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역사적 중심 교회는 항상 다른 지역에 넘겨 주고 사라졌다.
선교학을 새로 써야 한다
남후수 선교사
(본 원고는 2012년 7월 22-23일 미국 시카고 소재 휘튼대학교에서 열린 제 14차 세계한인선교사대회의 한 포럼과 23-27일에 모인 제 7차 한인세계선교대회의 한 분과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필자 주)
I. 시작하는 말
▲ 남후수 선교사
미주선교센터 (KPM-USA)
Evangelia Univ선교학교수
교회사는 한 때 흥왕하던 교회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쇠퇴하고 소멸하기를 반복한다고 기록한다. 오리겐과 어거스틴으로 대표되는 북아프리카 교회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활기찼던 동로마 교회는 회교의 중심지로 변했으며 로마를 기점으로 중유럽 바바리안들과 북유럽 바이킹들까지도 복음으로 사로잡았던 서로마 교회는 지금도 살아있기는 하지만 변질되어 더 이상 참 교회가 아니다. 칼빈이 태어난 프랑스나 그가 사역한 스위스 그리고 루터를 배출한 독일도 이제는 거의 이방화 되었다. 존 낙스의 스코틀랜드, 존 웨슬리의 잉글랜드도 마찬가지이며 청교도들이 건설한 미국 교회는 한 때 지구 모든 나라들에 선교사를 파송할 만큼 강력했지만 지금은 지쳐서 더 이상 선두에서 뛰기 힘들어 보인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예루살렘 교회나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한 안디옥 교회도 사라지고 없다. 바울이 설립한 소아시아 교회들이나 마게도니아 교회들도 요즘은 흔적도 없다. 이렇게 한 때는 선교사를 파송하던 교회들이 사라지고 나니 그 자리를 회교와 같은 강력한 반기독교 세력들이 차지하고 있다.
교회가 지역을 바꾸어 가면서 흥망성쇠를 반복하면 세계복음화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한 때 왕성하던 교회들이 쇠퇴하고 사라지는 이런 교회사적 현상이 한국교회라고 비켜가라는 법은 없으며 이미 그 징조가 나타난다고도 한다. 만약 현재와 같은 기조로 간다면 머잖아 한국교회도 소멸할 것이다. 본고는 이런 위기의식에서 교회의 흥왕과 쇠망이 반복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선교학적으로 고찰하고 이것을 방지하기 위한 새로운 선교학 개발을 제안 한다.
II. 교회사의 비연속성
교회사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기독교회가 안디옥, 소아시아, 지중해 연안, 중유럽, 북유럽, 서유럽, 신대륙, 그리고 세계적으로 확장되어가는 역사를 기록한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교회사는 연속되어 오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위에서 말했듯이 교회는 발아, 성장, 개화, 결실, 쇠퇴, 소멸의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이 과정은 200-300년을 거친다. 한 교회가 성장, 개화, 결실기에 들어서면 타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자신은 죽어간다. 그리고 새로이 복음 받은 교회가 그 바턴을 이어가다가 또 다른 지역에 넘겨주고 자신은 사라진다. 교회는 지역을 옮겨가면서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흥했다가 없어지는 역사의 연속이다.
III. 교회 쇠퇴의 원인 연구
교회가 시대마다 부흥하고 쇠퇴한데에는 각각 원인이 있다. 대표적으로 고대 북아프리카 교회와 현대 영국교회 쇠퇴 원인을 살펴본다. 선교학자 Herbert Kane은 그의 저서 기독교세계선교사(A History of the Christian World Mission)에서 북아프리가 교회가 몰락하고 이슬람화한 원인을 정치사회학적인 원인과 선교학적인 원인을 각각 여섯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다. Charles J. Speel은 북아프리카 카르타고를 중심하여 형성되었던 강력한 기독교회가 이슬람 세력에 맥없이 무너진 이유를 정치와 종교의 합작품인 반달 아리안주의(Vandal arianism)이라고 분석했다. 영국에서 사역하는 안양기 선교사는 영국교회 쇠퇴 원인을 교회 내적 원인과 외적 원인으로 나누어 제시했다.
선교학계에서는 교회의 흥망성쇠 현상을 복음 서진론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복음은 촛대를 서쪽으로 계속하여 옮겨간다고 한다(계 2:5). 복음은 각 지역에서 바턴을 다음 지역으로 넘겨주면서 예루살렘, 소아시아, 발칸반도, 로마반도, 북유럽, 서유럽, 신대륙 등으로 그 중심지를 서쪽으로 옮겼다고 설명한다. 이 복음 서진론에서 더 발전된 것이 BTJ 운동이다. 중국교회 시작되었다고 알려진 Back to Jerusalem 운동은 한국교회에서 탄력을 받는 듯하다. 이 운동의 골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지구를 서쪽으로 한 바퀴 돌아 다시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그제야 끝이 온다는 내용이며 예루살렘까지 복음을 운반하는 일을 오늘 우리가 주역으로 참여하자는 운동이다.
