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박희천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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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 박희천 생애



기 / 획 / 특 / 집 - 역사의 현장 속으로 원로와의 대화 ? / 박희천 목사와의 대화
“부지런히 성경 읽어야 강단이 개혁됩니다”
2013.01.31 10:19 입력

▲박희천 목사
?1927. 12. 24. 평남 순천군 출생

?1948-49 평양신학교 수학

?1956. 2. 고려신학교 졸업

?1961. 2. 숭실대학교 영문과 졸업

?1967. 5. 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신학석사(Th. M.)

?1968. 미 칼빈신학교 수학

?1968-95 총신대학신학대학원 설교학

?1974-77 표준성서 번역 위원

?1975-98 내수동교회 부임 담임 목회



사랑으로 본문읽기를 강조했고, 일생동안 성경적 설교와 실천을 통해 바른 설교가 무엇이며, 성경적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줬다. 또 박 목사는 총신대학교에서 28년간 헬라어, 설교학, 성경해석학 등을 가르친 신학자이기도 하다. 고려신학교 제10회 졸업생이기도 한 박희천 목사는 고려신학교에 대한 애정과 고신교회에 대한 사랑이 특별하다. ‘표준성경’ 번역위원으로도 활동하며, ‘나의 설교론’, ‘사무엘상’, ‘사무엘하’ 외 여러 권의 책을 펴내기도 하셨다.



지난 1월 11일, 고신역사관 김흥식 연구원과 함께 서울 마포구 현석동 220번지 밤섬 현대아파트 자택으로 박 목사를 찾아가, 오직 한 길, 말씀연구에 전념해 오신 그의 삶의 여정을 들었다.



■ 이상규 부총장 / 고신대학교










이상규 교수 : 목사님! 지면으로는 목사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뵙게 되니 반갑습니다. 1974년, 75년 무렵입니다만 제가 ‘신학지남’에서 목사님의 글을 읽은 일이 있는데, ‘예언해석’에 대한 글인 것으로 기억됩니다만 거의 40년 전의 일입니다. 글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그때부터 목사님을 지면으로 대했는데 이렇게 직접 뵙게 되니 저로서는 감사한 일입니다.



박희천 목사 : 이렇게 멀리까지 와 주시니 감사합니다만 저에게 뭐 들을 이야기가 있겠습니까? 신학지남에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만 그 때 글 쓸 사람이 없다고 해서 글을 쓰게 되었지요.



이 교수 : 제가 알기로 목사님은 이북에서 월남하신 것으로 압니다만 이북에서 어떻게 신앙생활 하시게 되었습니까?



박 목사 : 저는 평안남도 순천(順川)에서 출생했는데, 1927년생입니다. 불신가정에서 출생했는데, 제 어머니가 교회 가면 좋은 말씀 듣는다면서 교회에 나가도록 권해서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6, 7세 때부터 주일학교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교수 : 그 교회가 어느 교회였습니까?



박 목사 : 평안남도 대동군 김재면 애제리의 장현교회인데, 리(里) 소재지 교회였지만 면(面)소재지 규모의 교회였어요. 좀 후의 일입니다만, 1932년 1933년 무렵에 권세열(Francis Kinsler) 선교사가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숭실학교 학생들을 계몽활동 하도록 지역교회에 보냈는데, 그렇게 하면 학생들에게 한 학기 장학금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 때 학생들이 제가 다니던 교회에까지 와서 봉사했는데, 그런 일로 숭실학교도 알게 되었고 또 신앙생활하게 되었지요.



이 교수 : 목사님이 평양에서 이미 신학교에 다니시지 않았습니까?



박 목사 : 제가 평양상업학교를 다녔는데, 상업이 좋아서 간 것은 아니고 당시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천거로 가게 되었어요. 평양상업학교를 졸업한 후인 1948년에 평양신학교 입학했습니다. 이듬해 10월까지 4학기 수업하고 학교가 폐쇄되었어요. 그때 김인준 목사님이 잠시 교장을 하셨고, 이성휘 박사가 가르쳤지요. 공산정권 하에서 신학교를 더 이상 운영할 수 없게 되어 폐교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다가 6.25 동란 중에 월남했습니다. 25명의 가족들이 같이 월남 길에 올랐습니다만 짐을 지고 이동하다 보니 하루 30리도 못 갔습니다. 저는 24살 때였는데, 전란 중에 저가 앞서 월남하게 되었고 결국 가족들과 헤어지게 되었지요.



