 말을 하지 않았다. 누가 곁에서 말하면 무슨 상관이냐 책망하시며
그저 듣고 옳은 것은 취하고 그른 것은 버리면 된다고 하였다.
10. 만물을 한 몸처럼
식물이나 동물이나 모든 미물들을 다 사랑하였다.
산길을 가다가 칡넝쿨을 만나도 사람들의 발에 밟혀 다치지 않게 다 치워주며 걸었다.
풀포기 하나라도 뽑지 않고 마당의 잡초도 뽑지 않았다.
?
물에 빠진 쥐를 보면 막대기를 놓아서 나오게 해주었다.?하루는 독사가 부엌에 들어와 웅크리고 있으니
?부지깽이로 조심스레 몰아서 산으로 내보내며
다른 사람에게 보였으면 큰일 날 뻔 했으니
앞으로는 몸가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
하루 밤은 어둔 데서 무엇이 그를 물었다.
불을 켜고 보니 큰 지네였다.
조심조심 종이로 싸서 돌 틈으로 돌려보내며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했다간 큰일이 날 터이니
앞으로 다시는 사람들 틈으로 나오지 말라고 일렀다.
?
무엇이나 사람을 해치는 것이 나옴은 사람들의 잘못 때문이라고 하였다.
한번은 산이 무너지는 듯한 호랑이 울음소리에 사람들이 놀랐다.
?
“범이 무슨 짐승이기에 만물의 영장이 되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가?” 하면서 밤새도록 “만물의 영장이 네놈에게 져서야 되겠느냐?” 소리를 지르며
호랑이를 쫓아 보내느라 산을 헤맸다.
?
?사람이 해칠 마음이 없으면 어떤 짐승도 해치지 못하는 법이며 하나님의 허락이 아니면 사자라도 사람을 해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
파리 모기 등 해충이 나오는 것도
사람의 잘못 때문이라 했다.
파리가 생기기 전에 예방할 것이지 파리가 생긴 뒤 죽이려고만 힘쓰지 말 것을 설명하였다.
?
욕하고 미워하고 죽이는 죄를 짓지 말라 하였다.마을을 지나가다 보면 어린아이들이 욕을 하며 어덕뱅이니 문둥이니 손자놈이니 손가락질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
그럴 때마다 그러면 죄 된다 웃는 낯으로 타일렀다.
?그래도 계속 욕을 하면 그것도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요 나에게 들려주시려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했다.
내 육체에 문둥병은 없지만 어린아이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내 안의 문둥병을 가르치신 것으로 알았다.
?세상에서 어덕뱅이는 아니지만 날마다 하나님께 빌어먹으니 어덕뱅이도 옳은 말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끝없이 너그러우며 관대하였고 또한 인자하였다.
11. 찬양과 자비와 기도
그이는 길을 가다가 개미 한 마리만 밟혀도 길을 멈추고 돌아보며
“하나님 앞의 행위로 보아서는
내가 너한테 밟혀 죽어야 마땅한데
오히려 네가 나에게 밟혀 고생하는구나!” 하며
?슬퍼하였다.
무성하게 자라난 풀포기를 보며 기뻐하였고
?산에 올라가 우거진 모습을 보며 기뻐하였다.
?
그리고 “만물들아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자.”하면서 큰 소리로 찬양하였다. 죄인들을 보면 앞에서는 꾸지람을 하지만 뒤돌아서서는 울었다.
?
한 사람이라도 믿음에서 떨어지면 밤새도록 울었다.
“하나님 이 죄인을 잊지 마소서” 하고 기도하였다.
?해치는 이가 있으면 그이는 이 세상에서도 불쌍한 사람이라고 연민을 가졌고 무엇을 훔치는 사람이 있어도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왜 그렇게 어리석은가’ 하면서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
그는 걸음마다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다.
“하나님, 이 불쌍한 백성과 죄인들을 잊지 말아 주옵소서.” 하고 기도했다.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탁하였다.
언제나 부지런히 말씀을 전하며 말씀하는 시간에 밥상이 들어와도?공사부터 먼저하고 사사는 뒤로 하자며 말씀을 계속하였다.
?
마음에 항상 진리의 말씀만을 생각하였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였다.
길을 가다가 피곤하여 쓰러져도 하늘만 쳐다보며
우리가 움직이려면 위에서 힘을 주셔야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언제나 욥기를 생각한다고 했다.
?야고보서[5:11]에 욥의 말씀이 있어 좋다고 하였다.
병으로 앓는 이를 보아도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하고
식사 때도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하였다.
?
하나님께서는 지금이라도 병자를 낫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며
우리가 사는 힘은 밥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능력에 있다고 믿었다. 어디를 간다 해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다.
?
길을 떠날 때 기약이 없었다.
사람들이 물으면
?“모른다. 가다 어찌될 지 오다가 어찌될지 내가 어떻게 알겠소?” 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만 맡기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절망이 없었다.
12. 의의 옷을 입자
그는 입은 것이
?남보다 조금이라도 낫다고 생각되면 곧 바꿔 입어야 마음이 편안했다.
하루는 새 옷을 입고 나갔다가 어떤 남루한 옷을 입은 거지를 보자 곧 바꿔 입고 돌아와서 “음식이야 다른데서 얻어먹을 수도 있지만 거지가 옷을 어디서 얻어 입겠는가.” 하였다.
?
그이의 모자는 다 쭈그러진 검은색 중절모였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이 모자만을 쓰고 다니는 것을 보고 어떤 분이 그 모자를 몰래 아궁이에 불태워버리고 자기의 모자를 드렸더니 좋은 모자는 마음이 불안해서 쓸 수가 없다고 하였다.
?
그이는 두루마기는 입어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좋아하는 의복은 덕행이었고 의의 두루마기를 입고자 하였다. 그리고 정직의 허리띠를 동여매고 살았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않고 의의 두루마기를 입고 정직의 허리띠를 매고 오직 하늘나라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자 힘썼다.
?
