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 63년 고신 환원에 대한 평가
1963년 고신 환원 "과연 정당했나"
[ 기독신문 2006-03-27 오전 10:10:31, 조회수 : 145 ]
고신신대원 최덕성 교수 "이혼 전제한 결혼... 총회즉에 일차 책임" 주장
"내부서도 약한 명분 지적" "일방적 논리 일 뿐" 강한 반론 제기 잇따라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3월 18일 논문발표회에서
최덕성 고려신학대학교 교회사 교수(가운데)가
1963년 환원사건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연동측의 분립으로 대분열을 겪은 대한예수교장로회는 1960년 고신측과 승동측이 합동하면서 한국과 한국교회의 역사에 일치의 모범을 자랑스럽게 남길 수 있는 큰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잠시였다. 만 3년이 채 안되어 고신측은 이른바 "환원"을 부르짖으며 다시 갈라서고 말았다.
1963년 환원 논란의 핵심에 있었던 고려신학교의 신학대학원 교수 최덕성 박사가 고신 환원의 정당성을 강한 어조로 주장했다.
3월 18일 성결대학교에서 열린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회장:원종천) 제13차 논문 발표회에서 최 교수는 "고백하는 바가 같다는 동기로 앞뒤 살피지 않고 성사시킨 교회 합동은 "이혼을 전제로 한 결혼"으로 비유될 만큼 어설픈 것이었다. 동일한 신학과 교리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일치가 항상 성공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지 못했다"고 평가하며 1963년의 환원은 신앙과 신학으로도 극복하지 못한 이질적인 "삶의 세계(Lebenswelt)"를 좁히지 못한 결과로 빚어진 사건이었고 그 "일차적 책임은 합동 공약을 위반한 총회측에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 교회 내 친일 인사들과 세력들에 대한 공격적인 저술과 언설을 마다하지 않는 최 교수는 이날 발표회에서도 예의 신랄한 어조로, 환원은 "합동 직후 교권주의자들의 술수와 공약파기를 보면서" 과거 일재시대 우상숭배를 거부하여 당한 쓰라린 경험과 광복 후 과거사 청산 문제로 총회로부터 축출당한 경험을 떠올린 인사들이 취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풀이했다. "고신측계 교회들은 합동에서 가장 중요한 공약인 신학교 건에 대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합동서약의 조건이 자동적으로 해소" 된 것으로 보고서 원래의 위치로 돌아갔다"고 그는 말했다.
최 교수는 환원 과정에서 가장 큰 쟁점이 된 것은 "합동공약 가운데서 가장 중요했던" 고려신학교에 대한 "합동측의 공약 파기"였다고 주장하며 "신학교는 총회직영으로 일원화한다"는 합의 사항이 합동 이후 고려신학교를 폐쇄하려는 "신학교 단일화"로 변경되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날 최 교수는 총회가 고려신학교에 대한 합동공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환원의 표면적 원인에 더해, 합동한 "두 그룹 사이에 일제부터 고착된 "삶의 세계"를 좁히지 못한 것도" 환원 사건의 "큰 원인"이 되었다고 풀이했다.
최 교수가 환원 사건의 원인을 분석하며 제안한 환원 인사들과 총회측 사이의 "삶의 세계"의 차이는, 그러나, 이날 학회에 참석한 교회사 학자들에게서 강한 반론과 지적을 받을 정도로 일방적인 평가였다. 최 교수는 "두 그룹"의 생활세계를 "일제 시대 목숨을 걸고 불의에 대항하고 투쟁한 사람들의 신앙생리"와 "이족-이교 통치하에서도 "생존의 슬기"를 가지고 그 시대를 누벼온 사람들의 세계"로, 극명하게 대조적으로 묘사한 것.
이에 대해 강경림 교수(안양대)는 "한쪽은 오로지 "일사각오의 정신"이고 다른 한쪽은 오로지 "생존의 슬기"였다는 평가의 학문적 근거를 어떻게 제시할 것인지" 문제를 제기했다.
최재건 교수(연세대)는 "합동 후 1963년의 환원에는 합동측의 반론은 물론이고 고신측 내부에서도 명분이 약하다는 것이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당시 600여 고신측 교회의 4분의 1이 환원에 가세하지 않고 합동에 잔류했다는 사실과 합동 추진 당시 고신측 경기노회와 행정을 보류했던 김창인, 최훈, 이학인을 중심한 일파가 승동측과 합동 할 때에도 보류파로 남아 있다가 환원할 때 합동측에 가담한 사실, 군소선교부였지만 주한 미국정통장로교 선교부가 계속 고신측과 관계를 유지해 오다가 환원 후에는 양측과 모두 교류한 사실 등을 들어 "환원 명분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라고 최 교수에게 되물었다. 최 교수는 또한 고려신학교 건에 대한 양측의 이견에 대해서는 "합동측 입장에서 보면 당시의 상황으로는 한 교단 안에 두 신학교는 분열의 씨앗을 뿌리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므로 단일화하자는 것이었지 고신성을 말살이라는 것은 확대해석 한 것 아닌가"라고 덧붙여 논평했다.
최 교수 스스로 "합동과 환원 당시 고신측 교회에 고려신학교는 공동체의 정체성과 존재의의를 대변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고 표현했듯이, 합동하고 이어 환원할 당시 고신측 인사들의 "삶의 세계" 또는 정서에는 합동한 큰 공동체에 하나가 되겠다는 열의와 마음가짐보다는 큰 공동체 안의 작은 공동체로 계속 무리지어 있겠다는 의지가 더 컸던 것은 아닌지, 이 같은 반론도 또한 예상된다.
이날 주도홍 교수는 예장합동과 예장개혁의 합동이 성사된 지금 1960년의 합동과 1963년의 환원 사건은 우리에게 큰 역사적 교훈을 준다고 말해 여운을 남겼다.
■ 합동 - 환원 과정
1960년
10월 25일 = 합동추진위원회 "합동 결의 사항" 합의
12월 13일 = 고신측 제10차 총회 속회, 합동 결의. 이어 승동교회서 합동총회 개회,
합동 취지 및 선언문 채택.
12월 14일 = 고신측 한상동 목사 합동총회 총회장에 당선.
1961년
9월 21일 = 제46회 합동총회, 고려신학교 점차적 폐쇄 가결.
11월 = 경남(법통)노회, "합동원칙 파기상태" 선언.
1962년
10월 17일 = 한상동 목사, 고려신학교 복교 선언.
10월 31일 = 고려신학교 학우회, "복교선언" 지지 성명서 발표.
1963년
7월 29일 = 부산노회 고신측 출신 교약자들, 환원발기회 조직.
8월 8일 이후 = 부산-전라-경부-경기-경남-진주-경동노회 잇달아 환원.
9월 17일 =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제13회 환원총회 조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