이 교수 : 전란 가운데서 단신으로 월남하셨으니 고생도 많이 하셨겠습니다.



박 목사 : 말로 다 못하지요. 우리는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몸으로 체험했지요. 공산당 참으로 끔찍합니다. 저는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몸으로 체험하지 않았습니까! 남한의 종북주의자들 보면 한심하지요. 제가 1948년 11월부터 전도사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월남하여 대구까지 왔고, 감사하게도 대구 서부교회 전도사로 일하게 되었어요. 그 때 박윤선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박 목사님의 도움으로 학기 중간이지만 부산으로 와 고려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어요. 고려신학교에서 교육 받게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제가 고려신학교에서 5년간 공부하고 1956년 3월 제10회로 졸업했습니다.



이 교수 : 그 때 교수하신 분들이 박윤선, 이상근 목사님 등이었지요? 교수님들에 대한 인상이 어떠했습니까?



박 목사 : 그 때 교수하신 분들이 박윤선, 이상근, 박손혁 목사님, 선교사로는 마두원, 최의손, 한부선 목사님 그리고 김철현 선생 등이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학자이자 생활의 경건성을 지니신 분이었고, 이상근 목사님 또한 학자로서 경건하신 분이셨습니다. 이 두 분이 기억에 오래 남아 있습니다.



이 교수 : 부산으로 오신 후에는 남교회에서 일하셨던가요?



박 목사 : 그렇지요. 남교회 한명동 목사님 밑에서 5년간 전도사 일했지요. 그 후 한명동 목사님의 천거로 삼일교회로 가서 2년 7개월간 일했습니다. 삼일교회서 일한 기간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기간이었습니다. 당시 고려신학교 학생이 백여 명 정도였는데, 학생들의 소원이 최소한 1년 정도라도 한상동 목사님 밑에서 배웠으면 하는 그런 기대를 가졌는데, 제가 3년 가까이 한 목사님 밑에서 일했으니 소중한 기회였지요. 더군다나 첫 7개월간은 한 목사님 집에서 하숙을 했고, 하루 3끼 식사를 한 목사님과 겸상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한 목사님을 가까이에서 뵙고 지냈습니다. 한 목사님의 식구 외에는 나만큼 한 목사님을 잘아는 이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이 교수 : 목사님께서 보신 한상동 목사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박 목사 : 제가 볼 때 한 목사님께는 본받을 만한 10가지 정신이 있었습니다. 6가지는 한 목사님 개인적인 것이고, 3가지는 목회와 관련된 것이고, 나머지 한 가지는 교회지도자로서의 정신인데, 이 점에 대해서는 책을 써서 후대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소개해 보지요. 첫째로 한 목사님은 정직한 분이셨습니다. 바보스러울 정도로 정직한 분이셨지요.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말씀 한마디를 생명처럼 소중히 여겼어요. 이 교수님도 아시는 바처럼 김두석 선생은 일정 때 초등학교 교사가 아니었습니까? 신사참배를 거부하면 사표를 내야하는데 사표를 내면 생계를 이을 수가 없게 되는데, 이 일로 한상동 목사님을 찾아와 상담을 했습니다. 한 목사님으로서도 사표 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지요. 그 때 한 목사님은 마태복음 6장의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는 그 본문 말씀을 말하시면서 “이 말씀을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김두석 선생이 “믿든다”고 대답하니까 “그럼 됐구먼” 이것이 답이었습니다. 짧은 말 속에 깊은 생각이 들어 있다고 봅니다. 한 가지 사례입니다만 말씀에 철저하게 사셨지요. 셋째는 인간의 무능력을 철저히 인식했습니다. 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이 능력 주셔야 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넷째는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셨어요.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지 인간은 영광 받을 대상이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겸손하셨습니다. 여섯째는 철저히 ‘자신은 인간이다’라고 인식하고 사셨습니다. 잠시라도 주님 붙드심이 없으면 누구든지 미련해지고 약해진다고 믿었지요.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철저하게 인식한 것입니다. 한 목사님이 이런 분이셨기 때문에 교회 분열 문제로 시끄럽고 혼란스러웠을 때 제가 알기로 총회파에서 고려파는 욕했지만, 한상동 목사 개인을 욕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교수 : 한상동 목사님이 가지셨던 목회자로서 3가지 정신은 무엇이었습니까?