?
13. 예수를 잘 믿으려면
그이는 예수를 믿은 후 남들이
자기를 이공이라 불러주기를 바랐는데
이것은 철저한 자기부정의 정신이었다.
?
이공李公이 아닌 이공[李空]으로
자기가 없다는 뜻이다.
?
하루는 제자 오복희가 “어떻게 하면 예수를 잘 믿을 수 있을까요?”하고 묻자 즉석에서 대답하길
?“빌어먹어라” 했다.
?
“예수 잘 믿으려면 거지 오장치 짊어지듯
?믿어야 한다.
물에 빠지듯 풍덩 빠져서 믿어야 된다.”하고 가르쳤다.
?
개구리가 물에 뛰어들 듯
믿음의 바다에 풍덩 빠지라는 것이다.
?
그이는 진실로 진리의 바다에 몸을 바쳐 풍덩 빠졌다.
그리고 그가 풍덩 빠질 때 나던 그 소리는
지금도 영원한 울림으로 퍼지고 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에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누가14:26-27]
?
?
14. 순결생활
남녀의 순결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
결혼하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이
더 큰 은혜라고 하였다.
?
?복음을 받은 후
하나님과 부자유친(父子有親)하게 되자
부인과는 남매처럼 살았다.
부부관계를 끊고 순결의 삶을 살았다.
?
나이 어린 아내가 참지 못하고
다른 남자를 만나 살림을 차렸다.
?그러자 아내의 살림도구를 손수
지게에 지고 갖다 주며 언제든 돌아오라고 했다.
?
그 아내가 얼마 못 가서 되돌아왔을 때
?말없이 받아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남매로 살았다.
?
아내가 다시 참지 못하고 두 번째 집을 나갔다.
이공은 신령으로 정성으로 기도를 했다.
며칠이고 기도한 후 찾아가서 돌아오라고 권했다.
그 아내는 다시는 안 돌아갈 것이라며
온갖 악담을 했다.
그리고 “부끄러운 줄 모르고 여기를 찾아 왔느냐?”
하면서?물을 끼얹고 야단을 했다.
?
그이는 심한 냉대를 받았지만
온유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여인의 간부에 대해서도 선하고
관대한 태도로 대하며
그 여인을 데리고 살아도 유망할 것이 없으니
돌려보내라고 권유했다.
?
머지않아 그 집에 재앙이 닥쳐 아내는 할 수없이
다시 되돌아왔다.
그는 한글도 모르는 아내에게 한글을 깨우쳐주고
성경을 읽게 하였다.
그리고 찬송을 가르쳤다.
그 아내도 마침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왔다.
그리고 그이의 마지막 가는 길을 정성으로 보살폈다.
?
?
15. 마지막 가는 길 - 고난 받은 종의 노래
그이가 세상과 작별할 시간이 가까워 옴을 알았다.
그리고 세상 떠날 준비를 착실히 하였다.
믿는 이들에게 모든 진리를 아낌없이 풀어서 가르쳐 주었다.
모든 재산을 다 나눠주었다. 집도 전답도 다 없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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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식 한 톨까지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그 지방에 보일 증거는 다 보였다 생각해서 그 마을을 떠났다. 그를 받아들이고 모셔드리는 데는 세상에서 한 군데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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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는 산으로 들어갔다.
고요히 운명할 장소를 택한 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보릿가루 콩가루 도토리가루로 연명하면서
분량을 점점 줄여갔다.
마침내 마지막 40일 동안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물도 마시지 않았다.
공기로 연명하면서
바람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기운이라 했다.
최후 마지막 일주일간은 더없이 장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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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내 갈 수 있도록 손수 나무로 만든 틀,
즉 상여 위에 요를 깔고 누워서 세상을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과 육체의 땀나는 고통 속에 일주일을 보냈다.
임종시간이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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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람 한사람에게 유언을 남겼다.
부인에게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부탁하고
젊은 남녀들에게는 정욕을 극복하라 하고 장년들에게는 가정에 얽매여 진리사랑을 소홀히 할까 염려하라 경계했다.
어떤 이에게는 가시덤불 속에서라도 성경을 볼 것을 부탁하였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양 발과 머리를 붙들라 하였다.
?“놓치면 죽는다, 단단히 붙잡아서 높이 들라” 하고 소리를 높였다.
높이 들어올리자 그때 말씀하였다. “누가 나를 받들어 올리는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로다.” 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제자들은 이사야서의 다음 말씀을 생각하였다.
이제 나의 종은 할 일을 다 하였으니,높이높이 솟아오르리라.무리가 그를 보고 기막혀 했었지그의 몰골은 망가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었고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이제 만방은 그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제왕들조차 그 앞에서 입을 가리우리라.이런 일은 일찍이 눈으로 본 사람도 없고귀로 들어본 사람도 없다.[사52: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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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성자 이현필



