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아브라함 카이퍼, 네델란드 교육 제도 - 세상을 포기해야 하는 이유
개혁교회 경험에 비춘 한국교회 정치참여에 관하여
하나님의 손안에 겸손한 태도를 가지자.
이세령 목사
▲ 이세령 목사
코닷연구위원장
기독교인들이 한국 사회에서 정치에 참여함으로 사회를 조금 더 선한 방향으로 이끌 가능성이 있는가? 필자는 있다고 본다. 그리고 있다면 그 가능성의 근거는 무엇인가? 역시 성경적인 복음에 있다.복음을 가진 성도들이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선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섬긴다면 조금은 더 나아진 사회가 되리라고 본다. 복음의 은혜에 충실한 것이 죄를 이기는 힘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나 개혁파 신학이 낙관적인 측면에서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다. 전적인 타락이라는 현실을 놓고 볼때 결과적으로 소위 선지자적 비관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죄를 이기는 것은 복음이다. 그러나 세상은 전적인 타락의 현장이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가지고 타락한 세상을 살고 있다. 이런 모순적인 신앙고백을 가진 개혁파 성도들이 정치라는 국면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세상이 변화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낙관적이며 비관적인 차원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런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하나님 주권적인 손을 의지하게 된다. 낙관적으로 역사가 갈 것인지, 아니면 비관적으로 흐를지는 하나님의 손안에 달려있다.
몇가지 이야기를 한다.
먼저 필자가 살았던 네덜란드의 교육이야기를 하겠다. 오늘날과 같은 네덜란드의 교육제도의 틀은 아브라함 까이퍼가 틀을 놓았다. 그 특징은 먼저 공립과 사립이 모두 국가의 재정 지원을 받아서 운영되는 시스템이다. 둘째로 부모의 이데올로기(신앙을 포함)에 의해서 자녀의 학교를 선택할 수 있다. 자녀 교육의 권리가 부모에게 있다는 것을 존중한다. 물론 엡6:1-3에 근거한 것이다. 셋째로는 부모의 신앙과 동일한 신앙을 가진 교육 전문가에게 자녀를 맡기도록 사립학교를 설립할 권리가 주어졌다. 그리고 그 사립학교의 교원을 양성하는 사범학교도 세웠다. 여기의 재정에 국가가 차별없이 지원한다.
이렇게 성도들이 자신의 자녀 즉 언약의 자녀를 신앙으로 양육하려는 의지가 흐룬 반 프린스터에게서 일어나서 아브라함까이퍼의 정권에서 열매를 맺었다. 이때 자유대학이라는 사립대학이 설립되었다.
오늘날 한국 상황에서 사립학교에 아이를 보내면서 돈 일원한푼 내지 않는 공교육과 같이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현실적이지 않는 이야기인가? 대안학교 혹은 기독교 학교들에 자녀를 보내기 위해서 얼마나 비싼 등록금을 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지원하는 교회들의 희생으로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하나님의 주권이란 이름으로 약 120년 전에 네덜란드 개혁파 정치 집단의 노력으로 이루어내었고,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제 시간이 흘렀다. 오늘날 네덜란드 사회는 한국보다 훨씬 다 문화사회로 접어들었다. 이슬람 집답이 인구에 7-8%에 이른다. 개혁파 정당은 아니지만 기독정당이라고 이름하는 정당에는 공식으로 무슬림 의원을 한명 둔 것을 보았다. 이렇게 이슬람의 인구가 많다. 유럽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한국도 이슬람의 중요 목표지점이란 소릴 들었다.
여기서 아브라함 까이뻐 시대에 이루어논 개혁파 정신에 의거한 정치적 노력의 열매가 문제가 되고 있다. 부모의 신앙(이데올로기)에 의한 자녀 교육의 권리가 문제가 되고 있다. 이슬람 사람들도 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을 이슬람 학교에 보내겠다고 한다. 이것은 사회 통합의 큰 문제로 부각되었다. 무슬림들이 네덜란드 말도 배우지 않고 자기들끼리 게토를 형성해서 살면서 살고 있어서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다음 세대들까지도 이슬람 방식으로 교육을 시킨다면 보편적 가치에 의한 교육을 지향하면서 사회 통합을 이루어내려는 국가의 노력이 위기에 맞는다. 그래서 이민 일세대는 그렇다치러다도 다음 세대들은 보통의 교육을 받도록 사회가 노력을 한다. 여기서 걸림돌이 있다. 바로 기독교 사립학교이다. 왜 기독교인들은 사립학교를 설립해서 국가 지원을 다 받으면서 교육을 하고 있으면서 이슬람들은 차별대우를 하는가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으로 인해서 많은 논의를 거치면서 기독교 사립학교의 폐지에 대한 논의가 많이 거론되고 있다. 즉 국가의 재정 지원을 줄이는 것이다. 백년전에 종교는 기독교 밖에는 생각하지 못하던 그런 시절에 세운 개혁파 정치가들이 세운 최선의 정치적 노력의 결실들이 이제 상황이 바뀌어서 사회의 큰 짐이 되고 있다.