박 목사 : 첫째는 교회가 잘된다면 나 개인은 고생을 하던 망신을 당하던 상관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 가지 사례를 말씀 드리지요. 1957년 7월 달에 있었던 일인데, 한 목사님의 사택과 제 집과는 6백 미터 정도였어요. 그런데 주일날 아침 일찍이 제게 찾아오셨어요. “전도사님” 하시더니 오늘 설교준비가 안됐다면서 “이대로 나서면 교인들이 손해를 보니 조사님이 설교해 주세요. 누가 설교한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라고 하시면서 저더러 설교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지요. 목사가 강단에서 죽을 쑤기보다는 조사가 은혜를 끼치면 교회에 유익하다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설교준비가 안됐다는 것은 정직한 말씀이고, 교회 유익을 생각한 것은 개인보다 교회가 우선이라는 생각을 보여준 것이지요. 이렇게 생각하는 목사가 많지 않습니다. 누가 감히 담임목사가 서야 할 강단에 전도사를 세웁니까? 이런 것을 보면 교회가 우선이라는 생각을 하신 것이지요. 둘째는 수하의 부교역자를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었습니다. 맘에 들지 않아도 내보내려 하지 않고 끝까지 참고 인내하고 좋은 길이 열리기까지 기다려주셨습니다. 요즘의 당회장과 부교역자 관계를 생각해 보면 알지 않습니까? 저도 그래서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이런 정신을 배우고 실천해왔습니다. 셋째는 ‘바라고 의지하라’는 그런 정신으로 목회하셨습니다. 한 목사님은 어려운 일이 생겨도 사람 만나서 정치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해결하실까 생각하시면서 끝까지 바라고 주님 의지하신 분이지요. 마지막으로 교회지도자로서 한 목사님의 모습인데, 그는 회의 할 때, 총회장으로 일하든 노회장으로 일하든 사회할 때 보면 절대로 화를 내지 않습니다. 사회자가 화를 내면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그런데 화내지 않고 회의를 주제했습니다. 제가 내수동교회 목회할 때도 이런 모습을 모델로 삼았지요.



이 교수 : 한 목사님의 설교는 어떠했습니까?



박 목사 : 한 목사님은 입의 설교가 아니라 생활의 설교자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힘이 있고 감동을 주었어요. 고려신학교 경건회 설교는 거의 다 박윤선 목사님이 담당했고, 한 목사님은 일 년에 한두 번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1956년 2월경 졸업을 앞둔 때였는데, 한 목사님이 오셔서 경건회 설교한 일이 있어요. 그 때 디모데후서 2장을 본문으로 ‘참되게 살자’는 제목으로 설교했는데, 하나님은 참된 자와 손잡고 일 하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한 목사님의 생활이 지지해 주는 설교였으니 큰 은혜를 받고 120여명의 신학생이 다 울었습니다. 그 때의 설교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쉬운 것은 우리의 신학교가 너무 냉랭하다는 점입니다.



이 교수 : 고려신학교를 졸업하신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셨던가요?



박 목사 : 졸업 후에 서울로 가서 용산구의 성광교회에서 4년 일하다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갔습니다. 이 때 기억에 남은 교수 중에 에드워드 영(Edward Young) 교수와 스킬튼(John Skilton) 교수가 있습니다. 이 두 분은 아주 경건한 분이셨는데 저는 이 두 분은 20세기 보수신학을 위해 하나님이 특파하신 분이라고 생각하지요. 학적으로도 깊이 있는 분들이지만 영적으로도 감동을 주는 분이었습니다. 스킬톤 교수는 학생 한사람 한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아주 진지하고 모범적이었습니다. 저에게 개인적으로 헬라어를 지도해 주었습니다. 그 분주한 교수가 동양에서 온 학생 한사람을 위해 별도의 시간을 만들어 개인지도해 준 일은 대단한 배려였습니다. 잊을 수가 없지요. 그 후 칼빈신학교에 가서 1년을 지냈는데, 칼빈의 교수들은 학적으로나 영성에 있어서 웨스트민스터에 비해 크게 떨어졌어요.



이 교수 : 귀국 후에는 가르치시기도 하고 목회도 하셨지요?