복음 서진론을 부정하고 동서남북진론을 주창하는 사람들도 있다. 복음은 서진만 한 것이 아니고 동진도 했으며 또 동서남북으로 각각 퍼져나갔다고 보는 견해이다.
IV. 교회 흥망성쇠의 참 원인
위에서 교회가 지속적으로 존속하지 못하고 흥망성쇠를 반복하는 원인을 여러 학자들의 연구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런 연구들이 교회 흥망성쇠의 결정적인 원인을 밝히고 그 대안을 제시했다고 볼 수는 없다. 대안이 나왔다면 오늘 교회가 지속적으로 발전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같은 역사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외적인 조건이 열악하고 내적인 여건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복음이 자체적인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면 교회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 증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애급의 노예생활, 가나안 정착, 바벨론 포로 등은 신앙을 유지하고 전수하기에는 가장 악조건이었다. 신약시대에도 그들은 2,000여 년간 세계 각처를 유랑하면서 모진 고통을 당했지만 그들은 살아남았다. 역사적으로 유대인 보다 더 고난을 당했거나 믿음을 유지하기에 더 열악한 환경에 처했던 민족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자손들에게 전수했고 자손들은 그 신앙을 지키며 또 그 자손들에게 물려주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말씀을 목숨보다 더 중하게 여기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신 6:4-9). 아무리 환경이 나빠도 자녀들에게 신앙을 물려주고 자녀들이 그 믿음을 이어왔다면 교회가 사라지지 않는다.
신약교회들이 복음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못하여 복음이 다른 지역으로 떠나버린 현상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나 역사 개입으로 해석하여 인간 노력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얼핏 보면 신앙적인 해석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바른 해석이 아니고 운명론이나 숙명론에 가까우며 하나님의 일관성과 배치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백성과 오늘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하시면서 이런 가정에는 천대까지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출 20:6). 이 명령에 순종하여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들에게 잘 가르치고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중간에 임의로 혹은 주권적인 섭리로서 촛대를 다른 지역으로 옮기신다고 하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히 13:8) 하나님의 일관성과 배치된다. 자손대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수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실제로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수하는 것은 인간의 의무이다. 하나님께서는 명령을 잘 순종하는 사람들로부터 주권적으로 그 촛대를 빼앗아 다른 곳으로 옮기시지는 않으신다. 순종하지 않으니까 옮기신다(계 2:5). 이 원리는 신명기 28장의 축복과 저주 원리에도 이미 나타났다. 순종하면 복을 주시고 불순종하면 저주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불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촛대를 옮기신 것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나 간섭으로 돌리는 것은 자기 책임회피이고 운명론 혹은 숙명론이며 이것은 비성경적이다.
V. 수직선교와 수평선교의 이해
신약교회가 오래가지 못하고 자꾸 사라지는 것은 자녀들에게 복음을 전수하는 수직선교에 대한 구약의 지상명령을 등한히 했거나 아니면 소홀히 한 것이 그 원인이다. 하나님께서는 땅의 모든 백성들이 구원받도록 구약과 신약에 각각 지상명령을 주셨다. 신약 지상명령은 땅 끝까지 이르러 모든 민족을 제자삼아 만민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것으로서 수평적 선교이고 구약 지상명령은 자녀를 제자삼아 말씀을 자손대대로 전수하는 수직적 선교이다. 행 1:8 이후 신약교회는 수평적 선교에 치중했다. 현대 선교학도 타 민족에게 복음을 잘 전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 타 민족에게는 복음을 잘 전해왔지만 자기 자녀들에게는 복음을 전수하지 못하여 교회가 사라졌다.
신약 지상명령이 마 28:19에 근거한다면 구약 지상명령은 창 18:19절에 기초를 둔다고 현용수 박사는 주장한다. 표준새번역 성경은 이 구절을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 그의 자손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하면 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다 이루어 주겠다” 이라고 번역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잘 가르치라는 수직선교가 그 핵심이다. 구약에도 요나서처럼 이방선교, 수평선교에 관한 내용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구약의 관심은 자녀들에게 말씀을 전수하는 수직선교이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하나님께서는 지상의 모든 민족을 포함시키셨다. 하나님께서는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으로 오실 예수님을 통해서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자손대대로 간직하고 전수할 것을 명령하셨는데 이것이 구약의 지상명령이다(창 18:19). 만약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명령을 지키지 못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중간에 사라졌다면(구약교회가 사라졌다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수 없었을 것이고 그러면 인간의 구원도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고 물론 오늘 신약교회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2,000년의 험악한 세월을 지내오면서도 말씀을 자손들에게 전수했고 교회를 지켜내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교회를 통해 오셨고 인류구원을 완성하여 그 소식이 “땅의 모든 족속”들에게 전파될 수 있도록 했다.