이현필(李鉉弼, 호:방림, 1913~1964)





일생을 절식하며 맨발 벗고 다니면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였다. 금욕, 청빈, 순결을 몸소 실천한 선생은 동광원을 통해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 예수를 닮으려는 그의 열성은 철저하고 진실했다.





이현필(李鉉弼, 호적에는 李鉉鼎으로 되어 있음)선생은 1913년 1월 28일에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용하리(권동)에서 출생했다. 이곳은 나주군 영산포나 남평에서도 산을 타고 30여리 떨어진 산골짜기에 있으며 주변에 화학산과 천태산(혹 개천산)이 있다. 아버지 이승노(李承老), 어머니 김오산(金烏山) 사이에 3남매가 출생했는데, 현필은 어머니 나이 27세 때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과 누나가 있다. 막내로 자라서 일곱 살까지 어머니 젖을 먹고 자랐다고 한다. 꼿꼿한 성격은 부친을 닮았고, 인정이 많고 따뜻한 점은 효자댁 출신의 어머니를 닮았다.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열 살이 되기까지 권동집에서 자라면서 천태보통학교를 다녔다. 이 학교는 본래 서당이었던 것을 후에 학교로 승격한 것인데, 현필은 4년 동안 언제나 1등으로 공부하여 졸업했다. 그가 보통학교를 졸업한 것이 그의 전 학력이다. 그후 현필은 혼자서 독학하고 노력하여 많은 책을 읽고 사상이 깊어 그 실력이 대학교수와 논쟁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청년이 되어 다도면 면서기(茶道面 面書記) 시험에 응시하여 형과 함께 합격했으나 형만 서기로 다니고(후에 다도면장까지 지냄) 이현필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서기로 봉직하는 일을 시작하지 않았다.







어릴 때 이름은 싹뿌리라 불렀는데 그 이유는 전해지지 않는다. 후에 제자들이 이를 ‘뿌리고 싹 났으니’ 혹은 ‘예수를 안 후는 싹 버렸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선생은 자칭 ‘헌신짝’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뜻으로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죄인이라는 뜻이다. 일생 남들이 자기를 존경하고 칭찬해주는 일은 그 마음속으로부터 싫어했다.