박 목사 : 귀국 후에는 동대문의 동원교회, 그리고 후임제일교회에서 목회하다가 1975년 3월에 내수동교회에 부임했지요. 총신대학교에서는 28년간 가르쳤는데 헬라어를 가르치다가 신약학, 설교학 등을 교수했습니다.



이 교수 : 목사님께서 28년간 가르치셨으니 많은 제자를 배출하셨겠습니다. 특별히 기억나는 분이 있습니까?



박 목사 : 여러 사람을 언급할 수 있지만 김수흥 목사 같은 분이 있습니다. 박윤선 목사의 조카사위인데, 서울대학교에서 언어학을 공부했는데, 실력도 있고 인격도 잘 갖춘 그런 제자이지요.



이 교수 : 목사님께 살아오시면서 여러 스승으로부터 영향을 받으셨겠지만 특히 기억나는 분이 있을 텐데 소개해 주시지요.



박 목사 : 여러분을 들 수 있는데 신학적으로는 박윤선, 에드워드 영, 스킬톤 등을 들 수 있고, 신앙적으로는 한상동 목사의 영향을 받았습니다만 제일 큰 가르침을 주신 분은 북한에 있을 때, 최원초(崔元初) 목사님으로부터입니다. 1947년 5월 당시 초등학교 교사였는데, 그 때, 최 목사님이 저에게 성경 본문을 많이 보라고 권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 그 후 66년간 그 어른 교훈대로 성경본문을 많이 읽고 묵상하고, 본문을 깊이 연구해 왔습니다. ‘성경 본문을 많이 읽으라’는 권면은 다른 이가 줄 수 없는 도전이었습니다. 당시 최원초 목사님은 순천의 기탄리교회에 시무하셨는데, 제가 다니던 교회와 같은 시찰의 목사님이셨기에 제가 알게 된 것입니다. 최원초 목사님은 빌립보서를 3천 번, 계시록을 1947년 말까지 1만 번 읽으셨고 헬라어를 자습한 분이였지요. 진정으로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연구하신 분인데, 6.25때 순교하셨지요.



이 교수 : 목사님께서는 새벽기도 하신 후에는 무릎을 꿇고 성경을 읽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고 하루 4시간씩은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듣고 있습니다. 오늘의 신학도들이나 목회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후학들이나 신학도들에게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박 목사 : 거듭 말하지만 힘 있는 설교 하려면 우선 본문 읽기에 열중해야 합니다. 설교를 잘하는 방법은 성경 본문에 대해 박식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은 깊이가 어느 정도냐가 설교를 결정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어서 본문을 깊이 있게 보게 된 사람을 당해낼 자가 없지요. 설교는 누가 뭐라고 해도 성경을 얼마나 보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전도서에 보면 “지혜로운 자의 조용한 말이 미련한 자의 호령보다 낫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한국교회에는 “이렇게 하면 설교 잘할 수 있다”는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데, 그것은 일어서거나 걷지 못하는 앉은뱅이에게 높이뛰기 잘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격입니다. 저는 ‘본문을 많이 읽는 것’이 신학도들에게 있어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과제라고 봅니다.