VI. 이스라엘인과 기독교인의 차이점과 공통점
이스라엘 백성이 전 인류를 위해 이렇게 위대한 일을 했으면서도 막상 그 메시아가 세상에 오시니 그들은 배척했다 (요 1:11). 그래서 바울의 말대로 복음을 마땅히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할 것이로되 그들이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선교사들이 이방인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행 13:46). 그 모진 세월을 견디며 지키고 전수해 온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니 그들은 거부했다.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인가! 그러는 동안에 지난 2,000년 세월이 흘렀다. 이것은 바울이 말한바 “...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 (고전 9:27) 된 경우라 하겠다.
기독교인들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르지 않다. 기독교인들 역시 심한 박해를 받았고 순교하면서 신앙을 지켜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을 남들에게 나누어 주기보다는 자기 자손들을 통하여 보존하고 전수하는데 전념한 것에 반하여 기독교인들은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점에서 그들과 다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 역시 어리석은 것은 남들에게는 나누어 주었지만 자기 자녀들에게는 전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직선교는 잘 했지만 수평선교를 못했고 기독교인들은 수평선교는 잘 하지만 수직선교를 못하는 차이점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기독교인들의 공통점은 둘 다 자녀들 세대에 예수님을 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자녀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느라고 예수님을 모르고 기독교인 자녀들은 벌써 예수님을 떠났기 때문에 예수님을 모른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기독교인들은 자녀들에게 예수님을 바로 가르치지 못한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또 다른 차원의 차이점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으므로 바울처럼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이 설득만 된다면 당장에라도 천국백성이 될 수 있다는 유리한 점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떠나 이방인이 된 기독교인 자녀들은 현재 터키인들이나 유럽인들처럼 되돌아오기가 힘든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세대 간의 바른 신앙이 전수되기 위해서는 자녀들에게 어려서부터 올바른 신앙교육을 하는 것의 중요성과 수평선교 만큼이나 수직선교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VII. 이스라엘인과 기독교인의 문제 해결방법
이스라엘 백성들과 기독교인들의 문제는 서로가 서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으므로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독교인들처럼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면 바로 천국백성이 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수하면 자녀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고 믿음을 지키면서 지속적으로 천국백성으로 살 수 있다. 이것은 서로가 서로에게서부터 배우면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독교인들로부터 예수님이 왜 메시아인가를 배우고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어떻게 자녀들을 제자삼아 말씀을 전수할 수 있는가를 배우면 된다. 이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인들이 나서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독교인들을 배우라고 하면 선민의식에서 오는 체면이 있어서 선뜻 나서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이 선교사를 보내어 그들에게 예수님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자손들에게 끊임없이 전할 수 있었는가를 배우는 것도 기독교인들이 먼저 나서야 한다. 역시 선민의식 때문에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자기들의 노하우를 선뜻 가르쳐 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VIII. 구약의 지상명령
구약에도 지상명령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살피면 그 답이 나온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죄를 범한 이래로 하나님의 일관된 관심사는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 3:15절에 약속하신 메시아를 보내어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한 나라를 이루고 그 씨를 통하여 메시야를 보내기로 작정하셨다(창 12:1-3; 마 1장). 그래서 마태복음 1:1절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을 따라서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가장 큰 이유는 그와 그의 후손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림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초림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특별한 명령을 주셨는데, 그것이 창 18:19에 나타난 말씀이다. 이 명령은 선교적인 면에서 신약의 지상명령과 쌍벽을 이룰 만큼 중요한 것이므로 쉐마교육연구원의 현용수 박사는 구약의 지상명령이라고 명칭을 붙인다. 신약의 지상명령은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수평적 선교로서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인데 반하여, 구약의 지상명령은 말씀을 수직적으로 자손대대로 전수하여 예수님의 초림을 준비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아브라함은 이 말씀에 따라서 자녀들을 가르쳤고 또 그 자녀와 후대들에게 자녀를 낳으면 그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말씀의 제자 삼도록 명령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함이다(창 18:19e).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창 12:3)이며, 그의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 것”(창 22:17-18)이라는 것이다. 이 약속은 구약시대에 이루어지지 않고 신약시대에 이루어졌다. 즉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신 후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올 때에, 그들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됨으로(갈 3:6-9), 그의 씨가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이라는 말씀이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이 원대한 계획을 준비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택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창 12:3)는 언약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는데, 그 조건은 그의 후손들이 아브라함으로부터 배운 대로 실천해야(창 18:19c)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선조들로부터 내려오는 말씀을 전수받아 그대로 행했을 때라는 조건을 붙이셨다. 만약 그 자손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이루어 질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지도 않고, 지켜 행하지 않으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부모가 자녀에게 말씀을 전수하는 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류 구속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반드시 해야 할 하나님의 지상명령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은 말씀의 올바른 전수에 민족적인 사명을 걸었고 서기관들은 말씀의 정확한 필사에 생명을 바쳤다.
