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북한의 교회 정책, 북한 교회 현황
북한의 종교정책과 북한교회 상황
김동춘 박사
1. 북한 종교정책의 변화와 기독교
▲ 김동춘 박사
북경 Y CH담임
경북대 북한학 석사
중국 Y대학교 역사학 박사
선교한국 SFC분비위원장 역임
북한인 전도양육사역
통일선교신학교 설립준비팀장
북한 종교정책은 북한 정권이 들어선 이후 현재까지도 큰 틀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종교를 근본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북한 정권은 종교를 미신, 지배계급의 착취 수단, 인민의 아편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대외선전용으로 혹은 전술전략적인 면에서 시대별로 약간의 정책적 변화를 겪었다.
1) 1950, 60년대
1950년에 펴낸 "조선중앙연감"에 의하면, 해방 당시 북한에는 개신교도 약 20만명, 천주교도 약 5만 7천명, 합쳐서 약 25여만명의 기독교인이 있었다.(일반적으로 약30만 명으로 봄) 하지만 북한에 김일성정권이 들어선 이후와 6.25동란 와중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월남하여 기독교 인구는 급격하게 감소되었다.("북한문제이해", 통일교육원, 1999. 421쪽) 6.25이후에는 아예 교회건물을 헐어버리거나 용도를 바꾸었고, 기독교인들을 반혁명분자로 숙청하여 공개처형을 하거나 집단노동수용소에 투옥하여 기독교인은 지하로 들어가거나 배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
2) 1970, 80년대
1946년 조선기독교연맹 창립을 주도한 강양욱목사(김일성외숙)는 1972년 국가부주석이 되는데, 이것은 북한 종교의 대외선전용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다.
바로 이때 남북 7.4공동성명이 발표되었고, 헌법을 수정하여 신앙의 자유를 어느 정도 허용하였다. (헌법 54조, "공민은 신앙의 자유와 반종교 선전의 자유를 가진다") 그리고 이 해에 평양신학원을 개원하여 매 3년마다 10명씩 졸업을 시키고 있다.(1997년에 목사 수 30명, 전도사가 20명 정도 있었다.)
1980년대에 해외 관광객들이 많아지면서 그들을 위한 전시용 교회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83년 신약성서와 찬송가, 1984년 구약성서를 출간하였다. 1985년 평양에 한국의 고향방문단이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예배나 미사를 보게 하고, 이윽고 1988년 봉수교회를 설립하고, 89년에는 장충성당을 세웠다. 1989년에는 김일성종합대학에 종교학과를 개설하여 신학도 강의되고 있다.
3) 1990년대
북한은 1992년에 김일성의 지시로 칠골교회를 세웠다. 칠골교회는 소년 김일성이 어머니 강반석 집사와 함께 다니던 옛 칠골교회를 기념하여 복원 신축한 교회로 반석교회로 불려지기도 한다. 이것은 김일성의 기독교 정책에 대한 변화가 컸음을 보여준다. 바로 이 해에 북한은 사회주의 헌법을 개정하여 "반종교 선전의 자유"를 삭제하고, 제68조에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이 권리는 종교건물을 짓거나 종교의식 같은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보장된다"라는 조항을 신설하였다. 이 조항은 1980년대 이후 잦아진 해외 종교인들의 접촉, 방문, 물자 지원, 교류 협력을 유도하기 위한 정책적 변화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내부적인 기독교의 개방은 아니었다.