이 교수 : 고신교회에 대해 충고해 주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박 목사 : 저는 고신에 남아 있지 못하고 합동교단에 속하게 되었습니다만 고려파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북에서 오신 분들 다 한상동 목사와 등지고 고신을 떠났지만 저는 다릅니다. 비록 고신에 남아 있지 못했지만 저는 고신에서 참된 신앙의 순수성을 배웠습니다. 제가 출옥성도들과 직접적으로 교제하게 된 일을 감사하고, 그것에 저에게 약이 되었습니다. 충고해 줄 말이 없느냐고 물으니까 참고로 말씀 드립니다만, 박윤선 목사님은 훌륭한 학자이셨으나 행정은 잘 몰랐습니다. 그 분 뒤에는 신앙과 행정, 이 두 가지를 잘 갖추신 분이 울타리가 되어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잘 갖추지 못한 분들이 주변에 있어 누가 되기도 했다고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그를 도와주기 보다는 그를 이용하려는 이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고신의 귀한 학자이셨지요. 고신교회에 충고한다면 한상동 목사님 같은 분들의 정신을 체계화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 교수 : 분주하신 중에서 귀한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 가지를 배우고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목사님의 바른 설교에 대한 가르침, 본문 읽기에 열심을 다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가장 기본적인 말씀이지만 소홀히 여기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값진 충고라고 생각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앞으로도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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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자의 고향] 오정현 목사와 서울 내수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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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1.23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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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중심은 교회… 섬김의 길을 인도한 곳이 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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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사랑하는 책 지금 해어졌으나 우리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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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어린 시절은 찬송가 그대로였다. 내게는 어머니께서 들려주시던 성경이기도 했지만 아버지와 할아버지께서 들려주시던 성경이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손자 사랑의 으뜸이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계셨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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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서너 살 되던 때부터 무릎 위에 나를 앉혀 놓고 성경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그리고 늘 성경을 덮으시며 나에게 해주시던 말씀은 목회자의 길로 예비하신 하나님과 나만의 묵계가 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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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이는 모세같이 되거라. 모세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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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했지만 기쁨이 있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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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태어난 곳은 경상북도 의성. 할아버지 품에 안겨서 다니던 교회는 의성 삼분교회였다. 그 당시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세웠던 어머니 같은 교회로 큰 교회는 아니었지만 시골 교회에서 부친 세대에 20여명의 목사가 동시에 나왔으니 대단한 영풍이 불었던 곳이다. 그곳에서 증조할머니께서 처음 예수를 믿고 할아버지께서 그 신앙을 이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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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가 가졌던 믿음의 행보를 좇아 철저한 신앙생활을 하던 우리 가족은 가야제일교회를 개척하게 된 아버지(오상진 목사)를 따라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때 나이 일곱, 교회는 부산의 변두리 가야동 난민촌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었다. 교회 바로 아래에는 암자가 있었는데 나와 동생들이 지나갈 때면 누군가 돌멩이를 던지기도 하고, 큰 아이들이 위협하면서 때리기도 했다. 단지 예수쟁이가 지나간다는 이유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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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당시 목회자 가정이 다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 가족 역시 배를 곯아야 했고 제대로 입지도 못하며 자라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철없는 나에게 일상에서 우선은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다. 그런 배움 때문인지 예배의 경건이 몸에 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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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딱딱하고 차가운 개척교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으면 무릎이 시려오곤 했지만 학교에 갈 때도 교회에 들러 기도를 하고 등굣길에 나섰다. 동생(오정호 목사 새로남교회)과 함께 성경 퀴즈대회에 나가 수상을 놓친 적이 없었는데, 아마도 내 나이보다 많은 횟수만큼 성경을 읽었던 것이 힘이 되었던 것 같다.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부터는 등사기에 잉크를 묻혀 밤을 새워가며 교회주보를 만들었고 열여섯 살 때에는 난생 처음으로 주일학교 학생들 앞에서 설교까지 감당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이 가난한 달동네 개척교회 목사의 아들로 경험해야 했던 십대의 시간들이었다. 민감하고 자존심 하나로 똘똘 뭉쳐 있었던 시절이었기에 어려운 환경은 뼈에 사무칠 정도로 낙심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의 값으로 하나님은 반드시 구원으로 인도하신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고 은혜와 희생을 통해서 교회가 어떤 능력을 갖게 되는지 직접 목도하는 현장이 되었기에 나는 가난했지만 기쁨이 있던 시절 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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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입시를 위해 단신으로 부산을 떠나 서울의 학원에서 시작한 수험생활. 