IX. 구약 지상명령과 신약 지상명령의 연속성
구약의 지상명령이 초림 예수님을 예비하기 위한 것이라면 신약시대 이후에는 그것이 폐기되어 신약의 지상명령과 단절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말씀을 전수하는 가정적인 사역에서 더 확장하여 하나님의 본래 의도하신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도록’ 더 확장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가정에서 수직적으로 전수되어 오던 내용이 수평적으로 땅 끝까지 전하는 것으로 발전되었다. 수평적으로 모든 민족에게 확장하라는 말씀은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수직적으로 전하는 것을 그만두라는 말씀은 아니다. 수직적으로 해 오던 것은 그대로 계속하면서 이제는 수평적으로도 전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과 유대에만 치중하지 말고 사마리아나 땅 끝도 관심을 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교회는 오히려 사마리아나 땅 끝에만 치중하고 예루살렘과 유대를 소홀히 하여 자녀선교를 하지 못하여 그 결과로 그 자리에서 교회가 사라졌다. 구약교회와 정반대 현상이 일어났다. 자녀세대가 복음을 모르니 교회당이 모스크로 팔릴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수평선교를 할 인력도 사라져서 수평선교도 사라졌다.
신약의 지상명령인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a)는 말씀에는 ‘분부한 모든 것’이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에는 구약의 ‘교육내용’과 ‘지켜 행하게 하는 임무’인 수직선교가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임으로(요 1:14), 이 말씀 속에는 구약말씀 모두가 포함되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도 실제로 구약을 여러 번 강조하셨다(마 22:37; 막 12:30, 12:33).
X. 수직선교와 수평선교의 균형과 조화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이래로 하나님의 일관된 관심사는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구원자 예수님을 준비하셨다(창 3:15).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게 준비하시기 위하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구약의 지상명령 쉐마(창 18:19; 신 6:4-9)를 주셨다. 예수님께서 구원사역을 완성하신 후 이 복음으로 전 세계 열방을 구원하시기 위해 신약의 지상명령(마 28:19-20; 행 1:8)을 주셨다. 즉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두 가지, 구약과 신약의 지상명령을 주셨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지상명령이고, 신약시대에는 예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지상명령이다. 구약의 지상명령은 초림 메시아 예수님을 준비하기 위함이고, 신약의 지상명령은 초림하신 예수님(복음)을 모든 이방 민족에게 전파하여 재림하실 예수님을 준비하기 위함이다.
전자가 ‘쉐마’에 기초한 가정사역의 사명이라면, 후자는 교회 공동체가 해야 할 이웃 전도와 세계 선교의 사명이다. 전자가 부모가 가정이라는 성전에서 자녀를 말씀으로 양육하여 말씀의 제자 삼는 사역이라면, 후자는 목회자가 교회 공동체라는 성전에서 구원받은 이웃들을 말씀으로 양육하여 말씀의 제자 삼는 사역이다. 구약의 쉐마가 혈통적 유대인을 중심으로 한 가정사역이 본질이라면(창 18:19; 신 6:4-9), 신약의 지상명령은 구원받은 교인을 중심으로 한 교회 공동체 사역이 본질이다(사도행전 2장 이후). 전자가 수직전도라면 후자는 수평전도다.