김일성사망(1994년) 이후 북한에 지하교회가 성장하게 된다. 고난의 행군 시기 대량 아사자가 생김으로 주민 통제가 느슨해 진 틈을 타 많은 북한 사람이 중국으로 탈출하게 되고, 기독교를 접하게 되어 북한 지하교회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4) 2000년대
북한에 식량난이 해결되지 않고 고난의 행군이 계속되면서 탈북자들은 여전히 늘어나고 기독교 접촉자들도 더욱 늘어나 북한의 지하교인 수는 더욱 많아졌다. 이런 탈북자들은 중국에 불법 체류하거나 제3국이나 한국으로 가기도 하지만, 탈북자들은 북한으로 다시 입국하여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탈북자들을 통하여 기독교가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한 북한 정권은, 이들을 별도로 분류하여 강제노동수용소에 보내거나, 기독교를 전파하다가 발각된 자를 총살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2. 북한교회 현황
북한교회와 북한 기독교인은 크게 3가지 양태가 존재한다. 첫째는 해방 이전부터 믿어오던 그루터기 기독교가정 교회이고, 둘째는 평양 봉수교회나 칠골교회 등의 제도권 교회의 교인이고, 셋째는 중국 등에서 복음을 받았거나 그들로부터 신앙을 전수받은 지하교회 교인이다.
첫번째 그루터기 교인; 한때 북한에는 "지구상에서 종교가 없는 유일한 나라"로 기독교인은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탈북자들에 의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러한 신자 수가 많지는 않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믿음을 전수받은 기독교 가정이 있었다. 이들 믿음의 1세대는 70세 이상이 되어 생존자들이 점점 사라져 가지만, 그들의 자녀, 혹은 손자 손녀에게 남몰래 신앙을 전수하여 희미하나마 핍박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 온 것이다. 2대, 3대 신자들의 수는 극히 드물다. 더구나 이들 그루터기 신앙인들이 북한 정보 당국에 적발되는 경우 강제수용소나 변방에 강제 이주를 당하여 점점 신앙생활 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은진이의 경우, *배씨 부부의 경우 등) 하지만 감사한 것은 변방에 거주하면서 고난의 행군 기간 식량난을 오히려 이겨낸 경우가 많았다.
둘째, 관변교회인 봉수교회나 칠골교회의 교인이다. 이 교회의 교인들은 기독교훈련을 받은 동원된 교인이다. 상설적으로 예배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방문자들이 있을 때 동원된 교인인 것이다. 이들 중에서 진짜 교인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수는 미미할 것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평이다.
셋째, 중국 등에서 복음을 받았거나 그들로부터 신앙을 전수받은 지하교회 교인이다. 많은 탈북자들이 중국의 교회나 기독교인을 통해 복음을 받았다. 이들 중 많은 수가 북한에 들어가 지하교인이 되었고, 혹은 중국에 정착해 살고 있거나 제3국이나 한국에 정착하여 있다. 이들 기독교인 수는 약 10 만 명 정도로 본다. 북한 내의 지하 교인은 2-3명 정도가 함께 예배를 드리거나 거의 혼자서 신앙을 유지하는 정도이다.
3. 결어 : 북한교회 재건을 위한 제안
1) 국내 탈북자들에 대한 입양 및 공동체, 교회 재건 준비
2) 중국 및 제3국에 있는 탈북자들을 위한 복음 전도
3) 다양한 간접 전도 (국내에서, 중국에서)
4) 북한 교회 개척자 훈련 및 파송 준비
2013년 03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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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형룡은 초기 고신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 전국미래교회포럼에서 양낙흥 교수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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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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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29일부터 5월 1일까지 미래교회포럼(대표 박은조 목사)이 주최한 ‘고신교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의 대전 총회선교센터의 포럼에서 고려신학대학원 양낙흥 교수가 “고신 초기와 박형룡”이라는 제하의 발표를 했다. 여기서는 고려신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박형룡 박사가 부임하는 과정, 고신을 떠나는 과정, 떠난 뒤의 고신의 처지에 대해 나누어 요약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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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체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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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형룡의 고려신학교 교장 부임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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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형룡은 1920년 숭실대학, 1923년에 중국 남경의 금릉대학을 졸업한 후 도미,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3년간 수학하여 신학 석사를 취득하고, 1927년 9월부터 켄트키 루이빌의 남침례교 신학교에서 박사과정을 9개월 하고 28년에 귀국, 산정현 교회에서 잠시 목회를 하다가 1930년 부터는 평양신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교수직을 하면서 논문을 완성, 루이빌 신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38년까지 평양신학교 교수로 봉직했다. 38년 학교가 폐교되자 만주로 건너가 봉천신학교를 설립했다. 당시 봉천신학교는 신사참배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박형룡, 박윤선 두 사람에 대해서만은 대리인을 보냈고 당국도 이를 묵인하는 “묵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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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후 봉천에 계속 머물고 있는 그를 1947년 고려신학교에서 송상석 목사를 파송하여 9월 23일 경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그는 구 평양신학교 복교를 제안 받고 고민하면서 일주일을 머물고 있었다. 송상석은 부랴부랴 부산에 내려가 상황을 보고했고 한상동은 9월 30일에 상경해 박형룡을 만났다. 