사직동에 얻은 하숙방은 얼마나 작던지 아침에 일어나면 문 밖으로 발이 나가 있곤 했다. 내 몸 하나 편히 뉠 곳 없었지만 개의치 않고 교회를 정하고 가장 먼저 새벽기도회부터 나갔던 곳이 내수동교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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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시생이 새벽 기도에 나온다고 칭찬해 주셨던 첫 만남 이후 신앙의 야성을 키워주고 진실된 목회자상을 심어주신 박희천 목사님. 하루에 성경본문만 4시간 이상 통독하시며 성경을 거의 다 외우는 말씀의 부자. 하루에 7시간씩 공부하시는 집중력으로 매사에 진중함을 갖고 사람을 키우는 데 전력을 다하셨던 분. 나는 그토록 귀한 교회와 목회자를 만난 것이 너무도 감사한 일이었지만 신학생이 아닌 나에게 대학부를 맡기셨던 것 역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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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맡게 된 대학부에서 고 옥한흠 목사님을 초청 강사로 처음 뵈었다. 이 만남을 계기로 옥한흠 목사님을 나를 이끌어준 신앙의 멘토로 섬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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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년 옥한흠 목사님이 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나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가서 수양회 강사로 목사님을 모셨다. 귀국하자마자 내수동교회 대학부 여름수양회에 오신 목사님은 46명의 청년 대학생들을 향해 집회 기간 내내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셨다. ‘생명과 교제 기쁨’이라는 제목 앞에 우리 모두는 눈물로 회개하고 은혜 받고 거꾸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대성통곡의 현장이었다. 그 집회는 놀라운 전환점이 되었다. 집회에 참석했던 46명 대부분이 헌신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지었던 죄를 다 고백하고 전도하러 나가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전도하러 나가는 성령의 역사도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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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의 꿈 복음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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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수양회를 마친 후 두 달여의 시간이 흐른 9월 25일. 당시만 해도 대학생들이 전국에 걸쳐 10만 명도 안 됐는데 46명의 형제자매들이 500명의 태신자를 전도집회에 데리고 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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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건은 내 마음속에 ‘캠퍼스 사역만을 위해서 살아야 되겠다’ ‘젊은이들을 위해서 내 일생을 바쳐야 되겠다’는 결심을 갖게 하였다. 이 결심을 옥 목사님께 말씀 드렸고 “목회자의 길을 가지 않고 한 생애를 캠퍼스 사역에 바친다는 것은 무리다. 현실감이 없다”는 대답 후 나는 기도 끝에 뒤늦은 신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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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6년 대학부 형제들과 예수원 대천덕 원장님과의 만남은 또 다른 큰 도전이 되었다. 그 외진 곳에서 박하기로 소문난 음식만 먹고 살면서도 조국과 굶주리고 소외된 사람들을 품고 기도하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나 역시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게 되고 성령 사역에 눈을 뜨고 난 후부터 영혼구원에 늘 절박한 심정이 들었고 복음전도에 관한 한 가슴이 뜨거워져서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82년 미국에 건너가기 전까지 8년여 동안 주일 새벽마다 병원전도에 매달린 것은 그 때의 열정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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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캠퍼스를 돌며 전도를 하고 ‘복음은 살아 있어 반드시 역사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복음전도에 미쳤던 지난 시간. 지나간 과거의 피해의식에도 눌리지 말고 알 수 없는 미래 때문에 불안해하지도 말고 다만 오늘 맞닥뜨린 삶의 환경을 극복하겠다는 정신으로 무장하게 해준 지난 현장은 복음의 꿈을 영글게 한 거룩한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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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속 역사는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이 나타날 수 있는 교회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역사의 중심은 교회라는 사실을 알게 해준 지난 시간. 마라토너의 긴 호흡과 거시적인 안목을 가지고 오늘 내게 닥친 어려움이 어떻게 선한 결과를 가져올지 하나님의 반전 역사를 기대하는 방법을 터득했던 지난 현장은 복음의 능력을 경험케 한 영적인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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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지난주 참으로 오랜만에 내수동교회 대학부에서 함께 지냈던 강남교회 송태근 목사, 부산부전교회 박성규 목사, 내수동교회 박지웅 목사와 내수동교회를 찾아 귀한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모두가 이제는 각자 사역지에서 한국교회를 섬기는 중견 목회자가 된 우리는 청년 시절 순수한 복음을 만났던 고향 같은 이곳에서 지난날의 사명을 힘차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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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땅끝까지 이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의 증인들이다. 오직 한번뿐인 인생 속히 지나가리라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일만이 영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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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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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 경북 의성 출생. 1970년대 대학 청년들의 영적 부흥을 주도했던 서울 내수동교회 대학부를 이끌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바이올라대학교와 탈봇 신학대학원(M.Div), 미시간 칼빈 신학대학원(Th.M), 포체프스트룸대학교 신학부(Ph.D), 하버드대학교에서 수학(Resident Fellow)했다. 미국 남가주 사랑의교회를 섬기다가 돌아와 현재 사랑의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저서로 ‘잠들지 않는 사역자’ ‘통찰과 예견’, ‘열정의 비전메이커’, ‘목회트렌드2000’, ‘믿음의 가문을 일으키라’, ‘새천년 사역의 패스파인더’, ‘사람을 세우는 설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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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