두번째 이야기는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아브라함 까이뻐의 영역 주권이란 개혁파 이론이 있다.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미친다. 이런 이론에 근거해서 개혁파 기독 정치가 자라났다. 그러나 이 이론이 남아공화국에서 치욕적인 열매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분리) 정책의 사상적 배경이 된다. 물론 타락한 적용이라고 본다. 각각의 집단들의 권리가 충돌될 때 무엇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가? 혈통적인 차이가 권리가 우선된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백인종과 흑인종의 영역은 자연의 영역이기에 다른 어떤 것에 우선되는 구별점으로 이해되었다. 타락한 인간의 집단적 이기심을 바탕으로 소위 신칼빈주의 정치 철학이 배경이 된 최악의 작품이기도 하다.
세번째 이야기는 유럽에서 종교 개혁 시대를 보자.
독일은 종교개혁에서 성공한 나라이다. 루터는 제후들의 도움으로 슈말칼덴 동맹을 지휘하면서 그 동맹을 이끌었다. 뮐베르그에서 동맹군이 칼 5세와의 전투에서 패배를 하는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을 지났지만 작센의 선제후 마우리스 공이 마음을 돌림으로서 칼 5세를 굴복시키고 아우구스부룩 화의를 이끌어내어 루터파 중심의 종교개혁을 독일에서 안정을 시켰고 이후 북 유럽과 오스트리아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친다.
프랑스를 보자. 칼빈의 조국이다. 칼빈은 조극을 떠나 망명의 세월을 스위스 제네바에서 보냈다. 프랑스는 신성로마 제국 황제와의 세력 다툼의 틈 바구니에서 개혁파 신학을 발전 시키기도 했지만 대부분 카톨릭 정권에 의해서 핍박을 받았다. 1572년의 바돌로뮤 학살 사건과 낭트 칙령을 철회하는 루이 14세의 선언(1685)에 의해서 기독교는 핍박과 광야로 내몰렸다. 이후 18세기 종교의 자유가 찾아오지만 그러나 개신교는 아직까지 미미한 상태이다. 프랑스 위그노들의 종교개혁은 이렇게 전개되었다.
스위스가 자유도시라는 배경을 가지고 도시 의회를 중심한 개혁파 종교개혁을 상당부분 이루어내었다. 그러나 쯔빙글리가 2차 까뻴 전투에서 전사하는 것에서처럼 모든 스위스의 칸톤(주)들이 개혁파 신앙으로 돌아선 것이 아니다. 물론 칼빈과 같은 철저한 개혁파 신앙을 견지하는 노력이 제네바와 같은 좋은 그리스도의 학교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로잔의 아카데미는 베른의 정치적 영향력아래서 개혁파 신앙을 철저히 견지하지 못하고 그 교수들이 제네바로 옮기게 된다.
이제 대선이라는 정치의 계절이 왔다. 어떤 사람을, 어떤 정당을 선택해야 하는가? 답이 있을까? 그동안에 출마했던 분들보다는 훨씬 일관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실질적인 성장이나 안정 그리고 약자에 대한 배려 그로인한 복지 정책, 시대적 과제로 떠오른 양극화 현상의 극복 등을 위해서 누구도 증세를 이야기 하지 않는 현실이 필자에게는 안타까울 뿐이다. 정직하고 솔직한 정치가 가능한 시대를 만들어 볼수 있지 않을까? 1등이 아니어도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정치력이 존재한다고 필자는 믿는다.
우리는 정치가 가진 매력을 알고 있다. 그러나 쉽지 않는 길이다. 개혁파 신앙인들이 정치에 헌신하는 것도 좋은 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겸손이 언제나 필요하다. 땅위에서 한계가 있는 노력이다. 복음의 은혜를 가지고 세상을 섬기는 한 방편으로 노력을 하지만 그러나 낙관일지 비관일지 모르는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성경에서 손은 전쟁적인 용어임과 동시에 정치적 손이기도 하다. 그럼으로 겸손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의 한계내에서 겸손한 판단을 하면서 서야한다. 인물을 중심하든지, 정책과 공약을 보든지 좋다. 우리가 온전하지 못하다. 조금 나은 세계를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허락하시도록 은혜를 구하면서 나아가보자.
2012년 12월 0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