이현필의 집은 예수를 믿기 전에 넉넉히 살던 집안이었으나 부친의 사업 실패로 자기가 살던 집도 남에게 넘어갔다. 그 후 너무도 가난하게 살아 그는 돈을 벌어 고생하는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드리기 위해 옛집을 다시 사고 싶었다. 그래서 권동에 살면서 몇 십리 떨어진 영산포 읍에서 닭장사를 하러 다녔다. 당시 영산포에는 일본사람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일본인 교회가 하나 있었다. 담임목사는 관파라 불렀는데 그는 사람들에게 구제도 많이 하고 열심히 전도하던 분이었다. 이현필은 그를 만나 처음으로 예수의 복음을 듣고 그의 설교에 감화를 받아 예수를 믿기로 했다고 한다. 이때가 13세였을 때였다(1925년). 그의 나이 17세 때 서울 기독 청년학관(YMCA)에서 영어와 성경을 공부했는데 이때에 원경선 선생과 서로 알게 되어 서로의 교제가 평생 계속되었다. 그의 나이 21세때(1933년)에는 전남 광주 신안동교회 전도사로 시무하기도 했다. 이때 백춘성 장로와 알게 되었고, 백장로는 일생을 통하여 이현필을 도왔고, 동광원 사람들과 교제도 하였다.





3. 분홍비늘꽃 Epiloum angustfolium

과 명 : 바늘꽃과






이현필의 신앙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분은 예수를 믿고 방산(芳山)장로교회에 출석하면서 만난 등광리의 이공(李空, 이세종)선생이었다. 이곳은 용하리에서 10리 떨어진 중촌(中村)마을로 이공의 고향이다. 방산교회는 이 두 사람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교회로 지금은 등광리교회(1999년 초부터 현재 정칠영목사 시무)가 되었다. 그를 따라다니며 성경을 배울 때 부친은 아들을 보고 미치광이를 찾아다닌다고 꾸짖었어도 이현필은 그냥 계속 다녔다고 한다.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후 1948년 9월 1일에 남원 지리산 골짜기 ‘서리내’에서 몇 사람을 모아 성경을 가르친 것이 최초 “한국 기독교 토착 신앙공동체”운동을 시작한 시발점이었다. 몇 달 후 서울의 Y총무인 현동완선생이 보내준 기금으로 정인세와 함께 광주에서 동광원(이현필은 歸一園이라 함)을 세워 고아원 운영에 적극 지원을 하였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고아들의 숫자는 순식간 600명으로 불어났다.





동광원은 한마디로 “한국 기독교 수도원”이었는데 순결(철저한 남녀유별), 노동, 수도, 선행, 정직, 성실, 책임, 희생의 정신을 실천해 나갔다. 효소법을 개량한 농사를 시작했고, 모든 공동체 멤버는 직접 노동을 하여 자급자족했으며, 최소한 양만 먹고 최대한 남긴 농산물을 팔아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구제하는데 사용했다. 노동을 중요하게 여기며, 근검절약하고 사치를 피하고 현대문명을 거부하는 점에서는 재침례파(Anabaptist, 미국 오하이오주와 펜실베니아주를 비롯한 10여개 주에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살고 있음)인 아미쉬(Amish) 공동체와 통하는 점이 있다. 김용기장로의 가나안농군학교가 일종의 농촌계몽운동이라면, 동광원은 순수한 신앙운동이었다.