박형룡은 자신이 들은 “고려신학교가 교회분열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염려를 전했고 한상동은 고려신학교의 설립은 ”한국교회의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니 거취를 결정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한상동이 말한 혁명은 신사참배자들에 대한 권징, 자유주의자들의 척결이었다. 박형룡은 신의를 지키기 위해 10월 2일 부산으로 내려가 교장에 취임한다. 그러나 박형룡도 한상동에게서 전국 장로교 배경의 총회신학교가 되게 한다는 전제조건을 동의를 받았다. 그것은 신학교를 서울로 이전한다는 복안이었고 그렇지 않을 경우는 서울에서 따로 신학교를 설립할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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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신 초기의 박형룡에 대해 발표하는 양낙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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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신을 떠나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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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형룡의 고려신학교 교장 부임으로 인하여 고신의 위상은 달라졌다. 함께 교수로 취임한 한부선과 함께 120여명의 학생들이 평양신학교 전통을 잇는 학교로 활기를 띄었다. 47년 12월의 제49회 경남정기노회에서는 신사참배자들의 자숙결의안에 불복한 목사들로부터 “사과서”를 받았고, 고려신학교를 인준하고 원조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46년 12월에 고신 인준을 취소했던 진주에서의 48회 결정을 뒤집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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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48년이 되면서 박형룡과 한상동 사이에 마찰이 일었다. 그것은 4대 장로교(미남장로교, 북장로교, 호주, 캐나다) 주한 선교부와 협력한다는 박형룡의 구상에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한부선을 비롯한 메첸파 선교사들의 영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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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한부선과 메이첸 선교사들은 왜 미남북장로교 선교사들과 협력하기를 꺼려했을까? 한부선은 1924년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가을 프린스턴 신학교에 입학한다. 이때 이미 신학적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양분된 프린스턴 교수들 사이에서 한부선은 메이첸 편에 섰다. 28년 한부선은 4년만에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4월 미 북장로교 뉴 브룬즈윅 노회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는다. 28년 9월 한국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왔고 35년 한부선은 첫 안식년을 맞아 규정에 따라 신학연구를 해야 했는데 그는 프린스턴으로 가지 않고 메이첸이 설립한 웨스트민스트 신학교에 갔다. 거기서 그는 유학온 박윤선을 만났고 지분을 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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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년 미 장로교 총회는 메이첸을 비롯한 독립선교부 관계자들 모두에게 정직 처분을 내렸고 메이첸은 새로운 교단을 설립하게 되며 한부선은 이에 합류하여 창립맴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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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메이첸의 독립선교부 선교사로 파송받아 만주 하얼빈으로 간다. 38년 조선예수교 장로회 제27차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할 때 한부선은 회의장에서 강력한 반대를 외치다가 일경에게 끌려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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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9월 서울로 들어온 한부선은 존 베촐트의 소개로 한상동을 만난다. 한상동의 권유로 고려신학교 교수로 재직한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한부선과 메첸파 선교사들은 고려신학교가 주한 4대 선교부 및 기존 장로교 총회와 제휴하는 것에 필사적으로 반대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것은 본국에서는 동거할 수 없다고 선언했던 자들과 피선교지에서 동거해야 하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었다. 한상동이 한부선과 메첸파 선교사들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날 박형룡은 고려신학교에 남아있을 의욕을 상실했음은 자명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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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상동은 메첸파 선교사들과는 여러 가지로 통했다. 신사참배문제로 박해 받은 일, 신학적으로 극히 보수적인 공통점,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발, 그리고 다수파에 의해 따돌림 당하는 “소수파”라는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한상동은 박형룡 보다는 한부선에 대해 훨씬 더 강한 유대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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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이 무렵 서울에서는 장로회 신학교의 재건에 관심을 갖고 있던 이인식 등의 월남한 원로목사들이 고신측의 태도변화에 관한 소식을 듣고 분개했다. 이들은 고신이 총회 배경의 전국적 신학교로 변신을 시도할 때 자신들과 협력하게 될 것을 기대하다가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박형룡에게 고신을 떠나 서울에서 조선신학교에 대항할 보수적이고 전국적인 신학교를 설립하자고 설득했다. 