현재까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지 못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종말론적 입장에서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받을 만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아직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롬 11:25). 왜냐하면, 신약시대 기독교 역사를 보면 한 지역이 복음화 되면 복음을 전한 지역 교회가 사라져 갔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약시대 교회들이 신약의 지상명령인 수평적 선교에는 성공했지만,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말씀을 전수하라는 구약의 지상명령인 수직적 말씀전수에는 실패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신약교회는 2,000년간 이런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인가? 그것은 구약의 지상명령(창 18:19; 신 6:4-9)과 신약 지상명령(마 28:19-20)을 함께 수행해야 한다. 현대 목회자들도 우선 자신의 첫 번째 목회 현장은 가정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자녀를 제자삼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지상명령과 신약의 지상명령은 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완수해야 한다. 이렇게 구약과 신약의 지상명령이 짝을 이루어 완수될 때 온 세계 모든 민족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이 짝을 이루어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처럼, 사역도 구약과 신약의 지상명령, 즉 가정사역과 교회사역이 짝을 이루어 행할 때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온전히 이룰 수 있다. 신약시대에 모든 기독교인은 구약과 신약의 지상명령을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함께 성취해 나가서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
XI. 성경적 선교학을 다시 써야 한다
지금까지 신약교회의 선교학은 수평선교학이다. 선교의 정의도 타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에 초점이 있고 선교학의 커리큘럼도 모두 타민족, 타언어, 타문화 등을 중심으로 짜여있다. 어떻게 하면 복음을 타 민족들에게 잘 전할 것인가가 주 관심사이다. 그렇게 하다가 보니 자기민족과 자기 자녀들을 잃어버렸다. 어느 누구도 자기 자녀들이 지옥가기를 바라겠는가마는 실제로는 그렇게 되었고 지금도 그렇게 되고 있다. 이제부터는 자기 자손들에게 관심을 쏟아야 한다. 그러나 신약교회는 타민족 선교를 위한 방법론은 발전시켜왔지만 자기자녀 선교방법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그래서 현대 교회 자녀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90% 이상이 교회를 떠나 이방인이 되고 만다. 이제 우리는 구약의 지상명령을 회복해야 한다. 구약의 자녀교육 방법인 쉐마를 배워야 한다. 스스로 배우기 힘들면 이것을 아직도 잘 간직하고 있는 정통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배우면서 우리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러면 모두가 살 길이 생긴다. 한국교회는 수평선교학의 한계를 벗어나 수직선교학을 회복하여 균형 잡힌 성경적 선교학을 새로 세워야 한다. 그리하여 한국 선교사들은 성경적 선교학의 원리로 선교하여 세계 복음화를 이룩하고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
2012년 08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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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대한 네티즌 의견
정태홍
[2012-08-03]
현용수 박사의 쉐마교육 과연 성경적인가?
선교사님~
제가 먼저 쓴 글에 대하여
좀 더 유익이 되고자
현용수 박사의 쉐마교육이 성경적인지
제가 현용수 박사의 책과 강의를 비판하고
분석해 놓은 자료가 있습니다.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래의 링크를 복사하셔서
주소창에 붙여넣으시고 엔터를 치시면 됩니다.
http://www.esesang91.com/board.php?board=kkkcolumn&category=2
정태홍
[2012-08-03]
현용수 박사의 쉐마교육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쉐마인지요?
남후수 선교사님께~
선교사님~
선교사역에 얼마나 노고가 많으신지요~~
사역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나시고
선교사역에 크신 역사가 있기를 소원하오며,
더운 여름철에 더욱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선교사님~
선교사님께서 올리신
"선교학을 새로 써야 한다" 장문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현용수 박사의 쉐마교육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쉐마인지요?
저는 현용수 박사가 정말로 성경에 나오는 쉐마를 말하고 가르친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겠습니다.
그러나, 현용수 박사의 쉐마는
자신의 논리를 증명하기 위하여 성경을 인용하는듯하지만,
실제로는 성경에서 벗어난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남후수 선교사님~
제가 우선 다음과 같은 내용을 여쭙고 싶습니다.
현용수 박사는 13세 이전에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서,
양반교인이 되느냐? 쌍놈 교인이 되느냐?를 말하고 있습니다.
(http://www.esesang91.com/board.php?board=kkkcolumn&page=1&category=2&command=body&no=443)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8-29)
그런데 왜 13세 이전에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서
양반교인, 쌍놈교인이 된다고 할까요?
현용수 박사는
박윤선 박사, 한경직 목사 박형룡 박사 이런 분들은
수많은 기독교인들 중에 인격적이었던 것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들은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 한학을 공부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분들은 서당에서 한한을 공부했기 때문에
인격적이고 몸 가짐이 얌전한것이라 말합니다.
특히 도산 안창호 선생은 모든 한국민족의 지도자 반열의 1위에 오른 이유가
17세 이전에 서당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http://www.esesang91.com/board.php?board=kkkcolumn&page=2&category=2&command=body&no=413)
남후수 선교사님께 여쭈고 싶습니다.
과연 이런 말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쉐마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