현재 동광원은 남원에 그 본부를 두고 있으며, 여러 곳에 분원이 있다. 화학산 기슭 도암의 ‘청소골짜기’(정규수 수녀, 1948년 10월, 고아원운동 발상지; 고아와 머슴출신 한영우집사는 1953년에 들어와 동광원 수녀들의 농사일을 돕고 있다), 중촌(中村)의 화순(6?25때 피신처, 김춘일 수녀가 1953년에 들어와 현재 ‘큰 언니’역할을 하고 있다), 도구밖골(도구봉) 가마터, 문바위, 이세종 선생의 유적지와 무덤, 각시바위, 소반바위, 바람재, 전남 함평, 진도, 경기도 벽제 계명산(수녀의 마을), 무등산 등지에 있다. 광주 동광원은 5?16직후 정부에 의해 폐쇄 조치되었다가 1965년에 다시 귀일원(초대 원장=정인세 1909~1991, 초대 총무 및 2대 원장=김은연 1920~1991)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재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선생은 주로 암굴에서 수도를 했고, 손수 움막을 지어 기거했으며, 깨끗한 동정(童貞)생활을 실천했다. 부인 황홍윤은 광주에서 목회하던 백영흠 목사의 처제인데 결혼 직후부터 이선생은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것을 거절했고, 거지와 고아들을 끌고 다니면서 집안살림을 돌보지 않자 한때는 ‘칼을 품속에 숨기고’ 다니며 살해할 기회를 노릴 정도로 남편을 미워하였다고 한다. 한 때 다른 집으로 개가하였지만 노년에 병이 들어 도장리로 돌아와 회개하고, 정월례집에서 3년간 기도하며 살다가 1998년 83세로 소천하여 이세종 부인 ‘한골 어머니’의 묘 옆에 묻히었다.





6?25동란 때 공산당이 광주로 진입하기 직전 피신하지 않고 남아 있던 수피아여학교 교장 유화례선교사를 화학산 문바위, 박적골, 도구박골 등지에서 정성껏 숨겨주었다. ‘인공치하’ 5개월 동안 100여 동광원 식구들과 함께 피신생활을 한 것이다. 이때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동광원은 수도생활과 성경공부 지도하는 일 외에, 고아들, 폐결핵 환자들 돌보아 주며, 지체 장애인 300여 명 돌보고 있다. 그의 말년에 성경공부 모임이 절정을 이루었는데, 밤나무골 남나무 집에 백 여명의 제자들이 매양 선생의 말씀을 사모하여 모여들었다.





이현필선생은 건강이 좋지 않아 마침내 폐결핵에 걸려 고생하기도 했으며 자주 각혈을 했다. 죽음을 예상한 선생은 자기가 고요히 죽을 장소를 찾으러 서울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남녀 수십 명의 제자들이 광주역에서 눈물을 흘리며 환송을 하였다. 오북환, 김준호, 정인세가 동행했다. 서울 신촌 부근 넝마주이 거지굴에서 마지막 숨을 거둘 준비를 하면서 밤중에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제자인 정인세, 오북환에게 먼저 가라고 해서 이 두 분은 자리를 비웠고 김준호는 곁에 남아 있었다. 아마 선생은 옛날 광주 양림다리 밑에서 거지생활을 하던 시절을 회상하며 죽는 순간도 거지하고만 함께 있으려는 듯했다. 다음날 정인세는 다시 돌아왔다. 선생은 반가워하면서 김준호와 정인세 두 제자에게 마지막 신앙간증을 하였다.





“저는 이 시간까지 예수님을 섬김에 있어서 선행위주를 해왔습니다. 오늘 지금 저는 그 동안 잘못 믿어온 점을 자백합니다. 우리 예수님의 보혈만이 저를 구원한다는 것을 저는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는 일평생 오늘까지 밥이 귀한 줄 알며, 밥만 좋은 줄 여기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제게는 물이 제일 귀합니다. 생명수가 귀합니다. 이 물을 마셔야 저는 살고, 이 물을 마시지 않는 날엔 저는 죽습니다. 선행으로는 구원 얻지 못합니다. 예수님 보혈로만 구원을 얻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예수님 보혈이 내 몸에 한 방울 흘러 들어오면 저는 삽니다. 제가 앞으로 걸어갈 걸음은 주의 보혈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뛰어 들어갈 것입니다” 선생의 요청대로 정인세가 이를 종이에 받아 적었다.