결국 박형룡은 고신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고 교장으로 취임한지 6개월 만에 사임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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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형룡이 떠난 뒤의 고신의 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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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개월 밖에 있지 않았던 그가 고신에 무슨 영향을 미쳤을까 하겠지만 그의 떠남은 큰 파장을 몰고 왔다.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신학자조차 수용하지 못하는 구제불능의 독선적 소수” “몇몇 개인의 야심에서 출발한 분파”라는 의심이 야기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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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박형룡의 고신 이탈은 고려신학교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노회와 총회의 교권주의자들에게 고신을 매도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제공했다. 1947년 12월에는 고신인준을 결의했던 경남노회가 박형룡이 떠나자마자 김길창을 선두로 고려신학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48년 4월 말 개최된 장로회 총회는 공식적으로 고려신학교를 부정했다. “고려신학교는 총회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학교이므로 고신에 추천서를 주지 말라”는 결의가 총회에서 이루어졌다. 동년 9월에 열린 경남임시노회에서 다시 고신인준을 취소하였고, 12월의 경남 제50회 정기노회도 고신취소를 재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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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한상동과 박형룡 사이에 어떤 견해차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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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학교와 총회의 관계에 대한 견해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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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형룡은 고려신학교를 가능한 빨리 총회 인준 신학교로 만들고 싶었다. 전국 장로교회를 장악하는 신학교로 만들어 자신의 보수신학으로 정복하고자 하는 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상동은 고신이 총회에 들어가면 한국 신학계의 대세를 장악할 자신이 없었다. 교권의 간섭하에 정체성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한 생각은 한부선과 박윤선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선례를 소개 받은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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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신학교의 위치에 관한 견해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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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형룡은 신학교를 서울로 옮기자고 주장했지만 한상동은 그대로 두자고 했다. 중앙으로 진출해야 전국을 망라하는 학교가 될 수 있다고 하는 박형룡의 주장에 평양신학교도 서울에 있지 않았으나 전국 장로교회에 영향을 끼치는 신학교가 될 수 있었다고 한상동은 서울 이전을 반대했다. 한상동의 생각에는 서울로 옮겨 총회직영 신학교가 되면 자유주의자들의 영향을 받게 될 것이고, 특히 신사참배의 죄에 대해 자숙하지 않은 목사들과 공조하는 것은 심히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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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외부 선교부와의 협력에 대한 견해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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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상동은 미 정통 장로회 선교부와만 관계를 갖고 싶어 하는 반면 박형룡은 보다 포괄적이었다. 평양 숭실전문학교나 중국의 남경 대학은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부가 연합하여 설립한 학교인데 그는 이 학교를 졸업했다. 평양신학교 교수 시절인 1930년 대부터 미 남북장로교를 비롯한 4대 선교부 출신 선교사들과 동역한 경험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과도 협력관계를 갖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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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권징에 대한 견해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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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상동은 신사참배한 교회 지도자들이 “자숙안”의 이행에 의해 권징을 받아야만 교회의 재건에 동참할 자격을 회복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박형룡은 한국 장로교회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없는 신사참배에 대한 권징문제에 발목이 잡혀 보수신학교육과 복음전도에 결집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러한 견해 차이는 신학생들 간에도 그대로 반영되었고 박형룡이 고신을 떠날 때 상당한 수의 학생들도 이탈했다.(논문은 도착하는대로 포럼발표논문에 게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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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05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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