서울 신촌 대피호 굴속에서 사경을 방황하다가 문득 깨달아진 이 날의 경험이 있는 뒤부터는 이현필선생의 분위기는 보다 부드러워졌고 깊은 사랑의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일반 교계에서 이현필을 산중파 금욕주의자라고 불렀다. 그 말대로 지금까지 그는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으며 죽어도 약을 쓰지 않았다. 이공(李空)처럼 절대로 살생을 하지 않았다. 길을 걸어갈 때 보통 사람들보다는 배나 느리게 천천히 걸으면서 길가의 개미, 지렁이 등 곤충벌레가 밟히지 않게 목숨을 가진 것을 주워 옮겨 놓든가 피해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일평생 그는 한잔의 커피도 한 점의 고기도 들지 않았다. 몸소 청빈하게 순결하게 살면서 예수를 닮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의 철저한 금욕생활 자체에 대한 교만을 가지지 않고 죽는 순간까지도 항상 부족한 죄인임을 고백한다. “제가 오늘 이대로 죽으면 저는 천국에서 예수 앞에 역적 같은 놈이 되리라는 느낌을 가집니다. 그 동안 제가 절대선행을 강조해 왔던 고로, 저를 따르는 이들을 온통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을 만들어 버렸습니다…나는 위선자입니다. 나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구원 얻을 사람이지 선행이나 금욕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임종을 앞두고 깨달은 것은 예수 보혈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다. 물론 그의 과거의 신앙도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신앙이었다. 그런데 그의 제자들이 선생의 금욕생활 자체를 우상화하지 않을까 염려되어 이를 다시 강조한 것이다. 그의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2천년 전 유대땅 골고다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바로 지금 이 시간 어쩔 수 없는 나의 마음에 뚝뚝 떨어져 오는 예수님의 보혈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구름국화 Erigeron thunbergii var. glabratus







평생 고기를 한번 잎에 대지 않던 선생이 신촌에 있는 거지 굴에서 기진맥진해 있을 때 굴비 국물을 달라고 해서 떠 드릴 때 제자들이 당황했다. 물론 후두결핵으로 그 국물을 넘기지는 못했지만, 금욕주의보다 복음이 우선임을 몸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자체 자신이 죽고 나서 율법주의파나 고행을 위주로 하는 어떤 파가 생길까봐 몹시 염려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그의 급성 결핵병이 어느 정도 치유가 되어 위험한 고비를 넘기게 되었다. 병이 좀 회복된 후 이때의 심경을 술회하면서 “내가 저지른 이 파계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모든 사람들이 듣게 된다면 그 동안 나의 금욕주의, 고행, 불살생 때문에 나를 존경하고 따르던 제자들이나 청년들 중에 크게 실망하여 소동이 일어나 격분하여 나를 위선자라 혹은 정신이 돌았다고 욕하고 혹은 나를 저버리고 떠날 것이고, 혹은 더 분하게 생각하는 이는 몽둥이로 나를 때리며 동광원에서 쫓아내기까지라도 할 것임을 각오하면서 고기를 먹은 것이라”고 말함으로 인간 이현필을 우상화하려던 당시 제자들의 움직임을 과감히 뿌리치고 오직 예수의 복음만이 남아야 함을 강조했다. 그렇게 예수를 닮으려고 애쓰던 이현필선생.





1963년에 광주로 내려와 최흥종목사의 주선으로 제중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물론 혼자 입원하기를 거부하여 결핵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제자 김준호와 함께 입원하게 되었다. 사실 병원에 간 것은 자신 때문이 아니라 김준호를 입원시키려는 생각이 더 많아서 그렇게 한 것이다. 후두결핵병이 걸린 것이다. 기침과 가래가 심하고 목이 아파서 말을 못했다. 한동안 병이 심해서 40일간이나 목으로 물도 삼키지 못했다. X-ray를 찍어보니 속립성 결핵인데 이 병은 결핵균이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지는 급성 전신결핵이었다. 결핵약이 나오기 전에는 속립성 결핵에 걸렸다 하면 모두 사망하고 마는 무서운 결핵이었다. 여성숙 의사를 비롯한 의료진들의 정성어린 치료로 회복이 빨라 열흘 후에는 겨우 목소리가 나오게 되었단다. 이리하여 3개월간 병원 음식도 비교적 들면서 치료를 받던 중 퇴원하겠다고 한다. 평소 약을 쓰지 않고, 고기나 생선도 먹지 않던 이선생이고 보면 3개월간 병원에 입원한 것도 길었다. 특히 치료에 효험이 되는 약을 주어도 먹지 않고 모았으며, 주사도 거절하여 여성숙 담당의사가 권유하였더니, ‘우리 한국의 결핵환자들이 이 약을 다 먹을 수 있게 되면 나도 먹겠습니다’고만 했다. 아직 병이 완치된 것이 아니었고 겨우 고비만 넘긴 상태인데 퇴원하고 말았다. 심지어 여의사가 주사기에 약을 담아서 왕진을 하여도 막무가내 거절하여 그냥 돌아왔단다.2) 김준호는 6개월간 입원하여 건강이 많이 회복될 수 있었다.





예상대로 선생의 파계(고기도 먹고 약도 쓰다)로 많은 제자들이 떠나갔고, 심지어 그를 위선자라고 평하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선생은 신촌에서 고기국물로 입 다신 것과 제중병원에서 한번 약을 쓴 일 외에는 다시 과거의 습관대로 고기도 약도 입에 대지 않았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 본격적으로 제중병원 전도를 시작하였다. 그후 계속 그는 독신생활을 강조했다. 경기도 벽제 계명산으로 임종하러 갈 때 행한 고별(유언) 설교도 끝까지 동정(童貞)을 지키는 순결주의만은 양보하지 않았다. 선생과 동광원의 순결주의는 참으로 엄격하고 철저하여 이들 나름대로 독특한 해석을 가지고 있다. “끝까지 동정을 지켜라. 깨끗이 살아라. 청빈 생활을 사랑하라. 음란은 죄다. 동정을 지키고 깨끗이 살아라”





1964년 정초 해마다 하는 대로 광주 방림에 있는 동광원에서 한 달 동안 연속하는 수양회를 인도할 때 건강상태가 극히 악화되었다. 한번 하는 강론시간이 적어도 두 세 시간씩 계속했는데도 시종 그냥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하였다. 강의가 끝나면 무릎이 굳어져 일어서지 못하며 제자들이 양쪽에서 겨드랑이를 끼어 부축해 세웠고, 거실까지는 업어다 모셨다. 누우면 또 다시 송장 같았다. 한 달간의 수양회를 그렇게 인도하고 나서 자신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 평소 마음에 둔 경기도 벽제 계명산 분원에서 지냈다. 도착한지 엿새만에 세상을 떠났다. 임종의 자리는 계명산 속, 동광원 분원에서 500미터나 더 산중으로 들어가 옛날 현동완 선생의 산장자리에서였다. 1964년 3월 16일 저녁, 선생은 혼수상태에서 영적인 대화를 하고 있던 것을 조정은 수녀가 들었다. “예, 예, 저는 죄인입니다…예…” 혼자의 독백이었다. 그리고 조금 후 “할렐루야, 할렐루야” 찬송을 불렀다. 그제서야 조정은 수녀는 따뜻한 물을 들고 방에 들어가서 ‘선생님 아까 새벽에 누가 왔습니까?’ 물으니 “주님께서 내일 새벽 3시에 오라고 하셨습니다.”





다음날 산장의 새벽은 너무도 고요했다. 병든 이선생은 아랫목에 누워있고 왼편에는 계명산 수녀 원장인 김한나 수녀, 오른편에는 일생 잠시도 선생 곁을 떠나 본 일이 없는 김준호, 방구석에 김희옥 수녀, 조정은 수녀가 앉아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두 수녀에게 정결을 지킬 것을 당부하며, 준비된 선생의 수의(壽衣)로 깨끗이 빨아둔 누더기 옷 바지저고리로 갈아 입혔으나 죽는 사람은 그런 옷이 필요 없다면서 도로 헌 옷을 입은 그대로 묻어 달라고 당부했다. 관(棺)도 쓰지 말고 자기는 죄인이니 거적대기에 싸서 내다 파묻으라고 유언을 남겼다. 무덤은 평토장(平土葬) 우로 하라면서 죄인의 시체니까 아무도 모르게 하고 아무나 함부로 밟고 다니게 하라고 했다.



최후의 순간이 가까워 오면서 이선생은 기도하기를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하고파 무척 애썼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고자 할 때마다 주님은 저를 피하셨습니다. 주님! 저는 지금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오 기쁘다! 기쁘다! 오 기뻐! 오메 못참겠네. 아이고 기뻐! 이 기쁨을 종로 네거리에라도 나가서 전하고 싶어. 제가 먼저 갑니다. 다음에들 오시오!” 하고 눈을 감았다.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얼굴은 하늘을 향하여 쳐다보면서 마지막 호흡을 내 쉬었다. 1964년 3월 17일 새벽 3시 정각이었다. 이리하여 만51세의 향년으로 별세하셨다. 이때 그의 외모는 80된 노인보다 더 연로해 보였다고 한다. 그의 무덤은 벽제 계명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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